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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듯한 이 느낌은 기분 탓일까.
“뭐야, 진짜!”
선율은 휴대폰을 확 뒤집어 버렸다. 사무실에 첩자라도 심어 놓은 건 아닐까 싶어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내 생각 하고 있죠?>
그 재수 없는 말이 정곡을 찔러 가슴이 뜨끔하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하지.
선율은 책상 위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었다.
유신이 광고주로 나타난 이상 앞으로 편하게 일하긴 틀렸다. 물론 광고주와 매일같이 얼굴 보며 일하는 건 아니라지만 포트폴리오, 기획안, 제작 과정 등 많은 부분을 그에게 보고하게 될 것이다.
두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껄끄러운데 앞으로 내내 얼굴을 봐야 한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선율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디까지나 일이야, 일!’
과거의 일에 지나치게 매이는 건 아직까지 그를 잊지 못했다는 방증밖에 되지 않는다. 선율은 그럴 마음도 없을뿐더러 그런 모습으로 비치고 싶지도 않았다. 조유신에게 휘둘린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지잉―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선율은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이번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잉, 지잉, 지잉.
“왜.”
누군지 뻔해서 선율은 흔한 인사조차 생략하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요.
“내가 왜.”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갈 거니까.
예나 지금이나 그는 선율을 조련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한다면 하는 놈이니 선율이 움직이지 않으면 진짜로 사무실로 밀고 들어올 거다.
“후……. 어딘데?”
―사무실 옥상.
“너 거기서 딱 기다려.”
선율은 미간을 구기며 일어났다.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5분 전인데 벌써부터 꼭두각시가 된 것 같다.
‘기분 더러워.’
선율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꼭대기 층에서 내렸다. 꼭대기 층에서 옥상까지는 따로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두 층 정도를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오르며 선율은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조유신 이 망할 놈의 인간! 싹수 노란 자식! 어딜 하늘 같은 선배한테 오라 가라야? 갑자기 사라질 땐 언제고 왜 다시 나타난 거냐고,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꺾인계단을 돌아 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시커먼 인영에 선율의 가슴이 쿵 떨어져 내렸다.
‘어우, 깜짝이야!’
새카만 어둠을 등진 그는 깍지 낀 팔을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자세로 계단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무릎을 구부린 상태였는데도 발이 네 계단이나 아래로 내려가 있다.
“조유신?”
옥상에서 보자더니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는 선율을 바라보며 그가 씩 웃었다.
“눈에 안 보일 때도 내 생각만 하나 봐.”
허스키한 중저음이 계단에 낮게 깔렸다.
“미치게 설레는데.”
그가 일어난 순간 자동 센서 등이 탁 켜졌다.
계단을 훤히 밝힌 조명에 우뚝 선 유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딱 벌어진 어깨에 남자다운 목선. 오뚝한 콧대에 그림자가 진 뺨이 잘 깎은 사과처럼 반들거렸다.
8년 전 미소년 같았던 그는 훨씬 강인해진 모습으로 선율의 눈앞에 있었다.
짙은 수컷의 향기를 풍기면서.
정수리 위에서 불이 켜진 탓에 붉어진 얼굴을 가릴 수도 없었다. 유신이 한 걸음 내려온 순간 선율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딱 거기 서! 거기 서서 얘기해.”
유신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그려졌다. 느릿하게 팔짱을 낀 채 그가 차가운 벽에 살짝 어깨를 기대었다.
“그러죠.”
강렬한 시선이 선율의 입술을 끈적하게 훑었다.
“내려다보는 거 좋아하니까.”
순간 선율은 침대에서 보았던 그의 시선을 떠올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선배가 그렇게 올려다보면…… 너무 섹시해서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이불 안을 뜨겁게 데우던 그의 체온과, 깊숙이 찔러 오던 그의 손길. 무엇 하나 잊히지 않은 과거의 잔상에 선율은 숨을 헐떡였다.
미치게 좋았었던 그때.
서로가 전부인 것처럼 매달렸던 그때의 우리.
“왜 부른 거야?”
그러나 이 자리에 그때의 그녀는 더 이상 없다.
“사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대화 할 만큼 각별한 사이 아니잖아.”
“선배가 그러고 싶을 것 같아서.”
“내가 왜?”
“궁금하지 않아요? 8년 전에 대학도 때려치우고 사라진 내가 어떻게 베링거 모터스 이사가 되어 나타났는지.”
선율이 움찔했다. 솔직히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지난 8년간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가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게 된 건지 할 수만 있다면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듣고 싶었다.
“어, 궁금해.”
그러나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선배를 되찾으러 왔다는 그 말이 진짜일 것 같아서.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8년간 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었을 텐데 그 긴 시간 동안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건지.
내가 너를 잊으려 발버둥 치던 숱한 시간 동안 너는 내게 오려고 노력했던 걸까.
하면 무엇이 네 걸음을 막았을까, 두려워서.
선율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도 졸업 못 한 애가 그 유명한 베링거의 이사가 되어 나타났다니 궁금하지 않을 도리 있어? 미치게 궁금해. 돈인지, 백인지, 아님 운 좋게 얻어걸린 건지. 그런데 안 물을 거야.”
“왜?”
“너한테 관심 끄기로 작정했으니까.”
유신은 낮게 웃었다.
“그렇게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선율은 건조한 시선으로 센서 등을 올려다보았다. 움직임이 멎자 저절로 꺼져 버린 센서 등 때문에 사방이 어둑한 상태였다.
“헛소리하지 마. 어두운데 그런 게 보이니?”
“잘 보여. 아주 반짝반짝한데.”
짙은 어둠 속에서 빙긋이 웃는 입매가 보였다.
“내 눈에 한선율은 그래.”
어리석게도, 가슴이 뛰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순간부터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멀리 있으니 듣지는 못했겠지? 고작 이런 걸로 안도하는 나 자신이 싫다.
“한결같이 건방지네.”
선율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숨긴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할 말 다 끝나셨으면 가 보겠습니다, 조유신 이사님.”
“선배.”
분명히 선을 긋고 돌아서는 선율의 귓가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김기철이랑 결혼하지 마.”
무거운 침묵이 계단에 내리깔렸다. 선율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같이 일하기로 했으면 선은 지켜 주시죠. 이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상상 이상으로 나쁜 새끼야. 선배에게 상처만 줄 거라고.”
“상처라.”
선율이 돌아보았다.
“김기철이 아무리 나쁜 새끼여도 너만 하겠니?”
순간 다시 센서 등이 켜졌다.
밝아진 계단 위에서 유신은 저를 바라보는 선율의 눈동자를 보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붙잡으면 손이 타 버릴 것 같고, 껴안으면 심장이 얼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잡고 싶다.
미치게 잡고 싶어, 선배.
“두 번 다시 주제넘는 소리 하지 마.”
원망 서린 눈으로 잠시 유신을 노려본 선율이 싸늘하게 사라졌다.
“하아.”
혼자 남은 유신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방탄조끼라도 입어야 하나.
그녀의 독설을 들을 때마다 텅 비어 버린 줄 알았던 곳에서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 * *
유신은 선율을 생각하면 늘 여름이 떠올랐다.
입학 후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 기말고사가 끝난 교정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지방이 고향인 친구들은 모두 본가로 내려갔고 어떤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다. 개중 몇몇은 과제가 없는 방학을 틈타 질펀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조별 과제가 끝난 뒤풀이로 참석한 술자리.
평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술자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 유신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광을 내고 술자리에 참석했다. 아르바이트가 일찍 끝난 선율이 자리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반드시 고백하고 만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은 지는 꽤 됐다.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하는 선율이 워낙 바빠 얼굴 볼 시간이 없었을 뿐.
또한 굳이 오늘로 날을 정한 건 그날이 바로 방학식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야, 고백하려거든 무조건 방학 전날에 해. 학기 중에 고백했다가 거절당하잖아? 그럼 완전 그 학기 말아먹는 거라고. 방학 전날에 고백했다 까이면 그나마 낫지. 두어 달 지나고 보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볼 수 있으니까.]
선배 중 한 명이 후배들을 모아 놓고 조언이랍시고 해 준 말이었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유신에겐 솔깃한 조언이었다. 선배들이 해 준 쓰잘머리 없는 말 중에 그나마 제일 유익했던 조언이기도 했다.
유신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조유신? 네가 웬일이냐? 이런 자리에도 다 오고?”
동기며 선배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어. 자식, 한 학기나 지났는데도 깍듯하네.”
유신은 바로 옆자리에 커다란 백팩을 얹어 두었다. 선율이 오면 무심한 척 치워 주려고 일부러 준비한 아이템인데, 하늘이 무심하게도 성환이 빈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나 여기에 좀 앉을게. 가방 치워도 되지?”
옆자리 하나 비워 두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유신은 쓰린 속내를 감추며 웃었다.
“네, 선배님.”
그날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술을 몇 병을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신이 기억하는 건 1층 출구로 이어지던 계단이 서른여섯 개라는 것과, 출입문에 그려진 장미꽃이 백서른네 개라는 것이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선율이 아닐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문에만 꽂혀 있었다.
‘꽤 늦네.’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선율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누군가 따라 준 소맥을 한 번에 목구멍에 때려 박은 유신이 커다란 백팩을 어깨에 걸고 술집을 나섰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유신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슬렁슬렁 교정을 가로질렀다. 집은 학교와 반대 방향인데 왜 발걸음이 교정으로 향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막차는 놓쳤고, 알코올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고, 그냥 술을 깨고 싶었던 것 같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천천히 걷던 유신의 눈에 나뭇등걸 벤치에 앉아 있는 선율의 모습이 보인 건 그때였다.
‘어?’
무릎까지 오는 상아색 원피스를 입고 위엔 얇디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술병을 기울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게 그녀는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놓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술을 야금야금 퍼먹고 있었다.
“선배.”
오후내 내리쬐던 태양열이 식지 않은 자리에 유신이 털썩 걸터앉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이 내는 철퍼덕 소리에 선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신이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냥. 산책하다가.”
유신은 주머니 속의 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 왜 안 왔어요?”
“으응, 아르바이트 끝나는 날이라고 사장님이 갑자기 송별회 해 주신대서.”
“이쪽이 선약이었을 텐데.”
“내가 주인공인 자리라 빠질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오늘이 끝나기 전에 만난 그녀가 몹시도 반가웠다. 멀리서 선율을 본 순간부터 쿵쿵 뛰던 가슴은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 더욱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