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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었다.
그는 몸에 착 감기는 다크그레이 슈트를 차려입고 코듀로이 오버사이즈 코트를 살짝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손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렇게 온몸을 꽁꽁 싸맸는데도 둔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날렵한 흑표범처럼 보였다.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스토커야?”
선율은 그에게 성큼 다가서며 인상을 썼다.
유신을 맞닥뜨린 순간 이곳이 회사인 것도 잊었다. 그렇게 그리워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죽어라 피하고 싶은 지금은 잘만 나타난다.
그것도 가장 만나기 싫은 장소에서, 예고도 없이.
“싸가지 없는 놈인 줄은 알았는데 완전 미친놈이었구나? 지난번엔 동문회에서 나타나더니 오늘은 회사야? 나 여기 다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되찾으러 왔어요.
선배, 돌려받으러 왔다고.
그는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다. 한다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그의 성격을 떠올리면 회사쯤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다.
만날 걸 예상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바라보는 눈매를 보니 오늘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양 팀장의 존재도 잊은 채 선율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일단 따라 나와.”
“지금은 곤란합니다.”
“네가 곤란해 봤자 나보다 더해? 잔말 말고 나와! 여기까지 온 거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회사까지 찾아와 놓고 되지도 않는 헛소리 지껄이면 진짜 가만 안 있을 줄 알아.”
“선배.”
“그리고 말이야. 나 찾아온 거면 대표실 앞에 왜 있는 건데? 진짜 미친 거야?”
“그러니까.”
입에 칼을 문 듯 독설을 쏟아 내는 선율 앞에서 유신은 끄떡없었다.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길게 늘인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선율을 내려다보았다.
“선배 만나러 왔으면 내가 왜 대표실 앞에 있을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얼굴에다 찬물을 휙 끼얹은 것 같았다. 선율의 이성이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
그제야 유신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누가 봐도 비즈니스를 하러 온 듯한 슈트 차림, 수행 비서로 보이는 옆의 남자.
‘뭐야, 이 상황? 그러니까 지금…….’
그때 거짓말처럼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라면 비서가 마중 나와 손님을 안내했을 텐데 이번엔 대표가 직접 버선발로 나왔다.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나온 그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유신 이사님. 제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했네요, 허허.”
……조유신 이사님?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도착해서.”
자연스러운 유신의 대답에 선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서 들어오시죠. 따뜻한 차 한잔하면서 얘기 나눕시다.”
굽실거리는 대표를 보니 빠르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아니, 진즉에 상황 파악은 끝났는데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 온다는 베링거 모터스의 이사가 조유신이란 거지, 지금?’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영문 모르는 대표가 지시했다.
“마침 잘 왔네. 양 팀장, 한 팀장! 두 사람은 대기하고 있어요. 미팅 끝나면 부를 테니까. 오케이?”
양 팀장과 함께 복도에 남겨진 선율은 멍하니 그들이 들어간 문만 쳐다보았다.
세계 최고의 슈퍼 카, 베링거 모터스의 이사 조유신.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대체 어떻게…….’
그녀가 알기로 유신은 평범한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긴 했으나 교직 생활에 오래 몸담은 어머니가 있어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있다는 게 특별하다면 조금 특별한 점이랄까.
그 외엔 모든 것이 대한민국 평균치에 매우 근접한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능력까지 평범하지는 않았다. 과외 한 번 없이 독학으로 연성대학교 미대에 입학했고, 신입생일 때 이미 세계적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으니까.
산업 디자인을 전공으로 하던 그가 자동차 디자인에 유독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불과 몇 년 만에 베링거 모터스의 이사가 되어 나타난다?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스펙을 쌓았다고 해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혹시 말로만 듣던 재벌가 사생아라도 되나? 알고 보니 베링거 모터스 회장의 아들이었다던가…….’
그런 기연이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오만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던 선율은 그런 생각을 해 버린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내가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하겠냐고!’
연거푸 한숨을 쉬어 대는 그녀에게 양 팀장이 눈치 없이 물었다.
“히야, 인물 쥑이네. 베링거 이사라고 하기에 오십 줄은 된 아저씨가 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너무 젊은걸?”
하긴, 선율만 해도 그렇게 짐작했었다.
“그러게요.”
그녀는 성의 없이 짧게 대꾸했다.
“그런데 아까 보니 두 사람, 아는 사이 같던데?”
경쟁자에게 어떠한 빌미도 주고 싶지 않은 선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대학 동문이에요.”
“친한 사이?”
“그래 보이던가요?”
눈이 있으면 봤을 텐데. 못 잡아먹어 안달인 모습을.
“자세히는 못 봤지만 말이야. 분위기 살벌한 거 보니 좋은 사이는 아닌 거 같긴 하더라. 왜, 대학 다닐 때 싸우기라도 했어? 액면가 보니 조 이사가 한 팀장보다 어린 거 같던데. 선배 갑질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전 남친이라도 돼?”
선율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말씀 가려서 해 주세요, 양 팀장님.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은 실례인 거 모르세요?”
“에이, 뭘 또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아무렴 급이 다른데, 급이!”
……대표실 앞에서 멱살잡이 한번 해?
냉기가 펄펄 날리는 그녀를 보고 양 팀장이 유들유들하게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한 팀장도 짐작하고 있지? 대표님이 우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이유.”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이 자리 못 올라왔죠. 양 팀장님과 저,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이번 프로젝트 맡길 심산이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그런데 진짜 조유신 이사랑 별일 없었던 거 맞아? 두 사람 사이가 별로면 나는 땡큐인데 말이야.”
이 양반이 진짜.
선율은 히죽 웃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차가워 얼음 마녀라 불리는 선율이 노려보자 양 팀장이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뭘 또 그렇게 째려봐.”
“그냥요. 공감이 가서요. 양 팀장님이라면 그런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숨겨 둔 뜻은 없어요.”
그러니까 액면가 그대로 믿으시라고요.
선율은 붉으락푸르락한 양 팀장을 상대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뒤늦게 선율의 말뜻을 캐치한 양 팀장의 귓불이 벌게졌다.
“한 팀장, 지금 나 능력 없다고 디스한 거지? 프로젝트 따내려면 운발에 기대야 한다는 거야 뭐야? 이봐, 한 팀장! 야, 한선율!”
떽떽거리는 양 팀장의 고함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울렸다.
* * *
비서의 안내로 대표실에 들어갔을 때 유신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이 방의 주인이 그라고 오해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선율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착석했다.
“자자, 두 사람,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는 들었지? 급작스럽게 결정된 내용이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베링거 모터스의 광고를 담당하게 되었어. 인사부터 하지. 이쪽은 베링거 모터스 조유신 이사, 그리고 이쪽은 기획1팀 양아준 팀장, 이쪽은 기획2팀 한선율 팀장.”
“반갑습니다, 조유신입니다.”
대표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유신이 선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깨를 비집고 손을 내밀었던 양 팀장이 멋쩍게 그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한선율 팀장이 지난 시즌 론칭한 밥솥 광고,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밥이 아닌 사랑을 짓는다, 그 카피 아주 좋았어요. 제가 바이디오에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죠.”
선율은 악수를 청하는 커다란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초면인 척하겠다 이거지? 누군 못할 줄 알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유신 이사님. 제게 맡겨 주신다면 베링거 모터스는 슈퍼 카 그 이상의 가치를 보유하게 되실 겁니다.”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내미는 선율의 모습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위기감을 느낀 양 팀장이 얼른 끼어들었다.
“저는 1팀의 양아준 팀장이라고 합니다. 너무 훤칠하셔서 광고 모델이 온 줄 알았더니 이사님이셨군요, 하하!”
곧이어 두 사람 사이에 간단한 대화가 오갔으나 선율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광고를 따내야겠다는 열망뿐이었다.
* * *
[1팀과 2팀 간 경쟁 PT를 통해 최종적으로 광고를 제작해 줄 분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베링거 모터스의 광고를 따내실지 기대가 되는군요.]
갑질에 최적화된 얼굴로 유신이 선언했다.
혹시나 하는 행운을 바랐던 양 팀장은 급 실망한 기색이었고, 대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터라 선율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지인 찬스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럴 사이도 아니었고.
[우선 광고 의뢰서는 총책임자인 방성범 CD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2주 뒤에 뵙죠.]
선율은 3B 펜슬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일로 유신을 만나게 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동문회에서의 만남을 해프닝이라고 친다면 회사에서의 만남은 다분히 목적성 짙은 이벤트였다.
[선배, 돌려받으러 왔다고.]
그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 머리 아파.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갑자기 나타나 왜 헛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려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율은 진통제 한 알을 까서 꿀꺽 삼키며 다짐했다.
‘그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잖아. 광고만 따내면 그만이니까.’
이제 다시는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 앞에서 당황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을 거다.
이미 지나간 사람.
내겐 그저 광고주일 뿐이니까.
지잉―
그때 책상에 얹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선율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보았다.
<지금 내 생각 하고 있죠?>
모르는 번호였다. 잘못 온 건가 싶어 삭제하려는 순간 싸한 느낌이 뒷골을 울렸다.
……메시지에서 조유신의 건방짐이 느껴지잖아!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선율은 누구냐고 묻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잠시 후 답이 도착했다.
<명함.>
곧이어 하나 더.
<연락하라고 준 거 아니었나?>
휴대폰 너머에서 낮게 웃는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