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4)화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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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혼 생각 없는 거 알잖아. 미안하지만 네 프러포즈, 안 받은 걸로 할게.”

“결혼 생각이 없는 거야, 나랑 할 생각이 없는 거야?”

“…….”

“상식적으로 그래. 너랑 나, 결혼 적령기 남녀야. 서른 넘은 나이에 사귀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는 게 말이 돼?”

“기철아.”

“처음부터 결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잖아. 그렇지?”

기철이 대답을 촉구하듯 강한 눈빛으로 선율을 응시했다.

선율은 얼렁뚱땅 피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결혼 하고 싶지 않아. 당신 어머니, 나 엄청 싫어하시는 거 알잖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걱정하시는 거야. 내가 자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엄마 없이 자라서 그 모양이냐, 동생이 어려서 대학 공부 시키려면 돈 많이 들겠다, 내 아들 등골 빼서 공부 가르치는 건 아니지? 본데없이 자라 큰일이다. 처가가 든든해야 우리 아들 고생 안 할 텐데.”

선율의 입에서 쏟아진 말이 가시처럼 기철에게 박혔다.

“당신 어머니께 그런 소리 듣는 동안 내 자존심은 수도 없이 무너졌어.”

기철은 암담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간 선율이 꾹꾹 인내해 왔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율은 인내한 게 아니라 포기한 거였다.

그의 어머니를, 또한 그를.

기철은 절박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선율아,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우리 엄마, 남편 사랑 못 받고 살아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자기가 조금만 이해해 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나 기철이 매달릴수록 선율의 마음은 차게 식었다.

“또 나한테 이해를 구하고 있네. 여지없이.”

그와 사귀는 동안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그거였다. 자기가 조금만 이해해 줘, 육십 넘은 우리 엄마가 바뀔 수는 없잖아.

“김기철, 너 그거 알아?”

선율은 덤덤한 눈으로 기철을 바라보았다.

“당신 엄마 나쁜 사람 맞아.”

“선율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나는 그보다 더 심한 말 숱하게 들었는데. 왜, 나는 그러면 안 돼?”

그동안 계순은 틈만 나면 선율을 찾아와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 주겠다느니, 코딱지만 한 회사에서 밥벌이라도 하고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라느니, 참 뻔하고 재미없는 말들을 수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선율이 참은 건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 준 기철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유신이 홀연히 증발해 버린 그때, 더러운 소문으로 칠갑을 한 선율과 밥을 먹어 준 건 기철이 유일했으니까.

“당신 엄마가 그러던데. 내 아들 꿰차서 결혼하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라고.”

“그냥 하는 소리야. 아들 둔 엄마들이 대개 그렇잖아.”

“진심이면?”

“응?”

“나랑 결혼해서 정말로 네 엄마가 죽어 버리면 어쩔 건데.”

선율은 우물쭈물하는 기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덤비지 마. 가벼워 보이니까.”

때마침 출근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선율은 손목을 감은 기철의 손을 떼어 내고 돌아섰다.

“먼저 올라갈게.”

* * *

베링거 모터스 한국 지사.

유신은 이사실에 앉아 오늘 검토할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4개월.

업무 적응이 끝나고 나니 처리해야 할 서류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오전 내내 업무에 집중하던 그가 펜을 내려놓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두 시간 남았군.”

선배 얼굴 볼 시간까지.

선율을 떠올린 그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번졌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뻐근해진 어깨를 돌린 그가 비서실 호출 버튼을 꾹 눌렀다.

“사무실로 식사 준비해 줘요. 되도록 가벼운 걸로.”

―초밥 어떠세요, 이사님?

“좋네요. 와사비는 따로 담아 달라고 주문해 줘요.”

지금껏 목구멍으로 넘긴 거라곤 커피 두 잔이 전부였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고 자조하며 그가 소파에 등허리를 기대었다.

한선율.

잠깐 일에서 벗어나는 순간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지난 8년간 한순간도 잊어 본 적 없었다. 오로지 그녀로 점철된 유신의 지난 삶은 고통이었다.

[너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거야?]

울먹이며 묻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가슴에 일렁이는 말은 차고 넘치는데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울분에 찬 그녀의 눈빛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따가워 미칠 것 같아도 참고 또 참았다.

그녀를 지킬 수 있다면 나 하나쯤 천하의 빌어먹을 쌍놈이 되어도 좋았으니까.

“그래도 좀 아프긴 하네. 하필이면 기철 선배 애인이 되어 있다니.”

기철의 프러포즈를 받고 있던 선율을 떠올리며 유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로만 전해 듣던 것과 눈으로 확인한 것의 차이는 실로 컸다. 그 촌스러운 프러포즈를 보는 순간 눈이 돌아 버렸으니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뻔했잖아. 오래 준비한 보람도 없이.”

장갑을 벗었다.

잘 때 빼고는 거의 벗지 않아 유난히 하얀 손.

남자답게 툭 불거진 핏줄과 건장한 손마디 사이로 이제 익숙해진 흉터가 보였다. 왼손 약지부터 손등을 덮는 붉은 화상 자국.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이젠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유신은 그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김기철.”

유신은 그 이름을 곱씹으며 눈을 번뜩였다.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동자처럼 잔혹한 시선이었다.

* * *

사무실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오늘 하루를 버틸 커피를 타느라 탕비실에 삼삼오오 모인 직원들은 아침 인사와 함께 가벼운 수다를 곁들였다.

그중에 유독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대는 두 남자가 있었다.

“양 팀장님, 그 얘기 사실이에요?”

“베링거 모터스에서 광고 제작 의뢰 들어왔다는 얘기? 어어, 믿기 힘들지만 사실인 것 같아. 나도 어제 부장님께 슬쩍 들은 얘기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꿈인가 생시인가 하도 꼬집어 봐서 부장님 뺨에 피멍 든 건 똑똑히 봤어.”

“와우, 사실이라면 정말 대박이겠는데요? 다른 곳도 아니고 베링거 모터스잖아요! 슈퍼 카 업계 부동의 1위 자동차! 남자의 로망! 캬아! 그 광고 따기만 하면 올해 할 일 끝나는 건데 그럴 만도 하죠.”

“그러게 말이야. 그 콧대 높은 베링거가 이 미천한 곳에 친히 의뢰서를 보내 주시다니! 아아, 바이디오의 창립 멤버로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양아준 팀장과 도동묵 대리는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선율이 온 것도 몰랐다.

그들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선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베링거 모터스에서 의뢰가 들어왔다고?’

사실이라면 정말 대박이 아닐 수 없다.

베링거 모터스는 그야말로 귀족 중의 귀족 브랜드였다.

매장은 전 세계를 통틀어 열 개도 되지 않고 오로지 주문 제작만 받는 곳.

영업을 할 일이 없으니 광고를 만들 일도 없다.

그런데 그 대단한 베링거 모터스에서 광고를 만든단다. 선율은 벌써부터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베링거 모터스에서 광고 의뢰 들어왔다는 말.”

“흠흠! 아아, 음, 한 팀장 왔어?”

그제야 선율을 발견한 양아준이 티 나게 헛기침을 뱉으며 말을 돌렸다.

“오늘 얼굴 좋네? 아침부터 뭐 좋은 거 먹었나 봐?”

그도 그럴 것이 양아준 팀장은 선율과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방성범 부장 휘하 두 개의 기획팀. 그중 선율은 2팀 팀장이었고 양아준은 1팀 팀장이었다. 팀이라고 해 봐야 AD와 카피라이터 단 두 명인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원래는 한 팀이었는데 회사가 크면서 분리되었고 그 바람에 한참 선배인 양 팀장은 졸지에 선율과 경쟁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이번에도 베링거의 광고를 두고 싸우게 될 테지.’

양 팀장은 선율을 극도로 경계하며 대충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한선율이 누구냐!

그 빡세다는 광고업계에서 통뼈 하나 믿고 굴러온 불도저다. 해외 로케며 밤샘 작업이며 닥치는 대로 덤벼들어 최연소 팀장 타이틀까지 달았다.

양 팀장이 아무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해도 선율에게 들킨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다.

“제 얼굴 좋은 거야 어제오늘 일 아니고요. 사실이라면 어차피 저도 알게 될 거잖아요. 뭔데요, 네? 진짜 베링거에서 광고 만든대요?”

하는 수 없다는 듯 양 팀장이 입을 열었다.

“아직까진 소문이긴 한데 아마도 사실이지 싶어. 프로덕트 광고는 아니고 모터쇼 광고이지 싶은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런데 그 쟁쟁한 업체들을 놔두고 왜 바이디오에 의뢰한 거래요?”

“난들 아나? 사장님이 거하게 로비라도 하셨겠지.”

“그럴 돈도 없을 텐데요.”

“내 말이.”

그때였다. 탕비실 입구가 잠시 소란스럽다 싶더니 선율 밑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팀장님, 빨리 와 보세요! 대박 사건이에요! 지금 사장실에 누가 와 있는 줄 아세요? 베링거 모터스 이사라는 사람이…….”

선율과 양 팀장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그 소문 진짠가 보네요.”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위층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하아……. 하아…….”

양 팀장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선율은 계단으로 뛰었다. 한창 출근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기다리다간 숨넘어갈 것 같았다.

“어우……. 이거 좀 뛰었다고 숨이 이렇게 차냐.”

선율은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먼저 도착한다고 광고를 줄 리 만무하지만 어쨌든 눈도장이라도 먼저 찍으면 좋을 테니까.

대표실이 있는 13층에 도착했을 때 선율의 숨은 거의 턱 끝까지 치받쳐 있었다. 폭발할 듯 뛰는 심장을 오른손으로 꽉 누르며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아침내 공들여 세팅한 웨이브 머리가 생생하게 살아나자 그녀는 복도 끝을 향해 또각또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표실 앞에는 이미 손님들이 와 있었다. 멀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 둘.

두 사람 모두 훤칠한 체격이었고 그중 한 명은 창밖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계단으로 뛰어와 그런 거라고 애써 우기며 걸음을 옮겨 봤지만 등 돌린 남자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장은 기이할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익숙한 뒷모습.

어쩌면 그녀의 심장은 눈보다 빨리 제 앞의 존재를 알아챈 건지도 몰랐다.

또각또각.

선율의 하이힐 소리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선율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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