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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몸치는 안 돼.
하필 딱 그 타이밍에 넘어진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얼른 멀어지지 않으면 그에게 함몰될 것만 같은 아득함 속에서 선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선율은 어깨를 감싼 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비켜. 누가 내 몸에 멋대로 손대래?”
“그럼 넘어지지나 말든지.”
“넘어지든 말든 내 문제야!”
“자동 반사였어요. 순발력이 너무 좋아서.”
유신은 다시 손댈 생각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벽에 기댔다.
1초마다 감정이 끓었다 식었다 반복하는 자신에 비해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선율은 더 이상 그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조유신,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해명할 거 아니면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아니, 제대로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해 줄 생각 없어.”
차갑게 쏘아붙이는 선율을 유신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만 가지 감정이 집적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한 번도 장난인 적 없는데, 선배한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다. 지금 선율에겐 유신이 딱 그랬다.
“하!”
던진 모든 질문을 교묘하게 비껴가고 있는 걸 보니 알겠다.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거다.
‘하긴, 말해 줄 거였으면 애초에 그렇게 떠났을 리도 없겠지.’
선율은 분노를 갈무리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
톡 쏘아붙인 선율이 돌아섰다.
양심이란 게 조금이라도 있는 놈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예상은 이번에도 철저히 빗나갔다.
“되찾으러 왔어요.”
그의 대답은 또렷했다. 너무나 분명해 못 들은 척할 수도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선배, 돌려받으러 왔다고.”
차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른둘, 짧지 않은 인생에서 조유신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먹먹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미친놈.”
선율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곤 또각또각 복도를 벗어났다.
꿈에서라도 마주치지 않길 빌면서.
* * *
[선배.]
그의 숨결이 젖어 있었다.
[나 되게 기다렸는데.]
낮은 음성이 매끄럽게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움푹한 배꼽을 지나 가슴으로 파고든 순간 선율은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여기도 예뻐요?]
그의 손가락이 예민해진 살갗을 비틀었다. 그러다가 달래듯 살살.
[소리 내도 돼요. 나도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아…….]
처음 겪어 본 뜨거운 감각에 선율은 눈을 감았다.
맞닿은 가슴, 끌어안은 어깨. 벗어 내린 살갗에 밀착된 그의 몸에서 떨림이 전달되었다.
목 언저리에서 나는 그의 체향과 묵직하게 몸을 짓누르는 무게, 사각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꿈이었다.
예전엔 매일같이 꿨던 악몽. 그러다 하루걸러 한 번씩, 조금 더 지나니 아주 간혹.
요새는 거의 꾸지 않는 꿈이었다.
유신과 보냈던 그 밤은 황홀할 정도로 완벽했다. 처음이라고 쑥스러워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뜨거웠고, 선율의 온몸은 오롯이 그를 향해 활짝 열렸었다.
첫사랑이었다.
저돌적으로 다가온 유신에게 선율은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고 저 자신을 내던질 정도로 사랑했다.
그의 턱선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 맞닿으면 야릇한 소리를 냈던 젖은 피부와 입술까지 모든 것에 미친 듯이 끌렸다. 그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런데 넌, 왜 떠난 걸까.
“하아…….”
선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자주 반복되던 꿈.
꿈에서조차 눈물 나게 그리웠던, 그러나 깨고 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그 남자.
어제 내가 조유신을 만난 게 사실인 걸까?
아득하게 느껴져 어쩌면 그것조차 꿈이 아닐까. 잠시 생각하던 선율은 이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자.”
아침부터 단단히 기분을 잡쳤다. 선율은 뇌리에 남은 유신의 잔상을 털어 내며 출근 준비를 했다.
* * *
선율이 다니는 바이디오는 광고 대행업체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 이 바닥에서는 일 잘한다고 소문난 곳이다.
최근 톱 배우가 출연하는 굵직한 커피 광고를 찍고 난 후로는 위상이 꽤 올라가서 어느 정도 알아주는 사람도 생겼다.
마당발인 사장님 덕분에 광고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고 요새 들어오는 신입들 스펙도 제법 좋은 편이었다.
선율은 바이디오에서 AD(Art Director)로 일하고 있었다. 광고주가 의뢰한 제품을 검토하고 광고를 기획, 제작하는 전반적인 업무였다.
같은 회사의 제작팀에서 일하는 기철과는 입사 후 재회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다시 보냐며 놀라워하는 선율과 달리 그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여기에 너 근무하는 거 알고 왔어. 다시 보니 반갑다, 선율아.]
대학 시절 동창들과는 연락을 끊은 지 꽤 됐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기철은 대학생일 때와 별로 변한 것도 없었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매, 그에 반해 살짝 예민한 느낌을 주는 갸름한 턱. 누구에게나 잘 웃고 작은 농담에도 반응해 주는 성격까지 그대로였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 때 잠시 친하게 지낸 사이라 사회에서 만나니 반갑기는 했다. 두 사람은 꽤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기철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고백부터 해 왔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김기철 어제 잘 들어간 건가?’
때마침 주차를 마친 선율의 눈에 기철이 비쳤다.
그가 내린 곳은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
운전석에 누가 타 있을지는 뻔했다. 술이 덜 깬 아들을 출근시키기 위해 그의 어머니, 계순이 직접 회사까지 운전을 해 줬을 테지.
선율은 계순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엄마, 갈게요. 집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그래, 아들. 숙취 해소제 먹었지? 텀블러에 꿀물 탔으니까 꼭 챙겨 먹어. 알았지?”
“알았어요.”
기철이 조금 귀찮은 음색으로 대꾸했다. 돌아서던 계순이 문득 물었다.
“참, 기철아! 너 그 계집애랑 정말 헤어진 거지?”
기철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요. 헤어진 지 몇 달 됐다니까요.”
“같은 회사에 다니니 매일 마주치고 그럴 텐데 불편해서 어쩌니, 우리 아들. 그러지 말고 아빠 회사로 들어오라니까?”
“생각해 볼게요.”
은백색 세단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선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졌단 소리에 다행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계순을 보니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째 요새 좀 잠잠하다 했더니 헤어졌다고 둘러댄 모양이구나. 그래 놓고 프러포즈는 무슨.’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그때였다.
“한 팀장님!”
건물로 들어서던 기철이 선율을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헤어졌다고 말하던 그 입술로, 다정하게 말을 건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회사에서는 서로를 철저히 동료로만 대하는 두 사람이었다.
행여 다른 사람이 볼까 주위를 두리번거린 기철이 얼른 선율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주차장 기둥 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이르러 기철이 입을 열었다.
“어제 왜 연락 안 했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전화 한 통 없더라.”
“그러는 너도 연락 안 했잖아.”
“난…… 아, 모르겠어. 머리 깨질 것 같아.”
기철은 밤을 새운 것처럼 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연락도 못 하고 자 버렸네.”
“그렇게 나가선 술 마셨어? 혼자?”
“응. 펍에서 나와서 정신 차려 보니 집이더라고. 신용 카드 결제 내역 보니까 그 근처에서 한잔하고 집 앞에서 또 마셨나 봐. 넌 별일 없었지?”
기철은 떠보듯 물었다. 사실 그는 유신이 있는 그곳에 선율만 두고 나오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유신을 보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게 이제 와 후회됐다.
“별일 없었어.”
“조유신이 별말 안 해?”
“응, 별로.”
기철이 유신을 지독히 싫어한다는 걸, 아니 증오한다는 걸 선율은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꽤 친한 선후배 사이였던 두 사람이 무슨 일을 계기로 틀어졌는지는 몰랐지만 그때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건 알았다.
기철의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선율은 핸드백에서 민트 향 스프레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하고 가. 술 냄새 장난 아니야.”
“역시 나 챙겨 주는 건 자기밖에 없네.”
기철이 미소를 지었다.
안도감이 담긴 그 미소에 선율은 기분이 묘해졌다.
기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선율이 제일 잘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선율을 짝사랑해 온 그는 선율이 받아 줄 때까지 무려 열 번을 넘게 고백했다.
받아 줄지 거절할지도 모를 프러포즈를 위해 몇 달 치 월급을 탈탈 털어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한 남자. 그래 놓고 제 어머니에겐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뭐가 진짜일까?
“나 어제 솔직히 기분 좀 상했거든. 그 자리에 갑자기 조유신이 나타나서. 그런데 자기 얼굴 보니까 싹 풀린다. 숙취도 벌써 날아갔어!”
기철이 민트 향이 나는 입바람을 후후 불며 웃었다. 선율은 복잡한 생각을 끊어 냈다.
“그만 올라가자. 이러다 지각하겠어.”
“그래야지.”
“나 먼저 올라갈게. 같이 갔다간 괜히 오해 살 수 있으니까…….”
“선율아.”
몸을 돌리는 선율의 손목을 기철이 잡아 세웠다.
“뭐였어?”
“응?”
무슨 소리인지 몰라 되묻는 선율의 눈을 기철이 빤히 바라보았다.
“프러포즈에 대한 네 대답.”
선율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그가 꺼낸 얘기에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선율은 굳은 눈매로 기철을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