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이름 석 자에 술렁임이 시작되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이들 사이로 이내 경악이 번졌다.
“와……. 조유신 맞네. 미쳤다. 쟤 그때 자퇴하고 완전히 잠수 타지 않았어? 하필이면 이럴 때 오냐. 난리 났네.”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선율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였다.
그녀에게 ‘연하남 킬러’라는 오명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때 그 신입생.
살 떨리도록 황홀했던 하룻밤을 한낱 가십거리로 만들어 버린 그가 지금 눈앞에 있다.
뚜벅. 뚜벅.
선배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한 그가 선율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그가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선 그가 무릎을 꿇고 앉은 기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프러포즈를 꽤 거창하게 하네요?”
그의 입꼬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촌스럽게.”
선율의 심장이 툭 곤두박질쳤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조명을 쓸어 담은 것처럼 폭발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모두 잠재울 정도로 강렬했다.
“……조유신? 네가 여긴 어떻게.”
경악에 찬 얼굴로 선율이 물었다.
“보고 싶었어요?”
“뭐?”
“그런 표정이길래.”
유신이 픽 웃었다.
선율의 가슴은 이내 벼락을 맞은 듯 진동했다.
풋풋했던, 그러나 말도 없이 뜨거웠던 하룻밤 후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그의 등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작위적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숨어 있었다는 듯 극적이기까지 했다.
“잘 지냈어요, 선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바로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미소년 같았던 얼굴은 못 본 새 성숙한 남자의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으나 우울한 듯 순수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너무도 똑같아 일순간 선율은 자신이 선 곳이 동문회라는 것도 잊었다.
“너…….”
“조유신 이 새끼!”
허공에서 눈빛이 얽힌 찰나, 기철이 선율의 말끝을 가로챘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의 표정은 벌레를 씹은 듯 짓이겨져 있었다. 태워 죽일 정도로 번뜩이는 기철의 눈빛에 비해 유신의 눈동자는 어둑했다.
“자퇴생은 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런 거면 꺼져 주고.”
“야!”
“계속 그렇게 꿇어앉아 있을 거예요? 좀 없어 보이지 않나.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건 여전하네요.”
“너…….”
“3캐럿. 플래티넘 밴드에 스퀘어 믹스드 컷.”
유신의 시선이 기철의 손에 들린 반지를 느릿하게 훑었다.
“대충 봐도 차 한 대 값은 들었겠는데 이런 싸구려 펍에서 프러포즈하기엔 너무 언밸런스하지 않아요?”
“이 개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기철이 욕설을 짓씹으며 으르렁댔다. 기껏 무릎까지 꿇었는데 생각보다 멋이 없었던 프러포즈.
게다가 청혼을 가로막은 상대가 다름 아닌 조유신이다. 손바닥 위에 놓인 다이아 반지를 보며 망설이던 선율의 머릿속에 조유신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는 자신하지 못했다.
“혼자 일어나기 민망하면 내가 좀 도와줄까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기철의 코앞에 내뻗었다.
탁!
기철은 거칠게 유신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득달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낚아챘다.
“깐죽대지 마, 새끼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 너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붉으락푸르락하는 기철의 얼굴에 여유는 없었다. 반면 유신은 무서우리만치 침착했다. 기철을 주시하는 눈은 사냥을 앞둔 짐승처럼 서늘했다.
“내가 온 게 불편합니까?”
“뭐?”
비릿한 미소로 그를 마주한 유신이 고개를 숙여 기철의 귓가에 속삭였다.
“꼭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잖아, 지금.”
“헛소리 집어치워!”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허공으로 치켜든 기철의 주먹이 유신의 매끄러운 얼굴에 꽂힐 찰나였다.
“그만해, 둘 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야? 분위기 망치지 말고 둘 다 적당히 해!”
일촉즉발의 상황을 중재한 건 성환이었다.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기철의 주먹을 억지로 끌어 내렸다.
“기철아, 너도 그만둬. 좋은 자리에서 뭐 하는 거야?”
“아씨……. 진짜 뭣 같네.”
기철은 화를 참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멋쩍어진 성환이 유신의 어깨를 툭 치며 핀잔했다.
“어이, 조유신. 이 자식 신입생치고 여전히 패기 넘치네. 등장이 좀 요란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선배님.”
유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웠던 표정은 어느새 싹 씻겨 나가 깍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경직됐던 분위기가 그제야 풀렸다. 멀뚱히 상황을 주시하던 이들이 삼삼오오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유신아, 너 그동안 뭐 하고 지냈냐? 아무리 수소문해도 네 소식 아는 애가 없더라.”
“일이 조금 있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자퇴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나름 걱정 많이 했다. 잘 지냈어?”
“보시다시피.”
유신이 학교생활을 한 건 1년이 채 못 되었다. 그러나 입학 당시부터 슈퍼스타였던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또래보다 훌쩍 큰 키, 조각상 같은 이목구비는 둘째 치고 유신은 그 자체로 주위를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등장과 동시에 미대 여학우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한 그는 곧이어 남심마저 흔들었다. 축구, 농구, 배구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어 늘 팀을 승리로 이끄니 어떤 모임에서건 중심이 되는 게 당연했다.
“나 화장실 좀.”
사람들에 둘러싸여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 내는 그를 보며 선율은 가까스로 자리를 피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 * *
“우욱, 욱!”
선율은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기철이 프러포즈를 시작할 때부터 명치에 꽉 막혀 있던 것이 유신의 등장으로 아예 굳어 버렸다. 몇 점 집어 먹은 치킨이 돌덩이처럼 얹혀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아…….”
변기를 붙잡고 한참 게워 낸 선율이 흐르는 물에 입가를 씻어 냈다. 벌겋게 실핏줄이 선 눈동자가 마치 펑펑 운 사람 같았다.
“한심하네, 한선율.”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며 선율은 자조했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8년이란 시간은 조유신이란 존재를 조금도 퇴색시키지 못했다. 그가 계단을 내려선 순간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은 숫제 고장 난 것처럼 펄떡이며 뛰었다.
거울 속 모습은 대학생 티를 완전히 벗었는데 속은 아직도 8년 전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선율은 달아오른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왜 나타난 거야. 이제 와서.”
참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유복한 동기들이 해외여행이며 대학생 봉사며 여기저기 쏘다닐 때 그녀는 투잡을 뛰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하던 과외, 그러고도 생활비가 모자라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서 남들이 입이 마르도록 추앙하는 조유신이란 신입생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처음 그를 본 날은 남학생들이 야외 농구를 하던 날이었다. 벚꽃이 비처럼 흐드러지게 쏟아진 어느 날, 어둑한 가로등 아래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그를 보았다. 농구를 모르는 선율이 보기에도 독보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모습.
[혼자 날아다니네. 팬클럽도 달고 다니고.]
그를 보러 온 여학생들이 다닥다닥 철창에 붙어 있는 걸 보며 선율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땀에 젖은 그 얼굴을 침대 위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적어도 그때는.
유신과의 하룻밤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벌거벗겨진 채 내동댕이쳐진 기분. 아니, 실제로 그녀는 내동댕이쳐졌고 쓰러진 그녀 곁에 그는 없었다.
“나쁜 새끼. 정강이라도 차 줄걸 그랬지.”
선율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 * *
대충 세수를 마치고 나오니 문 앞에 길쭉한 인영이 서 있었다. 하얀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건 유신이었다.
“선배.”
못 본 새 더욱 깊어진 목소리.
코트 위에 느슨하게 걸친 머플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 폭발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본 순간 선율은 정강이를 차 주고 말겠다는 방금 전 다짐을 잊었다. 대신 그녀의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었다.
“……미친 새끼.”
날 기다린 건가?
틀림없이 그렇겠지.
“너 여기 왜 왔어.”
선율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깜짝쇼라도 하러 온 거야? 비싼 거 여기저기 걸친 거 보니 제법 성공한 모양인데 나 이만큼 잘살고 있다고 과시라도 하러 온 거니?”
“아니, 선배 만나러.”
그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진심 같아 선율은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장난질할 거면 그만……!”
“여전히 칠칠맞네요.”
말을 끊으며 다가선 그의 손가락 끝이 선율의 입술을 훔쳤다. 다 닦이지 못한 물방울이 그의 손끝에 지워졌다.
“챙겨 주고 싶게.”
입술 위로 열기가 번졌다.
그의 체취가 코끝에 와 닿자 깊이 묻어 두었던 감정이 들썩였다.
아득했다. 그의 눈동자가 살갗에 닿자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고작 손가락 하나 닿았다고 이렇게 흔들릴 일인가.
저 자신이 한심스러워 자괴감이 일었다.
탁!
선율은 입술에 닿은 유신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너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거야?”
“둘 중 어떤 게 더 궁금한 거야. 순서대로 대답해 줄까?”
“지금 이 상황에서 순서가 중요해?”
유신은 턱없이 여유로웠다. 그게 더 선율을 화나게 했다.
“같잖은 말장난에 놀아 줄 생각 없어. 그러니까 대답해!”
유신은 짙은 눈을 내리깔고 선율을 응시했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묘한 시선에 선율의 목덜미에 한기가 돋았다.
“나오라고 했었잖아. 8년 전 그날.”
“…….”
“꽁무니 말고 도망친 건 선배 아니었나? 나 그날 약속 장소에서 열여섯 시간 기다렸는데.”
유신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픽 웃었다.
“내친김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야겠지? 험한 데, 더러운 데 가리지 않고 있었죠. 미국에도 잠깐 있었고.”
대답이 뭐 이따위야.
선율은 화난 눈으로 유신을 노려보았다.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유신이 성큼 한 걸음을 다가왔다.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롄가?”
내려다보는 눈빛이 뜨겁게 얼굴 위로 덧입혀졌다.
“나 때문에 힘들었어요?”
소름 끼치도록 무감정한 중저음의 목소리.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제 감정을 비웃는 것처럼 새카만 그의 눈동자에선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힘들었냐고? 뻔뻔한 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선율은 아까 했던 다짐을 이제야 실현했다. 있는 힘껏 유신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가! 못 하는 운동이 없다던 조유신이다. 제대로 걷어찼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살짝 몸을 틀어 발길질을 피해 냈다. 그야말로 놀라운 순발력이었다.
덕분에 애꿎은 선율의 발은 허공을 걷어찼고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엄마얏!”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유신이 한 손으로 잡아챘다.
순식간에 몸이 밀착되었다.
단단한 손이 어깨를 감아쥔 순간 선율은 아득한 공포를 느꼈다. 또다시 그와 얽히고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
그것은 귓가를 스민 유신의 목소리에 확신이 되었다.
“내가 아까 말했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챙겨 주고 싶다고.”
폐부로 깊이 파고든 그의 체향에 선율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