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성대학교 동문회 날이었다.
강남역 4번 출구 라임 펍.
선율은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곤 요란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는 가게 입구에 서 있었다.
“좀 떨리네.”
졸업 후 한 번도 동문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한때 잘못 얽혀 버린 인연으로 대학 생활 내내 지독하게 따라다녔던 ‘연하남 킬러’란 꼬리표.
그럭저럭 잘 지내 왔던 동기들은 선율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젊은 치기로 꽁꽁 무장한 후배들은 대놓고 비아냥댔다.
[한선율 쟤, 조유신한테 따먹혔다며?]
그 신입생이 입학과 동시에 학과를 들썩이게 할 만큼 잘난 놈인 게 문제였을까.
[한선율 그렇게 안 봤는데 불여우네. 가정 형편 안 좋아서 연애할 시간 없다고 남자애들 고백 줄줄이 퇴짜 놓으며 도도한 척하더니 뒤에서 콩깍지 깐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네 살이나 어린 신입생이랑 자고 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냐?]
그 소문의 주인공이 그저 나라서 문제였던 걸까.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을 꾹 참으며 몇 달을 버텼다.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그저 버티는 시간이었다. 겨우 졸업한 후로는 단 한 번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다.
그 후로 8년.
서른둘이 된 선율은 예전의 앳된 모습과 달리 세련된 커리어 우먼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골반의 곡선을 잘 드러낸 펜슬 스커트와 하늘하늘한 어깨에 딱 떨어지는 실키한 재킷, 그리고 늘씬한 발목을 드러낸 7센티 하이힐까지.
수수하게 다녀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옷까지 갖춰 입으니 그야말로 날개를 단 듯 아름다웠다.
학창 시절 내내 청바지에 맨투맨만 입고 다녔던 걸 생각하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커다란 변화였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동창들 만날 일을 피해 온 그녀가 큰맘 먹고 나선 건 남자 친구인 기철의 부탁 때문이었다.
같은 학번 동기였고 현재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는 기철은 거의 두 달 전부터 동문회에 함께 가자며 그녀를 설득했다. 평소 늘 선율의 의견을 따라 주던 그가 이토록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한 건 처음이라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선율아, 먼저 와 있었네? 미안. 같이 나오고 싶었는데 부장님이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괜찮아. 나도 이제 막 도착했어.”
주차를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온 기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부단히 애쓴 모습에 선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오자고 해서 오긴 했는데……. 아직도 발길이 안 떨어진다. 나 꼭 가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오늘 성환이, 민서 커플 청첩장도 돌린다잖아. 졸업하고 한 번도 못 봤지? 학교 다닐 땐 민서랑 꽤 친하게 지내지 않았어?”
“민서 유학 간 후로는 연락 안 했어.”
“오늘 만나면 엄청 반가워할 거야. 들어가자.”
기철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끌었다. 선율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펍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선율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녀를 죄인으로 몰아갔던 지난날이 무겁도록 그녀를 내리눌렀다.
뿌연 조명으로 가득 찬 펍 안에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
동문회 장소치고는 다소 요란한 공간 안에 30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차 있다. 그들은 막 펍 안으로 들어서는 기철과 선율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기철이 왔어?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시간 약속 못 지키는 건 여전하네. 어라, 이게 누구야. 한선율도 왔네?”
“와, 선율아. 이게 얼마 만이야.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선후배 할 것 없이 고루 섞인 인파가 그들을 맞이했다.
파릇파릇한 대학생 티를 벗고 어느새 어엿한 사회인이 된 모습이다.
선율은 기철에게 꽉 잡힌 손을 자연스럽게 빼어 마주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잘 지내셨죠?”
들어서기 전 겁먹었던 것과 달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형식적으로라도 반가워해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불편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선율은 그들 틈에 섞여 앉았다.
“이번에 진우 선배 칸 영화제에 진출한 거 들었지?”
바로 옆자리에 앉은 종수가 물었다. 그는 과 대표를 맡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으로, 실질적으로 오늘 모임을 주최한 사람이기도 했다.
“응, 들었어. 황금종려상 받을 거 같다고 벌써부터 난리더라.”
선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수가 자랑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 유명한 진우 선배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줬단 거 아니야. 나 진우 선배랑 친한 거 알지? 동문회 한다고 했더니 선배가 싹 다 계산하고 갔어. 그러니 배 찢어질 때까지 먹고 마시자!”
그가 큰소리로 외치며 맥주잔을 치켜들자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잔을 부딪쳤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흥겨운 분위기에 선율 역시 자연스레 긴장이 풀렸다.
연성대학교 미대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사학이었다. 현 문화부 장관이며 국내 유수의 갤러리 관장, 해외파 영화감독 등 매해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해 낸 만큼 이곳 졸업생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오늘 모인 친구들의 화두는 단연 ‘누가 뭘 했다더라, 무슨 작품을 만들었다더라’ 하는 근황 얘기였다.
작은 광고 대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율로서는 끼어들 수도 없을 만큼 쟁쟁한 위치에 올라선 동문이 많았다.
기철을 제외하곤 따로 연락하는 친구가 없는 선율은 오랜만에 듣는 동문들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맞췄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성환이 일어났다.
“자자, 어느 정도 회포 풀었으면 다들 주목! 나랑 민서, 곧 결혼하는 거 알지? 이 자리를 빌려 청첩장 좀 돌릴까 하는데.”
“야, 진우 선배가 계산한 자리에 왜 숟가락을 얹어? 청첩장 돌릴 거면 거하게 한턱내야 하는 거 아니냐?”
“신혼집 마련하는 데 영혼까지 끌어다 써서 빈털터리다. 한 번만 봐주지?”
“하여간 저 자식 짠돌이인 건 여전하다니까. 민서야, 결혼 다시 생각하는 게 어때? 저 자식 결혼하면 팬티도 기워 달라고 할 놈이야. 너 바느질 잘하냐?”
가벼운 농담에 사람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친구는 밥 한 끼 못 얻어먹고 청첩장 받았다며 투덜거렸지만 성환이 대학 시절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어렵게 졸업한 것을 아는 이들은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몇 달 남았네. 꼭 갈게.”
“그래, 고맙다.”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던 성환과 민서는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청첩장을 모두 나눠 준 성환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곤 청첩장을 곱게 접어 가방에 넣는 선율을 향해 물었다.
“한선율, 너흰 결혼 안 해? 기철이랑 사귄 지 좀 됐잖아. 나이도 적당하고.”
“……응?”
선율이 멈칫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기철을 바라보자 그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며 미안한 시늉을 했다.
‘미안. 성환이랑 나랑 친한 거 알잖아.’
아마 성환에게만 살짝 귀띔한 모양인데 성환이 눈치 없이 이 자리에서 뱉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냥 지나가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선율이랑 기철이 사귀는 사이야? 난 몰랐는데?”
“완전 의외다. 둘이 학교 다닐 때 별로 안 친했지 않아?”
“아, 나만 빼고 다 연애하네. 치사한 것들!”
선율은 곤란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기철과 사귄다는 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도 없었다.
대학 시절 지저분한 소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 탓에 알리기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기철과의 관계에 확신이 없기도 했다.
애써 미소 짓는 선율을 보며 기철이 손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숟가락 한번 얹어 볼까.”
이게 무슨 소리지?
덜컥 드는 불안감.
말의 뜻이 해석되기도 전에 기철이 다가섰다.
수군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꽂혔다.
목덜미가 벌게질 정도로 당황한 선율의 귓가로 잔뜩 긴장한 기철의 목소리가 꽂혔다.
“여기서 발표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왕 멍석 깔아 줬으니 해야겠다. 너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사 뒀다가 내내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선율아, 나랑 결혼해 줄래?”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선율은 아득함을 느꼈다.
‘……이거였구나. 안 가겠다는 나를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망설이는 그녀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는 기철의 모습이 낯설다 느꼈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쩐지. 평소에 입지도 않는 정장을 갖춰 입고 넥타이까지 하더라니.
기철의 손바닥에 놓인 반짝거리는 다이아 반지에 선율의 시선이 흔들렸다.
묘한 분위기를 캐치한 성환이 적막을 깨며 소리쳤다.
“워후! 역시 기철이, 박력 쩐다. 한선율 뭐 해? 네 남친 계속 찬 바닥에 무릎 꿇리고 있을 거야?”
그러자 난데없는 상황에 넋 놓고 있던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받아 줘, 짝! 받아 줘, 짝!”
정수리로 스포트라이트가 쬐인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가운데 선율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왜 이래, 다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깜짝 이벤트치고는 좀 과하네. 나 이런 거 부담스러워하는 거 알면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알아. 그렇지만 너 데려오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어.”
장난으로 가볍게 넘기기엔 너무나 진지한 기철의 음성.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꿇어앉은 무릎은 선율이 반지를 받아 줄 때까지 결코 세워지지 않을 기세였다.
“다시 한번 물을게. 나와 결혼해 줄래?”
사귄 지 6개월밖에 안 됐는데도 몇 번이나 결혼 얘기를 꺼냈던 그였다.
그때마다 선율은 결혼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더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선율은 별처럼 반짝이는 작은 반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기철의 어머니였다. 너처럼 재수 없는 계집애가 어딜 감히 내 금쪽같은 아들 옆에 들러붙어 있냐며 악다구니를 퍼붓던 그 포악스러운 얼굴.
동창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선율은 가만히 눈을 들었다.
확신에 가득 찬 기철의 눈빛과 그의 손에 들린 다이아 반지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대답할게.”
무릎을 꿇고 있는 기철에서 한 발자국 다가선 그때였다.
저벅. 저벅.
펍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임에도 사위를 주목시키게 만드는 힘이 있는 발걸음.
선율에게 쏟아졌던 시선이 한순간 그쪽으로 옮겨졌다.
계단 위에 훤칠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단연 눈에 띄는 장신, 넥타이를 하지 않은 슈트 차림에 어깨에 걸친 회청색 코트.
숱 많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린 이마 아래 이목구비는 반듯하고 또렷했다.
어디에서나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요란스레 돌아가던 사이키 조명조차 그 앞에서 숨을 죽인 것 같았다.
누군가가 비명처럼 뱉었다.
“저 새끼 조유신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