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청혼
“이거 먹고 수업 가야 하지?”
주현은 새로운 피자 조각을 뜯어내며 물었다. 질문을 던졌고 맞은편엔 채하가 앉아 있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채하는 입을 꾹 다문 채 일회용 파마산 치즈 가루를 뜯어 주현의 피자 위에 골고루 분사했다.
“어, 고마워.”
“…….”
“아니, 채하야.”
“갈 거예요.”
퉁명스럽게 답한 채하는 피자 끄트머리를 베어 물었다. 혼돈의 설화 정기 점검이 있는 수요일. 주현은 연차였고, 공강 만들기를 실패한 채하는 수업에 가야 했다. 수업도 하나밖에 없으면서 뭐가 그리 귀찮은지, 어르고 달래서 학교에 보낸 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 먹은 피자 상자를 정리하고 일어난 둘은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수업 하나 기다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으니 주현은 근처에서 시간을 때울 예정이었다.
욕실에 서서 나란히 양치질한 둘은 옷을 찾으러 각자 흩어졌다.
“채하야. 내 셔츠 못 봤어?”
“꾸미지 마요.”
옷걸이를 뒤적거리며 묻자 돌아오는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협조할 생각 없어 보이는 채하에 주현은 셔츠 찾기를 포기하고 제 옷으로 보이는 검은 후드티로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준비가 끝난 채하가 주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꾸미지 말라고 해 놓고서 본인은 코트까지 단정하게 챙겨 입었다. 곱상한 얼굴 위에는 새로 맞춘 검은색 하금테 안경이 걸쳐 있었다. 전에 쓰던 금테 안경은 안타깝게도 주현이 부숴 먹었다.
“형.”
“응?”
“…아니에요.”
노골적으로 몸을 훑는 시선에 나가기 전에 거울을 확인해 봤으나 평소와 다른 바가 없었다. 주현은 어리둥절한 채로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형, 기다릴 거예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채하가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어.”
“어디서요?”
“글쎄. 피시방?”
“…거기가 좋겠어요.”
안 좋은 장소도 있나. 수상쩍은 채하의 답에 주현은 가볍게 웃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채하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가기 충분한 거리였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 붙잡힐까 봐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데, 집에서부터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는 시선에 주현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아니에요.”
처음에는 힐끔. 나중에는 대놓고 구경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아니라는 부정만 돌아왔다. 채하가 빤히 쳐다보는 건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었으나 전과 달리 빈도수가 잦았다. 강의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헤어질 때도 뒤통수가 뚫리는 듯했다.
주현은 채하에게 말했던 대로 피시방으로 향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westone : 웬일로 혼자세요?
[길드] 블랙 : 강의 들으러 갔어요
[길드] westone : 아 ㅡㅡ 강의라니
[길드] 블랙 : 서쪽님은 수업 안 가세요?
[길드] westone : 수요일 공강은 기본이죠
매번 접속 중인 서쪽이 신기해 묻자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기본이 안 된 채하는 현재 강의실에 있었다.
[확성기] 신사 : westone님 좋은말할때 귓 여세요
[길드] 블랙 : 저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네요
[길드] westone : 지가 게임 접어서 뺏긴걸 ㅋㅋㅋㅋ
[길드] 블랙 :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게 나았을까요..
[길드] westone : 아뇨 ㅋㅋ 저 요즘 게임 재밌어요
[길드] westone : 평온이지만 사람들이 재앙으로 알고 있어요 ㅋㅋ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
혼돈의 설화에 복귀한 신사는 길드를 빼앗겼단 걸 눈치채자 사사게에 글을 올려 서쪽을 고발했으나 여론은 서쪽의 편이었다. 사사게 글 가지곤 길드를 되찾을 수 없단 걸 깨달은 신사는 서쪽에게 귓속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겨서 말을 받아 주던 서쪽도 한 달이 넘자 귀찮아졌는지 친구와 길드원만 귓속말할 수 있도록 닫아 버렸고, 신사는 확성기를 통해 며칠째 울부짖고 있었다.
덕분에 유저들이 관심을 가져 그때 일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닉네임을 변경한 코쿄아까지 곤란해졌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레이드 가실래요?
[길드] 블랙 : 저 시간이 애매해서..
[길드] westone : 몇 분인데요? 그 안에 잡을게요
[길드] 월월월 : ㄷㄷ
[길드] westone : 님도 당연히 함께인데요?
[길드] 월월월 : ????????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
서쪽은 주현과 월월월을 파티에 초대한 후 방을 개설했다. 시간 안에 잡아 준다는 말이 진짜인지 서쪽은 파티 참여에 까다로운 공격력 제한을 두었다. 이래선 파티 모집 시간이 길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때였다. 익숙한 닉네임이 파티에 합류했다.
[SYSTEM] 신사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신사 : 웨스트님 좋은 말로 할때
[SYSTEM] 신사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
[파티] westone : 추방했어요 ㅋㅋ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때 길드 마스터였던 신사는 벌써 두 번씩이나 파티 추방을 당했다. 주현은 조용히 신사를 게임 방해로 신고했다. 신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얼마 뒤 홍보를 보고 들어온 유저들로 떠들썩해졌다.
놀랍게도 서쪽은 약속을 지켰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한 주현은 길드원에게 저녁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주현은 피시방에서 벗어나 경영대 카페로 향했다. 채하가 강의를 듣는 건물이기도 하고, 그쪽에서 기다리는 편이 아는 사람을 덜 만날 듯했다.
카페에 도착한 주현은 주문한 음료를 받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구석진 곳에 앉고 싶었는데 이미 다른 학생들이 선점한 상태였다. 휴대폰으로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 채하로부터 공유받은 시간표를 살폈다. 아직도 수업이 끝나려면 2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채하는 제 시간표를 내어 주면서 주현의 재학 시절 시간표를 받아 갔다. 이미 졸업도 한 마당에 저걸 왜 가져가나 싶었다. 채하는 그때의 주현이 어떤 시간에 무슨 수업을 듣고 다녔는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후회 같은 거 안 할 것처럼 사는 녀석이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길래 의외였다. 조금 더 빨리 만났다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첫 단추를 잘 끼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지금에라도 만난 것에 감사해야 했다.
“주현 선배.”
“……어.”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다.”
컵을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현은 위에서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래서 눈에 띄는 자리가 싫었다.
“선배, 오랜만에 봐도 진짜 잘생기셨어요.”
“……어, 고마워. 수업 잘 들어.”
붙임성 좋은 후배의 칭찬에 주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배웅했다. 후배도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지 주문한 음료만 받고 카페를 나섰다. 주현은 얼른 채하의 수업이 끝나길 바라며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현도 지나친 채하의 시간이 궁금하긴 했다. 물어보면 없는 말주변을 쥐어짜 내서라도 설명해 주겠지만,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야, 윤주현!”
윤주현이란 이름을 혼자 쓰는 건 아니었으나 부르는 이의 목소리가 귀에 익단 게 문제였다. 후배를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경찬이 나타났다. 옆에는 데면데면한 동기도 함께였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마친 경찬은 진동벨을 쥔 채로 주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오랜만이다?”
별로 오랜만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경찬은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부산스럽게 굴었다.
“너 살 빠졌냐?”
제 턱을 더듬으며 묻는 경찬에 주현은 대충 그렇다고 대꾸했다. 누가 한번 시작하면 놓아주지 않는 탓에 열심히 먹어도 몸에 살이 붙지 않았다.
“박동권. 넌 윤주현 엄청 오랜만에 보겠다?”
“어. 넌 애냐? 아직도 그거 마시게.”
주현의 앞에 있던 경찬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빈 곳에 동권이 앉았다. 사 주지도 않아 놓고 면박을 주는 동권에 주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넘겼다. 사람을 우습게 보던 채하도 손에 아메리카노는 쥐여 줬다.
이윽고 진동벨이 울리자 경찬이 다리를 뻗어 동권을 툭툭 건드렸다.
“내 것도 가져와.”
“싫어, 미친놈아.”
“어, 어. 고맙다.”
동권이 경찬을 때리는 시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음료도 받았으니 이제 그만 떠나 줬으면 좋겠는데, 음료 잔이 매장용이었다. 주현의 예상대로 동권은 트레이를 들고 돌아와 경찬의 앞에 잔을 던지듯 내려놨다.
“어, 땡큐. 야, 근데 너 돈 많이 벌었나 보다?”
빨대를 입에 물고 주현을 훑어보던 경찬이 팔을 뻗어 소매를 붙잡았다. 얼떨결에 손목이 붙들린 주현의 시선도 함께 내려갔다. 제 옷이라면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브랜드 자수가 그려져 있었다.
“……어. 생일 기념으로 샀어.”
“채하도 그거 입던데.”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고 어색한 입꼬리를 가리려 음료를 마시는데, 흘리듯 읊조린 경찬의 말에 홀로 찔려서 짧게 기침했다. 옷의 주인은 채하가 맞았다. 널찍한 품이 급격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잘 때 옷을 한두 번 빌려 입은 게 아니라서 입고 나올 때 옷이 유독 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너 여친 생겼냐?”
이번엔 소매 아래 뻗어 있는 손가락에 관심이 쏠렸다. 서프라이즈에 장렬히 실패하고 채하에게 뜯기듯 전한 커플링이었다. 맞다, 아니다로 나누어지는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주현은 답을 뱉기 전에 채하가 커플링을 빼고 다녔는지부터 떠올렸다. 평소 뭐라도 엮이고 싶어 하는 녀석이 반지를 뺄 리가 없었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방황하자 곧이어 동권이 질문을 던졌다.
“예쁘냐?”
“……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답이 나왔다. 채하는 예뻤다.
“뭐야. 선비처럼 굴 때는 언제고.”
예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꾸해 줬을 뿐인데 동권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댔다. 남자 동기들끼리 모여서 사람 얘기를 할 때면 마지막은 언제나 ‘그래서 예쁘냐?’로 귀결되었다. 여자 동기들이 한심하게 쳐다보는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그들은 언제나 당당했다.
소문이 빨리 도는 대학 특성상 주현은 재학 내내 말을 아꼈다. 연애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를 남자 동기들이 예쁘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주현은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반문했다가 도리어 이상하단 소리를 들었다. 남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 앞에선 아무리 좋은 얘기더라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주현의 걱정대로 술자리에서는 질리도록 동기들의 옛 여자 친구 얘기가 나왔다.
“너 그러다가 결혼하겠다?”
여자 친구 얘기하는 걸 싫어하던 주현이 커플링까지 맞추고 나타난 게 아니꼬웠는지 동권이 빈정거렸다. 결혼이란 단어에 꽂혀 정신 팔린 주현은 그게 비꼬는 건 줄도 몰랐다.
“어. 할 건데.”
슬슬 게임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가 되었다. 결혼식을 한다고 능력치가 오르거나 하는 커다란 변화는 없지만, 채하와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다.
“뭔데. 결혼한다고? 사고 쳤냐?”
“미쳤냐? 나중에 한다는 거지.”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경찬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질문을 던진 동권은 조용했다.
소문이 도는 걸 싫어하는데도 구태여 채하를 자랑한 이유를 묻는다면…… 채하가 그런 말에 타격을 받지 않는단 걸 알고, 또 채하와의 관계에선 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제 삶에서 이보다 더 귀여운 존재를 찾는 건 아무래도 힘들 듯했다.
주현은 무심코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가 마침 걸어오는 채하를 발견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머리통이 불쑥 솟아 있었다.
“쟤는 깔창 깔았겠다.”
주현을 따라서 유리창을 바라보던 동권이 읊조렸다. 그 말을 들은 경찬이 입술에 비웃음을 달고 반박했다.
“채하가 뭐하러 깔창을 깔아. 너보다 20cm는 클 텐데.”
“야, 나 172거든?”
둘이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주현은 채하의 행동을 지켜봤다. 카페에 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주현도 덩달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큰 보폭으로 걸어 금세 카페에 들어온 채하는 주현의 앞에 있던 둘을 건조한 시선으로 훑다가 짧게 목을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형, 가요.”
채하가 주현의 팔을 붙들자 경찬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너 채하 기다린 거였어?”
“어.”
“야, 채하야. 넌 윤주현 여친 아냐? 결혼하겠다는데 얼굴도 안 보여 줘.”
“……그걸 얘한테 왜 말해.”
없을 때 한 얘기를 당사자가 듣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조금 눈이 커진 채하는 고개를 내려 주현을 빤히 응시했다. 주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만 가 보겠단 말을 남기고 채하를 질질 끌고 갔다.
채하가 아무 말 없이 붙잡힌 대로 끌려와 준 덕분에 계속 팔을 붙잡고 있었단 건 정문을 빠져나와서야 알았다. 주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채하를 돌아봤다. 채하는 생각에 잠겼는지 어딘가에 정신 팔린 얼굴이었다.
“채하야.”
“…네.”
부르면 대답은 또 잘했다. 허공을 향해 있던 눈동자가 주현에게 꽂혔다.
“나 실수로 네 옷 입고 나왔는데…….”
“알아요.”
“……그래?”
자고 일어나면 늘 상의가 채하의 것이었으니 옷을 공유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착각하여 입고 나온 걸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채하의 눈동자가 주현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발끝까지 내려갔던 시선은 다시 올라와 얼굴을 뚫을 듯 응시했다.
꽂힌 열렬한 시선에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서 기다리면 돌아오는 건 정적뿐이었다.
“……왜?”
괜히 머쓱해진 주현이 뺨을 손등으로 쓸면서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답이 돌아왔다. 채하는 집에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안겨 오는 몸뚱어리에 주현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허리를 옭아매는 팔 위에 손을 얹었지만, 힘을 준다고 순순히 풀 녀석이 아니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이어지는 타박에도 채하는 드러난 주현의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렸다.
“형이…… 옷…….”
소리가 먹혀든 탓에 뭐라고 말을 하는지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되묻는 순간에 바지 버클이 풀렸다.
“왜, 왜.”
남의 바지를 함부로 벗기는 손길에 당황한 주현이 무릎을 세워 도망가려고 했으나 곧바로 붙잡혔다. 엎드려 있던 주현은 몸을 뒤집어 제 위에 올라탄 채하와 얼굴을 마주 봤다. 집에 오는 내내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지긴 했으나 그게 성욕을 느껴서인 줄은 몰랐다.
“……신발은 벗어야 하지 않을까?”
벗는다고 뒤를 돌아볼 때 도망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채하는 주현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벅지부터 붙잡았다. 그러곤 시선을 계속 주현에게 고정한 채, 발로 쓱 밀어서 제 것과 주현의 운동화를 쉽게 벗겨 냈다. 같이 산 커플 운동화였다.
“우리 어제 하지 않았어?”
“…형이 제 옷 입었잖아요.”
설마 또 할 생각이냐는 주현의 추궁에 채하는 가라앉은 눈으로 답했다. 옷을 한두 번 빌려 입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난리를 치는 이유를 주현은 알 수 없었다. 허리 밴드가 붙잡히고 바지가 허벅지까지 벗겨졌다. 끝까지 내려가지 않은 바지가 불편해서 버둥거리자 채하가 드로어즈와 함께 마저 벗겨 내고 주현의 성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아, 하지 마.”
입을 벌리며 고개를 숙이는 검은 머리통에 주현이 서둘러 손바닥으로 뺨을 밀어냈다. 차라리 해 주겠다고 몸을 일으키면 채하가 어깨를 눌러 다시 몸을 넘어뜨렸다. 빨간 혀가 선단에 맺힌 액을 핥고 갔다. 받기 싫다고 해놓고서 몸은 또 솔직한 게 주현 스스로 기가 찼다.
“……받을 생각은 없어?”
주현은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앞으로 형 넣을 곳 여기밖에 없는데 그냥 받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성기가 눅눅한 공간으로 삼켜졌다. 주현은 신음을 삼키며 뺨을 서늘한 바닥에 문질렀다. 왜 맨날 해 주기만 하나 했더니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
채하는 본인이 말을 뱉어 놓고 묘하게 그늘진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주현이 무심코 머리카락에 손을 대면 더 만져 달라는 의미로 머리를 손바닥에 문질렀다. 주현은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움직임이 없어 어느새 빛을 잃은 현관 센서 등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집 온갖 곳에서 하더니 이제는 하다 하다 현관이었다.
목구멍을 조이며 사정을 독촉하던 채하는 기어코 입 안에 정액을 받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삼키지 않고 손바닥에 뱉어 낸 정액은 그대로 주현의 뒤로 향했다. 차가운 손가락과 함께 파고드는 끈적한 액체에 포기한 채로 얌전히 몸을 맡겼다. 본격적으로 뒤를 쑤실 줄 알았던 손가락은 비좁은 입구에 꾸역꾸역 정액을 쑤셔 넣는 것에 그쳤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쌕쌕 숨을 쉬고 있으면 성기 위로 묵직한 기둥이 비벼졌다. 주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마찰은 쓰라렸다. 힘겹게 아프다고 말하면 채하가 그제야 눈치를 보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힘들다고 할 땐 무시하면서 아프다는 말에는 또 예민하게 굴었다.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형이…….”
“…흐으.”
갑작스레 귀두를 문지르는 손가락에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흐느끼자 곧바로 창백한 손이 나타나 행동을 막아 냈다.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하는 건 몇 번을 해도 여전했다.
“형이…… 결혼하겠다고 했잖아요.”
말을 뱉는 채하의 얼굴은 왜인지 억울한 낯빛을 띄웠다. 이를 악물었는지 볼록하게 튀어나온 턱에 이제 와서 게임 결혼이라고 정정했다간 큰일 날 듯싶었다. 부캐 닉네임을 윤채하로 지었던 걸 고려해 보면 채하는 법적으로 엮이는 순간을 간절하게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
“어, 그치.”
“……형이 결혼한다고 해서.”
채하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맞닿은 성기 두 개를 그러쥐고 쓸어내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쿠퍼액이 엉켜 함께 문질러졌다. 주현은 고장 난 채하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으, 흣, 게, 그렇게 좋아?”
연인 사이에서 흔하게 오가는 말이었다. 진짜로 결혼하는 커플이 몇이나 될진 모르겠다만. 보이는 반응이 귀여워서 물어본 건데, 채하는 붉어진 눈을 치켜떠 주현을 노려봤다. 오랜만에 받아 보는 적대적인 시선이 반가워서인지 자꾸만 실실 웃음이 흘렀다.
“…형은 사랑한단 말도 잘 안 해 주고.”
채하가 성기를 회음부에 문지르다가 미끄러뜨리며 주현의 것과 마찰시켰다.
“……흐읏, 그걸 말로 해야 알아?”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좋아한단 말은 쉬운데, 사랑한단 말은 부끄럽고 묵직하게 느껴져서 전하기가 어려웠다. 하려고 할 때마다 왠지 목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뒤로 미뤘는데 이렇게 마음 쓰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아낌없이 내어 줄 걸 그랬다. 애정에 목말라 있던 채하는 결국에 결혼하겠단 말에 꽂혀서 눈이 돌아갔다.
“그럼 내가 널 안 사랑하는 줄 알았어?”
주현은 장난처럼 말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고요한 채하의 시선뿐이었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형이…… 얼굴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안경 너머 채하의 눈동자가 주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와중에도 성기를 지분거리는 손길은 계속되었다. 분명히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인데, 주현은 그런 마음이 들긴커녕 채하가 여태껏 그런 걱정을 하며 지내 왔을 것을 생각하니 도리어 안쓰러웠다.
얼굴에 혹한 건 맞다. 하지만 얼굴 하나만 보고 사람을 사귈 만큼 주현은 미련하지 않았다.
“네가, 읏, 얼마나 귀여운데…….”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귀여운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모르니까 혼자 땅굴을 파고 있었겠다만. 주현은 채하가 타인과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인정사정없는 성격을 고수해 귀여운 건 저만 알았으면 했다.
“……윽.”
채하의 성기에서 분출된 정액이 후두둑 튀어 주현의 뺨에도 떨어졌다. 사정 후 한껏 나른해진 채하는 주현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제 성기를 쓸어내렸다. 열기에 물든 눈동자에 갇힌 주현은 누가 얼빠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채하는 손에 묻은 정액을 모아 또다시 주현의 뒤에 꾹꾹 밀어 넣었다. 이전에 넣어 두었던 것은 성기를 비비면서 엉덩이가 떠 올라서 그런지 흘러나와 있었다. 채하는 그것까지 도로 집어넣었다. 비좁은 내벽을 파고든 검지는 탐색하듯 주위를 더듬으며 안을 넓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빨리 넣자.”
“기다려요.”
팽팽하게 부푼 성기가 빠듯하던 참이었다. 주현이 손을 내려 만지려고 하면 아직 아니라고 팔이 그대로 공중에서 붙들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채하의 눈은 주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다정하게 마주하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돌아왔다.
“형, 제 얼굴 안 보고도 쌀 수 있어요?”
“시발. 그걸 왜 못 해?”
“그럼 이따가 보여 주세요.”
얼떨결에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이어서 중지가 진입했다. 내벽에 치덕치덕 발린 정액을 타고 미끄러지며 전립선을 긁자 주현의 허리가 튀었다. 손가락이 쓱 빠져나왔다가 다시 끝까지 들어가며 찌걱이는 소리가 났다. 다음은 약지였다. 푹 꽂힌 손가락은 끝에 걸린 반지를 남겨 두고 삽입을 멈췄다. 손가락이 뒤로 물러나자 정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별안간 기분이 좋아진 채하는 제 어깨에 올라간 주현의 발목에 입술을 부딪쳤다.
“형, 일어나요.”
안이 웬만큼 부드럽게 풀어지자 채하가 주현에게 두 팔을 뻗었다. 안기라는 것 같은데, 축축한 앞이 신경 쓰여서 아직 코트 차림인 채하에게 덥석 매달릴 수가 없었다. 꾸물거리자 성질 급한 채하가 몸을 숙여 주현을 들고 일어났다.
침대로 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채하가 주현을 내려놓은 곳은 누워 있던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벽 앞이었다.
“보여 주기로 했잖아요.”
주현이 어리둥절한 채로 손으로 벽을 짚었다. 채하는 삽입을 앞두고 주변을 문지르다가 긴장이 풀렸을 때 불쑥 귀두를 입구에 들이밀었다. 주현은 벽에 뺨이 뭉개진 채로 더운 숨을 뱉었다. 목덜미에 딱딱한 감촉이 닿자 주현은 이마를 벽에 고정한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거긴 물면 안 돼….”
“……네.”
당장 내일이 출근인데 보이는 곳에 자국이 남으면 큰일이었다. 주현은 목덜미 쪽 후드를 잡아 끌어 내린 후 머리를 숙였다. 용케도 알아들은 채하가 목 아래로 내려가 등 쪽 살을 깨물었다. 잇자국이 남자 그 자리를 빨아들이며 입술을 문질렀다.
“…흐으.”
선명한 흔적에 만족스럽게 웃은 채하가 고개를 떼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내벽을 갈랐다가 빠져나가는 성기에 주현이 흐느끼며 벽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면 채하의 손바닥이 그 사이를 가르고 나타나 주현의 이마를 받쳐 줬다. 외출복을 입고 하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이따금 다리에 닿는 채하의 코트 자락이 낯설면서 한편으론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다시 안을 헤집으며 들어온 성기는 조금 전보다 깊이 찌르고 빠져나갔다. 주현이 팔에 힘을 주어 무너졌던 자세를 세우자, 손이 자유로워진 채하는 주현의 허리를 붙잡고 내벽을 헤집었다. 점점 속도가 붙으며 안을 치받는 성기에 주현의 몸이 들썩였다. 무심코 까치발을 들었다가 채하가 굽혔던 등을 펴 버린 바람에 그대로 자세가 고정되었다.
“흐, 발. 으읏, 발이 안, 닿아.”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가면 발을 내릴 심산이었는데, 채하는 기회를 주지 않고 끄트머리만 남겨 둔 채 곧장 다시 내벽을 가르며 진입했다. 쉴 새 없이 안을 들쑤시는 기둥에 주현은 종아리가 저린 채로 끅끅댔다. 발을 내리려고 하면 성기가 너무 깊숙이 들어오는 탓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천, 히, 하으면, 안 돼?”
다시 벽과 합체되듯이 몸을 기댄 주현이 더듬더듬 문장을 완성했다. 잠시 속도를 늦춘 채하가 한 손을 내려 주현의 앞을 만지작거리더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안 되겠는데요.”
돌아오는 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팽팽한 주현의 성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손은 주현의 허리춤을 쥐고 내려온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체중을 지탱하는 건 다시 발가락의 몫이 되었다. 바들거리다가 자세가 휘청하면 휘어진 성기가 깊은 곳에 처박혔다. …흐윽. 놀란 주현이 어깨를 떨자, 채하가 주현의 머리카락에 제 뺨을 비비적댔다.
주현의 허리를 붙들던 채하의 손이 사라지더니 곧바로 복부를 휘감았다. 남은 한 손은 주현의 앞으로 향했다. 빳빳하게 솟은 성기를 둥글게 말아쥔 손이 위아래로 왕복하며 사정을 독촉했다.
“하으, 지마.”
과한 쾌감에 바둥거리면 손길은 더욱 짓궂어졌다. 기둥을 쥐고 남은 엄지가 귀두 위를 덧그리며 문댔다. 가기 직전이었다. 채하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는 탓에 주현은 붉게 익어서 엉망이 된 얼굴을 벽에 숨겼다. 먼저 가면 채하가 오그라드는 내벽을 일부러 휘젓곤 했다.
“…형, 설마 참아요?”
같이 지내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몸을 부대껴서인지 이상함을 감지한 채하가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아한 말투였다. 주현의 배를 휘감고 있던 왼팔에 힘을 주며 위로 끌어당겼다. 옷자락과 함께 주현의 몸도 들썩였다. 자세가 더 높아지자 발끝을 완전히 세울 수밖에 없었다.
“싸는 거 보여 주기로 했잖아요.”
처음 약속했던 것에서 의미가 많이 변질한 듯했다. 더는 못 참을 듯하여 주현은 벗어나기 위해 채하의 팔을 붙잡고 버둥대다가 중심을 잃고 발을 삐끗했다. 양말만 남은 다리가 미끄러지며 채하의 발등을 밟았다. 채하가 붙잡고 있는 탓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모면했지만, 성기가 너무 깊숙하게 들어온 게 문제였다.
“……흐으응.”
주현은 채하에게 몸을 기댄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탓에 볼록한 목젖이 드러났다. 어느새 정액을 받아 손이 축축해진 채하는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길게 핥았다.
“……그걸 도대체 왜 먹어.”
위를 올려다보던 주현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몸을 떨어뜨린 채하는 주현을 다시 앞으로 돌린 후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안아서 침대로 옮겨 주는 줄 오해한 주현은 얌전히 목에 팔을 걸었다. 손바닥이 엉덩이 살을 잡아당기자 주현의 얼굴에 일순간 배신감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였다. 성기가 멈추는 것 없이 한 번에 끝까지 진입하니 채하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끙끙거렸다.
“다리 제대로 감아요.”
남은 한쪽 다리까지 들어 올리려고 하자 주현의 반발이 거셌다.
“아, 아, 안 돼.”
“침대 안 갈 거예요?”
내내 까치발 들고 서 있어서 평소보다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눕게라도 해 주겠단 제안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답은 못 하고 들뜬 숨만 쉬자 채하의 손이 남은 허벅지를 붙들고 힘껏 들어 올렸다. 벽에 등이 닿은 채로 몸이 불쑥 위로 떴다. 성기의 압박감이 어느 때보다 심했다.
“침대, 흐읏….”
얼른 침대로 가자고 말을 이으려 했지만, 채하의 성기가 전립선을 긁은 탓에 가로막혔다.
“…네. 끝나고 보내 줄게요.”
그렇게 또 한 번 채하에게 당하며 언제 끝날지 모를 정사가 시작되었다. 간 지 얼마 안 된 내벽은 예민했다. 어딜 찌르든 목에 매달리며 흐느끼는 주현에 채하가 미소 지으며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쪽 부딪혔다. 채하를 붙들고 있지 않으면 성기가 무서울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탓에 주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채하는 주현의 얼굴을 볼 수 없단 게 아쉬웠으나 내내 안고 있을 수 있단 게 좋았다. 기분이 들뜬 채하를 따라서 성기가 주현의 눅진한 안을 질펀하게 들쑤셨다. 미끄러졌다가 빠져나오는 기둥에 주현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앞 머리카락을 채하의 어깨에 문질렀다.
“좋, 윽, 아요?”
채하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도 질문을 던졌다. 어깨에 닿은 이마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긍정했다.
“으응. 좋아.”
앞서 대화에서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아느냐고 말을 나눠서일까. 채하는 원하는 답을 쉽게 받아 갈 수 있었다.
“……하.”
채하는 젖은 앞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깊은숨을 쉬었다. 그동안 한 손에 몸을 맡긴 주현은 떨어질까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주현을 고쳐 안은 채하는 속도를 올렸다. 빠르게 내벽을 찌르고 나간 성기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극점을 때리고 갔다. 이럴 때면 너무 느낀 나머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너, 너무, 흐으… 깊, 어.”
또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두 다리로 채하의 몸을 힘껏 조이는 게 주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형은 근데, 깊, 윽, 거 좋아, …흐, 하잖아요.”
“……흐으, 아니야아.”
“…맞는데에.”
고의로 전립선을 긁는 성기에 몸을 바르르 떨면, 늘어진 말을 따라 하는 얄미운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도 깊었지만, 일부러 끝까지 밀고 들어오는 채하에 주현은 목에 팔을 두른 채로 무력하게 끅끅댔다. 성기가 밖으로 빠져나갈 때면 안에 고여 있던 정액과 쿠퍼액도 함께 밀려 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아, 아. 흐윽.”
주현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신음만 흘리자, 목덜미에 묻고 있던 채하의 입술이 움직였다.
“갈 것 같아요?”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닌지 들썩이는 성기는 매섭기만 했다. 주현은 팔에 힘을 주며 채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시야가 흐려졌다. 채하는 절정을 맞아 조여드는 내벽을 꿋꿋하게 가르고 들어갔다. 고집스럽게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더니 그제야 사정을 시작했다. ……흐윽. 안에 가득 분출되는 정액 때문인지 주현이 한 번 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정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채하가 몸을 낮춰 주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러모로 혹사당한 탓에 땅을 밟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 끝났겠거니 안심하면 차가운 손가락이 엉덩이를 벌리며 안으로 진입했다. 사정의 흔적을 빼내기 위해 내벽을 긁어내던 손은 간혹 실수인 척 전립선을 문질렀다.
정말로 모든 게 끝났을 때, 주현은 기력을 잃은 채로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너라면 안 사랑하는 사람한테 박혀 주겠냐고.”
언제나 걱정을 안고 살았을 채하가 안쓰러운 것과 별개로 왜곡되어 전해진 마음이 억울했다. 주현이 쪼그려 앉아서 웅얼거리자 채하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너를 덜 사랑했으면…… 넌 여기서 차였지.”
어떻게 보면 재학 시절처럼 또 마음을 무시당한 거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며 주현을 빤히 응시하던 채하는 느릿하게 입을 떼더니 엉뚱한 소리나 해댔다.
“형이 저 안 만났으면…… 다른 유저랑 사귀었을 거 생각하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랜선 연애를 왜 해.”
자신을 꾀었다고 주장하며 쫓아오던 막무가내만 아니었으면 공란으로 비었을 자리였다. 유저들하고 연락한 것도 게임 거래가 전부였는데, 랜선 연애 취급이라니 주현은 기가 막혔다.
“저랑은 했잖아요.”
“……아니, 넌 실제로 만났으니까.”
눈꺼풀을 내리깐 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현은 그런 채하의 볼을 장난스럽게 손등으로 문질렀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널 불안하게 만들어?”
“…….”
정말 그러한지 뺨을 괴롭힘당하는 와중에도 채하는 말이 없었다.
“착하게 살았으면…… 됐잖아. 앞으로는 마음 좀 곱게 써.”
스스로 생각해도 오죽 잘못한 게 많으면 ‘왜 나랑 사귀는 걸까?’라는 주제의 말도 안 되는 고찰 따위를 하는 건지. 주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채하의 뺨을 꼬집었다. 잡았다가 놓은 거라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채하는 멀어지는 주현의 손을 황급히 붙잡아 다시 제 뺨 위에 얹었다.
“제가 왜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잘 보여야 해요?”
“……어, 그래.”
아무래도 채하의 귀여운 면을 보게 되는 건 주현 혼자만의 몫으로 남을 듯싶었다.
채하는 자꾸만 얼굴 때문에, 게임 때문에 하나씩 따져 가면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주현은 그 모든 게 합쳐진 임채하가 좋았으니까.
“그런 걸 걱정하고…… 아가야?”
주현은 흐트러진 채하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채하는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맡기면서 자유로운 입으로는 또다시 주현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저 늙으면 버릴 거예요?”
“……오래오래 평생 데리고 살게.”
* * *
채하는 약속대로 주현을 침대에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주현은 걸음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이곳저곳에 묻은 체액이 찝찝해서 당장 씻고 싶었다. 뒤따라온 채하가 같이 씻겠다면서 욕실 문을 닫았다. 그 안에서 또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온 주현은 탈진한 상태였다. 이렇게 살다가 기절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됐지만, 주현의 몸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이대로 휴일을 보낼 수 없는 주현은 컴퓨터를 켜고 혼돈의 설화에 접속했다. 채하가 따라서 로그인하는 걸 확인한 후, 캐시샵에서 결혼식 아이템을 구매했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청첩장을 열어 현재 접속 중인 친구 목록 유저들에게 초대를 보냈다.
[길드] westone : 이거 뭐예요
[길드] westone : 저녁에 보자는 게 결혼식이었다니
[길드] 블랙 : 청첩장이요
[길드] westone : 와 ㅋ 할 생각 없다고 해놓고서
[길드] 블랙 : 제가 언제요
기억은 났지만, 채하가 그때의 일을 떠올려 서운해할까 봐 시치미를 뗐다.
[길드] 통망통 : 결혼하면 뭐 줘요?
[길드] westone : 청첩장이요
[길드] 통망통 : ???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 하객한테 보낼 수 있는 청첩장이 전부예염
[길드] 통망통 : 버프 같은 거 없음요?
[길드] westone : 네
[길드] 통망통 : 왜 하는거예요?
[길드] westone : 음 블랙님 밍채님 잠깐 나가보세요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나갈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서쪽은 말을 이어갔다.
[길드] westone : 랜선연애 과몰입이셔서
[길드] 블랙 : ㅅㅂ 저희 아직 있어요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STEM] 길드원 단공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밍채 : 사랑해서요
[길드] 단공 : ㅆㅂ 오자마자 뭔데
[길드] blueberry : 우편봐 밍채랑 블랙님 결혼한대
[길드] 단공 : 블랙님 협박 당하신거 아님??????
이제야 퇴근했는지 늦은 시간 나타난 단공은 입장하자마자 채하의 사랑 고백을 보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전해 받은 건 주현과 채하의 결혼 소식이었다. 단공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에게 넘어오라며 마지막까지 치근덕댔다.
[길드] strawberry : 결혼하면 그거 있어요
[길드] 통망통 : 뭐요?
[길드] strawberry : 커플링이 결혼반지로 바뀌어요
[길드] 단공 : 능력치 더 세지나?
[길드] strawberry : 아뇨 디자인이 이뻐져요
[길드] 단공 : ㅆㅂ 진짜 혼설답다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루베리와 스트로베리는 길드에서 유일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스트로베리가 설명해 주는 결혼의 장점에 길드원들은 역시나 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주현은 오히려 솔깃해졌다.
[길드] 단공 : 어차피 반지 자리에 커플링 끼는 사람 없지 않음?
[길드] 단공 : 아바타 쪽으로 옮겨줄만도 한데
[길드] westone : 음..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
[길드] westone : 최근에 한분 보긴 했는데..
[길드] 단공 : 설마 민채 너냐?
서쪽이 준 힌트 하나만으로 단공은 범인을 쉽게 유추해 냈다. 커플링의 능력치는 경험치를 더 받는 게 전부였다. 전투에는 사용할 수 없는 인벤토리 보관용 아이템이었다.
[길드] blueberry : 블랙님 결혼식 언제 해요?
[길드] 블랙 : 어스름님까지 오시면 하려고요
[길드] blueberry : 길마님 기절하겠네 ㅋㅋ
[길드] blueberry : 부르고 올게요
블루베리가 그렇게 말을 남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스름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어스름은 오자마자 주현에게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단공이나 어스름이나 채하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건 여전했다.
길드원이 얼추 다 접속했다고 판단한 주현은 결혼식 아이템을 사용하고 식장으로 신전을 골랐다. 옷도 채하와 맞추어 직업 아바타를 착용했다. 오래간만에 꺼내입은 갑옷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쪽을 선두로 길드원들이 하나둘 신전에 입장했다.
[전체] westone : 와 ㅋ 만반의 준비를 하셨네요
[전체] 단공 : 컨셉 제대론데?
[전체] 레아 : 진짜 예뻐요
채예스에 위치한 리라의 신전은 벨페고르의 습격을 받고 복구 작업에 들어간 상태지만, 결혼 아이템을 사용하여 볼 수 있는 신전의 풍경은 그와 달랐다. 리라의 힘이 강했을 시절인지 신전의 벽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주현과 채하 캐릭터 앞에 놓인 리라의 석상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시작된 결혼식은 거창할 게 없었다. 서쪽의 말대로 커플 시스템에 과몰입한 유저들만이 밟는 예식이었기에 생각보다도 더 빈약했다. 캐릭터가 마주 보더니 이제는 결혼반지가 된 커플링을 서로의 손에 끼워 주는 게 전부였다.
[전체] westone : 아스모데우스 구출 컷신이 더 정성스러운데요?
[전체]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블랙님이 가장 먼저 결혼하다니 ㅠㅠ
[전체] strawberry : 진짜 결혼한 것도 아니신데요
[전체] westone : 밍채님 집념이면 진짜로도 하실 것 같아요
[전체]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단공 : 블랙님 이제 이혼합시다
다들 서쪽의 말이 장난인 줄 알고 웃고 넘겼지만, 채하는 정말로 언젠가 주현과 서류상으로 엮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지금도 겨우 게임 결혼식인데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혼 아이템 사용 한 번이면 모든 게 지워지는 관계인데도.
주현은 한쪽 팔을 괴고 남은 손으로 아직 촉촉한 채하의 머리카락을 툭 건드렸다.
“좋아?”
“네.”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만 보아도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주현은 제가 채하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닉네임 바꿀까? 앞에 밍채 붙여 달라며.”
토라진 채하가 한참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줄 게 있다는 주현의 말에 돌아와, 주현의 닉네임 앞에 제 닉네임을 넣어 달라고 뻔뻔한 요구를 했다. 주현의 닉네임이 30만 원이라고 서쪽이 일러준 덕분에 닉네임 변경은 무산되었다.
주현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그때와 달리 채하가 이렇게라도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면 제가 가진 것을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채하가 눈이 커진 상태로 주현을 응시했다. 어째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던 때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아뇨.”
“왜?”
“형이 계속 데리고 살아 준다고 했으니까…….”
“살아 주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거지.”
“네.”
주현은 채하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힐을 주는 게 짜증 나서 숟가락을 던졌는데 현실에선 더하지 않을까 싶었다. 채하는 제가 일방적인 약속을 받아 낸 줄 알지만, 주현으로선 거저먹은 거나 다름없었다.
주현은 제가 사랑하는 것 중 가장 어여쁘고 막무가내인 임채하를 바라보았다.
“너 졸업하면 같이 살까?”
볼 때마다 건드리고 싶은 하얀 뺨을 주현의 손가락이 쿡 찔렀다.
“아뇨.”
냉큼 알겠다고 긍정할 줄 알았다. 돌아오는 거절에 주현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삐걱대며 입술을 다물었다. 채하를 서운하게 만든 게 있었나 싶어서 최근의 일을 떠올렸지만 짚이는 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왜 거절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같이 살아요.”
“아, 뭐야. 싫다는 줄 알았잖아…….”
“제가 왜요?”
이어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주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채하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가족도 쉽게 만지지 못하는 곱상한 얼굴이 주현의 손길을 따라 뭉개졌다.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그렇게 한참을 둘만의 세상에서 시시덕대다가 정신을 차리면 모니터 화면에는 파티 초대가 도착해 있었다. 채하가 수락하는 걸 확인하고 주현도 덩달아 파티에 입장했다.
[파티] 단공 : 머임? 왜케 늦음
[파티] westone : 신혼여행 다녀오셨대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블랙 : 이거 무슨 파티예요?
[파티] westone : 두분 결혼 기념으로 루시퍼 잡으러 가요
[파티] 블랙 : ㅅㅂ 갑자기요?
[파티] westone : 두분 첫 레이드가 루시퍼였어요 기억 안 나세요?
워낙 강렬했던 일이라 기억이야 선명했다. 도와주겠다고 온 서쪽은 다짜고짜 채하에게 딜 내기를 제안하더니 깔끔하게 졌다. 덕분에 주현이 채하와 게임 커플이 될 수 있었다. 그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져준 서쪽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너 그때 졌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왜 져요?”
“…그래. 자신이 있었구나.”
서쪽의 제안이 채하에겐 정당하게 주현을 데려갈 기회였다. 태연하게 되묻는 채하에, 커플 성사는 랭크전에서 주현이 말장난을 던졌을 때부터 정해진 미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파티] 어스름 : 루시퍼가 첫 레이드예요? 밍채가 힘든거 시켰네...
[파티] westone : 블랙님이 살려달라고 저랑 월월님 부르셨거든요
[파티] 블랙 : 아니..
[파티] westone : 그래서 제가 밍채님이랑 딜빵 떴는데 졌어요 ^^..
[파티] 단공 : 못 살리셨구나........
[파티] 단공 : 그때 살렸다면......
[파티] blueberry : 그래도 니 자리는 아님
[파티] 밍채 : 유부남 건드리지 마세요
[파티] 단공 : ㅆㅂ 미안하다;;;;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블랙 : 죄송합니다..
방금 막 게임에서 유부남이 된 주현이 채하를 닮은 파란색 키보드를 두드렸다. 약지에선 여전히 함께 맞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랜선 교체! 끝>
* 각주 모음
[1] 길드 포인트.
[2] 여자에 미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