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11. 해답 (2) (11/13)

랜선 교체! 4권

지은이: 토라미

목차

11. 해답 (2)

외전 1. 블루 셀레스트

외전 2. 청혼

11. 해답 (2)

가장 인기가 많은 롤러코스터엔 예약을 걸어 두고, 한 번에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바이킹부터 노렸다. 대기 줄이 운 좋게 바로 앞에서 끊겼고, 주현은 다음 차례에 채하를 끌고 맨 뒷자리로 향했다. 착석하고 안전바가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혹시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채하의 안색을 살폈다.

놀이기구 못 탄다고 한 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지만, 정말로 못 타는 거면 큰일이었다. 주현이 옆으로 몸을 틀자, 계속 주현을 쳐다보고 있던 채하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형, 손잡아 주시게요?”

주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제자리로 옮겼다. 이윽고 바이킹이 출발하여 세찬 바람과 함께 앞뒤로 흔들렸다. 주현의 예상대로 채하는 놀이기구를 잘 탔다. 바이킹이 올라갈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처럼 즐기는 건 아니었다만, 앞을 멀뚱멀뚱 응시하다가 무서운 척 연기하며 몇 번씩 주현의 귀에 입술을 붙여 귓속말을 시도했다.

롤러코스터 시간까지 다른 놀이기구를 즐겨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제약이 많았다. 탑승객의 안전을 위해서 키와 몸무게를 제한하는데, 여기서 채하의 키가 걸림돌이 되었다. 놀이기구는 190cm까지 탑승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채하가 신체검사 때 190cm가 나왔으니 괜찮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으니 주현은 채하를 끌고 걸음을 돌렸다.

제한 없이 탈 수 있는 놀이기구야 널렸다. 비교적 줄이 짧은 낯선 놀이기구를 몇 개 더 타고 나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잠시 벤치에 앉았다.

“형, 뭐 마실래요?”

“……어, 너 뭐 마실래?”

기념일보단 한산한 편이었지만 사람이 몰리는 곳이니 정신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혼이 빠진 얼굴로 되묻자 채하가 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형, 겨울에도 아이스 마셔요?”

“어, 맞아.”

“여기서 기다려요.”

그 말을 남기고 인파 속으로 합류했다. 사람 사이에 섞이는 걸 어지간히 싫어하는 채하가 스스로 뛰어든 걸 지켜보며 주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주현은 채하가 사라진 자리에 시선을 두며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했다. 채하와의 관계에서 게임을 지우더라도 계속 만나고 싶은지 궁금했다. 온종일 머리로 고민하는 것보단 직접 부딪혀 보는 게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주현이 내린 답은…….

“저기요.”

“네?”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현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깨어났다.

“형.”

상대방의 어깨 너머에선 두 개의 컵을 들고 다가오는 채하가 있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앞에 서 있던 사람도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바이킹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아, 입구 쪽에 있었는데 못 보셨어요?”

“놓쳤나 봐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반대 방향으로 가길래 붙잡으려다가 다가온 그림자에 주현은 손부터 뻗었다.

“사람 많았지?”

“네.”

보통은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니었다고 부담감을 덜어 주는 말을 하지 않나? 채하에게 사회성을 기대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채하는 들고 있던 컵 중 하나를 주현에게 내밀었다. 컵의 겉면이 불투명한 하얀색이어서 내용물이 뭔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계속 초콜릿아이스크림만 키울 거야?”

주현은 채하가 사 온 아이스 초코를 마시면서 물었다. 멀쩡한 본캐가 있는데 계속 부캐에만 머물러 있는 건 시간이 아까웠다. 주현처럼 길드에 문제가 있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레이드 나오기 전까지이요.”

“아, 그렇지. 곧 나오려나?”

악마 레이드는 이렇다 할 주기가 없었다. 콘텐츠가 떨어졌다 싶을 때나 유저들에게 욕을 왕창 얻어먹는 일이 있을 때, 유저들의 원성을 막기 위해서 내는 비장의 무기였다.

첫 번째 악마인 루시퍼가 업데이트되던 날, 길드원들은 들뜬 반응이었지만 주현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캐릭터 스펙은 충분히 입장이 가능했으나 폐만 끼칠 게 뻔해서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었다. 그랬던 주현이 이제는 레이드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파티 안 구했죠.”

“평온이랑 같이하자고?”

“아뇨.”

“그럼?”

채하는 잠시 생각하는지 말이 없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능청스럽게 웃었다.

“때 되면 얘기해 드릴게요.”

파티원은 보나 마나 단공, 블루베리, 어스름일 텐데 비밀스럽게 구는 채하에 기가 막혔다. 확실히 아스모데우스 때 평온 길드원과 함께했던 레이드는 유쾌했으니 주현도 나쁠 건 없었다.

“그래.”

벤치에서 잠깐 숨을 돌린 둘은 롤러코스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놀이공원에는 롤러코스터가 두 종류였는데, 학생 때 탔던 기억을 떠올려 더 괜찮은 쪽에 예약을 걸어 두었다. 예약한 롤러코스터로 가던 길에 다른 롤러코스터를 보게 되었다. 신장 제한이 있다는 안내판에 주현은 안도했다. 기다렸다가 또 못 탈 뻔했다.

게임에서 채하가 190cm라고 했을 때는 거짓말이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날의 주현은 어리석었다. 당시에는 나이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채하가 말하는 키는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주현은 지금 동행인의 거대한 키 탓에 행동반경의 제한을 받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머리띠는 잠시 보관함에 넣어 두고 둘은 나란히 열차에 올라탔다. 내려오는 안전바에 시선을 두는데 손가락에 온기가 걸렸다. 헛웃음 지으며 옆을 돌아보자 이제는 무서워하는 척 연기조차 하지 않는 낯 두꺼운 임채하가 있었다.

어정쩡하게 손가락끼리 얽힌 채로 롤러코스터가 출발했다. 끼긱거리며 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열차에 주현은 정면을 한 번, 옆에 있는 채하를 한 번 힐끔 쳐다봤다. 왠지 이 상태로 하강했다간 누구 하나 다칠 것 같아서 손을 마주 잡자, 채하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뭐야.”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열차가 바람을 가르며 낙하했다. 주현은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이어서 공중을 시원하게 한 바퀴 돈 열차는 다시 레일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날이 풀리지 않은 날씨에 타서 그런지 바람에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다. 옆에 앉은 채하를 확인하자, 주현이 바라봐 주기만을 기다리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살면서 놀이기구 타는 거로 밀려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멀쩡한 채하를 보니 주현은 잘 타는 편이 아닌 듯했다.

열차가 또 한 번 재빠르게 하강하고 그렇게 운행이 끝이 났다. 기다리는 게 2시간, 타는 게 5분. 인기 많은 대다수 놀이기구가 그랬다.

슬슬 퍼레이드가 시작할 것 같아서 채하를 끌고 다시 벤치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놀이공원 조형물이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여졌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주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채하는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주현의 앞은 퍼레이드 행렬을 기다리며 미리 자리를 잡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인파에 휩쓸리는 것보단 뒤에서 여유롭게 구경하는 걸 선호하는 주현은 계속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채하보다 키가 큰 사람은 드물 테니 시야 확보는 어렵지 않을 테다. 주현은 채하만큼 큰 키는 아니었지만, 주현보다 작은 사람은 널렸으니 괜찮았다.

채하는 어디로 간 건지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주현은 기나긴 퍼레이드 행렬을 바라보며 채하가 왜 놀이공원에 오자고 했을까 의도를 궁리했다. 놀이기구가 타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퍼레이드 때 자리를 비운 걸 보았을 때 이쪽 용건도 아닌 듯했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텐데 왜 놀이공원이었을까? 그렇게 골똘히 고민하던 차에 채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주현은 혼돈의 설화에서 성기사가 되어 나타났던 채하를 떠올렸다. 주현이 좋아하는 온갖 것을 모아 온 채하를. 지금도 별반 다를 거 없는 모습이었다. 두 손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어김없는 초콜릿 맛의 등장에 주현은 피부가 팽팽하게 느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채하야.”

채하가 아는 주현이 좋아하는 것들. 게임 닉네임처럼 어둑한 하늘, 캐릭터 닉네임을 지을 때 사용하는 오만 색상으로 물든 놀이공원, 그리고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주현은 비로소 확신했다.

“우리 만날래?”

“네.”

채하는 언제나처럼 대답이 재빨랐다. 뭔 말인지 듣고 긍정을 하는 걸까. 주현이 채하를 의심하는 사이, 채하는 덤덤한 얼굴이지만 긴장한 기색이 확연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 생일이에요.”

생일로 느껴질 만큼 기쁘다는 걸까, 정말 생일이라는 걸까. 흔들리는 주현의 눈동자를 발견한 채하는 가볍게 웃었다.

“진짠데.”

“아냐. 믿었어.”

“그만큼 기쁘단 말도 맞아요.”

주현은 채하의 얼굴을 뜯어봤다. 눈꺼풀이 사뿐히 접히고, 볼이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래. 주현은 임채하가 좋았다.

* * *

차로 돌아가는 길에 정말로 생일이냐고 물으니 채하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2월 29일. 올해 2월은 28일까지 있으므로 정확하겐 채하의 생일이 없는 해였다. 얘는 뭔데 생일까지 이렇게 특별할까. 주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신분증을 돌려줬다.

29일이 없으니 어쨌건 오늘이 생일인 셈인데, 초를 불지 않고 넘어가기엔 아쉬울 듯해 주현은 제과점에 들러 1호 크기의 케이크를 하나 구매했다. 주현이 채하와 만난 건 점심이니, 아침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겠다만 그래도 한 번 더 축하해 주고 싶었다.

“여기가 집이야?”

“네.”

차가 있으니 주차장이 필요할 테고, 협소한 공간에서 살 것 같진 않았는데 집이 생각보다 더 좋았다. 지인 할인이니 하면서 아이템 값을 깎아 줄 때가 아니었다. 주현은 케이크 상자를 든 채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가족들이랑은 언제 만나?”

“주말에요.”

가족들도 채하 같은 성격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가족한테 사랑받고 자란 임채하라니, 상상이 안 갔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채하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주현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연 채하가 비켜서며 케이크 상자를 가져가고, 주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채하의 집에 입성했다.

“형, 여기 앉아요.”

채하가 식탁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 두며 의자를 뒤로 끌어냈다.

“어, 그래. 초 붙여도 돼?”

“네.”

방 안에 연기가 차는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했다. 주현은 숫자 초 2와 4를 가지런하게 케이크 시트에 꽂아 두고 성냥으로 불을 피웠다. 초에 불을 옮기면서 노래도 불러줘야 하나 슬쩍 채하의 눈치를 봤는데, 시선이 부딪히자 채하가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노래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채하가 눈을 뜨고 볼을 부풀려 불을 껐다.

“생일 축하해, 채하야.”

미소 짓는 주현을 따라 채하의 뺨이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리본 머리띠라도 씌워 줄 걸 그랬나. 고깔모자 없이 머리가 휑한 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주현의 생일에는 머리에 거추장스러운 장식 따위 하지 않았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형, 자고 가요.”

휴대폰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채하가 팔을 붙잡았다.

“옷이 없어서.”

“제 거 빌려 드릴게요.”

“……혼설도 켜 두고 와서.”

“…….”

“다음에 또 올게.”

일부러 거절하려고 한 건 아닌데 집을 비웠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마음에 걸렸다. 왠지 변명처럼 들리는 말들이 이어지자 채하도 포기하고 팔을 놓아주었다.

“집 앞까지 같이 가요.”

“됐어. 금방 가는데.”

주현은 케이크에서 숫자 초를 뽑아내고 다시 상자를 조립했다.

“지금 안 먹을 거지?”

“내일 형이랑 같이 먹을게요.”

그 말은 당장 내일도 놀러 오라는 뜻이었다. 주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귀갓길엔 채하도 함께였다.

* * *

[채하] (사진)

[채하] (사진)

[채하] (사진)

[채하] (사진)

컴퓨터를 켜려던 중 채하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채하가 보낸 건 놀이공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다시 봐도 제 얼굴이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주현은 사진을 갤러리에 저장했다. 굳어 있는 인간을 뒤로하고 채하의 얼굴을 확대해 보았다. 이렇게 생겼는데 프로필 사진 한 장 걸어 두지 않은 게 희한했다.

귀여워서 어디에다가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프로필 사진을 해 볼까 하다가도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는 채하의 자세가 수상하게 느껴져서 관뒀다. 채하가 자신을 좋아한단 걸 알고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탓도 있었다.

아쉬운 대로 주현은 제 얼굴만 잘라서 프로필 사진에 걸어 두었다.

[김경찬] 우웩

[김경찬] 뭐임?

몇 년간 비어 있던 프로필을 오랜만에 업데이트한 건데 바로 반응이 왔다. 개강까지 하루를 앞두고 또 술을 퍼마시고 있을 경찬이었다. 경찬의 프로필 사진은 여백 없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부담스러워서 답 없이 대화방을 나왔다.

[채하] 형

[채하] 사진 내려요

[윤주현] 안 그래도 그러려고

[윤주현] 니가 봐도 이상하지?

프로필 사진을 지우고 배경을 밤에 찍었던 놀이공원으로 채웠다. 그사이 채하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채하] 아뇨 귀여워요

귀여운데 왜 내리래. 주현은 휴대폰을 보며 바람 빠지게 웃었다.

얼마 후, 경찬에게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여자 친구가 생겼느냐고 묻길래 읽고 씹었다. 혼자서 결론을 내린 경찬은 배신자라는 말을 남겨 놓았고, 그것 역시 무시해 버렸다. 주현은 갈아입을 옷 몇 가지와 노트북을 챙겨 채하의 집으로 향했다.

“형.”

“어, 안녕. 들어갈게.”

주현이 초인종을 누르자 채하가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컴퓨터 있어요.”

채하가 바리바리 싸 온 주현의 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나 아니야?”

“전 노트북으로 하면 돼요.”

“나도 노트북으로 하면 되는데.”

집주인을 밀어내고 하나뿐인 컴퓨터를 차지하는 건 양심이 아팠다. 주현은 노트북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다가 채하가 미리 준비해 둔 공간을 발견했다. 어제 보았던 컴퓨터 옆에 채하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하나였던 의자도 두 개가 되었다. 이래서 같은 취미를 가지면 여러모로 편했다.

채하의 노트북 화면에는 이미 채예스 광장이 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컴퓨터를 차지하는 건 주현의 몫이 될 듯싶었다.

“형, 어차피 업데이트해야 해요.”

노트북에도 혼돈의 설화를 설치해 두긴 했으나 주로 컴퓨터로 접속하기에 업데이트가 밀려 있었다. 주현은 순순히 컴퓨터 앞에 자리하고 게임에 로그인했다.

“벨제불 나온다던데.”

“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채하가 접시에 케이크를 담아 돌아왔다.

여섯 번째 악마, <식탐의 벨제불>. 홈페이지를 장식한 광고를 보며 아껴 두던 휴가를 사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캐릭터 선택 창으로 이동한 주현은 초콜릿아이스크림으로 접속한 채하를 따라서 아메싫어를 택했다.

“오늘 강화를 해 봐야겠다.”

“형, 재료 필요해요?”

“괜찮아. 나 골드 많아.”

또 재료를 준다고 할까 봐 먼저 선을 그었다. 그러자 작은 케이크 조각이 꽂힌 포크가 입 앞으로 내밀어졌다. 주현은 케이크를 받아먹으며 ‘컬러칩’에 길드 가입 신청을 넣었다. 채하의 캐릭터인 초콜릿아이스크림 머리 위에는 평온이 아닌 컬러칩이 자리하고 있었다.

컬러칩을 두고 신혼집이 뭐니 채하가 헛소리했던 게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그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주현이 제 발로 컬러칩에 들어가는 날이 왔다.

“이거로 들어왔으니까 한 판 하고 본캐 가자.”

“네.”

채하가 또다시 포크를 들이미는 동안 주현은 파티를 만들고 방을 개설했다. 채하가 대기실에 입장하는 걸 바라보며 포크를 무는데, 합류한 파티원의 닉네임에 놀라서 컥 기침했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아메싫어 : 뭐예요?

[파티] westone : 와 ㅋ 월월님 제 말 맞죠

[파티] westone : 블랙님 살림 차려서 안 돌아오는 거라고 ㅡㅡ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하시네염

[파티] 아메싫어 : 어떻게 알아요

파티장은 주현이었다. 방을 클릭하면 파티원의 닉네임을 확인할 수 있기야 하지만 우연히 발견하여 들어온 뉘앙스가 아니었다.

[파티] westone : 사사게에 올라갔는데 어떻게 몰라요 ㅋㅋㅋㅋ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대련을 걸었다길래

[파티] westone : 그럼 아메싫어는 블랙님이겠다 한 거죠

길드원이 사건에 휘말렸다고 연대해 줄 채하가 아니었다. 완벽히 추리해 낸 서쪽에 주현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동안 바쁜 척했던 게 부끄러웠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주현도 서쪽이 갑자기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다면 서운했을 것이다.

[파티] 아메싫어 : 죄송해요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파티] westone : 아니에요 ㅋㅋ 같은 무기 스트레이트는 열받죠 ㅡㅡ

“스트레이트?”

“길드원 중에 있어서.”

재앙 소속이 아니니 코쿄아가 무기를 스트레이트로 강화했단 걸 모르는 채하에게 간략히 설명을 해 주었다.

[파티] 아메싫어 : 사람 안 모이는데 파티 깨도 될까요?

[파티] 월월월 : 저희가 싫은 건가염 ㅠㅠ?

[파티] 아메싫어 : 아뇨.. 본캐 무기 강화하려고요

[파티] westone : 아 얼른 깨세요 ㅡㅡ

[파티] 아메싫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평소 같았으면 이대로 출발하자고 했을 서쪽도 주현을 부추겼다. 주현이 블랙으로 다시 접속하자, 채하도 밍채로 캐릭터를 옮겼다. 동시에 떠오른 로그인 알림에 단공이 소름 끼친다는 반응을 보였다. 채하가 바로 옆에 있으니 의도치 않게 평온의 길드 채팅을 엿보게 되었다.

[길드] 신사 : 블랙님 오랜만인듯 ㅋㅋ

[길드] 코쿄아 : 맞아여 ㅋㅋㅋㅋ 어서오세여 ㅎ

만만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리웠을 테다. 코쿄아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해 줬을 신사도 이제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코쿄아가 남자길래 성별을 따지지 않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만, 다 착각이었다.

부족한 재료를 바로 구매할 수 있게끔 자리를 거래소 앞으로 옮겼다. 주현의 캐릭터를 채하와 서쪽, 월월월이 뒤따랐다. 주현은 오늘도 잊지 않고 최고급 보호석을 넣은 채 강화 버튼을 눌렀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최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8 어둠이 깃든 대검]

역시나 실패였다.

[전체] westone : 생각해보니까 아까 블랙님 커마 밍채님 같네요

[전체] 월월월 : 맞아염

[전체] 월월월 : 두분 반대였어염 ㅋㅋㅋㅋ

[전체] westone :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둘의 부캐 커스터마이징은 초창기 서로의 모습과 유사했다. 주현은 웬일로 서쪽의 말에 공감했다. 채하는 주현을, 주현은 채하를 따라 했으니 서로 닮은 게 맞았다. 주현은 가볍게 웃고 다시 강화 버튼을 눌렀다. 또 터졌다.

“형, 제가 눌러 봐도 돼요?”

“어.”

그런다고 붙진 않겠지만 채하에게 마우스를 밀어주고 대신 손에 포크를 쥐었다. 채하가 강화 버튼을 누를 때, 주현은 채하에게 케이크를 꽂은 포크를 내밀었다.

“어, 어, 어, 어, 뭐야.”

포크를 쥐지 않은 손으로 채하의 팔을 붙잡았다. 주현은 오류가 난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화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사라지는 강화 성공 이펙트 탓이었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9 어둠이 깃든 대검]

주현은 숨도 못 쉬고 헐떡이는데 채하는 덤덤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화 버튼을 눌렀다. 이어서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주현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20 어둠이 깃든 대검]

“영상 찍어. 영상.”

“네.”

포크를 접시에 내려 두고 허둥지둥하자, 채하가 재빠르게 팔을 뻗어 키보드 키를 눌렀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지나간 장면도 녹화해 저장할 수 있었다. 보여 줄 사람은 딱히 없지만, 스크린 샷과 영상으로 몇 번씩이나 기록해 두었다.

스트레이트 강화는 장비에 큰 욕심 없는 주현도 들뜨게 하는 드문 순간이었다.

[전체] westone : ? 블랙님 20강 되셨네요

[전체] 블랙 : 네..

[전체] 블랙 : 스트레이트로 갔어요

[전체] 월월월 : ????????????????

[전체] westone : ???헐 블랙님도 장성한 아들이었네요 ㅡㅡ

[전체] westone : 완전 축하드려요 ㅡㅡ

[전체]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강 축하드려염

주현은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했다. 낮은 강화 단계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19강과 20강이라니. 눈알을 굴려 채하의 캐릭터 장비를 훑어봤다. 저 중에서 쉽게 강화한 게 몇이나 될까.

“저도 처음이에요.”

“아, 그래?”

시선을 눈치챈 채하가 곧바로 해명했다. 하긴 주현이 보았던 채하의 강화는 그렇게 순조롭지 않았다. 천장을 찍어 강화 성공 확률이 100%가 되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 강화는 고생해서 했는데, 대리 강화에서 스트레이트라니. 주현이 채하였으면 부러워서 잠을 못 잤을 텐데, 채하는 그런 기색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전체] westone : 저희도 이제 무기 20강 파티 만들어요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파티 모집 때마다 스펙 제한을 걸던 코쿄아를 벼르고 있던 서쪽이 제안했다.

[전체]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체] 블랙 : 아..

[전체] westone : 강화하세요 ㅡㅡ

우는 월월월의 장비 창을 열어 보자 아직 무기가 17강에 머물러 있었다. 강화 실패 스택도 7번이나 쌓여 있는 게, 남 일 같지 않아서 월월월이 안쓰러워졌다.

주현은 아웅다웅하는 서쪽과 월월월을 뒤로 하고 창을 내려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영상부터 찾아 나섰다. 게임 인생에서 다신 없을 역사적인 순간이 잘 기록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여기 있어요.”

채하가 팔을 뻗어 마우스를 쥔 주현의 손 위를 덮쳤다. 마우스와 함께 손이 쭉 끌려갔다. 폴더를 찾아 준 후 채하는 다시 노트북으로 눈을 돌렸다. 주현도 움짤 생성에 집중했다. 커뮤니티에 올려서 자랑한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고 개인 소장이 하고 싶었다. 물론 원본 동영상도 같이 가져갈 거였다.

18강에서 20강으로 넘어가는 기적적인 순간을 움짤로 담아 낸 후 돌아오자 길드 채팅이 소란스러웠다.

[길드] 레아 : 허얼 블랙님 무기 뭐예요?!

[길드] 레아 : 언제 20강 가셨어요???

[길드] westone : 방금 스트레이트로 19 20 바로 넘기셨어요

[길드] 잔혹동화 : 와 운 대박이다

[길드] 레아 : 우와 축하드려요!!!!

[길드] 암흑기사 : 올 ㅋㅋㅋ 블랙님 로또 사야겠네요 ㅋ

로또를 사야 하는 건 주현이 아니라 채하였다. 주현이 한 거라곤 앞에서 강화를 터뜨려 확률을 높여 둔 것뿐이었다. 꽤 쌓여 있는 길드 채팅을 즐겁게 읽으며 마우스 휠을 내렸다.

[길드] 코쿄아 : 진짜부럽네여 ㅠ 저는 천장 찍었는데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꼬꼬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꼬꼬아 : [+17 어둠이 깃든 대검]

[길드] 꼬꼬아 : ㅠㅠ

[SYSTEM] 길드원 꼬꼬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무기 하나 보여 주겠다고 캐릭터를 바꿔 오는 정성에 주현은 말을 잃었다.

코쿄아의 무기는 그새 한 단계가 더 올라 있었다. 13강에서 스트레이트로 16강까지 간 건 잊었는지 고작 한 번 천장 찍었다고 슬퍼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넘어가고 말았을 행동들이 코쿄아여서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주현은 코쿄아가 이후 강화에서도 매번 천장을 찍길 간절히 기도했다.

[길드] 신사 : 흠

[길드] 신사 : 강화 잘된건 좋은 일인데 ㅋㅋㅋ

[길드] 신사 : 코쿄아님처럼 천장 찍는분들도 많고 하니까

[길드] 신사 : 자랑은 하지 맙시다 ㅋ

주현은 한껏 억울해졌다. 먼저 자랑을 한 건 코쿄아였다. 하지만 길드 마스터인 신사처럼 고지식한 놈한테 설명해 봤자 달라질 건 없어서 말을 말았다. 한 번 더 마우스 휠을 내렸다. 주현과 같은 생각을 한 서쪽이 신사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여 놓았다.

[길드] westone : 길드에 자랑 안 된다는 규칙은 없는데요?

[길드] 신사 : 규칙이 필요한게 아니라....ㅋ

[길드] 신사 : 기본적인 배려죠 ㅎㅎ

[길드] 신사 : 웨스트님 천장 찍었는데 같은 무기가 스트레이트로 강화했다고 바로 자랑하면 좋음?

[길드] westone : 블랙님이 언제 자랑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말을 전한 건 전데요

[길드] 암흑기사 : 왜싸움 ㅋㅋㅋ 좋은 일인데 걍 같이 기뻐해주면 되지

팽팽한 대립에 구경하던 암흑기사가 서쪽의 편을 들었다. 늘 신사와 붙어 다녀서 서쪽을 이상하다고 몰아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원래는 암흑기사처럼 상황을 따져 판단하는 게 보통의 경우이지만, 요즘은 무작정 우기고 보는 신사와 코쿄아 같은 사람만 만나서 그런지 암흑기사가 도리어 신기해 보였다.

[길드] 마우스지키미 : 블랙님 강화로 고생하던데 ㅊㅋ

[길드] 사멍꾼 : 축하드려요 ㅎㅎ

고집부리는 것도 한두 번만 통했다. 길드원 여론은 서쪽과 주현의 편이었다. 주현과 친하다거나, 코쿄아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닌 오로지 본인들의 판단이었다. 모든 사람이 신사와 코쿄아처럼 편파적이지는 않았다. 서쪽과 주현이 길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 벨제불 대비해서 강화하신건가?

[길드] 블랙 : 네

[길드] 암흑기사 : 파티 정함? 같이하실?

[길드] westone : 밍채님이랑 하시겠죠

[길드] 코쿄아 : 밍채님 저한테 벨제불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소리일까. 서쪽의 예상대로 채하와 파티를 꾸릴 예정이라 적당한 거절의 말을 고르고 있다가, 코쿄아의 채팅에 황당해져 키보드 위에서 손이 멈췄다. 채하는 코쿄아와 대련까지 했으니, 코쿄아와 제 사이가 나쁘단 걸 알 텐데 왜 그런 모험을 자처한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주현은 곧장 채하를 불렀다.

“채하야.”

“네.”

채하는 노트북 자판으로 채팅을 치는 데에 열중이었다. 뭘 하고 있는지 힐끔 훔쳐보자, 이번에는 신사에게 파티 제안을 하고 있었다. 왠지 옆에 있던 채하의 캐릭터가 사라졌더라니. 평온 채널에 간 줄 알았는데 광장에서 신사와 코쿄아를 섭외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길드 채팅으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채하는 코쿄아에게 파티를 제안했을 걸 상상하니 섭섭해졌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때는 언제고 이럴 때만 한눈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파티하려고요.”

“…….”

뺨에 꽂히는 열렬한 시선을 느낀 채하가 통보하듯 말했다. 그에 주현은 평온 길드와의 파티일 줄 알고 제대로 캐묻지 않았던 과거가 한탄스러워졌다. 이래서 속단은 안 되는 거다.

사람이 싫다는 이유로 파티 안 하겠다고 우기는 것도 웃긴 일이라 주현은 그대로 침묵했다.

[전체] 신사 : 밍채님 힐 제대로 할거임?

[전체] 밍채 : 네

광장으로 자리를 옮기니 신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채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채하가 게임에서 가장 싫어하는 유저가 신사라고 확신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지금껏 보았던 모습과 다른 채하에 당황스러워졌다. 채하와 급격하게 거리가 멀어진 기분이었다.

[귓속말] westone : ㅁㅊ 밍채님 머리에 총 맞으셨대요?

[귓속말] westone : 지금 블랙님을 저런 파티에 넣겠다고요?

[전체] 신사 : 그렇다면 난 오케이 ㅋ

[전체] 신사 : 나머지 파티원은?

[전체] 밍채 : westone님이랑 월월월님 하고

[전체] 월월월 : ??????

[귓속말] westone : 밍채님 진짜 뭐 하는 거예요?

[귓속말] westone : 혹시 뭐 걸고 내기하는 건가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저도 몰라요..

사전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하의 독단적인 결정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서쪽이나 월월월은 원래도 주현과 함께 파티를 맺으니 일정이 꼬이거나 한 건 아니다만, 신사와 코쿄아의 존재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전체] 밍채 : 레아님

랜덤 매칭 레이드를 끝나고 돌아오는 길인지 레아가 광장에 나타나고 채하에게 지목당했다.

[전체] 레아 : 네?

[전체] 코쿄아 : 레아님은 장비가 좀 글치 않나여 ㅋㅋ

[전체] 밍채 : 나머지 인원은 구해볼게요

[전체] 레아 : ???

코쿄아가 지적했으나 채하는 그러든 말든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막 광장에 온 레아는 상황을 몰라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주현은 레아에게 귓속말로 찬찬히 설명했다.

[귓속말] 레아에게 : 벨제불 파티예요

[귓속말] 레아에게 : 저랑 서쪽님 월월님 코쿄아님 신사님 밍채 가기로 했어요

[귓속말] 레아 : 아 저를요?!

[귓속말] 레아에게 : 네 혹시 선약 있으세요?

[귓속말] 레아 : 아녀 ㅎㅎ 저야 좋아요!!!

일을 벌이는 건 채하였고 수습은 주현의 몫이었다. 강화 때문에 고마웠던 게 조금 전의 일인데 바로 기분이 바닥으로 치달았다.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닌, 약 주고 병 주고. 주현은 그렇게 병을 얻었다.

[전체] 신사 : 이제 보니까 레아님이랑 둘이 닮았네 ㅋㅋ

[전체] 코쿄아 : 레아님이 저 따라했네여

[전체] 코쿄아 : 근데 제 캐릭이 좀 더 이쁜듯

재앙에는 유독 남자 캐릭터가 많아서 여자 캐릭터인 레아와 코쿄아가 눈에 띄는 편이었다. 둘 다 밤색 머리카락이라 그런지 멀리서 보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길드원 몇몇은 둘을 헷갈리기도 했다.

위는 보통의 의견이고 주현의 생각은 달랐다. 전체적인 느낌만 비슷했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차이가 컸다. 레아는 코쿄아보다 머리카락 색이 조금 더 밝았고, 눈동자는 반짝이는 금색이었다. 또 무기는 큼지막한 스태프라서 주현은 둘을 헷갈릴 일이 없었다. 레아가 아바타 염색을 훨씬 잘하기도 했다.

[전체] 신사 : 자매 같음

[전체] 코쿄아 : 제가 동생할래여 ㅋㅋㅋ

[전체] 코쿄아 : 레아님 뭔가 나이 많을것 같아여

[전체] 레아 : 그래요?

주현은 레아보다 코쿄아의 나이가 다섯 살은 많을 거로 예측했다.

[전체] westone : 코쿄아님 몇 살인데요?

[전체] 코쿄아 : 비밀이져 ㅋㅋㅋ

[전체] 신사 : 스물후반 아님?

[전체] 코쿄아 : 맞아여

방금까지 비밀이라고 해 놓고 이제는 또 공개적으로 나이대를 밝혔다. 그리고 주현의 예상대로 레아가 코쿄아보다 어렸다.

[전체] 레아 : 그럼 제가 더 어려요!!!

[전체] 코쿄아 : 레아님 어린척하시네여 ㅋㅋㅋㅋ

[전체] 코쿄아 : 어려보이고 싶은 나이긴 하져

[전체] 코쿄아 : 그래서 커마도 어리게 하시는건가?

뭐 하는 놈이지. 주현은 코쿄아의 채팅을 정독하며 실소했다. 이젠 주변 눈치도 안 보고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전체] 레아 : 제 커마가 별로예요?

[전체] 블랙 : 아뇨 귀여워요

[전체] 밍채 : ?

[전체] 블랙 : ㅅㅂ.. 캐릭터가 귀엽다고

잠자코 있던 채하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주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엽다는 말이 제 소유인 것처럼 구는 채하가 깜찍했다. 채팅을 치다가 문득 채하가 바로 옆에 있단 걸 자각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채하를 마주했다.

“캐릭터가 귀엽잖아.”

“제 캐릭터는요.”

“내가 만들었는데 당연히 네가 제일 귀엽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 * *

진짜로 신사, 코쿄아와 벨제불 파티를 함께 하는 걸까. 레아에게 설명한 건 주현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싶어서 채하를 지켜보았으나 딱히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게임을 하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밤이 되었다. 욕실에서 씻고 나온 주현은 여전히 하나뿐인 침구에 난관에 봉착했다.

“아래에서 잘게.”

“이불 하나예요.”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에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자, 채하가 침대 위 이불을 들치며 올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그 행동이 더더욱 못 미더웠다. 마주한 채하의 입술이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형,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얼른 누우라는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슬금슬금 침대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떨어질 수도 있으니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하길래 주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채하의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불 끌게요.”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이 어두워지고 옆 매트리스가 살짝 눌리며 채하가 다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천장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정이 호기심인지 호감인지 구별도 못 하는 놈에게 긴장했다니. 주현은 헛웃음을 목 안으로 삼켰다.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채하를 훔쳐봤다. 채하는 이미 주현 쪽으로 누워 있었다. 고르게 쉬는 숨에 몸이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무방비해 보여서, 이럴 때면 까칠하게 굴던 과거의 채하가 희미해졌다.

팔을 뻗어 매끈한 뺨을 콕 찔러 보았다. 검지를 따라 볼이 움푹 파였다.

그때 놀이공원에서 주현은 채하를 만날까 하는 고민보다는, 왜 채하여야만 하는지 이유를 찾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귀여웠다. 얼굴이 아니라 하는 행동이. 그렇게 웃어 본 건 오랜만이었다. 막무가내로 굴던 녀석이 때때로 눈치 보는 것도 귀여웠고, 싫어하던 아메리카노를 콕 집어서 가져다주던 녀석이 이제는 주현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순간을 채워 나가려고 노력하는 게 귀여웠다.

주현은 채하에게 또 다른 예외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주현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채하여야만 하는 이유였다.

생각에 잠긴 상태로 채하의 입꼬리를 꾹 눌러 보는데 촘촘한 속눈썹이 번뜩 뜨였다. 소리 내어 놀라기도 전에 얼굴이 불쑥 다가와 입술을 훔쳐 갔다. 쪽, 하고 울리는 마찰음에 몸을 반쯤 일으키자 채하가 와락 껴안는 바람에 다시 침대 위로 눕혀졌다. 주현의 다리 사이로 채하의 무릎이 들어왔다. 갑자기 다가온 위기감에 버둥대자 이번에는 귀에서 쪽 소리가 났다. 주현은 닿는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렸다.

“왜, 왜 이래.”

“형이 먼저 만졌잖아요.”

겨우 볼 한 번 찔러 보고 입꼬리 한 번 눌러 본 건데, 사람을 변태처럼 취급하는 채하에 주현은 억울해졌다. 채하의 무릎 위치가 애매해서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밀어내자, 채하가 주현의 오금을 붙잡았다.

“야, 거긴 왜.”

“……형이 자꾸 만져서.”

환장하겠네. 눈알을 굴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데 한쪽은 벽으로 막혔고, 다른 쪽으로 도망치려면 채하를 밀어내야 했다. 이래서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했던 건가. 가만히 있던 채하를 먼저 만지작거려서 깨워 놓은 건 주현이었지만, 판단력이 흐려진 지금은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쪽. 이번엔 목덜미였다. 왠지 부끄러워서 손으로 가리자, 채하는 그대로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주현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제 위에 올라탄 채하를 살폈다. 잘 자고 있다가 이게 웬 난리인지 알 수 없었다.

시트를 더듬으며 몸을 뒤로 빼자, 종아리가 붙잡힌 채로 다시 쭉 끌려왔다. 채하의 무릎이 고간에 닿을까 무서워서 다시 손바닥으로 무릎뼈를 막아 냈다. 온 힘을 다해 무릎을 막아 내는 노력이 안중에도 없는 채하는 몸을 숙여 주현의 입술을 머금었다. 닿고 떨어지던 때와 달리 부드럽게 빠는데 주현은 소름이 끼쳐서 어깨를 오그렸다.

잠시 입술을 뗀 채하가 내리깐 눈으로 주현의 뒷머리를 매만지며 읊조렸다.

“형, 머리에서 같은 향 나요.”

“그렇겠지. 네 샴푸니까…….”

주현은 팔을 들어 채하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바람 빠지게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주현의 손길을 따라 흐트러졌다. 그렇게 머리카락 끝을 문지르는데 별안간 채하의 손이 나타나 깍지를 꼈다. 주현의 두 손은 할 일이 많아서 바빴다. 한 손은 아직도 다리 사이에서 무릎의 진입을 막았고, 다른 한 손은 채하에게 붙잡혀 있었다.

콧대가 스쳤다. 뒤이어 말랑한 입술이 부딪혔다. 다시 코끝이 스쳤다. 채하가 얼굴을 기울인 탓이었다. 주현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채하의 혀가 들어왔다. 뾰족한 혀가 입천장을 건드렸다. 몸을 흠칫 움츠려도 입 안을 누비는 혀는 꿋꿋했다. 주현도 혀를 움직여 채하를 휘감았다. 그러자 채하가 갑작스럽게 한쪽 허벅지를 움켜쥐며 몸을 바짝 당겨 붙였다.

“잠깐만. 나 출근해야 해.”

깍지 낀 손을 다급히 풀어내고 채하의 얼굴을 붙잡았다.

“제가 뭘요.”

채하는 풀린 눈으로 주현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변명했다.

“……자자.”

이래 놓고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주현은 한 손으론 채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남은 손으론 등을 두드렸다.

“…네.”

스르륵, 채하가 다시 비어 있던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 * *

잠을 설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거면 왜 그만하자고 한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일에도 통 집중을 못 해서 하루가 엉망으로 흘러갔다.

[귓속말] 밍채 : ㅠㅠ

[귓속말] 밍채에게 : 왜

[귓속말] 밍채 : 형이 집에 안 와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ㅅㅂ 거기가 너희 집이지 내 집이냐고

[귓속말] 밍채 : ㅠㅠ

자취방에서 게임을 로그인하니 채하에게서 바로 귓속말이 도착했다. 우는 것으로 통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는지, 잠시 후 이번에는 톡으로 사진이 도착했다. 냉동실을 꽉 채운 초콜릿 맛 콘 아이스크림의 광경에 주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윤주현] 그거 다 먹으면

[윤주현] 이 시려

[채하] 하나씩 먹어요

답장은 저렇게 했어도 기꺼이 채하의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주현은 다시 채하의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채하는 얌전하기만 했다. 잘 땐 여전히 주현을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고, 깨어났을 땐 채하의 팔에 꽉 묶여 있단 것만 뺀다면.

그렇게 여섯 번째 악마 레이드인 <식탐의 벨제불>을 앞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전체] 팥앙굼 : 님

[전체] 팥앙굼 : 메마른땅 어떻게 가요?

채하가 씻는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7채널을 떠돌던 유저가 채하의 캐릭터에게 다가와 질문했다. 채하는 조금 전까지 단공, 블루베리와 대화를 나눴는데 둘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주현은 채하의 노트북 앞으로 의자를 끌고 갔다. 대신 답변해 주는 정도야 채하가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전체] 밍채 : 항구에서 배 타고 가면 돼요

[전체] 팥앙굼 : ㄱㅅㄱㅅ

다시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길드 채팅에 단공이 나타났다.

[길드] 단공 : 밍채 해킹이다

[길드] 어스름 : ?

[길드] 단공 : 뉴비한테 길 설명해주는데요

[길드] blueberry : ?

[길드] 어스름 : 신고해야겠는데...

단공에게 제보받은 어스름은 진지하게 신고를 고민했다.

채하는 어떻게 살아왔길래 뉴비한테 길 설명해 준 거까지 해명해야 할까. 주현은 채하라면 위기에 어떤 식으로 대응을 했을까 고민을 해 보았다. 아무래도 무시했을 것 같다. 주현은 그렇게 단공의 채팅을 못 본 척 넘겨 버렸다.

“형, 뭐 해요?”

쪽, 뺨에 입술이 닿았다가 떼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다가오며 입술에서 쪽 소리가 났다. 그날 이후로 부쩍 스킨십이 늘었다. 머리카락이 아직 촉촉한 채하가 주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길 물어보길래 설명해 줬어. 근데 단공 님이 의심을 해서…….”

“무시해요.”

안 그래도 못 본 척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현은 안심하고 의자 바퀴를 밀어 컴퓨터 앞으로 돌아갔다. 잠시 옆으로 치워 두었던 채하 몫의 의자도 원상복구 시켜 놓았다.

“나도 씻어야겠다.”

그렇게 자리를 비운 주현이 다시 돌아왔을 땐, 채하는 게임 창을 내려 두고 리포트를 작성 중이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니 함께 조별 과제를 했을 적이 생각나기도 하고, 학교를 빼먹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지난날이 우스워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학생이라고 하기에 의심되는 점이 꽤 있었는데, 그걸 다 덮어 두고 채하와 잘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때때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계속 속일 수 있었을 텐데도 정체를 밝힌 채하가 기특해졌다.

주현은 의자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채하의 손가락을 구경했다. 주현도 남자애들 사이에선 하얀 편에 속했지만, 채하는 햇빛을 안 보고 살았는지 창백하단 감상에 가까웠다.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뼈가 도드라진 무릎, 팔과 마찬가지로 하얀 종아리, 마지막으로 좁은 발볼에 신발 고르기 편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넌 어떻게 발까지 예쁘냐.”

주현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시선을 아래에 둔 주현의 빽빽한 정수리를 바라보며 채하가 물었다.

“해 볼래요?”

내가 뭔 말을 했더라. 돌아오는 대답이 이상해서 기억을 복구하는 사이, 채하의 몸이 불쑥 다가왔다.

“잠깐만, 뭘 해 보는데?”

“다요.”

허리를 감싸 안더니 무 뽑듯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놀라서 발을 버둥거리자 채하의 한쪽 팔이 허벅지를 붙들어 균형을 맞췄다. 떨어질까 무서워서 목을 꽉 끌어안자, 손이 슬금슬금 반바지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형이 꼬셨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언젠가 한 번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밍채가 채하라는 걸 알게 되고, 채하가 뻔뻔한 얼굴로 형이 먼저 꼬드겼다고 억지를 부렸을 때였다. 주현은 그때보다 더 억울한 심정으로 소리쳤다.

“미친 거 아니야?”

“형, 어린이 보험은 30세까지 가입할 수 있대요.”

“……여기서 보험이 왜 나와.”

채하의 몸이 기울었다. 안겨 있던 주현은 덩달아 뒤로 자빠지며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졌다.

“어리니까 형이 봐줘요.”

채하가 말하는 어린이 보험은 주현도 가입이 가능한 나이였다.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것처럼 주장하는 채하에 말문이 막혔다. 헛웃음 짓느라 방심하는 사이, 반팔 티셔츠 안쪽으로 채하의 손이 들어왔다.

“아니, 내일이 레이드인데.”

주현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잡자 채하가 고개를 내려 쪽 입술을 부딪쳤다.

“열심히 할게요.”

인생은 때때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레이드를 대비하여 같이 연습하려고 왔는데, 채하에게 먹힐 준비를 하는 지금이 주현에겐 그랬다. 저번에는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오늘은 절대 통하지 않을 터였다.

머리를 굴려 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아서 주현은 채하의 목덜미를 붙잡고 급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자신에게 맡기기로 했다. 채하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서 혀를 질척하게 섞었다.

분명히 배 위에 올라가 있던 채하의 손이 갑작스럽게 바지 밴드를 넘어 안을 파고들었다. 주현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형,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요.”

남의 손이 바지 안까지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 어쩌라는 말인가. 따지고 보면 사람을 좋아해 본 적 없다면서 거리낌 없이 덥석 만지는 채하가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저 처음인데 형이 가르쳐 줘야죠.”

또 슬그머니 손을 움직인 채하가 드로어즈 위를 더듬거렸다. 주현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채하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나도 처음인데 무슨 소리야.”

“……왜요?”

“……왜라니.”

“사귄 사람 있다고 했잖아요.”

채하는 생각만 해도 서운해졌는지 주현의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비비적댔다.

“오래 안 사귀었으니까.”

“왜 헤어졌는데요?”

갑작스럽게 시작된 질의응답 시간에 주현은 바람 빠지게 웃으며 답했다.

“바빠서.”

“형이요?”

“아니, 둘 다.”

“……음.”

채하가 별안간 몸으로 짓누르는 바람에 주현은 다시 뒤로 자빠졌다.

“저는 형이 헤어지자고 해도…….”

얼굴 위로 그림자가 덮였다. 어쩐지 나른해 보이는 채하가 눈꺼풀을 끔벅이며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안 놔줄 건데.”

“……어. 그래 보인다.”

머리를 숙인 채하가 주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거기다가 남기면 안 되지.”

다급히 얼굴을 붙잡자 채하가 고개를 틀어 손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럼 어디가 되는데요.”

“……당연히 안 보이는 곳이지.”

“전 아무 데나 괜찮은데.”

그렇게 읊조린 채하는 다시 고개를 내리곤 옷자락을 들쳐 옆구리를 깨물었다. 간지러워서 꿈틀대자 채하가 힘을 주어 허리를 붙들었다. 받고만 있기 민망해서 채하의 티셔츠 밑자락을 붙잡고 위로 끌어 올렸다. 옷을 사수하려고 애쓰던 주현과 달리 채하는 순순히 티셔츠를 내어 주었다. 고개를 떼고 팔까지 들어주는 여유에 주현은 기가 막혔다.

똑같이 자국을 만들어 주겠다고 결심을 한 채 어깨를 깨물었다. 하얀 어깨에 찍혀 있는 잇자국에 왜 흔적을 남기는지 알 것 같았다. 주현이 혼자 뿌듯해하는 동안 허리춤을 지분거리던 채하는 다시 바지를 노리기 시작했다. 밴드를 잡아당기는 손가락을 주현이 콱 붙잡았다.

“……누가 넣을 건데?”

“전 상관없어요.”

쪽, 채하가 주현의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원래도 넣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답하는 채하를 보니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채하가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넣어.”

주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애처롭게 붙잡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자 채하의 손이 원활하게 드로어즈 안으로 진입했다. 손바닥을 둥글게 말며 성기를 붙잡는 손길에 소름이 돋아서 발가락을 움츠렸다.

“형, 마지막으로 언제 뺐어요?”

“시발, 그걸 왜 물어?”

당황해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하는데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답하는 채하가 먼저였다.

“전 알려 줄 수 있는데.”

엄지손가락이 귀두 위를 빙글 문질렀다. 성기를 만지는 감각은 새삼스러울 것 없었지만, 타인의 손이라는 것과 그 상대가 채하라는 것에서 흥분이 몰려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눈을 감자, 채하가 곧장 손목을 붙들어 소리를 막던 팔을 떼어 냈다.

“형, 좋아요?”

“……조용, 흐으, 히, 좀 하면 안 돼?”

“처음이라서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또 자신 없어 했다. 아무래도 거짓말로 사람을 꾀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주현은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잘, 읏, 하고 있을걸?”

“그럼 더 열심히 할게요.”

다짐하듯 답한 채하는 드로어즈에서 손을 빼내더니 양손으로 바지 밴드를 잡고 쭉 당겨 한 번에 벗겨 버렸다. 채하의 손가락에 걸린 건 드로어즈도 함께였다. 가려 주는 옷이 모두 사라져서 꺼떡이는 성기가 그대로 드러나자 문득 도망가고 싶어졌다.

왠지 불안한 느낌에 본능으로 몸을 일으키자 고간 쪽으로 머리를 숙이는 채하가 보였다. 주현은 황급히 팔을 뻗어 두 손으로 채하의 볼을 힘껏 붙들었다.

“미친. 지금 뭐 하는 거야.”

“……빨아 보려고요.”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줄 아나. 주현이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채하는 제 앞에 놓인 주현의 엄지를 약하게 깨물며 애교나 부려댔다. 사람 처음 좋아해 본다면서 속전속결로 진도를 빼는 채하에 주현은 낚인 기분이었다.

“내가 해 줄게.”

“아뇨. 전 여기 들어갈 거니까…….”

채하가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놀라서 허리를 튀자, 채하가 물고 있던 엄지를 놓아주며 입을 살짝 벌려 혀를 보여 줬다. 새빨간 혀에 주현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공평하게 형도 여기.”

“……내 의견은?”

“좋을 거예요.”

그렇게 단정 지은 채하는 더는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지 주현의 어깨를 밀어 뒤로 눕혀 버렸다. 성기가 따뜻하고 습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이빨이 닿자 깨물릴까 무서웠던 주현은 종아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흐윽.”

어여쁜 얼굴이 열심히 성기를 빨아들이고 있을 걸 상상하면 피가 몰렸다. 쾌감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척거리자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꽉 압박하며 붙들었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힘입은 채하의 고개가 한 번 더 아래로 내려갔다. 뒤로 고개가 빠지며 성기를 힘껏 빨아들였다.

“하. ……언제까지 해?”

잠시 입을 뗀 채하에게 물었다.

“형이 쌀 때까지요.”

주현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던 채하는 다시 성기를 물었다. 조금 하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채하는 집념을 보이며 정성스레 애무했다.

이따금 이가 스쳐서 주현이 아파하면 사과의 의미로 혓바닥이 성기를 할짝댔다. 주현은 고통도 잊고 숨을 헐떡였다. 호흡을 따라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머리가 푹 숙어지며 귀두가 좁은 통로로 빨려 들어갔다. 채하의 목젖이 꿈틀대며 성기가 조였다.

“그으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을 뱉던 순간에 바짝 조여든 목구멍에 문장이 이상해졌다. 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하게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슬슬 사정감이 들었다.

“……채, 읏, 하야.”

쾌감을 느끼느라 목소리가 끊어져 나왔다. 그에 채하는 묵묵부답으로 답했다. 하는 수 없이 주현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러지 못하도록 채하가 허벅지를 붙들어 주현의 몸을 둥글게 말아 버렸다.

“잠깐만, 잠깐만. 읏!”

성기를 입에 담고 있는 채하는 주현과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귀는 놀고 있으니 듣는 건 가능할 텐데, 채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더 세게 빨아들이는 탓에 성기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대, 흐으, 화를, 하자!”

사정하기 직전이었다. 터질 듯 팽팽하게 부푼 성기에 채하가 고개를 뒤로 살짝 빼더니 혀로 귀두를 핥았다. 혀끝이 귀두를 후벼 파는 감촉에 주현은 아래에 깔린 시트를 바스락 구겨 쥐었다. 다시 축축한 입 안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현은 이제 한계였다. 어떻게든 채하의 얼굴을 치우려고 손을 내두르자, 채하에게 붙잡혀 손깍지 낀 채로 시트 위로 떨어졌다.

채하가 목구멍을 조이자 입 안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흐, 읏!”

채하는 주현의 신음을 즐기며 고개를 떼곤 입 안에 쏘아진 정액을 꿀꺽 삼켰다. 뱉어서 뒤에 넣어 볼까도 했는데 맛이 궁금해서 그건 다음으로 미뤘다.

“…미, 미친.”

꿈틀대는 목젖을 발견한 주현이 입술을 떨면서 경악했다. 뭐 하나 할 때마다 큰 반응을 보여 주는 주현 덕분에 채하는 내내 흡족했다. 채하의 입꼬리가 미소를 그리자 반대로 주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채하는 옆에 놓인 탁자 서랍에서 물건을 꺼내, 젤은 손에 쥐고 콘돔은 침대 위로 던졌다.

“뭐야. 저게 집에 왜 있어?”

“형이랑 하려고 샀어요.”

힘껏 노려보는 주현이 귀여웠던 채하는 볼에 쪽 입을 맞추며 해명했다.

“……언제 샀는데?”

“그건 비밀이에요.”

채하가 손에 젤을 쭈욱 짜낸 뒤, 주현의 배에 입술을 쪽 하고 부딪혔다. 채하는 젤을 얹은 검지, 중지 위를 엄지로 비벼 녹여 냈다. 이윽고 엉덩이 사이를 차가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채하의 본래 체온이 따뜻한 편이 아니라서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흐윽.”

주현은 사기를 당한 게 분명했다. 웬만해선 언제 샀는지 알려 줄 텐데 비밀이라고 하는 걸 보니까 진작부터 준비되어 있었을 게 뻔했다. 채하의 집이 호랑이 소굴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신이 난 채로 놀러 온 거다.

좁은 내벽을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혹여나 다칠까 걱정이 되어 채하는 주현의 표정을 살피며 손을 움직였다.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왕복을 반복하는 손가락에 주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형, 불편해요?”

“……딱히.”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긴장이 될 뿐, 아프진 않았다. 채하는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검지와 중지가 내벽을 들쑤시며 질척한 젤을 펴 발랐다.

“형, 안에 되게 따뜻해요.”

채하는 궁금하지 않았던 정보를 친절히도 알려 줬다. 주현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자 채하가 턱을 붙잡아 원상태로 복구시켜 놓았다.

“아픈지 봐야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손가락이 하나 더 늘었다. 마찰로 생기는 끈적이는 소리가 부끄러웠다. 고개를 돌릴 순 없으니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자 턱에 있던 손이 사라지더니 뻣뻣하게 서 있던 성기가 콱 붙잡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래에 들어간 손가락은 내벽을 넓히기 위해서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고, 성기에 닿은 손은 엄지로 귀두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이, 건 언, 읏, 제까지 해?”

주현은 채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형이 쌀 때까지요.”

“아니, 난 방금도 했는데. 너는?”

억울해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항변하자, 채하가 손바닥으로 어깨를 쭉 밀어 버렸다.

“저는.”

손가락이 조금 전보다 깊숙하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흐윽. 놀란 주현이 신음하자 채하의 손이 뒤로 빠졌다가 다시 한번 안에 처박혔다.

“여기에 할래요.”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서 허리를 띄우자, 채하가 재빠르게 그 아래로 베개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높아진 하체에 놀라서 버둥거리는 몸을 꽉 붙잡은 채하가 다리 한쪽을 제 어깨 위로 올렸다. 자세가 점점 채하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진입하기 쉬워진 채하는 내벽을 꾹꾹 누르며 종아리에는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하고 넣자.”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이상해져서 얼른 끝내 버리고 싶었다.

“형이 싸야 한다니까요.”

채하는 주현의 내벽을 넓히는 데에 열중하며 냉정하게 답했다. ……아니, 그게 마음대로 되느냐고. 주현은 내리깐 채하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댔다. 손가락을 문 내벽은 여전히 빠듯했고 쾌감을 느끼긴 어려울 듯싶었다. 계속 채하를 바라보고 있던 주현은, 채하가 고개를 든 바람에 시선이 부딪혔다.

“……형이 느꼈으면 좋을 텐데.”

채하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다시 콱 주현의 성기를 붙들었다. 좌우로 흔드는 손길에 따라 성기에 피가 몰렸다.

“흐, 윽. ……잠깐, 만.”

어깨 위에 올라간 다리를 지탱해 주는 팔이 사라졌으니 힘이 빠진 주현은 다시 침대로 내려올 수 있었다. 가벼워진 어깨에 성기를 흔드는 손이 한결 빨라졌다. 엄지가 귀두를 세게 후벼 파며 사정을 독촉했다.

“이번 건 형 안에 넣을 거예요.”

“안 궁금, 윽, 해.”

“원래 처음 거 넣으려고 했는데 먹어 보고 싶어서.”

조금 전에 안 궁금하다고 했는데도 가볍게 무시한 채하는 말을 이어 갔다. 주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손바닥으로 채하의 입을 막아 버렸다. 쪽, 손바닥에 입술을 찍은 채하는 고개를 뒤로 물러 주현의 손바닥에서 멀어졌다.

성기를 쥔 손과 내벽을 휘젓던 손 모두 사라졌다. 주현이 숨을 고르는 사이, 성기가 축축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쭉 빨리는 감각에 발끝을 오므라들며 사정했다. 넋 놓은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 번 자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두 번은 못 할 듯싶었다.

채하는 사정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주현의 성기를 손으로 쥐어짜며 모조리 입에 담았다. ……흐으. 주현은 빨개진 얼굴을 침대 시트에 묻으며 몸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채하는 정액을 손바닥에 뱉어 내고 그대로 주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인 주현은 더는 잔소리할 힘이 없었다. 축 늘어진 채로 힘겹게 심호흡하는 주현을 채하는 끈질기게 괴롭혔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이고 뭐고 이대로 잠에 빠지고 싶었다.

주현의 낯빛을 확인하며 아래를 한참 손가락으로 쑤시던 채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내려 성기를 꺼냈다. 늘어져 있던 주현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엉덩이 아래에 걸린 베개에 걸려 다시 뒤로 자빠졌다. 그러는 중에도 채하는 묵묵히 콘돔을 씌우고 있었다.

진짜 사기를 당했다. 주현은 작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채하가 아플까 봐 아래로 가겠다고 한 거였다. 그런데 더한 놈이 주현의 앞에서 성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뭐야, 시발.”

“형은 섹스할 때 욕을 많이 하네요.”

휘어진 매끈한 성기를 보며 주현이 욕을 읊조리자 채하는 여유롭게 웃으며 주현의 종아리에 입이나 맞췄다. 주현은 긴장한 탓에 턱이 악물리고 종아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금세 상태를 눈치챈 채하가 종아리를 주무르며 주현을 달랬다.

“저걸 어디에다가 숨기고 다닌 거야.”

“바지요.”

채하는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나. 지금 저걸 넣으면 수요일 레이드고 목요일 출근이고 모두 물 건너갈 미래가 훤하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채하가 뒤를 풀어 준다고 했을 때 열심히 협력할 걸 그랬다. 채하도 웬만큼 풀렸다고 판단해 넣겠다고 한 거지만, 두려움에 휩싸인 주현은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였다.

“전 플라토닉 러브도 가능해요.”

“……시발. 그건 좀 죽이고 말해 봐.”

“형 보면 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말은 감동적이었으나 채하의 중심이 워낙에 꼿꼿하게 발기해 있어서 신뢰성이 떨어졌다. 지적에도 채하는 부끄러움이 없는지 성기를 가릴 생각은 안 하고 주현의 발목을 붙잡고 쪽쪽 입술이나 비벼댔다.

“……하. 넣어.”

결심한 주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흉기가 제 안에 들어가는 건 못 볼 듯싶었다. 내내 얼굴 가리는 걸 허용하지 않았던 채하는 이번에도 잽싸게 쫓아와 손을 잡아챘다.

“저거는 안 아플 수가 없어!”

“형이 조금 아픈지, 많이 아픈지 봐야 해요.”

소리치는 주현에게 채하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아플 텐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채하와의 말싸움에서 이겨 본 적 없는 주현은 이번에도 패배했다. 눈이라도 감자 싶어서 눈꺼풀을 닫았다. 회음부에 미끈하고 묵직한 감각이 스쳤다. 채하의 귀두였다. 진입을 앞두고 입구 주변을 문지르고 있었다.

“형.”

“응?”

“사랑해요.”

“어, 읏!”

채하에게서 사랑한단 말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는 순간 내벽으로 성기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으윽. 신음하며 시트를 구겨 쥐고 몸을 비틀었다. 성기를 사정없이 꽉 압박하는 내벽에 채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구겨진 주현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고는 조금 더 기둥을 밀어 넣었다.

“형, 힘 빼야 해요.”

채하가 자꾸 제 상태를 신경 쓴단 걸 알아서 괜찮은 것처럼 꾸며 내고 싶었지만 주현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몸이 긴장을 풀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자, 채하가 허벅지를 주무르며 감각을 분산시켰다.

“…흐으.”

“형, 거의 다 들어왔어요.”

그 커다란 게 벌써 다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뒤가 뚫리는 생경한 감각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뻔한 거짓말을 가려냈다. 채하는 주현이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멈췄다가 괜찮아지길 기다렸다.

주현은 기력이 없었다. 내내 긴장해 있던 터라 에너지 소비가 과했다. 두 다리는 채하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고 팔은 시트 위로 축 늘어져 흐물거렸다. 이 상태로 한 번은 더 사정해야 끝난다는 게 지옥 같았다. 더군다나 채하는 아직 한 번도 정액을 빼지 않았다.

“그으, 냥 넣어.”

“안 돼요.”

“하, 씨.”

아픈 건 주현의 몫인데 채하가 더 예민하게 굴었다. 섹스가 시작된 내내 자신이 한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은 채하가 얄미웠다.

“……으.”

“반 들어갔어요.”

채하가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왔다. 속일 수 없단 걸 학습했는지 이전처럼 다 들어왔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주현은 이를 악물며 풀린 눈으로 채하의 얼굴을 훑었다. 눈이 마주치고, 채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파 죽겠는데 저건 또 귀여웠다. 얄밉다는 말은 취소다.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이 티셔츠 밑자락을 건드렸다. 배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리자 채하가 허리를 들썩이며 성기를 한 번 더 밀어 넣었다. 흐으, 신음을 흘리니 채하가 허리를 지분대며 귀찮게 굴었다.

“형.”

“……왜 자꾸 불러.”

“진짜 다 들어갔어요.”

그렇게 설명한 채하가 마지막으로 남은 기둥을 쭉 밀어 넣었다. 하체가 들리며 골반이 꽉 붙잡혔다.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채하를 따라서 몸이 흔들렸다. 내벽을 꽉 채우던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주현은 신음을 앓았다.

“흐, 읏.”

“형, 피부 엄, 청 빨개졌어요.”

누구 때문에 빨개졌는데. 억울함을 담아서 힘껏 노려보는데 미끄러지며 들어오는 성기의 압박감에 다시 눈에 힘이 풀려서 입술을 악물었다.

“……흐, 형. 깨물지, 마요.”

입술을 가르며 채하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평소 예쁘다고 생각하던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혓바닥을 누르더니 그다음에는 입천장을 긁었다.

“읏, 워아, 은, 어야.”

“형, 입으은, 어떤지 궁금해서요.”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고의로 손가락에 잇자국을 내자 채하는 오히려 좋아하며 손을 거두어 갔다. 타액이 묻은 손가락은 반쯤 올라간 티셔츠를 들치며 주현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돌기를 빙글 돌리는 축축한 감촉에 막으려고 팔을 뻗자 도리어 채하에게 붙잡혔다.

“왜에, 읏!”

전보다 깊숙하게 성기가 진입했다. 분명히 다 넣었다고 했으면서. 또 속았다. 다른 한 손이 주현의 성기를 잡아채더니 귀두를 꾹꾹 눌러 쾌감을 유도했다. 왜 거짓말하냐고 따질 수도 없이 입에선 신음만 줄줄 흘렀다. 앞은 붙잡혔지, 뒤는 엄청난 게 들쑤시고 있지. 숨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과 고통 속에서도 용케 쾌감을 느꼈다.

흐으. 들뜬 숨을 내쉬며 벗어나려고 하면 성기를 괴롭히는 손길이 짓궂어졌다. 사정이 가까워지자 발끝에 힘이 들어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순간, 채하가 더 깊숙한 곳으로 성기를 처박았다.

“……으읏!”

주현은 희미한 시야 사이로 채하의 얼굴을 살폈다. 똑같이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고 입술 사이로 나오는 호흡이 가빴다. 채하가 아직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는데 혼자 세 번이나 가고 싶지 않았다.

“치, 으어, 봐.”

힘없는 팔로 제 성기를 붙잡은 채하의 손을 툭 치자, 채하는 묘한 눈으로 주현을 내려다보다가 요도 입구를 짓누르며 세게 문질렀다. 내벽을 후벼 파듯 쑤시는 성기는 덤이었다. 힘주고 있던 허벅지가 나른해지고, 발가락이 구부러들었다. 확 조여드는 내벽에 채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끔벅이며 흐느끼는 주현을 구경했다. ……으으응. 주현의 성기에서 정액이 분출되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언 지인짜, 읏, 언제 해…….”

사정한 성기를 쥐어짜고 있는 채하를 힘없이 바라보며 주현이 물었다.

“지금이요.”

그렇게 대답한 채하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현의 안을 두꺼운 성기가 들쑥날쑥 무자비하게 쑤셔댔다. 으, 읏. 주현이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도망가려고 하자, 채하는 발목을 단단히 잡고 쭉 당겼다. 몸이 부딪히며 꿰뚫리는 감각에 주현은 헐떡이며 가슴팍을 부풀렸다.

“…방, 방금 해앴, ……는데.”

“……네.”

채하는 여전히 대답만큼은 잘했다. 안이 들쑤셔지는 감각에 주현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얼굴도 몸도 너무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았다. 꽉꽉 조이는 내벽에 채하는 이따금 눈을 찌푸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삽입에 주현은 쾌감에 익숙해질 틈이 없었다. 몸이 잠깐 들리며 성기가 일순간 깊은 곳을 후비고 지나갔다.

“으, 응!”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베개가 빠지고 채하가 몸을 낮췄다. 멀찍해서 흐리멍덩하게 보이던 얼굴이 선명해졌다. 기절하더라도 저 얼굴이 사정하는 건 꼭 봐야만 했다. 주현은 흔들리는 시야에 비치는 곱상한 얼굴을 뚫을 기세로 바라봤다.

“……하, 형. 울어, 요?

왜 시야가 흐릿한가 했더니 울고 있던 모양이다. 빠르게 눈물을 쓱쓱 닦아 냈다. 그 모습에 설핏 웃은 채하가 허리를 느릿하게 돌리며 내벽 깊숙한 곳을 후벼팠다. 그러던 중 전립선을 건드린 탓에 놀라서 발을 버둥대자 그대로 허벅지가 붙잡혀 그곳만을 들쑤셨다.

“형, ……흐, 너무, 좋아요.”

채하의 어깨에 얹힌 종아리에 입맞춤이 쏟아졌다. 버틸 수 없는 쾌감에 또 눈물이 쏟아진 주현은 시야가 흐려졌다.

“얼굴, 읏, 어, 흐읏…… 구울.”

상체가 멀어진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투정 부리듯 부르짖자 채하가 기꺼이 몸을 숙여 주어 다시 거리가 가까워졌다. 어느새 다시 사정이 코앞이었다. 또 멀어질까 봐 팔을 채하의 목에 걸었다. 그러자 몸이 번쩍 들리며 채하의 성기가 전립선을 제대로 짓눌렀다. 감전된 사람처럼 바르르 떨며 채하를 힘껏 껴안았다. 채하는 바짝 조여드는 내벽 안을 느릿하게 휘저었다.

어느새 스르륵 힘이 빠져 흘러내리는 몸을 채하가 팔로 단단히 붙들었다. 주현은 바들바들 떠는 채로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채하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으니, 아래에서 쑥 빠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시발.”

못 봤다. 사정이 끝났는지 콘돔을 빼서 묶고 있는 채하를 보니까 한없이 억울해졌다. 뭐 때문에 지금껏 참고 박혔는데, 가장 보고 싶었던 걸 놓쳐 버렸다. 억울해서 훌쩍이자 채하가 등을 문질러 주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하면 되죠.”

……아직 안 끝났다고?

늘어진 주현을 침대에 눕힌 채하는 새로운 콘돔을 제 성기에 씌우고 있었다. 다시 뻣뻣하게 솟은 성기를 보며 주현은 경악했다. 도망가려는 허벅지를 커다란 손이 붙들어 힘껏 당겼다.

“형이 좋아하는 제 얼굴 봐야죠.”

입구에 성기를 문지르며 말하는 채하의 목소리가 음습했다. 조금씩 넣던 처음과 달리 단번에 성기가 내벽 안으로 진입했다.

“흐읏!”

허리를 비틀어 몸부림을 치자 골반이 붙잡혀 몸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정사로 인해 움직임이 한결 수월해진 내벽을 채하가 여유롭게 들쑤셨다. 끙끙거리면서 자꾸 제 얼굴을 훔쳐보는 주현에 채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주현의 다정함에 잠식될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형이…….”

“하으…! 으, 응.”

“여기 좋, 아하더라고요.”

쑤셔 줄 때마다 기둥을 조이는 내벽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전립선을 긁으며 성기를 파묻듯 넣자 주현의 종아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굽어졌다. 채하는 흐트러진 주현의 앞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반듯한 이마에 쪽 입술을 부딪쳤다.

다시 멀어지려는 채하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은 주현이 힘겹게 입술을 맞물렸다. 목에 팔을 감으려다가 미끄러지자 채하가 등을 감싸 안으며 푹 성기를 쑤셔 넣었다. 계속해서 찔리는 전립선에 신음과 울음이 섞인 소리를 앓으며 채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티셔츠 안으로 불쑥 들어간 채하의 손이 가슴팍에 솟은 돌기를 매만졌다.

“하, 읏, 나만, 해!”

“형, 좋아요?”

채하가 고개를 돌려 쪽 귀에 입을 맞췄다.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빨아들이고, 다음에는 구겨진 티셔츠를 벗기고 똑같이 어깨에 잇자국을 만들어 줬다. 제가 남긴 얼룩덜룩한 흔적에 만족스럽게 웃은 채하는 주현의 뺨에 머리카락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형, ……안에 엄청, 윽, 따뜻해요.”

알고 싶지 않은 안 속 온도를 자꾸만 알려 주는 채하 탓에 주현의 귀와 목이 빨갛게 익어 갔다. 하얗던 몸이 붉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니 채하의 성기에 더욱 피가 몰렸다. 주현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눈만 간신히 뜬 채, 채하를 따라 몸이 흔들렸다. 이제는 어딜 만지든 느끼는 몸 탓에 더욱 힘이 없었다. 그중 제일은 내벽을 가르며 쉴 새 없이 찌르는 채하의 성기였다.

졸린 것처럼 눈을 끔벅대면 채하가 허리를 쳐올리며 전립선을 거칠게 들쑤셨다. 흥분에 젖은 채하는 턱뼈가 튀어나오도록 이를 악물었다. 채하에게 안겨 있던 주현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몸을 강타한 쾌감에 팔과 다리로 채하를 꽉 껴안으며 매달렸다. 성기가 귀두만을 남겨 두고 뒤로 빠졌다가 다시 쾅 들이받았다. 주현은 이대로 몸이 쪼개질 것 같았다.

빠르고 깊은 삽입이 반복되었다. 마찰에 엉덩이 사이가 얼얼했다. 힘든데 중심에는 피가 바짝 쏠리며 사정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쿠퍼액을 눈치챈 채하가 주현의 성기를 부여잡고 엄지로 귀두를 비비며 문질렀다.

“흐, 힘들, 어, 읏…….”

어딜 만져도 느끼는 지금은 양쪽으로 자극당하는 상황이 더욱 힘겹게 느껴졌다. 주현이 칭얼대며 어깨에 입술을 비비자, 채하가 다시 주현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형, 같이 가요.”

채하의 제안에 주현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귀두를 못살게 구는 손길은 여전했고, 뒤를 쑤시는 속도도 재빨랐다. 반동 탓에 몸이 위로 올라가면 허벅지가 잡혀 다시 아래로 끌려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는 얼굴을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채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채하도 사정이 가까워졌는지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고 조급함만 남았다. 내벽을 긁는 기둥에 주현은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다리를 풀어내며 축 늘어졌다. 배에 쏟아지는 정액을 보며 숨을 고르는데, 채하는 양쪽 허벅지를 붙잡은 채로 계속해서 안을 헤집었다.

“……갔, 는, 읏, 데에.”

“……네에.”

아까도 이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바들바들 떨며 조이는 내벽을 채하는 꿋꿋하게 성기로 가르며 깊숙한 곳까지 진입했다. 아직 목표가 남은 주현은 몸을 때리는 사나운 쾌감을 꾹 참으며 버텨 냈다.

채하의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열기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나른하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채하가 성기를 내벽에 깊게 파묻고 손으로는 주현의 눈을 가렸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시야에 주현은 손바닥을 두 손으로 붙잡고 버둥거렸다. 그 순간, 전립선을 찌르는 감각에 채하의 손을 붙든 채로 흐느꼈다.

“……시발.”

또 못 봤다. 이번에는 채하의 고의였다.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성기에 주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큼직한 손이 사라지고 되찾은 시야에는 새로운 콘돔을 씌우는 채하가 보였다.

* * *

“……흐.”

울어서 부은 눈두덩이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주현은 게슴츠레 뜬 시야로 주변을 훑었다. 불을 켜지 않아서 방 안이 어둑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틀자, 책상 앞에 앉은 채하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리포트를 마저 작성 중인 듯했다.

콧대 위에는 금테 안경이 얹혀 있어서 인상이 평소보다 단정하게 느껴졌다. 편의점에서 재회했을 때 썼던 안경은 은테였던 것 같은데, 금세 안경을 바꾼 모양이었다.

“……으, 으.”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과 함께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불이 하나밖에 없단 것도 결국에는 거짓말이었다. 주현이 몸에 두른 이불은 새것처럼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레이드에 가야 하므로 슬슬 일어나야 하는데,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 구석구석이 쪼개지듯 아파서 힘이 없었다. 고개를 이불 속으로 넣어 몸 상태를 확인하자 다행히 옷은 입혀져 있었다. 바지는 원래 입고 있던 것이고, 상의는 품이 넉넉해진 걸 보아 채하의 옷으로 추정되었다.

“…흐윽.”

끙끙대며 머리카락을 베개에 비비적거렸다.

자꾸만 코디를 따라 하는 신사 때문에 화가 난 채하가 선물했던 곰돌이 인형 탈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주현은 그 얻어터진 곰돌이 탈이 된 기분이었다.

“형, 일어났어요?”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뒤척이는 탓에 기척을 느낀 채하가 주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왠지 얼굴을 마주하기 부끄러워서 그대로 숨죽이고 있자, 매트리스가 눌리며 채하가 올라왔다. 자는 척 연기하는 주현을 채하가 이불째로 꽉 껴안았다. 예고 없이 몸이 조이자 주현은 힘겹게 잇새로 숨을 쉬었다.

얼마 안 가 이불이 들치며 멀쩡하다 못해 반들반들한 얼굴을 자랑하는 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형, 눈 부은 거 귀여워요.”

눈두덩이에 떨어지는 뽀뽀 세례에 주현은 축 늘어진 채로 손만 훠이훠이 휘저었다. 이번에는 손이 붙잡혀 손등에 입술이 찍혔다. 아무래도 막는 건 불가능해 보여서 빠르게 포기했다. 채하가 얼굴에 입술을 찍든, 몸을 바스러지게 안든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멀거니 컴퓨터를 응시했다. ……레이드는 가야 하는데.

“형, 슬슬 레이드 준비해야 해요. 제가 업데이트해 놨어요.”

“……어, 잘했어.”

잘했단 말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채하는 입술을 부딪쳐 알아서 상을 받아 갔다. 기어가듯 침대에서 내려가는 주현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채하가 허리를 붙들어 뒤에서 껴안았다. 주현은 채하의 몸에 기댄 채로 마른세수했다. 어째 놓아주질 않는 것 같았다.

채하를 등에 달고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자 이전에는 없던 방석이 의자에 깔려 있었다.

“나 양치질.”

아직 업데이트가 끝나지 않은 모니터를 확인한 주현은 허리에 감긴 채하의 팔을 풀어내며 읊조렸다. 양치질을 위해서 욕실로 향하는데, 채하는 여전히 주현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 모습에 게임에서 줄기차게 뒤따르던 채하의 캐릭터가 생각나기도 했다.

따라 들어올까 무서워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채하와 밀폐된 장소에 함께 있기 무서웠다.

주현은 한 손으론 칫솔질을, 남은 손으론 세면대를 붙잡았다.

거울로 상태를 살피니 얼굴이 전체적으로 부어 있었다. 귀엽다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는 채하가 대단했다. 너무 많이 해서 애가 좀 아픈가? 얼굴만 좋아 보이지 썩 상태가 좋은 건 아닌 듯했다.

주현은 한숨과 함께 세면대에 치약을 뱉어 냈다. 입을 헹구며 고개를 돌려 목덜미를 확인했다. 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지 자국은 없었다. 티셔츠 들쳐 복부도 살피려다가 어차피 둘밖에 볼 일 없는 곳인데 뭐 어떤가 싶었다.

한결 상쾌해진 상태로 욕실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채하와 마주쳤다.

“왜 이렇게 쫓아와.”

어디에 있든 채하의 집이니 손아귀 안인데, 떨어져 있으면 무슨 일 나는 사람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안경알 너머 채하의 눈동자는 말없이 주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채하를 뒤로하고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모니터엔 업데이트가 끝나고 게임 시작 화면이 펼쳐져 있었다.

주현은 의자에 앉아 본캐인 블랙을 선택했다. 의자엔 전과 달리 방석이 깔려 있어서 푹신하긴 했지만, 침대보다 상대적으로 딱딱하여 닿는 부위마다 뻐근해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지각이에요 ㅡㅡ

[SYSTEM] 길드원 월월월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월월님은요?

[파티] westone : 사형이요 ㅡㅡ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전 채팅을 확인할 수 없는 월월월에게 다짜고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길드 창을 열어 접속 인원을 살펴보자 아직 잔혹동화, 신사, 코쿄아가 오지 않은 상태였다.

“채하야. 이거 파티 네가 만들어?”

“제가 만들게요.”

질문에 냉큼 대답한 채하는 마우스를 움직여 접속 중인 인원을 하나씩 초대하기 시작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blueberry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단공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단공 : 재앙님들 하이용

[파티] westone : 평온에선 두 분만 하세요?

[파티] 단공 : 길마님 회사에 끌려갔음 ㅋ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

나머지 파티원의 접속을 기다리는 동안, 주현은 거래소를 뒤적거렸다. 레이드를 돌면서 유저 몇몇이 리본 머리띠를 착용했던 걸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채하와 제 캐릭터 머리에 씌워 주고 싶었다.

검색을 해 보자 놀이공원에서 썼던 것과 유사한 모양새의 아이템이 나왔다. 가격은 최저가가 1억 골드였다. 예쁜 아이템 가격이야 부르는 게 값이라지만, 현실 머리띠보다 10배가 훨씬 넘게 비싼 가격에 구매가 급격하게 망설여졌다.

“형, 그거 갖고 싶어요?”

주현이 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채하가 물었다. 그에 주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갖고 싶은 것보다는 채하 캐릭터에 씌우고 싶은 욕망이었다. 답을 얼버무리는 주현에 채하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저 있는데.”

“있다고?”

곧바로 우편함으로 아이템이 도착했다. 주현이 보고 있던 리본 머리띠가 맞았다. 주현에게 우편을 보낸 채하는 제 캐릭터 머리에도 리본 머리띠를 씌웠다. 기본이 분홍색이어서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를 끌고 염색 NPC를 찾아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뒤늦게 업데이트를 끝낸 잔혹동화, 신사, 코쿄아가 접속했다. 마저 파티에 초대해 인원을 채운 채하가 방을 생성했다.

[파티] 단공 : 코쿄아님 ㅎㅇ 오랜만

[파티] 코쿄아 : 안녕하세여 ㅋㅋ

[파티] blueberry : ㅎㅇ

[파티] 코쿄아 : 하이 ㅋㅋ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 평온 길드원과 코쿄아를 보니, 주현은 채하의 길드 생활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평온 길드원 대다수가 기억하는 코쿄아를 홀로 기억하지 못한단 게 이상했다. 심지어 다른 길드였던 주현도 코쿄아를 알았다. 예전에는 모르는 척하는 건가 채하를 의심도 했었지만, 이제는 채하가 타인에게 무심하단 걸 아니 그러려니 했다.

[파티] 코쿄아 : 앜ㅋㅋ 두분 커플룩이시네여

대기실에 입장한 캐릭터 중에서 같은 옷을 입은 건 주현과 채하밖에 없었다. 칭찬하는 건 아닐 테고, 또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을까 싶어서 주현은 잠자코 기다렸다. 턱을 괴고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사람을 뚫을 듯 고요히 응시하는 채하가 있었다.

“……왜?”

“아니에요.”

채하는 명쾌한 답을 내어 주지 않고 머리카락을 목덜미에 비비적거리기나 했다. 잠에서 깨어난 뒤로 내내 졸졸 쫓아오는 것도 그렇고, 빤히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파티] 레아 : 우와 엄청 귀여워요

[파티] 코쿄아 : 좀 유치한뎈ㅋㅋㅋ

[파티] 코쿄아 : 밍채님 협박당하고 계신거 아니져...?

[파티] 단공 : 협박은 블랙님이 당하시는 것 같은데용 ㅠ

[파티] blueberry : ㅇㅈ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코쿄아가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거는 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니 주현도 구태여 반응하지 않았다. 레이드 시작도 전에 말다툼하며 힘을 빼고 싶지 않기도 했다.

[파티] 밍채 : 귀여운데요

[파티] 단공 : ?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채하의 캐릭터가 주현의 캐릭터 뺨에 입술을 부딪치는 순간, 주현의 볼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쪽. 짧은 마찰음이 울려서 옆을 돌아보자 이번에는 입술끼리 맞물렸다.

[파티] blueberry : 민채한테 먹이 주지 말라고

[파티] 단공 : 진짜 역겹다.........

[파티] 단공 : 블랙님 비위 좋으시네요

[파티] 단공 : 나였으면 사사게에 박제함

주현은 제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채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귀여워서 비위는 모르겠고…… 주현도 한때는 채하를 사사게에 올리고 싶어 했다. 단지, 채하가 사사게에 닉네임이 올라가는 것 정도에 타격감을 받는 인간이 아니라서 실패했을 뿐.

[파티] 코쿄아 : 랙님이 나쁠게 뭐가 있어여 ㅋㅋㅋ

[파티] 코쿄아 : 장비도 다 사주시는데여 ㅎ

[파티] 단공 : 블랙님 내가 장비 사준다고 해도 안 넘어오던데 ㅠ

[파티] 코쿄아 : 랙님 인기 엄청 많네여

[파티] 코쿄아 : 예쁘신가?

[파티] 밍채 : 네

무시해도 되는 질문에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채하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때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예쁘단 칭찬에 주현은 별안간 소름이 돋았다.

“너 채팅 치지 마.”

“……그냥 대답한 건데.”

주현은 질린 얼굴로 노트북 자판 위에 올라간 창백한 손을 붙잡았다. 그에 채하는 엄지로 주현의 손등을 쓸면서 칭얼댔다.

[파티] 단공 : ???

[파티] 단공 : 남자 아님?

[파티] 코쿄아 : 밍채님 눈에는 예뻐보이시나봐여 ㅋㅋ

[파티] westone : 밍채님한텐 뭔들..

[파티] 잔혹동화 : ...ㅎㅎ

[파티] 단공 : 저 지금 토할것 같은데용 ㅠ_ㅜ

[파티] blueberry : 나가 그럼

[파티] 단공 : 힝 서러워

[파티] 신사 : 준비됐으면 시작하죠?

[파티] 밍채 : 네

떠들썩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사가 말을 끊으며 등장했다. 그런 신사에게 채하가 흔쾌한 기색으로 그러겠다 대답한 건 예상 밖이었다.

주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채하의 얼굴을 살폈다. 늘 신사를 못마땅해하던 채하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즐거워 보였다. 솟아오른 볼과 입꼬리가 이상해서 한참을 응시하니, 채하가 얼굴을 돌려 주현을 바라보았다.

“형, 캐릭터 바꿔서 할래요?”

돌연 묻는 채하에 주현은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도 이제야 좀 할 만해졌는데 성직자라니.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보스에게 얻어맞고 버프를 빼앗길 게 뻔했다. 짤막한 로딩을 거쳐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레이드 장소는 마몬 때와 같은 채예스의 궁전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를 따라 걸으니 금속으로 만들어진 반들반들한 문이 등장했다. 서쪽이 포탄을 펑펑 터뜨리며 빠르게 다가가자 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리며 엉망이 된 만찬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상한 음식 탓에 악취가 풍겨 녹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만찬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 위는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흐트러진 식기와 찌꺼기만 남은 음식. 어수선한 기다란 테이블 끝엔 아직도 음식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는 이번 레이드의 보스 벨제불이 있었다.

파티원과 눈이 마주치자 벨제불의 얇고 투명한 날개가 팔락였다.

[파티] westone : 티저 볼 때도 느꼈지만

[파티] westone : 날아다니겠네요

[파티] 단공 : 아 벌써 싫다 ㅠ

벨제불은 곤충 형태의 보스로 파리와 유사한 생김새를 가졌다. 마몬이 정신없이 날아다녔던 걸 고려하면 벨제불에게도 꽤 고전할 듯싶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자 화면에 낯선 상태 아이콘이 떠올랐다.

“오염 저위험?”

“기본으로 얻는 것 같아요.”

주현이 혼잣말처럼 읊조리자 채하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주현은 눈알을 굴려 채하의 노트북 화면을 훑었다. 주신 리라의 초상화 옆에 주현과 똑같은 상태 아이콘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 점점 올라가나 보다.”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으로 나누어지는 듯했다. 파티원들이 사용한 스킬로 버프 아이콘이 화면 상단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티에는 탱커가 세 명, 힐러가 무려 네 명이었다. 힐러가 과하게 많은 탓에 힐에서는 손을 뗄 줄 알았던 채하는 처음으로 파티 힐을 열었다.

서쪽이 예상했던 것처럼 벨제불은 윙윙거리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잡으란 건지 말라는 건지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벨제불의 복부에 반짝이는 나이프가 꽂혔다.

[파티] blueberry : 이러면 내려오네

찢어지게 우는 소리를 내던 벨제불은 블루베리가 있는 쪽으로 하강하며 다리로 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나이프를 던져 벨제불을 도발한 건 블루베리였다. 블루베리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 스태프를 휘둘러 불꽃을 날렸다.

[파티] 단공 : 머임? 난 안 되는데

단공이 던진 숟가락이 벨제불의 머리에 맞고 튕겨 나왔다. 주현은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숟가락, 포크, 나이프. 캐릭터를 끌고 테이블로 다가가자 식기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주현은 포크를 획득하고 벨제불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포크가 등에 꽂힌 벨제불은 획 몸을 돌리더니 주현의 캐릭터를 향해 잽싸게 날아왔다.

“유인해서 잡는 건가 봐.”

“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데도 꼬박꼬박 답이 돌아왔다. 이럴 때면 주현은 겨우 ‘초콜릿아’에 서운해서 답하지 않던 채하가 떠올랐다. 그때의 일이 더욱 어이가 없으면서 귀엽게 느껴졌다.

숟가락은 미끄러지고, 포크와 나이프는 몸에 꽂혔다. 앞서 실험을 통해 눈치챈 사실에 파티원들은 벨제불이 하늘을 날 때마다 식기를 던져 어그로를 끌어왔다. 그러다가 내려오는 벨제불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한 신사의 캐릭터가 뒤로 자빠지며 몸을 굴렸다. 신사의 머리 위로 하얀 깃털 표식이 떠올랐다.

파티에 성직자는 둘밖에 없었다. 채하와 코쿄아. 코쿄아는 주현의 캐릭터 옆에 서 있었다. 코쿄아가 사용한 빛 기둥이 벨제불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왜요?”

채하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채하는 왜 그러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주현에게 물었다. 그에 주현은 말을 잃었다.

“……아니야.”

주현은 다시 모니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번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노트북으로 옮겨 가니 키를 잘못 눌러서 실수했을 수도 있었다. 주현은 그렇게 믿으며 게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파티] 레아 : 엇

구석에서 마법을 쓰던 레아가 갑작스럽게 피를 모조리 잃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벨제불의 어그로는 멀찍이 떨어진 단공이 끌고 있었으니 수상한 상황이었다.

[파티] westone : 레아님 뭐예요?

[파티] 레아 : ㅠㅠ 갑자기 피 다 잃어서

[파티] 레아 : 아 저 오염 고위험 됐어요 ㅠㅠㅠㅠㅠ

레아의 뒤로는 짙은 녹색의 연기가 퍼져 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와 만찬장을 잡아먹는 오염에 이동에 제한이 생겼다. 처음보다 좁아진 공간에 주현은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벨제불의 체력을 깎는 속도를 봤을 때 클리어 때까지 버티기 힘들 듯했다.

“이거 안 되겠는데.”

“리트할까요?”

결론을 내리고 중얼거리는 주현에 채하가 재도전 의사를 물었다.

“……일단은 방법을 찾고.”

재도전하더라도 실패 원인을 알아내야 했으니 주현은 캐릭터를 멈춰 놓고 채팅을 쳤다.

[파티] 블랙 : 오염 속도 막는 법 없을까요

[파티] 블랙 : 이 속도면은 못 깰 것 같은데

[파티] 단공 : 전 모르겠어용 ㅠ

[파티] 레아 : 헉 밍채님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채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레아에 주현이 어리둥절하며 마우스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오염을 뚫고 레아에게 다가가 빛을 불어넣는 채하의 캐릭터가 주현의 시야에 걸렸다. ……뭐 하는 놈이지? 옆에 채하가 있는 탓에 속으로 구시렁댔다.

평소에는 주현이 나서서 부탁하지 않으면 힐도, 부활 스킬도 사용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채하가 파티를 지극히 보살피는 모습에 주현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내가 서운하게 군 게 있었나?’

싸우긴커녕 좋아 죽었던 것 같은데. 채하가 보이는 플레이는 의아하기만 했다. 본래 성직자라면 당연했을 플레이였지만, 그걸 채하가 하고 있으니 수상쩍었다.

주현은 테이블에 놓인 숟가락을 주워 채하의 캐릭터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채하의 캐릭터는 몬스터가 아니니 당연히 맞지 않았다. 캐릭터의 몸뚱이를 숟가락이 그대로 통과했다. 쭉 날아가던 숟가락은 구석에 썩어 있던 음식물에 맞더니 펑 터지며 함께 사라져 버렸다.

[파티] 단공 : 와 블랙님 천재임????

[파티] 레아 : 우와

[ westone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얼떨결에 주현은 오염의 비밀을 풀어내는 걸 성공했다. 신이 난 파티원은 상한 음식을 향해 숟가락을 던지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벨제불에게 통하지 않길래 뭔가 했더니 사용법이 달랐다.

만찬장에 웬만큼 오염된 공기가 지워지자 파티원들은 다시 벨제불과의 전투에 집중했다. 벨제불의 다리에 맞고 구르는 코쿄아에게 힐을 넣어 주던 채하가 뒤늦게 주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왜 저한테 던졌어요?”

“……아닌데?”

채하의 추궁에 주현은 시치미를 뗐다. 사실대로 말하면 채하가 삐칠 것 같았다.

현 상황에서 더 섭섭한 사람은 주현이었지만, 채하에게 파티 힐을 강요한 전적이 있는 주현은 따질 명분이 없었다. 더 캐물을 줄 알았던 채하는 쉽게 넘어가 주었다. 그런 태도가 한층 서운하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내내 쫓아오고 귀찮게 굴었으면서, 게임이 시작되니까 딴판이었다. 경찬에게 게임 중독자 소리를 들었던 주현은 억울해졌다. 진짜 게임 중독자는 제 옆에 있었다.

[파티] 월월월 : ???????

2페이즈로 넘어가자 벨제불의 패턴이 달라졌다. 포크나 나이프를 던져서 벨제불을 끌어 내렸을 때, 벨제불이 취하는 행동이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1페이즈 때처럼 하강하며 바닥을 다리로 내리찍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내려와 유저를 안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월월월은 현재 벨제불의 품에 있었다.

[파티] westone : 잘 가요 월월님

[파티]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

[파티] 레아 : 저건 못 구하는 거예요?!

[파티] westone : 안 되는 것 같아요

서쪽은 월월월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면서도 구해 주고 싶었는지 포크를 던져 벨제불의 눈을 공격했다. 통하지 않는 걸 보아 구출이 불가능한 패턴이었다. 천장까지 올라간 벨제불은 그대로 다리에서 힘을 빼 월월월을 떨어뜨렸다.

[파티] 월월월 : 감사해염 ㅠㅠ

또다. 쿨타임에 걸려 부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채하는 월월월에게 다가가 부활 아이템을 사용했다. 파티에 넘치는 게 힐러인데 귀찮게 아이템을 사용해서까지 월월월을 살리는 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형, 왜 저 노려봐요.”

“……내가 언제.”

주현은 눈꺼풀을 세게 깜빡이며 노려보느라 얼얼해진 눈알을 식혔다.

[파티] 신사 : 밍채님 웬일임 ㅋㅋ

꾸준히 힐을 받아 간 신사는 채하를 띄워 주기까지 했다. 한때는 채하가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길 바랐지만, 지금은 멋대로 굴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파티원 모두 장비 스펙이 좋았고, 실력도 준수해서 레이드 진행은 순조로웠다. 술술 풀리는 게임을 보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도리어 땅굴 파고 내려가듯 우중충하기만 했다.

금세 3페이즈로 넘어갔다. 주현이 알던 것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채하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경직 타이밍도 재지 못하고 단공이 벨제불에게 어깨를 부딪치는 거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블랙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파티] 단공 : 블랙님 저 개쩔죵 ㅎ_ㅎ

[파티] blueberry : 그 말 안 했으면 나았을 듯

[파티]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신사 : 아 내가 하려고 했는데 ㅋ

[파티] 블랙 : 네

[파티] 단공 : ?

[파티] 단공 : 저 지금 눈물 나서 스샷연타하고 있음요 ㅠ

눈알을 굴려 채하의 반응을 살폈으나, 채하는 게임에 집중하여 채팅 창을 보지 않는 듯했다. 제자리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스치듯 걸린 시야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볼록 튀어나와 도드라진 턱뼈가 눈에 들어왔다. 주현은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옮겼다.

[파티] 단공 : 밍채 보고 있냐?

[파티] 단공 : 블랙님 나한테 넘어올듯 ㅋ

[파티] 신사 : 집중 좀 하죠

예상외로 단공을 말린 건 채하가 아니라 신사였다. 채하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계속 참고 있는 듯했다. 얼른 레이드를 끝내고 채하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결심한 주현은 테이블 위에 있던 나이프를 들고 벨제불을 향해 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나이프는 날개에 부딪혔다. 그에 벨제불은 놀랍게도 한쪽 날개를 잃어버리고 불안정하게 하늘을 떠다녔다. 3페이즈 전까지는 날개를 맞혀도 통과해 버리고 말았는데 변화가 생긴 것이다.

[파티] 신사 : 블랙님 겜 잘하시네 ㅋㅋ

신사는 주현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찬사를 보냈다. 기쁘긴커녕 소름이 끼치기만 했다.

나머지 파티원도 식기를 날려 벨제불의 날개를 찢어 놓았다. 날개를 모두 잃은 벨제불은 바닥에 떨어져 엎어지더니 몸을 파닥파닥 뒹굴며 괴로워했다. 자유롭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프리딜 타임이었다. 모두가 합심하여 공격 스킬을 쏟아 낼 때, 채하는 마나가 아까운지 소극적으로 빛 기둥을 내리찍었다.

날개를 잃은 벨제불은 개미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몸을 뒹굴며 등으로 바닥에 충격을 줘서 장판을 만들기도 하고, 다리를 휘둘러 파티원들을 멀리 쳐내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니 어느덧 벨제불의 체력이 조금 남아 클리어를 앞두게 되었다.

[파티] 신사 : 다음에도 이렇게 같이 가는 거 괜찮을듯? ㅋ

[파티] 코쿄아 : 저두여 ㅋㅋ

[파티] 코쿄아 : 블베 여전히 개잘하네

신사가 은근슬쩍 던진 말에 주현은 진저리쳤다. 둘과 파티를 함께하는 건 한 번만으로 충분했다. 파티원 구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채하가 만찬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보살피는 건 더더욱 짜증이 났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거칠게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을 때였다.

[SYSTEM] 밍채님이 신사님의 추방을 제안합니다.

“뭐야.”

질투 때문에 불타오르던 머릿속이 급격하게 새하얘졌다. 시야마저 아득해지며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이대로 추방하게 내버려 둘 순 없으므로 재빠르게 반대에 한 표를 던졌다. 신사의 추방 투표가 시작된 순간부터 사사게행은 이미 정해졌다. 그걸 수습할 수 있을지는 투표 결과에 달렸다.

서쪽은 분명히 찬성할 테다. 찬성표야 서로 안 눌렀다고 우기면 될 거였다. 어떻게 신사를 설득할지 머리를 굴리던 차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건 주현 하나인지 투표는 금세 마무리되었다.

[SYSTEM] 신사님의 추방 투표 결과입니다. 찬성 5명, 반대 4명으로 신사님을 추방합니다.

[SYSTEM] 신사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당황한 주현은 조급하게 눈을 굴려 파티원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월월월은 주현처럼 분쟁을 싫어하니 반대일 테고, 레아는 추방 투표에 쉽게 찬성을 할 것 같지 않았다. 평온 길드원인 단공과 블루베리는 재앙의 길드 마스터를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코쿄아는 당연히 신사의 편이니, 반대가 여섯 명으로 나와야 옳은 계산이었다.

[SYSTEM] 밍채님이 코쿄아님의 추방을 제안합니다.

신사를 쫓아내자마자 새로운 추방 투표가 시작되었다. 채하가 왜 레이드 내내 얌전히 있었는지 마침내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파티가 무산되면 안 되니까 성질을 꾹 참고 때를 기다렸던 거였다.

신사의 찬성이 다섯 명이었으니,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올 테다. 추방 대상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으니 반대는 한 명이 준 세 명으로 뻔한 결과였다.

[SYSTEM] 코쿄아님의 추방 투표 결과입니다. 찬성 6명, 반대 2명으로 코쿄아님을 추방합니다.

[SYSTEM] 코쿄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뭐야. 왜 또 한 명이 늘었어?”

이쯤 되면 주현과 함께 꿋꿋하게 반대표만 던진 한 명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두 명 다 추방된 상황에 머릿속이 한껏 어질해졌다. 초조하게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던 주현은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시야로 채하를 마주했다.

“너 어쩌려고 저 둘을 추방해.”

“형이 쟤들 때문에 힘들어하니까…….”

분쟁은 주현이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신사와 코쿄아는 무조건 사사게에 글을 올릴 테고, 그들의 표적은 채하일 테니 그에 따른 대응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머리가 아픈 상황인데…….

“없앤 건데.”

우습게도 주현은 제 앞에 있는 채하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부루퉁한 얼굴의 채하가 주현의 눈치를 보며 문장을 완성했다.

다른 길드 소속인 채하가 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열 받는 복수였다. 주현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채하에게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야 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망했다. 주현은 뱉지 않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임채하에게 인생을 제대로 저당 잡혔단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파티] 단공 : 와 이게 되네

[파티] 단공 : 재앙님들 ㅈㄴ 빡쳐있으셨구나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반대 생각보다 적네요?

[파티] 잔혹동화 : 너무 속시원해요 ㅎㅎ

채하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에 젖어 있던 주현은 모니터 화면에 올라오는 채팅에 빠르게 현실로 복귀했다. 먼저 뺨 맞은 건 이쪽인데, 이대로 순순히 사사게에 끌려가기엔 억울했다.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울 때였다.

[파티] westone : 저 길드 잘렸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잔혹동화 : 저도 ㅎ

[파티] 월월월 : 저두염

[파티] 레아 : 저도요!!!

재앙 길드원이었던 유저들의 머리 위에 달려 있던 길드 표시가 순차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쨌건 반대표가 나왔는데, 다짜고짜 모두를 자르는 건 어떻게 나온 사고인지 주현은 신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잔혹동화는 그간 길드를 함께 키운 운영진이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왜 안 잘려요

[파티] 블랙 : ?

[파티] 단공 : 그러네용 잊으셨나?

[파티] westone : 걔가 블랙님을 잊을 수가 없는데..

[파티] 블랙 : ㅅㅂ

주현의 캐릭터 머리 위에는 여전히 재앙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눈물겨울 정도로 올곧은 신사의 순정에 주현은 서쪽에게 놀림 받고도 반박할 수 없었다.

“……하.”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화를 삭이는 채하가 있었다. 주현은 마지막까지 앞길을 방해하는 신사 탓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파티] westone : 그래서 반대는 누구예요?

[파티] westone : 둘 투표결과도 다르던데요 ㅋㅋㅋ

이날만을 기다려 왔을 서쪽은 역시나 두 번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아직 레이드가 끝나지 않은 탓에 주현은 거추장스럽게 구는 벨제불의 발길질을 막아 내며 답했다.

[파티] 블랙 : 저요

[파티] westone : 그럼 한 명은 뻔하네요

[파티] 블랙 : ?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나머지 한 명의 정체가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데, 서쪽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했다. 서쪽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굴 때 상대방은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파티] 블랙 : 월월님이에요?

[파티] 월월월 : 저 맞는데 어떻게 아셨대염;;;

[파티] westone : 뻔하죠 배신자 ㅡㅡ

[파티] 월월월 : 억울해염 ㅠㅠㅠㅠㅠ 전 다른분들 생각해서 반대한건데

반대가 모두 재앙에서 나온 표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평온 길드원은 신사와 코쿄아의 추방에 참견할 이유가 없었다. 한때 코쿄아와 같은 길드였으며, 레이드 시작 전에 친근하게 인사도 주고받았었다.

[파티] 블랙 : 레아님 찬성하셨다고요?

[파티] 레아 : 네!!!

[파티] 블랙 : 왜요?

[파티] 레아 : ㅈ같아서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ㅁㅊ 저 레아님 욕하는 거 처음 봐요 ㅋㅋㅋㅋㅋㅋ

언제나 바른 언어 습관을 지향하던 레아가 대놓고 욕을 할 정도면 주현이 없을 때도 코쿄아가 어지간히 괴롭힌 모양이었다. 힘들다고 혼자 부캐 키우러 떠날 때가 아니었는데. 씁쓸하게 웃은 주현은 평온 길드원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파티] 블랙 : 단공님이랑 블루베리님은 왜 찬성하셨어요?

[파티] 단공 : 전 블랙님 편 들어준건뎅 ㅠ_ㅠ

[파티] 단공 : 블랙님이 반대할줄은 몰랐죱

[파티] westone : 배신자네요

[파티] 블랙 : ㅅㅂ

단공은 원래 게임을 유쾌하게 하는 편이니까 갑작스러운 추방 투표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을 한 건 블루베리였다.

[파티] blueberry : 신사님 투표는 반대했고요

[파티] blueberry : 코쿄아 쪽은 걔 하는 짓 보기 싫어서 찬성했어요

[파티] 레아 : 그럼 결과가 딱 맞네요

채하가 코쿄아에게 갚아 준 방식은 단순히 추방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채하는 코쿄아와 친하게 지냈던 평온 길드원을 구구절절 말로 설득하는 대신에 직접 보게끔 자리를 마련했고, 그들은 채하의 뜻대로 코쿄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쩌다가 걸린 우연인지, 처음부터 계산한 결과인지 궁금했던 주현이 채하에게 물었다.

“이것도 이럴 줄 알고 한 거야?”

“네. 전 상관없는데, 형은 아니잖아요.”

내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채하는 주현이 코쿄아와 평온의 관계를 불편해한단 걸 용케도 눈치채고 그것까지 고려하여 일을 벌였다. 사사게에 오른 후 상황 설명으로만 평온 길드원을 설득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형.”

주현은 채하에게 받는 건 뭐든 마음에 들었지만, 이렇게 자신만을 위해서 귀찮은 일을 자처하는 게 가장 간지럽고 좋았다. 종종 짜증 났을 순간들을 마지막에 기뻐할 주현 하나만을 보고 꾹 참아 냈을 테니까.

주현이 그토록 고민했던 임채하여야만 하는 이유였다. 겨우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냐는 듯한 반응이나, 가벼운 위로로 끝나지 않고 제 방식으로 풀어내는 채하가 좋았다.

“다 같이 평온으로 와요.”

“……어스름 님은 이걸 알아?”

주현을 내려다보며 읊조리는 얼굴에 순간 혹했지만, 재빨리 정신 차렸다. 파티에 함께한 평온 길드원 세 명 모두 사사게에 올라갈 텐데, 어스름으로선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저 운영진이에요.”

채하에게 운영진 직책을 쥐여 준 어스름도 썩 정상은 아닌 듯했다. 늘 사사게를 주시하고 있다길래 한때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제 보니까 자업자득이었다.

“이제 형이 저 책임져야 해요. 아무도 저랑 파티 안 해 줄 텐데.”

채하가 약한 소리를 내며 속상한 척 주현의 어깨에 머리카락을 비비적댔다. 원래도 사사게 스타인데 한 번 더 올라간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다. 채하가 키우는 캐릭터는 컬러수집가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 사사게에 올라간 전적이 있었다. 컬러수집가도 타이밍이 엇갈려서 사사게행을 피한 거지, 얌전히 지낸 건 아니었다. 사사게 경력직답지 않은 발언이었지만 주현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왼팔로 채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토닥였다.

“그래.”

받아 줄 길드가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평온이 그렇게 해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었다.

“왜 전에는 넘어오라고 안 했어?”

“형이 그 중이병 같은 길드 좋아했잖아요.”

“…….”

중학교 2학년인 척 나이를 속이고 행동한 채하가 할 말은 아니었다.

주현이 뉴비였던 시절, 서쪽과 월월월의 제안으로 멋모르고 들어간 길드였다. 그땐 코쿄아 같은 놈도 없었고, 신사와는 마주칠 일이 드물었으니 길드가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이야 짜증 나는 일투성이지만, 그때는 즐겁고 재미난 일이 더 많았다.

코쿄아가 거슬리게 구는 탓에 언젠가는 나가리라 이를 갈았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후련하여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시원섭섭해서 속이 시끄러웠다.

[파티] 블랙 : 밍채가 평온으로 오래요

[파티] westone : 살림 합치시네

[파티] westone : 드디어 결혼하는 건가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레아 : 우와 감사합니다!!!

[파티] 잔혹동화 : 감사합니다 ㅠㅠ

[파티] 단공 : 드디어 평온도 북적북적하겠당 ^0^

[파티] blueberry : 너랑은 파티 안 할듯

[파티] 단공 : 힝 님들 믿어용 ㅠ_ㅠ

클리어까지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시끄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탓에 이전보다 속도가 더뎠다. 드디어 체력을 모두 잃은 벨제불이 철퍼덕 바닥에 시원하게 엎어졌다.

[파티] westone : 헐헐

보통의 악마 레이드는 엔딩 컷신에서 엉망이 된 세상이 평화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머리엔 휘어진 뿔이, 턱에는 하얗고 긴 수염이 달린 조그마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손에는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일곱 번째 악마인 벨페고르였다.

[파티] westone : 와 저 앞의 일 다 잊었어요

[파티] westone : ㅁㅊㅁㅊㅁㅊ 성한아 드디어 일하는구나

만신창이가 되어 뻗은 벨제불을 느릿하게 훑은 벨페고르는 한참을 턱을 우물거리더니 혀를 쯧 차고 이내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파티] 월월월 : 여름 방학에 나오겠네염

[파티] westone : 학교 진짜 눈치 없네 종강이나 하지

[파티] 블랙 : ㅅㅂ 이제 개강했잖아요

그렇게 엔딩 컷신이 끝나고 인벤토리에 차례차례 보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사와 코쿄아는 같이 고생했으나 클리어도 못 하고,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통쾌해졌다.

[SYSTEM] 밍채님이 [어둠의 힘]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단공 : ㅆㅂ 망겜

[SYSTEM] 월월월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blueberry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단공님이 [식탐의 내음]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잔혹동화님이 [식탐에 오염된 포크]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단공 : 갓겜입니다 ^0^

[파티] blueberry : ㅋ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축하드려요

채하가 가져간 아이템을 보고 망겜이라 울부짖던 단공은 벨제불에서만 나오는 액세서리 재료를 획득하고 말을 재빠르게 철회했다. 태세 전환하는 단공에 주현은 웃으면서 캐릭터가 광장으로 돌아가길 기다렸다. 파티장인 채하가 파티를 유지한 채 던전을 빠져나왔다.

[파티] westone : ㅅㅂ 개놀랐네

[파티] 단공 : ???

[파티] westone : 신사가 광장에서 저희 기다리고 있는데요

[파티] 단공 : 재앙 채널 어디였죠?

[파티] 월월월 : 4채염

길드 추방만으로 기분이 풀릴 신사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나 했더니 광장에서 파티가 나오기만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씩 귓속말하기엔 번거로울 테니 신사치곤 괜찮은 선택이었다.

[전체] 신사 : 밍채님 어딨음?

던전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왔을 때는 캐릭터를 움직이지 않으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글바글한 인원 중에 채하가 보이지 않으니 신사가 캐릭터를 움직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체] 신사 : 하....

[전체] 신사 : 반대한 사람은 누구예요 두분은 봐드림

[전체] 신사 : 한분은 블랙님이겠고

[귓속말] 월월월에게 : 월월님

[귓속말] 월월월 : 넴

[귓속말] 월월월에게 : 혹시 괜찮으시다면 단공님이랑 블루베리님이 반대한 거로 말해도 될까요?

채하는 추방 투표를 제안한 요주의 인물이었으니 이미 수습할 수 없었지만, 둘은 가망이 있었다. 재앙의 싸움에 괜히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귓속말] 월월월 : 넴 ㅋㅋㅋㅋ 좋아염

월월월이 흔쾌히 승낙하자 주현은 일단 길드부터 탈퇴했다. 캐릭터 머리 위에 오랜 시간 달고 있던 재앙의 이름이 미련 없이 사라졌다.

[전체] 블랙 : 반대는 단공님이랑 블루베리님이 하셨어요

[귓속말] 단공 : 오잉 저 찬성인데용?

[귓속말] 단공 : 아

[귓속말] 단공 : 밍채 진짜 부러워서 눈물나용 ㅠ_ㅜ 저를 먼저 만나셨어야지

진실은 파티원들만 알고 있으니, 신사는 주현이 뱉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낯 두껍게 흘러나오는 거짓말에 단공이 의아하다는 듯 귓속말을 보냈다가 이내 깨달았다.

감동했던 단공은 얼마 후 서러워하며 다시 등장했다.

[귓속말] 단공 : 와 블랙님 이러시기예요? 민채한테 이르고

일렀다기보다는 채하가 옆자리라서 채팅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주현은 힘이 들어간 이마를 매만지며 채하를 힐끔 살폈다. 단공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채팅으로 귓속말을 보낸 게 다였다. 채하치곤 얌전한 대응에 주현은 걱정을 접고 다시 신사의 캐릭터를 노려봤다.

[전체] 코쿄아 : 불만인거 있으면 말로 하지 다들 너무하신거 아니에여? ㅋㅋ

[전체] 코쿄아 : 지금 파티 구하는거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서 추방하고 ㅋ

채하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코쿄아에 주현은 내심 감동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으면 사사게행을 각오하고 일을 벌인 의미가 없어졌다.

[전체] 코쿄아 : 원님은 저랑 친했으면서 어떻게 ㅋㅋ

[전체] westone : 제가요? 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코쿄아 : 여자에 ㅁ1쳐가지고 사람 추방하고

아직도 성별을 오해하고 있는 코쿄아는 서쪽을 콕 집어 지목하더니 배신감을 느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에 내내 가만히 서 있던 블루베리의 입이 열렸다.

[전체] blueberry : 말 진짜 ㅈ같이 하네

[전체] 코쿄아 : ?

[전체] blueberry : 니 말하는 거 개같애서 추방 찬성했다

[전체] 신사 : 반대했다면서요

[전체] 단공 : 반대는 블랙님이랑 월월월님인데 ㅋㅋ

어째 평온 길드원이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한껏 살벌해진 듯했다.

[전체] 코쿄아 : 내가 뭐라 했는데?

[전체] blueberry : 지가 뱉은 말도 모르네

[전체] 코쿄아 :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한 적 있어?

[전체] blueberry : 그럼 그렇게 시비 털고 다니는 게 정상이냐?

[전체] 코쿄아 : 성별 앞세워서 날먹하는 애들한테 그런건데 왜 니가 화를 내?

예상은 했지만, 블루베리의 성별은 역시나 여자였던 모양이다. 블루베리의 지적을 이해하지 못한 코쿄아는 도리어 화를 내며 답답해했다. 저런 놈도 여자 친구를 사귄다니,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주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오른편의 채하와 눈이 마주쳐서 가볍게 웃었다. 안경 너머로 껌뻑껌뻑하던 채하의 눈도 부드럽게 휘어졌다.

[전체] 코쿄아 : 내가 널 버스충 취급했냐고

[전체] blueberry : 진짜 개노답이네

[전체] 단공 : ㅇㅈ

[전체] 코쿄아 : 하..... 말을 말자

안 그래도 몇 없는 여성 유저들을 무시하고 다니는 코쿄아가 아무리 잘해줘 봤자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에 특별대우 받는다고 기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전체] 신사 : 암튼 이번 일은 사사게에 올릴거고요

[전체] westone : 올리세요 ㅎㅎ

[전체] 신사 : 님은 말하는 것 좀 고치셈 ㅋㅋㅋ 개빡치네

[전체] westone : 아저씨도 말하는 거 고치세요 어린애들 구박하지 말고

[전체] westone : 그 나이 먹고 질척대는 거 안 쪽팔림??

[전체] 신사 : 내가 언제 질척댔는데

[전체] 코쿄아 : 신사님이 참아여 ㅋㅋ 저런 애들 말 섞어주면 안댐 ㅎㅎ

광장 한가운데서 싸우고 있으니 재앙 길드원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닌 척 구경하고 있었다. 말다툼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하려 키보드에 손을 얹을 때였다.

[전체] 코쿄아 : 남친한테 일러서 일 벌여놓은 애는 ㅈㄴ 조용하네 ㅎㅎ

코쿄아가 아직도 성별을 오해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채하가 남자 친구는 맞으니 주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체] 블랙 : 저요?

[전체] 코쿄아 : 그럼 누가 또 있어여 ㅋㅋ?

[전체] 단공 : 근데 블랙님 남잔데 왜 자꾸 여자라고 몰아가는거임? 코쿄아 혹시 돌았음?

[전체] 레아 : 그러니까요!!!

[전체] westone : 신사가 여자인줄 착각하고 사랑해서 그래요 ㅋ

[전체]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밍채님 그래서 그때 개빡쳤었는데 ㅋㅋㅋ

주현은 그 당시를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채하가 게임을 접을까 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돌아오기만을 기약 없이 기다렸었다.

[전체] 코쿄아 : 아 게1이 새1끼들 ㅋㅋ 개역겹네

게이가 맞는 주현은 코쿄아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주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모니터를 바라보던 채하는 게이 소리를 들은 게 좋은지 실실 웃더니 주현의 목덜미에 쪽 입술을 부딪쳤다.

채하의 반응을 코쿄아가 보았다면 분명히 눈을 뒤집고 분노했을 것이다.

[전체] 단공 : 밍채한테 버스 타려고 애쓰던 애가 역겹다고 하니까 웃기긴 하다 ㅋㅋ

[전체]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blueberry : 나만 느낀줄

[전체] 코쿄아 : 내가 언제 ㅋ

[파티] 블랙 : 이제 그만하고 가면 안 될까요.. 싸워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계속되는 싸움에 주현은 조심스레 파티 채팅으로 말을 띄웠다.

[파티] 단공 : 넵넵 블랙님 의견 존중해용 ㅎㅎ

[파티] blueberry : 네 저도 이제 할 말 없어요

다행히 둘은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주현은 그리운 캐릭터가 가득한 광장을 마우스를 돌려 훑고 7채널로 이동했다.

《 사멍꾼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채널이 바뀌면서 친구 신청이 날아왔다. 반가운 닉네임에 주현은 일단 수락했다. 친구 창을 열어 보자 코쿄아와는 진작에 친구가 끊겼고, 다른 재앙 길드원들에게도 친구 신청이 도착해 있었다. 그중에는 신사, 코쿄아와 친하던 암흑기사도 있어서 의외였다.

[귓속말] 사멍꾼 : 블랙님 친구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귓속말] 사멍꾼 : 길드 나가시는 거 아쉬워서 걸었어요

[귓속말] 사멍꾼에게 : 길드 분위기 망쳐서 죄송해요

[귓속말] 사멍꾼 : 괜찮아요 지금 길드 망해서 ㅋㅋㅋㅋ 다들 나가고 있어요

이건 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사멍꾼의 정보 창을 확인하자 길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밀린 친구 신청을 모두 수락하고 살펴보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귓속말] 암흑기사 : 블랙님 ㅎㅇ 가끔 겜 같이해요 ㅋㅋ

“……형은 너무 인기가 많아요.”

지켜보던 채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흘겨본 후 낮게 읊조렸다. 진짜 인기가 많은 게 누군데. 코쿄아가 평온에서 채하를 따라다녔을 거라곤 예상 못 했던 주현은 사실을 알게 되고 기분이 이상했다. 한때 랭킹 1위였으니 채하와 함께 게임을 하고 싶은 유저가 널린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채하가 다른 유저와 합을 맞추고 있을 걸 상상하면 속이 쓰렸다.

[파티] 단공 : 길드 탈퇴 페널티 시간 지나면 가입 넣으세용 바로 받아드릴게요 ^0^

[파티] 잔혹동화 : 넵 감사합니다 ㅠㅠ

주현은 귓속말에 마저 답장을 보내고 길드 창을 열어 재앙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사멍꾼이 알려 준 대로 길드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는지 총인원의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직장인들은 접속하기 힘든 평일 점심시간임을 고려하면 큰 수치였다.

[파티] 단공 : 길마님 지금 오고 있대용

[파티] 레아 : 헉 저희 때문에요???

[파티] blueberry : 아뇨 원래 반차 쓰기로 했는데

[파티] blueberry : 저희가 사고 쳤으니까 오면 이제 게임 대신 사사게에 글 쓰시겠죠

[파티] 단공 : ㅋㅋㅋㅋㅋㅋㅋ 아 재밌어

이전 길드 마스터였던 신사는 박제 글을 쓰고, 새로운 길드 마스터가 되어 줄 어스름이 반박 글을 올릴 상황이 묘하게 느껴졌다. 주현은 휴대폰으로 사사게에 들어가 새로 고침을 하며 신사의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어스름이 반박 글을 작성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까지 채하가 욕먹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일단은 첫 번째 댓글을 차지하고 분위기를 선동할 계획이었다.

“형, 걱정돼요?”

“난 상관없는데, 너 욕 먹을까 봐.”

게임에서 한두 번 욕 먹어 보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은 켕기는 것도 없으니 주현이 걱정하는 건 채하 하나였다. 눈에 불을 켜고 휴대폰 화면을 새로 고침하는 주현을 그림자 진 눈으로 바라보던 채하는 별안간 쪽 입술을 부딪쳤다.

“야, 너는 이럴 때…… 흐.”

이런 순간마저 장난이 치고 싶냐고 따져 물으려고 했는데, 다시 한번 맞붙으며 채하가 주현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갔다.

“형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게임 중 유저 두 명 추방해 놓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오히려 말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양심 없는 말을 덤덤하게 읊조린 채하는 잠시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마디가 쭉 뻗어서 곱상한 손이 마우스를 쥐고 움직였다.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그러곤 안기듯 주현의 허리를 감싸더니 몸을 번쩍 들어 의자에서 일으켰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레이드 가실래요?

“채팅! 답은 해야지!”

의자에서 일으켜 준 것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공중으로 들린 몸에 놀란 주현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모니터 화면을 검지로 가리켰다.

“네.”

짤막하게 대답한 채하는 침대 위에 주현을 내려놓았다. 혼자 다시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더니 허리를 숙여 키보드를 두드렸다. 제 캐릭터로 뭔 말을 뱉을지 몰라서 불안에 젖은 주현은 곧장 채하를 쫓았다.

[전체] 블랙 : 저 바빠요

[전체] westone : 하긴 밍채님이 이번 일 주역이시죠

[전체] westone : 전 레이드 갈게요~

이상한 말을 지껄였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상적이었다. 쫓아온 주현을 내려다보던 채하는 다시 가뿐히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향했다. 시트가 밀려나며 그 위로 주현의 몸이 떨어졌다.

“……아직 몇 시간 안 지난 것 같은데.”

티셔츠를 들치며 불쑥 들어오는 침입자의 손을 붙잡은 주현이 중얼대자, 채하가 목덜미에 쪽 입술을 부딪쳐 변명했다. 와중에 보이는 곳에는 자국을 남기지 말라던 부탁을 착실히도 들어줬다.

“형은 걱정이 너무 많으니까…….”

몸이 뒤로 기울고 채하가 그 위로 올라탔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보았던 시야가 다시 한번 눈앞에 펼쳐졌다.

“다른 생각 못 하게 하려고요.”

“……힘들어서 못 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대답을 한 채하는 바로 몸을 낮춰서 주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금 더 턱을 아래로 내리자 티셔츠 안으로 머리통을 집어넣는 채하가 보였다. 복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허리를 꿈틀댔다. 그에 반응하듯 축축한 혀가 가슴 돌기를 건드렸다.

“……흐, 아니, ……거긴 왜.”

“그때 못 해 봐서요.”

그 말이 어째 못 해 본 것들을 다 해 보겠다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도망가려고 하면 더 짓궂게 군다는 걸 아는 주현은 찌푸린 눈으로 몇 시간째 불이 꺼져 있는 형광등을 응시했다. 한쪽은 깨물렸다가 세게 빨렸다가 하며 채하의 입속에서 고통을 받았고, 다른 한쪽은 심심하지 않도록 엄지손가락이 빙글 굴려 주고 있었다.

“…이, 불으은…….”

“여분 있어요.”

대답하기 위해 채하가 잠시 입을 뗀 순간 주현은 가슴팍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쉬었다.

“……넌 어제 한 말 중에 거짓말이 아닌 게 뭐야.”

“형, 사랑한단 거요.”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채하에 도리어 주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바닥으로 열이 오른 뺨을 가리고 있자, 어느덧 몸을 일으킨 채하가 손목을 붙잡아 주현을 방해했다.

“가리지 마요.”

“……흐으.”

몸이 바짝 붙으면서 묵직한 바지춤끼리 문질러졌다. 옷을 사이에 두고 마찰하는 성기에 소름이 끼친 주현이 슬쩍 몸을 띄우자 그대로 바지와 드로어즈가 쑥 벗겨졌다. 휑해진 다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다리 사이를 가리려고 무릎을 세우는데, 그대로 몸이 반으로 접혔다.

“잠깐만!”

자세도, 채하의 시선이 향한 곳도 이상했다. 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감지한 주현이 불러세우자 채하는 얌전히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주현의 발목에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뭐 하려는 거야……?”

“빨아 보려고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저 없는 말투였다.

“어딜…… 흐으.”

“여기요.”

둔부를 벌리고 들어온 손가락이 입구를 툭 건드렸다.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생각 못 하게 해 주겠단 말을 이루겠다고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충분히 답을 내어 줬다고 판단한 채하가 다시 가랑이 사이로 내려가려고 하자, 주현이 재빠르게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잠깐만.”

자꾸만 불러세우는 주현을 가라앉은 눈으로 빤히 내려다보던 채하는 대뜸 안경을 벗더니 친절히 접어 주현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얼떨결에 안경을 건네받은 주현이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몸이 뒤집혔다.

“얼굴 보면서 하고 싶은데…… 형이 힘들 것 같아서요.”

힘들면 보통 그만두지 않나? 뜻을 굽히지 않는 채하에게 주현이 속으로 투덜대자 커다란 손이 양 허벅지를 붙잡고 억지로 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 순간 내벽 안으로 눅눅한 살덩이가 진입했다. 미끄러지며 안을 누비는 혀에 주현이 흐느끼며 시트에 얼굴을 비비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시야를 확보했다.

엎드려 있는 탓에 보이는 건 손에 쥔 채하의 금테 안경과 베개, 침대 헤드가 전부였다. 열중하여 움직이는 채하를 따라서 콧대에 지그시 눌린 엉덩이 살이 뭉개졌다.

“……그으냥 넣, 흐으, 면 안 돼?”

“안 넣을 거예요.”

보이지 않는 아래에는 채하가 있을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발끝이 저릿했다.

“……흐윽.”

빳빳이 선 성기가 불편했던 주현이 한쪽 무릎을 세우자, 채하의 혀가 한결 수월하게 내벽을 들쑤셨다. 주현은 끙끙거리면서도 손엔 힘을 싣지 않도록 조심했다. 소중하게 꼭 쥐고 있는 안경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뒤를 빨리고 있나 돌이켜 생각해 보다가 문득 기억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조각 하나가 깨어났다.

“재, 미…… 흐으, 없, 으며언, 버린……다고오.”

그 말을 코쿄아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채하는 알까. 슥 빠져나가면서 입구를 질척하게 핥는 혓바닥에 주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시트에 문질렀다. 큼지막한 손에 허리와 골반이 붙잡히더니 또다시 몸이 뒤집혔다. 입꼬리가 일직선을 그리는 못마땅한 얼굴의 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딴생각하지 말라니까 걔 생각하고…….”

“…으응.”

눅진한 내벽을 가르며 손가락이 불쑥 침입했다. 처음과 달리 얼굴을 구기며 바르작거려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끝까지 들어갔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젤이 체온에 녹아 치덕치덕 안에 들러붙었다.

그 말을 했던 건 코쿄아가 아니라 채하였는데, 다른 사람 생각이라니. 울컥해서 턱에 힘이 실렸다.

“그때 형이 도망갔어야 했는데.”

“네, 가…… 못, 흐으, 가게 해앴, 으, 응, 잖아.”

“네. 도망갔으면 잡으러 쫓아갔을 거예요.”

대화하는 중에도 채하는 손가락을 늘려가면서 꾸준하게 내벽을 들쑤셨다. 피가 쏠린 성기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사정감이 들긴 하는데 도무지 분출할 기미가 안 보였다. 쥐고 흔들 생각으로 손을 내리자, 그대로 공중에서 팔이 붙잡혔다.

“……흐으.”

“전 형이랑 같이 있을 때 늘 즐거웠는데.”

속상한 듯 칭얼거렸지만, 내벽을 쑤시는 손가락은 매섭기만 했다. 채하가 몸을 낮춰 붙들고 있던 주현의 손바닥에 쪽 입술을 가볍게 부딪쳤다.

“형은 아니에요?”

“…으, 응. 나, 돈데.”

“그럼 저 말은 성립이 안 돼요.”

뻔뻔하게 미소 짓는 채하를 주현은 가볍게 노려보고 말았다.

“바압, 먹, 잔 거, 흐윽, 싫다, 고, 으, 하고.”

채하 때문에 서러웠던 일이야 넘쳐났다. 시간이 지난 지금 따져 봤자 달라질 건 없지만, 무시해도 될 말들을 성실히 답해 주는 채하 탓에 주현은 뒤늦게 그간의 설움을 토해 내고 있었다.

“형이…… 한 번 더 꼬셨으면 넘어갔을 거예요.”

“무, 슨…… 흐응, 읏.”

“진짠데.”

채하가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준 덕분에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팔을 내린 채하는 이번에 주현의 발목을 잡고 제 어깨 위로 얹었다. …흐. 높아진 하체에 흐느끼며 몸을 뒤틀자 채하가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고, 계속해서 내벽을 손가락으로 괴롭혔다.

“이제 넣, 읏, 어.”

“안 넣어요.”

채하는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렸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인데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한쪽만 받는 건 뭔가 싶었다.

“……그럼 안 할래.”

지금껏 받아 놓고 이러는 것도 웃겼으나 주현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어깨 위에 걸쳐 있던 다리를 내렸다. 뚝 끊긴 흐름에 채하가 주현을 집요하게 응시하다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뽀뽀하라는 건가 싶어서 입술을 부딪쳤다.

“형, 저 안경 주세요.”

오해한 것 때문에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은근한 미소를 짓는 채하에 어디로든 숨고 싶어졌다. 가져가면 되는 걸 씌워 달라는 듯 얼굴을 내민 채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현은 귀에 걸리지 않도록 확인하며 순순히 채하에게 안경을 돌려주었다.

“안경은 왜?”

“형이 좋아해서요.”

……어떻게 알았지? 안경을 걸친 단정한 얼굴에 자꾸만 눈이 갔다. 눈알을 굴리며 채하의 눈치를 보던 순간이었다. 다리가 벌어지고 허벅지가 붙들리며 몸이 그대로 꿰뚫렸다. 인정사정없이 내벽을 가르고 진입한 성기가 그대로 전립선을 후벼팠다. ……흐으응. 세우고 있던 팔꿈치가 무너지며 몸이 뒤로 자빠졌다. 드디어 분출된 정액에 복부가 질척해졌다.

“왜, 흑, 지그, 음, 읏!”

“형이, 넣윽, 라고.”

조금 전 사정한 탓에 조여드는 내벽을 채하가 이를 악문 채 들쑤셨다. 쾌감이 끝도 없이 주현을 집어삼켰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계속 성기를 받아 내자 어느새 다시 중심에 피가 몰렸다.

“형, 좋, 아요?”

“흐으, 응.”

긍정하든 부정하든 무자비하게 들쑤실 채하를 알았다. 주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의 성기가 더욱 깊숙이 파묻히며 전립선을 후비고 지나갔다. 흐윽. 주현이 시트를 구기듯 힘껏 쥐며 허리를 뒤틀자 창백하다 싶을 만큼 하얀 손이 골반을 붙들었다. 으읏!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던 성기가 귀두만 남겨 두고 다시 불쑥 안으로 진입하며 극점을 때렸다.

주현은 채하에게 넣으라고 했던 걸 뒤늦게 후회했다. 느껴서 몸을 바르작거릴수록 성기가 빠르게 안을 헤집었다. 자꾸만 발에 힘을 준 탓에 종아리가 후들거렸다. 아직도 바들바들 떨리는 내벽을 채하의 성기가 푹 가르고 들어갔다.

주현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눈앞이 흐릿해질까 빠르게 닦아 내자 깨끗해진 시야에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 채하가 있었다.

“그, 흑, 렇게, 제가, 보고, 윽, 싶어요?”

채하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체가 들려 위로 띄워지며 성기가 깊이 쑤시고 들어왔다. …흐윽. 무릎을 세우고 있던 주현은 발끝으로 시트를 밀면서 채하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허벅지가 붙들리고 몸이 쭉 당겨졌다. 들썩이며 눌리던 때와 달리 꾹 압박되는 전립선에 주현이 몸부림을 치자, 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를 깊이 파묻었다.

“……으, 흐으으.”

목이 뒤로 젖혀진 채로 주현이 바르르 떨었다.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종아리에는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굽어졌다. 온몸으로 반응하며 사정을 맞은 얼굴을 채하가 한참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주현이 진정되었을 때쯤에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직, 흐으….”

예민해진 내벽을 굵직한 기둥이 쉴 새 없이 들쑤셨다. 사정을 맞아서 좁아진 내벽이 채하의 성기를 우물거리며 반겨주었다. 주현이 얼굴을 시트에 파묻어 가리려고 하면 턱이 붙잡혀 원상태로 돌아왔다.

“저, 가는, 윽, 거, 봐야죠.”

흐트러진 까만 앞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안경 너머의 솟은 눈꼬리가 접히면서 야릇한 미소를 그려냈다. 쾌감에 절여져 풀린 눈으로 채하를 담기 위해 애써 노력했다. 흐, 흐으……. 거칠어진 숨을 타고 신음이 흘렀다. 턱을 든 열이 오른 얼굴이 채하를 따라 흔들렸다.

“으, 응!”

안 그래도 너무 느껴서 죽을 것 같은데 채하가 허리와 복부를 매만지며 귀찮게 굴었다. 몸 곳곳으로 퍼지는 화끈한 감각에 덴 것처럼 펄쩍 뛰었다.

사정을 앞두자 채하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목엔 핏대가 서고, 주현의 허벅지를 붙든 손엔 뼈가 도드라졌다. 치받는 성기에 주현이 몸을 뒤틀며 훌쩍였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몸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빠져나갔던 성기가 미끄러지게 진입하며 전립선을 푹 찌르고 들어갔다. 주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헐떡였다. 깊은 곳에 파묻힌 성기는 그제야 사정하기 시작했다. 내벽에 울컥 쏟아지는 정액에 주현은 바르르 떨면서 눈에 힘을 주고 채하를 응시했다. 이를 악물고 있던 채하의 얼굴이 나른하게 풀어지면서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사정을 마친 성기는 질척해진 안을 한참을 들쑤시다가 스르륵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제야 주현이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으읏!”

이제 끝났다고 방심하고 있던 차에 채하의 검지와 중지가 내벽을 갈랐다.

“빼야 해요.”

“……흐으.”

골반을 뒤틀며 숨을 쌕쌕 쉬는 주현을 채하가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내벽을 긁었다. ……으으응. 눈을 게슴츠레 뜬 주현이 앓는 걸 보니까 다시 성기가 섰지만, 목표를 달성했으니 채하는 이만 참기로 했다.

주현이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할 때까지 내벽을 싹싹 긁은 채하는 몸을 낮춰 주현의 몸 곳곳에 입술을 찍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한 상태인 주현은 힘없는 목소리로 채하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계속 왜 이래.”

떨어지면 죽는 사람처럼 치대는 채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헤집었다.

“형이 제 거가 된 것 같아요.”

“……뭔 소리야.”

사람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아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사게 첫 댓글 자리를 지키겠다는 주현의 다짐은 그렇게 잊혔다.

* * *

비몽사몽 하던 눈이 뜨였다. …흐으. 몸을 단단히 옭아매는 팔에 주현이 짧게 신음을 흘리면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면서 이마에 쪽 입술이 떨어졌다. 껴안고 잤는지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금방 채하의 얼굴이 보였다.

“형, 일어났어요?”

“……어.”

주현은 시선을 아래로 옮겨 이불 안을 살폈다. 그새 티셔츠가 또 한 번 바뀌었다. 전에는 흰색이었는데, 이번엔 검은색이었다. 이런 옷을 가져온 기억이 없으니 채하의 것일 터였다. 몸을 일으키려 꿈틀대자 채하가 순순히 팔을 풀어냈다.

“……나 휴대폰.”

“여기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난 채하가 컴퓨터 앞에 있던 휴대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일어나기엔 아직 힘이 없던 주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하에게 기어가 무릎을 베고 누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이었다. 아침, 점심 둘 다 먹지 못하고 내내 잠만 자서 그런지 더욱 기력이 모자랐다.

“……댓글 진짜 많네.”

그대로 곯아떨어지지 말고 첫 댓글을 먹었어야 했는데. 주현은 한숨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사사게엔 신사의 닉네임으로 작성된 글이 엄청난 댓글 숫자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매너] 평온 길드 고의 추방 (밍채, 단공, 레아, 블랙, 월월월, 잔혹동화, blueberry, westone)

작성자 : 신사 | 댓글 : 301개 | 조회수 : 8160

안녕하세요. 재앙 길드 마스터 신사입니다.

이번에 나온 ‘식탐의 벨제불’ 레이드 중 이유 없는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되어 글을 적습니다.

글 제목에 적힌 닉네임은 당시 파티원이며,

한때는 저희 길드원이었던 유저들도 있습니다.

동고동락했던 길드원들을 상대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평온 길드원 : 밍채, 단공, blueberry

재앙 길드원 : 레아, 블랙, 월월월, 잔혹동화, westone

아래부턴 상황 설명입니다.

1. 밍채님이 저와 코쿄아님에게 벨제불 파티를 제안했습니다.

평소에도 몇 번 파티를 함께할만큼 친밀한 관계여서 전혀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2. 밍채님이 어느 때보다 열심히 케어해주셔서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했습니다.

게임 오래하신 고스펙 유저분들을 아시겠지만 밍채님 힐 절대 안 합니다.

근데 정신 차리고 힐도 하고 부활도 하길래 ‘아, 진심이시구나. 예전 일 반성하셨구나.’ 하고 믿었습니다.

3. 클리어를 앞두고 밍채님이 저와 코쿄아님을 추방했습니다.

제 추방 투표에서는 반대가 3표, 코쿄아님은 2표 나왔습니다.

반대표 던진분들은 글에서 제외하려고 했으나,

거짓말을 하는 등 협조하지 않는 자세를 취해

부득이하게 모두 박제하게 되었습니다.

(신사_추방.jpg)

(코쿄아_추방.jpg)

* *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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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밍채는 누가 데리고 돌아주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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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 * *

↳ 둘다 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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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놓고 둘이 방 파면 잘 차던데

* * *

- 서쪽1 : 아저씨 ㅋㅋㅋ 추방당한 이유는 왜 안 적으세요? 저희 대화 나눈 거 있을 텐데요 ^^ 아저씨가 먼저 길드원들 꼽주고 다녔잖아요 같이 추방당한 코쿄아도 마찬가지고요

* * *

↳ 코쿄아 : 말로 하면 되는걸 추방한게 누군데여 ㅋㅋ 그렇게 꾹참고 있었으면 계속 참고살지 왜 갑자기 추방???

* * *

↳ blueberry : (채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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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뻔뻔하넼ㅋㅋㅋㅋㅋㅋ 지가 먼저 길드원 꼽줘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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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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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으면 같이 안 돌면 되지

* * *

↳ 추방한놈도 당한놈도 음침하다 ㅋㅋ

* * *

- 밍채랑 파티한것부터 잘못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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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22

* * *

↳ 차단필수인데 ㅋㅋ

* * *

↳ 코쿄아 : 글 제대로 안 읽음? 밍채하고 블랙이랑 커플이었다고

* * *

↳ 니들이 안 적었잖아;

* * *

- 얼마나 꼽주고 다녔으면 길드원들이 합심해서 길마를 추방하냐 ㅋㅋㅋㅋ

* * *

↳ 존나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 레전드

* * *

- 성격 존나 피곤하다 유저들 수준 ㅉ

* * *

- 길마가 이상한거지 추방 투표 제안한것도 다른길드 ㅋㅋㅋㅋ 다른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였으면 걔들이 판깔아주냐

* * *

↳ 밍채랑 블랙 커플이라며 그럼 블랙이 제안한거지 이게 어떻게 길마 행실로 돌아감? 길드원끼리 생긴 문젠데?

* * *

- 길마가 극한직업이다

* * *

- 재앙 인원수 보면 답이 나옴

* * *

↳ 미친 ㅋㅋㅋ 줫망했네

* * *

↳ 길드원 우르르 나간데엔 이유가있음 ㄹㅇ

* * *

↳ 나간지 어떻게 앎?

* * *

↳ 여기 대형길드임

* * *

↳ ㅇㅎ ㄱㅅㄱㅅ

* * *

- 댓글에 달린 스샷까지 정독해보면 코쿄아가 제일 피곤한데...???? 여성유저 싫으면 거르면 되는걸 굳이 꼽주는 이유는 뭐임?

* * *

↳ 근데 이거 당해보면 좆같긴함 나는 싫은데 다른 길원이 껴서 가자 이럼

* * *

↳ 저중에서 누가 여자임? 블랙 잔혹동화 westone은 무기 어둠 20강인데 얘네가 버스를 어떻게 탄단거임? 레아 월월월만 여자인가

* * *

↳ 스샷 채팅 보면 west는 남자고 나머지가 여자인듯

* * *

↳ ㅋㅋㅋㅋㅋㅋ 팩트 = 코쿄아보다 잔혹동화가 스펙 더 좋음 ㅋㅋㅋㅋ

* * *

↳ 잔혹동화 의문행 ㅋㅋㅋㅆㅂ

* * *

↳ 기사가 없는데 버스다?!

* * *

↳ ??? : 스펙은 내가 더 구리지만 여자는 누구든 버스충이다!

* * *

- 블랙 형 남잔데.... 예전에 거래할때 민증봤는데 존나 잘생겼음

* * *

↳ 그걸 왜 기억하고 있음?

* * *

↳ 나저렇게 생긴사람 처음봐서... 배우인줄 알고 검색해봤었음 이름 좀 여자같긴 함

* * *

↳ 민증사진은 어케봄? 가리고 보낼텐데

* * *

↳ 안 가리고 보내는 사람들 많음

* * *

↳ 얼굴에 자신있나보지

* * *

- 이름 좀 여자 느낌난다고 꼽준거면 여러모로 레전드ㅋㅋㅋㅋㅋ

* * *

↳ 본인들도 댓글 보고 좆됐단걸 느꼈을듯

* * *

↳ 신사는 그럼 게이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 코쿄아 : 헷갈릴수도 있지 개꼽주네 ㅋㅋ 그럼 남자끼리 저렇게 붙어다니는게 정상임?

* * *

↳ 자아성찰하세요... 스샷보면 님들이 제일 게이같아요...

* * *

↳ 오해했으면 사과를 해야짘ㅋㅋ

* * *

- 블랙은 진짜 불쌍한데? 신사는 여자라고 들이대고 코쿄아는 여자라고 배척함 근데 남자임

* * *

↳ 추방 제안할만하다

* * *

↳ 그래놓고 사사게 박제도 함 ㅋㅋㅋ +남자라고 주장했는데 끝까지 안 믿어줌

* * *

↳ 진짜 여자라면?

* * *

↳ 이름이 뭐길래 일이 이렇게 꼬이냐

* * *

↳ 존나 예쁜 이름인가

* * *

↳ 나 저분이랑 골드거래해서 아는데 그렇게까지 오해할 이름 아님 ㅋㅋ 더 여자 같은 이름 널렸음

* * *

↳ 거래자 이름을 왜 기억함?

* * *

↳ 골드 전부 사갔어

* * *

↳ 기억할만하지

신사는 마지막까지 속이 좁았다. 제목에 배치된 파티원의 이름은 채하를 제외하곤 가나다라 순서였다. 일부러 채하를 앞에 세워 둔 걸 보면, 혼자 온갖 욕을 들어 먹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사게의 여론은 신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댓글을 읽던 주현은 그간의 고통받던 시간을 한 번에 보상받는다고 느꼈다. 신사와 코쿄아가 계속 성별을 착각하지 않았다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잘된 것 같은데?”

채하가 안심하라는 듯 말해도 걱정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었는데, 이젠 정말로 관심을 끌 수 있게 되었다. 주현이 만족스러운 듯 씩 웃으면서 채하와 시선을 맞추는데, 채하는 어째 얼굴이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형, 왜 거래할 때 민증 보냈어요?”

“……그쪽에서 요구했으니까? 나 그때 거래하던 템이 민증 인증 필수였어.”

“사진은 왜 안 가렸어요?”

“……어, 몰랐어. 인증할 때 아예 안 가리는 사람도 많던데.”

다행인 건 주현은 뒷자리라도 가리고 보냈다. 나중에서야 이름과 앞자리만 보여 줘도 된단 걸 알았다. 게임에서 비싼 아이템 먹어 본 게 손으로 꼽힐 정도로 적은데, 거래했던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사람들 덕분에 오해를 씻을 수 있던 거지만.

“……따질 건 내가 더 많지.”

“뭔데요.”

뭐가 그렇게 채하를 서운하게 만든 건지, 금세 토라진 얼굴로 주현에게 대꾸했다.

“코쿄아가 나한테 말 전한 거 알고 있었어?”

“아까 형이 울면서 말해 줘서 알았어요.”

“……울진 않았어.”

“네.”

주현이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자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채하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주현을 고요히 응시하다가, 주현이 몇 번씩 그랬던 것처럼 검지로 볼을 콕 찔러보았다. 채하의 돌발 행동이 뭐 그리 웃긴지 주현의 입이 시원하게 찢어졌다.

“뭐 하는 거야?”

큼지막한 채하의 손이 이번에는 단정한 눈썹을 꾹 눌렀다. 얼굴 이곳저곳을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주현은 그만하라고 말리는 대신에 마음껏 만지도록 기꺼이 얼굴을 내어 주었다.

“형은 왜 그 말 듣고도 남았어요?”

다음은 입술이었다. 채하의 엄지가 입꼬리를 위로 누르듯 당기며 억지웃음을 그려 냈다. 주현은 짓궂은 말로 장난을 칠까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채하가 바라는 답을 순순히 내어 주기로 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리자 채하의 손이 물러났다.

“네가 좋아서.”

주현은 제 앞에 놓인 손가락에 쪽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그래서 그랬나 보지.”

답은 들은 상대방은 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보여 주며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 * *

다음 날, 주현은 퇴근하고 나서야 평온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전날에는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많아서 그대로 게임을 꺼 버렸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새로운 길드 이름에 주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반겨 주는 채팅 창을 확인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blueberry : 어서오세요

[길드] 어스름 : 반가워요 블랙님 ^^

[길드] 블랙 : 안녕하세요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저도 보여줘요 얼굴 ㅠㅠ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 얼마나 잘생긴거임????

[길드] 블랙 : 그분이 착각하신거 같은데..

[길드] westone : 밍채님이 블랙님 예쁘다고 했던게 진짜였던거네요

“넌 왜 괜한 말을 해서…….”

“전 진심이었는데.”

주현이 나무라자, 채하는 길드 창을 종료하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에 주현만 민망해졌다.

[길드] 단공 : 근데 난 이해가 안감

[길드] blueberry : 멍청해서 그래

[길드] 단공 : 아직 말 다 안 했어....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처럼 잘생기고 게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분이 왜 민채를?

[길드]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blueberry : 그건 나도 궁금함

[길드] 어스름 : 사고 같은 거지...^^

어스름의 말대로 그날의 일은 사고에 가까웠다. 랭크전을 하지 않았다면, 실버 티어에 배정받지 않았다면, 계속되는 패배에 심신이 지치지 않았다면 채하와 만나지 못했을 테다. 한순간의 실수로 엮여 여기까지 온 관계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길드] 단공 : 민채는 게임 좀 하는 것 빼곤 없는데

[길드] 블랙 : 다른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길드] westone : ?

[길드] 단공 : 네?

[길드] 어스름 : ??????????

[길드] blueberry : 글렀다 이건

게임을 월등히 잘해서 그렇지 다른 걸 나쁘다고 하기엔 모호했다. 실제로 채하를 만난다면 얼굴에 대한 단공의 생각도 바뀔 것이라고 주현은 확신했다. 성격은…… 이만하면 귀여운 거 아닌가? 주현은 시선을 내려 제 어깨에 엉겨 붙은 채하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확성기] 신사 : 어둠의 강화석 싸게 팝니다 거래소에 올려둠

[길드] westone : 쟨 진짜 뻔뻔하네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

애석하지만 신사와 코쿄아가 게임을 접는다거나 사과문을 올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글을 삭제하고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미리 글을 캡처해 두었던 블루베리가 전문을 다시 사사게에 올린 덕분에 잠깐 시끄러웠으나 둘이 묵묵부답으로 응하니 관심도 꺼져 갔다.

“……채하야. 너 뭐 해?”

어깨에 묵직하게 달려 있던 게 사라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덤덤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채하가 보였다. 무엇을 하나 화면을 엿보니 캐릭터를 끌고 거래소에 가 있었다. 느닷없이 거래소에 갈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래소에 아이템을 올렸을 때, 가장 만나기 싫은 상대는 가격을 깎아 달라고 부탁하는 유저가 아니었다. 아이템이 판매될 수 없게끔 앞길을 막는 1골드 빼기를 하는 유저였다. 1 빼기 하는 유저를 계속해서 만나면 다음 날까지 아이템이 판매되지 않아서 인벤토리로 들어오는 경우가 무수했다.

채하는 지금 그 귀찮은 짓을 하고 있었다.

“……계속 방해할 거 아니면 헛수고야.”

어둠의 강화석은 수요가 많은 아이템이어서 채하가 1 빼기를 해 봤자였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타이르는 주현에 채하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확성기로 템 파는 유저들은 급전이 필요한 거예요.”

“…….”

“지금 벨트 매물 싸게 나와서 이거 사려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벨트가 팔리기 전까지 골드를 수급하지 못하게끔 막겠다는 말이었다. 보통은 급할 때 지인에게 골드를 빌리거나 하지만, 사사게에 올라 신용이 떨어진 신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코쿄아밖에 없을 터였다.

“네가 사면 되잖아?”

“전 필요 없어요.”

음률 벨트를 착용하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었다. 채하는 언젠가부터 스펙업을 하지 않아서 아이템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장비 상관없이 잘하긴 하지만, 주현은 그래도 성직자 1위 자리는 다시 탈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길드] westone : 저 벨트 샀어요

[길드] westone : [어둠이 깃든 식탐의 벨트]

[길드] 레아 : 우와

채하가 보고 있던 벨트 매물이 모니터 화면에서 사라지고 길드 채팅에서 서쪽이 등장했다. 신사와 서쪽은 여러모로 정반대의 인간인 듯했다. 거래소에 어둠의 강화석을 잔뜩 올려 두었던 채하는 수수료를 내며 매물을 거둬들였다.

[길드] 단공 : 밍채 뭐하는거임?

[길드] blueberry : ?

[길드] 단공 : 어강 올렸다가 빼는데?

[길드] westone : 신사가 아까 확성 쐈잖아요 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ㅆㅂ 지독하다

[길드] blueberry : 너도 길드원 아니었으면 똑같이 당했을듯

[길드] 단공 : ㅠ_ㅠ

평온에서의 하루는 무탈하게 흘러갔다. 재앙에서 쫓겨나 터를 옮기게 된 유저들은 서서히 평온에 물들어 갔다. 원래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던 길드이기도 하고, 어스름이 워낙에 중재를 잘해 주는 터라 힘들이지 않고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일곱 번째 악마 레이드인 벨페고르가 업데이트된 날, 평온은 최초로 두 파티가 나왔다. 한 파티 인원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사탄 때를 고려하면 큰 발전이었다.

[확성기] 신사 : 가족 같은 <재앙> 길드원 모집중

[확성기] 신사 : 만렙길드/길드스킬/부캐가입자유

[확성기] 신사 : 가입&문의는 귓말

[확성기] 프시케 : 가 족같은 길드겠지

[확성기] tal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혼돈의 설화는 길드 이름 변경이 불가능했다. 만렙 길드인 재앙을 놓지 못한 신사는 뻔뻔스럽게 확성기를 쏘아대며 길드원을 모집했다. 그새 코쿄아는 재앙의 운영진이 되었다.

사사게에 올랐던 일 때문인지 몇몇 유저들은 랜덤 매칭에서 재앙 길드원을 만나면 방을 깨거나 나가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확성기로 억울함을 토로하던 길드원들도 나중에는 지쳐서 길드를 탈퇴했다. 그렇게 재앙 길드의 인원은 점점 줄어들었고, 길드 유지를 위해서 신사는 욕을 먹어 가면서도 꿋꿋하게 길드원을 구했다.

[길드] 잔혹동화 : 망했으면 좋겠는데 고생한거 생각하면 좀 슬프네요 ㅎㅎ

[길드] 레아 : ㅠㅠ

[길드] westone : 길포[1] 신사보다 제가 더 많이 모았는데 ㅡㅡ

[길드] 단공 : 근데 왜 운영진 아녔어용???

[길드] westone : 걔가 저 싫어해서 절대 안 줬어요 ㅋㅋㅋ

[길드] 어스름 : 평온에서 드리겠습니다 ^^

[길드] westone : 헐 진짜 주셨네

신사가 운영진을 뽑는 기준이 뭔진 몰라도, 초창기부터 쭉 재앙에 있었던 서쪽에겐 단 한 번도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둘은 파티를 함께하는 경우도 드물었으니 길드원들 대다수는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어렴풋하게 눈치챌 정도였다. 길드 채팅에 함께 나타날 때마다 의견이 갈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모든 건 신사가 일방적으로 포병을 깎아내리며 가만히 있던 서쪽을 건드린 탓에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이 맺혀 있던 서쪽은 어스름에게 운영진 자리를 받으며 비로소 그간의 억울함을 덜어 낼 수 있었다.

[길드] westone : 그런데 이렇게 막 주셔도 되나요??

[길드] 블랙 : 밍채도 운영진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까는 밍채님 그렇게 안 나쁘다면서요

[길드] 단공 : 블랙님 개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어스름 : ^^

[길드] 블랙 : ㅎ

[길드] 레아 : 밍채님 말 없으셔서 무서워요

[길드] 밍채 : 형 말이 맞아요

[길드] blueberry : 전 이게 더 무서워요

[길드] 단공 : ㅆㅂ ㅇㅈ

* * *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 모르지만, 주현은 사소한 곳에서 채하의 사랑을 느꼈다. 채하의 캐릭터 선택 창을 볼 때 유독 그런 기분이 들었다. 도톰한 책을 무기로 든 캐릭터들 사이에서 홀로 커다란 검을 메고 있는 캐릭터라든가. 두 글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돋보이는 다섯 글자와 여덟 글자 닉네임이라든가.

출근 준비를 마친 주현은 나가기 전, 침대에 누워 있던 채하의 볼록한 볼을 콕 찔러 보았다. 자는 줄 알았던 채하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새까만 눈동자가 주현을 응시했다. 볼에 닿은 손가락에 채하가 얼굴을 문질렀다.

‘형, 오늘은 손 안 잡아요?’

약 올리듯 눈앞에서 팔랑팔랑 창백한 손이 흔들렸다. 그에 주현은 당황하지 않은 척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마지못해 채하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아침마다 몰래 잡았던 건데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직 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하는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주현의 손을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저 형 캐릭터로 게임 해도 돼요?’

‘……어, 뭐 그러든가.’

대답하면서도 사사게에 갈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차피 같이 게임을 하는 채하가 사사게 스타인데 한 명 더 유명해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을 듯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중, 채하로부터 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채하] 형 언제 와요?

[윤주현] 나 집 들렀다가 가려고

[채하] 네

사귀고 난 후부터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채하는 주현의 자취방을 더 좋아했다. 책상이 좁은 편이라서 노트북 놓고 같이 게임도 못 하는데, 뭐가 좋은지 주현으로선 알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한 주현은 경험에 비롯된 불신에 컴퓨터 전원부터 켰다. 오는 길에 사사게를 훑어봤을 때 특별히 올라온 건 없었지만, 게임에서도 조용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왜 이제 와요 ㅡㅡ

[길드] 단공 : 블랙님 ㅠ_ㅠ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레아 : 블랙님!!!!!!!

[길드] 잔혹동화 :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들 애타게 제 닉네임을 부르짖는 걸 보니 주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친구 창을 확인해 보자 역시나 채하는 로그인 중이었다.

[길드] 블랙 : 안녕하세요

[길드] westone : 장비창 보세요

[길드] 잔혹동화 : 얼른 봐주세요 ㅠㅠ

해킹범이라도 왔다가 간 걸까. 불안하게 굴러가던 주현의 눈동자가 장비 창을 열고 휘둥그레졌다.

“뭐야.”

어둠과 음률이 섞여서 혼잡했던 장비 창이 왼손 반지를 제외하곤 깔끔하게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검은색은 어둠 장비의 고유색이었다. 아이템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려놓자 모조리 치명타 확률 증가 옵션이 달려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제작자의 닉네임엔 하나같이 밍채가 자리했다.

[길드] 레아 : 블랙님 어디 가셨어요!!!

[길드] blueberry : 기절하신듯

[길드] 단공 : 나였어도 기절함

[길드] 단공 : 이제 포기할게요...... 저도 저건 못해드려용 ㅠ0ㅠ

[길드] westone : 블랙님 ㅋㅋㅋ 얼른 밍채님 장비도 봐주세요

서쪽의 말을 듣고 다급하게 마우스를 움직인 주현은 채하의 장비 창도 재빠르게 훑었다. 주현의 장비 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했다. 투구, 상의, 하의, 장갑, 신발, 귀고리, 목걸이, 반지, 벨트, 팔찌. 똑같이 왼손 반지를 제외한 모든 곳에 블랙이 새겨져 있었다.

채하는 주현과 만나기 전부터 어둠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으니, 동일한 아이템을 새롭게 맞춘 거였다. 오로지 장비 제작자 닉네임을 블랙으로 바꾸기 위해서.

재료가 부족했는지 강화 단계가 어중간해서 채하의 랭킹은 더욱 낮아져 있었다.

[길드] 블랙 : 왜 저런..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사랑이란 그런 거예요

어둠 벨트 매물이 저렴하게 올라왔을 때, 채하가 필요 없다고 답한 이유를 이로써 깨닫게 되었다. 돈 많은 랭커들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을 채하는 기어코 해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통일된 제작자 닉네임을 보면 주현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길드] 밍채 : ㅠㅠ

[길드] 블랙 : ㅎㅎ 감동이다

[길드]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

[길드] 월월월 : 밍채님 채팅이에염 ㅋㅋㅋㅋ

[길드] 레아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blueberry : 진짜 ㅁ친놈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채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 냈다.

[길드] 블랙 : ㅎㅎ 감동이다

주현은 제가 친 채팅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신에, 채하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길드] 단공 : 블랙님.........이어도 못 참아요

[길드] 단공 : 저 토나와용 ㅠ

[길드] westone : 어둠 받았으면 저 정돈 해줘야죠 ㅋㅋㅋㅋㅋㅋ

[길드] 잔혹동화 : 두분 진짜 사귀는거예요?

[길드] 잔혹동화 : 커플 중에도 저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못 봐서...

[길드] 단공 : 원래 민채가 하는 짓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어용 ^_^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채팅으로 웃고 떠들던 중 별안간 월월월이 둘에게 질문했다.

[길드] 월월월 : 두분 다 제작 만렙이에염?

[길드] 단공 : 우욱............ 제작 만렙이라니

[길드] 블랙 : 저 액세서리 제작만 올려뒀을텐데

[길드] 단공 : 헐 밍채 캐시템 썼음?

[길드] 블랙 : ?

쉴 새 없이 제작을 돌려도 반나절 만에 장비 제작 만렙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채하는 옵션작과 강화까지 마무리 지어놨으니 수월한 과정이 더더욱 수상했다.

[길드] 잔혹동화 : 그걸 사는 사람이 있다고요?

현질을 대놓고 유도하는 혼돈의 설화는 제작 시간 단축 아이템을 캐시로 내놓았다. 이걸 누가 사냐는 비판이 잇따랐지만, 아직도 종종 사는 사람이 있긴 한 듯싶었다.

[길드] 블랙 : 안 샀겠죠..

[길드] 밍채 : 샀어요

[길드] 블랙 : ?

그 사람이 주현의 곁에 있었다. 주현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둘의 장비 창을 열람하다가 의문이 생긴 레아가 물었다.

[길드] 레아 : 반지 한쪽은 왜 비어있는 거예요?!

[길드] westone : 블랙님 반지는 제가 사드릴까요~~~~~?

[길드] westone : 아 ㅋ 바로 대련 걸려오네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과 채하의 캐릭터는 똑같이 왼손 반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현은 사탄 반지가, 채하는 아스모데우스 반지가 없었다. 각각의 반지는 서로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비워 둔 장비 창을 보고 주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하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언제 줄지 타이밍만 엿보던 물건을 들고 서둘러 채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걷는 널찍한 보폭이 주현의 다급한 마음을 대변했다. 어느새 공동 현관을 지나서 문 앞에 다다라 초인종을 누를 때였다. 벌컥 열리는 문에 놀라서 뒷걸음질 치자 커다란 그림자가 주현을 덮쳤다.

채하가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매달리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팔을 든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주현은 채하에게 들어가자는 의미로 등을 토닥이며 누가 볼세라 현관문부터 닫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전해야 할지 주현을 머리 아프도록 고민하게 한 검은 케이스를 손에 쥔 채로 물었다.

반지를 어둠으로 바꾸지 않는 채하를 보고 서쪽이 프러포즈 타령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은 아니었으나, 눈치 빠른 채하가 선수 친 바람에 결국에는 그렇게 되어 버렸다.

“형이 아침마다 저 만졌잖아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손이잖아.”

“아무튼요.”

처음에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충 감만 잡았다. 나중엔 세상모르고 자는 듯싶길래 종이를 잘라서 표시해 보기도 하고, 막판에는 대놓고 줄자를 가져와서 손가락에 둘러보았다. 채하가 그걸 다 지켜봤을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해졌다.

“제 반지 주세요.”

맡겨 놓은 것처럼 구는 태도가 뻔뻔스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주는 데에 바빴던 채하가 처음으로 주현의 것을 빼앗고자 했다. 반지를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엉겨 붙은 몸을 떼지 않는 탓에 주현은 안긴 채로 꼼지락거리며 작은 케이스를 열었다.

“……손 좀 줄래?”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리면서 어수선하게 구는 채하에게 주현이 마지못해 말했다. 몸이 조금 물러나며 아침마다 몇 번이고 만지작댔던 하얀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반지 끼우다가 손가락을 다칠 일이 없단 걸 알지만, 주현은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하여 약지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으며 제 손을 구경하던 채하는 케이스에 남은 반지 하나를 빼내 주현의 손을 붙잡고 똑같은 자리에 끼워 주었다. 열심히 골랐다고 자랑하려 고개를 든 순간에 그대로 입술이 먹혀들었다.

한참 뒤 게임에 다시 접속했을 때, 주현의 우편함에는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가 도착해 있었다. 제작자의 닉네임은 당연하게도 밍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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