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승부 (9/13)

9. 승부

임채하의 인성으론 자애로운 성기사 플레이를 할 수 없단 건 알았지만 알려 준 정보가 몽땅 거짓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성기사 300위는 당시 주현이 있던 곳이었다.

‘알고 말한 건가?’

임채하가 자신이 블랙이란 걸 언제부터 알았을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지값을 두고 말다툼을 했던 날에 도달했다. 아마도 그때 계좌주인 윤주현이란 이름에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 이후로 임채하가 쓸데없는 연락을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시간이 지난 일이라 가물가물해진 기억을 힘겹게 더듬었다. 다 알면서 지금까지 숨긴 채하가 괘씸했고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궁금했다. 채하에게 물어보면 명쾌한 답을 받아 낼 수 있을 테지만 주현은 채하에게 귓속말을 보내는 대신 다른 행동을 취했다.

《 밍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친구를 삭제하기 무섭게 신청이 도착했다. 친구 삭제를 했는데 커플이 여전히 유지가 되는 게 신기했다. 커플까지 끊기엔 그동안의 고생을 견딘 자신의 수고가 지워지는 기분이라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친구 신청을 거절하자 활자에서 뻔뻔함이 읽히는 채하의 채팅이 도착했다.

[귓속말] 밍채 : 형 친구 해주기로 하셨잖아요

채하의 캐릭터인 밍채 앞에는 주현의 캐릭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주현의 캐릭터가 입은 옷은 뇸뇸치킨과 콜라보한 아바타였다. 아바타 쿠폰을 양보받은 주현은 채하에게 갖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 채하는 마지못해 나중에 친구를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밍채에게 세 번째 글자를 건네받지 못했지만, 주현은 이로써 이름을 완벽히 완성할 수 있었다. 임채하였다.

《 밍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하는 수 없이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 약속하긴 했으니까……. 능구렁이 같은 채하의 성격상 주현이 도망친단 것까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커플인 탓에 친구 창 가장 위편에 자리 잡은 밍채의 닉네임을 복잡한 눈으로 훑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굳게 믿던 귀여운 밍채의 정체가 대학교 2학년 군필 복학생이었다. 어쩐지 평일 오전에 목격담이 들려오던 게 이상했다. 학교를 불성실하게 다니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학점 잘 챙기는 임채하였다니, 게임 때문에 성적 말아먹은 건 아니라서 그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매번 비웃던 놈이 별안간 앞에 나타나 친해지고 싶다느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은 건 무척 수상한 일이었다. 의도가 뭘까 머리 아프게 궁리하던 날이 주현을 스쳐 지나갔다.

채하와의 기억을 짚어 가며 회상할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경찬과 술을 마신 것도 어쩌면 저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찬이 형이라고 부르라 해도 죽어도 선배님 소리를 고집하던 놈이 자신에게는 형이란 호칭을 허락받고 싶어 했으니까. 게임에서는 경찬이 메마른 땅에 진입하기만을 기다렸다가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자신에게만 쌀쌀맞던 게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했으니 그걸 감사해야 할지, 별난 놈이라고 혀를 차야 할지. 우습게도 원래 그런 놈이란 걸 알게 되니 서럽던 그때의 기억이 한결 괜찮아졌다.

주현이 블랙이 아니었다면 임채하가 순순히 사과하지 않았을 테다. 오해였다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을 테고,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는 헛소리를 하며 옷소매를 붙잡지 않았을 테고, 아바타 쿠폰을 기꺼이 양보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지는 건 주현이 블랙인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너 언제부터 알았어

[귓속말] 밍채 : 형이 계좌 알려줬을 때요

[귓속말] 밍채에게 : 왜 말 안 했어

[귓속말] 밍채 : 친삭할거잖아요

맞는 말이다. 밍채가 채하라는 걸 더 빨리 알았다면, 친구 목록에서 채하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 앞당겨졌을 것이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게임에서까지 채하에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고,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넌 그래놓고 나랑 사귀고 싶어 한 거야?

[귓속말] 밍채 : 사귀고 싶다곤 안 했는데

주현도 뱉어 놓고 아차 했다. 채하는 정확하게 친해지고 싶다고 했었다.

[귓속말] 밍채 : 형 말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해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ㅅㅂ

한때 좋아했던 후배에게 게임 채팅으로 고백을 받는 순간이었다. 고백이라고 하긴 좀 모호하고 채하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 중인 모양이지만. 자기 마음이 어떤지 자각도 없이 친해지고 싶다고 무작정 들이댔단 게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하는 놈이지?

[귓속말] 밍채에게 : 난 너랑 만날 생각 없어

[귓속말] 밍채 : 저도 형한테 만나달라고는 안 했어요

……진짜 뭐 하는 놈이지? 뻔뻔스러운 채팅에 주현은 황당해졌다.

[귓속말] 밍채에게 : 친구는 내가 뭐 약속한 게 있으니까 계속 두는데

[귓속말] 밍채 : 네

[귓속말] 밍채에게 : 앞으로 너랑 게임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귓속말] 밍채 : 네

채하가 가장 우려했을 말을 냉정하게 뱉는데도 꼬박꼬박 답이 돌아왔다. 대답만큼은 누구보다 잘하는 걸 보면 제가 예뻐했던 중학교 2학년의 밍채가 아른거렸다.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게 제가 알던 채하라니까 아직도 얼떨떨했다.

주현은 홧김에 게임을 꺼 버렸다.

* * *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사탄 어떠세요?

[길드] 월월월 : 인사는 어디갔냐구염 ㅠ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westone : 저한텐 저게 인사예요

[길드] 블랙 : 안녕하세요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어김없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혼돈의 설화에 접속했다. 주현은 간다고 말도 안 꺼냈는데 서쪽은 당연하게도 먼저 초대를 보내왔다. 이제는 밍채와 함께 게임을 하지 않으니 주현도 새로운 파티를 구해야 했다. 수락을 누르고 입장하자 파티에는 월월월과 레아가 있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패치 내역 보셨어요?

[파티] 블랙 : 아뇨

[파티] westone : 아스모데우스 구출 패턴 캐릭터끼리 뽀뽀하는 거 역겹다고 수정됐어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westone : 이제 볼뽀뽀래요 ㅠ 아직 월월님 캐릭터랑 못 해봤는데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그렇게 문의가 많았어요?

[파티] westone : 다른 파티에서도 일부러 안 구하는 일이 있었나 봐요 ㅋㅋㅋ

하긴 신사와 같은 파티고 신사가 잡혀갔다면 누구도 나서서 신사를 구하지 않았을 테다. 신사와 친한 코쿄아라면 모를까……. 신사가 내보였던 호의가 성별을 오해해서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신사가 채하를 견제했던 일 때문인지 주현은 아직도 껄끄러웠다.

[파티] 월월월 : 수정돼서 다행이에염

[파티] 레아 : 전 서쪽님이랑 해보고 싶었는데 ㅠㅠ

[파티] westone : ㅠㅠ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아 밍채님 접속 중이에요? 초대할까요?

늘 붙어 다니던 게 채하였으니 서쪽이 던지는 질문은 당연했으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티] 블랙 : 바쁘대요

[파티] westone : 헐 또 학원 다녀요?

[파티] 블랙 :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개인 사정이라

채하가 이제 학원에 다니지 않고, 현재 접속 중이며, 주현의 초대를 기다리며 광장에서 얌전히 대기 중이란 걸 알았지만 없는 사람 취급하고 넘겨 버렸다.

[파티] westone : 그러면

[파티] 블랙 : 안돼요

[파티] 월월월 : ;;;;;;;;;;;;;;;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대로 출발하자고 말할 서쪽의 의도가 뻔히 읽혔다.

[파티] westone : ㅠㅠ

[파티] 월월월 : ;;;;;;;;;;;

[파티] westone : 공개방으로 만들게요

[파티] westone : 공컷 없이 괜찮죠?

[파티] 레아 : 네!!!

주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쪽이 만든 대기실에 입장했다. 방금 막 집에 돌아와서 몸이 지쳐 있었고, 어제 채하에게 뒤통수를 맞은 충격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 못 버티고 죽는다고 뭐라 할 서쪽이 아니란 걸 알지만, 1인분은 하고 싶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westone : ?

[파티] 월월월 : 안녕하세염

[파티] 레아 : 밍채님 안녕하세요!!!

[파티] 밍채 : 안녕하세요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2인분 이상은 해주실 건데 이대로 출발하면 안 되나요?

[파티] 월월월 : 되겠냐구염;;

[파티] westone : ㅠㅠ

평소 같았으면 대기실에 입장하자마자 옆에서 엉겨 붙었을 채하지만 어제 했던 대화 때문인지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얼른 게임이 시작하기를 바랐다. 공개 방으로 개설한 이상, 채하를 쫓아낼 자격이 없었다.

[파티] westone : 두 분 싸우셨어요?

[파티] 레아 : 저도 그거 묻고 싶었어요!!!

입장하고 나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니 의심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주현이 바쁘다고 했던 채하가 제 발로 나타났기도 했고. 부정한다고 속진 않겠다만 주현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 블랙 : 아뇨

[파티] westone : 아 그러세요?

[파티] westone :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래요

[파티] 블랙 : 결혼 안 했어요

[파티] westone : 언젠간 하시겠죠

[파티] 블랙 : ㅅㅂ

결혼이고 뭐고 관계가 파탄이 나기 직전이었으나 서쪽은 절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파티] westone : 사람이 안 오네요

[파티] 월월월 : 출발할 생각 마세염

[파티] westone : 단호하네..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파티원 구성만 보아도 다른 때였으면 금방 인원이 찼을 텐데, 어제 업데이트한 아스모데우스 때문인지 방에는 파리만 날렸다. 서쪽의 말대로 이대로 출발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익숙한 닉네임의 유저가 대기실에 입장했다.

[SYSTEM] 코쿄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코쿄아 : 안녕하세여 ㅎㅎ

[파티] westone : 코쿄아님 사탄 안 가셨어요?

[파티] 코쿄아 : 넹

[파티] westone : 여섯이니까 허락해주세요 월월님

[파티]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월월월 : 가염

[파티] westone : 앗싸

코쿄아가 파티에 합류하고, 게임이 시작되어 로딩에 걸리고, 모니터 화면에 푸른 언덕이 펼쳐질 때까지 채하는 말이 없었다. 아마 제 눈치를 보는 듯싶었지만, 그간 저질렀던 일이 아직도 얄미웠으므로 주현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듬직한 서쪽의 캐릭터가 사탄이 있을 나무로 달려가는 동안, 주현은 채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밍채에게 : 힐 제대로 해

[귓속말] 밍채에게 : 나랑 게임하는 거 아니니까

[귓속말] 밍채 : 네

채하에게 신사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채하는 이번에도 성실히 답했다.

다가온 서쪽 탓에 염소가 시끄럽게 울면서 흩어지고 사탄이 잠에서 깨어나며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치유의 가호 》

채하 말고도 힐러가 둘이나 더 있었지만, 첫 번째로 단체 힐을 사용하는 건 채하의 몫이 되었다.

[파티] 월월월 : 제가 해도 되는뎀

《 영웅들의 합창 》 《 독주 》 《 주신 리라의 은총 》

뒤이어 월월월과 코쿄아의 버프가 쏟아지고 주현의 캐릭터 위로는 투명한 방어막이 덮어졌다. 성직자의 스킬이었다. 당연히 채하가 줬겠거니 생각하고 사탄에게 다가가는데, 맞은편에 똑같은 방어막을 달고 서 있는 코쿄아의 캐릭터가 보였다.

받는 공격의 피해량을 일회성으로 감소해 주는 스킬 ‘빛의 희생’은 본인에게 사용이 불가했다. 언제나 주현의 것이었던 채하의 방어막이 코쿄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제대로 힐 하라고 채하를 꾸짖었던 건 주현이었지만 막상 본분을 다하며 게임을 하는 채하를 보니 뱉은 말을 철회하고 싶어졌다.

주현이 코쿄아의 성별을 물어봤으니 코쿄아를 수상하게 여겼단 걸 알고 있을 텐데, 일부러 그러는 건가 의심할 때면 채하는 다른 파티원 또한 지극정성으로 보호했다. 사탄에게 스쳐 조금이라도 피를 잃으면 곧장 채하가 힐을 넣어주었다.

[파티] 레아 : ???

[파티] 월월월 : ㄷㄷ

파티 힐은 모를까, 채하에게 개인 힐을 처음 받아 보는 파티원들은 이 상황을 어색해했다.

[파티] westone : 밍채님 저도 힐 주세요~

서쪽은 채하에게 힐을 받으려고 일부러 사탄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힐러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만족스러워야 할 텐데 주현은 오히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힐에 마나를 쓰는 걸 아까워하는 녀석이 제 말에 선뜻 뜻을 굽혔다. 파티원 누구든 조금만 대미지를 입어도 채하가 재빠르게 힐을 넣어 주니, 힐러인 월월월과 코쿄아는 할 일이 없어서 공격과 버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힐 진짜 열심히 주시는데

[파티] westone : 클리어 시간은 늘어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파티] 월월월 : 저도 힐 하고 싶어염 ㅠㅠㅠㅠㅠ

[길드] 코쿄아 : 저 밍채님한테 갠힐 처음 받아봐여 ㅋㅋ

[길드] 레아 : 저두요!

[길드] westone : 다 똑같지 않을까요 ㅋㅋㅋ

[길드] 신사 : 밍채님 드디어 정신 차림?ㅋ

[길드] 코쿄아 : 넹 힐 잘 주던데여? ㅋㅋㅋㅋ

주현은 채팅 창과 힐 하느라 바쁘게 책장을 넘기는 채하의 캐릭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에 힐을 오죽 안 줬으면 신사와 코쿄아가 저렇게 말할까 싶기도 했지만, 채하에게 힐을 시킨 주현으로선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채하는 제 말대로 성실히 힐에 전념했을 뿐이었다.

딴생각하느라 사탄에게 캐릭터가 뺨을 얻어맞자 곧장 힐이 들어오며 머리 위로 하얀 깃털 표식이 떠올랐다. 파티에 성직자가 둘이었지만 채하가 준 힐일 게 뻔했다.

평소와 플레이 방식이 달라져서 마나 관리가 불편할 텐데 채하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서 묵묵히 힐에 임했다. 설렁설렁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캐릭터인 밍채가 채하를 닮아서인지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처음 커스터마이징을 넘겨줬을 때 자길 닮았다고 하길래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그 말이 진짜였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청초한 얼굴의 캐릭터가 책장을 넘겼다.

현실에서는 일부러 아메리카노를 먹이던 녀석이 게임에서는 주현에게만 극진히 힐을 줬다.

블랙으로 딱히 밍채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는데, 혼자 친밀감을 느끼고 마음을 연 채하가 신기했다. 어스름을 밀어내고 채하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던 건 오히려 주현이었다. 어스름에게서 채하를 빼앗는 데에 성공했고, 그 밍채인 채하는 주현과 함께 게임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곱씹을수록 씁쓸했다.

임채하와 게임에서 붙어 다니다 보니까 똑같은 인간이 된 모양이었다. 채하가 다른 유저에게 힐을 주는 게 섭섭했다. 채하가 사사게에 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채하에게 자신이 유일한 예외이길 바랐다.

주현은 임채하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길드] 코쿄아 : 부활도 해주는데여 ㅋㅋㅋ

마침 채하는 죽은 코쿄아에게 빛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주현은 사탄에게 다가가 검을 크게 휘두르며 시선을 끌었다. 희번덕이는 사탄의 눈이 주현의 캐릭터에게 닿았다. 주현은 사탄이 꽂는 창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 냈다.

[파티] 코쿄아 : ?

코쿄아가 살아나기 직전, 채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킬 동작을 끊어 버리고 주현에게 힐을 보탰다. 단번에 목적을 바꾼 채하를 대신해 월월월이 다가와 코쿄아를 살려 냈다.

코쿄아를 부활시키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용케도 주현의 체력이 깎인 걸 알아차렸다. 채하가 아낌없이 마나를 퍼부어 힐을 넣어준 탓에 체력이 이미 원상태로 돌아갔지만, 머리 위로 떠 오르는 하얀 깃털 표식은 여전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그만해

[귓속말] 밍채에게 : 마나 아까워

말 잘 듣는 채하답게 힐이 뚝 끊겼다. 밍채가 채하란 걸 알게 된 이후로 속내를 읽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주현은 복잡한 심경이 훤히 드러나는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올라오는 채하의 채팅을 읽고 속이 뜨끔해졌다.

[귓속말] 밍채 : 형 일부러 맞았잖아요

‘……어떻게 알았지?’

[귓속말] 밍채에게 : 아닌데?

[귓속말] 밍채 : 네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답은 성실했다. 잠시 멈춰 있던 채하의 캐릭터는 다시 파티원들에게 힐을 나누어 주며 맵을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방어막을 만들어 파티원을 지키는 ‘빛의 희생’은 또다시 코쿄아의 몫으로 돌아갔다. 힐러는 생존에 취약하니 보호를 받는 게 당연했지만, 주현은 계속 채하에게 서운해졌다. 언제 다시 걸어 줬는지 모를 코쿄아의 ‘빛의 희생’이 주현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런 걸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파티] 코쿄아 : 수고하셨어여

[파티] westone : 이제 레비아탄 갈까요?

[파티] 월월월 : 해산은 없냐구염 ㅠ

[파티] westone : 당연한걸 ^^

어느덧 사탄을 처치하고 화면이 밝아지며 인벤토리로 보상이 들어왔다. 누구 하나 특출난 것 없이 모조리 잡템을 받아 갔다. 이어서 서쪽이 레비아탄 방을 개설하는 동안,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를 힘껏 노려보았다. 제가 열심히 빚어서 만든 커스터마이징이었지만 오늘따라 얄미워 보였다.

[SYSTEM] 짠호박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길드] westone : 헐

[길드] westone : 비공으로 만드는걸 깜빡했네요 ㅠ

[길드] 블랙 : 괜찮아요

사탄도 공개 방이었으나 유저가 오지 않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출발해 버린 거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였고 다들 개의치 않는 반응이었다.

[파티] 짠호박 : ㅎㅇ

[파티] westone : 안녕하세요~

[파티] westone : 아스모데우스 때문에 사람이 너무 안 와서 그런데

[파티] westone : 이대로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파티] 짠호박 : ㅇㅇ ㄱ

[파티] westone : 그럼 출발할게요~

짠호박의 직업은 사냥꾼으로 손에는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짠호박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쪽이 게임을 시작하고 로딩 창에 진입했다. 악마 레이드 하나가 끝나자마자 새 레이드를 시작하는 일이 피곤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다들 웬만큼 고인 유저들이라 그런지 중간에 빠지는 이가 없었다. 월월월도 괜히 엄살 한 번 부린 거지 지친 기색이 없이 따라왔다.

《 빛의 희생 》

맵에 입장하자마자 동시에 떠오른 상태 아이콘에 주현은 눈알을 굴려 채하의 캐릭터와 코쿄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코쿄아에게 돌아갈 줄 알았던 스킬이 예상을 벗어나 주현에게 도착했다.

채하가 다른 스킬을 먼저 사용한 탓에 단체 힐 스킬은 월월월이 선점하게 되었고, 코쿄아의 ‘빛의 희생’은 월월월에게 씌워졌다. 사탄에서 단체 힐을 쓰던 건 채하였다. 채하가 다음 스킬을 쓰려고 할 때, 주현은 이미 코쿄아에게 방어막을 받은 상태였다.

설마…….

‘주고 싶었는데 못 준 건가?’

스킬엔 쿨타임이 있기에 한 번 타이밍이 엇갈리면 방어막을 주기가 힘들었다. 채하에게 방어막을 받으려면 기존 방어막이 깨져야 하는데, 주현이 사탄에게 잘 얻어맞지 않기도 했고 깨질 때마다 코쿄아가 잽싸게 새로운 방어막을 제공한 탓도 있었다.

입술을 물어 웃음을 꾹 참은 주현은 레비아탄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옆엔 공격력 버프를 받고 신이 난 서쪽이 함께였다. 체력이 빠르게 닳자 레비아탄은 공격을 피하고자 바다에 몸을 숨겼다가 뒤편에서 나타나 코쿄아를 덮쳤다.

[길드] westone : 코쿄아님 일부러 안 피하시는 거예요?

주현도 이전부터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코쿄아의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탄 때는 한 번 죽기까지 했었고 지금은 레비아탄이 기습 공격을 할 걸 알고 있었으면서 피할 생각 없이 안일하게 굴었다.

[길드] 코쿄아 : 아 넹 ㅋㅋ 밍채님 힐 좀 받아보려구여

[길드] westone : 아

서쪽도 사탄 때 채하에게 힐을 받기 위해서 고의로 대미지를 입었으니 코쿄아의 행동을 지적하기 멋쩍은 상황이었다. 채하는 재앙 길드 채팅에서 코쿄아가 자기를 조롱하고 있단 것도 모르고 체력이 깎인 코쿄아에게 꼬박꼬박 힐을 넣어 줬다.

한동안 코쿄아를 괴롭히던 레비아탄은 다시 앞으로 헤엄쳐 와 뱃머리를 깨물었다. 맛도 없을 배를 부지런히 씹어 먹는 레비아탄을 바라보며 주현은 초기에 채하와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레비아탄을 처음 클리어했던 날이었다. 긴장한 탓에 경직 대신 다른 스킬을 누르게 되고, 실수를 눈치챈 채하가 빛 기둥을 쏟아부으며 대미지로 경직을 넣었었다. 그 일로 채하는 버그를 의심받으며 사사게에 박제되었다. 채하와 함께 사사게에서 구르던 시절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느라 하마터면 경직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주현의 캐릭터가 어깨를 부딪치자 레비아탄이 뒤로 밀려났다. 채하를 선두로 유저들의 감사 인사가 떠오르고 게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파티] 짠호박 : ㅋㅋ이걸 못피하네

정정한다. 파도 패턴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탄은 채하와 수없이 재도전했기에 패턴을 모를 수가 없었고, 아스모데우스는 아직 횟수가 초기화되지 않았기도 하고 이제 막 나온 레이드라 숙련이랄 게 없었다. 반면에 레비아탄은 레이드가 업데이트된 지 시간이 꽤 지났고 파도 패턴은 중간에 한 번 나오기에 따로 연습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그 탓에 운 좋으면 피하고 손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파도에 휩쓸리는 일이 빈번했다. 미끄러진 주현의 캐릭터는 레아와 함께 레비아탄의 먹이가 되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레비아탄의 입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중반쯤 실수한 건데 곧장 나무라는 짠호박이 어이없긴 했으나 시비 거는 유저가 한둘도 아니고 무시하고 말면 되는 일이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타륜에 도달해 둘을 구하는 건 채하의 몫이었다. 채하의 캐릭터가 타륜을 손에 쥐고 방향을 틀어 배를 레비아탄의 복부에 부딪쳤다. 공격당한 레비아탄은 침을 뚝뚝 흘리며 갑판 위로 레아와 주현의 캐릭터를 뱉어 놓았다. 캐릭터 머리 위로 깃털이 생기며 여느 때처럼 힐이 들어왔다.

[파티] 짠호박 : 이대로 출발하자고 해서 잘하는줄 알았는데

[파티] westone : 사람 없어서 가자고 한 거예요 ㅎㅎ

[파티] westone : 몇 명 죽더라도 충분히 깰 수 있고요

[파티] 짠호박 : 그럼 비공방을 만드시짘

비공개로 방을 개설해서 저런 놈은 못 들어오게 해야 했는데. 아마 서쪽도 지금쯤 열 받아 하고 있을 테다. 짠호박의 말에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자 게임은 다시 평화롭게 흘러갔다. 역시나 무시가 답이었다.

[파티] westone : 고생하셨습니다

[파티] 짠호박 : ㅋㅋ 고생하긴함

[길드] westone : 쟨 진짜 왜 저럴까요

[길드] 월월월 : 그냥 무시하세염

레비아탄을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은 또 잡템이었다. 서쪽은 조금이라도 더 짠호박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는지 바로 파티를 해체했다. 짠호박만 아니었다면 루시퍼, 마몬 레이드까지 파티가 이어졌을 것이다.

이상한 유저 하나 만났다고 그새 피곤해진 주현은 서둘러 광장으로 나왔다. 마우스를 돌리며 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다가 채하가 없단 걸 깨달았다. 같이 게임 안 하겠다고 말해서 채널도 옮긴 건가. 말이 너무 심했나 뱉은 말을 되짚어 보며 친구 창을 켜 채하의 위치를 확인했다.

채하는 왜인지 대련장에 들어가 있었다.

채하가 허구한 날 유저들에게 대련을 신청한단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 상황에서 대련장에 갈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툴툴거리며 서쪽을 자극하던 짠호박. 채하는 파도 패턴을 실수하지 않았을뿐더러, 파티장도 아니라서 짠호박에게 응어리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채하라면 주현을 깎아내린 짠호박이 아니꼬워서 대련을 걸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주현은 무시하고 지나가면 되는 일에 힘을 쓰는 채하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 현실에서는 본인밖에 모르던 놈이 게임에서는 남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단 게 신기했다. 게임 한정으로 공감 능력이 생기는 건가 싶다가도, 그랬다면 사사게에 가는 일도 드물었을 테니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귓속말] 밍채에게 : 채하야

어쨌든 주현은 일단 채하를 말려야 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또 사사게 가면 어쩌려고

짠호박이 보통의 유저보다 예민하긴 했으나 딱히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받아들이는 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고, 서쪽도 그걸 알기 때문에 짠호박에게 구태여 따져 묻지 않았다.

[귓속말] 밍채에게 : 난 너랑 오래오래 게임하고 싶어

그렇게 지나갔으면 끝났을 일인데, 채하가 짠호박에게 대련을 걸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귓속말] 밍채 : 형 저랑 게임 안 한다면서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ㅅㅂ

[귓속말] 밍채에게 : 일단 들어

[귓속말] 밍채 : 네

그때는 그동안 속았단 게 서운하고 배신감이 들어서 홧김에 뱉은 말이었다. 당분간 게임을 그만둬 볼까도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돌아왔을 때쯤 채하가 사사게에서 매장당해 있을 듯했다. 서쪽이 이따금 장난으로 유아교육과냐고 묻곤 했는데, 지금의 주현은 정말로 채하를 육아하는 기분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아무튼 그만하고..

[귓속말] 밍채 : 형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귓속말] 밍채 : 대련은 쟤가 걸었어요

[귓속말] 밍채에게 : ?

이건 또 뭔 소리야. 주현은 물음표 하나를 보내곤 얼어붙은 상태로 눈알을 굴렸다.

[귓속말] 밍채 : 쟤가 형네 길드 사사게에 공론화하겠다고

[귓속말] 밍채에게 : ?

우리가 뭘 했다고 공론화한단 말인가. 미간을 좁힌 채로 채하에게 물음표를 보내는 행위만을 반복했다.

[귓속말] 밍채 : 저보고 댓글로 증언해달라 부탁했어요

[귓속말] 밍채에게 : 넌 뭐라 했는데?

[귓속말] 밍채 : 해보랬죠

[귓속말] 밍채 : 저런 거 공론화해봤자 누가 편들어준다고

한두 번 사사게에 가 본 게 아닌 채하는 경력직답게 말을 했다.

[귓속말] 밍채 : 얼마 있다가 제가 형 커플인거 알았는지

[귓속말] 밍채 : 욕하면서 대련 걸길래

[귓속말] 밍채에게 : ?

채하는 평온 길드 소속이니 오해한 짠호박이 채하에게 협력을 요청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인이 오해해 놓고 어떻게 잘못도 없는 애한테 욕을 할 수가 있지? 주현은 채하와 거리를 두기로 한 것도 잊고 채하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귓속말] 밍채 : 욕설은 신고했고 대련은 받았어요

[귓속말] 밍채에게 : 잘했어

[귓속말] 밍채 : 형 저랑 게임해주실 거예요?

[귓속말] 밍채에게 : 아니

[ 밍채님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

어느새 대련을 끝내고 옆에 나타난 채하의 캐릭터가 쪼그려 앉아서 엉엉 눈물을 쏟아 냈다. 채하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여전했다. 주현은 제 캐릭터 옆에 있는 커다란 덩치를 복잡한 눈으로 훑었다.

[ 밍채님이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

주현이 고민에 빠진 사이, 채하는 감정표현을 바꿔 가며 다양하게 설움을 토해 냈다.

[전체] westone : ?

4채널 광장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니 유저가 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상가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 서쪽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둘을 발견하고 캐릭터가 멈칫했다. 서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기가 막힌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밍채님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

[ 밍채님이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

채하는 서쪽이 보든 말든 주현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묵묵히 울고 있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뭐하세요..?

[전체] 블랙 : 저도 몰라요

그건 주현도 채하에게 묻고 싶었다.

[전체] westone : 아 네..

서쪽은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다시 둘을 훑은 뒤 얘기했다.

[전체] westone : 나중에 청첩장이나 주세요

혼돈의 설화는 커플을 100일 이상 유지하면,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아무 때나 관계 해지가 가능한 커플과 달리 결혼은 이혼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게임을 가볍게 하는 유저들은 커플 정도에서 그쳤고, 돈을 아까워하지 않거나 헤어질 미래 따위 생각하지 않는 유저들은 결혼식을 올리곤 했다.

주현은 채하와 이미 100일을 넘겼지만 결혼할 의사가 없었다. 커플도 채하가 매달린 탓에 마지못해서 하게 된 거였지, 게임에서 누군가와 커플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전체] 블랙 : 결혼 안 할 건데요

[전체] westone : 아 네..ㅋㅋ

[전체] westone : 전 다른 악마 깨러 갈게요

서쪽은 절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서쪽이 나머지 악마 레이드를 하러 떠나는 동안에도 채하의 캐릭터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손가락이 아프지도 않은지 감정표현이 끝날 때쯤에 새로운 감정표현이 시작되었다.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귓속말을 보내려는 때였다.

[전체] 코쿄아 : 밍채님

[전체] 코쿄아 : 마몬 가실래여?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키 작은 여자 캐릭터가 다가와 채하에게 말을 걸었다. 이 둘의 사이는 도대체 뭘까. 코쿄아의 어둑한 주홍색 눈동자와 밍채의 선명한 적안이 서로를 마주했다. 함께 던전을 가자고 제안할 정도면 친한 것 같은데, 채하가 코쿄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평온에서 가끔 마주치는 데면데면하던 사이라고 하기엔 또 블루베리와 코쿄아가 친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전체] 밍채 : 아뇨

[전체] 코쿄아 : 그래여? ㅋㅋ 그럼 말구여

[전체] 코쿄아 : 블랙님 가실래여?

[전체] 블랙 : 아뇨 저 이제 끄려고요

[전체] 코쿄아 : 힝 ㅠ

두 번 거절당한 게 서러웠는지 코쿄아가 시무룩한 채로 등을 돌렸다.

* * *

피시방 접속 시간에 따라 보상을 차등 지급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억지로라도 피시방 점유율을 올리려는 수가 뻔히 보였다. 이런다고 점유율이 몇 퍼센트나 오를까 싶었으나 일단 주현은 피시방에 가는 중이었다. 주현이 죽고 못 사는 아바타가 누적 보상 100시간에 걸려 있었다. 아바타 디자인이 어정쩡하여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유저들도 있었지만, 주현은 아바타가 누더기든 말든 일단 모으고 보는 수집가였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설마

[길드] 블랙 : ?

[길드] westone : 피시방이에요?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역시 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100시간 채우시게요???

[길드] 블랙 : 네

피시방에 100시간만 앉아 있으면 아바타 하나를 공짜로 준다는데 못할 것도 없었다. 같은 생각인 유저가 꽤 됐는지 피시방 버프 인원이 무려 열 명이었다. 평소에는 많아 봤자 다섯 명이었는데 이벤트 첫날부터 두 배라니,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보였다.

길드원들과 대화하던 주현은 불현듯 채하를 떠올리고 친구 창을 켜 위치를 확인했다. 철썩 붙어 다니던 이전과 달리 따로 레이드를 도는 경우가 생기니, 또 대련장에 간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CH.4] 대도시 채예스 - 광장.

4채널의 광장이면 같은 곳에 있는 거 아닌가? 주현이 마우스를 돌리며 채하의 캐릭터를 찾는 순간, 채하의 상태가 로그아웃으로 변해 버렸다. 자신의 접속 알림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 기다렸다는 듯 로그아웃해 버리는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친해지고 싶다느니 말했던 건 한 번 더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고민하는 때였다.

비어 있던 옆자리 의자의 바퀴가 끌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목 받침을 붙잡은 곧게 뻗은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조금 더 턱을 위로 들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채하가 매끄러운 미소를 구사하며 인사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임채하가 피시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누적 보상 목록에는 채하가 갖고 싶어 할 만한 아이템이 없었고, 있더라도 캐시를 주고 사면 되는 것들이었다. 임채하는 혼돈의 설화가 피시방 접속 이벤트를 한다고 순순히 참여할 인간이 아니었다.

“어, 그래. 학교는…… 방학이겠구나.”

“네.”

학교는 잘 다니면서 노는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방학 시즌이란 걸 뒤늦게 상기했다. 방학이 아니더라도 누구보다 학점을 열심히 채우고 있을 채하인데, 주현이 걱정해 줄 처지가 못 됐다. 괜히 멋쩍어져서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자 채하도 옆에서 컴퓨터 전원을 켰다.

주현이 오자마자 로그아웃을 한 건, 피시방에 있음을 알아채고 자리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형은 제가 싫으세요?”

그동안 제가 한 짓은 생각도 안 나는지 채하는 제법 뻔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채하가 가증스럽게 느껴져야 마땅한데, 가여워 보이니 주현은 자신이 글러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현이 적당한 말을 고르다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싫어도 형이 먼저 꼬드긴 거라 무를 수 없어요.”

들려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주현은 옆을 돌아봤으나 마주한 채하의 얼굴은 태연했다. 꼬드겼단 게 조별 과제 때를 이야기하는 건 아닐 테고, 뉘앙스를 보아선 PvP 랭크전인데 그때의 일은 사고에 가까웠다. 사람이 한 번쯤 맛이 가서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그 한 번의 실수가 채하를 꼬드겼다기엔 억울했다.

주현이 말을 잃은 사이, 채하는 느긋하게 게임에 접속했다. 모니터 화면엔 채하의 접속 알림이 떠오르고, 피시방 버프에는 인원이 추가되었다. 수강 신청을 하려고 피시방에 들렀던 채하와 마주친 날, 그날도 지금처럼 접속 알림과 동시에 버프 인원이 늘었을 텐데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밍채가 채하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한 탓도 있었다.

바로 옆에서 게임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팔을 뻗으면 채하가 닿고, 고개를 돌리면 채하의 모니터 화면을 언제든지 훔쳐볼 수 있단 것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 상대가 자신에게 쩔쩔맨단 것은 더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주현은 제 캐릭터 옆에서 나타날 채하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다. 피시방 자리를 옆으로 옮기기까지 했는데, 혼자 레이드를 돈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채하라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었다. 주현은 몸을 뒤로 빼, 가림막 너머로 채하의 모니터 화면을 엿보았다.

채하는 의외의 인물과 귓속말로 대화하고 있었다. 코쿄아였다. 친구나 길드원이 아니면 귓속말을 못 하도록 막아 두었으니, 채하가 코쿄아와 친구 상태란 뜻이었다.

[귓속말] 코쿄아 : ㅋㅋㅋ 또 안 간다고 하실거져?

[귓속말] 코쿄아에게 : 네

파티 제안을 매번 거절했는지 코쿄아는 기대도 안 하는 눈치였다. 언제부터 친구가 된 걸까. 게임을 하다 보면 마음 맞는 사람과 얼마든지 친구를 맺을 수 있지만 그게 채하라면 말이 달라졌다. 유저들에게 친구 신청은커녕 차단이나 하고 다닐 것 같은 애가 친구가 생겼다니. 경찬과 채하가 단둘이 술을 마신 걸 목격했을 때와 유사한 충격이었다.

“왜요.”

“……아냐. 계속해.”

시선을 느낀 채하가 고개를 돌려 주현을 마주했다. 상대가 채하라 그런지 엿보다가 들킨 상황에도 딱히 부끄럽지 않았다. 주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답하자, 마우스를 쥔 채하의 손이 망설임 없이 코쿄아를 차단해 버렸다.

“너 지금 뭐 해?”

“전 형이 아는 줄 알았어요.”

“내가 뭘 알아?”

“친구 신청 안 받아 주면 형한테 말한다고 헛소리를 해대길래…… 형네 길드원이어서 차단도 못 하고, 징징대는 거 시끄러워서 받아 준 거였어요.”

코쿄아와의 일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채하의 성격이 훤히 보였다. 이렇게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는 녀석이 어쩌다가 저에게 빠지게 된 건지. 말을 마친 채하는 캐릭터를 움직여 주현의 바람대로 옆에서 나타났다.

“차단하면 파티할 때 채팅 안 보이잖아. 그건 풀어.”

“형 저랑 게임 같이 해 주실 거예요?”

코쿄아와 같은 파티에 들어가지 않으면, 차단을 풀 이유도 없었다. 채하가 재앙 길드원을 만날 일이라곤 주현과 함께 게임을 하는 경우 외엔 드물었다. 전에 뱉은 말이 있어서 쉽게 대답을 못 하고 고민하는 사이, 채하에게 바람맞은 코쿄아가 앞으로 다가왔다.

[전체] 코쿄아 : ㅋㅋㅋ 왜 받아줬나했네여

이유 없이 친구 삭제를 당했는데도 코쿄아는 채하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하곤 길드 채팅으로 옮겨 갔다.

[길드] 코쿄아 : 밍채님한테 장비 묻는 중이었는데

[길드] 코쿄아 : 블랙님이 질투하시네여 ㅠㅠ

[길드] westone : 밍채님이랑 같이 지내더니 밍채님이 되셨네요

[길드] 블랙 : ㅅㅂ 아니에요

[길드] 신사 : 장비 묻는건 좀 냅두시지 ㅋㅋ 별걸 다 질투 ㅋㅋ

[길드] 코쿄아 : 다른 성직자님한테 물어보면 되긴 해여 ㅋㅋ

신사의 채팅 때문에 주현만 속 좁은 사람이 되었다. 같은 직업을 키우는 유저에게 장비를 물어보는 일은 흔했고, 채하는 한때 랭킹 1위였으니 당연히 수많은 질문을 받아 왔을 테다. 귓속말을 막아 두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일지 모른다.

“형은 저 사람 성별 왜 물어본 거예요?”

“누구, 코쿄아?”

“네.”

“신사가 나한테 잘해 준 게 이름 보고 성별을 착각해서인가 싶어서. 근데 또 코쿄아랑도 친하게 지내니까.”

“걔는 음침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코쿄아는 ‘그 사람’이었지만 신사는 ‘걔’였다. 채하는 신사가 어지간히 싫은 듯했다.

“형, 앞으로는 제 이름으로 거래해요.”

“네 이름도 성별 상관없이 많이 쓰이거든?”

터무니없는 말을 가볍게 받아친 주현은 다시 대화의 주제로 돌아갔다.

“코쿄아 남자라며?”

“그거랑 별개로 형은 너무 착하니까.”

채하에게 착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주현은 괜히 민망해져서 입술을 다물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채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 갔다.

“형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죠.”

“……혼설에서 딱히 착한 짓을 한 적은 없는데.”

“아뇨. 형은 사람 자체가 그래요.”

채하는 단호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긴 보통이었으면 채하와 절연해야 했을 텐데 어영부영 봐주던 모습이 그렇게 비친 모양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해 보이는 건 맞아서 주현은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저였으면 걔 안 따라갔어요.”

채하가 말하는 ‘걔’는 신사일 텐데, 한창 신사가 치근덕대고 주현이 마지못해 함께 다녔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한심하다는 얘기를 돌려 말하는 거였을까. 하지만 채하는 속을 긁으려는 목적이 아닌지 얼굴은 덤덤하기만 했다. 지금 상황에서 주현을 비하해 봤자 채하가 얻어 가는 것도 없었다.

“나도 별로 따라가고 싶진 않았어.”

변명 같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좋게 좋게 거절해 봤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고, 이전에 강화석을 받은 탓에 대놓고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채하와 같이 게임을 할 시간도 아까운데 신사와 어울려 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형은 제 기분이 어땠는지 모를 거예요.”

어느 정도 열 받아 했단 건 안다. 서쪽, 월월월을 파티에 초대해서 누구랑 같이 있는지 추리하려고 했으니.

“제 닉네임 적힌 무기 들고 걔랑 던전 가고.”

“아…….”

그건 서러울 만했다. 채하에게 무기를 선물했는데, 채하가 그 무기로 다른 사람에게 힐을 줬다면 무척 서운했을 테다. 주현은 당시에 다가오는 신사 탓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 채하의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다.

“그건 미안. 진짜 생각 못 했다.”

세상에는 대가 없는 호의도 있겠다만 채하는 그렇게 마음 넓고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기를 쥐여 주고 탱커로 써먹을 생각이었나 본데, 바로 신사가 데려갔으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혼돈의 설화처럼 유저 숫자가 많지 않은 게임은 사람을 뺏기는 것에 민감했다.

“형 그럼 저랑 게임 같이 해 주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구구절절 불쌍한 척을 하는가 했더니. 주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제 캐릭터에 철썩 붙어 있는 채하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아니.”

* * *

누적 접속 이벤트 때문에 채하와 피시방에서 만나는 게 무언의 약속이 되었다. 채하와의 껄끄러운 감정이 모두 녹은 건 아니었으나 굳이 피할 이유 또한 찾지 못했다.

평일에는 퇴근 후에야 피시방에 갈 수 있어서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때때로 일어났다. 지정석이 아니니 자리는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주현은 양쪽에 사람이 앉는 걸 불편해해서 구석이나 복도 쪽 자리를 택하는 걸 선호했고, 어디에 앉아 있든 채하가 용케도 찾아왔다. 그게 반복되니 어차피 쫓아올 거 한자리에 머무르기로 했다.

늦게 오면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채하는 그리하여 옆자리까지 결제를 마쳐 두었다. 게임에서 돈 쓰는 것만 보아도 채하의 재력을 쉽게 느낄 수 있었지만 이럴 때면 더욱 실감이 났다.

주현은 오늘도 채하가 미리 맡아 둔 자리에 앉았다. 채하의 또 다른 아이디를 로그아웃하고 제 아이디를 입력했다. 채하가 충전해 둔 요금을 쓰더라도 채하가 아무 말 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형, 랭크전 3시즌 열렸어요.”

“알아. 길드원이랑 해야지.”

“…….”

옆에서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주현은 모니터만 응시하며 혼돈의 설화 접속을 마쳤다.

채하와 매번 피시방에서 만난다고 함께 게임을 하는 건 아니었다. 주현이 먼저 파티에 입장하면 채하가 모니터를 훔쳐보고 있다가 실수나 우연을 가장하며 따라 입장했다. 그것도 공개 방일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서쪽이 소수 인원 파티를 꾸려 비공개 방을 만들면 그날 채하는 허탕을 쳤다. 그럴 때 채하는 게임은 안 하고 귓속말로 응원의 말을 보내곤 했다.

주현은 채하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채하도 딱히 답을 정하고 행동하는 것 같진 않았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잔혹동화 : 블랙님 ㅈ크전이 부활했어요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 봤어요

피시방 누적 이벤트 진행 중이니 조금 더 재미있는 콘텐츠를 가져오는 게 정상적인 운영일 텐데, 시즌 종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랭크전 새 시즌을 시작한 게 정말로 혼돈의 설화다웠다.

[길드] 코쿄아 : 혼설 섭종할때쯤엔 다들 티어가 마스터 아닐까옄ㅋㅋ

[길드] 암흑기사 : ㅇㅈ

PvP 특성상 이기면 게임이 재미있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적당히 할 때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전 시즌에서 마스터 티어를 받았으니 연승을 몇 번 하면 쉽게 안정권에 들 수 있을 테다. 주현은 점수를 계산하며 함께 할 적당한 유저를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랜덤 매칭에 운명을 맡기기엔 실버 티어에서의 여정이 아직도 주현을 괴롭혔다.

[전체] 블랙 : 월월님

[전체] 월월월 : 넴

[전체] 블랙 : 같이 랭크전 하실래요?

[전체] 월월월 : 저 다이아인데 블랙님 마스터 아니에염?

[전체] 블랙 : 전 괜찮은데

1시즌 때 플래티넘이었던 월월월은 2시즌에서 다이아로 마무리를 지었다. 코쿄아의 말대로 유저들은 날이 갈수록 실력이 향상하기에 아마 나중에는 마스터 티어의 자리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주현은 월월월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다른 티어의 유저와 파티를 맺는 일은 도박이었다. 상대 팀 인원이 마스터 티어 두 명일지, 마스터와 다이아 티어 한 명씩일지, 다이아 티어만 두 명일지는 게임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랭크전 1시즌 때부터 기회가 되면 같이 해 보자고 말을 나누었는데 이제야 호흡을 맞춰 볼 수 있게 되었다. 월월월은 힐러인 음유시인이니 상대 조합이 어쨌든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매칭이 끝나고 문 너머의 상대 팀원 닉네임이 보였다.

[파티] 월월월 : 얼른 화해하세염 ㅠㅠ

[파티] 블랙 : 네..

그중엔 채하의 캐릭터인 밍채가 있었다. 계속 화면을 힐끔 훔쳐보길래 또 귓속말로 응원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방심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 중 하나인 채채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채하와 상대 팀으로 만났었는데…… 주현은 완벽하게 패배했었다.

[길드] westone : 아 저녁 먹고 왔는데 누가 블랙님 뺏어갔어요 ㅡㅡ

[길드] 블랙 : 저 월월님이랑 랭크전 중이에요

[길드] westone : 배신감 들어요

[길드] 월월월 : 밍채님이 매칭 쫓아오는데염...

[길드] westone : 이기면 블랙님 가질 수 있는 건가요?

[길드] westone : ?

[길드] westone : 와 ㅋㅋㅋㅋ 저 말 하자마자 밍채님한테 귓속말 왔어요;;;

“야. 같이 있는 거 티 내면 어떡해.”

채하와 주현이 실제로도 아는 사이라는 건 유저 중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극비였다. 말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이 서쪽이나 월월월이 조금 놀라는 데에서 그칠 거란 걸 알지만, 아직 채하를 어떻게 할지 결정 못 한 주현으로선 비밀로 하고 있었다.

[길드] westone : 두분 싸운줄 알았는데

[길드] westone : 이런 건 잽싸게 이르시네요?

[길드] 블랙 : ㅅㅂ 아니에요

서쪽은 둘이 같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주현이 말을 전달한 줄 오해했다.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주현도 장난스럽게 부정하며 화제를 넘겨 버렸다. 슬슬 랭크전 대기 시간이 끝나가서 주현이 마우스를 다잡았다.

“혼설에서 처음 만났던 날 생각 나요.”

주현은 문이 열리자마자 채하와 승부를 볼 예정이었다. 주현이 줄어드는 숫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채하는 수줍은 얼굴로 속눈썹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그땐 형이 먼저 꼬드겨 놓고 모른 척해서 속상했었는데.”

네가 모른 척한다고 속상함을 느낄 놈이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주현은 피해량 감소 버프부터 둘렀다. 옆에서 월월월도 차근차근 버프 스킬을 사용하는데, 머리 위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 기둥이 떨어졌다. 채하는 팀원에게 힐도, 버프도, 보호막도 주지 않는 가차 없는 놈이니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빛 기둥에 맞고 바닥을 구르는 월월월을 도와주러 다가간 주현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캐릭터 머리 위에 해골이 떠 올랐다. 주현은 재빨리 스페이스 바를 눌러 공격을 끊어 냈다.

《 주신 리라의 축복 : 3초간 사용한 공격이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

무력해진 3초 동안 공격 대신 방어에 전념했지만, 어차피 상대 팀의 목표는 월월월이었다. 희비는 그 3초에서 갈렸다. 티어가 올라갈수록 유저들의 공격이 정확했고 치명타 대미지가 뜰 확률도 높아서 한 대만 맞아도 어마어마하게 캐릭터가 아파했다.

[파티] 월월월 : 아 ㅠㅠㅠ 바로 공격 올줄 몰랐어염

[파티] 블랙 : 괜찮아요.. 저도 대응을 제대로 못했어요

월월월이 먼저 죽고 그 위에는 주현의 캐릭터가 쓰러졌다. 채하의 팀원은 실력이 좋은 게 아니었는데도 채하가 공격할 타이밍을 잔뜩 만들어 줘서 쉽게 게임을 했다.

저 자리는 원래 주현의 것이었다. 발로 차 버린 건 주현이었으니 아쉽지 않아야 마땅했지만 채하에게 속수무책으로 지니까 착잡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저랑도 해요

[길드] 월월월 : 제가 나갈게염

[길드] westone : 월월님 튀는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전 다이아에 있을래염 ㅠㅠㅠㅠ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주현은 설마 또 채하를 만날까 싶은 마음으로 매칭을 돌렸다. 채하가 아무리 모니터를 엿보고 있어도 같은 티어의 유저가 한두 명도 아니고 전 판의 상대를 또 만나긴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파티] westone : 와 진짜네요 ㅋㅋㅋㅋ

로딩이 빠른 서쪽이 먼저 반응해 왔다. 이 정도면 정말로 채하가 디렉터인 장성한의 아들이 아닌가 의심해 볼 법한 단계였다. 물론 성씨도 다르고, 채하가 부모님이 만든 게임을 할 만큼 효자처럼 보이지는 않다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중, 채하가 별안간 제안했다.

“형이 한 판이라도 이기면 안 따라다닐게요.”

그 말은 질 때까지 랭크전 매칭을 따라오겠다는 걸까? 주현은 단 한 번도 랭크전에서 채하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채하도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걸어온 거겠지. 주현은 문이 열리자마자 적진으로 돌진하는 서쪽에게 피해량 감소 버프를 걸어 주며 대답했다.

“그래.”

서쪽은 채하와 열 번을 겨뤄서 한 번의 승리를 따냈으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었다. 더군다나 채하의 팀원은 랜덤 매칭으로 만난 초면의 유저가 아닌가. 합은 서쪽과 주현이 더 좋아서 자신이 있었다.

[파티] westone : 밍채님 이렇게 잘하셨나요? 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오늘따라 악착같으시네

분명히 자신은 있었는데 허무하게 졌다. 하필이면 채하의 팀원도 고인물 유저라서 상대하기 까다로웠고 주현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채하는 잽싸게 서쪽의 목숨을 앗아갔다. 서쪽이 사라지고 주현은 둘에게 쉴 틈 없이 얻어맞았다.

서쪽은 패배를 시원하게 인정했다. 주현도 서쪽의 말에 동의했다. 아쉽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채하는 모든 공격을 완벽히 피했다. 아마 성직자의 딜 생명줄이라고 불리는 기본 버프도 깨지지 않은 채로.

[파티] westone : 블랙님 저희 또 해봐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westone : 그런데 밍채님은 반지 한쪽 안 바꿔요?

[파티] westone : 하나만 음률이네요

채하가 아스모데우스에서 재료를 획득하고 만든 반지는 주현의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었다. 밍채가 채하라는 걸 알게 된 날부터 이걸 돌려줘야 하나 고민을 해 봤는데, 고집 센 채하가 순순히 돌려받을 것 같진 않았다. 또 채하는 제작자의 닉네임으로 블랙이 적힌 반지를 받고 싶다고 말했었다.

[파티] 블랙 : 때 되면 바꾸겠죠

[파티] westone : 그때처럼 블랙님 프러포즈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요?

[파티] 블랙 : ㅅㅂ 아니에요

서쪽은 역시나 눈치가 빨랐다. 채하의 바람을 정확히 꿰뚫은 서쪽에게 여느 때처럼 부정의 말을 보내고 매칭이 잡히기를 기다렸다.

“……아.”

옆에서 채하가 낮게 탄식했다. 주현이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앙다물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채하가 있었다. 채하는 먼저 매칭이 잡혔으니, 주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현은 미소를 꾹 삼키며 쾌재를 불렀다.

[파티] westone : 어 ㅋㅋ 밍채님 엇갈렸네요~

매칭이 끝나고 상대방의 닉네임을 확인한 서쪽도 뒤늦게 기뻐했다. 마스터 티어에는 서쪽이나 주현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 유저가 널린 편이었지만 채하 같은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상대로 채하를 만나지만 않으면, 치열한 결투 끝에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점수 안녕한가요?

[파티] 블랙 : 아뇨

그 말은 채하를 만났을 때는 어김없이 패배했다는 뜻이다. 채하가 쫓아온다고 해도 매칭 시스템상 매번 만나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주현은 점수를 얻고, 잃고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다이아 티어로 강등했다.

화면에 떠오르는 다이아 티어 표시에 시야가 어질해졌다. 마스터 티어는 채하의 도움 덕분에 갈 수 있었던 곳이니, 채하를 외면함으로써 잃는 게 당연한 절차였다. 하지만 정작 티어가 떨어지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건가. 채하가 없더라도 마스터 티어에는 가뿐히 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파티] 블랙 : 저 다이아 됐어요

[파티] westone : 플래티넘 되기 전에 재결합하세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westone : 2시즌 때 블랙님 다이아였잖아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일부러 다이아 티어로 내려가더라고요

랭크전 2시즌이 열리자마자 채하는 사사게에 이름을 올리며 화제를 몰았었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녀석이니 단순히 버스 타고 올라온 유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게임을 던진 줄 알았다.

“형이랑 같이 게임 하고 싶었어요.”

주현에 맞춰 매칭을 돌려야 하니 채하는 계속 주현의 모니터를 훔쳐보고 있었다. 서쪽의 채팅을 엿본 채하가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어, 그래.”

채하의 목적은 언제나 주현과 게임을 하는 것과 친해지는 것, 두 가지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또다시 매칭을 돌리려 마우스를 움직이는 때였다. 나란히 서 있던 서쪽과 주현의 앞으로 코쿄아가 밤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가왔다.

[전체] 코쿄아 : 블랙님

[전체] 블랙 : 네

[전체] 코쿄아 : 저랑도 랭크전해여

[전체] 코쿄아 : 저도 마스터예여 ㅋㅋ

주현은 누구 덕분에 다이아였다.

[파티] westone : 저랑은 다음에 이어서 해요

[SYSTEM] westone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하기 민망한 상황에 서쪽이 선수를 쳤다. 주현은 제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채하와 모니터의 코쿄아를 번갈아 바라보고 코쿄아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파티] 코쿄아 : 블랙님 제가 밍채님 이겨드릴게여 ㅋㅋ

[파티] 코쿄아 : 블랙님은 아무래도 밍채님을 잘 모르니까

[파티] 코쿄아 : 계속 지는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구여 ㅋㅋ

‘내가 임채하를 모른다고?’

게임 못한다는 말보다 채하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 더 자존심이 상했다. 주현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주현은 채하를 모르기 때문에 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주현이 채하를 아는 만큼, 채하도 주현을 파악했기 때문에. 심리전이 불가능하니 결국 판가름 나는 것은 컨트롤이었다.

코쿄아의 전 길드가 평온이었다고 하더라도, 채하와 오랜 시간 게임을 한 것은 주현이었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파티] 블랙 : 제가 밍채를 모른다고요?

[파티] 코쿄아 : 절 믿어보세여 ㅋㅋㅋ

코쿄아를 믿는 것보다 채하에게 한 판만 져 주면 안 되느냐고 비굴하게 구는 편이 더 빠를 테다. 주현은 코쿄아의 말을 흘려들으며 매칭을 돌렸다. 코쿄아의 말이 진짜든 아니든, 매칭에서 채하를 만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매칭을 돌리지 않기엔 피하는 모양새가 별로였고, 만약 채하를 만난다면 코쿄아가 자신만만하게 가르치려 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코쿄아가 말하는 방법이 정말로 채하에게 통한다면 그것대로 최악이었다.

“형.”

먼저 로딩이 끝난 채하가 주현을 불렀다. 말에서 들뜬 기색이 묻어나는 걸 보니 주현의 상대는 채하일 게 뻔했다. 까맣게 암전되었던 모니터 화면이 밝아지면서 커다란 출입문 뒤로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밍채였다.

[파티] 코쿄아 : 밍채님 무조건 선공 오거든여

[파티] 코쿄아 : 보통은 힐러부터 자르는데

[파티] 코쿄아 : 밍채님은 블랙님 먼저 공격할거예여

채하가 랭크전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명확한 순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보이는 인간부터 죽이다가 눈에 거슬리면 목표가 바뀔 뿐이었다. 채하가 코쿄아를 마지막까지 살려 둔 데엔 코쿄아가 처음에 죽여야 할 만큼의 가치가 없거나, 마지막에 죽일 이유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주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채하는 코쿄아부터 죽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채하는 주현을 마지막에 죽일 예정이었다. 채하와 상대로 마주했던 수많은 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티] 블랙 : 문 열리면 맹세 드릴게요

스킬 ‘기사의 맹세’는 해당 유저가 받는 공격의 피해량을 일회성으로 30% 방어해 준다. 다른 유저들에게 버프를 내어 주지 않는 채하는 바로 달려올 테니, 타이밍에 맞춰서 코쿄아에게 스킬을 사용하면 대참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주현이 긴장한 채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 코쿄아가 여유롭게 웃으며 호의를 거절했다.

[파티] 코쿄아 : 맹세 말고 방패 쓰세여 ㅋㅋ

‘신념의 방패’는 파티원이 아니라 본인에게 사용하는 피해량 감소 스킬이었다. 코쿄아는 채하가 자신이 아닌 주현을 공격할 테니, 그에 대응하라고 주장했다.

이쯤 되니 주현은 오기가 생겼다.

[파티] 블랙 : 네

누가 채하에게 얻어맞나 한번 보자는 오기가.

평소 같았으면 이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자꾸 코쿄아가 채하에 대해 아는 척을 하니까 신경이 예민해졌다. 겨우 어스름을 밀어냈는데 이번엔 코쿄아라니. 힐도 제대로 안 하는 놈이 인기가 왜 이리 많은 건지. 주현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마침 문이 활짝 열리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주현은 대검을 질질 끌고 문을 지나쳤다.

[파티] 코쿄아 : ?

성직자인 코쿄아는 힐과 버프 스킬을 사용하느라 바빠 채팅을 칠 시간이 없었다. 고작 물음표 하나였지만 주현은 코쿄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파악을 끝냈다. 채하가 선공을 올 것이라 말한 건, 적진에 가지 말고 제자리에서 기다리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코쿄아가 생각하기에 목표는 주현이었으니, 주현이 성급히 적진으로 향하는 건 게임을 던지는 것처럼 비쳤을 테다.

그건 코쿄아의 입장이고…… 주현의 작전은 달랐다. 채하는 코쿄아를 공격할 테니, 주현은 남은 상대 팀원을 노릴 생각이었다. 채하의 견제가 없다면 상대 팀 한 명 목숨을 끊는 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이번 맵은 울창한 숲이었다. 채하와는 길이 엇갈렸는지 맵 중앙에 도착할 때까지 캐릭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채하와 같은 팀인 상대방의 직업은 우연하게도 성기사였다. 두 팀의 직업이 정확히 일치했다. 탱커 뒤에 숨지 않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간 게 참으로 채하다웠다.

PvP에서 유저들이 죽었을 때 가장 자존심 상해하는 상황은 바로 미러전[1]이었다. 같은 직업의 유저에게는 절대 패배하고 싶지 않아 했으니 이를 악물고 상대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커다란 검이 공기를 가르고 허공에서 부딪쳤다. 코쿄아가 채하를 상대로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르니 빠르게 승부를 봐야 했다. 상대편 성기사가 공격을 끊고 바로 반격을 이어 갔다. 주현은 재빠르게 대검을 세웠다. 승기를 쥐었다고 착각한 성기사는 자신감을 얻어 공격을 연계했다.

PvP에서 승리를 예감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였다. 상대방의 캐릭터가 바닥을 구를 때. 주현은 성기사의 검이 여섯 번째 획을 긋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성기사가 최대로 연계할 수 있는 공격의 횟수는 여섯 번이었다.

[파티] 코쿄아 : ;

코쿄아가 채하에게 죽고 땀을 흘릴 때, 주현의 반격에 당한 성기사는 바닥을 굴렀다.

[SYSTEM] 파티원 블랙님이 오직성기사님을 처치하였습니다.

땅에 철퍼덕 쓰러지는 성기사의 뒤로 우두커니 서 있는 채하의 캐릭터가 보였다. 다른 유저의 방해 없이 처음으로 맞붙는 경기였다.

“캐릭터 형 닮았어요.”

수줍게 웃으면서 말을 뱉어 놓고 던지는 공격은 매서웠다. 빛 기둥이 주현이 서 있던 자리에 연달아 떨어졌다. 거리를 벌리면 채하의 캐릭터와 함께 주현을 쫓았다. 주현은 성직자를 이기는 법은 알았지만, 채하를 이기는 법은 몰랐다. 채하와의 내기를 떠나서, 한 번쯤 채하를 이겨 보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채하를 뛰어넘고 싶은 것보다는, 채하와 파티를 맺을 만큼 충분한 자격이 있단 걸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웬만해서 PvP는 먼저 자세가 무너진 쪽이 패배했다. 상대방이 복원할 시간을 내어 주지 않기에, 한 번의 실수가 패배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계속 피해 다닐 수는 없으니 채하의 캐릭터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채하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현은 이어질 스킬을 예상할 수 있었다.

《 주신 리라의 축복 : 3초간 사용한 공격이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

화면에 상태 아이콘이 떠오르는 순간 재빨리 공격을 끊어 냈다. 이어질 채하의 반격에 맞춰서 검날을 세우자,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검날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머리 위에 떠 올랐던 해골이 사라지자마자 채하는 이어서 속박 스킬을 사용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사슬에 몸이 묶인 주현의 캐릭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채하의 공격이나, 스킬 시간이 끝나 사슬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채하는 공격을 택했다. 빛 기둥이 주현의 캐릭터 정수리에 떨어졌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무력하게 맞고 있는 건 미련했다. 자세가 무너진 캐릭터가 앞으로 구르자, 주현은 키를 눌러 일부러 캐릭터를 한 번 더 굴렸다. 가까스로 뒤에 떨어진 빛 기둥을 피하고 캐릭터를 일으킬 수 있었다.

주현은 곧바로 채하의 캐릭터에게 다가가 어깨를 갈랐다. 머리 위로 또 한 번 빛 기둥이 충돌했다. 채하에게 체력을 빼앗겼지만, 그 덕에 성직자의 기본 버프를 깨뜨릴 수 있었다. 들어오는 대미지가 이전보다 미약했다.

“……아.”

옆에서 탄성이 들려오자,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채하의 체력을 깎아야 했다. 방어할 시간도 아까워서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렀다. 성기사와 달리 성직자는 방어 기술이 없었다. 캐릭터를 움직여 공격을 피해야 하는데, 주현이 가깝게 다가오면 채하가 멀리 달아나 봤자 공격 범위 안이었다. 채하도 피하는 대신에 공격을 택했다.

어깨를 빛이 꿰뚫자 캐릭터가 주춤 무릎을 굽혔다. 검날에 스친 채하의 캐릭터도 덩달아 몸이 기우뚱했다. 주현은 눈알을 굴려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경기가 끝나기까지 30초. 남은 체력이 애매했으나 채하의 공격이 치명타 대미지가 뜨지 않는 이상, 한 대 맞고 죽을 일은 없을 듯했다. 주현은 운을 믿고 마지막 공격을 날렸다.

주현은 깨달아야 했다. 채하는 서쪽이 장성한 아들이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게임 내에서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단 걸. 쓰러지는 제 캐릭터를 보며 주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SYSTEM] 파티원 블랙님이 밍채님을 처치하였습니다.

그 위로 채하의 캐릭터도 털썩 무릎을 꿇더니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주현의 캐릭터를 덮쳤다.

럽샷[2]. 무승부였다.

주현은 경기장에서 벗어나자마자 코쿄아와의 파티부터 깨 버렸다. 대화할 공간을 잃은 코쿄아는 예상대로 길드 채팅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은 주현이 너무했다는 내용이었다.

“형.”

반박할지 말지 고민하는데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지금 코쿄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무승부가 나온 상황이었다.

“형이 이겼으니까…….”

주현의 낯빛을 살피며 말을 조심스레 뱉는 채하는 처연한 얼굴이었다.

무승부니까 이긴 게 아니라고 아득바득 우길 줄 알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논리로 고집을 부리던 게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니 놀랄 것도 없었다.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는 채하에 당황한 주현은 급하게 왼편으로 의자를 틀었다. 채하가 있는 방향이었다.

“……내가 이겼다고?”

떨떠름한 눈치로 되물을 때였다. 채하도 의자를 주현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툭. 무릎이 부딪혔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주현이 의자를 뒤로 빼려고 할 때, 채하의 발목이 주현을 붙들었다. 뒤로 물러난 만큼 쭉 당겨 온 주현의 무릎은 어느새 채하의 무릎 사이에 있었다.

“이제 안 따라다닐게요.”

당연한 말을 선심 쓰듯 얘기하는 채하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져야 할 텐데, 주현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둘의 관계는 채하가 손을 놓으면 끝날 사이였다. 앞으로는 우연히라도 마주칠 일이 없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찝찝해졌다.

“됐어.”

복잡한 속내와 다른 무심한 답을 던진 주현은 채하의 무릎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무릎뼈를 손바닥으로 붙잡고 밀어내는데 어째서인지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돌덩어리인가?

“됐다고요?”

“어. 이겼다고 하기도 뭐하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어. 너 혼자서 제안한 거잖아.”

“왜요?”

“왜긴. 따라다니든 말든 그건 네 자유니까.”

“형, 저랑 게임 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함께 안 한다고 했지, 하기 싫단 식으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혼자 말을 오인하여 받아들인 채하에 주현은 헛웃음을 삼키며 다시 채하의 오금을 쥐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든가.”

낑낑거리면서 빼려고 노력해도 미동이 없던 무릎은 채하가 힘을 풀면서 간단히 해방되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더니. 인성을 여러모로 잔뜩 앗아간 신은 채하에게 이외의 많은 것을 내어 주었다.

주현은 다시 원상태로 의자를 돌리고 채하가 없는 반대편으로 턱을 괴었다. 내부 조명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그 덕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숨길 수 있었다. 주현은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조금 전 채하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이제는 따라오지 않겠다던 채하의 발언에 놀라서 심장이 덜컥였다. 염치없이 졸졸 따라오던 채하가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건, 당한 주현의 처지에선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정작 주현은 억울해졌다. 자신이 고생해서 사람 만들어 둔 임채하를 두고 물러나라니. 다른 데서 얌전히 힐을 하고 있을 채하를 떠올리면,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날 주현과 채하는 누적 접속 100시간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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