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교체! 3권
지은이: 토라미
목차
8. R:0 G:0 B:0
9. 승부
10. 해답 (1)
8. R:0 G:0 B:0
모든 건 업보다.
채하에게는 그걸 미처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경영학과는 안 그래도 조별 과제가 많은데, 재수 없게 교양 수업마저도 조별 과제가 넘쳐났다. 시장통을 연상시키듯 북적이는 대화방은 보기만 해도 짜증을 유발했지만, 정작 훑어보는 이의 눈은 덤덤했다.
본인만 믿으라는 듯 말하지만 까 보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말도 없이 잠적하는 사람, 뱉은 말을 기억도 못 하는지 자꾸만 말을 바꾸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들을 만나며 1학년 1학기를 보냈다. 이제는 말하는 것만 봐도 누가 무임승차를 하려는지 예측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채하는 팀플 좋아해? 맨날 그러고 있더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과방으로 이동한 채하는 미완성인 PPT 작업을 이어 갔다. 열정적인 모습에 옆구리에 노트북을 꽂고 지나가던 선배 하나가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미대니까 자기가 가독성 좋게 PPT 제작을 하겠다고 떵떵거리던 인간이 전날 돌연 잠적을 했다. 요즘 PPT 양식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헛소리를 하는가 싶더라니, 예상이 보기 좋게 적중했다. 완성한 것처럼 말하길래 보여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다른 팀원들이 부담 주지 말라고 말리는 탓에 한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도망쳤다.
“또 잠수 탔대요.”
옆에 앉아 있던 민준이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며 대신 답했다. 앞서 몇몇이 그랬던 것처럼 불쌍하단 눈으로 채하를 훑어보고,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채하는 누가 말을 걸든, 건드리든 무심한 낯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 * *
“조는 이름순으로 묶었습니다.”
이 정도면 네가 가는 곳에 조별 과제가 따라오는 것 아니냐고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작년까지 조별 과제가 없었다는 선배의 언질에 혹해서 신청한 수업에 또다시 조별 과제가 등장했다. 시험을 과제로 대신하겠다는데, 채하는 차라리 시험을 봤으면 했다.
교수의 등 뒤로 보이는 스크린에는 낯선 이름과 함께 채하의 이름이 묶여 있었다. 채하는 무덤덤한 눈으로 이번에는 몇 명이, 또 누가 잠적을 할지 예상을 하다가 널따란 강의실을 천천히 훑었다.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채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채하가 몇 번 더 눈을 깜빡일 때도 상대방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채하는 결국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임채하입니다. 1학년이에요.”
“아, 윤주현입니다. 시디과예요, 2학년.”
시디과. 그 말을 저번 학기에도 자기만 믿으라고 자신만만한 척 굴다가 난데없이 잠적하던 인간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연락을 아무리 해도 받지 않던 인간이 발표 날에는 점수를 받아먹으려고 일찍부터 강의실에 들어와 있었다. 전공 수업에 조별 과제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구구절절 제 사정을 설명했다. 과제를 못 하겠으면 휴학을 해야지 왜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걸까 싶어서, 쉬라는 의미로 이름을 빼 버렸다.
모여 있는 둘을 따라서 다른 조원까지 모이고 나니 주제를 정하고 역할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뚫을 듯이 강렬한 시선이 있었다. 본인 딴에는 힐끔 훔쳐보는 모양인데, 모른 척해 주기가 힘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채하는 내색하지 않고 펜을 굴렸다.
또 한 명이 PPT 제작을 맡겠다고 나서면 어떻게든 말릴 생각이었는데,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먼저 다 함께 만들자고 의견을 냈다. 자료 조사도 함께, PPT도 함께, 발표도 함께. 참 공평한 인간이었다. 자료를 합칠 때 번거로울지언정, 누구 하나 도망가더라도 가장 손해가 적은 해결책이었다.
[임채하] 안녕하세요 선배님 경영학과 임채하입니다
[임채하] 혹시 과제 어디까지 하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윤주현] 제출 기간 많이 남지 않았나요? 자료조사는 거의 끝났고 정리 중인데 왜요?
“야, 근데 그렇게 하면 알려 주냐?”
“알려 주던데.”
“넌 인생 살기 편하겠다.”
지켜보던 동기 하나가 부러워하면서 혀를 찼다. 마침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말풍선 옆 숫자 1 표시가 지워졌다.
“윤주현? 잘생긴 시디?”
“잘생겼다고? 나보다 잘생긴 사람 없던데.”
“네 옆에 있는 임채하는 사람 아니냐?”
유독 튀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눈에도 똑같았는지, 이번에는 뒤에 서 있던 동기가 아는 체했다. 화면을 훔쳐보던 옆에서 싸움이 나든 말든 채하는 주현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임채하] 제가 막히는 게 있어서 선배님 조언이 듣고 싶어서요
[윤주현] 뭔데요?
[임채하] 혹시 시간 되세요?
물 흐르듯 약속까지 잡은 채하는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시선이 쏠렸지만,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말없이 자리를 떴다. 임채하, 어디 가? 행선지를 묻는 동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현이 무임승차 하거나 잠적하는 무책임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건 알았다. 다 함께하자고 해 놓고 나중에 발뺌하는 앞뒤 다른 인간들도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제안한 사람은 보통 성실한 정상인이었다.
튈 것 같은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귀찮게 구는 게 일상인 채하였지만, 주현에게는 의도가 달랐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어, 잘했는데요?”
교외 카페에서 만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번듯한 외모의 인간은 채하를 단번에 찾아내어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쁜 와중에 힘겹게 시간을 낸 건지 행동이 성급했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의례적으로 물었는데, 얼버무리는 성의 없는 답이 돌아왔다.
착각했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채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늘 짓던 익숙한 미소를 얼굴에 달았다. 그리고 주문한 지 얼마 안 된, 입을 대지 않은 기다란 컵을 주현의 앞으로 쑥 밀어냈다.
“입 안 댔어요. 드세요.”
“……괜찮은데요, 저 아메.”
“전 새로 주문하면 돼요. 그리고 말도 놓으세요.”
주현은 곤란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제 앞에 놓인 컵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 * *
불순한 시선을 한두 번 받아 본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해 주는 거야 쉬운 일이었다. 뺨을 콕 찌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면 노트북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기계처럼 자판을 두드리는 주현이 있었다. 주현의 옆에는 오늘도 채하가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자리했다. 이따금 입에 빨대를 무는데 컵 안의 액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모양새가 웃겼다.
“선배,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맞다. 그러네. 채하야, 강의실에서 보자.”
주현은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가 두드러진 손이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주현을 배웅했다.
채하는 가끔 주현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잘 속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면서 몰라주길 바라는 게 어이가 없었고, 뻔히 보이는 속내를 허울 좋은 선후배의 우정으로 포장하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였을까.
[윤주현] 고생했어 내가 밥 사주고 싶은데 시간 언제 될까?
보기 좋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건드려 보고 싶었다.
[임채하] 선배 같이 밥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눈치 없이 못 알아먹고 또 들이대거나, 멋쩍어하며 물러날 줄 알았다. 채하의 메시지 옆에 붙어 있던 숫자 1이 사라지고, 긴 시간이 지나도 주현으로부터 답이 도착하지 않았다.
무시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고 채하는 기억에서 주현을 지웠다. 아쉬울 게 없는 관계였다.
* * *
[귓속말] 어스름 : 밍채야
[귓속말] 어스름에게 : ?
분명히 귓속말은 막아 뒀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친구 창을 켜자 그곳에 어스름의 닉네임이 있었다.
[귓속말] 어스름 : 복귀했어?
입대하기 전에 장비를 모두 팔았다가 제대 후 다시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스름. 그 닉네임을 곱씹다가 게임을 접기 전, 같은 길드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귓속말] 어스름에게 : 네
[귓속말] 어스름 : 그럼 우리 길드 올래?
[귓속말] 어스름 : 진실 터진거 알지?
진실은 입대 전 채하가 있던 길드의 이름이었다. 혼자 레이드를 돌다가 우연히 진실 길드 마스터 눈에 띄어 제안을 받고 가입했었다. 나중에 입대를 준비하게 되면서 게임을 접게 되었고, 길드도 자연히 탈퇴하게 되었다.
몰려다니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길드원과 어울린 건 손으로 꼽히지만, 어스름의 닉네임은 기억이 났다. 혼자 있는 게 불쌍해 보이기라도 했는지 자꾸만 말을 걸고 친한 척해댔던 인간이었다.
[귓속말] 어스름에게 : 네
평온. 어스름의 정보 창 길드 자리엔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차피 마땅히 갈 길드도 없었고 계속 게임을 할 거라면 버프 길드든 뭐든 구해야 하는 건 맞았다. 어떤 길드는 접속할 때 꼬박꼬박 인사해야 했고, 또 어떤 길드는 미접속 3일만 넘어가면 가차 없이 추방해 버렸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귀찮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어스름님이 길드 <평온>에 초대하셨습니다. 》
[SYSTEM] 길드원 밍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blueberry : 신입?
[길드] blueberry : 어서오세요
[길드] 어스름 : 지인이에요
[길드] 단공 : 이야 1위?
[길드] 어스름 : 혼자 게임하는거 좋아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
채하는 어스름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지만, 어스름은 채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귀찮게 굴면 탈퇴하려고 했는데, 정확한 판단을 내린 어스름을 보니 길드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듯했다.
[길드] 단공 : 아잉 ㅠㅠ 같이 겜해보면 안댐?
[길드] 밍채 : 해요
[길드] 단공 : 헉 정말요????
게임 한 판 하는 거 몇 분이나 걸린다고. 밍채는 단공의 캐릭터를 누르고 대련 신청을 보냈다. 단공은 레이드 초대인 줄 알고 덥석 받고 입장했다. 머리 위로 물음표 가득한 말풍선을 띄우더니 다짜고짜 빛 기둥을 맞고 뒤로 자빠졌다. 단공도 랭커였으니 일방적으로 맞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채하의 캐릭터에게 단 한 번도 대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공격이 모조리 빗나가니 나중에는 냅다 달려들기까지 했다.
[전체] 단공 : 와 개독하네;;
[길드] 단공 : 길마님 지인 맞음?
[길드] 어스름 : ^^
[길드] blueberry : 단공 왜 대련장임?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난 여한 없어 ^0^...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단공 : 밍채님 밍채님
[전체] 단공 : 친구할래요?
[전체] 단공 : 잘해줄게요
《 단공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탱커 구하기 힘들 때 써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수락했다. 혼돈의 설화는 탱커가 귀한 탓에 사람이 없는 시기에는 파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채하의 직업이 힐러인 성직자라서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긴 했지만 몇십 분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고달픈 건 매한가지였다.
일반 레이드에서는 아무 캐릭터나 세워 두고 탱커로 써먹으면 됐으나 경직 스킬이 필요한 악마 레이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없다고 레이드를 못 깨는 것도 아니었고 조금 게임이 곤란해지는 게 전부였지만 몇몇은 탱커가 없으면 절대 출발하지 않겠다고 못 박는 탓에 출발이 늘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길드] 단공 : 밍채님이랑 친구했다
[길드] 어스름 : 탱 세우려고 하네
[길드] 단공 : 탱커 맞는데용
[길드] 어스름 : 밍채는 나도 탱 세웠어 ㅎㅎ
[길드] 단공 : ?
[길드] 단공 : 길마님 마검사잖아요
[길드] 어스름 : 탱커로 쓰면 탱커래 ^^
[길드] blueberry : ?
그 말은 누구나 탱커로 세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진짜 탱커가 아니니 어그로가 좀 튀긴 했지만, 채하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어그로가 덜 온다면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전 길드에서는 어스름을 자주 이용했다. 어스름의 채팅을 보니까 왜 닉네임이 기억에 남았는지 깨달았다.
* * *
[SYSTEM] 길드원 밍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어스름 : 밍채 안녕 ^^
[길드] 단공 : ㅆㅂㅋㅋㅋㅋ
[길드] 어스름 : 시간 괜찮니?
[길드] 코쿄아 : 또예여?
[길드] 밍채 : 네
대답하자 어스름으로부터 장문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 어스름 : 사사게에 올라왔더라 ㅎㅎ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스샷을 보니까 네가 잘못한거 같긴 하더라고? 사과는 안할거지? ^^ 그럴 것 같았어 사과는 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이제부턴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는데 이것도 안 들어줄거지 ㅎㅎ? 밍채 네 의도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앞으로는 차라리 부캐를 키워서 해보는건 어떨까?
[귓속말] 어스름에게 : 네
[귓속말] 어스름 : 어 그래???
길드 나가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어스름은 부캐 육성을 제안했다. 평온 달고 사건을 몰고 다니면 길드 마스터인 어스름이 귀찮아지니 할 거면 길드 떼고 하라고 돌려 말하는 거였다. 못 들어줄 것도 없어서 알겠다고 대답하자 어스름은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길드] 단공 : 길마님 맨날 사사게 정독한다잖아
[길드] blueberry : 정독할만함 맨날 올라오던데
[길드] 코쿄아 : 매번 반응 갈리는거 신기해여 ㅋㅋ
[길드] blueberry : ㄱㄴㄲ 댓글알바 구한거임? 뭐임?
매일 올라오는 게시물을 어스름이 수습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좋은 아이템을 먹을 때마다 같은 파티였던 유저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니 그들은 당연하게도 채하의 편을 들어줬다. 받은 돈이 겨우 100만 골드, 1천 원도 안 되는 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람들이 채하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대변하고 알아서 마무리까지 지어 줬다.
[귓속말] 어스름 : 부캐 닉은 뭔데?
[귓속말] 어스름 : 지금 만들거야?
[귓속말] 어스름에게 : 예전에 만든거 쓸건데요
[귓속말] 어스름 : 닉이 뭔데?
[귓속말] 어스름에게 : 왜요?
[귓속말] 어스름 : 그것도 친구 하고 싶어서 그렇지 ^^
[귓속말] 어스름에게 : 채채요
부캐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감시하려는 목적이면서 어스름은 티 나는 거짓말을 뱉었다. 어스름이 말린다고 하여 그만둘 것도 아니었고, 지켜보라는 의미로 부캐 닉네임을 알려 줬다.
자꾸만 사사게에 출석하게 되는 건 고의가 아니었다. 어스름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최소 두 자리 랭커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마나를 소비해 힐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상인이라면 포션이 남을 테고, 손가락 조금 귀찮게 움직여서 포션 먹으면 되는 일인데 꾸역꾸역 힐 받겠다고 채팅 치는 꼴이 고까웠다.
채하는 본캐인 밍채의 골드를 채채에게 옮겨 장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보급 장비로도 게임은 할 수 있었지만, 상대를 원활히 죽이려면 어느 정도 수준의 장비는 필요했다. 부캐 중에도 웬만큼 장비를 맞춘 게 몇 있었지만 그건 평온에 이미 가입해 둔 터라 어스름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는 처지였다.
랭킹이 뜨는 걸 확인한 채하는 PvP 랭크전에 입장했다. 채채는 PvP용 캐릭터였다.
* * *
[귓속말] 어스름 : 밍채야...
[귓속말] 어스름에게 : 왜요?
두 시간 만에 다시 어스름에게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 어스름 : 너 왜 실버에 있어?
[귓속말] 어스름에게 : 배치가 여기였는데요
[귓속말] 어스름 : ?
[귓속말] 어스름 : 본캐는 마스터잖아
[귓속말] 어스름에게 : 네
[귓속말] 어스름 : ?????
[귓속말] 어스름 : 아니 왜 실버냐니까
[귓속말] 어스름에게 : 혼설이 저보고 실버라는데 왜 자꾸 저한테 물어요
[귓속말] 어스름 : 너 왜 패작하고 다녀????
양심 없는 몇몇 유저들이 벌써 사사게에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남 탓을 하거나, 게임에 협조하지 않거나, 체력 관리 못 해 놓고 힐을 요구하는 유저들을 만나면 게임을 포기했다. 정성 들여서 게임을 이겨 줄 이유가 없었다.
실버 티어에는 조별 과제에서 만났던 조원들만큼 다양한 인간이 존재했다. 남 탓을 안 하고 게임에 협조적이어도, 자기가 게임을 잘해서 이긴 줄 알고 으스대면서 칭찬을 요구하는 걸 보니까 나중에는 이겨 주기가 싫었다. 상대 팀으로 만나면 일부러 달달 볶다가 제한 시간이 끝나 갈 때쯤 죽여 놓았다.
당시 채하는 무척 심심했고, 별난 인간들이 모인 실버 티어에서 일어나는 일은 재미있었다. 본캐인 밍채보다 부캐인 채채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인제 그만 돌아오라고 어스름이 재촉할 정도였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슬슬 실버 티어도 지루해져서 정말로 본캐로 돌아갈까 하던 때였다.
[파티] 카민 : ㅎㅇㅎㅇ
[파티] 카민 : 형만 믿어♡
전 판에도 이런 인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채하는 무심한 눈으로 화면을 훑었다.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그나마 아바타는 간간이 장신구에 흰색이 섞여 있었지만 천이 온통 새빨간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일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드에 있는 블루베리와 스트로베리도 하나의 색에 맞춰서 커스터마이징을 했는데,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는 오랜만이었다.
[전체] 성직자상향좀 : 카민님
[전체] 카민 : ?
[전체] 성직자상향좀 : 님 팀 채채
[전체] 성직자상향좀 : 사사게에 박제된애임
[전체] 티팟 : 실물 처음봄
[전체] 카민 : ?
최근 사사게에 올라간 일이 잦아서 그런지 랭크전을 돌릴 때면 알아보는 유저가 생겼다. 부캐인 채채의 활동지가 랭크전 실버 티어로 특정이 된 탓이었다.
[파티] 채채 : 형만 믿을게요♡
채하는 붉은 소환사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려고 채채로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보호 스킬까지 걸어 줬다.
안타깝게도 소환사의 실력은 딱 실버 티어 수준이었다. 공격 타이밍을 볼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잘 막는 것도 아니고. 형만 믿으라고 하길래 골드 정도 실력은 되는 줄 알았더니 완전히 형편없었다. 그러면서 자신만만하게 군 게 웃겨서 힘 좀 내 보라고 힐을 걸어 주니 나가서 싸우진 않고 채하의 캐릭터에게 달려와 뒤로 쏙 숨었다.
《 Win 》
당연하게도 게임에서 이겼다. 본캐가 마스터 티어인 채하가 전력으로 싸웠는데, 실버 티어인 유저들에게 지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같은 팀이었던 소환사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파티] 채채 : 형
[파티] 채채 : 저 덕분에 이겼는데 왜 아무 말 없어요?
이렇게 완벽히 이겨 주면 고맙다고 인사하거나 격렬하게 반응하며 친구 신청을 보내는 유저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소환사가 퇴장했다는 메시지였다. 염치없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먼저 들이대던 인간이 그러니까 어이가 없었다.
[SYSTEM] 새로운 파티원을 찾는 중입니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어.”
채하는 말없이 게임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놀랐다. 같은 편이었던 소환사를 상대편으로 만났다. 채하는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던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전체] 채채 : 여보 ㅋㅋ 상대편이네?
* * *
재앙 채널이 어디였더라. 다시 본캐인 밍채로 돌아온 채하는 길드 창을 열어 재앙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길드 마스터인 신사가 열심히 써 놓은 소개란에는 4채널이라고 친절히도 설명되어 있었다.
[길드] 단공 : 밍채 왤케 오랜만이지?
[길드] 코쿄아 : 오랜만 맞아여 ㅋㅋㅋ
[길드] 단공 : 밍채 뭐임 바쁨?
[길드] 어스름 : 드디어 청산했구나
어스름은 채하가 게임에서 벌이는 괴이한 짓을 그만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스름은 채하가 본캐를 숨기고 부캐로 즐기고 다녔으면 했지만, 채하는 본캐든 부캐든 재미만 있으면 상관없었기에 본캐를 끌고 블랙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스름이 알았다면 기겁하며 말렸을 일이었다. 물론 어스름의 말을 듣진 않겠지만.
소환사가 본캐라고 소개한 성기사는 역시나 4채널 광장에 있었다. 다가가자 음유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블랙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눈동자는 똑같이 선명한 붉은색이었고, 머리카락 색은 닉네임은 따라서 새까맸다. 블랙은 길드원 중 누군가 매물 없다고 울부짖던 아바타를 걸치고 있었다.
* * *
블랙과 커플이 되었다. 꼭 블랙과 커플이 되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최근 만난 유저 중에 가장 재미있어 보여서 저지른 일이었다. 실버 티어에서 재밌는 일을 기다리며 게임 돌리는 것보다 블랙을 쫓아다니는 편이 시간 절약이 되었다.
블랙은 웃겼다. 커플 하기 싫다고 아는 유저를 동원하여 불러오는 것도 웃겼고, 그 유저들이 블랙의 편이 아니라 제 편을 들어주는 것도 웃겼다. 이래도 저래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으니 나중에는 커스터마이징을 트집 잡았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에 딱히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본 설정에서 조금만 변화를 줬던 터라 바꾼다고 아쉬울 것도 없었다.
[길드] blueberry : 밍채 해킹임?
[길드] strawberry : 왜?
[길드] blueberry : 커마 맡긴건가?
[길드] 단공 : 뭐임 밍채 커마 바꿈?
[길드] 단공 : 나도 볼래
[길드] blueberry : ㅇㅇ 광장
[전체] 단공 : ㅆㅂ 개잘생겼네
[전체] 코쿄아 : 여자들이 좋아할것 같아여
여자들은 모르겠고 블랙의 취향이란 건 안다. 커스터마이징까지 바꾸고 나니 블랙의 커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커플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둘 다 길드원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서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도 사소한 변화는 있었다. 재앙의 길드 마스터가 갑자기 돈을 걸고 딜 내기를 하자고 한다거나, 그 돈을 블랙에게 넘겼더니 아바타 선물이 도착했다거나, 늘 바뀌던 랭크전 파트너가 이제는 오로지 블랙이 되었다거나.
[귓속말] 어스름 : 마몬 갈래?
[길드] 코쿄아 : 저희 언제 출발해여?
[길드] 어스름 : 밍채만 데리고요
[길드] 단공 : 김민채 부캐에 있네
[길드] 단공 : 왜 부캐키움?
[길드] 어스름 : 재앙 길드채널 아는 사람?
[길드] 코쿄아 : 재앙이여? 4채여
[전체] 어스름 : 재앙길드가 4채구나
[전체] 단공 : 근데 여기 맞음?
[전체] blueberry : 맞겠지
블랙과 랭크전 호흡을 맞추던 중이기도 했고 대답하기 귀찮아서 무시하니까 길드원들이 직접 찾아왔다. 단공이 며칠 전부터 커플 어디서 구했느냐고 귀찮게 굴더니만 겸사겸사 커플의 존재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귓속말] 블랙 : 뭐야 이 사람들?
[귓속말] 블랙에게 : 모르는 사람이에요
[전체] 어스름 : 왜 귓을 안 봐?
[전체] blueberry : 길마님 민채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 아닌지요?
[전체] 단공 : 김민채 원래 귓 안봄
[전체] blueberry : ㅇ? 얘 파티 있다는데요?
[전체] 밈체 : 랭크전 할건데
[전체] blueberry : 또 뭔 컨셉질하는데;
[전체] blueberry : 괜한 사람 그만 괴롭히고 본캐로 들어와
먼저 수작질을 걸었던 건 블랙이었다. 장단에 맞추어 줬을 뿐인데 블랙을 못살게 군 입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쌍방 과실이었다면, 블랙과의 일은 유일하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길드] blueberry : 진짜 착해보이는데 저런 사람을 괴롭히냐
[길드] 단공 : ㅈㄴ 불쌍함...
[길드] 코쿄아 : 뭔일이에여?
[길드] 어스름 : ㅎㅎ 아니겠지
[길드] 밈체 : 그 형이 먼저 들이댔다니까요
[길드] 단공 : 이젠 사기까지 치네
블랙과의 랭크전은 계속되고 있던 터라, 이후 채팅에 반응해 주지 않자 길드원들도 자연스레 대화를 끊고 마몬 레이드로 떠났다. 랭크전을 마치고 다시 본캐로 옮겨 오자 마침 광장에 서 있던 어스름과 마주쳤다.
[전체] 어스름 : 진짜로 블랙님 뭐야?
[전체] 밍채 : ?
[전체] 어스름 : 친한거야?
[전체] 밍채 : 그냥 재밌어서 데리고 다니는건데요
[전체] 어스름 : ???????
커플은 있으나 마나 한 자리였고 블랙은 전투에서 썩 쓸모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게임을 한 지 얼마 안 된 건지 이해도가 부족했고, 만렙인데도 스토리가 끝까지 안 밀려 있는 희한한 인간이었다. 진저리치며 기겁하는 반응이 웃겨서 따라다니는 거지, 이것도 질리면 다시 실버 티어로 돌아가든가 할 생각이었다.
[전체] 어스름 : 나중에 재미없으면 어떡할 건데?
[전체] 밍채 : 버려야죠
채하는 당연한 걸 묻는 어스름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블랙도 어차피 좋아서 커플하고 있는 건 아닐 텐데, 이쪽에서 먼저 끊어 주면 고마운 일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블랙은 채하에게 조금 재미있는 인간이었다.
예고 없이 진행되었던 기습 밸런스 패치. 블랙의 직업인 성기사는 상향을, 채하의 직업인 성직자는 하향을 받았다. 레비아탄에서 대미지로 경직 비슷한 효과를 내었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성직자 다수가 드러누우며 항의할 때, 채하는 홀로 심드렁했다. 어차피 파티 게임이었고 성직자가 너프 먹은 만큼, 상향 받은 직업들이 힘써 주면 되는 일이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시시로 : 성직자 안 받음
성직자 직업을 받지 않겠다는 유저들을 만날 때 역시 채하는 무덤덤했다. 성능 하향된 직업을 거르는 건 언제나 있던 일이었고 이번이 성직자의 차례가 되었을 뿐이었다. 혼돈의 설화 모든 유저가 성직자를 받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인간 하나가 벌인 건데,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에 바락바락 화를 내는 것도 힘만 빠졌다.
채하의 생각은 그랬는데, 블랙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길드] 단공 : 사사게에 블랙님 떴음;;
[길드] 어스름 : ?
[길드] 단공 : 밍채 잘못 아님 ㅋㅋㅋㅋ 편하게 읽으세요
[길드] 어스름 : 다행이네 ^^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 개멋있다 밍채랑 깨지고 나랑 사귀면 안되나
[길드] blueberry : 두 개의 재앙이네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은 사사게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에 예민했다. 채채로 플레이 중이었던 자신에게 들이댔다가 모른 체하던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테다. 시시로가 성직자를 거른다고 해서 블랙이 피해 보는 건 다른 파티로 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전부였을 텐데, 구태여 시비를 걸었다는 게 의아했다.
그것도 채하가 퇴장한 뒤의 일이었다. 사사게에 게시글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채하는 영원히 몰랐을 테다. 너를 위해서 나섰다고 으스대기라도 했으면 이해했을 텐데, 잘 보이고 싶어서 저지른 일이 아니란 게 의외였다.
예상에서 어긋난 블랙이란 인간이 궁금해졌다.
* * *
보낸 사람 : 블랙 (성기사)
우편 제목 : 밍채야 도와준거 고마워
우편 내용 : 이건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보내
첨부된 아이템 : [지적인 학자 세트]
반짝이는 금테 안경, 새까만 케이프에 장식된 황금빛 브로치와 체인. 게임을 몇 년 했는데도 블랙이 보내 주는 옷들은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모조리 염색해서 보내는 탓일까. 거래소에서 유저들이 염색해 놓은 아바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채하의 캐릭터를 고려해 염색한 아바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바타를 밍채에게 입혀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으로 다가갔다. 채하는 오래간만에 은테 안경을 꺼냈다. 이따금 눈이 피로할 때나 쓰던 거였다. 학교에서 안경을 쓰면 얼굴이 낯선지 다들 힐끔거리고 지나쳤다.
[밍채] (사진)
[밍채] 저 예뻐요?
토익 학원에 도착한 채하는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은 것을 확인하고 혼돈의 설화에 접속해 스크린 샷을 찍었다. 야무지게 애교 감정표현까지 사용해 촬영한 사진을 블랙에게 보내니, 얼마 안 가 답장이 도착했다.
[블랙] 어 괜찮다
[블랙] 지금 접속 중이야?
[밍채] 아뇨 저 영어 학원이요
전공 과제 리포트는 수학 학원, 토익은 영어 학원으로 둔갑했다. 블랙에게 나이를 속이면서 죄책감이 든 적은 없었다. 어차피 실제로 만날 사이도 아니었고, 온라인에서 구구절절 개인 정보를 떠드는 건 조심성 없는 짓이었다.
이전 길드에서는 길드 마스터가 끈질기게 물어대길래 나이를 말해 줬는데, 형이라고 부르라는 강요가 이어졌다. 기가 막혀서 아저씨라고 했다가 일반 길드원으로 강등당했던 기억이 있었다. 나중에 길드 마스터가 로그아웃하고 어스름이 몰래 등급을 올려 줘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길드를 옮겼을 테다. 채하는 길드 마스터 보라고 일부러 어스름에게만 형이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지금도 어스름은 여전히 형이었다.
단공이 왜 자기는 형이라고 불러주지 않느냐고 섭섭해했는데, 나이도 모르는 인간이 서운해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때처럼 아저씨라고 해 주자 차라리 단공이라고 불러 달라며 한발 물러났다.
“술 먹는다는데 너 갈 거야?”
“안 가.”
“헐, 왜 안 가? 나 담배 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민준이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갔다. 버리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열린 문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반듯한 얼굴을 발견했다.
“너 진짜 안 가?”
“안 가.”
“얘들이 너 꼭 데려오라는데?”
“나 약속 있어.”
자꾸만 묻는 민준을 흘기고 냉동고 앞에 서 있는 주현에게 불쑥 다가갔다.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봤는지 문이 열린 뒤로 쭉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제대 후에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교양 수업에서 마주친 시각디자인과 3학년이 주현의 친구였는지 자꾸만 주현 얘기를 해대서 근황 정도야 꿰뚫고 있었지만.
“선배. 오랜만이에요.”
채하는 주현이 잡으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콜릿 맛 콘 아이스크림을 집어 주현의 바구니에 대신 넣어주었다. 몸은 여전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었고 눈알만 바쁘게 굴러갔다.
“잘 지내셨어요?”
가볍게 던진 인사에 번듯한 얼굴이 무너졌다. 그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동안 연락 한번 없으셔서, 저 섭섭했어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져 보자 주현이 바구니를 챙기며 냉동고 문을 닫았다.
“과제 때문에 바빴고, 졸업 때문에 바빴고, 취업 때문에 바빴고, 이젠 일하느라 바빠.”
바쁘든 말든 그건 채하와 관련 없는 일이었다. 달아나고 싶어서 안달인 주현의 앞을 막아서며 채하는 억지로 대화를 이어 갔다.
“선배, 저 안 반가워요?”
반갑진 않았지만 반가운 척을 해서라도 들러붙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자꾸 술자리에 가자고 꼬드기는 민준이 피곤했다. 얼굴 비춘 다음에 눈치껏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겠다만 그러면 게임 접속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다.
“집 가면 게임밖에 안 할 텐데, 가서 친구랑 놀지 그래?”
채하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친구는 너랑 놀고 싶은 눈치인데.”
호선을 유지하고 있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건드려도 가만히 있길래 마냥 무른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 모여서 노는 거 좋아하는데 쑥스러워서 잘 못 낀다며? 있는 친구들한테 잘해.”
“헐, 너 그랬냐? 야, 얘들이 너 기다리고 있다니까?”
다른 때면 예상에서 벗어나게 행동하는 주현이 흥미로웠을지 몰라도, 선약이 있는데 술자리에 끌려가게 된 채하에겐 골치 아픈 변덕이었다. 채하는 제 팔에 엉겨 붙는 민준을 떨치며 주현을 불렀다.
“선배.”
“그럼 오늘은 잘 놀고. 연락해, 다음에 보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나왔다. 출입문이 열리고 주현이 편의점을 벗어나면서 꿉꿉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 * *
수호자 직업이 업데이트되었다. 신직업에는 관심이 없지만, 블랙이 부캐를 육성한다고 하기에 따라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다. 블랙이 닉네임으로 ‘블루셀레스트’를 한다길래 혹시나 하여 인터넷에 카민을 검색해 보자, 카민 역시 색 이름이었다. 블랙이 닉네임을 모조리 색깔로 짓는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 맞춰서 캐릭터 닉네임을 ‘컬러수집가’로 결정했다. 커스터마이징도 최대한 따라 해 만들고 내친김에 길드도 생성했다. 평온에 가입하면 어스름이 또 괜한 걱정을 하며 귀찮게 굴게 분명했다.
컬러수집가가 채하라는 걸 모르는 블랙이 도망가고, 그 뒤를 쫓고, 무슨 일인지 블랙이 커플 신청까지 먼저 해 줬다. 채하는 굉장히 즐거운 상태였다. 메마른 땅에서 이상한 인간이 블랙을 죽일 때는 조금 짜증이 났으나 금방 갚아줬으니 기분 나쁜 것도 잠시였다.
분명히 그랬는데,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뭐해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아 미안
[파티] 블루셀레스트 : 길드 뉴비가 뭐 좀 물어보느라
[파티] 컬러수집가 : 길드에 사람 없어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너 오기 전에 잠깐 도와줬었거든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가 편한가봐
웬 이상한 인간이 등장했다. 물러터져서 불쌍한 사람 못 지나치는 거야 진작부터 알았지만, 막상 다른 인간 신경 쓴다고 가만히 멈춰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더러웠다. 자랑하듯 이야기를 늘어놓는 블랙도 괘씸했다. 채하는 공격을 멈추고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화면 속 블랙을 응시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학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렇구나
원인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조차 못 하는 블랙은 다른 곳을 들쑤시고 있었다. 서운하다고 말하면 곧바로 해결될 일이었지만 채하는 그러지 않았다. 본인이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줄도 몰랐으니 그럴 수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채하는 홀로 몬스터를 잡는 블랙을 지켜보며, 이쯤에서 버릴지 말지 저울에 올려 두고 고민했다. 사람 하나 졸졸 쫓아다니는 것도 꽤 힘이 드는 일이었고, 접속 시간을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슬슬 귀찮던 참이었다.
[전체] 양궁달인 : 형!!!
성직자 안 받겠다던 시시로와 말싸움이 붙었던 것만 보아도 블랙은 정의감이 강했다. 나서는 걸 싫어해서 그렇지 원래 그런 성향의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너그러운 블랙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넘쳤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이제 와서 사람이 들러붙는 게 새삼스러울 일이 아닌데.
[전체] 양궁달인 : 블랙형 퀘 어디임요?
[전체] 양궁달인 : 렙도 비슷한데 같이 하면 안됨여?
게임을 하면서 이토록 기분이 불쾌한 건 처음이었다.
[파티] 양궁달인 : 헐 동갑이네 반말ㄱ?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파티] 컬러수집가 : 저 반말 싫어해요
뉴비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아이템 세팅을 한 꼴로 뉴비인 척하는 게 한심했고,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고 도와주는 블랙은 더욱이 어이가 없었다. 양궁달인의 나이를 듣고 나니까 왜 블랙이 거절을 못 하고 도와줬는지 알 수 있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은 어리면 다 좋아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
[파티] eastone : ......????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가 어린 걸 좋아한다고?
[파티] 컬러수집가 : 네
본인은 몰랐는지 황당해하는 반응이었다. 블랙은 길드원인 서쪽과 말을 주고받다가 대뜸 숨겨 두던 본심을 꺼내 놓았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래도 니가 제일 귀여워
[파티] eastone : .......?
[SYSTEM] eastone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서쪽에게는 외면을 받은 블랙이지만, 채하는 그 말에 설득되어 버리려던 결정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 * *
[SYSTEM] 길드원 밍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단공 : 밍채ㅎㅇ 나 블랙님이랑 사귐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
[길드] 밍채 : ?
접속하고 나서 처음으로 본 게 단공의 헛소리였다. 마우스를 움직여 4채널 광장을 둘러보던 채하는 블랙이 없단 걸 확인하고 친구 창을 켰다. 커플의 자격으로 채널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CH.7] 대도시 채예스 - 광장.
한 번도 평온의 채널에 놀러 온 적 없는 블랙이었다. 단공이나 어스름이 또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블랙을 꼬드긴 듯했다. 채하는 한숨을 삼키며 채널을 바꾸고 그제야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말을 던졌다.
[전체] 밍채 : 형 바람피우는 거예요?
어이없어하는 블랙의 채팅이 이어져야 했지만, 돌아오는 건 모여 있던 유저들의 수군거림이었다.
[전체] 단공 : 뭐야 ㅁ1친 왜 사라져?
[전체] blueberry : ?
[전체] 어스름 : 블랙님 보호석 안 넣으셨어요?
[전체] 블랙 : 넣었어요..
[전체] westone : 문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보호석 얘기를 하는 걸 보아 강화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단공의 말대로 블랙의 등에 달려 있던 커다란 검이 자취를 감췄다. 정보 창을 열어 보자 역시나 장비에서 무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전체] 밍채 : 형 최고급 보호석으로 넣었어요?
[전체] 블랙 : 그냥 보호석..
[전체] 어스름 : 아이고... 그냥 보호석은 15강 강화부터는 50% 방어밖에 못해줘요
[전체] 단공 : 블랙님 무기 뭐였죠? 어둠이었나?
[전체] 블랙 : 음률이요..
[전체] 단공 : 아 그래도 개아깝다.....
평온 길드원은 제 무기가 터진 것처럼 블랙을 걱정해 주었다. 정작 블랙과 늘 파티를 맺는 채하는 침묵을 지켰다.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느라 말을 할 틈이 없었다.
‘이러다가 게임 접는 거 아닌가?’
한 번도 걱정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접속 시간은 채하가 더 길지 몰라도, 혼돈의 설화에 대한 애정은 블랙이 컸다. 평일에는 일 다닌다고 그나마 자제하는 거였지, 주말에는 내내 접속 중인 게 블랙이었다.
게임에 애정이 있더라도, 멀쩡하던 무기를 잃은 건 게임을 그만둘 만한 충분한 사유였다. 아바타 사들이며 즐겁게 게임을 하던 유저들도 무기 강화에 진전이 없다고 별안간 게임을 접는 일이 상당했다. 강화는 그만큼 장벽이 높았다.
[전체] blueberry :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문의 넣어보시고요
[전체] blueberry : 무기는 돈 모아서 어둠으로 가세요
[전체] blueberry : 음률은 돈 아까워요
[전체] 단공 : ㅇㅈ 닉도 딱 어둠이랑 어울리네요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 네
길드원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블랙을 보며 채하는 고심했다. 무턱대고 무기를 사 주기엔 거절할 가능성이 컸다. 블랙은 일방적으로 받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블랙이 상가 쪽으로 등을 돌렸다. 채하는 다급히 키보드 위로 손을 얹었다.
[전체] 밍채 : 지금 사지 마요
[전체] 단공 : 그럼 블랙님은 뭐 들고 싸움? 맨손? 격투가냐?
[전체] 밍채 : 사탄 나오면 가격 내려갈텐데 왜 지금 사요?
[전체] blueberry : 단공 거래소에 재료 올려둔 거 아냐? 바이럴인듯
[전체] 단공 :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네;;
[전체] 밍채 : 형 일단은 보급 무기 껴요
무기에 큰돈을 쓰게 되면 아바타를 살 돈이 없어진다. 블랙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레이드가 아니라 아바타 때문인데, 그러다가 흥미를 잃고 게임을 관두면 곤란했다.
[전체] westone : 레비아탄 ㄱ?
[전체] 컁컁컁 : 분위기 못 읽냐구염 ㅠㅠ
[전체] westone : 아닠ㅋㅋㅋㅋ 블랙님 무기 재료 얻어주자구요!!
[전체]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밍채 : 가요
마침 재앙 길드의 서쪽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채하는 광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잽싸게 초대를 보냈다. 단공이 몇 번이고 거절하길래, 채하는 똑같이 몇 번이고 초대했다. 한 명 없다고 클리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레이드 클리어 후, 파티가 해체되고 채하는 부캐에 접속했다.
[SYSTEM] 길드원 밈체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어스름 : ?
[길드] 밈체 : 레이드 돌려고요
원활하게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부캐까지 돌려야 했다. 부캐에 접속하자마자 떨떠름한 어스름의 채팅이 채하를 반겼다.
[길드] 단공 : ㅆㅂㅋㅋㅋㅋㅋㅋ 길마님 ㅈㄴ 예민함
[길드] blueberry : 블랙님 덕에 요즘 사사게 볼 필요 없다면서요
[길드] 바람결 : 사사게요????
[길드] 어스름 : ^^
[길드] 단공 : 근데 길마님 왜 밍채 붙잡아두는거임?
[길드] 단공 : 보통 사사게 가면 추방하지 않나
[길드] 어스름 : 밍채로 홍보가 잘돼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어스름 : 성직자 문의 많더라 ^^
대다수의 뉴비들은 아이템을 맞출 때 랭킹 1위의 장비를 참고했다. 웬만해서 채하가 1위 자리를 버티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길드 홍보가 되었고, 길드 가입 문의가 가장 많은 직업은 단연 성직자였다.
길드원들이 자신에 대해 떠들든 말든 채하는 악마 레이드 방을 찾아서 떠났다.
시간이 지나고 <분노의 사탄> 업데이트 날. 게임에 접속하니 파티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블랙이 보였다. 보나 마나 무기 탓을 하며 파티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채하는 곧장 블랙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길드] 단공 : 머임 방금 출발했는데
[길드] 어스름 : 밍채 어차피 안갈걸
[길드] 단공 : 쟤를 받아주는 파티가 있다고요?
[길드] blueberry : 블랙님 있잖아
[길드] 단공 : 블랙님 진짜 불쌍하다
[길드] 어스름 : 출정 안 뜨는 거 보니까 밍채 기다리신듯
[길드] 단공 : 왠지 아까 물어보니까 안 간다고 하던데 ㅠ0ㅠ
정작 고생하는 건 보급 무기를 착용한 블랙과 함께 레이드에 가야 하는 채하였지만, 누구도 채하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채하도 반응해 줄 필요 없는 길드 채팅을 무시하고 블랙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파티] 블랙 : 이걸 공컷 없이 공개방으로 깨자고?
[파티] 밍채 : 둘이서 할건데요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데이트인데 왜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요?
둘이서 가려고 일부러 길드 파티가 출발했을 시간에 느지막이 온 건데, 다른 사람을 끼우려고 안달인 블랙이 괘씸했다. 이래 놓고 공개 방으로 가자고 하면 무기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고 들 게 분명했다.
승리는 아득바득 우긴 채하에게 돌아왔다. 블랙도 순순히 협조하려는지 기여도를 켜면 안 되느냐고 물어왔다. 평소에는 기여도 표시 없이 게임을 하면서, 보급 무기를 착용한 지금 같은 상황에 기여도를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발상이 의아했다. 이해가 안 가긴 했지만 해 달라니까 해 줬다.
무기가 바뀌어 공격 속도에 변화가 있기도 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공격하는 사탄 탓에 블랙은 바닥을 자주 굴러다녔다. 하필이면 치명타 대미지가 떠서 한 방에 죽어 버리기도 했다. 채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블랙에게 다가가 빛을 불어넣어 살려냈다.
[파티] 밍채 : 형 그냥 방어만 해요
공격이 먹힌다고 해도 사탄에게 큰 영향이 없을 텐데 블랙은 자꾸만 타이밍을 엿봤다. 그렇게 얼쩡거리다가 또 죽을 텐데. 채하는 블랙에게 조언을 하고 사탄에게 빛 기둥을 쏟아부었다.
조언대로 방어에 집중하나 싶었는데, 기회가 오니 참지 못하고 달려든 블랙은 결국 바닥과 한 몸이 된 상태로 숨이 끊겼다. 말 안 듣고 죽은 걸 보면 한심해야 하는데, 마냥 웃겨서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채하는 다시 블랙을 살리기 위해 캐릭터를 끌고 달려갔다.
부활 스킬은 이미 전에 썼고 아직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부활 아이템을 사용해야 했다. 다가오는 사탄이 보였지만 채하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부활을 이어 나갔다. 사탄이 들고 있던 창이 캐릭터의 등을 내리치며 화면에 떠 있던 버프 아이콘을 빼앗아 갔다.
[파티] 블랙 : 그만 좀 살려 ㅅㅂ
성직자 업데이트 이후, 레이드에서 처음으로 기본 버프를 잃는 순간이었다.
* * *
운이 좋았다. 무기 재료는 이미 다 모아 뒀는데 아무 이유 없이 전하면 거절할 게 뻔해 구실을 찾던 중이었다. 마침내 블랙의 앞에서 아이템 보상으로 [7대 악마 무기 재료 선택 상자]를 획득했다. 파티원 모두 액세서리 재료인 [분노의 열매]를 갖고 싶어 했지만, 채하는 홀로 무기 재료로 쓰이는 아이템만을 원했다.
[전체] 단공 : 블랙님은 왜 너 같은 애를 만나서
조금 전부터 블랙에게 커플 타령을 하는 단공을 완벽하게 박살 내고 대련장을 빠져나온 채하는 캐릭터를 끌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NPC 대장장이에게 완성된 [어둠이 깃든 대검]을 받고 옵션작까지 마친 후에야 다시 광장으로 돌아갔다. 블랙은 역시나 부담스러워했지만, 광장에 있던 유저들이 받으라고 재촉한 덕에 채하는 소매넣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길드] 단공 : 블랙님이랑 밍채 실친임?
[길드] 어스름 : 아닐걸...
[길드] 단공 : 근데 무기를 사준다고???
[길드] blueberry : 민채 돈 많잖아
[길드] 단공 : 그건 맞지
[길드] 단공 : 대검 선물하면 블랙님 나랑도 커플해줄까?
[길드] blueberry : 너 같은 애랑 만나고 싶겠냐고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통망통 : 단공님 전 사귈 의향 있어요
[길드] 단공 : 님은 좀
[길드] 통망통 : 잉잉 무기 사쥬떼염
[길드] 단공 : 우웩
[길드] blueberry : 천년만년 오래가세요
앞으로는 블랙과 계속 붙어 다닐 텐데, 무기 정도야 쉽게 사 줄 수 있었다. 다른 아이템도 블랙이 원한다면 구해 줄 의향이 있었지만, 워낙에 물욕 없는 인간이라 그런 일은 없을 듯했다. 사탄 듀오 클리어 덕분에 사이도 돈독해졌고, 무기 일도 해결이 되었고, 이제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을 때였다.
[SYSTEM] 블랙님은 이미 파티에 속해 있습니다.
길드원들과 어찌나 붙어먹던지, 늘 보던 메시지라 심드렁했다. 이번엔 또 어느 던전에 갔나 싶어서 친구 창을 켜 위치를 확인하자 <인형의 집>이었다. <인형의 집>이야 첫 번째 일반 레이드였으니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옆에 덧붙여진 헬 모드 표시가 수상했다.
확인을 위해 블랙과 친한 유저들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레아는 로그아웃 중이라 초대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밍채 : 안녕하세요
[파티] westone : ??안녕하세요
[파티] 월월월 : 안녕하세염
‘누구랑 간 거지.’
[귓속말] 블랙에게 : 인형의 집에 누구랑 있어요?
[귓속말] 블랙에게 : 형 헬모드 안 하잖아요
혼자 랜덤 매칭을 돌리진 않았을 테고, 평소 붙어 다니던 건 앞서 초대했던 셋이 전부였다. 채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블랙에게 초대를 반복했다. 언젠간 받아 주겠거니 싶었다. 블랙이 입장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뜨고 나서야 채하는 마우스 클릭을 멈췄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강화석 드릴까염?
[파티] 블랙 : 아뇨 저 신사님이 주신것도 있고
[파티] westone : ?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골드도 더 샀
[파티] 블랙 : ?? 왜요
[파티] westone : 신사요?
어디선가 들어 본 닉네임인데 캐릭터 외양이 떠오르지 않았다. 셋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채하는 신사의 닉네임을 검색해 정보 창을 열어 보았다. 블랙과 같은 재앙 길드. 직업이 성기사인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마몬에서 딜 내기를 했던 재앙의 길드 마스터라는 걸 기억해 냈다.
강화석을 받는 대가로 함께 던전을 돈 건 아닐 테고. 상대방이 억지로 쥐여 주고 끌고 갔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채하는 블랙에게 신사보다 더 큰 마음의 빚을 달아 놓기로 했다. [어둠의 강화석]을 1천 개씩 두 묶음을 보냈다. 강화하고도 남을 넉넉한 양이었다.
[파티] 블랙 : 잘 쓸게
[파티] 밍채 : 네
[파티] westone : 뭐 주셨어요?
[파티] 블랙 : 강화석이요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신사랑 밍채님 중에 누가 더 많이 주셨어요?
[파티] 블랙 : 비밀이에요
[파티] westone : 월월님은 그냥 얘기해주던데
[파티] 월월월 :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늦게 봤다구염 ㅠㅠ
천 단위로 보내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했는데 신사를 얕본 모양이었다. 채하는 1천 개를 더 얹어서 보냈다.
[파티] 블랙 : 그만 보내
[파티] 밍채 : 네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승자네요~!
* * *
“저기, 그 선배 아니야? 편의점이랑 고기 먹었을 때…….”
민준이 가리킨 손가락을 쫓아가 보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쪽에 자리를 잡은 주현이 보였다. 2학기 수강 신청을 앞두고 북적이는 피시방에서 용케도 주현을 찾아낸 민준이 대단했다. 홀로 번듯한 얼굴을 가져서 그쪽으로 시선을 뒀다면 충분히 눈에 띄었을 테지만, 주변에 관심 없는 채하로선 발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민준 덕에 주현을 마주친 채하는 조금 전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채하, 어디 가?”
“선배 만나서, 인사드리려고.”
반대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건우가 묻자 채하는 짤막하게 설명하고 주현에게 다가갔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주현이 피시방에 올 만한 일이라곤 혼돈의 설화밖에 없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모니터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던 상대가 인사를 듣더니 별안간 숨을 멈추고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커피 드세요.”
아직도 잘 마시는 척할지 궁금했다. 어, 어. 당황한 주현이 말을 더듬으며 컵을 건네받았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바쁘게 굴러가는 눈알이 가련했다. 주현의 모니터엔 역시나 혼돈의 설화 홈페이지가 띄워져 있었다. 아직 로그인하지 않았는지 닉네임은 표시되지 않았다.
“재밌어요?”
게임에서 사기당한 적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만만한 성격 탓에 꽤 고생했을 것 같은데.
“재밌게 하세요.”
어쩌면 게임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주현이 혼돈의 설화를 한단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그저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제가 하던 게임을 따라 한단 게 웃겼다.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 * *
“아, 망했다. 휴학할까?”
“……씨발.”
곳곳에서 욕이 난무하고 휴학을 논의할 때, 수강 신청에 성공한 채하는 유유히 혼돈의 설화에 접속했다. 컴퓨터를 붙들고 씨름하던 건우와 민준도 결국엔 욕을 읊으며 다른 학생들처럼 퇴장했다. 한산해진 피시방에서 채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모니터를 뚫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귓속말] 블랙에게 : 형 언제 나와요
블랙은 사탄 레이드 중이었다. 블랙과 친한 서쪽이 4채널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강화석으로 순진한 사람을 꼬드기던 그 얍삽한 인간이 또다시 치근덕대는 게 명백했다.
[귓속말] 블랙 : 좀 걸릴 것 같은데
[귓속말] 블랙에게 : 네
로그아웃 중일 때마다 다른 인간하고 붙어먹는 것에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쨌든 원흉은 블랙에게 들이대는 신사에게 있었다. 양궁달인 때처럼 심기 불편한 걸 티를 내며 눈치를 주는 수도 있었으나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랬다가 블랙과 사이가 어색해지면 채하만 손해였다.
실제로는 몇 분 안 되었겠지만, 체감상 기나길었던 시간을 얌전히 기다리니 마침내 광장에 블랙이 등장했다. 블랙의 옆에는 똑같은 제복을 입은 신사의 캐릭터가 서 있었다. 제복은 분명히 블랙과 채하, 둘이 함께 맞춰 입은 옷이었는데, 느닷없이 신사가 합류했다.
[전체] 밍채 : 제가 벌레예요?
다가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떨어지는 블랙에 인내심이 바닥났다.
[전체] 밍채 : 형 옷 바꿔요
[전체] 블랙 : 옷?
[전체] 밍채 : 기다려요
거래소로 향한 채하는 눈에 불을 켜고 절대 따라 하지 않을 아바타를 찾아 나섰다. 마우스 휠을 이용해 스크롤을 내리던 도중, 정수리에 도끼가 박힌 곰돌이 인형 탈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 버전 곰돌이 인형 탈을 두 개 구매하고 블랙의 캐릭터에 맞춰서 꼼꼼히 염색까지 마쳤다.
[전체] westone : 쥐여 터진 곰돌이로 커플룩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전체] 블랙 : 쥐여 터졌다뇨
[전체] 월월월 : ???????????
[전체] 월월월 : 옷도 많은데 왜 이걸???
[전체] westone : [귓속말] 월월월에게 : 두분 취향이래요
[전체] 월월월 : 아
[전체] 블랙 : ㅅㅂ 다 보이잖아요
[전체] 블랙 : 그리고 제 취향 아니에요
사람들 반응이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신사를 떨어뜨리는 게 목표였고, 블랙도 겉으로 싫은 것처럼 말하지만, 끝까지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심 마음에 드는 듯했다.
[파티] 신사 : 곰돌이 귀엽네요 ㅋㅋㅋㅋ
끝내 신사가 곰돌이 인형 탈까지 따라 입는 걸 보고 있으니, 정수리에 꽂힌 도끼를 빼서 신사에게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파티] 밍채 : 왜 따라 해요?
[파티] 신사 : 원래 자주 입던 옷인데요?
[파티] 밍채 : 자주 입었다고요?
[귓속말] 블랙 : 참아
[파티] 밍채 : 등산복이나 입고 다녔으면서
취향에 동떨어진 옷을 걸치고도 신사는 뻔뻔스러웠다.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에 참으라고 말리는 블랙이 못마땅했지만, 신사만 해치우면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
[파티] 신사 : 밍채님 미리 말해두는데 힐 안 할 거면 지금 파티에서 나가세요 힐 안 하는 힐러 필요 없습니다
신사가 뭐라고 지껄이든 채하는 아무렇지 않았다. 신사보다 더한 인간들이 널린 게 혼돈의 설화였고, 신사는 보는 눈 있다고 예의 차려 존댓말이라도 써 주고 있으니 말이다.
신사가 설령 욕을 퍼부었어도 채하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담담했을 테다. 신사는 그만큼 채하에게 아무런 가치 없는 인간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파티] 신사 : 밍채님 제가 블랙님 지인이라서 참는거예요
[파티] 블랙 : 신사님 평소에 밍채가 힐 안 하고 다닌 건 맞는데요
[파티] 블랙 : 딜사이클 어떻게 돌리든 본인 자유 아닌가요?
[파티] 신사 : 블랙님 ㅋㅋㅋ 다른 힐러들은 마나가 넘쳐나서 힐을 하나요?
[파티] 신사 : 월월님이나 동화님도 딜하고 싶은 거 참고 힐하는겁니다
[파티] 월월월 : 전 힐 좋은데염???
[파티] 블랙 : 그건 힐러들끼리 조율했어야 하는 일인데 신사님이 참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파티] 신사 : 음
[파티] 신사 : 네 뭐
[파티] 신사 : 제가 예민했던 것 같네요
블랙이 제 편을 들어주고, 자신을 대변해 줄 때는 분명히 즐거웠는데,
[파티] 블랙 : 밍채 너도 열매로 신사님 죽인건 사과하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의 편을 들어주는 걸 보니 채하는 처음으로 서러워졌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 * *
게임을 안 하니 여유가 생겼다. 무언가를 미리 할 필요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간 맞춰서 게임을 하겠다고 애쓰던 게 미련한 짓이었다.
일과를 모두 끝마치고 나면 새롭게 생겨난 여백이 채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흘러가던 하루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정리가 되었지만 삶은 이전보다 권태롭게 느껴졌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서러움을 느끼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고, 홧김에 게임을 접을까도 고민하다니. 어차피 블랙 없었으면 실버 티어를 부유하다가 끝내 게임을 접었을 것이다. 그만두는 사유가 누구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하긴 했으나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블랙] 밍채야
고민에 빠지게 한 이로부터 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생각해 보면 최근 머리 아프게 고민한 일은 모조리 블랙과 관련되어 있었다.
[블랙] 뭐해??
[밍채] ㅋㅋㅋㅋㅋㅋ
[밍채] 형 생각이요
[블랙] 줄게 있는데
[블랙] 혼설은 언제쯤 들어와?
[밍채] 지금이요
풀던 토익 문제집을 뒤로하고 노트북을 켰다. 이렇게 또 할 일 하나가 블랙에게 밀렸다. 채하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제 캐릭터 밍채로 게임에 접속했다. 블랙이 신사를 편들어준 후로 접속을 안 한 탓인지 채하의 캐릭터는 여전히 머리에 도끼가 꽂혀 있는 곰돌이 인형 탈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야 캐릭터 옷을 갈아입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차림새였지만, 앞으로 다가온 블랙은 어째서인지 같은 곰돌이 인형 탈을 입고 있었다.
신경 같은 거 쓰지 않을 줄 알았다. 블랙은 원래도 채하가 사라지길 바랐고, 그렇게 별안간 파티를 탈퇴하며 물러난 건 블랙에게 기회였다.
신사와의 언쟁에서 블랙이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게 채하에게 서럽게 기억됐지만, 블랙으로선 응당한 판단이었다. 블랙은 자신처럼 이기적이고 편협한 인간이 아니니, 편파적인 반응을 바라는 건 욕심에 비롯된 억지였다.
[전체] 밍채 : 형 줄거 있다면서요
[전체] 블랙 : 맞아
[전체] 밍채 : 얼마나 대단한 거 주려고요
삐친 것처럼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상황이 기울었다는 걸 알았다.
[전체] 밍채 : 형 닉네임 앞에 제 닉네임 넣어주세요
[전체] westone : 아 블랙님 닉 30짜리인데 ㅋㅋㅋ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인간을 이토록 따를 수가 있나 싶었지만, 채하는 한가하게 그런 것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전체] 밍채 : 장난이에요
[전체] 밍채 : 얼른 주세요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날이 승기를 쥔 게 블랙이란 걸 인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도대체 뭘 주려고 하길래 쩔쩔매면서 불렀을까 싶어서 우편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우편함이 번쩍이며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가 도착했다.
아이템이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지만, 제작자가 블랙으로 표기되는 반지는 블랙이 아니면 줄 수 없었다.
[밍채] 형
[밍채] 계좌 알려주세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몇 번이고 받아 봤으나 이번만큼은 값을 치르고 싶었다. 반지만 줬어도 충분히 흡족했을 선물이었는데 옵션으로 치명타 확률 증가까지 붙어 있었다. 아이템 성능 때문에 만족스럽다기보다는, 블랙이 자신을 위해서 만든 아이템이란 게 좋았다.
[밍채] 안 알려주면 거래소에다가 팔 거예요
[블랙] ?
[밍채] 판 다음에 그 돈 형한테 다 보낼 거예요
고집을 부리니 블랙도 결국 포기하고 계좌를 알려 줬다. 협의 끝에 보내는 돈은 1만 원이 되었지만 남은 값은 어떻게든 게임에서 치르면 되는 일이었다. 블랙에게 소매넣기를 하는 건 채하에게 습관에 가까웠다.
블랙이 알려 준 계좌를 입력하고 송금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하얀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멈칫했다. 윤주현. 유별나다고 볼 수 없는 이름이었으나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었다.
채하는 휴대폰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블랙 캐릭터 위로 주현의 얼굴을 그려 보려고 했으나 그 선명하던 이목구비를 오차 없이 떠올리는 건 어려웠다.
‘키가 175cm는 넘었던 것 같은데.”
자신처럼 거짓말을 한 걸까.
[밍채] 형
[블랙] 왜?
[밍채] 키가 175예요?
[블랙] 키 작아 보이는 이름이야?
블랙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윤주현이라고 상상을 하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현실에서 절대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하던 상대가 전화번호부에 이미 등록된 사람이었다.
[밍채] 아뇨
[밍채] 더 클 것 같아서요
이름 하나 가지고 확신할 수 없으니 채하는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었다. 그 윤주현은 소환사를 키운다고 했었다. 키도 다르고, 캐릭터 직업도 다르고, 공통점이라곤 혼돈의 설화를 한단 것밖에 없었다.
[파티] 밍채 : 형 그래서 무슨 일 해요?
[파티] 블랙 : 디자인
[파티] 블랙 : 왜?
[파티] 밍채 : 그럴 것 같았어요
확답을 얻고 나서 채하는 머리를 굴렸다. 상대방이 자신을 싫어할 게 자명했다. 스스로 벌인 일이니 이제 와서 불평할 건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문제였다. 똑같이 이름을 밝혔다가는 주현이 도망가 버릴 미래가 그려졌다.
일단은 친하다는 주현의 친구를 만났다. 술자리처럼 이유 없이 사람을 만나는 자리는 질색이었지만 아쉬운 건 채하였으니 꾹 참고 잔을 부딪쳤다. 주현의 SNS 아이디가 블랙이길래 뜻을 물어봤더니, 친구라는 경찬은 흑염룡 같은 헛소리를 해댔다. 정말 친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같이 게임을 하면서 주현의 마음이 평균의 사람들보다 심하게 너그럽다는 건 알았는데 경찬을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찬과 술을 마시면서 얻은 정보라곤 경찬의 졸업 걱정이 전부였다.
[전체] 블랙 : 언제 왔어?
[전체] 밍채 : 방금이요
주현의 닉네임이 왜 블랙인지도 모르는 인간과 함께 게임을 하는 걸 목격하니 어이가 없어졌다. 경찬의 닉네임은 ‘경챠니’인 탓에 못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귓속말] 블랙 : 경챠니 쟤한테도 힐 좀 주라
[귓속말] 블랙에게 : 싫어요
닉네임 뜻도 모르는 인간은 힐 할 가치가 없었다. 단번에 거절하니까 주현도 설득을 포기했는지 말이 없었다. 마침 다음 퀘스트 진도가 메마른 땅이었다. 자리를 옮기는 둘의 뒤를 쫓아 배에 올랐다.
PK가 가능한 메마른 땅에 도착하고, 주현은 조금의 의심도 없는지 성큼성큼 걸어가 PvP존을 밟았다. 위험지대에 들어왔단 것도 모르는 경찬은 주현을 졸졸 따라갔다. 둘을 지켜보며 채하는 잠시 고민했다. 경찬을 죽이면 주현이 싫어할 것 같았지만 없애려면 지금이 최적의 시기였다. 이대로 게임에 재미를 붙이고 계속 주현을 따라다니면 곤란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전체] 블랙 : ?
[전체] 경챠니 : ?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경찬의 캐릭터를 집어삼켰다.
* * *
9월. 동기들은 들이닥친 개강에 정신없어할 때, 채하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현이었다. 주현의 속을 긁을 때는 말이 술술 나왔는데 막상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려니까 긴장이 되어서 첫마디를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임채하] 선배
그렇게 고민해서 결정한 게 고작 ‘선배’였다.
[임채하] 안녕하세요
[임채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잘못한 게 있었으니 사과가 먼저였지만 메시지로 말해 봤자 장난 같아 보일 것 같아서 뒤로 미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친해지고 싶다고 들이대면 차단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채하는 주현의 관심사를 끌고 왔다.
[임채하] (사진)
동기 중 하나가 맛집이라며 소개한 음식점의 간판이었다.
[임채하] 폰트가 궁금해요
1학년 2학기. 주현과 조별 과제 한 팀이 되고 진도를 확인하려고 물었을 때, 주현은 채하를 경계했었다. 과제가 어려운 신입생인 척 구니까 그제야 상대를 해 줬었다. 주현은 질문에 관대했다.
[윤주현] TM고양이체
채하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한편 혼돈의 설화에서는 랭크전 2시즌이 열렸다. 1시즌 채하의 티어는 마스터였고, 주현의 티어는 한 단계 아래인 다이아였다. 한 티어 차이 정도야 무난하게 파티를 맺을 수 있었지만, 이왕이면 티어를 똑같이 만들어 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채하는 먼저 게임을 돌렸다.
또 사사게에 가면 주현이 싫어할 테니, 마스터 티어에 있어선 안 되는 유저들과 팀으로 만날 때만 게임을 던졌다. 1시즌 때는 가만히 서 있었다면, 2시즌인 지금은 공격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팀원을 보조했다. 혼자 남았을 때도 꿋꿋하게 힐 스킬만을 사용했다. 버스 타서 올라온 인간들에게 양심을 기대해선 안 되지만, 그들은 정말로 양심을 잃었는지 채하를 사사게로 보냈다.
[길드] 어스름 : 또 시작됐구나
[길드] 단공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 없다고 ㅈㄴ 막나가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파티] westone : ??
[파티] 밍채 : 안녕하세요
[파티] westone : 아 블랙님이 질투하겠네
주현은 이런 사소한 일에 질투할 만큼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서쪽을 만났으니 이번 판 승리는 확정이었다. 채하는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 몇 번의 게임을 져야 다이아 티어에 도달할 수 있을지 계산했다.
[파티] westone : 밍채님 왜 혼자 돌려요?
[파티] 밍채 : 다이아 가려고요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님이 있는 곳이요?
[파티] 밍채 : 네
* * *
[임채하] 선배
[임채하] 저 랭크전 마스터예요
씹혔다. 평소 접속하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들어오지 않아서 말을 걸어봤는데 상처만 남았다. 채하는 주현과의 대화방에서 벗어나 블랙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밍채] 형
[밍채] 오늘 안 와요?
[블랙] 지금가는중
임채하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대답이 밍채에게는 손쉽게도 돌아왔다. 다 제가 그동안 했던 짓 때문이겠다만 답장이 오지 않는 대화방을 볼 때면 입 안이 썼다. 밍채가 그렇게 좋은가 싶기도 했으나 그렇다기보다는 임채하란 이름의 메시지만 무시하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주현은 공평했으니 모두에게 다정한 대답을 내어 주고 있을 테다.
회식 때문에 접속이 늦었다는 주현은 캐릭터를 광장에다가 세워 두고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관심을 끌어 봐도 대답이 없었다. 채하는 주현이 돌아올 때까지 캐릭터를 옆에 앉혀 두고 얌전히 기다렸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아이스크림 필요 없어요?
벌거벗은 남자 캐릭터가 다가오더니 주현 쪽으로 몸을 틀며 대뜸 물었다. 주현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단 걸 아는 건지, 술자리에 널린 이상한 인간들을 따라 하는 건진 몰라도 의도가 불순해 보였다.
[전체] westone : ?????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 밍채님은 아이스크림 안 먹냐구요
[전체] 밍채 : 전 안 먹어요
대련장으로 끌고 가자, 서쪽은 황당해하며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의했다. 몇 번의 대련이 반복되니 서쪽도 익숙해졌는지 채하의 공격을 받아치며 전력으로 임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언제 와요 ㅡㅡ
대련이 열 판에 다다르자 지친 서쪽은 느닷없이 주현에게 화를 냈다. 서쪽도 채하도 장난이었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채하는 캐릭터를 다시 주현 옆으로 옮겨 앉혀 두었다. 얼마 안 가 주현이 깨어났다.
[전체] 블랙 : 밍채야
[전체] 밍채 : 네
[전체] 블랙 : 안 자?
[전체] 밍채 : 내일 나가야 하긴 해요
내일은 경찬과의 약속이 있었다. 친하지도 않고 말도 안 통하는 경찬과의 술자리는 불편했지만, 주현을 끌어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나자는 제안마다 전부 거절을 당하니 경찬을 이용하는 게 최선이었다.
채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전체] 밍채 : 저 나가지 마요?
[전체] 블랙 : 아니
[전체] 블랙 : 약속은 가야지
얼굴을 보고 사과를 하고…….
[전체] 밍채 : 형
[전체] 밍채 : 저녁에 봐요
아이스크림을 사 줘야겠다.
* * *
“채하야, 나 졸업할 수 있겠지?”
본인의 졸업 여부를 타인에게 묻는 것부터가 글렀다. 질문이 한심했지만, 어렵사리 얻은 기회였으니 채하는 내색하지 않고 상대의 빈 잔에 소주병을 기울였다.
“하시겠죠.”
멀쩡한 인간이라면. 뒷말은 삼킨 채하는 스스로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얼굴에 달았다. 경찬은 졸업 걱정에 속이 타는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정말로 졸업을 걱정했으면 여기서 술 마시고 있진 않을 텐데. 채하는 경찬을 흘겨보고 술잔을 기울였다.
채하가 복학했을 때, 주현은 이미 졸업한 상태였다. 한데 같은 학번인 경찬은 어떻게 지냈길래 내년에나 졸업할 수 있고 그 역시도 확신이 없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기이한 인간을 보듯 싸늘한 눈빛으로 훑어도 취기에 사로잡힌 경찬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현 선배 부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 그치.”
정신이 알딸딸한 경찬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벅이다가 테이블에 대충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가져갔다. 아마 주현은 지금쯤 게임을 하고 있을 테다. 레이드 중이라면 중간에 나올 수가 없었다. 채하는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경찬과 헤어질 계획을 세웠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경찬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터라 주현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경찬이 뱉는 말을 통해 대답을 유추하는 것은 가능했다.
“바쁘냐아? 너 또 게임 하지?”
예상대로 주현은 혼돈의 설화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주현은 낯을 가리니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랜덤 매칭을 하고 있진 않을 테고, 또 길드원들에게 이끌려서 레이드라도 돌고 있으려나 싶었다. 채하는 서쪽에게 끌려다니던 주현의 모습을 상상하며 낮게 웃었다.
“나와라. 여기가 어디냐면…….”
설득에 성공한 건지 고집을 부리는 건지 경찬은 중얼거리며 위치를 설명했다.
“야아. 너 부른다고 했단 말이야.”
이어서 경찬이 말꼬리를 늘리며 떼를 썼다. 게임 끊고 올 것 같지 않긴 했는데 역시였다. 채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핑계 세 가지를 정리하며 슬슬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주현과 입씨름을 하던 경찬이 별안간 채하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
“…….”
“나 채하랑 마시고 있지이.”
이런 인간도 주현과 친구를 하는데 채하는 만나고 싶다는 제안마다 퇴짜를 맞았다. 어쩌면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경찬 혼자였으면 나왔을 주현이지만, 채하의 이름을 듣고 나면 마음을 바꿀 테다.
“너 올 때까지 기다린다아?”
경찬이 막무가내로 나가는 걸 보아 역시 제 존재가 문제였나 보다. 주현이 넘어오지 않자 경찬은 괜히 게임을 트집 잡았다. 경찬은 메마른 땅에서 죽은 게 그리도 충격적이었는지 채하를 언급했다.
“너 그 싸가지 없는 새끼랑 게임 하지?”
정작 그 싸가지 없는 새끼는 경찬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찬에게 빛 기둥을 퍼붓던 싸가지 없는 새끼는 남 얘기를 듣는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로 잔을 기울였다.
“야, 너 타자 소리 들린다?”
끝내 경찬은 설득에 성공했는지 얼른 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블랙의 뜻도 모르는 인간이 주현을 불러낼 수 있단 게 놀라웠다. 경찬이 주현의 몫까지 추가 주문을 하는 동안 채하는 슬며시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붉어진 얼굴을 세면대에서 식히고 겸사겸사 계산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경찬 앞에 동그란 뒤통수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품 넓은 검은 후드티를 입은 주현은 경찬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주현은 채하와 비슷한 옷을 입었다. 닉네임이 블랙이라고 옷도 까만 걸 좋아하나. 주현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습득한 채하는 둘에게 다가갔다.
“선배.”
과제를 하면서, 편의점에서, 고깃집에서, 피시방에서, 앞서 몇 번이고 보았던 얼굴이었지만 이토록 뜯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반듯하다고 간결하게 표현되던 얼굴에 부연 설명이 붙었다. 이마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드러난 눈썹이 짙었고, 아래로 쌍꺼풀진 부드러운 눈이 있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내던 얼굴은 온 근육을 동원하여 채하를 껄끄러워하고 있었으나 워낙에 단정한 이목구비 탓에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얘 데려간다.”
“제가 할게요.”
경찬을 일으키려던 주현을 채하가 막아섰다. 뒷일 생각 안 하고 퍼마시던 건 알았는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정신을 놓을 줄은 몰랐다. 결과적으로 주현을 만났으니 오히려 이쯤에서 빠져 준 경찬에게 고마웠다.
채하가 경찬을 가게 밖으로 끌고 나오자 주현이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부르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고 채하는 주현의 옆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말을 붙였다.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마저 어영부영 넘기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걸 알았다. 상대방이 대화할 마음이 없더라도 채하는 밀어붙여야만 했다. 채하의 인사에 주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톡 메시지는 몰라도, 사람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주현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어요?”
“택시 온다.”
대답을 회피한 주현은 고개를 돌려 바쁜 척 차도를 훑었다. 채하는 가깝게 다가온 택시 뒷자리에 경찬을 구겨 넣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경찬과 택시가 사라지면 둘만의 시간이었다. 주현은 도와주려고 했는지 팔을 뻗었다가 헛손질만 하고 곧장 손을 거두었다.
용건이 끝난 택시가 둘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채하는 택시를 응시하다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현을 돌아봤다. 그에 채하를 훔쳐보던 주현이 당황하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마냥 싫어할 줄 알던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보여서 다행이었다. 안도하며 말을 걸려던 순간이었다. 주현이 말을 던지듯 뱉고 등을 돌렸다.
“나 간다.”
오늘은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기대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주현의 뒷모습을 보니, 염치없는 건 알지만, 또 한 번 마음이 서러워졌다.
“선배,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몰라서 물어?”
안다.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얘기 좀 하려고 할 때면 주현이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가서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이마저도 주현이 회피하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불퉁한 얼굴로 주현을 바라보던 채하는 억울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 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선배가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다 싫다고 하면서.”
친해지고 싶었다. 당장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빙빙 돌아서라도, 언젠가는 친해지고 싶었다. 채하에게 블랙은 늘 어차피 만날 일 없는 인간이었지만, 정작 앞에 놓이니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임채하로는 계속 미움을, 밍채로는 귀여움을 받는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싫어할 것 같았다. 그간 사람 상처를 줘 놓고 이제 와서 비굴해지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나 채하는 이기적이게도 주현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배랑 친해질 수 있는데요.”
“넌 네가 했던 말 다 기억하긴 해?”
주현은 화를 내는 순간에도 얼굴이 고요했다. 속내를 내보여도 될지 말지 채하가 고민하는 사이, 주현은 또다시 등을 돌렸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열을 식히는 주현의 팔을 달려가 붙잡았다. 여유롭게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선배가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채하는 지금도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단지, 아쉬울 것 없던 삶에 붙잡지 않으면 아쉬울 존재가 생긴 거였다. 게임 인연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테다.
처음에는 그저 블랙이 윤주현인 게 신기했다.
“저 볼 때 시선도 그렇고…….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데도 매번 가져갔잖아요.”
“네가 착각한 거야.”
주현의 부정이 이어지자 채하는 순순히 수긍했다.
제 얼굴 보고 넋 놓던 게 고까웠다. 속마음을 숨기려고 전전긍긍하던 게 우스웠다. 들러붙는 인간들과 다를 게 없으면서 애써 좋은 선배인 척 포장하려고 하는 게 한심했다.
알고 나니까 아니었다.
주현은 얼굴 껍데기에만 관심을 뒀을 것이다. 게임을 할 때도 장비를 맞추는 것보다 아바타 사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다.
속마음을 숨기려 한 건 표했을 때 상대가 불편해할 걸 알아서였을 테다. 주현은 채하가 성직자란 이유로 방에서 나가야 했을 때, 뒤에서 말싸움해 놓고 비밀에 부쳤다. 사사게에 글을 쓸 때는 채하에게 피해가 갈까 봐 닉네임을 지울 정도로 사소한 곳에서도 배려심이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들러붙는 숱한 인간들과 다를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
“네. 제가 오해했어요.”
“…….”
“죄송해요. 선배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텐데.”
“지금까지 오해하면서 잘 지내 놓고 갑자기 왜?”
주현의 말이 맞았다. 주현이 블랙이 아니었다면 채하는 사과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주현이 블랙인 이상 그런 걸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로 너를 좋아했어도 그런 식으로 거절하는 건 아니지.”
“……반성하고 있어요.”
길 한복판에 서 있던 터라 대화가 길어지자 행인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이 모여들었다. 주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곤란한 얼굴로 급하게 대화의 마무리를 맺었다.
“그럼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난 간다.”
“선배.”
주현을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두 가지. 하나는 성공했고 다른 하나는 아직이었다. 채하는 또 주현의 검은 소매를 붙들었다.
“아이스크림 사 드릴까요?”
“뭐?”
“초콜릿 맛으로 사 드릴게요.”
* * *
[귓속말] 블랙에게 : 형
서로 모르고 만났으니 정체를 숨긴 건 고의가 아니었으나 나중에 알게 된다면 주현은 분명히 배신감을 느낄 게 뻔했다. 주현이 블랙인 걸 알고 난 후부터 언제 말할지 상황을 엿봤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되었다.
[귓속말] 블랙에게 : 저 할 말 있어요
[전체] westone : 블랙님 왔어요?
[전체] 블랙 : 네
다짜고짜 임채하라고 소개하기엔 뜬금없어서 적당한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재앙 길드원이 나타나 주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체] westone : 악마 레이드 가실래요?
[전체] westone : 되게 빨리 오셨네요
[전체] 블랙 : 이상한애 만나서요
[전체] westone : 이상한 애?
[전체] 블랙 : 예전에는 친했는데
[전체] westone : 아아 ㅋㅋㅋㅋ 불편하셨겠네요
‘이상한 애’가 된 채하는 생각이 깊어졌다. 주현은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이 드물었는데 채하는 그 어려운 확률을 뚫고 당첨되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지금 밝혀 봤자 두 쪽 다 연이 끊기고 끝날 것 같았다.
[전체] westone : 그럼 악마 갈까요?
[전체] 블랙 : 잠시만요 밍채 물어볼게요
[귓속말] 블랙 : 할 말 있다며 뭔데?
채하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귓속말] 블랙에게 : 아니에요
[귓속말] 블랙에게 : 악마 저도 갈래요
* * *
[임채하] 그간 저 도와주셨던 거 보답으로 밥 사드리고 싶은데
[윤주현] ㄴㄴ 괜찮아
[임채하]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가까스로 약속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채하는 어떻게 하면 이상한 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침대에 누워 골똘히 궁리했다. 경찬에게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감흥이 없었는데, 주현이 뱉는 이상한 애가 뭐라고 그리 서운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자세를 바꿔 옆으로 누운 채하는 휴대폰 화면을 두드려 알림이 잔뜩 쌓여 있는 대화방으로 들어갔다.
[임채하] 학교 근처에 맛있는 곳
[박건우] ?
[임채하] 아는 사람
[한기혁] 뭐야 소개받음? 나도 끼워줘
[박건우] 소개받는데 널 왜 끼워줌 미친새끼
[박건우] 근데 누구 만남??
[임채하] 남친
[한기혁] 뭐야 ㅆㅂ
채하가 장난치는 줄 아는 기혁은 욕설을 남기며 사라졌다. 진짠데. 채하는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확하게 짚어 말하자면 게임 남자 친구였다.
이미 고깃집에서 남친 발언을 겪은 건우는 채하가 또 헛소리한다고 넘기며 괜찮았던 음식점을 서너 개 추천했다. 채하는 건우가 추천한 음식점을 하나씩 검색하며 주현이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곳을 골랐다. 학교 주변은 아는 사람을 만나 방해받을 수 있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주현이 만나기 싫어할까 봐 다른 수가 없었다.
장소 선택을 끝낸 채하는 이제 다음 계획에 들어갔다.
이미 학교를 졸업해 버린 주현과 채하의 연줄이라곤 혼돈의 설화와 경찬밖에 없었다. 경찬은 썩은 동아줄이었으니, 채하가 믿을 건 혼돈의 설화였다.
주현에게 아이템을 차곡차곡 쌓아 두기로 했다. 너덜너덜하던 곰돌이 인형 탈을 계속 입고 다닌 걸 보면 선물을 내팽개칠 위인이 아니었다. 어김없이 투구 옵션작을 완성한 채하는 강화해서 보낼까 하다가 발상을 바꿨다. 주현이 직접 아이템을 강화하게 되면 그 돈이 아까워서라도 게임을 접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무기와 방어구는 강화 실패 스택이 쌓이는 순간부터 귀속되어 분해하지 않는 이상 골드로 바꿀 수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하나 더 덫을 설치해 두었다.
[귓속말] 블랙 : 갑자기?
[귓속말] 블랙에게 : 다음 레이드 가려면 형 방어구 바꿔야해요
마음 같아서는 모든 방어구를 선물해 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다. 한 번에 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니 채하는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귓속말] 블랙 : 나 일단 나가봐야 해서
[귓속말] 블랙 : 투구는 고맙고
[귓속말] 블랙 : 나중에 얘기하자
[귓속말] 블랙에게 : 네
이미 한참 전에 준비를 끝낸 채하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주현과 약속했던 날이었다. 주현이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옷도 모조리 검은색으로 맞춰 입었다. 만나기로 한 역 앞에 도착한 채하는 우두커니 서서 주현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머리 아프게 고민해 보아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살면서 인간관계에 아쉬움 한번 없었고 이토록 친해지고 싶은 상대 역시 처음이었다.
“저기요.”
“…….”
“……뭐야.”
사람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가 흘기며 사라질 때도 채하는 주현에게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계속 귀찮게 군다면 진이 빠진 주현이 항복하며 가끔 연락하는 선후배가 될 수 있겠다만 채하는 그런 어정쩡한 사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밍채인 걸 말해야 할 텐데 이렇다 할 타이밍이 안 보였다.
마침 시야에 주현이 들어왔다.
“선배.”
하얀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주현은 화들짝 놀라며 채하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하는 주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현이 오기 전까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주현의 눈이 채하의 행색을 빠르게 훑었다. 주현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채하는 미리 알아봤던 음식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화 없이 무작정 걷는 게 어색한지 주현은 이따금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여기라고?”
“네.”
도착한 음식점 앞에서 주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건우가 추천한 곳 중 가장 괜찮아 보였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채하는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머리에 새겨 두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왜 친해지고 싶은데?”
자리를 잡고 주문까지 끝내자 주현은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천천히 마시라고 말을 늘어놓으니 주현이 비장한 얼굴로 질문했다. 답은 간단해서 고민 없이 흘러나왔다.
“선배가 궁금해서요.”
홀로 정의했던 게 모조리 빗나가서, 또 어떤 이면이 있을까 궁금했다. 채하의 대답 뒤로 주현의 침묵이 길어졌다. 다물어진 주현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채하는 초조해졌다. 이윽고 주현이 물었다.
“왜 내가 궁금해졌는데?”
“제가 오해했으니까요.”
“그럼 뭐가 궁금한데?”
주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왜 혼돈의 설화를 시작했을까. 이상한 인간이 길드 마스터로 자리한 재앙에는 왜 남아 있는 걸까. 블루셀레스트로 왜 먼저 커플 신청을 했을까. 경찬과는 왜 친구 해 주는 걸까. 그리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걸 알지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전부요.”
명쾌한 채하의 대답에 컵을 내려놓던 주현이 손을 삐끗했다. 눈이 커지고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로 입을 열었다.
“음식 나왔습니다.”
마침 종업원이 나타나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탓에 주현은 답할 기회를 빼앗겼다. 음식을 모두 진열한 종업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주현은 시선을 접시로 옮기고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았다.
주현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전 선배랑 알아가고 싶어요.”
황당함이 거리낌 없이 드러나는 얼굴이 채하와 마주했다. 주현은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컵을 들어 물을 꿀꺽 삼켰다.
“나랑 친해지고 싶고…… 알아가고 싶다고?”
되묻는 주현에 채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
“너도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일부러 그런 건 맞아요.”
주현이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한 말이란 걸 알지만 채하는 그럴 수 없었다. 주현을 무시하고 우습게 본 게 맞았다. 일부러 도발했고 주현이 내보이는 반응을 즐겼다. 그 모든 일을 실수로 덮어 버리면 주현이 여전히 자신을 껄끄러워할 걸 알았다.
“전 선배랑 알아가고 싶어요.”
채하는 말을 뱉고 슬쩍 주현의 눈치를 봤다. 일부러 그랬단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싫어하려나. 주현은 또 생각에 잠겼는지 말이 없었다. 채하는 그런 주현의 고요한 얼굴을 훑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
안 될 걸 알고 던져 본 말이었는데 흔쾌한 승낙이 돌아왔다. 임채하로는 절대 허락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호칭을 손에 넣었다. 고민에 빠져서 무심코 허락한 걸 수도 있었다. 채하는 호칭을 빼앗기기 전에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형.”
“…….”
“주현 형.”
“……흡.”
* * *
“형.”
[귓속말] 블랙에게 : 형
손가락으로만 써 보던 형을 목소리로 내뱉을 수 있단 게 신기했다.
[귓속말] 블랙 : 코쿄아 남자야?
[귓속말] 블랙에게 : ?
돗자리에 함께 앉아서 잠수하던 주현은 다짜고짜 낯선 이름을 내뱉었다. 마시는 코코아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성별을 묻는 걸 보아 유저의 닉네임이었다.
[귓속말] 블랙에게 : 그게 뭐예요
채하는 주현에게 되물으며 코쿄아의 닉네임을 검색했다. 역시나 유저였다. 직업은 같은 성직자였고 길드는 재앙이었다. 재앙 길드원을 왜 자신에게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랭킹을 보니 레이드에서 한 번 만났겠거니 싶었다.
[귓속말] 블랙 : 왜 몰라?
[귓속말] 블랙에게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귓속말] 블랙 : 너희 길드원이었잖아
[귓속말] 블랙에게 : ?
[귓속말] 블랙 : 같이 레비아탄도 잡았는데
[귓속말] 블랙에게 : 저희 길드원이었다고요?
길드에 그런 닉네임이 있었나. 질리도록 들러붙는 단공이나 이따금 파티 초대를 보내는 블루베리, 블루베리와 함께 다니는 스트로베리, 채하를 길드에 초대했던 어스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억에서 흐릿했다.
같이 레비아탄을 잡았단 얘기는 평온 길드원이 자신을 쫓아 파티에 입장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친구 상태면 어느 던전을 플레이 중인지 확인할 수 있어서 대기 중일 때 파티를 쫓아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지난 기억을 되짚으며 회상해 보아도 코쿄아란 유저가 누군지 짐작이 안 갔다. 주현이 코쿄아의 성별을 물었으니 답은 줘야 했으므로 채하는 길드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길드] 밍채 : 코쿄아
[길드] blueberry : ?
[길드] 밍채 : 성별 알아요?
[길드] blueberry : 쿄아는 왜?
평온에 있었단 게 진짜였는지 블루베리가 애칭으로 불렀다.
[길드] 밍채 : 궁금해서요
주현의 닉네임을 팔아먹을 순 없어서 핑계를 댔다.
[길드] blueberry : 남자잖아
[길드] 밍채 : 확실해요?
[길드] blueberry : 길챗으로 맨날 군대 얘기하던 건 기억 안 남?
길드 채팅으로 헛소리하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라서 도배하는 유저가 있으면 읽지 않고 넘겨 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채하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는 블루베리가 오히려 신기했다.
[귓속말] 블랙에게 : 블베가 남자래요
[길드] 단공 : 코쿄아? 남자임
[길드] 단공 : 갑자기 여자인척이라도 함?
[길드] blueberry : 쿄아 길드 재앙이네
[길드] 단공 : ㅆㅂ 블랙님이랑 친해질까봐 성별 체크도 하냐?
[길드] 밍채 : 네
[귓속말] 블랙에게 : 단공도 남자래요
[길드] 단공 : 빠른 이별 바람
[길드] 단공 : 헤어지면 내가 바로 블랙님 데려가야지
[길드] blueberry : 단공 꿈 ㅈㄴ 크네...
주현이 뭐 때문에 묻는지 예측 가는 이유는 없었으나 채하는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제 같은 길드가 된 주현이 코쿄아의 성별을 묻는 게, 한때 친했던 평온 길드원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길드원이 자신을 이상하게 말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주현이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싫었다. 채하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귓속말] 블랙에게 : 그건 왜요?
용건이 끝난 주현은 답이 없었다.
채하는 아까 켜 두었던 코쿄아의 정보 창을 느릿하게 훑었다. 길드를 옮기는 건 게임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블루베리가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했던 유저가 평온을 탈퇴하고 재앙으로 간 건 이해가 안 갔다. 가입 전에 분명히 길드 마스터인 신사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그때 도망치지 않고 가입했단 걸 믿을 수 없었다.
채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코쿄아를 뒤로하고 주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블랙에게 : 형
[귓속말] 블랙 : ㅇㅇ
[귓속말] 블랙에게 : 제 성별은 안 궁금해요?
[귓속말] 블랙 : 방금 형이라고 했잖아
[귓속말] 블랙에게 : 형이 저 궁금해할 때마다 이름 한 글자씩 알려줄게요
어쨌건 임채하로도 형 호칭을 허락받았으니 밍채인 걸 밝히기에 적기였다.
[귓속말] 블랙 : 그래 뭔데?
[귓속말] 블랙에게 : 채예요
* * *
[전체] 블랙 : 나 잠시 자리 비울게
[전체] 밍채 : 형 어디 가요?
[전체] 블랙 : 치킨 사러
혼돈의 설화가 뇸뇸치킨과 협업을 했다. 선착순으로 아바타 쿠폰을 준다길래 주현이 사서 먹겠거니 했더니만 예상대로였다. 채하는 주현의 채팅을 보자마자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빠져나왔다. 집에는 이미 점심에 포장해 온 뇸뇸치킨의 상자가 남아 있었으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금세 가게에 도착한 채하는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섰다.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몇몇 있었지만 아는 얼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예의 차리면서 인사하는 게 피곤했다.
“주현 선배?”
“어,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 퇴근하신 거예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간간이 주현의 이름이 들렸다.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주현에게 인사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던 채하는 다시 계산대로 몸을 틀었다.
“혼돈의 설화 주신 리라의 간장 치킨 세트 주세요. 아바타 쿠폰 있나요?”
“네. 같이 드릴까요?”
“네.”
수북하게 쌓인 아이템 쿠폰 옆에 자리한 아바타 쿠폰은 고작 한 장이었다. 이러면 주현은 못 받지 않나? 주문을 끝낸 채하는 주현에게 자리를 비켰다.
“혼돈의 설화…… 주신 리라의 시즈닝 치킨 세트 하나요. 아바타 쿠폰 있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아바타 쿠폰은 방금 마감됐어요.”
마감되었다는 말에 주현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탄식한 주현은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쳤다. 채하는 주현이 주문할 때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앉을 기회를 잡았다. 후배들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어쩌나 했는데 주현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형, 게임 접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복귀했어.”
주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그때도 주현이 거짓말한단 걸 알았지만 정말로 접을까 봐 마음을 졸였었다. 거짓말이라서, 여전히 게임을 해서 다행이었다. 주현의 거짓말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주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채하는 계속 담아 두던 질문을 던졌다.
“형, 제 혼설 닉네임 안 궁금하세요?”
궁금하다고 답하면 알려 줄 의향이 있었다.
“안 궁금해.”
“그러면…….”
하지만 주현은 이번에도 거부했다. 같이 게임을 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예전보다는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단번에 거절당한 걸 보니까 모두 착각이었다. 조금 섭섭해진 채하는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주현의 눈을 마주했다.
“나중에 궁금해지면, 알려드릴게요.”
주현이 끝까지 묻지 않을 걸 알았지만 먼저 묻는 날이 오길 바랐다.
어느덧 포장 주문한 치킨이 나오고 채하와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하나씩 챙기고 가게를 나섰다. 채하는 앞서 걷는 주현의 뒤를 쫓으면서 치킨 박스 위에 놓인 아바타 쿠폰을 꺼냈다. 주현이 아니었으면 쭉 이벤트로 받은 직업 아바타를 입고 다녔을 정도로 게임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주현에게 주려고 받은 쿠폰이었다.
걸음을 빨리해 옆으로 온 채하는 길을 걷는 동안 주현을 쳐다봤지만, 주현은 채하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아직도 불편해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채하는 옆모습밖에 보여 주지 않는 주현을 불렀다.
“형.”
“어, 왜.”
“…….”
주현이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로 대꾸했다. 채하는 주현이 돌아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주현은 채하의 바람대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채하는 주현에게 손에 쥐고 있던 아바타 쿠폰을 내밀었다.
“형, 가지실래요?”
“어!”
부지런히 무시할 땐 언제고 주현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채하가 쿠폰을 넘겨주기만을 기다렸다. 자신이 아바타 쿠폰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름을 한 글자씩 알려 주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여기요.”
“고마워. 넌 안 써?”
주현이 화내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갔지만, 그날 모조리 말했다면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채하가 아는 주현이라면 상대에게 화를 내어 상처를 주는 것보다 혼자 삭이고 무시하는 걸 택할 테다.
“전 있어요.”
주현이 제게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마는 것도 싫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실망하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하는 편이 나았다. 주현이 무시하고 끝내 버리면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주는 거야? 게임 골드라도 줄까?”
“나중에 저랑 혼설에서 친구 해 주세요.”
“……뭐 그러든가.”
올려다보며 들뜬 어투로 묻는 주현에게 채하는 부탁 하나를 남겼다. 주현에게는 사소하고, 훗날의 채하에게는 동아줄이 될.
* * *
채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눈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기상청의 예고대로였다. 주현에게 만나자고 슬쩍 떠봤다가 단칼에 거절당한 채하는 마우스를 움직여 초대를 보냈다. 길 미끄러워서 집에 있겠다던 주현은 정말로 집에서 혼돈의 설화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라, 정말로 길이 미끄럽단 이유라서 다행이었다.
나중에 친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주현은 혼돈의 설화가 우선일 것 같았다. 채하는 그래도 좋았다. 같은 취미를 가졌으니 주현의 옆에서 함께 게임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파티] 블랙 : 왜?
주현은 무슨 파티인 줄도 모르면서 덥석 초대를 받고 대기실에 입장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준 건 고마웠지만 채하는 불퉁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 몰상식한 재앙 길드 마스터 초대도 이렇게 단번에 받아 주나? 재앙의 길드 마스터는 고작 강화석 몇 개 쥐여 주고 생색내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파티] 블랙 : 설산?
[파티] 밍채 : 눈 와요
[파티] 블랙 : 너희도 눈 내리는구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주현은 기뻐할까, 당황스러워할까. 주현이 밍채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단 건 알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쉽게 넘어 다닐 수 없는 괴리감이 있었다.
코쿄아가 주현의 나이를 물었을 때, 주현은 어정쩡하게 답했었다. 제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으니 아무래도 게임에서 만난 인연을 오프라인에서 반겨 줄 것 같진 않았다.
역시 말하지 않는 걸 택했어야 했나.
[파티] 블랙 : 너 요즘은 학원 안 가?
채하의 복잡한 속을 모르는 주현은 대검으로 설괴를 가르며 길을 트고 있었다.
[파티] 밍채 : 형이랑 놀려고 그만뒀어요
[파티] 블랙 : ?
토익 학원은 방학 동안 잠깐 다닌 거였고 수학 학원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으니 주현에게 진실을 말해 줄 때가 되었다. 그만두었다는 말이 좋았는지 대검을 휘두르는 주현의 캐릭터 동작이 묘하게 성급해졌다.
* * *
[귓속말] 블랙 : 밍채야
[귓속말] 블랙에게 : 네
[귓속말] 블랙 : 아스모데우스 파티 구했어?
[귓속말] 블랙에게 : 저 버리고 가려고 했어요?
[귓속말] 블랙 : 아니.. 내가 묻잖아 그래서
둘이서 가자고 하는 건 아닐 테고. 항상 붙어 다니던 재앙 길드원과 함께겠지.
[귓속말] 블랙에게 : 형이랑 갈래요
채하는 주현에게 답하고 빠르게 올라가는 길드 채팅을 피곤한 눈으로 훑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길드원을 구하는 재앙과 달리 평온은 조용했다. 어스름은 대형 길드 타이틀에 욕심이 없어서 길드가 망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인원을 원했다. 웬만해서 길드 탈퇴하는 유저가 없으니 인원 충원을 위해 홍보하는 경우 역시 드물었다.
[길드] 단공 : 머임 우리 또 인원 부족함?
그리하여 평온은 늘 파티 모집에 곤욕을 겪었다.
[길드] blueberry : 민채 또 빠지는거임?
[길드] 단공 : 그러겠지
[길드] 단공 : 키워줘봤자 소용없다
[길드] blueberry : 단공 니가 언제 민채를 키웠는지....?
[길드] blueberry : 민채가 널 키웠지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꾸하면 또 귀찮게 굴면서 치근덕댈 테니 채하는 잠수인 척 말을 아꼈다.
평온의 길드 규모가 협소한 편은 아니다만 <음욕의 아스모데우스>에 입장하려면 적정 스펙을 갖추어야 하므로 게임을 가볍게 하는 유저들은 파티에 합류할 수 없었다. 어스름에게 가입 문의하는 유저들은 대체로 성직자 뉴비였으니 최종 던전에 함께 가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길드] 단공 : 야 밍 채 야
[길드] 단공 : 밍
[길드] 단공 : 채
[길드] 단공 : 야
[길드] blueberry : 또 잠수인척하네
[길드] 단공 : 블랙님한테 같이 가자고 하면 안댐???
[길드] 밍채 : 안되는데요
[길드] 단공 : ㅆㅂ 이런것만 바로 답해주네
단공이 주현에게 던지는 말이 모조리 장난이란 걸 알지만, 그와 별개로 볼 때마다 짜증스러웠다. 또 자기에게 오라니, 대검을 사 주겠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일 걸 상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팠다. 단공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번엔 주현에게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 블랙 : 밍채야
[귓속말] 블랙에게 : 네
[귓속말] 블랙 : 너희 길드랑 우리랑
[귓속말] 블랙에게 : ?
[귓속말] 블랙 : 아스모데우스 파티 같이하기로 했어
범인은 누가 봐도 단공이었다. 이래서 주현이 길드원과 친구가 되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재앙과 평온이 함께 파티를 맺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어느 때보다 못마땅했다.
[길드] 단공 : 블랙님이 파티 합치는거 좋다네
[길드] blueberry : 넌 곧 대련장 가겠다
[길드] strawberry : 이긴적 있긴 해요?
[길드] blueberry : 없음
[길드] 단공 : 대련장은 이기려고 가는게 아냐
[길드] 단공 : 밍채에게 변하는게 없다는 깨달음을 주는곳이지
[길드] 어스름 : 맨날 지면서 그러니까 없어 보인다
[길드] 단공 : 길마님 저 뼈 아파용 ㅠ
채하는 단공이 떠들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 단공을 대련장에 데려간다고 하여 약속이 취소되는 것도 아니었고, 수락한 사람이 주현이라는데 불만스러운 속내를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업데이트 날. 어스름의 초대를 받은 채하는 부루퉁한 얼굴로 파티원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재앙에서는 자주 보던 셋에 간간이 함께 파티를 맺었던 잔혹동화까지 끼워서 총 다섯 명이 왔다.
[파티] 단공 : 오랜만이야 쟈기 ^3^
[파티] 밍채 : 헛소리하지 마세요
채하는 한숨을 삼키며 단공의 헛소리를 재빠르게 차단했다.
[파티] blueberry : ㄱㄴㄲ 쌉소리 좀 작작해
[파티] 단공 : ㅠ_ㅠ
[파티] westone : 밍채님 욕 안 하시는 거 신기해요
[파티] 어스름 : 밍채는 욕만 안 해요 ^^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쓰는 거였다. 다른 대체 단어도 많은데 구태여 저속한 말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주현이 감탄사처럼 쓰는 욕설은 채하에게 예외였다.
[파티] 블랙 : 맞는 거 같네요
[파티] 밍채 : 아니에요
다른 유저가 어스름의 말에 웃는 건 상관없었지만, 주현이 동조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정하자 단공의 조롱이 이어졌다.
[파티] 단공 : 우웩 왤케 가증스럽지?
[길드] 밍채 : ?
물음표 하나 쳤을 뿐인데 채하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단공은 쉽게 뜻을 읽었다.
[파티] 단공 : 응응 지금 레이드 가야 해서 대련 못함 ㅋㅋㅋㅋㅋ
[길드] 밍채 : 끝나고 하면 되는데요
[파티] 단공 : 응 나 레이드 클하면 끌거야 ㅅㄱ
[파티] 단공 : 블랙님 밍채가 길드채팅으로 욕해용 ㅠㅠ
[파티] blueberry : 블랙님이 니 편을 들어주겠냐?
[파티] 단공 : 개서럽네 ㅜ_ㅠ
말 한 번 뱉고 나서는 욕은커녕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단공은 주현을 회유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블루베리는 주현이 채하의 편을 들어주리라 추측했으나 채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주현이라면 어느 쪽 편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신사와의 일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던 것처럼.
[파티] 어스름 : 둘다 그만 싸우고 대기실 들어와
[파티] 단공 : 네네
[파티] 단공 : 어 블랙님도 뇸뇸치킨 먹었어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블랙 : 저 갔을 땐 아바타 쿠폰 품절이라서 후배한테 양보받았어요
얼른 던전에나 입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을 때, 주현이 채하의 얘기를 꺼냈다. 입장 대기에 지루함을 느끼던 채하는 별안간 긴장하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파티] westone : 후배거 빼앗은 거 아니에요?
[파티] 블랙 : 아니에요 ㅋㅋㅋ 걔가 준댔어요
[파티] 잔혹동화 : 후배분은 혼설 안 하시나봐요
[파티] 블랙 : 걔도 해요 성기사라고 하던데
[파티] westone : 헐 블랙님 좋아하나보다
그때는 주현이 블랙인 걸 모르고 던진 말이었다. 함께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닉네임이나 직업을 알려 주게 되면 게임에서 치근덕거릴 것 같았다. 게임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 난데없이 혼돈의 설화를 하고 있다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커플이었던 블랙의 정보를 넘겼는데…… 그 블랙이 주현이니 난감해졌다.
[파티] 단공 : 아 경쟁자 생겼네;;
[파티] 단공 : 밍채 또 길드채팅으로 욕해욧 ㅠㅠ
과거를 회상하느라 답할 타이밍을 놓쳐서 얌전히 있었는데 단공은 또 채하를 자극해 왔다.
[파티] 블랙 : 욕은 안할것 같은데요
[파티] blueberry : 밍채잘알
단공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 주현을 보며 채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구구절절 아니라고 해명하지 않아도 주현이 다 알아준다는 게 신기했다.
* * *
사람 구출하는 취미 따위 없어서 레비아탄 파도 패턴 때도 설렁설렁하던 채하였지만, 이번만큼은 눈에 힘을 주고 유령을 피하는 데에 집중했다. 선두를 달리는 어스름이 아직 생존해 있으니 자신이 실수하더라도 주현을 구출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파티] 단공 : 이야 길마님 대박이네
[파티] blueberry : 와 이걸하네?
[파티] westone : 담번엔 저렇게 피해야겠다
이윽고 어스름이 무사히 방 안에 진입하고 시점이 그곳으로 옮겨 갔다. 주현의 캐릭터를 직접 구하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구출이 목표였으니 채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어스름을 구경했다.
어스름은 주현의 캐릭터 목을 조르고 있던 아스모데우스에게 다가가 마검을 휘둘러 몸을 갈랐다. 형태를 유지하던 천이 찢기며 아스모데우스가 방황하는 사이, 어스름은 잠들어 있던 주현의 캐릭터를 깨웠다.
[파티] 어스름 : 여기부터 컷신 있네
[파티] westone : 그래요? 아 영상 찍기 딱이었네
어스름의 캐릭터는 몸을 숙이더니 주현의 캐릭터에게 입맞춤을 선사했다. 채하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레비아탄 때는 구출 패턴 성공 시 갑판에 유저들을 뱉어 놓길래 비슷한 연출일 거로 생각하고 안일하게 행동했건만. 혼돈의 설화가 뒤통수를 쳤다.
[파티] 밍채 : ?
[파티] westone : ?
[파티] westone : 아 진짜 아쉽다........
[파티] 월월월 : 서쪽님 무서워염;;;
[파티] 밍채 : 지금 뭐하는 거예요?
[파티] 단공 : 와 혼설ㅁ1쳤네 ㅋㅋㅋㅋㅋ
[파티] 어스름 : 나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야 밍채야...
고작 캐릭터끼리 입 맞춘 건데도 순식간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채하는 스킬이 등록된 키를 연타하며 주현에게 힐을 불어넣었다. 평소에 하도 힐을 아껴서 그런지 키가 뻑뻑했다.
다음 패턴 때는 단공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붙잡혔다. 침대 위에 철퍼덕 엎어진 단공을 채하는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현은 전화 받느라 불가피한 상황이었지, 멀쩡하게 게임을 하던 단공은 왜 끌려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파티] blueberry : 안 구해도 되는거 아님?
[파티] 단공 : 야 블베 이러기냐?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어스름 : 나도 포기 ^^
[파티] blueberry : 내 캐릭터로 너랑 별로 키스하고 싶지 않음;
[파티] strawberry : 그럼 나도 ㅎㅎ
평온 길드원은 단공을 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단공의 캐릭터와 키스하고 싶지 않다는 블루베리의 말에 채하도 동의했다.
[파티] 단공 : 그래봤자 블랙님이 나 구해주실거임
[파티] 밍채 : 형이 뭐하러요?
[파티] 단공 : 블랙님 얼른 제 입술 가지세요
[파티] 밍채 : 하기만 해봐요
주현은 마음이 약하니 정말로 단공을 구해 줄 가능성이 있었다. 우르르 죽는 평온 길드원 사이에서 채하는 묵묵히 주현의 뒤를 쫓았다. 주현이 혹시나 방에 진입하려고 하면 순서를 가로채 먼저 들어갈 계획이었다.
[파티] 단공 : 블랙님 믿어용 ㅠ_ㅜ
주현의 앞에는 넉넉히 통과할 공간을 둔 두 유령이 있었다. 가속이 붙은 주현의 캐릭터가 왼쪽으로 기울더니 옷깃이 스치고 하얗게 얼어 버렸다. 그에 채하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파티] blueberry : 블랙님 일부러 죽으시네 ㅋㅋ
[파티] westone : 엥 고의였어요?
[파티] 단공 : 아니겠지... 실수겠지...
파티원들이 주현을 두고 진실을 밝히는 동안, 채하는 제 캐릭터를 주현의 옆에 얼려 두었다. 주현은 고의였다. 가속이 붙어서 피할 시간이 애매했다고 하더라도, 캐릭터가 스칠 거라는 계산을 주현이 못 했을 리가 없었다.
파티원 모두가 구출에 실패하자 단공은 아스모데우스에게 잡아먹혔다. 채하는 들뜬 기색으로 단공의 파티 추방을 제안했다. 단공이 억울해하든 말든, 주현이 제 편을 들어준 게 기뻤다.
* * *
[SYSTEM] 밍채님이 [음욕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반지 재료가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액세서리는 강화 스택이 쌓이든 아니든 되팔기가 가능했지만, 주현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무기, 합성 아바타, 투구, 콜라보 아바타. 이어서 채하는 이번에 반지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파티] 밍채 : 어둠의힘 살게요
[파티] 단공 : ?
[파티] 단공 : 길드원할인같은거안함
[파티] 밍채 : 거래소 시세로 살게요
말은 두 배로 비싸게 팔 것처럼 한 단공은 정작 반값으로 할인을 해 주었다. 넘치는 게 골드인 채하는 거래소 시세대로 제값에 거래했다. 주현에게 선물할 건데 단공에게 빚지는 건 싫었다.
[길드] 단공 : 할인해준다해도 안받네 ㅠ_ㅠ
[길드] blueberry : 너랑 엮이기 싫은가봄
[길드] 단공 : ㅆㅂ 밍채야 그런거냐?
[길드] blueberry : 그랬으면 차단 박았지 그걸 물어보네...
채하는 공방에 들러서 [어둠이 깃든 음욕의 반지]를 제작했다. 나머지 재료는 인벤토리에 미리 모아 두었던 터라 따로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공방을 나와선 주현에게 가기 전에 아이템 옵션작을 돌렸다. 직접 옵션을 띄우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지만 제 닉네임을 제작자 표시로 붙이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옵션작으로 골드를 왕창 잃은 채하는 우편함으로 캐릭터를 옮겼다. 재앙 길드원에게는 100만 골드를, 주현에게는 [어둠이 깃든 음욕의 반지]를 첨부했다. 거래소에 가서 시세를 검색하고 가치만큼 불편해할 주현의 모습이 예상되어 채하는 미리 귓속말을 보내 놓았다.
[귓속말] 블랙에게 : 형
[귓속말] 블랙에게 : 전 제작자 형 닉네임 붙은거 갖고 싶어요
[귓속말] 블랙 : 그러면 반지 재료를 나한테 보내고
[귓속말] 블랙 : 만들어 달라고 했어야지
[귓속말] 블랙에게 : 형 옵션작 돌릴 골드 없잖아요
무기와 투구 강화가 덜 끝났고, 이제는 반지 강화도 해야 했다. 침묵 상태로 돌입한 주현에게 채하는 추가로 말을 얹었다.
[귓속말] 블랙에게 : 형 게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귓속말] 블랙 : 아니.. 나 안 접는다니까
[귓속말] 블랙 : 내가 이거 팔고 접으면 어쩌려고
[귓속말] 블랙에게 : 형이 팔리가 없잖아요
[귓속말] 블랙 : ㅅㅂ
정말로 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그런 걱정을 말해 주지 않았을 테다. 채하는 어떻게 해야 주현의 부담을 덜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중, 채팅 창을 보고 사고가 굳어졌다.
[귓속말] 블랙 : 밍채야
[귓속말] 블랙에게 : 네
[귓속말] 블랙 : 이름 궁금해
제가 먼저 알려 주기로 제안한 일이었지만, 주현이 아직도 불편해한단 걸 알아 버린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또 주현을 속이면 시간을 미룰 수는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런 미련한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채하는 둘 중에 뭘 택할지 고민하다가 닉네임을 지을 때 이용했던 제 이름의 성을 주현에게 바쳤다.
[귓속말] 블랙에게 : 임이요
[귓속말] 블랙 : ?
[귓속말] 블랙 : 하나 더
반응을 보아하니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주현이 궁금해한다면 닉네임을 알려 줄 의향이 있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귓속말] 블랙에게 : 마지막 글자는 형이 좋아하는 거 넣어주세요
절대 환영받지 못할 이름의 완성을 두고 마지막 객기를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