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어둠이 깃든 약속 (6/13)

6. 어둠이 깃든 약속

지옥 같던 평일을 지나쳐 돌아온 주말, 주현은 오래간만에 경찬을 만났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게임이나 하고 싶었지만, 경찬이 얼른 나오라고 아득바득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주현이 꼬리를 내렸다.

“너 SNS 아이디 왜 블랙이냐고 묻더라.”

“……뭐라고?”

만나서 밥부터 먹는데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경찬에 주현이 젓가락을 내려 두며 되물었다.

“어제 채하랑 술 마셨거든.”

“……뇌내망상 아냐?”

임채하가 친하지도 않은 선배와 술자리를 가졌을 리가 없었다. 경찬은 워낙에 붙임성이 좋으니 남들보다 채하를 오래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배배 꼬인 그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또 갖가지 핑계를 대며 바쁜 척 굴어 쏙 빠져나갔을 게 뻔했다.

“야. 우리가 학번 차이가 좀 나도, 어? 말이 잘 통한다고.”

채하의 본색을 모르는 경찬은 주현이 무안을 주는 것으로 착각했다. 반박하는 경찬에 주현이 고개를 돌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세대 차이가 나서 거리를 둔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조별 과제가 끝나고 밥 한 끼 하자고 말을 꺼냈을 때, 단칼에 거절하던 게 임채하였다. 차라리 바쁘다는 핑계라도 댔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친한 사이가 아니지 않으냐고 창피를 주던 건 주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먼저 다가와서 친한 척 말을 붙이던 건 채하가 아니었나. 똑같이 호의로 답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뺨을 얻어맞은 꼴이 된 주현은 어이가 없었다.

“걔랑 왜 술을 마셨는데?”

아직 여름 방학이 끝나지 않았다. 학과와 건물이 다른 채하와는 학교에서도 마주칠 일이 손으로 꼽혔다. 그런데 밖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고 하니 경찬의 망상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현이 떨떠름한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묻자 경찬의 눈썹이 억울해졌다.

“아니, 왜 안 믿지? 채하가 나한테 팔로우 걸었길래, 반가우니까 만나서 술 먹자고 한 건데?”

임채하는 SNS를 하지 않는다. 톡 프로필조차 매번 비어 있는데, 사진을 잔뜩 올리는 SNS를 할 리가 없었다.

“채하가 네 아이디 왜 블랙이냐고도 물어봤다니까?”

누가 임채하를 사칭해서 경찬한테 팔로우한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주현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쥐고 버려 두었던 아이디에 들어갔다. 잔뜩 쌓여 있는 알림을 하나씩 확인하는데, 정말로 채하가 있었다.

경찬은 그렇다고 쳐도 사이 나쁜 주현에게까지 손을 뻗을 이유가 없었다. 친구가 없어서 안 친한 사람들도 팔로우하고 다니나? 채하의 계정을 살펴보자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팔로워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에 비해 팔로잉은 몇 없는 것이 이럴 거면 왜 SNS를 시작했는지 의도를 묻고 싶었다.

주현은 채하를 제외하고 자신을 팔로우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뒤늦은 맞팔을 해 주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왜 블랙이긴…… 이름 한자를 검을 현(玄)으로 쓰니까.”

“그랬냐? 난 잘 몰라서 흑염룡 같은 건 줄 알았지.”

“……미쳤냐?”

주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경찬이 그렇게 오해했으면 채하에게도 그리 전했을 게 분명했다. 이유를 듣고 속으로 비웃었을 채하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자 경찬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며 심드렁하게 굴었다. 그건 남의 일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채하와의 사이가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을 테지만, 그것과 별개로 채하의 기억에 중이병 선배로 남고 싶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서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경찬이 이번엔 혼돈의 설화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전에도 혼돈의 설화가 재밌느냐고 질문하며 몇 번씩 말을 꺼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실행에 옮기진 않았었는데 어제 만났다는 임채하가 바람을 집어넣은 게 분명했다.

개강을 코앞에 두고 게임이라니. 주현이 질책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경찬의 변명이 이어졌다. 어차피 졸업은 멀었고 겨우 하루 노는 건데 왜 이렇게 유난이냐. 윤주현, 네가 부모라도 되느냐. 어제 임채하랑 술 마셨다는 놈이 그렇게 대꾸하니까 기가 막혔다. 보나 마나 전전날에도 술이나 마시고 다녔을 테다. 경찬의 말대로 주현은 부모가 아니었으니 경찬의 졸업 걱정은 접어 두기로 했다.

“……너 임채하 닉네임은 알아?”

“채하? 모르지. 너랑 게임 할 건데 채하 닉네임도 알아야 하나?”

컴퓨터 본체 전원을 누르며 묻자 경찬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답했다. 술 마시면서 혼돈의 설화 얘기를 했으면 당연히 닉네임도 알 거로 생각했다. 임채하가 바람을 넣은 게 아니었나? 주현은 회원 가입 중인 경찬을 흘겨보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너 왜 혼설을 하겠다는 건데?”

“잘생긴 애들만 하는 게임이 궁금해서?”

“…….”

너무 가볍고 보잘것없는 이유라서 주현의 말문이 막혔다. 차라리 채하를 따라서 하게 되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경찬은 진심인지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어느새 회원 가입을 끝내고 직업으로 검사를 택한 경찬은 몰두하여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하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까지 마치자 이번엔 닉네임 차례였다.

“야. 나 닉 뭐할까? 경차니 어때?”

“나랑 친구 할 생각 하지 마.”

“경차니 이미 있네. 경챠니 할까?”

“…….”

닉네임을 이것저것 입력하여 빈자리를 찾아낸 경찬의 최종 닉네임은 경챠니가 되었다. 주현은 본명을 닉네임 삼는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욕먹을 때 더 기분 나쁘단 걸, AOS 장르 게임을 주로 하던 경찬이 모를 수가 없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westone : 루시퍼 어때요?

튜토리얼에 빠진 경찬을 뒤로하고 게임에 접속하자 서쪽과 월월월이 반갑게 맞이했다. 서쪽의 인사는 언젠가부터 ‘이 레이드 어때요?’가 되어 있었다.

[길드] 블랙 : 저 친구랑 피방 왔어요

[길드] westone : 친구분도 혼설하세요??

[길드] 블랙 : 네 해보고 싶다고 해서

[길드] 사멍꾼 : 블랙님 악마시네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니까요

[길드] 블랙 : ???

[길드] westone : 이 망겜에 친구를 끌어들이시다니

[길드] 블랙 : 아니.. 걔가 한다고 했어요

간간이 길드원들이 친구를 데려와 같이 게임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다들 얼마 안 가서 게임을 접고 소식이 뚝 끊겼었다. RPG 게임 특성상 진입 장벽이 높아 뉴비 입장에서는 적응이 힘들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현금을 꽂지 않으면 장비를 파밍[7] 하면서 차근차근 위 단계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게임을 쉽게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주현은 현금부터 꽂고 시작했지만, 상위 레이드는 무서워서 발도 안 들였다. 주현 같은 성향의 유저들도 꽤 있었다. 아무래도 레이드에는 고인물 유저들이 대다수이다 보니 사소한 실수가 두드러지게 주목을 받았고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레이드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야, 윤주현. 너 닉네임 뭐야?”

“……내가 친구 신청 걸게.”

“너 나 버리려고 안 알려 주는 거지?”

“걸고 있으니까 조용히 좀 해 봐.”

경챠니. 친구 목록 한구석에 이런 닉네임이 자리한단 게 소름이 끼쳤다. 귀여운 어감으로 닉네임을 짓는 유저들은 수없이 많았고 밍채 역시 그러했지만, 경찬이 하니까 거북하게 느껴졌다.

“닉네임도 블랙이야? 여기는 중복 닉 되냐?”

“되겠냐?”

“그럼 닉네임 이거 산 거야?”

“어. 산 거야. 그러니까 4채널로 와 봐.”

경찬은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옆에서 조잘대는 경찬의 목소리에 주현은 기력을 빼앗기며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왜 벗고 있어?”

경찬의 캐릭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몰라도, 누굴 보고 묻는지야 뻔했다. 4채널에서 벗고 있을 사람은 서쪽밖에 없었다. 왠지 광장에 있을 것 같았다.

주현은 광장으로 향하기 전에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혔다. 이대로 가면 그 도끼 박힌 곰돌이 옷은 뭐냐고 경찬이 꼬치꼬치 캐물을 게 분명했다. 주현이 택한 건 밍채가 입은 [지적인 학자 세트]와 유사한 디자인인 [축복의 성자 세트]였다.

일을 끝낸 주현이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역시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이분이 친구분이에요?

[전체] 블랙 : 네

[ westone님이 경챠니님에게 인사합니다. ]

[전체] westone : 블랙님 친구 있으셨구나

[전체] 블랙 : ㅅㅂ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

“얜 입은 거야, 벗은 거야?”

“입었어.”

옷의 밑단이 보이는데 엉덩이 윤곽도 선명한 서쪽의 캐릭터가 신기한지 경찬이 마우스를 돌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장소가 피시방이라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현은 자리를 옮기고 싶었으나 그래 봤자 경찬이 쫓아올 걸 알아서 체념했다.

“갑옷은 없어? 다들 싸울 준비가 안 됐네.”

광장을 지나는 다른 재앙 길드원을 훑어보며 경찬이 중얼거렸다.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게임은 복장을 간소화할수록 강한 법이다. 오히려 뉴비가 치렁치렁 장신구를 달아 화려하게 꾸미거나 아바타를 살 돈이 없어 장비인 갑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로 돈 많은 서쪽 같은 유저들이나 투명 아바타를 구매해 캐릭터를 벗길 수 있었다. 남자 캐릭터 상의 투명 아바타가 무려 2억 골드였다. 서쪽은 올곧은 취향 탓에 새 캐릭터를 생성할 때마다 잊지 않고 투명 아바타를 구하고 다녔다.

“아바타 없으면 어차피 계속 갑옷 입어야 해.”

“갑옷은 언제 주는데?”

“……레벨 업을 해.”

“도와주는 거지?”

“어.”

슬슬 답해 주기 귀찮아서 말이 짧아졌다. 주현이 파티를 만들어 초대하는 와중에도 경찬은 얼른 갑옷을 입고 싶다고 나불댔다. 밥 먹고 바로 헤어졌어야 했는데, 피시방 가자는 말에 혹해서 따라온 게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너 버프 길드 가입해.”

“너희 길드는 못 들어가?”

“길마가 재수 없어. 다른 곳 가.”

“너보다?”

헛소리하는 경찬을 가볍게 무시하고 마우스를 빼앗았다. 길드 창에 들어간 주현은 홍보란에 보이는 길드들을 대충 훑어보고 괜찮아 보이는 곳에 가입 신청을 넣었다. 운영진이 접속 중이었는지 곧장 승인을 받고 경찬의 캐릭터 머리 위로 길드 이름이 떠올랐다.

‘혼설하는사람들’

주현이었으면 가입하지 않을 길드명이었지만, 경찬의 캐릭터니까 상관없었다. 주현은 쥐고 있던 마우스를 경찬에게 돌려주고 제 컴퓨터로 돌아왔다.

“길마가 재수 없는데 왜 길드를 안 옮겨?”

혼자 다른 길드인 게 소외감이라도 드는지, 경찬이 말꼬리를 물었다. 주현처럼 낯가리고 적응력 없는 사람들에겐 길드를 옮기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재앙에는 나가야 하는 이유보다는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다른 길드라고 정상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사사게만 살펴보아도 길드 고발 게시물이 흔히 널려 있었다. 파벌을 나누는 것부터 해서, 정치질, 뒷담화 등. 재앙 정도는 괜찮은 편에 속했다. 신사만 지우면 평화로웠다.

“옮길 길드가 없어. 버프 길드는 길드 채팅을 사용 못 하고, 대형 길드 들어가기엔 두 명까지밖에 안 받아 주니까.”

그뿐만 아니라 버프 길드는 부캐 가입이 까다로운 편이었고, 대형 길드는 파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리 가입을 받아 주지 않았다.

“직접 키우기엔 오래 걸리고 사람 모으기도 힘들고.”

혼돈의 설화도 초창기엔 꽤 잘나갔기 때문에 그때 생긴 길드가 수두룩했다. 이후 사람이 빠지면서 소형 길드는 죽어 가는 추세였고, 중대형 길드만이 살아남았다. 만렙인 중대형 길드를 두고 신생 길드에 가입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 진짜 게임 중독자 같다.”

주현의 설명이 끝나자 경찬이 질린 낯으로 흘리듯 얘기했다. 자기가 물어봐 놓고 성의껏 대답해 주니까 게임 중독자라니. 하지만 주현은 게임 중독자란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게임을 끊어 내지 못하는 건 맞았다.

“야. 얜 직업이 뭐야?”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경찬이 팔꿈치로 주현을 툭툭 건드렸다. 주현은 거슬리는 경찬의 팔을 치우며 모니터를 확인했다. 정보 창을 열어보면 직업이 떡하니 나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뭐긴, 아.”

경찬이랑 대화하느라 광장에 세워 뒀던 제 캐릭터 옆에 미인형 남자가 철썩 붙어있었다.

“얜 성직자야.”

[전체] 블랙 : 언제 왔어?

[전체] 밍채 : 방금이요

대답한 밍채가 주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눈길을 끌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고 있는데 옆에서 경찬이 황당무계한 소리를 내뱉었다.

“얘 임채하 아냐?”

닉네임에 ‘채’가 들어간단 이유로 밍채는 의심을 받았다.

이건 밍채를 향한 모독이었다. 얼굴과 키는 임채하가 나을지 몰라도, 성격 면에서는 절대 밍채를 이길 수 없을 테다. 밍채는 실력이 폐기 직전이었던 주현을 주워 와 이제는 사람 손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갱생시켰다. 밥 한 끼 먹자는 제안을 아니꼽게 받아치는 놈과 비교하는 건 밍채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얘는 아가야.”

“우웩. 미쳤냐?”

주현이 얼굴을 굳히며 반박하자, 경찬이 진저리치며 반응해 왔다. 열한 살이나 어린 애를 아기 취급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토하는 시늉을 하며 유난 떠는 경찬이 더 이상했다.

“중2라고.”

“설마 여자애는 아니지?”

주현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경찬을 훑었다. 오해할 여지를 줬으니 한 번 물어본 건데, 순식간에 쓰레기 취급당한 경찬은 한껏 억울해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야. 누가 남자끼리 이러고 노는데?”

밍채는 아직도 주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손가락이 아프지도 않은지 참 열심이었다.

“너 나랑 이러고 노냐고.”

“넌 징그럽고 얜 귀여워.”

당연한 걸 물었다. 주현은 지금도 경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어컨도 고쳐졌으니 굳이 피시방에 올 필요가 없었다. 혼돈의 설화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정말 하고 싶었나 보다 했는데, 게임은 안 하고 헛소리만 늘어놓는 걸 보아 자신을 붙잡을 핑계였던 모양이다.

[전체] 블랙 : 나 오늘 친구 레벨업 도와줄거라서

[전체] 밍채 : 저도 갈래요

[전체] 블랙 : 재미없을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주현은 밍채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성기사는 잡몹 처리가 답답하므로 누가 도와준다고 하면 넙죽 받아먹어야 했다.

“아, 나 쟤 싫은데.”

밍채가 파티에 합류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본 경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만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밍채를 비호감으로 낙인찍는 경찬에 주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너 초등학교 입학할 때 쟤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어떻게 핏덩이를 미워하냐?”

“야. 중2면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릴 때야. 쟤 싸가지를 봐.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 안 보여? 웨스트원 님은 반갑게 인사해 주던데.”

서쪽이 성격 좋은 건 맞지만, 밍채가 싸가지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진짜 싸가지 없는 임채하는 그리도 예뻐해 주면서, 오늘 처음 본 밍채에게 박한 평가를 하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레벨 업 도와주겠다고 따라와 준 애한테 무슨…….”

만렙 캐릭터로 하위 던전을 돌면 수리비도 안 벌린다. 더군다나 밍채는 장비가 엔드 스펙이어서 한 판당 수리비가 1만 골드가 넘어갔다. 순수한 호의를 건네는 밍채에게 경찬은 자꾸만 적대심을 보였다. 평소에는 눈치도 없어서 임채하가 선 긋는 걸 못 알아먹던 놈이 왜 게임에서 중학교 2학년이랑 기 싸움을 하고 있는지. 경찬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대기실에 들어오기나 해.”

더 말다툼을 해 봤자 결판이 나지 않을 게 뻔했다. 주현이 재촉하자 경찬도 군말 없이 대기실에 입장하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나 싶었는데, 얼마 안 가 또 경찬이 트집을 잡았다.

“성직자 힐러 아니냐?”

“힐러지.”

“왜 힐을 안 줘?”

경찬이 모니터 속 밍채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그에 주현도 속으로 구시렁댔다. 하위 던전에서 힐 받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아프면 물약을 마셔 체력을 채워야 하는 게 아닌가? 애초에 안 맞으면 되는 일이었다.

뉴비 시절, 몬스터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레벨 업한 주현이지만 밍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잊어버렸다.

“……걘 힐러 아냐.”

경찬에게 답하느라 방어 타이밍을 놓치자, 잡몹에게 얻어맞고 피가 조금 깎였다. 워낙에 단단한 방어구 덕분에 주현은 몇 대를 맞아도 끄떡없었다. 밍채는 그 조그마한 흠집도 용납할 수 없었는지 곧바로 힐이 들어왔다. 주현이 밍채는 힐러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캐릭터 머리 위로 떠 오른 선명한 깃털 표식을 마주하는 게 민망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가 받는 건 뭔데?”

대놓고 사람을 편애하는 밍채에 경찬이 기가 막힌 얼굴로 변했다. 경찬이 끊임없이 밍채를 미워하는 건 억울했지만, 이번 일만큼은 주현도 반박할 수 없었다. 주현은 경찬 몰래 밍채에게 접선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경챠니 쟤한테도 힐 좀 주라

[귓속말] 밍채 : 싫어요

밍채도 경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지 단번에 거절했다. 평소에는 ‘네, 네’ 잘도 대답하면서 이럴 때만 싫단다.

주현의 모니터 화면을 힐끔 훔쳐본 경찬은 허! 크게 혀를 찼다.

“나도 쟤 싫어.”

“넌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

밍채는 어리기라도 하지, 경찬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놓고 왜 이리 유치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 견제하는 둘 사이에 낀 주현은 던전 한 판을 끝낼 때마다 녹초가 되어 의자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이제 경찬이 집에 가자고 말이라도 꺼내 줬으면 좋겠는데, 게임에 재미를 붙인 건지 얼른 다음 던전 방을 만들라며 재촉해 왔다.

“너 이제 메마른 땅 가야 해.”

“메마른 땅?”

“나 따라와.”

메마른 땅 하면 창쓰는애와 지독하게 싸운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밍채가 사사게 스타인 채채라는 게 유저들에게 밝혀진 계기이기도 했다. 수호자 출시가 한창 학생들의 방학이 시작되었을 시기였는데 그새 시간이 지나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주현은 경찬, 밍채와 함께 항구로 이동해 메마른 땅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사람이 많아서 어수선하던 그때와 달리 배의 승객이라곤 셋밖에 없었다. 얼마 후 배에서 내린 주현은 고민에 빠졌다.

메마른 땅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수호자 육성 때는 지름길을 택했다가 창쓰는애에게 느닷없는 PK[8]를 당했었다. 지금은 부캐 육성 이벤트 기간도 아닐뿐더러 사람 많은 1채널도 피했으니 그런 미친놈이 더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주현은 결심하고 PvP존을 밟았다. 길이 두 갈래라는 걸 모르는 경찬은 앞서가는 주현의 뒤를 졸졸 쫓았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전체] 블랙 : ?

그러던 중 밍채가 별안간 파티를 탈퇴했고,

[전체] 경챠니 : ?

하늘에서 원기둥 형태의 빛이 떨어지더니 경찬의 캐릭터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죽은 듯 잠든 경찬의 캐릭터가 처량해 보였다. 만렙에 괜찮은 방어구까지 둘둘 감고 있던 주현도 밍채와의 대련 때 조금 맞았다고 체력이 왕창 깎였었다. 레벨 20에 장비라곤 사냥터에서 나온 걸 대충 주워 입은 경찬은 한 대 맞고 바닥에 뻗어 버렸다.

“야. 이거 뭐냐?”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던 경찬이 고개를 돌려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이어서 덜덜 떨리는 경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참는 듯한 침음이 섞여 있었다.

“……나 죽인 거냐?”

“……아무래도 그렇지.”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죽여 놓고 반성하는 것도 웃기지만, 밍채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뻔뻔한 태도로 주현에게 입이나 맞추고 있었다. 그에 경찬이 분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키보드에 손을 얹는 경찬에 주현이 서둘러 팔을 잡아챘다.

“야. 쟤 애기라니까. 우리보다 열한 살이나 어리다고!”

“채하냐는 말 취소야. 우리 채하는 저렇게 싹퉁바가지가 아닌데.”

아니다. 임채하는 싹퉁바가지가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반박했다간 경찬이 지금 밍채 편을 드는 거냐고 성난 얼굴로 따지고 들 게 뻔해 말을 아꼈다.

“저거 진짜 개또라이네. 넌 이런 애를 왜 데리고 노냐?”

굳이 따지자면 데리고 놀아 주는 건 밍채였다. 어스름을 제치고 밍채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지 말해 주고 싶었다. 그래 봤자 경찬은 공감하지 못할뿐더러 한심하게 여길 게 분명했지만.

“안 해. 다른 게임 하자.”

“어, 어. 그래.”

이를 꽉 문 경찬이 읊조렸다. 주현은 경찬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서둘러 맞장구쳤다. 이만 로그아웃하겠다고 밍채에게 귓속말을 보내려 키보드에 손을 얹자, 억센 손아귀가 팔을 옭아맸다. 씨우적거리는 경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쟤랑 사귀어? 그런 것도 알려 줘야 해?”

밍채와 사귀진 않지만, 게임 커플이었다. 커플이 아니더라도 함께 게임 중인 유저에게 로그아웃하겠다고 말하는 건 기본 예의였다.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이미 밍채를 싫어하는 경찬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주현이 팔을 뿌리치고 꾸역꾸역 메시지를 완성하는 동안 경찬은 노발대발하며 말을 쏟아 냈다.

“너도 저런 새끼 그만 놀아 주고 적당히 끊어 내라. 나중에 너 죽일지 어떻게 아냐?”

밍채는 주현을 죽이긴커녕, 보스에게 맞아가면서 살리는 놈이었다. 성직자의 딜 생명줄이라고 불리는 기본 버프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밍채가 주현을 죽인 건 손으로 꼽혔는데, 채채일 때 다른 팀이 되고 모르는 척했던 것과 시시로와의 대련 때문에 함께 연습했던 일이 있었다. 그 외에는 늘 같은 팀이었으며, 오히려 창쓰는애에게 죽임당했을 때 밍채가 분노하며 부캐를 수납하고 본캐를 들고 왔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다른 거 하자며. 언제까지 혼설 얘기 할 거야.”

“그 새끼가 재수 없어서 그렇지.”

밍채가 욕먹는 게 싫어서 말을 돌리자 경찬도 투덜거리며 자주 하던 AOS 게임으로 옮겨 갔다.

깊이 생각해 보면 밍채에게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밍채는 평소 주현의 친구들에게 잘해 줬었다. 경찬은 현실 친구고, 길드원은 게임 친구라는 차이점이 있겠지만, 밍채가 사람 가려가면서 태도를 바꿀 것 같진 않았다.

레아, 서쪽, 월월월과는 분명히 잘 지냈던 것 같은데. 밍채가 상냥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인사만큼은 꼬박꼬박 잘했고, 좋은 아이템을 먹으면 기꺼이 돈을 나눴으며, 서쪽이 소수 파티를 모집할 때도 흔쾌히 참여했다.

하지만 경찬에게는 인사 따위 생략했고, 체력이 깎이는데도 힐 한 번 주지 않았으며, 메마른 땅의 PvP존을 밟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빛 기둥을 날려 한 방에 죽여 버렸다.

“와. 윤주현, 존나 못해.”

게임을 한두 번 못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신기한지 경찬이 감탄하는 어투로 읊조렸다. 원래도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밍채가 왜 그랬을까 고민하느라 게임에 집중할 수 없어서 더더욱 엉망이었다. 경찬이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말든 주현은 밍채에 관한 고민을 이어 갔다.

어차피 연습 게임이었다.

* * *

사납던 햇빛이 한발 물러난 9월. 주현의 9월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개강 때문에 바빠진 경찬의 연락 빈도수가 준 것, 주현의 무기가 18강이 된 것, PvP 랭크전 2시즌이 시작된 것.

마지막으로 채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현은 어쩌다 보니까 기나긴 승부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통쾌하기는커녕 기분이 떨떠름하기만 했다.

연락 없어서 섭섭하다, 연락하겠다. 말로만 지껄이던 놈이 정말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가 도착한 건 9월의 둘째 주였다.

[임채하] 선배

일하던 중 모니터 화면 구석에서 톡 메시지 알림이 떠올랐다. 보통 이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경찬이나 밍채 정도였는데,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이 발신인의 자리를 꿰찼다.

주현은 메시지를 눌러서 확인해 볼 생각도 못 하고, 이어서 떠오르는 알림을 눈으로 읽기만 했다.

[임채하] 안녕하세요

[임채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마지막 대화가 같이 밥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지 않으냐는 본인의 질문이었을 텐데. 바로 위에 자리한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채하는 홀로 천연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평소에도 얼굴 가죽 두꺼운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겪어 보니 그보다 더한 놈이었다.

[임채하] (사진)

사진은 미리 보기가 불가능했다. 무시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호기심에 굴복한 주현은 채하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채하가 보낸 사진은 학교 주변 유명한 맛집의 간판이었다.

‘설마 여기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물으려고 보낸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바로 차단이었다.

[임채하] 폰트가 궁금해요

“……허.”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풀썩 내려가고,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꼭 쥐고 있던 마우스를 놓쳤다. 눈을 내리감은 주현은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사소한 질문을 던지는 채하에 열이 받았다.

‘보통 그때 일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하지 않나?’

하지만 임채하는 보통의 인간에 속하지 않았으니 사과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주현은 그렇게 단념하고 채하에게 답을 보냈다. 괜히 읽고 씹었다가 또 경찬에게 헛소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윤주현] TM고양이체

간판 폰트 하나 물어보겠다고 말을 건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굳이 사이 안 좋은 자신을 찾아온 연유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요즘엔 폰트 찾아 주는 사이트도 잘 구축되어 있지 않나.

3년 만에 톡을 건 이유가 고작 폰트라니. 주현이었으면 선배한테 물을 바에 궁금증을 꾹 참고 말았을 테다. 채하는 아직도 제 잘난 얼굴을 믿는지, 거절당할 거란 생각 없이 톡을 보낸 모양이었다. 물론 채하의 예상대로 주현은 메시지를 무시하지 못했다.

[임채하] 감사합니다

한창 조별 과제를 하던 때처럼 공손한 말투였다. 이런 식으로 과하게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일 때면 3년 전 그 일이 제 망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대화방을 조금만 올라가면 냉랭하고도 매몰찬 메시지를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임채하] 선배 같이 밥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주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다시 봐도 기막힌 놈이었다. 누가 보면 자신이 제발 만나 달라고 질척거린 줄 알겠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때도 먼저 말을 걸고 가깝게 다가온 건 채하였다. 이번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

주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 *

《 밍채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주현은 씻고 나와 혼돈의 설화에 접속했다. 게임 입장과 동시에 주현을 반기는 건 밍채의 파티 초대였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밍채 : 형 랭크전 할 거죠?

[파티] 블랙 : 어

랭크전을 하려고 온 거긴 했지만, 곧바로 파티 초대가 날아올 줄은 몰랐다.

[길드] westone : 에엥 누가 블랙님을 납치했죠??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 누구겠어염

[길드] westone : ㅠㅠ 납치 실패

서쪽도 파티 초대를 보냈는지, 길드 채팅으로 아쉬운 소리를 냈다. 9월에 접어들고 랭크전 2시즌이 열렸다. 1시즌 때 티어가 그대로 옮겨 와서 주현은 다이아였다.

[길드] 암흑기사 : 랭크전 진짜 좃같다

[길드] 잔혹동화 : ㅈ크전 그만하고 싶어요

[길드] 레아 : ㅠㅠㅠㅠ 저두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 게 바로 오늘인데 길드원들은 벌써 지쳐 있었다. 콘텐츠가 싫으면 안 하면 된다고들 하지만, PvP 랭크전은 티어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이 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참여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각 티어는 상위 일정 퍼센트 비율로 정해지고, 안정권에 접어들면 발길을 끊는 유저들이 수두룩했다. 어정쩡한 퍼센트에 걸리면 계속 점수를 확인하고 올려야 한다는 귀찮음이 있었으나, 접속 안 한다고 점수가 깎이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밍채는 특이하게도 마스터를 달성한 후 부캐로 패작 하고 다녔지만 말이다.

파티장인 밍채가 게임을 시작했는지 랭크전 입장 로딩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밍채와 주현의 티어가 화면에 표시됐는데, 마스터여야 하는 밍채는 무슨 일인지 다이아에 머물러 있었다.

[파티] 블랙 : 너 티어가 왜 이래?

[파티] 밍채 : 형 없으니까 점수가 안 올라요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저 힐했어요

물음표가 추궁으로 느껴졌는지 밍채가 변명을 내뱉었다. 힐 안 한다고 사사게에 가던 밍채가 자진해서 힐을 했다고 하니 더욱 의아해졌다. 팀원이 아무리 못한다고 해도 밍채 실력이면 충분히 버스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몇 판은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티어가 다이아까지 내려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체] 감사할줄아는인간 : 블랙님

[전체] 블랙 : 네

매칭이 잡히고 상대편 유저가 느닷없이 주현을 불렀다.

[전체] 감사할줄아는인간 : 님 팀 밍채 사사게 올라갔어요

‘이거 어디서 본 채팅 아닌가?’

익숙한 채팅의 흐름에 주현은 머릿속 저편에 묻어져 있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게 되었다. 밍채와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사사게에서 이름을 날리던 채채와 마주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파티] 블랙 : ㅅㅂ 뭐야

[파티] 블랙 : 너 뭐 했어

[파티] 밍채 : 진짜 힐만 했는데

[ 밍채님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

밍채는 억울한지 감정 표현을 이용해 눈물을 쏟아 냈다. 간혹 오해를 받고 사사게에 올라가는 일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사건은 인게임에서 유저들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밍채는 괴상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했다.

[파티] 밍채 : 사람들이 게임 던졌어요

대기 시간이 끝나고 문이 열리는 바람에 사사게를 확인할 경황이 없었다. 주현은 이 판이 끝나자마자 사사게에 들를 것이라 마음을 정했다. 주현의 캐릭터가 대검을 땅에 질질 끌며 문을 지나쳤다.

울던 밍채도 몸을 일으키고 주현에게 방어막을 걸어 줬다. 밍채는 언제나 주현에게만은 협조적이었다.

맵이 새롭게 추가되었는지 보이는 풍경은 채예스의 상가였다. 눈을 아프게 하는 색색의 천막과 상점 앞에 어지럽게 늘어진 물건들 탓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주현은 대검을 세웠다. 가냘픈 화살이 광택 나는 검날에 맞고 튕겼다.

이어서 뒤쪽에서도 화살이 날아왔다. 미처 피하지 못해 밍채가 걸어 줬던 방어막이 부서지고 미약한 대미지가 들어왔다. 공격을 보아하니 상대 팀은 두 명 다 수호자였다. 깎인 체력이 금세 차오르고, 머리 위엔 새하얀 깃털 표식이 둥둥 떠올랐다.

《 주신 리라의 은총 》

상대편을 발견했는지 밍채가 공격력 버프를 사용했다. 쾅, 쾅! 연이어 빛 기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편은 밍채에게 맡기고 주현은 나머지 한 명을 찾으려 천막 아래를 샅샅이 뒤졌다. 과일 상자 뒤에 숨은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수호자는 워낙에 체구가 작아서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기에 유리했다.

수호자와 눈이 마주치자, 발밑으로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뿜어내는 연기에서 도망치려 캐릭터의 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또 한 번의 화살이 주현을 노렸다. 서둘러 검을 세워 화살을 막아 내긴 했지만, 공격 범위 차이가 확연히 나는 탓에 주현은 수호자를 위협할 기회가 없었다.

[SYSTEM] 파티원 밍채님이 감사할줄아는인간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어느덧 밍채가 승리를 쟁취하고 돌아왔다. 다이아는 마스터의 한 단계 아래 티어였다. 마스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유저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밍채는 기본 버프를 유지한 채 상대를 말끔히 처리했다.

그 모습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또 사사게에 간 건지 궁금해서 갑갑해질 지경이었다.

《 치유의 가호 》

이따금 화살에 맞고 아파하는 주현에게 지속 힐을 걸어 준 밍채는 주현의 캐릭터를 지나쳐 상자 뒤에 숨어 있는 수호자에게 다가갔다. 쾅! 눈 부신 빛이 확산하며 상자를 결딴내 버렸다. 성직자가 PvP에서 강세를 보이는 직업은 아니었는데, 밍채가 하는 걸 보면 그 어떤 직업보다도 성능이 뛰어나 보였다.

응원의 의미로 밍채에게 피해량 감소 스킬을 걸어 주자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

밍채와 결투 중인 수호자의 처지에선 어이가 없을 상황이었다.

마르지 않는 마나를 가진 밍채는 도망가는 수호자를 쫓으며 가는 길마다 빛 기둥을 때려 넣었다. 푯말과 상자, 천막 등이 와르르 무너져 바닥을 뒹굴었다. 줄행랑을 치던 수호자가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밝은 빛이 정수리를 갈랐다.

밍채는 넓은 시장 바닥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 싸우고 있었다. 주현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성기사는 이동 속도가 느려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상대를 잡기 힘들었다. 괜히 쫓아가 검날을 휘두르면 방해만 될 게 뻔해 거슬리지 않게 뒤에 빠져 있었다.

[SYSTEM] 파티원 밍채님이 어둠이깃든수호자님을 처치하였습니다.

《 Win 》

이윽고 밍채가 마지막 상대까지 잡자 승리 문구가 화면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파티] 블랙 : 기다려

광장으로 돌아온 주현은 밍채에게 일러두고 게임 화면을 내려 사사게로 향했다. 밍채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일을 묻어 버리든지 반박하든지 할 수 있었다.

랭크전 2시즌 오픈이 바로 오늘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밍채의 닉네임을 단 게시물이 두 개나 올라가 있었다. 주현은 댓글이 더 많은 게시물로 들어갔다.

[비매너] 랭크전 패작 평온 길드 “밍채”

작성자 : 리라남친 | 댓글 : 56개 | 조회수 : 2801

랭크전 마스터 티어임

본인 음유시인이었고 밍채는 성직자

둘다 힐러여서 번갈아가면서 단체힐 스킬 박으면 되는 상황

(_018.jpg)

처음에는 좀 싸우더니 갑자기 힐만 함

모든 마나를 사용해서 나를 힐해줌

힐해주면 좋은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것 같아서

다시 설명해주자면 밍채랑 본인 둘 다 힐러였고

단체힐 스킬 켜고 나머지 마나로 딜하는게 효율 훨씬 좋음

힐만 쳐할거면 왜 PVP함?

* * *

[댓글]

* * *

- 힐러여서 힐한건데 욕을 먹네

* * *

↳ 리라남친 : 저도 힐러라고요

* * *

- 그니까 왜 랜덤매칭을 돌림

* * *

↳ 리라남친 : 친구가없다 됐냐?

* * *

- 나도 쟤 만났는데 딜하던데?

* * *

↳ 나도 만났음 정상인 맞음

* * *

↳ 리라남친 : 글 다시 읽어

* * *

- 얘 힐 안 한다고 올라온적 있지 않나? 이젠 힐만 하네

* * *

↳ 학습능력 존나 없는듯

* * *

- 딜하라고 말이라도 해보지 바로 사사게 데려오네

* * *

↳ 리라남친 : 말했는데 안통함

* * *

- 니 버스충이잖아 밍채가 정의구현했구만

* * *

↳ 리라남친 : 날 언제 봤다고 버스충이래 브론즈 새끼가

* * *

- 버스충 만나면 게임 던지는거로 유명함 니가 잘못했네

* * *

- 진정한 서포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걱정이었는데, 밍채가 사람 가려가면서 참교육을 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채채일 때도 밍채는 유저들 사이에서 평이 갈렸다. 누구는 정상이었다고 하고, 누구는 패작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사사게에 박제했다. 당시 주현은 다수의 의견이었던 패작 여론을 믿었지만, 왠지 지금처럼 밍채에게도 억울한 면이 있었을 것 같았다.

한때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밍채에게 왜 힐을 주지 않는 거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에 밍채는 마나가 아까워서라고 답변했다. 실력 없이 올라온 패작 유저들에게는 힐을 줄 마나가 아까운 게 맞았다. 그때처럼 완전히 손 놓고 있기엔 사사게에 갈까 봐 힐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기특했다.

[파티] 블랙 : 오해했네 미안

[파티] 블랙 : 잘했어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다시 게임으로 돌아온 주현은 잠시나마 오해했던 밍채에게 사과부터 뱉었다. 밍채는 주현의 캐릭터 볼에 입술을 갈기는 것으로 응했다.

[길드] westone : 아 블랙님 저 오늘 점심부터 랭크전 돌렸는데

[길드] westone : 밍채님 만났어요

[길드] 블랙 : 딜하던가요?

[길드] westone : 네 ㅋㅋㅋㅋㅋ

서쪽도 밍채가 사사게에 올랐다는 걸 아는지 유쾌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밍채는 버스충 판독기가 맞았다. 티어에 맞지 않은 실력의 유저를 팀으로 만나면 게임을 포기하는 유저는 밍채 말고도 비일비재한데, 밍채는 1시즌 때의 일 때문에 더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서쪽의 증언을 보며 상황을 정리하던 주현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길드] 블랙 : 밍채랑 몇 시에 만나셨어요?

‘중학생이 점심에 게임을 하는 게 가능한가?’

[길드] westone : 1시? 2시?

[길드] westone : 그쯤이었어요

[길드] 월월월 : 블랙님 집착하시네염

[길드] 블랙 : ㅅㅂ 아니거든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 안심하세요!! 게임만 했습니다

[길드] 블랙 : 아니라고요

중학생은 한창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꾀병으로 조퇴하고 집에 와서 게임을 한 듯싶은데, 경찬만큼이나 밍채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 * *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단번에 시선을 빼앗아 가는 알림이 있었다. 화면 구석에서 떠오르는 임채하란 이름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채하와의 대화방 알림을 꺼 버리면 해결되는 일이었지만, 그래 봤자 혹시 메시지 온 게 없나 괜히 톡을 껐다 켰다 하며 서성거릴 자신을 잘 알았다.

[임채하] (사진)

[임채하] 가독성 어때요?

[윤주현] 배경 투명도 낮추고 폰트 크기 키워

[임채하] 네

채하가 보낸 사진은 학교 과제로 추정되는 PPT 화면이었다.

어제는 사진을 선명하게 인쇄하는 법을, 그저께는 엉뚱하게도 좋아하는 폰트와 색 조합을 물었다. 채하가 가져오는 질문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사소하고, 굳이 주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답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며칠 전부터 목적을 알 수 없는 연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현은 가장 친한 경찬과도 이렇게까지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채하는 어떤 것이라도 주현과 접점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 채하의 태도에 자신이 만만해 보이나 고민도 해 봤으나 끈질기게 찾아오는 걸 보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순수하게 도움이 필요했다면 함께 술을 마실 정도로 친밀한 경찬에게 부탁하는 것이 옳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주현의 조언을 반영한 사진이 도착했다.

[임채하] (사진)

[임채하] 이렇게요?

[윤주현] 어

임채하. 차단할까 말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게 하는 이름이었다.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끝끝내 차단하지 못한 건 대화 주제가 주현의 관심 분야인 탓이었다.

간혹 무보수로 이것저것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양심 없는 지인들이 있었는데 채하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서 더욱이 애매했다. 단순히 조언을 구하는 수준이었고, 꼬박꼬박 감사하다고 인사하기도 했다. 피드백에 맞춰서 변하는 결과물을 보면 주현이 더 만족스러웠다.

[임채하] (사진)

[임채하] 이건 폰트 뭔지 아세요?

하나를 끝마치니 또 다른 질문이 도착했다. 테이블에 놓인 물티슈 사진이었다. 뒤에 찍힌 배경을 보아하니 학교 강의실인 모양이었다.

[윤주현] 일러스트로 그린 것 같은데

[임채하] (사진)

[임채하] 이건요?

이번에는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빨아들이고 있는 컵 홀더였다. 플라스틱 컵 너머에는 채하의 친구인 민준의 흐릿한 형상이 보였다.

[윤주현] 그것도 일러스트

[윤주현] 내가 지식인이야?

[윤주현] 왜 자꾸 물어봐

채하의 질문이 흥미로운 것과 접근이 의심스러운 건 별개의 일이었다. 굳이 분위기를 얼어붙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임채하] 내공 대신 밥 사드릴게요

죄송하단 말이나 변명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일부러 무안을 주는 물음이었는데도 채하는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주현이 채하의 언변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3년 전 그날의 일이 그리 부끄럽게 기억되지 않았으리라.

주현은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톡톡 건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채하가 원하는 건 뭘까.

[윤주현] 됐어

고가의 상표 시계나 신발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다니는 걸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리고 돈도 안 버는 처지인 녀석한테 밥 얻어먹는 건 모양 빠져서 싫었다. 경찬은 돈 많은 사람이 형이라며 넙죽 받는 편이었지만 주현의 생각은 달랐다.

[임채하] 선배

한창 대학교에 다닐 때 후배들에게 몇 번이고 들었던 호칭이었다. 그런데도 임채하가 부르는 ‘선배’는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주현은 초조하게 마우스를 두드렸다. 오늘따라 일이 없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하루를 망쳤을 게 분명했다.

더는 임채하를 좋아하지 않는데, 여전히 임채하가 자신의 일상을 뒤흔든단 게 기이했다.

[임채하]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윤주현] 안 돼

[임채하] 왜요?

싫으면 싫은 거지, 이유까지 말해 줘야 하나.

경찬이 형이라고 부르라 할 때는 죽어도 안 부르던 녀석이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서 가슴이 답답했다. 채하가 던지는 모든 말이 고요하기만 하던 주현의 삶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한 주현은 마지막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 * *

[길드] westone : 블랙님 펫이에요?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블랙님 옆이요 ㅋㅋㅋ

퇴근 후 집에 도착한 주현은 출석 시간을 채우기 위해 컴퓨터부터 켰다. 캐릭터를 대충 광장 벤치에 앉혀 둔 채, 할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서쪽의 채팅이 보였다. 느닷없는 펫 타령이 의아했다.

화면 가득 캐릭터 얼굴을 확대해 놨던 터라 마우스 휠을 밀어 거리를 벌렸다. 그제야 옆에 철썩 붙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 옆자리가 떡하니 비어 있는데도, 밍채는 그 위에 올라가 주현의 캐릭터 옆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보였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잠수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초대를 보내봤는데 밍채가 곧바로 수락하며 파티에 합류했다.

[파티] 블랙 : 안녕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보통 사람이라면 똑같이 인사말을 돌려줄 텐데, 밍채는 입술로 화답했다. 밍채가 캐릭터 볼에 입술을 비비고 있는 동안 주현은 랭크전에 입장했다. 사람 많을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매칭이 빠르게 잡혔다. 로딩 창을 지나 랭크전 맵에 들어간 주현은 마주한 닉네임에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전체] westone : 아 설레네요

[전체] 블랙 : 여기 다이아인데요??

[전체] 잔혹동화 : 제가 다이아여서 ㅎㅎ

[전체] 블랙 : 아

마스터에 있어야 할 서쪽을 상대 팀으로 만났다. 서쪽은 같은 길드인 잔혹동화와 함께 매칭을 돌린 건지 둘이 한 팀이었다. 대다수의 유저는 마스터 티어를 달성하면 랭크전에는 발도 안 들이지만 서쪽은 제 한계를 시험하는 건지 랭크전에 붙박여 있었다. 더 올라가 봤자 마스터의 보상은 똑같은데도 말이다.

[파티] 밍채 : 제가 연금술사 잡을게요

[파티] 블랙 : ?

잔혹동화의 직업이 연금술사였다. 밍채가 잽싸게 잔혹동화를 채 간 탓에 주현의 상대는 당연하게도 남은 서쪽이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한 번이라도 마스터 티어를 달성해 본 밍채가 서쪽을 맡아야 했지만, 밍채는 이미 잔혹동화를 잡기로 결단했는지 돌아오는 물음표를 보고도 끄떡하지 않았다.

[파티] 블랙 : 내가 서쪽님을 어떻게 잡아

[파티] 밍채 : 형 잘하잖아요

[파티] 블랙 : 아니

[파티] 밍채 : 형 2분만 버텨요

실랑이하는 사이,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시야를 가리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맵은 1시즌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우거진 숲이었다. 날씨가 새롭게 추가되었는지 하늘에서 사나운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캐릭터를 움직이자 물웅덩이를 밟는 찰박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의 캐릭터엔 여느 때와 같이 방어막이 둘려 있었다.

젖은 잎사귀를 지나쳐 부지런히 뛰어다니면 얼핏 홀딱 벗은 것처럼 보이는 그은 피부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쪽도 주현을 찾은 건 마찬가지인지 인사 대신에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펑! 폭음과 함께 주변의 나무와 풀잎이 쓸려 나갔다. 간신히 대검을 세워 방어에 성공한 주현의 캐릭터만이 한바탕 휩쓸려 간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서쪽은 주현에게 숨 돌릴 시간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연이어 대포알이 주현의 캐릭터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탄알이 캐릭터와 맞닿는 순간에 맞춰 대검을 세웠다.

원거리 공격 캐릭터를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까. 가진 건 대검뿐인 주현은 아직 정답을 찾지 못했다.

《 주신 리라의 은총 : 10초간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밍채도 한창 바삐 싸우고 있는지 공격력 버프가 들어왔다. 서쪽을 공격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매섭게 다가오는 포탄을 막고 반격을 이어 갔다. 캐릭터가 대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신사가 가르쳐 줬던 것처럼 스페이스 바를 눌러 공격을 끊어 내고, 다시 날아오는 포탄을 받아쳤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서쪽의 바로 앞에서 방어를 성공한 주현은 반격 대신 손가락을 뻗어 경직 스킬 단축키를 눌렀다. 어깨를 부딪치는 주현의 캐릭터에 서쪽도 휩쓸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때 채팅 창에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SYSTEM] 파티원 밍채님이 잔혹동화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전체] 잔혹동화 : ㅠㅠ 서쪽님 부탁해요

경기가 시작된 지 2분. 밍채는 정말로 2분 만에 잔혹동화의 숨통을 끊어놨다.

경직에 성공한 주현은 곧이어 또 한 번 스킬을 사용해 푸른빛이 스며든 검날로 서쪽의 머리를 가르려 했으나 눈치 빠른 서쪽은 캐릭터를 굴려 옆으로 벗어났다. 주현은 허공에 검을 꽂았다. 머쓱해서 눈알이 흔들린 사이 옆에서 폭음이 들렸다. 캐릭터를 지켜 주던 방어막이 쨍그랑 깨지며 체력이 왕창 깎였다. 가까운 곳에서 얻어맞은 탓에 치명타가 뜬 모양이었다.

서쪽이 다시 장전하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 부신 빛이 둘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빛 기둥에 스친 서쪽의 캐릭터가 주춤하자 이번엔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PvP는 한 번 상대에게 말리면 다시 주도권을 잡기가 힘들었다.

밍채는 서쪽의 캐릭터가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공격을 퍼부었다. 주현의 눈에는 희망 고문처럼 보였다. 이윽고 죽기 직전인 서쪽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허공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몸을 속박했다.

[전체] 밍채 : 형이 죽여요

[전체] westone : 와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혼설하면서 제일 어이없는 순간이에요

[전체] 블랙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SYSTEM] 파티원 블랙님이 westone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언제 서쪽을 죽여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주현은 냉큼 대검을 휘둘렀다. 뒤로 자빠지는 서쪽의 캐릭터가 애처로워 보였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 Win 》

마스터 티어인 서쪽과 싸워서 이겨서일까. 승리 문구와 함께 마스터 티어로 승격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절대 갈 일 없을 거라 여겼던 마스터 티어였다. 그곳에 당도했단 게 믿기지 않아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현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잠시 눈을 감았다.

밍채가 주현을 죽이는 날이 머지않아 올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던 경찬에게 반박하고 싶어졌다. 죽이기는 무슨. 멱살을 붙잡고 마스터까지 끌어올렸다.

[길드] westone : 랭크전에서 다양한 인성질을 봤지만

[길드] westone : 블랙님이 최고네요

광장으로 복귀하자 황당해하는 서쪽의 채팅이 올라왔다.

[길드] 블랙 : 억울해요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 뭐하셨어염?

[길드] 블랙 : 아무것도 안 했어요

[길드] westone : 능력 좋은 남편 있어서 행복하시겠어요

[길드] 블랙 : 아니..

[길드] 잔혹동화 : 좋으시겠어요

[길드] 블랙 : 아니 ㅋㅋㅋㅋㅋㅋㅋ

잔혹동화까지 유치한 놀림에 합류하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날아갈 듯해 밍채의 캐릭터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 내야 했다.

* * *

[임채하] 선배

[임채하] 같이 혼설하실래요?

뻔뻔함이 묻어나는 메시지에 순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자존심도 염치도 없는 놈이었다. 뚜렷한 존재감을 알리는 이름 세 글자를 보며 주현은 근심 가득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무시당한 메시지가 대화방에 떡하니 남아 있었다. 채하는 민망하지도 않은지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붙여 왔다.

이젠 질문 공세가 통하지 않는단 것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느닷없는 게임 제안에 머릿속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피시방에서 비웃고 가지 않았었나? 만날 때마다 사람을 무시하던 녀석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탓에 주현은 혼란에 빠졌다.

[윤주현] 아니

[윤주현] 망겜이라 접었어

[임채하] 재밌는데

[윤주현] 재미없는데

부정의 말을 뱉을 때마다 양심이 쿡쿡 찔렸다. 채하에게 메시지가 오기 전까지 주현은 혼돈의 설화 업데이트 내용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 아바타 합성 기능이 생기면서, 합성으로만 얻을 수 있는 아바타가 추가되었다. 주현은 채하와 말장난을 할 게 아니라, 얼른 집으로 돌아가 아바타 합성이나 돌리고 싶었다.

[윤주현] 템도 다 팔아서 못해

혹시나 복귀하라고 설득할까 봐 미리 선을 그었다.

[임채하] 템 사드릴게요

[윤주현] 니거 주면 생각해볼게

아이템 팔고 접었다고 하면 그쯤에서 물러날 줄 알았는데 채하는 설득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하는 수 없이 주현은 무리수를 던졌다. 한 게임을 오랫동안 하던 녀석이니 착용하고 있는 장비에 애착이 클 거라고 넘겨짚었다.

곧이어 긍정이 돌아왔다.

[임채하] 네

무리수에 가까운 부탁에 채하는 냉큼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렇게까지 목을 맬 필요가 있나? 갑작스럽게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는 채하가 부담스러울뿐더러 무척 수상쩍었다. 혼돈의 설화로 치면 신사 같은 놈이었다.

[윤주현] 됐어 게임 질렸어

거래소에서 아이템 사 와 놓고 자신이 착용하던 것이라 우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든 아니든 상대해 줄 이유가 없는 주현은 거절의 뜻을 비쳤다.

[임채하] 네

고집스럽게 굴 줄 알았는데 채하는 그대로 물러났다. 주현은 턱을 괸 채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매번 거절당하면서 들이대는 임채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임채하를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도 못지않게 한심했다. 워낙에 무른 성정 탓에 제대로 화도 못 냈다.

한때는 채하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끔 덮어 놓으면 완벽히 잊을 줄 알았다. 무모했다. 사람의 기억이 연필로 그려지고,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도화지가 아닌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말끔히 지울 수 없다면 부딪히는 게 옳았다. 뭘 얻어내려는 건지 몰라도, 고군분투하는 임채하를 보면 내심 통쾌했다. 먼저 굽히고 들어올 줄 모르던 상대였다. 난데없이 쥐어진 주도권이 얼떨떨했지만, 주현은 일순간의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채하가 일부러 져 주는 것도, 채하에게 세워 두었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 * *

[전체] westone : 블랙님 뭐 뽑게요?

아바타 합성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 용케도 눈치챈 서쪽이 다가와 물었다.

주현은 접속하자마자 광장 한가운데 서서 아바타 합성을 돌리고 있었다. 옆에는 늘 그렇듯 밍채가 나무늘보처럼 매달려 있었다. 주변에 친구가 많을수록 확률이 올라간다는 미신이 있었으니 주현은 환영이었다.

[전체] 블랙 : 전부요

[전체] westone : 이렇게 서버비 납부를 하시네요

[전체] 블랙 : ㅅㅂ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뭐 좀 뽑으셨어요?

[전체] 블랙 : 아뇨..

합성 기능은 가진 두 개의 아바타를 합쳐서 하나의 새로운 아바타를 만드는 형식이었다. 게임들이 그러하듯 합성 전용 아바타는 확률이 희박했다. 얻기가 어려워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합성 전용 아바타들은 가격이 10억 골드를 넘어갔다. 10억에 사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파는 사람들이 단합한 탓에 당분간은 가격이 내려가기가 어려울 듯했다.

[전체] 블랙 : 아바타만 20개 날렸어요

[전체] westone : 저도 몇 개 해봤는데 결과가 더 별로던데요

[전체] westone : 혼설은 양심도 없지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밍채 : [빛의 신관 세트]

별안간 서쪽과 주현의 대화를 밍채가 가르고 들어왔다. 그 어떤 비틱질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던 주현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빛의 신관 세트]는 이번에 추가된 합성 아바타 중 하나였다. 주신 리라의 신관들이 입는 의례복으로, NPC 코스프레를 좋아하는 유저들이 무척이나 탐내는 아바타였다.

[전체] westone : 헐

[전체] westone : ㅊㅊㅊㅊ 와 저걸 뽑으시네

주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팔라고 하면 팔까? 하지만 거래소 시세가 무려 10억이었고, 주현이 들고 있는 골드는 겨우 2억이었다. 아바타 하나에 10억을 바치기엔 그만큼 무기 강화가 늦어지게 된다. 다섯 번째 악마 레이드가 나오기 전까지 무기 20강을 달성하는 게 현재 목표였다.

대다수의 유저들이 그러하듯, 주현은 스펙업과 룩펙업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전체] 밍채 : 형 가질래요?

놀란 주현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서쪽한테 형이라고 할 리는 없을 테다. 혹시 몰라서 마우스를 끌어 주위를 빙글빙글 돌려 봤지만, 광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곤 셋밖에 없었다.

주현이 답을 늦추자, 보다 못한 서쪽이 귓속말로 재촉해 왔다.

[귓속말] westone : 얼른 달라고 하세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이거 받아도 될까요..?

[귓속말] westone : 네!!!!!!!!!!!!!!!!!

이미 밍채한테 무기도 받아먹은 처지에 더 아플 양심은 없었지만, 아바타까지 받으려니 정말로 어린애 등쳐먹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돌아서면 후회할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전체] 블랙 : 너는?

[전체] 밍채 : [빛의 신관 세트][빛의 신관 세트]

[전체] 블랙 : ?

[전체] westone : .....?

[전체] 밍채 : 두 개예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묻자, 밍채는 [빛의 신관 세트]를 두 개나 태그했다. 지나가던 유저들이 보았으면 욕했을 광경이지만 다행히도 광장엔 여전히 세 사람이었다.

[귓속말] westone : 장성한 아들 아니에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서쪽은 귓속말로 은근히 밍채를 의심해 왔다. 장성한은 혼돈의 설화 디렉터의 이름이었다.

밍채는 평소에도 아이템을 잘 얻는 편이었지만, 합성 아바타 출시 하루 만에 두 개나 가져가는 건 정말로 디렉터와의 사이를 의심해 볼 법한 일이었다.

[전체] 블랙 : 남는다면..

[귓속말] westone : 저게 남겠냐구요 그냥 달라고 하세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너무 양심 없잖아요..

[귓속말] westone : 10억에 양심이 어딨어요

서쪽의 말이 맞았다. 갖고 싶은 아바타 앞에서 자존심과 양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달라고 빌어야 할 상황인데 상대가 중학생이라 그런지 추저분해 보일까 봐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주현에 줄 마음이 사라질 만도 한데, 밍채는 개의치 않는지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등을 돌렸다. 그에 주현은 힘주어 마우스를 꽉 붙들었다.

[귓속말] westone : 저도 이런 정상인 겜친 만들고 싶네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밍채도 처음에는 정상인 아니었어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억짜리 아바타 받으면서 너무하시네요

온전히 이해하려고 할 때면, 밍채가 돌발 행동을 해 오는 탓에 녀석의 심리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힐 안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나 주현에게만큼은 후했던 것. 성직자 나가라던 시시로에겐 심드렁했으나 양궁달인, 신사를 못마땅해한 것. 레아, 서쪽, 월월월에겐 호의적이었으나 경찬을 필요 이상 경계한 것.

일관성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만 밍채는 남들보다 심하게 기복을 보였다.

그렇게 밍채에 대해 고심하는 사이, 우편함 아이콘에 빛이 들어왔다. 주현은 느릿하게 심호흡을 하며 우편함에 들어갔다. 게임 친구 잘 사귄 덕에 10억짜리 아바타를 거저먹는 순간이었다.

목록 가장 상단에 자리 잡은 밍채의 우편은 평상시와 차이점이 있었다. 늘 제목에 온점 하나 찍어 두던 녀석이 ‘형’이라고 적어 두었다.

보낸 사람 : 밍채 (성직자)

우편 제목 : 형

우편 내용 : 접지 마요

첨부된 아이템 : [빛의 신관 세트]

밍채가 적어 둔 우편 메시지를 읽는 순간, 저항 없이 웃음이 터졌다. 게임을 접기라도 할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무기 강화하겠다고 꼬박꼬박 골드를 벌고 사 오는 노력이 보이지도 않나. 주현이 입이 찢어지게 웃는 동안 광장으로 돌아온 밍채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전체] 블랙 : 내가 왜 접어

[전체] westone : 헐 접으려고 하셨어요? ㅡㅡ

[전체] 블랙 : 아니.. 안 접는다고요

[전체] 밍채 : 섭종[9]까지 같이 해요

[전체] 블랙 : 아니..

[전체] westone : 밍채님이 서버비 납부 잘해주셔서 섭종은 안 할듯요

[전체] 블랙 : ㅅㅂ

천상계 랭커들은 아무리 운이 좋아도 큰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경지에 오르려면 억 단위로 골드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밍채도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라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주섬주섬 [빛의 신관 세트]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에 맞춰서 늘 어둠침침한 옷만 입다가 오래간만에 입는 쾌활한 분위기의 옷이었다. [빛의 신관 세트]는 하얀 옷감과 베이지 문양의 의례복으로, 목부터 무릎까지 늘어진 금으로 수놓은 영대가 포인트였다. 마족의 행색으로 예복을 착용하니, 지나가던 신관 NPC를 붙잡고 옷을 빼앗은 것처럼 보였다.

[전체] westone : 순정도 예쁘긴 한데

[전체] 블랙 : 검은색으로 덮어야죠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주현도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가 문득 10억짜리 아바타 받고 입을 싹 닦는 건 어른의 도리가 아니다 싶어서 말을 꺼냈다.

[전체] 블랙 : 갖고 싶은 거 있어?

[전체] 밍채 : 형이요

[전체] westone : 혼수였네요..

[전체] 블랙 : ㅅㅂ

방금 뱉은 건 장난이었는지 밍채가 말을 덧붙였다.

[전체] 밍채 : 게임만 접지 마요

게임에 일주일씩이나 접속 안 한 건 본인이면서 괜한 걱정을 하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 * *

금요일 회식은 최악이었다. 남들은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마실 때, 주현은 직장 동료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어야 했다. 회식 날짜가 목요일이었어도 마신 다음 날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투덜거렸을 테지만, 황금 같은 주말이 날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자리가 파하고, 한적한 지하철에 올라탄 주현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야근하는 것보다는 낫다지만 칼퇴근했으면 집에서 여유롭게 혼돈의 설화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주현은 직장 회식 문화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간절히 빌었다.

지친 몸에 술까지 들어가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을 켜자 쌓여 있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임채하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 불청객을 대면했다.

[임채하] 선배

[임채하] 저 랭크전 마스터예요

“뭐라는 거야?”

주현의 티어도 채하와 같은 마스터였다. 예전처럼 심해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갇힌다고 하더라도 밍채가 금방 꺼내 줄 것을 알았다. 든든한 아군이 있는 주현에게 채하의 티어 어필은 심드렁한 수준이었다. 주현은 메시지를 읽고 씹었다.

얼마 후 휴대폰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발신인이 누구일지 뻔해 주현은 울리는 머리를 꾹꾹 지압하며 남은 한 손으로 대충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임채하의 알림이 지워진 자리에 밍채의 이름이 떠올랐다. 주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서둘러 반가운 이름을 맞이했다.

[밍채] 형

[밍채] 오늘 안 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출석하던 주현이 11시가 가까워지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밍채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이틀 전만 해도 게임을 접지 말라고 매달리던 녀석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한 듯했다. 주현은 솟아오르는 광대를 매만지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블랙] 지금가는중

[밍채] 야근했어요?

[블랙] ㄴㄴㄴ

[블랙] 오늘회식해가지고

[밍채] 형 술 마셨어요?

[블랙] ㅇㅇㅇ

퇴근이 늦어질 때면 몇 번씩 밍채가 신경 쓰이긴 했었는데,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별거 아닌데도 기뻤다. 값비싼 아이템을 턱턱 안겨 주는 것은 당할 때마다 놀라긴 하지만, 밍채가 워낙에 물욕이 없는 녀석이니 친밀의 정도로 보기가 힘들었다. 만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도 신사에게 받아야 할 1억 골드를 주현에게 양보한 일이 있었다.

간혹 아이템을 강제로 선물해 놓고 사이가 틀어지면 사사게에 박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밍채는 그런 속 좁은 놈들과는 달랐다. 원래도 씀씀이가 클뿐더러, 밍채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골드를 아까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주현과 다퉜을 때 밍채는 아이템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대신에 로그아웃을 택했다.

게임에서 이상한 사람들만 보다가 오랜만에 정상인을 만나서일까. 밍채의 심리를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바라는 바가 뻔히 보이던 유저들과 달리 밍채가 주현에게 요구하던 건 게임을 접지 말라는 것 하나였다.

[밍채] 빨리 와요

그래서인지 주현이 밍채와 친해졌다고 느끼는 건 지금 같은 사소한 순간이었다. <분노의 사탄> 업데이트 날 길드 파티를 보내고 주현을 찾은 것, 신사와 <인형의 집> 헬 모드를 하던 중 누구와 같이 있느냐고 귓속말을 보낸 것, 지금처럼 언제 오느냐고 묻는 것.

아직도 그 괴상한 콘셉트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밍채가 자신을 재미를 위한 대체재로 보지 않는단 건 알았다.

날이 넘어가기 전에 간신히 집에 도착한 주현은 나른한 몸을 이끌고 컴퓨터 앞으로 갔다.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 혼돈의 설화에 접속하기까지 몇 번의 헛손질이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당장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무거웠지만 애써 힘을 주고 버텼다. 피곤한 것과 게임 출석 체크는 별개의 일이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레이드 가자고 하고 싶은데

[길드] westone : 야근하고 오신 것 같아서 눈치 보이네요

[길드] 월월월 : 눈치 안 보시는 것 같은데염?????

[길드] 블랙 : 야근아니고 회식ㅇ이에요 ㅋㅋㅋㅋ

[길드] 사멍꾼 : 금요일 회식....

[길드] 잔혹동화 : 끔찍하네요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길드 채팅이 북적였다. 얼른 씻으러 가야 했지만, 머리가 멍해 주현은 모니터를 멀거니 응시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갑갑한 셔츠 단추를 풀면서 흐느적거리는 사이, 길드 채팅에서 서쪽이 주현을 찾았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요? ㅎㅎ

[길드] 월월월 : 아;;;;;;;;;;;;;;;

[길드] 블랙 : 네?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아니었지만 사고가 느리게 돌아갔다.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길드 채팅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길드] 레아 : 엌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소름끼쳐염;;;

[길드] 암흑기사 : 해본적 없으신가본데 ㅋㅋ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좀 생겼어야 가능한 멘트잖아요

[길드] 레아 : 저게요...?!

잠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등으로 볼을 두드리며 찬찬히 채팅을 정독했다. 서쪽이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후배들 상대로 헛짓거리하는 선배 성대모사였던 모양이다. 그런 멘트는 좀 생겼어야 가능하다는 채예스의수호자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주현이 목격했던 광경에서 그런 사람들은 대다수 생겼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었다.

[길드] 사멍꾼 : 블랙님 잘생겼을 것 같은데요?

[길드] 블랙 : 아뇨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ㅋㅋㅋㅋㅋㅋㅋ 아니라는데요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 괜찮아요 중요한건 성격이에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면서 잘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멍꾼이나 아니라고 굳게 믿는 채예스의수호자나 이상한 건 매한가지였다. 와중에 암흑기사는 채예스의수호자와 같은 의견인지 은근히 위로의 말을 전했다.

사람 생긴 거로 놀리든 말든 관심 없는 주현은 가볍게 무시했다.

[길드] westone : 월월님은 당해보셨나본데요

떠들썩한 채팅 사이 홀로 소름 끼친다는 월월월을 서쪽이 용케도 발견하고 언급해 왔다.

[길드] 블랙 : 월월님 공대 아니에요?

공대가 남자만 있는 곳은 아니지만, 월월월의 반응을 보았을 때 상대는 남자가 분명했다.

[길드] westone : 맞아요

[길드] westone : 월월님 남자한테 인기 많잖아요

[길드] 월월월 : 그렇게 말하면 블랙님 오해하시잖아염;;

[길드] westone : 피방에서 혼설하면 다들 얼굴 확인하러 오고

[길드] 블랙 : 인기 많은거 맞는데요?

[길드] 월월월 : 아니라구염 ㅠㅠㅠ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

채팅을 읽으며 실없이 웃고 있으니 졸음과 취기가 서서히 달아났다. 어쨌든 씻긴 해야 할 듯싶어 즐거워 보이는 채팅을 뒤로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덜 마른 머리카락과 함께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을 땐, 캐릭터 옆에 처량한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밍채가 보였다. 아깐 정신이 없어서 밍채에게 말을 건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키보드에 손을 얹으며 채팅 창을 확인하는데, 서쪽이 왔다 갔는지 밍채와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아이스크림 필요 없어요?

타이밍이 엇갈렸는지 주현이 씻으러 간 직후로 보였다.

[전체]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밍채님 그만

[전체] westone : 아니

[전체] westone :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아

[전체] westone : 블랙님 언제 와요 ㅡㅡ

광장에서 무슨 일이 있긴 했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서쪽의 채팅이 가득했다. 밍채의 채팅 기록이라곤 캐릭터 옆에 앉기 위해 사용한 감정 표현 메시지가 전부였다. 서쪽이 웃는 걸 보아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현은 밍채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채팅을 돌려 서쪽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뭐하신 거예요?

[귓속말] westone : 전 순수하게 블랙님한테 아이스크림 사드리려고 한건데 ㅠㅠ

주현의 추궁에 서쪽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은 채팅에 남아 있어서 주현도 아는 이야기였다.

[귓속말] westone에게 : ?

[귓속말] westone : 밍채님이 자꾸 대련을 걸잖아요 ㅋㅋㅋㅋ

[귓속말] westone에게 : 하셨어요?

[귓속말] westone : 네

[귓속말] westone : 한판은 이겼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몇 판 하셨는데요?

[귓속말] westone : 열판이요 ㅋ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서쪽이 아홉 판을 내어 주고 한 판의 승리를 가져오긴 했으나, 밍채를 한 번도 죽여 본 적 없는 주현으로선 그마저도 대단해 보였다. 주현은 미동 없이 기다란 눈꺼풀만 깜빡이는 밍채의 캐릭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름을 불러보았다.

[전체] 블랙 : 밍채야

[전체] 밍채 : 네

언제나 그랬듯 대답은 참 성실했다.

[전체] 블랙 : 안 자?

사실 자러 가고 싶은 건 주현이었으나, 밍채가 지금껏 기다린 바람에 혼자 두고 가기 민망했다.

[전체] 밍채 : 내일 나가야 하긴 해요

[전체] 블랙 : 내일 안 와?

[전체] 밍채 : 켜두고 나갈 거예요

RPG 게임 유저다운 발언이었다. 게임의 엔드 콘텐츠는 레이드 따위가 아니었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잠수를 타는 ‘석상’이 진정한 고인물의 경지였다. 혼돈의 설화에는 값비싼 아바타를 입혀 두고 온종일 서 있다가 로그아웃을 하는 유저들이 허다했다. 주현은 고인물은 아니었으나 레이드가 내키지 않았을 시절, 출석 시간 채운다고 마을에 서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었다.

그땐 서쪽과 월월월이 레이드 갈 생각이 없느냐고 줄기차게 물었었는데, 지금의 주현이 둘의 처지가 되었다. 네가 약속 때문에 밖에 나가면 나는 누구와 게임을 해야 하느냐고 밍채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체면상 어린애한테 구지레하게 매달릴 순 없어서 주현은 안타깝게도 밍채를 놓아주어야 했다.

[전체] 블랙 : 그럼 언제 와?

[전체] 밍채 : 왜요?

끈질기게 캐묻는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밍채가 되물었다. 마음 같아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레이드는 길드원과 함께 돌면 되는 일이었지만, 랭크전만큼은 밍채를 대체할 인력이 없었다. 혼자 랭크전을 돌렸다가 티어라도 떨어지면 밍채가 부캐를 들고 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약속이 있다는 밍채의 말에 주말 계획이 무너진 주현은 새로운 일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밍채가 솔깃한 제안을 던졌다.

[전체] 밍채 : 저 나가지 마요?

‘티가 났나?’

몇 마디 안 했는데도 밍채는 어렵지 않게 주현의 속내를 꿰뚫었다. 그러라고 냉큼 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약속 취소는 상대방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주현은 일말의 양심을 싹싹 긁어모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체] 블랙 : 아니

[전체] 블랙 : 약속은 가야지

[전체] 밍채 : 형

[전체] 밍채 : 저녁에 봐요

밍채가 저녁에 온다면 그때까지 레이드를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새로운 주말 계획을 완성한 주현은 밍채와 인사를 나누고 가뿐한 마음으로 게임을 종료했다.

* * *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난 주현은 비몽사몽 상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곧장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모니터 화면에 익숙한 채예스 광장의 풍경이 펼쳐지고 나서야 주현은 밍채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약속 때문에 자리를 비운 밍채는 저녁은 되어서야 오겠다고 말했었다.

[길드] 잔혹동화 : 블랙님 안녕하세요

[길드] 블랙 : 안녕하세요

광장 중앙에는 잠수 중인 신사가 서 있었다. 아바타 합성에 성공했는지 극악의 확률을 자랑하는 [용맹한 전사 세트]를 입고 있었다. 휘날리는 망토부터 갑옷까지 모조리 빨간색이라 언뜻 보면 피 칠갑 모양새 같기도 했다.

혼돈의 설화는 왜 옷을 저렇게 입는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주는지, 그들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주현도 합성 아바타를 밍채에게 선물 받긴 했지만 다 모으는 게 목표였기에 이후에도 합성에 도전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괜한 아바타만 잃었다.

주현은 마우스로 방향을 돌려가며 밍채를 찾았다. 게임을 켜 두고 나간다고 하였으니 어딘가에 밍채의 캐릭터가 있을 테다. 바쁘게 손목을 움직이던 주현은 이윽고 고운 얼굴과 안 어울리게 거대한 덩치를 가진 캐릭터를 발견했다.

푸르른 잎사귀가 가득한 나무 그늘에, 밍채가 고양이 무늬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옆에 사람 한 명 앉을 공간을 떡하니 비워 놓은 모습이 귀여웠다. 다른 의자 아이템도 많을 텐데, 굳이 같이 앉을 수 있는 돗자리를 택한 게 깜찍했다.

잠수는 늘 주현의 몫이어서 밍채가 먼저 굳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현은 밍채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그러던 중 파티 초대가 날아왔다.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오늘은 길드원과 함께 레이드를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초장부터 달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서쪽에게 남은 레이드가 몇 안 되길 바라며 초대를 수락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레이드 가요!

[파티] 블랙 : 어디 가나요?

[파티] westone : 메아부터 아그나까지요

[파티] 블랙 : ㅅㅂ

현재 레이드로 취급되는 던전 중 첫 번째가 <인형의 집>의 메아였고, 악마 레이드를 제외한 마지막 던전이 일곱 번째 인어 아그나였다. 서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레이드를 돌겠다고 선포했다.

[파티] westone : 휴식타임 드려요 ^^

[파티]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

서쪽은 잔혹동화와 친해졌는지 오늘도 함께였다. 인원을 살펴보자 파티 멤버는 둘이 끝이었다. 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주현은 서쪽에게 물었다.

[파티] 블랙 : 월월님은요?

[파티] westone : 그분은 친구가 많으셔서 다른 파티에 갔답니다

[파티] 블랙 : 저는 친구가 없단 거예요?

[파티] westone : 네

[파티] 블랙 : ㅅㅂ

게임 친구라고 해 봤자 밍채, 레아, 서쪽, 월월월이 전부였다. 서쪽이 장난친단 걸 알아서 주현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파티] westone : 두 명 모자라네요

[파티] 블랙 : 구하고 가요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저도 일반 레이드는 사람 다 모아서 가요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악마 레이드와 달리 일반 레이드는 탱커가 보스의 어그로를 가져가기 때문에 인원이 부족하면 클리어 시간이 늦어지고 모든 건 주현의 손해로 이어졌다.

[길드] westone : 메아부터 아그나까지 가실 분~

[길드] 월월월 : ;;;;

[길드] westone : 안 갈거면서 희망 고문하지 마세요 ㅡㅡ

[길드] 월월월 : 블랙님 도망가세염;;;;

[길드] 블랙 : ㅅㅂ 저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STEM] 레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레아는 조금 전까지 잠수였는지, 나타나자마자 서쪽에게 납치를 당했다.

[파티] 레아 : 아그나까지 오늘 안에 잡을 수 있는 거 맞아요...?

[파티] westone : 당연하죠

[파티] westone : 조합도 지금 완벽하다구요

[파티] westone : 블랙님이 맞고 계시면 저희가 후딱 잡으면 돼요

[파티] 블랙 : ㅅㅂ 제 의견은요

주현은 성기사로 탱커였고, 힐러는 연금술사인 잔혹동화가 있었다. 일반 레이드에서는 딱히 직업이나 포지션을 가리진 않지만, 조합이 좋을 땐 다른 파티보다 훨씬 빠르게 게임을 끝낼 수 있었다. 서쪽처럼 고스펙일 경우엔 조합 상관없이 맞아 가면서 딜로 찍어 누르는 일도 있었다.

[길드] westone : 마지막 한 분 구해요 ^^

[길드] 신사 : 저 초대

신사의 등장에 당황한 서쪽이 파티 채팅으로 은밀히 물었다.

[파티] westone : 잠수인 척할까요?

[파티] 레아 : 헛...

[SYSTEM] 신사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블랙 : ㅅㅂ

엔터를 누른 주현은 볼 안쪽 살을 짓씹었다. 타이밍이 엇갈려 버렸다. 서쪽이 바로 초대할 줄 모르고 친 채팅이었는데, 신사의 뒷담화를 한 것처럼 상황이 그려졌다.

[귓속말] westone : 죄송..

[귓속말] westone에게 : 아뇨 뭐

신사가 길드원에게 욕을 한 적은 없지만, 욕만 안 했지 말하는 수위는 비슷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밍채에게 괜한 트집을 잡은 적도 많았고, 그때 못했던 말을 지금 갚아 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파티] 신사 : 저 담배좀요

[파티] westone : 그럼 저도 담타

[귓속말] westone에게 : 담배 피우세요?

[귓속말] westone : 아뇨 ㅋㅋ 걍 따라해봤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의아해서 묻자 예상대로였다. 담배 피우겠다고 파티원을 기다리게 하는 신사가 고까웠는지 서쪽이 허세를 부린 거였다.

[파티] 신사 : 왔음

[파티] westone : 메아부터 방 만들게요

얼마 후 신사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고 서쪽이 대기실을 만들었다. 대기실에 입장한 주현은 제 캐릭터 옆에서 나타나는 신사를 힐끔 훔쳐봤다. 신사와 주현은 같은 성기사였다. 장비 차이가 확연하니 신사가 가르쳐 줬던 것처럼 ‘함성’ 스킬을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파티] 신사 : 블랙님

[파티] 블랙 : 네

전투 상황을 대충 예상하던 중, 별안간 신사가 주현을 불렀다. 친구 삭제를 당한 후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였다.

[파티] 신사 : 블랙님이 함성 쓰세요

[파티] 블랙 : ?

[파티] westone : ?

[파티] 신사 : 저 빡딜[10] 넣을거라 ㅋㅋ

‘함성’ 스킬을 사용하면 몬스터 어그로를 강제로 빼앗아 오게 되니 플레이가 피곤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성기사가 원래 해야 할 일이었고, 성기사 캐릭터를 키우는 이유였다. 일반 공격보다 반격 대미지가 더 센 걸 모두가 아는데, 신사는 날로 먹겠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있었다.

[귓속말] westone : 저 아저씨는 컨에 자신도 없으면서

[귓속말] westone : 뭔 성기사를 하겠다는 건지

신사의 뻔뻔함에 서쪽이 불평했다. 컨트롤에 자신 없는 건 주현이 더했으니 안타깝게도 서쪽의 말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실력 좀 모자라더라도 성기사가 하고 싶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구태여 서쪽의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서쪽도 다른 성기사 유저들이 잘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고, 신사가 한 말이라서 괜히 비꼬는 것일 뿐이었다.

[귓속말] 잔혹동화 : 블랙님 제가 집중케어 해드릴게요

[귓속말] 잔혹동화에게 : 감사합니다

안 맞으면 힐러의 보살핌도 필요 없을 테지만 그럴 자신이 없는 주현은 냉큼 수락했다. 질리도록 본 장난감 성에 파티원과 함께 입장한 주현은 사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함성’ 스킬을 사용했다.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는 스킬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메아에게 달려가 검을 휘두르는 신사의 모습이 평소보다 치졸해 보였다.

자랑하고 으스대는 걸 좋아하는 신사가 보스의 어그로를 가져가기 싫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간혹 레이드를 뛰다 보면 공격 방향과 스킬 사용이 이상한 유저들을 볼 수 있는데, 듀얼 모니터를 사용해 한쪽으론 영상을 틀어 놓고 딴짓을 하는 거였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만 상황이 나쁘면 사사게행이었다.

영상을 보면서 게임을 하면 집중력이 떨어져 모든 공격을 받아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 어그로를 떠넘기는 이유로 적합했다. 랜덤 매칭에서 의심되는 유저를 몇 번 만나긴 했지만, 길드 마스터가 그러는 건 처음 봤다.

[귓속말] westone : 아 ㅡㅡ

[귓속말] westone : 저 아저씨 너튭딜하네요

눈치 빠른 서쪽은 금세 알아챘다. 열심히 딜 한다던 신사는 설렁설렁 스킬을 섞어 가며 메아에게 검날을 날렸다. 어그로는 몽땅 주현이 가져간 터라 다른 파티원은 공격만 퍼부으면 되는 간단한 상황이었지만 신사는 그마저도 불성실했다.

* * *

메아에서 아그나까지 3시간이 조금 넘었다.

[파티] 레아 : 수고하셨어요!!!

[파티] westone : 수고하셨어요~

[파티] 신사 : 수고했어요

[파티] 잔혹동화 : 빨리 끝났네요

[파티] 블랙 : 고생하셨습니다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그 3시간 동안 주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게임은 즐거워지려고 하는 건데 이렇게 고통받는 게 맞는가 싶었다. 대기실에서 ‘함성’ 스킬을 누가 쓸지 조율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문제는 아무 말도 없었다는 거였다.

길드 파티는 스펙을 따지지 않고 파티원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에 분위기가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파티 분위기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살얼음판이었다. 워낙에 스펙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서 보통의 파티보다 빨리 끝난 건 좋았다. 클리어 시간까지 느렸다면 정말 누구 하나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파티가 파하고 뒤늦게 한숨을 몰아쉬는데 서쪽에게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악마 레이드 남은 거 있으면 제 부캐랑 같이 도실래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잠시ㅏ만요 저 전화 와서

[귓속말] westone : 네~

이번 주 남은 악마 레이드가 뭐가 있었나 머리를 굴리던 차에 경찬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쪽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휴대폰 스피커에서 밀려 나왔다. 보나 마나 또 술을 퍼마시고 있을 게 분명했다.

“왜?”

- 바쁘냐아?

“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바쁘다고 하면 경찬이 나오라고 재촉할 게 뻔했다.

경찬은 본래 취했을 때 평소보다 기분이 들뜨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처럼 말이 조금씩 늘어지는 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 너 또 게임 하지?

“아니?”

조금 뜨끔했지만, 주현은 평온한 어조로 반박했다. 어차피 휴대폰 너머의 경찬은 주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 나와라. 여기가 어디냐면…….

경찬은 느릿느릿하게 익숙한 술집 간판의 이름을 읊었다.

“나 어제 회식했어.”

이틀 연속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뿐더러, 경찬은 한 번 술이 들어가면 날이 새도록 퍼붓듯 마셔서 집 가는 걸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니까 벌써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 야아. 너 부른다고 했단 말이야.

“너 누구랑 마시는데?”

- 나?

친구가 하도 많은 녀석이라 누구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 예상이 안 갔다. 답을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의 소음에 묻혀서 경찬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 너 올 때까지 기다린다아?

“안 간다니까.”

- 너 그 싸가지 없는 새끼랑 게임 하지?

“게임 안 한다니까?”

게임을 하고 있던 건 맞지만, 경찬이 그토록 예의 바르다고 칭찬하던 서쪽과 함께였다. 그리고 밍채는 싸가지 없는 새끼가 아니었다. 반박할 거리는 많았으나 또 그 새끼 편을 드는 거냐고 성을 낼 경찬의 모습이 그려져 관뒀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 약속 잡혀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야, 너 타자 소리 들린다?

“……너 만나러 가야 해서 나가겠다고 말하는 중이잖아.”

- 쏘리. 얼른 와라.

[귓속말] westone : 그럼 내일 같이 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그렇게 경찬의 통화가 끊기고, 서쪽과의 귓속말도 마무리를 지었다. 주현은 다시 캐릭터를 밍채 옆으로 옮겨 두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저녁에는 밍채와 랭크전을 할 생각이었는데, 저녁에 보자는 약속은 아무래도 지키지 못할 듯했다.

* * *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떠들썩한 소음이 주현을 반겼다. 눈동자를 굴려 어수선한 가게 안을 재빠르게 살폈다. 불그스름한 조명 탓에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차에 꾸벅꾸벅 조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술자리가 있다 하면 경찬은 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졸음과 싸우고 있는 저 남자가 설마 경찬일까 싶었지만, 입은 옷도 그렇고 덩치도 경찬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긴가민가한 상태로 다가가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흐릿하던 이목구비가 선명해졌다.

“야. 너 얼마나 마신 거냐?”

주현은 경찬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자마자 술 마시라고 잔이라도 내어 줄까 겁났는데 경찬의 꼴을 보니 걱정이 싹 사라졌다. 앓으면서 겨우 말을 뱉는 모습이 황당했다. 통화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새 정신이 날아가 버렸다. 아무리 마셔도 집까지 무사히 걸어가던 놈이 처음으로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테이블에는 소주로만 여덟 병이 놓여 있었다. 졸업할 생각이 있느냐고 경찬에게 묻고 싶었다. 맞은편에 잔이 하나 더 놓여 있는 걸 보아선 상대방이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어지간히 독한 놈이었다.

주현은 빈 잔의 주인을 상상하며 고민에 빠졌다. 경찬이야 택시에 대충 밀어 넣고 집으로 보내면 되지만, 정체를 모를 상대방이 문제였다. 취한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가기엔 양심이 아팠고, 그렇다고 챙겨 주기엔 주현은 낯을 가릴뿐더러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선배.”

나직한 목소리가 잡음을 가르고 들어왔다. 주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주현이 놀란 건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 경찬의 술 상대가 임채하라는 점. 두 번째, 상대가 너무나 멀쩡한 상태라는 것. 취기에서 벗어나려고 세수라도 했는지 얼굴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옷은 여전히 꾸밈에 간절함이 없는 검은 후드티였다. 그렇게 입었어도 채하는 가게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다.

평소보다 조금 붉은 얼굴의 채하와 눈이 마주친 주현은 억울해졌다.

경찬과는 잘도 술을 퍼마시면서, 밥 먹자고 말 꺼냈다가 대차게 까였던 자신의 과거는 뭐였을까. 둘 다 다른 과에, 조별 과제로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거절당한 사람은 주현 하나였다.

“얘 데려간다.”

주현은 통보하듯 말하고 경찬에게 다가갔다. 취한 놈 뭐가 예쁘다고 챙겨 주는지 모르겠지만,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찬의 팔을 제 목에 두르고 일으키려는 때, 하얀 손이 경찬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제가 할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임채하는 경찬에게만 관대했다. 경찬이 채하를 예뻐하던 건 특유의 친화력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둘이서 술을 마실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주현은 과거 채하에게 거절을 당했던 게, 경찬보다 친밀한 사이가 아니어서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날의 일은 채하가 무례하게 반응했던 것도 있지만, 자신이 성급하게 다가갔단 불찰도 있었다.

‘친한 줄 알았는데.’

그날의 일을 몇 번이고 곱씹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확인을 받으니 섭섭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선배님 어디 사는지 아세요?”

“…….”

“선배.”

“아, 어. 택시 내가 부를게.”

경찬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온 채하의 뒤를 멍하니 쫓던 주현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휴대폰을 꺼내 경찬의 자취방 주소를 입력하고 택시를 불렀다. 넋 놓고 있었다는 걸 들킨 게 부끄러워서, 고작 택시 연락 하나로 부산스럽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선배, 안녕하세요.”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도, 경찬을 데리고 서둘러 가게를 벗어나려 했던 것도, 내내 휴대폰에 시야가 붙박여 있던 것도 오로지 채하를 피하기 위해서였건만. 채하는 주현의 노력을 사뿐히 짓밟고 눈을 휘게 접으며 말을 붙였다. 뒤늦은 인사에 주현은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어요?”

톡으로 그렇게 괴롭혀 놓고 잘 지냈느냐고 묻고 싶을까. 주현은 채하의 두꺼운 낯짝을 흘겨본 후 가까이 다가오는 택시로 눈을 돌렸다.

“택시 온다.”

경찬을 택시에 집어넣으면 주현이 할 일은 끝이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한가하게 채하와 안부 인사 따위를 묻고 싶지 않았다. 경찬과의 약속이 취소된 덕에 집으로 돌아가 밍채와 랭크전을 할 예정이었다. 경찬과의 술 약속에도 쓰기 아까운 시간인데, 그걸 채하에게 허비할 순 없었다.

“잘 부탁드려요.”

채하는 축 늘어진 경찬을 가뿐히 들어 옮겨 택시 뒷자리에 밀어 넣었다. 도와주려고 팔을 뻗었던 주현은 민망하게 주먹을 쥐며 손을 거둬들였다. 뒷문이 탁 소리 나며 닫히고 택시가 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얘도 택시 태워서 보내야 하나?’

꼿꼿하게 뻗은 등을 보면 멀쩡한 듯했다. 예고 없이 채하가 고개를 돌린 탓에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당황한 주현은 얼굴을 획 돌려 눈을 피해 버렸다. 훔쳐본 건 아니었으나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나 간다.”

대충 말을 내뱉고서 주현은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선배,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감정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울리고 주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조금 억울해 보이는 얼굴의 채하가 있었다. 늘 비웃음을 그리던 입술이 꾹 다물려 울상을 만들어 냈다.

채하가 뱉은 말은 오히려 주현이 묻고 싶은 것이었다. 경찬과는 기꺼이 술친구가 되었으면서, 그땐 왜 그리 쌀쌀맞게 군 것이냐고 추궁하고 싶었다.

“몰라서 물어?”

구구절절 따지고 싶은 말들이 한가득하였지만 길 한가운데서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참아 냈다. 채하보다 게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밍채가 우선순위이기도 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잘못했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채하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목에 힘을 주었는지 내뱉는 말들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선배가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다 싫다고 하면서.”

주현이 좋아하는 것은 혼돈의 설화였고, 잘하는 것은 그간 채하가 물었던 전공 관련 질문이었다. 그토록 궁금해했던 채하의 꿍꿍이를 밝혀 내는 순간이었지만 주현은 후련하지 않았다. 채하의 속내는 주현이 예상하던 것과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배랑 친해질 수 있는데요.”

음습할 줄 알던 속마음은 순수했다. 주현은 순간 풀어질 뻔했던 경계를 다시 갖췄다. 지금 와서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먼저 선을 그은 건 채하가 아니었나.

“넌 네가 했던 말 다 기억하긴 해?”

주현은 우물쭈물하는 채하를 두고 다시 등을 돌렸다. 똑같이 걷어차 주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바닥을 쳤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괜한 화만 낸 건 아닌가 싶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를 식히던 중, 팔이 붙잡히고 몸이 돌아갔다.

짜증을 내며 뿌리치려던 때였다.

“선배가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주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옆 도로에선 자동차 하나가 소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 소리에 맞춰서 주현의 가슴도 쿵 내려앉았다. 사고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채하가 말을 뱉었을 때 제 표정이 어땠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마주 보고 있던 채하가 아니고서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동자가 흔들렸을까, 목울대가 움직였을까. 걱정이 이어졌으나 채하는 주현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저 볼 때 시선도 그렇고…….”

그건 주현도 억울했다. 살면서 채하처럼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는데 넋 놓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데도 매번 가져갔잖아요.”

못 마시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줬다는 말이었다. 채하가 내뱉는 진실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렇게 무시를 당한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임채하를 좋아했다.

“네가 착각한 거야.”

부정하기엔 이미 늦었지만, 주현은 턱을 들어 채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시절, 임채하를 좋아하던 게 맞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을 얕봤다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이미 지나간 과거더라도 채하에게 지기 싫었다.

“네. 제가 오해했어요.”

“…….”

“죄송해요. 선배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텐데.”

아니라고 뻗댈 줄 알았던 임채하는 순순히 제 잘못을 수긍했다. 그에 주현은 또다시 멍청한 얼굴을 내보여야 했다. 주현은 채하가 생각하는 불순한 의도가 맞았고, 창피하게도 속마음까지 읽혔었다.

“지금까지 오해하면서 잘 지내 놓고 갑자기 왜?”

울컥한 주현이 뱉는 말은 매끄럽지 않았다. 상처를 준 건 본인이면서 채하는 상처 받은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너를 좋아했어도 그런 식으로 거절하는 건 아니지.”

“……반성하고 있어요.”

풀 죽은 상태로 대답하는 걸 보니까 또 마음이 약해졌다. 하긴 얼굴이 저렇게 생겼으면 그동안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많았을 것 같았다. 주현이 호시탐탐 고백할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남자 둘이 길 한복판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이상한지 지나가던 행인들이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정도 대화했으면 오해도 풀릴 만큼 풀렸을 테다. 밍채가 기다리고 있을 걸 상기하니, 마음이 조급해진 주현은 다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난 간다.”

“선배.”

밍채는 새벽까지 게임을 하지 않는 탓에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채하가 또 팔을 붙잡은 탓에 주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현은 붙들린 팔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채하와 같은 검은 후드티를 입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나 했더니만.

채하는 시시각각 변하는 주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이스크림 사 드릴까요?”

“뭐?”

느닷없는 아이스크림 타령에 주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데도 채하는 팔만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주현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채하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초콜릿 맛으로 사 드릴게요.”

* * *

사 준다고 따라가서 얻어먹은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주현은 콘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빙빙 돌려 뜯어내며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이스크림마저 거절했다면 대화가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밍채는 아직도 밖인지 돗자리 위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마우스를 돌려가며 밍채를 훑어보다가 주현은 캐릭터를 일으켰다.

[귓속말] 밍채 : 형

밍채의 캐릭터도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그에 놀란 주현은 명치 부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귓속말] 밍채 : 저 할 말 있어요

보통 이렇게 예고하고 뱉는 말은 좋은 주제가 아니었다. 설마 새로운 게임 친구가 생겼다거나 게임을 접는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주현은 불안에 떨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캐릭터의 곱상한 얼굴이 유난히 진지해 보였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왔어요?

[전체] 블랙 : 네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어서, 남은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불편했다. 움직이는 주현의 캐릭터를 발견하고 서쪽이 다가온 터라 대화 상대가 둘이 되었다.

[전체] westone : 악마 레이드 가실래요?

[전체] westone : 되게 빨리 오셨네요

[전체] 블랙 : 이상한애 만나서요

[전체] westone : 이상한 애?

[전체] 블랙 : 예전에는 친했는데

[전체] westone : 아아 ㅋㅋㅋㅋ 불편하셨겠네요

채팅을 한 손으로 처리하느라 굼뜬 속도가 답답할 만도 한데 서쪽은 인내심 있게 말을 기다렸다.

[전체] westone : 그럼 악마 갈까요?

[전체] 블랙 : 잠시만요 밍채 물어볼게요

주현은 다 먹고 껍데기만 남은 쓰레기를 잠시 책상에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두 손을 키보드에 얹었다. 비장하게 운을 떼던 밍채는 금세 사라져 버렸는지 아직도 말이 없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할 말 있다며 뭔데?

잠시 자리를 비웠나 싶었는데 답은 곧장 돌아왔다.

[귓속말] 밍채 : 아니에요

[귓속말] 밍채 : 악마 저도 갈래요

왠지 시무룩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주현은 제 착각이라 여기고 서쪽에게 말을 전했다.

[전체] 블랙 : 밍채 간대요

* * *

[임채하] 선배

키보드 앞 빈 공간에 내려 뒀던 휴대폰 화면이 번뜩였다.

[임채하] 잘 들어가셨어요?

늦은 시간 헤어졌으면 얼마든지 상대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걸 임채하가 한다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주현은 그냥 무시할까 싶다가도 그건 너무 매정한 것 같아 팔을 뻗어 휴대폰을 쥐고 답을 썼다.

[윤주현] 어

[윤주현] 넌?

[임채하] 저도 집이에요

주현은 컴퓨터 모니터와 번갈아 바라보다가 휴대폰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어차피 게임은 루시퍼를 처치하고 엔딩 컷신에 돌입하고 있었다.

[임채하] 그간 저 도와주셨던 거 보답으로 밥 사드리고 싶은데

[윤주현] ㄴㄴ 괜찮아

“밥 먹다가 체할 일이 있나.”

이제 임채하와 단둘이 시간을 가지는 건 사절이었다. 그날은 원만하게 속여 넘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더 얘기를 나눴다가는 좋아한 게 맞았다는 사실이 탄로가 날지도 모른다. 주현은 채하가 오해한 것으로 두고 싶었다.

[임채하]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바로 위에 괜찮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걸까. 영 제멋대로인 건 여전했다. 거절하고 넘어가면 또 무슨 일로 귀찮게 할지 모르니 주현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휴일 중 하루를 채하에게 반납했다. 밥 한 끼 하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임채하가 먼저 제안하는 날이 오다니.

휘둘리는 자신도 웃기지만 싫어한단 걸 뻔히 알면서도 다가오는 임채하도 참 특이한 녀석이었다.

* * *

[귓속말] eastone : 밍채님 말이 없네요

[귓속말] eastone : 혼내셨어요?

[귓속말] eastone에게 : 제가 왜요?

[귓속말] eastone : ㅋㅋㅋㅋㅋㅋ

[귓속말] eastone : 원래도 말 많으신 편은 아니긴 한데

본캐 악마 레이드를 끝낸 서쪽은 부캐에 접속 중이었다. 주현은 어제와 오늘 루시퍼, 마몬, 레비아탄, 사탄을 차례차례 클리어했다. 죽어 있던 땅이 되살아나는 사탄의 엔딩 컷신이 진행되는 동안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서쪽이 귓속말을 걸어왔다.

서쪽의 말대로 밍채의 말수가 줄었다. 서쪽처럼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면서 게임을 하는 타입이 아니긴 했지만, 귓속말도 거의 끊기다시피 하니까 밍채가 게임 중인 건지, 친구가 대신 하는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물론 게임 실력은 밍채의 것이 맞았다.

평소보다 힐이 과하게 잘 들어온다는 게 유일한 변화였다.

[SYSTEM] eastone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eastone : 잡템 파티 시작

[SYSTEM] 밍채님이 [어둠의 힘]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eastone : 밍채님 ㅊㅊㅊ

[SYSTEM] 월월월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사멍꾼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채예스의수호자 : 헐 개부럽다

[SYSTEM] 채예스의수호자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귓속말] eastone : 진짜 장성한 아들 아니에요?

[귓속말] eastone에게 : 맞는 것 같네요

[어둠의 힘]은 무기, 방어구, 액세서리 제작에 사용되는 공통 재료로 다른 재료보단 값이 싸고 얻을 확률이 높았지만 매일 잡템 가져가는 처지에선 그것도 부러웠다. 밍채는 확실히 다른 유저보다 쉽게 아이템을 얻어 갔다. 랭킹 높다고 아이템 획득 확률이 높아지는 건 아닐 테고, 피시방에서 게임이라도 하는가 싶었다. 피시방은 버프를 받아서 행운이 높아진다.

[파티] eastone : 다들 고생하셨어요~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길드] 사멍꾼 : 헉

[길드] 사멍꾼 : 밍채님이 골드 주셨어요

[길드] 월월월 : 아이템 드시면 늘 나눠주시더라구염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와 ㄷㄷ

파티가 깨지고 광장으로 나온 주현은 마우스를 돌려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같은 채널에 있었으니 당연히 옆에서 나타나야 할 밍채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의아해하며 친구 창을 열자 커플의 권한으로 밍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밍채는 상가에 있었다. 밍채가 상가에 갈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둠의 힘] 시세를 확인하여 거래소에 판매하는 것. 다음 레이드에서 나머지 반지 한 짝이 출시되면 [어둠의 힘]이 필요할 테니 인벤토리에 보관할 줄 알았는데, 이미 여분을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주현은 밍채가 돌아올 때까지 캐릭터를 광장 외곽에 마련된 벤치에 앉혀 두었다.

[SYSTEM] 길드원 eastone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westone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다음 악마는 방학에 나오겠죠?

[길드] 월월월 : 넴

[길드] westone : 얼른 종강이나 했으면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신캐 또 나올까용?

[길드] 월월월 : 안 나올것 같은데염

[길드] westone : 수호자 때 유입 많아서 겨울은 패스할것 같아요

혼돈의 설화는 동시 접속자가 줄어들면 위기감을 느끼고 신직업을 출시하는데, 지난 여름 방학에 나왔던 수호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고 그 덕에 많은 신규, 복귀 유저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이후 랭크전 2시즌이 열리면서 한 번의 유저 탈주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추이가 나쁘지 않아서 당분간 새로운 직업 출시는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귓속말] 밍채 : 형

신직업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떠드는 길드 채팅 사이로 밍채의 귓속말이 빼꼼 존재감을 드러냈다. 접속 때 악마 레이드 갈 거냐고 물었던 것 외 처음 하는 대화였다.

[귓속말] 밍채에게 : 왜?

밍채에게 묻고 나서야 불이 들어온 우편함을 발견했다. 팔 줄 알았던 [어둠의 힘]이 [어둠이 깃든 투구]로 바뀌어 주현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느닷없는 선물이라 당황스러운 감정이 컸다. 무기를 받았을 땐 무기가 터져서 없던 상황이었고, 아바타를 받았을 땐 몇 번씩이나 합성해서 얻으려 노력했던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투구는 갖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간절하지도 않은 아이템이었다.

‘설마 게임을 접나?’

간혹 게임을 접을 때 가진 아이템과 골드를 현금으로 바꾸지 않고, 주변 친한 유저들에게 넘겨주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밍채라면 친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길드원과 주현일 테고, 오늘 얻은 [어둠의 힘]을 주현을 위해서 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투구에도 치명타 옵션을 붙여서 준 게 마음에 걸렸다. 아이템을 정리하는 것치고 무척 정성스러웠다. 이번에도 강화는 주현의 몫이 될 테지만, 그렇다고 넙죽 받기엔 부담스러운 선물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갑자기?

[귓속말] 밍채 : 다음 레이드 가려면 형 방어구 바꿔야해요

그런 이유였다면 주현 스스로 바꾸라고 설득했어야지, 장비를 선물해서는 안 됐다. 설마 장비를 안 바꾸고 게임을 접을 거로 생각한 걸까. 레이드 입장이 안 되면 장비를 바꾸는 대신에 아예 게임을 접어 버리는 유저들이 있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나 일단 나가봐야 해서

[귓속말] 밍채에게 : 투구는 고맙고

[귓속말] 밍채에게 : 나중에 얘기하자

[귓속말] 밍채 : 네

채하와 밥 먹는 날을 언제로 할까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여 오늘로 잡았다. 어제 만났는데 오늘도 얼굴을 봐야 한다니. 얼마 남지 않은 휴일이 아까웠지만, 채하와의 관계도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정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굳이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진 않았으나 채하가 워낙 강경하게 만나고 싶어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주현은 아른거리는 투구와 밍채를 뒤로하고 집을 빠져나왔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동안 지난밤 채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오해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하던 임채하. 어떻게 오해가 풀렸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유만으로 친해지고 싶다며 다가오는 것도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귀결되려면 오해를 풀어 준 사람은 주현이 돼야 했으나 연락을 주고받던 시점에 주현은 채하와 만났거나 대화한 기억이 없었다.

“선배.”

넋 놓고 걷던 주현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어느새 만나기로 한 역 앞에 도착했고, 먼저 온 채하가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현이 채하였다면 오해에 대해 사과는 할지언정, 양심상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을 테다.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오히려 화를 돋울 수 있었다. 오해로 사이가 멀어진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고생해서 관계를 회복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채하가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뭘까.

“안녕하세요.”

“어, 안녕.”

꾸벅 고개를 숙이는 채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훑었으나 그런다고 알아내는 건 없었다. 검은 롱코트, 검은 티셔츠, 검은 면바지, 검은 스니커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매서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자꾸만 시선을 끌었다.

눈을 돌린 주현은 채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밥은 됐고 커피나 마시자고 제안했는데, 꼭 음식 대접을 해 드리고 싶다고 채하가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돈 쓰는 건 똑같고 대접받는 건 자신인데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어느새 음식점 앞에 다다르고 채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라고?”

“네.”

주현은 채하에게 물으면서 힐끔 간판과 주변을 살펴봤다. 밝은 회색 외벽 앞에 알록달록한 화분이 놓인 파스타 전문점이었다. 채하가 뭐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가리는 거 없다고 답했으니, 당연히 채하의 선택에 따라야 하는 처지였지만 데이트 장소나 다름없는 식당에 주현은 떨떠름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간 채하가 문을 붙잡고 있던 덕분에 주현은 편하게 입장했다. 음식점 안에는 주현의 예상대로 연인들로 가득했다. 여자끼리 온 테이블도 몇몇 보였지만 남자끼리 온 건 채하와 주현밖에 없었다.

누가 추천을 한 건지, 본인이 직접 찾은 건지, 언젠가 한 번 왔던 식당인 건지. 주현은 채하가 정보를 얻은 경로가 몹시 궁금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주현은 물부터 따랐다.

“선배, 뭐 드실래요?”

“너랑 같은 거.”

“네.”

진짜로 얻어먹으려고 나온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먹을 기분도 아니었다. 채하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고 종업원에게 주문을 마쳤다. 이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주현에게 말을 건넸다.

“천천히 마시세요.”

누구 때문에 속이 타서 물을 마시는데 태평하게 말을 늘어놓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채하와 한자리에 있는 게 피곤했고 시간을 버리고 있단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채하를 만나기 전에 게임 레이드를 모두 끝내 놓아서 다행이었다.

“왜 친해지고 싶은데?”

음식 나오고 해도 되는 대화였지만 그러기엔 인내심이 못 버틸 듯했다. 그에 채하는 고민하는 기색 없이 곧장 답을 내놓았다.

“선배가 궁금해서요.”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고개 숙인 주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장소도, 던지는 말도, 앞에 놓인 사람도 허상이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투성이였다.

상대가 궁금하다는 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었다. 주현은 어쩌다가 이런 놈한테 걸리게 되었는지 지난날을 돌아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계기가 없었다. 채하의 연락은 그만큼 갑작스럽고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호감을 표했으면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 일인데, 상대를 의심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주현은 흘긋 채하를 훔쳐봤다. 늘 여유만만하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에 기분이 묘해졌다. 사람 하나 잃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 저에게 목을 매는 게 신기했다. 주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앙다문 입술이 초조하게 파들거렸다.

“왜 내가 궁금해졌는데?”

“제가 오해했으니까요.”

오해가 풀렸다고 상대가 궁금해지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주현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주변인에게 재미없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학교 다닐 때도 주현의 말에 꼬박꼬박 반응해 주는 건 남자 동기 중에는 경찬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고지식한 놈이라며 무시를 일삼았다. 어차피 몰려다니는 성격도 아니었고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아쉬운 건 없었다.

“그럼 뭐가 궁금한데?”

주현은 다시 컵을 들었다. 이어질 채하의 말을 기다리며 물을 꿀꺽 삼켰다.

“전부요.”

채하가 내놓은 답에 당황해서 손을 삐끗했다.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직전이었던 터라 물을 엎지르는 건 모면했다. 주현이 질겁한 얼굴로 입을 떼려고 할 때, 종업원이 나타나 음식을 놓기 시작했다.

“음식 나왔습니다.”

음식을 모두 진열한 종업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주현은 눈을 접시에 고정한 채 포크로 면을 돌돌 말며 고민에 빠졌다. 3년 만에 만난 후배가 갑작스럽게 게이가 되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채하에게는 너무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정말 만약에 채하가 게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주현의 앞에 나타나 불도저처럼 구는 건 망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망상에 가까운 일이 실현 중이었다. 주현은 포크에 감아 놓은 면을 입 안에 넣다가 이어지는 채하의 말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전 선배랑 알아가고 싶어요.”

“…….”

주현은 황당한 심정을 물과 함께 꾹 삼켜 냈다. 요즘 애들은 말을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하나?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구로 꽂히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주현은 속이 탔다.

“나랑 친해지고 싶고…… 알아가고 싶다고?”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채하가 했던 말을 짚어 가며 묻자 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에 성격이 꼬인 놈이니 남들이 오해할 법한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일 수도 있었다. 보통 알아가고 싶다는 말은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아니라 사귀고 싶은 상대에게 쓰지만…… 말이야 사람에 따라 쓰는 방식이 다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 뭐.”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과거의 일이 껄끄럽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을 계속 붙잡아 두는 건 주현에게도 좋지 않았다. 털 수 있다면 보내 주는 게 맞았다.

“너도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고의라고 믿었지만, 채하를 생각해서 실수로 포장해 줬다.

“일부러 그런 건 맞아요.”

나름의 화해하자는 의미였는데, 알아듣지 못한 맞은편의 상대가 굳은 얼굴로 강경하게 부정했다. 넘어가라고 준 기회를 걷어차는 채하에 주현은 정녕 친해지고 싶은 게 맞는지 채하의 의도를 또 한 번 의심해야 했다.

“전 선배랑 알아가고 싶어요.”

슬쩍 반응을 확인하는 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비웃음을 달고 살던 입꼬리가 오늘은 시무룩하게 내려가 처량해 보였다.

알아가고 싶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인 걸까. 입만 열면 거짓말을 술술 내뱉던 놈이 왜 진실만을 얘기하겠다고 결심했는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주현이 생각에 잠기자 눈치를 살피던 채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

채하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든 말든, 형 소리를 들을 일도 몇 없을 터였고 그마저도 흘려들으면 되는 일이었다.

“형.”

“…….”

“주현 형.”

“……흡.”

혼잣말하듯 심각한 얼굴로 읊조리는 채하에 주현은 씹던 음식물을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다. 골똘히 고민하느라 한 번씩 고개를 갸웃대는 얼굴이 시선을 빼앗아 갔다. 붙임성 좋은 후배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던 호칭이었지만 채하가 부르는 이름은 괜히 간질거렸다.

* * *

밥만 먹고 깔끔히 헤어졌으나 그전까지 채하가 형 타령을 해대는 탓에 아직도 형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어떻게 오해가 풀렸는지 과정을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은 정말로 채하와 알아가는 사이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음식점에서는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충 대꾸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주현은 컴퓨터 책상 앞으로 향했다. 캐릭터를 광장에 세워 두고 나갔었는데 밍채가 그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 두고 앉아 있었다. 밍채도 함께 잠수를 탄 모양이었다. 주현은 캐릭터를 움직여 밍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말이 없는 것을 보아 밍채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길드] 신사 : 지인분이 길드 들어오기로 했어요

[길드] 신사 : 인사 잘해주세요

[길드] 레아 : 네!!!

일명 좆크전이라고 불리는 랭크전 시즌은 유입이 없는 비수기였다. 그래서 길드원 변동이 없는 편이었지만 신사처럼 지인을 데려오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실제 친구인지 게임 친구인지 몰라도 망해 가는 재앙에 들어오다니 운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신입 길드원에게 관심 없는 주현은 마우스를 움직여 밍채 캐릭터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손에 쥔 마우스가 미끄러졌다.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레아 : 어서오세요!!!!

[길드] 코쿄아 : 안녕하세여 신입이에여

[길드] 월월월 : 어서오세염

[길드] 신사 : 재앙 길채는 4채널이에요

[길드] 코쿄아 : 네 ㅋㅋㅋ

‘……코쿄아?’

코쿄아는 평온에 있었다가 길드를 탈퇴한 유저였다. 놀란 주현은 눈에 힘을 주고 코쿄아의 정보 창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 코쿄아가 맞았다. 밍채와 어스름이 했던 얘기를 주현에게 알려 주었던 사람이었다.

평온을 탈퇴했으니 다른 길드에 가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돌고 돌아 재앙에서 마주치다니 게임 세상이 좁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길드] 암흑기사 : 코코아님 ㅎㅇ

[길드] 코쿄아 : 안녕하세여

[길드] 암흑기사 : 와 코코아님도 합성압타 입으셨네 부자 ㄷㄷ

[길드] 코쿄아 : ㅋㅋㅋㅋ 운 좋았어여!!!

[길드] 마우스지키미 : 결국 길드 옮기셨네요 ㅋㅋ

[길드] 코쿄아 : 신사님이 자꾸 옮기라고 해서여 ㅠㅠ

신사와 친한 유저들은 다들 코쿄아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면 밍채와 신사가 마몬에서 딜을 겨뤘던 날, 신사가 밍채를 방구석 백수 취급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신사는 평온에 지인이 있어서 밍채의 접속 시간을 전해 들었다고 했었다. 그게 코쿄아였던 것이다.

[길드] 신사 : 같은 길드면 던전 다니기 쉬우니까 ㅋㅋ

[길드] 코쿄아 : 그쳐 ㅋㅋㅋ 잘 부탁해여 (__)

[길드] 사멍꾼 : 엄청 친해보이시네요

[길드] 신사 : 제자임 ㅋㅋ

주현은 밍채의 얼굴을 훑어보던 걸 멈추고 채팅을 정독하고 있었다. 제자를 키운다는 허무맹랑하던 말이 진실이란 게 놀라웠다. 직업이 다른데 가르쳐 줄 게 있나? 신사가 부캐로 성직자를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주현이 길드에 들어온 후, 신사는 늘 성기사 위주로 캐릭터를 육성했고 부캐는 모조리 신직업이었다.

주현이 둘의 사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밍채가 깨어났다.

[귓속말] 밍채 : 형

주현은 기다렸다는 듯 밍채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귓속말] 밍채에게 : 코쿄아 남자야?

[귓속말] 밍채 : ?

코쿄아의 성별이 여자라면 이해 가지 않는 모든 점의 설명이 가능해졌다.

[귓속말] 밍채 : 그게 뭐예요

밍채는 도리어 반문했다. 같은 길드였고, 같은 직업이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밍채의 무심함에 주현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밍채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성직자는 받지 않겠다고 무안을 줬던 시시로의 닉네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왜 몰라?

[귓속말] 밍채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귓속말] 밍채에게 : 너희 길드원이었잖아

[귓속말] 밍채 : ?

[귓속말] 밍채에게 : 같이 레비아탄도 잡았는데

[귓속말] 밍채 : 저희 길드원이었다고요?

처음에 물음표를 보낸 것에서부터 정말 모르는 눈치이긴 했다. 금시초문이란 반응을 보이던 밍채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다시 등장했다.

[귓속말] 밍채 : 블베가 남자래요

본인은 기억을 못 하니 길드원의 도움을 받았다. 예상과 다르게 돌아온 답에 평온 길드원에게 성별을 속인 건가 싶었지만 이어지는 밍채의 말에 의심이 끊겼다.

[귓속말] 밍채 : 단공도 남자래요

[귓속말] 밍채 : 그건 왜요?

신사와 아무리 친해도 결국 오랜 시간 같이 지낸 건 길드원일 텐데, 성별을 다르게 알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정말로 코쿄아가 남자고, 신사는 순수하게 제자를 키울 마음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잠시나마 신사를 의심하고 변태 취급했던 게 미안해졌다.

[길드] 코쿄아 : 웨스트님

[길드] westone : ?

[길드] 코쿄아 : 저 파도 패턴 알려주시면 안돼여?

[길드] 코쿄아 : 그때 피하던거 너무 멋있으셔서여

[길드] westone : ㅇㅋ 가요

[길드] 월월월 : ;;;;;;저는 왜 초대하시는데염

[길드] westone : 초대받아놓고 튕기시네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코쿄아는 첫날부터 적응력 좋게도 길드원들에게 말을 붙여 왔다. 은근히 칭찬 섞어서 얘기하는 걸 보면 화술의 귀재였다. 저런 성격이었다면 평온에서도 잘 지냈을 텐데 밍채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신기했다. 밍채가 코쿄아의 성별을 물었을 때 단공과 블루베리가 별다른 말을 얹지 않은 걸 보면 길드를 나간 것도 본인의 의지였을 것이다.

[길드] 코쿄아 : 블랙님

이름이 불릴 줄은 몰랐던 터라 주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길드] 코쿄아 : 같이 가실래여?

[길드] westone : 블랙님 갈거예요?

[길드] 블랙 : 아뇨 저 지금 대화 중이라

[길드] westone : 데이트 중이셨구나

[길드] 블랙 : 아니..

[길드] westone : 좋은 시간 보내세요

코쿄아가 모르는 척할 줄 알았다. 코쿄아가 밍채와 어스름의 얘기를 주현에게 전한 건, 둘과는 단절하겠다는 뜻이었다. 주현은 그 말을 듣고도 밍채와 커플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건 코쿄아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 코쿄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길드] 코쿄아 : 친구는 걸어도 되져?

[길드] 블랙 : 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물으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주현은 근심 섞인 얼굴로 수락을 눌렀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인기 많으시네요

[길드] 코쿄아 : 블랙님은 저랑 비밀이 있어여 ㅋㅋㅋ

[길드] westone : 밍채님한테 일러도 되나요?

[길드] 블랙 : 아뇨

코쿄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밍채에게 말해 봤자였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 봤자 코쿄아가 대련장으로 끌려가는 일이었다.

[귓속말] 밍채 : 형

[귓속말] 밍채에게 : ㅇㅇ

때마침 밍채에게 귓속말이 도착했다. 설마 서쪽이 벌써 밍채에게 일렀나 싶었다.

[귓속말] 밍채 : 제 성별은 안 궁금해요?

[귓속말] 밍채에게 : 방금 형이라고 했잖아

[귓속말] 밍채 : 형이 저 궁금해할 때마다 이름 한 글자씩 알려줄게요

주현은 곤란한 얼굴을 내보이며 키보드 위에 얹은 손으로 툭툭 자판을 건드렸다. 밍채의 본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평온 길드원과 함께 게임을 했던 레아, 서쪽, 월월월조차도 밍채의 이름을 알 텐데 선심 쓰듯 제안하는 밍채가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웠다. 주현은 밍채의 장난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그래 뭔데?

[귓속말] 밍채 : 채예요

이름이 김민채니까 당연히 채가 들어가겠지. 너무나도 예상했던 이름이라 놀라울 건 없었다.

* * *

[임채하] 형

채하의 선톡을 한두 번 받는 게 아니었지만, ‘형’ 소리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친한 후배들에게 허용했던 형 호칭이 채하의 것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이서 술자리를 가질 정도로 친밀한 경찬조차도 채하에게 선배님이라 불렸다. 형은 주현만의 특권이었다.

[임채하] 아이디 왜 블랙이에요?

경찬에게도 한 번 물었던 것이었다. 그때 경찬이 헛소리를 해대는 탓에 오해하고 있었을 테다. 이건 기회였다.

[윤주현] 이름 한자가 검을 현이라서

[임채하] 형 이름 예뻐요

[윤주현] 고마워

훅 들어오는 채하에 잠시 당황한 주현은 고심하다가 답을 보냈다. 대화를 마친 후에도 멋쩍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채하는 알아가고 싶다는 제 말을 지키듯 지금처럼 질문을 던지는 날이 늘었다. 이전까지는 주현이 가진 정보에 관한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주현이란 사람에 대해 물어왔다. 주현은 휴대폰을 내려 두고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돈의 설화는 할로윈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할로윈 아바타도 함께 출시했는데 기존 인간형 몬스터의 복장을 공포 버전으로 만들어 인기가 좋았다. 주현도 상자를 까던 중에 채하에게 답을 보냈던 터라, 마저 마우스 클릭을 이어갔다.

[SYSTEM] westone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이로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아!!!!!!!!!!!!!!

[길드] 신사 : 까비

한쪽에서 아바타 상자를 까던 서쪽은 여자 캐릭터용 옷을 뽑고 분노했다. 남자 캐릭터만 키우는 서쪽에게는 필요 없는 아바타였다. 뽑은 아바타를 거래소에다가 판매한 후 번 돈으로 남자 캐릭터 아바타를 사면 되는 일이었지만, 인벤토리에 묵히면 아바타 가격이 오르니 고민이 될 법했다.

뒤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며 신사가 이로 아바타를 획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SYSTEM] 신사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이로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신사 : ㅋㅋ 이로 물량 많이 풀었네

[길드] 코쿄아 : 신사님 이로 팔거예여?

[길드] 신사 : ㅇㅇ 살거?

[길드] 코쿄아 : 넹

주현의 인벤토리에는 아바타 교환 쿠폰만 쌓여 가는데 길드원들은 뭐 그리 운이 좋은지 연달아 아바타 획득 알림이 떠올랐다. 동의 없이 아이템 획득이 공개되는 시스템 탓에 주현은 혼자 아바타를 못 얻고 있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숨을 푹 쉬며 다시 10개 단위로 상자를 열었다.

까만 네모 칸 10개가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7번째 칸이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주현은 숨을 멈추고 마우스를 꽉 붙들었다.

[SYSTEM] 블랙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태키스 세트 (남)]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ㅊㅊㅊㅊㅊ

[길드] 암흑기사 : 개부럽다

[길드] 월월월 : 축하드려염

감격한 얼굴로 스크린 샷을 연타했다. 최근에는 쿠폰을 모아서 아바타를 얻는 게 일상이었는데 예고 없이 행운이 찾아왔다. 길드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이로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태키스 세트 (남)]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이로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설린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뭐야?”

와르르 연속해서 올라오는 획득 알림에 주현의 입이 벌어졌다. 옆에 얌전히 앉아 있길래 구경하는 줄 알았더니만 따라서 아바타 상자를 열고 있던 것이다. 밍채의 아바타 획득에 떠들썩하던 길드 채팅이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확성기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westone : 와... 대박이네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서쪽이었다. 멈췄던 길드 채팅과 확성기도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확성기] 라스 : 성한아 겜 꺼라

[확성기] 아가성기사 : 장성한 조카네

[길드] 레아 : 허얼........

[길드] 마우스지키미 : 현타오네 ㅆ.ㅂ

[길드] 잔혹동화 : 저건 어떤 기분일까요

[길드] westone : 블랙님 얼른 가서 하나 달라고 해보세요

[길드] 블랙 : 여캐압을요?

[길드] westone : 아 그러네 ㅋㅋㅋㅋㅋㅋ

뺏을 마음도 없지만, 밍채가 뽑은 남자 캐릭터 아바타는 주현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여자 캐릭터 아바타라 밍채도 입을 수 없어서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며 서 있던 서쪽이 다가와 밍채에게 물었다.

[전체] westone : 밍채님 잘 뽑는 팁 있나요?

[전체] 밍채 : 많이 사세요

[전체] westone : 저 정도는 되어야 랭킹 1위를 하나보네요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블랙 : 몇 개 샀는데?

[전체] 밍채 : 1000개요

[전체] 블랙 : 뽑을만했네..

룩에는 관심이 없어 보여서 아바타 상자를 안 사는 줄 알았으나 주현의 10배씩 구매하고 있었다. 주현은 혀를 내두르며 밍채의 재력을 실감했다. 얜 돈이 어디서 나는 거지 싶다가도 학원을 다양하게 다니는 걸 보면 집이 어지간히 잘 사는 듯했다. 학원 다니느라 게임을 할 시간은 없어도 돈을 자유롭게 쓰는 밍채가 내심 부러웠다. 주현이 어릴 땐 부모님 눈치를 보면서 몰래 문화상품권으로 캐시를 충전하곤 했었다.

또 밍채처럼 장비 세팅이 끝난 고스펙 유저들은 게임에서 번 골드를 유저들에게 판매하고, 그 돈으로 아바타 상자를 구매하면 되는 구조였다.

[SYSTEM] blueberry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설린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태키스 세트 (남)]를 획득하셨습니다.

[전체] 레아 : 밍채님은 아바타 왜 까시는거예요?!

[전체] 블랙 : 리워드 받으려고 아닐까요

[전체] 블랙 : 아바타는 팔아서 골드로 바꾸면 되고

[전체] 밍채 : 네

밍채가 남은 아바타 상자를 까는 동안 주현은 조금 전 얻었던 [공포의 태키스 세트 (남)]으로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밍채도 덩달아 태키스 세트로 복장을 바꿨다. 태키스는 마족과 맞서 싸우는 기사단장이었지만, 마족에게 패배하고 육체를 빼앗기게 되었다. 태키스는 휘날리는 망토가 특징인데 공포 버전이라 그런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캐릭터를 둘러보며 어떻게 염색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서쪽이 말을 걸어왔다.

[전체] westone : 저 할로윈 이벤트 하러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

사탕을 모으려면 일반 던전을 돌아야 했고, 같이 돌면 잡몹 처리가 빠르니 일거양득이었다. 주현은 대답하려다가 아직 상자를 까는 중인지 말이 없는 밍채를 힐끔 쳐다봤다.

[전체] 블랙 : 상자 얼마나 남았어?

[전체] 밍채 : 이게 마지막이에요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설린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으스스 할로윈 아바타 상자]에서 [공포의 이로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전체] westone : ..?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결혼식 했는데 남편이 장성한이면 어떡하실 거예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귓속말] westone : 제 강화 확률 좀 올려달라고 해주세요

밍채는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아바타를 쓸어 가면서 상자깡을 마무리했다. 괜히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만 부러워서 배 아파진 상황이었다.

[전체] westone : 그럼 두분 가시는거죠?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전체] westone : 레아님 가실래요?

[전체] 레아 : 헉 넹

[SYSTEM] 레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레아까지 포함하면 총 4명이었다. 일반 던전 최대 입장 인원이 다섯이었으니 한 자리가 남은 셈이었다. 서쪽은 늘 그렇듯 월월월부터 찾아 나섰다.

[길드] westone : 월월님 뭐하세요?

[길드] 월월월 : 바빠염

[길드] westone : ;

[길드] 월월월 : 진짜로 던전 돌고 있는데염ㅠㅠ

[길드] westone : 사탕 모으러 가실 분?

[길드] 코쿄아 : 저여

[SYSTEM] 코쿄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하필이면 손을 든 사람이 코쿄아였다. 코쿄아와 밍채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서쪽은 냉큼 초대를 보냈고 코쿄아가 파티에 입장했다. 주현이야 조금 어색한 정도였지만 밍채는 얘기가 달랐다. 한때 같은 길드원이었던 밍채를 딱 한 번 본 주현에게 팔아넘길 정도면 둘은 원수에 가까운 사이였다.

파티에 밍채가 있다는 걸 모르는 코쿄아가 손을 들었고, 둘은 무방비한 상태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파티] 코쿄아 : 밍채님 계시네여?

[파티] 코쿄아 : 안녕하세여

[파티] 밍채 : 안녕하세요

[귓속말] 밍채에게 : 누군지 모른다며

[귓속말] 밍채 : 네 몰라요

[귓속말] 밍채 : 형 길드원이니까 인사한 건데

코쿄아가 평온 길드원이었든 말든 관심 없고 이제는 재앙의 길드원이니 그것에 맞게 대우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둘이 싸울까 봐 불안에 떨었던 마음이 도리어 의아해졌다.

[파티] westone : 출발할게요?

서쪽이 대기실에 입장한 파티원들에게 동의를 구하던 때였다. 신사가 뒤늦게 나타났다.

[길드] 신사 : 자리 남음?

[길드] 레아 : 다 찼어요!!!

[길드] 신사 : ㄲㅂ

그래도 파티 분위기를 망치는 신사보단 사교성 좋은 코쿄아가 나았다. 밍채가 코쿄아를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주현도 상관없었다.

서쪽이 택한 맵은 <밀려오는 해변>이었다. 속박 스킬이 있는 성직자가 둘이나 있으니 <망각의 숲>을 추천하고 싶었지만, 월월월에게 폐를 끼쳤던 일이 떠올라 주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파티] westone : 아

[파티] 레아 : 왜여?

[파티] westone : 블랙님 망숲에서 월월님 멕였다면서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밍채 : ?

그때의 일이 억울했는지 월월월이 서쪽에게 말했던 모양이었다.

[파티] westone : 속박도 있는데 망숲 갈까요?

[파티] 블랙 : 그냥 해변해요

[파티] 밍채 : 형 왜 저 빼고 망숲 갔어요?

[파티] 블랙 : 니가 없었잖아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월월월과 <망각의 숲>을 갔던 건 액세서리 제작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였고, 그 당시 밍채는 삐쳐서 접속하지 않고 있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날이 벌써 오래전 일이 되었다. 주현이 새삼스럽게 세월을 실감하고 있을 때, 코쿄아가 질문을 던졌다.

[파티] 코쿄아 : 블랙님이 밍채님보다 형이에여?

[파티] 블랙 : 네

[파티] 코쿄아 : 블랙님은 몇 살이에여?

[파티] 밍채 : 형 나이를 왜 궁금해하시는데요

코쿄아는 주현에게 물었는데 경계하면서 답을 미루는 건 밍채의 몫이 되었다. 이상한 데에서 예민한 밍채에 주현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 블랙 : 20대예요

[파티] 코쿄아 : 아항 ㅋㅋ 어려보이셔서여

[파티] 코쿄아 : 밍채님은 그럼 미자이신가?

[파티] westone : 밍채님 나이 모르세요?

[파티] 코쿄아 : 밍채님 나이는 어스름님밖에 모를걸여 ㅋㅋ

또 어스름이었다. 코쿄아의 말에 주현은 의문스러워졌다. 초면이었던 양궁달인에게도 선뜻 나이를 알려 주던 게 밍채였다. 그런데 평온에서 밍채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어스름밖에 없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파티] 밍채 : 저희 길드는 나이 공개 자유인데

[파티] 밍채 : 형한테만 알려준 거예요

[파티] 블랙 : 감동이네

[파티] 블랙 : ㅅㅂ 뭐야 나 안 쳤어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가 혼돈의 설화 고인물이란 걸 뜬금없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제 닉네임을 달고 앞이 조금 밀려난 채팅을 보면 어이가 없어서 황당했다.

[파티] 레아 : 그런데 밍채님 랭킹 왜 낮아졌어요?

[파티] 블랙 : ?

지켜보던 레아가 뱉은 느닷없는 말에 주현은 서둘러 밍채의 정보 창을 열어 봤다. 정말로 랭킹이 70위대로 밀려나 있었다. 새로운 장비가 나온 것도 아닌데 크게 하락한 밍채의 랭킹이 이상했다. 주현은 밍채의 장비를 뒤적거리며 문제를 찾아 나섰다.

“뭐야?”

왼손 반지 칸. 음률 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플링이 들어차 있었다. [밍채와 블랙의 커플링]. 제 닉네임이 적혀 있는 아이템 이름을 마주한 주현은 말을 잃었다. 언제부터 밍채의 장비가 어긋나 있었는지 기억을 돌려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저러고 공개 방이라도 갔을까 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파티] westone : 한쪽은 제작자 블랙.. 다른 한쪽은 커플링..

[파티] 레아 : 저 커플링 쓰는 사람 처음 봐요

[파티] westone : ㅋㅋㅋㅋ 은근 많아요

던전 한계선만 맞췄다면 다른 장비를 끼는 건 자유라지만, 좋은 장비를 두고 커플링을 착용하는 심리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커플링의 효과는 커플과 함께 게임을 할 때 경험치를 더 가져가는 것밖에 없었다.

[파티] 코쿄아 : 장비 그렇게 하실거예여?

[파티] westone : 일반 던전이어서 괜찮아요

[파티] westone : 출발할게요

* * *

11월. 할로윈 이벤트가 끝나고 혼돈의 설화는 다시 없뎃을 맞았다. 서쪽은 그에 분노했다가 몇 주 지나고 홈페이지를 장식한 다섯 번째 악마,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티저 영상에 디렉터 장성한 씨에게 사과를 올렸다.

[길드] 코쿄아 : 블랙님 레이드 같이 가실래여?

길드원들은 다음 악마 레이드를 대비해 스펙업에 한창이었다. 합성 아바타 뽑겠다고 수십 개의 아바타를 갈아 버린 주현은 골드가 부족해 무기가 여전히 18강에 머물러 있었다. 대신에 밍채에게 선물 받았던 투구는 레이드를 돌아 골드가 모이는 대로 강화를 했고 간신히 17강까지 도달해 장비를 교체할 수 있었다.

[귓속말] westone : 파티에 신사 있어요

[길드] 블랙 : 저 지금 나갈거라서 ㅎ

[전체] 블랙 : 나 잠시 자리 비울게

서쪽이 거절한 파티가 주현에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주현은 왠지 변명처럼 보이는 말을 늘어놓으며 제안을 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밍채가 접속 중인 상황에서 자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파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전체] 밍채 : 형 어디 가요?

[전체] 블랙 : 치킨 사러

[전체]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뇸뇸치킨이요?

[전체] 블랙 : 네

혼돈의 설화는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티저 영상과 함께 느닷없이 치킨 브랜드와의 콜라보 소식을 가져왔다. 유저들 대다수가 누가 사 먹느냐는 반응이었지만 정작 확성기에서는 벌써 쿠폰 거래가 왕성했다.

주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배달 앱을 뒤적거렸으나 열린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근하는 길에 포장해 오는 건데, 집에 빨리 가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가 더 귀찮아진 상황이었다.

[전체] westone : 맛있어요

[전체] 블랙 : ?

[전체] 블랙 : 오늘 콜라보 떴잖아요

[전체] westone : 소식은 전부터 돌았어요

[전체] westone : 이벤트 페이지 뜨자마자 시켰죠 ㅋ

[전체] westone : 아바타 쿠폰은 한정이라 얼른 가셔야 할걸요?

[전체] 블랙 : 배달될줄 알고 그냥 왔는데 다 막혔더라고요..

[전체] 블랙 : 지금 나가려고요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블랙님 피방 가셨을 때 동접 많았잖아요~

[전체] westone : 얼른 뛰세요

혼돈의 설화와 협업한 뇸뇸치킨의 이벤트 쿠폰은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콜라보 기간 동안 지급하는 아이템 쿠폰이었고, 두 번째는 매장마다 수량이 정해져 있는 아바타 쿠폰이었다. 주현은 모니터 화면 전원만 꺼두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서쪽의 말대로 뛰어갈까도 싶었지만, 배달도 닫혀 있는데 아바타 쿠폰이 소진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마음이 조급해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재빨랐다. 이윽고 귀여운 폰트로 적힌 뇸뇸치킨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주현은 위기에 부딪혔다.

일반 고객과 게임 유저를 구분하기 위해 ‘혼돈의 설화 세트’를 출시한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 주현은 가게 안을 살펴 키오스크부터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았다. 피시방에서 혼돈의 설화를 하는 건 채하를 마주쳤을 때 외에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메뉴 주문은 다른 의미였다.

“주현 선배?”

“어,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 퇴근하신 거예요?”

이래서 이사를 해야 했다.

두리번거리는 주현을 발견한 학교 후배들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퇴근을 한 건 맞았지만, 퇴근하자마자 게임 쿠폰 받으러 한걸음에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 방금.”

“선배, 여기 앉으세요!”

지켜보던 다른 한 명이 가방을 치우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주현은 애써 미안한 얼굴을 꾸며 냈다. 혼돈의 설화 삽화가 그려진 상자를 후배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친하지도 않아서 할 말이 없었다. 후배들이 예의상 내어 준 자리에 앉아 눈치 없이 떠드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난 포장하고 바로 갈 거라서 괜찮아.”

주현은 그렇게 대꾸하곤 고민하는 척 메뉴판을 훑었다. 바로 혼돈의 설화 세트를 주문하기에 멋쩍었다.

“혼돈의 설화 주신 리라의 간장 치킨 세트 주세요. 아바타 쿠폰 있나요?”

“네. 같이 드릴까요?”

“네.”

주현이 어떻게 하면 일반 고객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동안, 선수 쳐 주문하는 이가 있었다. 계산대를 향해 덤덤하게 쏟아지는 말에 주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돌렸다. 주현의 고민을 무색하게 만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형, 주문하세요.”

검은 모자 탓에 그림자가 졌지만, 주현은 하관만 보고도 채하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가게에 채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주현은 얼떨결에 채하 옆에 서서 주문을 시작했다.

“혼돈의 설화…… 주신 리라의 시즈닝 치킨 세트 하나요. 아바타 쿠폰 있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아바타 쿠폰은 방금 마감됐어요.”

주문하는 게 부끄럽다고 미루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현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낮게 탄식했다. 다른 지점에 간다고 남아있을 것 같진 않아서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마쳤다.

“그럼 그렇게 주세요.”

“네. 20분 정도 걸리세요.”

그 말은 20분 동안 임채하랑 대화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후배들 옆에 앉을 걸 후회하며 채하와 함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뒤늦게 혼자 다른 곳에 앉겠다고 우기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채하가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괜히 티를 내며 상처 주고 싶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길에서 마주쳤어도 어색했을 텐데, 한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눠야 한다니 숨이 막혔다. 주현은 가게 내부를 구경하는 척 눈알을 굴리다가 채하가 뱉는 말에 놀라 혀를 씹었다.

“형, 게임 접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복귀했어.”

채하를 떼어 내기 위해 얼버무렸던 변명이 주현의 발목을 잡았다. 거짓말이라는 게 티가 났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구랑 달리 뻔뻔하지 못한 천성 탓에 주현은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접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복귀했단 말이 어이없을 만도 한데 채하는 트집 잡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고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드는 게, 일순간 주현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형, 제 혼설 닉네임 안 궁금하세요?”

알려 줄 것처럼 떠보는 질문이 솔깃했지만, 그에 넘어갈 순 없었다. 채하의 닉네임을 알게 되면 당연히 주현의 닉네임도 알려 줘야 했다. 오프라인에서도 귀찮게 구는데 온라인에서까지 치근덕대는 건 사절이었다. 직업도 같은 성기사인 터라 함께 게임을 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안 궁금해.”

“그러면…….”

딱 잘라 거절하는 말에 잠시 시무룩해졌던 채하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다가 주현을 응시했다.

“나중에 궁금해지면, 알려드릴게요.”

마치 궁금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 자신감이 채하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혼돈의 설화 주신 리라의 간장 치킨 세트, 시즈닝 치킨 세트 포장 나왔습니다.”

우렁차게 울리는 괴상한 메뉴 이름에 주현은 식겁했으나, 가게 안 사람들은 저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드느라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잔을 부딪치며 자기들의 세계에 빠진 후배 무리를 힐끔 확인하고 눈을 돌린 주현은 봉투에 담긴 치킨을 챙겨 들었다.

혼돈의 설화를 하는 건 부끄럽지 않았지만 괴상한 메뉴 이름은 멀쩡한 사람도 부끄럽게 만들었다. 먼저 가게를 빠져나온 주현이 문을 붙잡고 서 있자 채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통과했다. 이만 헤어지고 싶었지만 가는 길이 같은 탓에 주현은 뺨을 꾹 찌르는 시선을 무시한 채 걸어야 했다.

“형.”

“어, 왜.”

“…….”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꾸하자 채하가 말을 잇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얼굴을 뚫을 듯 열렬한 시선은 그대로였던 터라, 주현은 하는 수 없이 채하를 마주 봤다. 채하는 한 손에는 포장한 치킨을, 다른 한 손에는 주현이 그토록 바라던 아바타 쿠폰을 쥐고 있었다.

“형, 가지실래요?”

“어!”

용건이 아바타 쿠폰인 줄 알았다면 시선을 피할 일도 없었을 테다. 들뜬 얼굴로 쿠폰을 넘겨주기만을 기다리는 주현을 채하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랬다가 안 넘겨준다고 할까 봐 주현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직선을 유지하던 채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더니 들고 있던 쿠폰을 내밀었다.

“여기요.”

“고마워. 넌 안 써?”

다시 돌려줄 마음은 없었지만, 주현은 예의상 물어봤다.

“전 있어요.”

“…….”

업데이트 날은 분명히 오늘인데, 그렇다면 임채하는 하루에 치킨을 두 번이나 먹는 걸까. 확성기에서 쿠폰을 판매하는 유저 중에 채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안 채하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형, 주말에 뭐 해요?”

“주말? 그때 첫눈 온다고 하던데, 길 미끄러워서 집에 있지 않을까.”

“…….”

길이 미끄럽지 않았어도 집에서 혼돈의 설화를 할 예정이었다.

아바타 쿠폰이 제 손에 들어온 게 믿기지 않은 주현은 혹시나 긁혀 이미 사용한 게 아닌지 요리조리 돌려가며 확인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말이 없자 주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고심하는 얼굴의 채하가 서 있었다.

“왜?”

“아니에요.”

앙다문 입술이 왠지 시무룩해 보였지만 채하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 가볍게 넘겼다.

“진짜 주는 거야? 게임 골드라도 줄까?”

아바타 쿠폰은 한정 수량이었던 터라 인게임에서 팔아도 값이 꽤 나오는 편이었다. 그런 쿠폰을 말 한마디에 덥석 넘겨받다니 운이 좋았지만 이대로 입을 닫기엔 양심이 아팠다. 올려다보며 묻는 주현에 채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중에 저랑 혼설에서 친구 해 주세요.”

“……뭐 그러든가.”

쿠폰에 정신이 팔렸던 주현은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채하의 부탁이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나중에’ 친구를 해 달란 건 도대체 뭐였을까.

* * *

[길드] 레아 : 와아 밖에 눈 오네요

[길드] westone : 월월님은 그래서 남친이랑 첫눈 맞으러 나가셨어요

[길드] 월월월 : 저 접속 중인데염?????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아깝다

돌아온 주말. 기상청이 예고했던 것처럼 창문 밖엔 희멀건 눈이 흐늘흐늘 휘날리고 있었다. 주현이 걱정했던 것보다 거세진 않아서 길이 미끄러울 일은 없을 듯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채하의 물음이 주말에 만나자는 제안이었던 것 같았다. 아바타 쿠폰 받아 놓고 매몰차게 거절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의도치 않게 과거의 채하 같은 짓을 했다.

[길드] 코쿄아 : 전 지금 나갈건데

[길드] westone : 코쿄아님 사는 곳은 눈 안 내려요?

[길드] 코쿄아 : 내려여

[길드] westone : 눈 오면 불편할텐데

[길드] 코쿄아 : 여친 만나러 가여 ㅋ

부럽다는 반응을 받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서쪽은 연애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서쪽이 반응해 주지 않자 코쿄아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주현은 코쿄아의 채팅을 정독하며, 코쿄아가 남자라는 확신을 얻었다.

[길드] 코쿄아 : 여친이 빼빼로데이 때 빼빼로도 만들어줬어여

[길드] westone : 사서 먹으면 되는걸

[길드] 코쿄아 : 부러우세여?

[길드] westone : 저요?

[길드] 코쿄아 : 네 ㅋㅋㅋㅋ

[길드] 코쿄아 : 웨스트님 걱정마여 노력하면 사귈수있어여

[길드] westone : 아 네..

[길드] 월월월 : 며칠 되셨어염?

[길드] 코쿄아 : 곧 1년이여 ㅋㅋ

[길드] 암흑기사 : 코코아님 남자임? 여잔줄 ㅋㅋㅋㅋ

[길드] 코쿄아 : 여자할까여? 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넷카마는 좀 ^^

[길드] 코쿄아 : 당연히 장난이졍 ㅋㅋ

[길드] 코쿄아 : 여친이 기다리겟네여 전 이만

[길드] 코쿄아 : 저녁에 봐엽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길드원과 나눈 짧은 대화에 주현은 코쿄아가 왜 신사랑 친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졸지에 코쿄아를 부러워하는 처지가 된 서쪽은 어이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코쿄아는 가끔 서쪽과 파티를 맺으니 신사만큼 밉보인 건 아닌 듯했다.

서쪽에게 레이드 가자고 할까 고민하던 주현은 떠오른 파티 초대에 마음을 바꿨다.

《 밍채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파티] 블랙 : 왜?

파티를 수락하고 밍채가 미리 만들어 놓은 대기실에 입장했다. 밍채가 선택한 던전은 부캐 육성 시에나 가는 설산이었다. 양궁달인이 길을 찾지 못해 주현이 선뜻 도움을 주러 갔던 장소였기도 했다. 보스를 잡으러 갈 줄 알았는데, 마주한 일반 던전에 당황한 주현이 물었다.

[파티] 블랙 : 설산?

[파티] 밍채 : 눈 와요

[파티] 블랙 : 너희도 눈 내리는구나

밖에 눈이 내린다고 캐릭터도 눈을 맞아야 하는 밍채의 감성은 난해했다. 주현은 일단 어울려 주기로 마음을 먹고 레디를 마쳤다. 게임이 시작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던전의 풍경을 보며 문득 밍채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 블랙 : 너 요즘은 학원 안 가?

주현은 대검으로 설괴를 시원하게 가르며 물었다.

[파티] 밍채 : 형이랑 놀려고 그만뒀어요

[파티] 블랙 : ?

돌아온 대답에 말을 잃고 말았다. 저번엔 조퇴하고 게임을 하더니 이번엔 학원을 그만뒀다니.

밍채의 실행력이 대단하면서도 너무 게임에 빠진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눈보라 탓에 뿌옇게 물든 화면을 보며 주현은 웃음을 삼켰다. 한편으론 같이 놀고 싶어서 그만뒀다는 말에 우습게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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