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둠이 깃든 프러포즈
자취방 에어컨이 고장 났다. 더위가 한창인 8월인데,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집주인에게 문의를 해 보자 에어컨 수리까지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푹푹 찌는 날씨를 피해 보려고 티셔츠를 펄럭였지만 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주현은 일단 선풍기로 버텨 보기로 했다.
그나마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퇴근한 주현은 곧바로 피시방으로 향했다.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비어 있는 자리가 몇 없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주현은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디를 입력해 컴퓨터를 켰다. 한창 대학에 다닐 때, 수강 신청을 하러 몇 번 왔던 장소였다.
게임에 접속하자 모니터 한구석에 피시방 버프 아이콘이 자리를 잡았다. 같은 피시방에 혼돈의 설화 유저가 몇 명인지 알려 주는 참으로 불친절한 경험치 버프였다. 주현은 이미 만렙이라서 쓸모가 없었다.
현재 접속 유저는 주현을 포함하여 세 명이었다. 유저들 모두가 망겜이라고 하지만 신기하게도 피시방마다 접속 유저가 있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블랙 : 저 피시방인데
[길드] 블랙 : 저 말고 두 명이나 더 이 게임을 하네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월월님 맨날 피방인데 염탐 온다잖아요~!
[길드] 월월월 : 아 진짜 싫어염;;;;;;;;;;
월월월은 노트북으로도 게임이 돌아가지만, 늘 친구들에게 이끌려 피시방에 다녔다. 그렇다고 친구들하고 같은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은 주로 FPS 게임을 했고, 월월월은 구석에서 레이드를 돌았다. 서쪽이 그러면 돈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어차피 돈은 친구가 내준다고 답했었다. 그에 서쪽은 친구가 월월월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월월월은 진저리쳤다.
[길드] 월월월 : 맨날 모니터 염탐 온다구염;;;
[길드] westone : 마음 맞는 사람 하나 골라서 사귀면 되겠네요
[길드]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블랙님도 곧 경험하게 될거예염 ㅠㅠㅠ
서쪽, 월월월과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 뜬금없는 파티 초대가 화면 한가운데로 날아왔다.
《 신사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접점이라곤 어제 골드를 거래한 게 전부인 사람이었다. 말을 주고받던 것도 손으로 꼽혔고, 이렇게 접속하자마자 파티 초대를 보낼 정도로 친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같은 직업이어서 신경을 써 준다고 하기엔, 애초부터 길드에 성기사는 단둘이었고 이제 와서 유대감을 느낄 것도 없었다.
주현은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끝내 결정을 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블랙 : 뭐예요??
[파티] 신사 : 성기사 하는 법 가르쳐 드리려고요 ㅋㅋ
신사는 주현에게 무심한 편이었다. 주현은 길드에 들어온 후 늘 서쪽, 월월월과 붙어 다녔으니 신사에게 직업 관련 질문 외에는 도움을 받을 일이 없기도 했고, 신사도 먼저 도와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 이상 길드원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길드 마스터와 운영진도 결국 게임을 즐기는 유저였으니, 레이드를 도느라 바빠서 만날 일이 없었다.
지금껏 내버려 둬 놓고 갑자기 가르쳐 주겠다고 말을 꺼내니 황당했다. 골드 좀 샀다고 잘해 주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신사에게 골드를 구매한 유저는 주현 말고도 길드에 널려 있었다. 당장 레아만 해도 그랬다.
[파티] 신사 : 무기 12강이네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블랙 : 혹시 골드 더 파시나요?
강화하다가 골드가 부족해서 아쉽게도 12강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15강은 넘어야 이전에 끼던 음률과 성능이 비슷해지니 자연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평소 관심도 없던 장비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장비 욕심이 들었던 건 채하와 랭킹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때가 유일했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잊혔다.
무기가 없을 때는 무념무상 상태였으나 막상 손에 쥐어지니 어떻게든 20강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이건 다 밍채 탓이었다. 함께 레이드에 가는 게 익숙해지니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고, 그러려면 장비 성능이 좋아지는 수밖에 없었다.
[파티] 신사 : 얼마나 사려고요?
[파티] 블랙 : 3억이요
[파티] 신사 : 8500에 드릴게요 ㅋㅋ
어제보다 천 원이나 할인된 가격이었다.
혼돈의 설화에서 밍채를 제외하고 주현과 가장 친한 유저는 서쪽과 월월월이었다. 그런 서쪽이 제시하는 가격이 8,500원이었는데 어제 친해진 신사가 호의를 베풀기엔 수상한 숫자였다.
주현은 신사에게 입금하고, 우편함으로 골드를 받으면서 내내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신사에게 이유를 묻기엔 자칫 무례하게 보일 수가 있었고, 되레 어색해지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도 컸다. 지금도 매우 서먹서먹한데 이보다 더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파티] 신사 : 강화 지금 할 건가요?
[파티] 블랙 : 아뇨
밍채가 오면 그 옆에서 할 예정이었다. 밍채가 선물한 무기이니 그러고 싶었다.
[파티] 신사 : 그럼 일반 레이드부터 가죠 ㅋㅋ
신사는 비공개 레이드 방을 개설했다. 던전은 <인형의 집>으로, 지금은 철 지난 레이드이긴 했으나 한때는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월월월은 아직도 <인형의 집> 보스인 메아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었다.
주현이 게임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패턴이 단순화된 상태였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메아를 처치한 주현은 월월월의 고통을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파티] 신사 : 헬모드로 갈게요
[파티] 블랙 : 네
혼돈의 설화 측은 과거 어려웠던 던전을 그리워하는 유저들을 위해 헬 모드를 출시했다. 헬 모드로 플레이를 하면 보상을 하나씩 더 얻을 수가 있었는데, 주현은 그럴 바에 일반 모드로 두 판을 도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인형의 집>에 입장하자, 던전 이름처럼 작고 귀여운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성에서 왁자지껄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신사가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다가가자, 우람한 덩치를 가진 메아가 인형들을 헤치고 나왔다.
메아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 인형이었는데, 목덜미 쪽 박음질이 뜯겨 솜이 튀어나온 모양새가 가여우면서 섬뜩했다. 컷신이 끝나고 게임이 개시되자마자 메아는 제 앞에 있던 신사를 발로 뻥 차 버렸다. 메아는 재밌다는 듯 킥킥 웃음을 흘렸다.
[파티] 신사 : 악마 레이드 제외하고는 함성을 제일 먼저 쓰시고요
[파티] 블랙 : 넵
《 함성 : 몬스터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
채팅을 치느라 메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신사가 바닥을 굴렀다. 함성 스킬을 사용한 신사와 블랙의 캐릭터가 대검을 번쩍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번쩍이며 검날에 스며들었다.
[파티] 신사 : 이렇게 여럿이서 함성을 쓰면요
[파티] 신사 : 메아 공격해보세요 ㅋㅋ
주현이 캐릭터를 움직여 메아의 어깨에 공격을 날리자, 신사도 따라서 검을 휘둘렀다. 공격은 동시에 들어갔고 메아의 시선이 향하는 건 신사였다.
[파티] 신사 : 더 쎈사람 쳐다보거든요
[파티] 신사 : 이러면 마나만 허비하는거니까 걍 쓰지마세요 ㅋㅋ 다른 탱도 이해할거예요
일반 레이드는 최대 인원이 다섯 명이었고, 웬만해서 성기사나 대장장이를 만날 일이 없었다. 모르고 있던 점이라 신사가 새롭게 알려 주는 정보가 흥미로웠다.
[파티] 신사 : 짤막하게 공격 넣는 것보다 반격이 더 쎈건 알죠?
[파티] 블랙 : 네
[파티] 신사 : 네네 웬만해서 반격하시고요
잔뜩 성이 난 메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주워 신사에게 던졌다. 신사는 재빨리 대검을 들어 장난감을 받아쳤다. 도리어 자신이 던진 장난감에 맞게 된 메아는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인형들의 대장인 메아가 슬퍼하자, 장난감 성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줄곧 곁에서 우물쭈물하던 인형들이 일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파티] 신사 : 공격 끊는 법은 아심?
[파티] 블랙 : 공격 끊는 법이요?
[파티] 신사 : 마우스 클릭하고 스페이스바 눌러보세요 ㅋㅋ
눈물을 쏟는 메아의 복수를 위해 인형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현은 신사의 말대로 마우스를 클릭해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가깝게 다가왔던 강아지 인형이 검날에 맞고 펑 터져 버렸다. 왠지 월월월에게 미안했다.
성기사는 직업 중에서 공격 속도가 상당히 느린 편이었다. 강아지 인형을 해치우고도 검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붉은 눈의 고양이 인형이 빈틈을 발견하고 주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주현은 이어서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정말로 공격이 끊기고 캐릭터가 기본자세로 돌아왔다. 이걸 진작 알았다면 바닥을 구를 일이 절반으로 줄었을 텐데, 여태껏 몰랐다는 게 분하고 억울했다. 주현은 서둘러 검날을 세워 날아오는 고양이 인형을 막아 내고 반격을 가했다.
서쪽은 때때로 신사의 실력을 깎아내렸지만, 주현의 입장에선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주변에 성기사 유저가 신사 하나이기도 했고, 주현이 레이드에서 본 성기사 중에선 신사가 제일이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메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더니 급작스레 볼에 바람을 넣었다. 메아의 뺨이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그에 힘입어 메아의 몸도 함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일반 모드에선 없던 패턴이었다. 순식간에 덩치가 불어난 메아는 거인이 되어 버렸고, 주현의 캐릭터 몇 배는 될 발로 쿵쿵 바닥을 찍어댔다. 메아가 소동을 피우는 바람에 시야가 흔들려 다가오는 인형들의 움직임을 받아치기가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메아의 발밑에서는 둥근 장판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어서 할 일이 두 배가 되었다.
대충 감으로 방어를 하자 신사가 별안간 웃음을 쏟아 냈다.
[파티] 신사 : ㅋㅋㅋㅋㅋ
그리고 주현을 공격하려던 곰 인형의 뒤를 쫓아 복부를 대검으로 갈랐다.
[파티] 신사 : 인형의집 노피격으로 클리어하면
[파티] 신사 : 웬만한 공격 다 받아칠수있어요 ㅋㅋ
[파티] 블랙 : 아.. 넵
아마 다음 생쯤에야 가능할 것 같은데, 신사는 일상 얘기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주현은 느닷없이 밍채를 떠올렸다. 밍채도 기본 버프 유지를 위해 <인형의 집>에서 연습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인형과 싸우는 밍채를 상상하니, 신기하게도 밍채가 게임에 접속했단 알림이 떠올랐다.
[파티] 신사 : 이거 끝나고 사탄 듀오 가실래요?
[파티] 블랙 : 이번주 사탄은 이미 했어요
[파티] 신사 : 연습모드로요 ㅋㅋ
[파티] 신사 : 성기사 듀오로 영상 찍어보고 싶어서요
친구 목록에 장비도 실력도 훨씬 괜찮은 성기사 유저가 널렸을 것 같은데, 자신에게 집착하는 신사의 태도가 이상했다. 줄곧 아바타만 사다가 뒤늦게 레이드에 관심이 생겼단 걸 눈치라도 챈 걸까.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히는 신사가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얼른 이 파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길드 채팅이 소란스러워졌다.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
[길드] westone : 밍채님 파티인데 왜 블랙님이 없는 거죠?
채팅 창을 메우는 서쪽의 말을 읽으면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물음표를 보내는 월월월의 반응을 보니 둘 다 밍채의 파티에 초대된 모양이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이전보다 성급하게 움직였다.
[길드] westone :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길드] westone : 깜짝 이벤트?
주현이 대답이 없자, 서쪽은 홀로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해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무섭게 다가오는 인형들을 상대하느라 채팅을 칠 여유가 없었다.
[파티] 신사 : 잘하네요 ㅋㅋ
어슬렁거리던 주현이 집중해 공격을 쳐내니 신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사가 칭찬하든 말든 관심 없었고, 한시라도 빨리 메아를 처치해 던전을 끝내고 싶었다.
둘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을 밍채가 주현을 빼먹었을 리가 없었다.
[귓속말] 밍채 : 형
친구 목록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 밍채는 주현이 <[헬] 인형의 집>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쪽의 말처럼 정말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려고 둘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
[귓속말] 밍채 : 인형의 집에 누구랑 있어요?
[귓속말] 밍채 : 형 헬모드 안 하잖아요
왜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였다.
오랜 결투 끝에 메아의 체력이 바닥났다. 번뜩이던 눈이 살포시 감기더니, 부풀었던 메아의 몸도 원상태로 돌아갔다. 메아가 얌전해지고, 주현은 보상이 들어오기도 전에 다급하게 채팅을 쏟아 냈다.
[파티] 블랙 : 밍채가 불러서 사탄 듀오는 못 할 것 같아요
[SYSTEM] 신사님이 [메아의 솜뭉치]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신사님이 [메아의 솜뭉치]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메아의 솜뭉치]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메아의 솜뭉치]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고생해서 잡았으니 보상은 받아야 했다. 모조리 쓸모없는 잡템이긴 했지만, 인벤토리에 보상이 들어온 걸 확인한 후 주현은 미련 없이 파티에서 탈퇴했다.
[귓속말] 신사 : 다음주에 같이 해요 ㅋㅋ
[귓속말] 신사에게 : 네
《 밍채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파티에서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파티 초대가 도착했다. 초대될 때까지 누른 모양인데 밍채의 집념에 감탄하며 파티에 입장했다. 파티에는 길드 채팅에서 보았던 것처럼 서쪽과 월월월이 있었다.
[파티] westone : 그래서 이 파티는 정체가 뭔가요?
[파티] 월월월 : 그러게염
서쪽과 월월월은 자기들이 밍채에게 이용을 당했단 걸 알고 있을까? 주현이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말해 봤자 또 밍채와 엮여서 놀림이나 받을 게 뻔했다.
[파티] 블랙 : 저 강화하려고요
주현은 밍채의 만행을 땅에 묻어 버리고 성급히 화제를 돌렸다.
[파티] westone : 광장으로 모이면 되나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강화석 드릴까염?
[파티] 블랙 : 아뇨 저 신사님이 주신것도 있고
[파티] westone : ?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골드도 더 샀
[파티] 블랙 : ?? 왜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광장으로 다가오던 서쪽과 월월월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담긴 말풍선이 떠오른 탓이었다. 딱히 문제 있는 말을 뱉진 않았는데 둘의 반응이 이상했다.
[파티] westone : 신사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westone : 왜요?
믿을 수 없다는 어투였다. 서쪽은 평소 신사를 떨떠름하게 여겼으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파티] 블랙 : 골드 살 때 받았어요
[파티] westone : 아 그럼 뭐..
사정을 설명하니 그제야 긍정하는 눈치였다. 주현은 슬슬 강화를 시작해 보고자 아이템을 이용해 강화 창을 켰다. 강화 창에 무기와 보호석, 강화 재료를 얹어 놓고 마우스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밍채가 광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랑 <인형의 집>에 갔는지 안 알려 줘서 삐쳤나 싶었지만, 밍채가 그렇게까지 속 좁은 인간은 아닐 테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려 오른손이 마우스에서 키보드로 넘어가던 때였다.
우편함 아이콘에 불이 들어왔다.
보낸 사람 : 밍채 (성직자)
우편 제목 : .
첨부된 아이템 : [어둠의 강화석] 1,000개, [어둠의 강화석] 1,000개
설마 하는 심정으로 우편을 열어 보자 발신자는 예상대로 밍채였다. 아이템 개수 최대 단위가 천인 탓에 밍채는 [어둠의 강화석]을 1천 개씩 두 묶음을 보냈다. 강화석이 하나당 6만 골드였으니, 총 1억 2천 골드의 값어치를 지닌 선물이었다.
20강까지 가는 길에 무기가 아무리 많이 터져도 강화석을 2천 개나 쓰진 않을 것 같은데…… 이건 붙으라는 의미인지, 그만큼 터질 거란 의미인지 밍채의 뜻을 추측하기가 난해했다.
반송할까도 고민했다가 그러면 밍채의 기분을 망칠 게 분명해서 관뒀다. 나중에 갚으면 되는 일이었다.
[파티] 블랙 : 잘 쓸게
[파티] 밍채 : 네
어쨌건 신경을 써 준 밍채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궁금증이 도진 서쪽이 냉큼 물어왔다.
[파티] westone : 뭐 주셨어요?
[파티] 블랙 : 강화석이요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신사랑 밍채님 중에 누가 더 많이 주셨어요?
서쪽에게 신사는 그냥 신사였고, 밍채는 님이었다.
[파티] 블랙 : 비밀이에요
[파티] westone : 월월님은 그냥 얘기해주던데
[파티] 월월월 :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늦게 봤다구염 ㅠㅠ
좋은 마음으로 선물한 두 사람을 비교하고 싶지 않아 비밀에 부쳤다. 그때 또 한 번 우편함 아이콘이 반짝거렸다.
보낸 사람 : 밍채 (성직자)
우편 제목 : .
첨부된 아이템 : [어둠의 강화석] 1,000개
[파티] 블랙 : 그만 보내
[파티] 밍채 : 네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밍채님이 승자네요~!
갖고 있던 걸 보내주는 건지, 거래소에서 사 오는 건지. 1천 개를 고민도 없이 덜컥 보내는 밍채에게 그만하라 일러두자 밍채도 금방 꼬리를 내렸다.
우편을 보내고 광장으로 돌아온 밍채는 여느 때처럼 주현의 캐릭터 옆에 엉겨 붙었다. 찰거머리같이 구는 밍채의 행동도 이제는 익숙해져 주현은 무덤덤하게 강화 버튼을 눌렀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3 어둠이 깃든 대검]
[파티] 월월월 : 강화하고 계신 거예염?
[파티] westone : 장비창을 보세요 ㅡㅡ
[파티] 월월월 : ㅠㅠㅠㅠㅠ 넴
[파티] 월월월 : 와 붙으셨네염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피시방이라서 행운 버프를 받아서일까. 집에서 했던 강화보다 과정이 수월하게 느껴졌다. 물론 행운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으리란 걸 알고, 이 모든 게 기분 탓이란 것도 안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3 어둠이 깃든 대검]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3 어둠이 깃든 대검]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3 어둠이 깃든 대검]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3 어둠이 깃든 대검]
[파티] 월월월 : ㄷㄷ 스택 쌓이는거 실시간으로 보이네염
[파티] westone : 강화 한두번 하세요?
[파티] 월월월 : 아니 ㅋㅋㅋㅋ 그럼 무슨 말을 해야 되나염ㅠㅠ
연달아 강화가 붙는다거나, 적은 횟수 만에 강화에 성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확성기나 자유게시판에서 종종 보이긴 하지만 그건 소수였다. 대다수는 강화 실패 보너스 수치가 쌓여 강화 확률이 50%에 다다랐을 때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로 운이 없으면 강화 성공 확률이 90%에 육박해도 몇 번이고 실패했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4 어둠이 깃든 대검]
[파티] westone : ㅊㅊㅊㅊ
[파티] westone : 피방이라 그런지 잘 붙으시네요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4 어둠이 깃든 대검]
[파티] 밍채 : 형 피시방이에요?
[파티] 블랙 : 집 에어컨 고장 나서
[SYSTEM] 아이템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고급 보호석]의 효과로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14 어둠이 깃든 대검]
밍채에게 답해 주는 와중에도 주현은 강화 버튼을 눌렀다. 강화 창 막대 게이지가 차오르는 것만 몇 번을 보는 건지. 반복되는 장면에 지루해질 만도 한데 결과에 따라 강화 비용이 달라지니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될 때까지 질러 봐야 하는 강화였지만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마우스에 둔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동안 강화된 장비를 사서 몰랐는데, 장비를 직접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었다. 같은 시기에 똑같은 장비를 구해도 누가 먼저 20강을 찍느냐는 운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돈을 더 많이 쓰는 사람이 앞서가는 경우가 많지만, 결국에 승자는 돈을 덜 쓴 사람이었다.
[SYSTEM]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5 어둠이 깃든 대검]
그런 면에서 주현은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13강을 쉽게 넘겨서 기대했으나 역시나 혼돈의 설화는 주현을 배신했다. 14강과 15강은 강화 확률 100%를 보고 나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남은 골드가 애매해서 오늘은 이쯤에서 강화를 마치기로 했다.
[파티] 블랙 : 여기까지 해야겠어요
[파티] westone : 이제 사탄 갈까요?
[파티] 월월월 : 이번주 했잖아염 ㅠㅠㅠㅠ
[파티] westone : 안낚이네 ㅋ
[파티]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에어컨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수리 일정이 밀린 탓이었다. 집주인이 미안하다고 여러 번 사과하는데, 부모뻘 되는 사람에게 따져 묻기도 그랬고 그럴 성격도 아니라서 조금 더 버텨 보기로 했다.
“주현 선배?”
연차 냈는데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또다시 피시방으로 피난을 왔다. 회사에서 주현 씨, 주현 님 소리만 줄곧 듣다가 오랜만에 들려온 선배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반가워서…….”
“주현 선배, 안녕하세요.”
낯익은 얼굴의 후배 둘이 나란히 서서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민 반응을 보인 건 제 잘못인데 후배가 먼저 사과하니까 상황이 민망해졌다. 주현은 멋쩍어하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봤다. 후배들한테 어떻게 비쳤을진 모를 일이다.
“……어, 안녕.”
“선배 오늘 일 쉬시는 거예요?”
“어, 연차.”
“아. 저희는 수강 신청하려고요.”
둘은 또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따라 사람이 유독 많다 싶었는데 공교롭게도 대학교 2학기 수강 신청 날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석에 자리를 잡는 건데, 사람들과 붙어 있기 싫어서 입구 벽 쪽에 앉았다가 눈에 띈 모양이었다.
주현은 슬그머니 숨겨 놨던 창을 다시 켰다. 서쪽이 보았으면 혼돈의 설화가 부끄러우냐고 물었을 광경이었다. 혼돈의 설화가 딱히 창피한 건 아니었지만, 서쪽의 캐릭터 옷차림과 커플인 밍채가 쏟아 내는 망언은 어디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선배.”
이제 좀 게임을 시작해 볼까 하던 차에 또다시 선배 소리가 들렸다. 이 커다란 피시방에 선배 호칭 들을 사람이 저 하나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주현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자 나긋나긋한 인사를 건네며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머리에 얹은 검은 캡 모자 탓에 눈 밑으로 그림자가 졌다.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 인상이 차가워 보였다. 언젠가부터 채하에게 늘 서늘한 분위기를 느꼈다.
“커피 드세요.”
만날 때마다 껄끄럽게 구는 탓에 오늘은 또 어떤 시비를 걸어올까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 채하는 들고 있던 투명한 컵을 불쑥 내밀었다.
“어, 어.”
한심하게도 말을 더듬으며 컵을 건네받았다. 컵을 쥔 손으로 찬 기운이 넘나들었다. 컵 안에 든 얼음들이 벽에 부딪히며 달그락 소음을 냈다.
“재밌어요?”
채하가 주현의 모니터를 눈짓했다. 아직 로그인하지 않은 혼돈의 설화 홈페이지가 주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현은 처음으로 혼돈의 설화가 부끄러워졌다. 화면에 자리 잡은 건 벌거벗은 서쪽도 아니었고, 헛소리를 내뱉은 밍채도 아니었다. 오로지 홈페이지 하나였으나, 그게 뭐라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지.
따라서 게임을 시작했다는 걸 채하가 눈치챈 것도 아닌데, 그 질문 하나에 모든 속내를 읽힌 기분이 들었다.
“재밌게 하세요.”
입꼬리가 한 번 더 솟아올라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채하가 등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건조한 시선이 주현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고, 입가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렸다. 예의상 보였던 미소가 조소로 변하는 찰나를 주현은 정확하게 포착했다. 이건 순전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채하의 뒤통수를 보며 주현은 혀를 찼다. 채하가 향한 곳엔 고깃집에서 마주쳤던 채하의 친구들이 있었다. 저 성격에도 멀쩡히 친구를 사귈 수 있단 게 경이로웠다.
주현의 고개가 다시 모니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컵을 컴퓨터 책상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색깔만 봐도 아메리카노였다. 쓴 건 질색이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
[길드] westone : 사탄 어때요?
[길드] 블랙 : 인사가 먼저 아니냐고요..
[길드] westone : ㅠㅠ
[귓속말] 신사 : 저 지금 레이드중이라ㅋㅋ
[귓속말] 신사 : 끝나고 바로 사탄 듀오 갈까요?
입장과 동시에 채팅 창이 시끌벅적해졌다. 서쪽에게 적절히 대꾸한 후 신사의 귓속말을 확인했다. 저번 주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탓에 더는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그냥 싫다고 해야 했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다니는 게임 인생이 피곤해졌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 신사님이랑 듀오 가기로 해서요
[귓속말] westone : ??
[귓속말] westone :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귓속말] westone : 강화석 받았다고 지금 밍채님 두고 신사한테 넘어간 거예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아니..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신사에게 골드를 사고, 친구가 되고, 성기사 딜 사이클에 대해 배우고…… 차근차근 진행된 탓에 정확한 지점을 찾기 힘들었으나, 아무래도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았다.
[귓속말] westone : 근데 신사는 왜 갑자기 블랙님 노려요?
[귓속말] westone : 밍채님은 서사라도 있지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서사가 어딨어요
[귓속말] westone : 아무튼 있어요
친구 목록에 있는 유저 중 첫 만남이 가장 최악이던 게 밍채였다. 그런 밍채를 두고 서사 타령을 하는 서쪽은 얼마나 신사가 싫은 건지 가늠이 안 됐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도 이유는 모르겠고..
[귓속말] westone에게 : 골드 거래하면서 친구 됐어요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혹시 본명으로 거래하셨나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닉네임으로 거래를 해야 했나? 어차피 신사가 같은 시간대에 여러 사람과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해당 금액을 입금할 사람은 주현밖에 없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이름이.. 여자들도 많이 쓰는 이름이잖아요?
조심스레 운을 띄운 서쪽의 채팅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미친 거 아니야?”
성별이 여자기만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유저가 게임에 널리긴 했으나, 설마 길드 마스터란 인간이 그럴까 싶었다. 재앙의 규모는 작지 않아서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길드에 여자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당장 레아와 잔혹동화만 해도 성별이 알려진 여성 유저였다. 신사는 둘에게 찝쩍대는 기색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레아에겐 장비로 나무라기까지 했었다.
[귓속말] westone : 거래하고 나서부터 친절한 게 이상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길드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저한테요? ㅅㅂ
[귓속말] westone : 같은 성기사라서 반가웠나봐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아니..
[귓속말] westone : 뭐.. 제가 오해한 걸 수도 있으니까 신사한테 남자라고 성별 말해보세요
[귓속말] westone : 그래도 계속 블랙님한테 잘해주면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귓속말] westone : 밍채님처럼 블랙님의 남편 자리를 노리는게 아닐까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뭐라는 거예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성별 한번 말해보세요
길드 사람들과의 거래는 서쪽과만 해봐서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고작 이름만 가지고 성별을 판단하는 것도 웃기지만, 세상에는 워낙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널렸으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갑자기 강화석을 잔뜩 보내 준 것도 그렇고, 말투가 사근사근해진 것도 수상했다. 주현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신사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신사에게 : 신사님 저 남자예요
채팅을 마친 주현은 설마 남자라고 길드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귓속말] 신사 : 그래요? ㅋㅋ
느닷없는 성별 공개에 신사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귓속말] 신사 : 저 이제 나가요
어느덧 레이드를 끝낸 신사가 마을로 나왔다.
《 신사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주현이 신사의 파티에 합류하고, <분노의 사탄> 대기실이 만들어지는 동안 찝찝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남자라는 말을 믿지 않고 장난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미 넘긴 화제를 다시 한번 언급하기도 어정쩡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속이 답답한 건 오랜만이라 머리가 아팠다.
[파티] 신사 : 옷 맞춰 입을까요?
이렇게 된 이상, 신사의 호의를 같은 성기사라 갖는 유대감이라 여기기로 했다. 이미 남자라고 말을 했고, 그 말을 믿지 않은 건 신사의 문제였다. 나중에 자신을 넷카마라고 몰아갈 수도 있으니, 주현은 스크린 샷을 찍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옷을 갈아입은 신사가 주현의 캐릭터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주현은 원래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캐릭터 옷을 자주 바꿔 입었지만, 밍채와 붙어 다닌 후로는 비슷한 스타일로 맞춰 입고 있었다.
[파티] 신사 : 트윈룩 ㅋㅋ
주현의 캐릭터가 입은 옷은 제복이었다. 하얀 셔츠와 재킷, 검은 넥타이, 어깨를 가로지르는 띠만 진홍색으로 염색해 포인트를 줬다. 염색이 우연히 겹칠 수는 있어도 대놓고 따라 하는 인간은 흔하지 않았다.
완전히 똑같은 행색을 한 신사의 캐릭터가 이를 드러내며 실실 웃고 있었다.
[파티] 신사 : 형제같네요
이마가 훤히 보이게 넘긴 머리카락은 시선을 빼앗는 강렬한 붉은색이었고 눈은 그와 대조되게 시커멨다. 신사는 원래 머리카락 색을 흑발로 고정해 두고 머리 모양만 바꾸는 편이었다. 코디에 따라서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안 그러던 신사가 갑작스럽게 변화를 주니 영 꺼림칙했다.
주현은 흑발에 적안이 특징인 제 캐릭터의 외양이 급격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준 커스터마이징의 색상을 멋대로 변경하고 나타난 밍채를 마주했을 때와 유사한 심정이었다.
[파티] 신사 : 갈까요?
[파티] 블랙 : 네
왜 따라 하느냐고 물으면 너무 무례해 보일까. 밍채는 되고, 신사는 안 된다고 우기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미심쩍은 마음을 뒤로한 채 주현은 준비 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 사탄 영상 촬영을 끝으로 신사와의 연을 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친구 목록 삭제는 불가능하겠지만 둘이서 던전 가는 일은 줄이는 게 옳았다.
푸른 언덕 너머로 풍성한 잎사귀를 가진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신사가 대검을 끌며 다가가자, 아래에서 풀을 뜯어 먹던 염소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에서 깬 사탄이 몸을 벌떡 일으키곤 무기인 삼지창을 둘에게 겨누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 기사의 맹세 》
화면에 떠오른 상태 아이콘에, 본인이 받는 피해량을 감소시켜 주는 ‘신념의 방패’ 스킬을 사용하려고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기사의 맹세’는 성기사가 파티원 한 명을 지목해 사용하는 스킬로, 설명대로 5초간 받는 공격의 피해량을 감소시켜 준다. 보통은 생존력이 약한 힐러 직업군에게 걸어 주지만, 지금은 파티원이 둘밖에 없는 탓에 서로에게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파티] 신사 : 맹세 좀요 ㅋㅋ
사사게 스타인 밍채와 거리를 두던 시절, 밍채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힐을 받을 때도 이렇게 섬뜩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었다. 스킬을 받을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 신사에게 스킬을 걸어 주는 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본능이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리는 탓에 손가락이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파티] 신사 : 블랙님?
[파티] 신사 : 저한테 맹세 좀 걸어주세요
못 본 척 공격을 이어가자 신사가 재촉해 왔다. 주현은 하는 수 없이 신사를 지목한 후 ‘기사의 맹세’ 스킬을 사용했다. 신사에게 기사의 맹세 따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더욱 억울했다.
[파티] 신사 : 감사 ㅋㅋ
어차피 공격을 맞지 않으면 필요 없는 스킬이었다. 실제로 밍채와 사탄 듀오에 도전했을 땐 단 한 번도 ‘기사의 맹세’를 쓰지 않았다. 밍채가 죽은 주현을 살리겠다고 사탄에게 얻어맞긴 했지만, 그런 고집스럽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밍채는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영상을 찍는다는 건, 어딘가에 그 영상이 올라간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게임을 못하는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맡은 바에 소홀히 임하고 싶지 않았다. 집중해서 사탄의 공격을 받아치는 순간,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현 선배.”
“어, 어?”
마침 신사가 사탄에게 맞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주현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거 드세요.”
한 가지 다행이었던 건, 말을 건 사람이 채하가 아니라 처음에 인사하러 왔던 같은 과 후배였다. 주현의 시선이 닿자 벽 아래로 숨기고 있던 캔 음료를 내밀었다. 돈 버는 직장인으로서 후배에게 음료수 얻어먹기가 민망해 바라만 보고 있자, 키보드 옆 비어 있던 공간에 캔이 고집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후배가 잽싸게 내려놓은 탓이었다.
“예전에 저희 커피 사 주셨잖아요.”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서로 어색해지는 길이었다. 재학 내내 과제에 쫓겨서 기억이 오락가락했으니 쉬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투명한 컵이 눈에 들어왔다. 먹던 것처럼 생겼는데 저걸 주긴 좀 그렇지.
“고마워. 잘 마실게.”
“네. 저희는 가 볼게요.”
그렇게 후배들의 인사를 받으며 주현은 다시 모니터로 눈을 옮겼다. 네 명이었던 피시방 버프가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임채하는 집에 안 가나? 주현이 피시방을 전세 낸 것은 아니었지만, 버프를 통해서 채하의 접속 사실을 알게 되니 떨떠름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파티] 신사 : 블랙님?
[파티] 블랙 : 죄송해요 후배들이 말 걸어서요
주현이 잠수라는 걸 눈치챈 신사가 그간 사탄의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주현은 서둘러 사과하고 대검을 휘둘러 사탄에게 출혈을 입혔다.
[파티] 신사 : 후배요?
[파티] 신사 : 블랙님 어리신가 ㅋㅋ
“……미치겠네.”
괜히 말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신사에게 조금의 먹이도 던져 주면 안 됐다. 이제 나이가 꽤 어린 여성 유저라는 인식이 박혔을 게 분명했다. 한숨을 삼키며 사탄에게 묵묵히 공격을 쏟아부었다. 얼른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귓속말] 밍채 : 형 언제 나와요
분명 로그아웃 상태였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접속한 밍채가 귓속말을 걸어왔다. 후배한테 음료수를 건네받는다고 한눈을 팔았을 때 접속한 듯싶었다. 이제는 누구랑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언제 나오느냐는 독촉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좀 걸릴 것 같은데
[귓속말] 밍채 : 네
2페이즈가 시작되고 주현은 사탄이 나무에 올라가는 타이밍에 맞춰 경직 스킬을 사용했다. 주현의 캐릭터가 나무로 달려가는 동안, 신사는 마나를 아끼려는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
캐릭터의 방향을 잘못 맞췄는지 나무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파티] 블랙 : 헐 죄송해요
[파티] 신사 : ㅋㅋㅋㅋ 괜찮아요
죄송하다고 채팅을 쳤지만, 딱히 죄송할 일은 아니었다. 신사도 스킬을 사용했다면 사탄에게 원활한 경직을 먹일 수 있었을 테다.
사탄이 몸을 앞뒤로 흔들자 가지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덜렁이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패턴 단순화를 시키지 못한 탓에 빨간 열매들 사이에 녹색 열매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직을 실패한 건 아쉽지만, 녹색 열매야 먹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주현은 캐릭터를 요리조리 움직여 빨간 열매 하나를 습득했다.
[파티] 신사 : ;;
신사가 별안간 땀을 흘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살피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열매를 먹는 구간에서 죽을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열매를 두 개 이상 먹게 되면 사망하는 과식 상태였다.
이건 게임을 끝낼 기회였다. 먼저 죽은 건 신사였으니 자신이 따라서 죽는다고 하여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테다. 나무에서 내린 사탄은 들고 있던 창으로 땅을 헤집어 놓았다. 땅이 격자 형태로 나누어지며 안전지대에 따뜻한 볕이 들었다. 주현은 일부러 캐릭터를 우왕좌왕 정신없이 움직였다.
[파티] 신사 : ?
뒤이어 땅이 흑백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암흑에 휩쓸린 주현의 캐릭터가 체력을 몽땅 잃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주현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을 내뱉었다.
[파티] 블랙 : 실수로 초록열매 먹었네요;;
실제로 먹은 건 빨간 열매였지만, 신사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파티] 신사 : 저도 실수했으니 뭐 ㅋㅋ 재도전 ㄱ?
열매 패턴에서 죽을 정도면 본인이 듀오 클리어할 실력이 아니란 걸 깨달을 만도 한데 신사는 포기를 몰랐다.
[파티] 블랙 : 제가 무기도 그렇고 패턴 숙지도 안 돼서요
[파티] 블랙 : 사람 더 모아서 하면 안 되나요?
보스 패턴은 밍채 덕분에 질리도록 외웠지만,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티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시도했다. 쉽게 놔줄 것 같지 않으니 사람이라도 더 불러 모아야 했다.
[파티] 신사 : 네 ㅋㅋ
신사는 곧바로 순응했다. 혹시나 의견을 무시한 채 재도전을 하자고 우기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능청스럽게 웃은 신사는 파티를 유지한 채 밖으로 나왔다.
[길드] 신사 : 사탄 가실 분?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파티 맞죠?
[길드] westone : 저요
[길드] westone : 월월님도요
[길드] 월월월 : 저 레이드 중인데염??????
[길드] westone : 곧 끝나잖아요
[길드] 월월월 : ;;;;;
[파티] 블랙 : 신사님
[파티] 신사 : 네
용기 내어 신사의 닉네임을 부른 주현은 다시 성별을 말할까 말까 반복하여 고민했다. 성기사들의 유대감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사심이 담긴 뉘앙스를 풍기는 신사를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이미 타이밍을 놓쳤지만, 이 이상 미룬다면 신사가 자신을 여자로 착각하고 고백을 해 올지도 몰랐다. 주현은 고심하던 말을 채팅으로 옮겨 담았다.
[파티] 블랙 : 왜 잘해주세요?
“……질문이 좀 이상한데.”
뱉어 놓고 후회했다.
[파티] 블랙 : 다른 건 아니고..
[파티] 블랙 : 저희 원래 안 친했잖아요
말을 수습해 봤지만 그래도 이상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진짜 이상한 사람은 신사였으니, 주현은 포기하고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파티] 신사 : 아 ㅋㅋㅋㅋ 동생 생각나서요
[파티] 블랙 : ?
동생 생각난다고 게임에서 만난 유저한테 잘해 주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지금껏 내버려 둬 놓고 동생 타령이라니. 신사에게 받았던 강화석은 나중에라도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목적이 음흉해 보이는 사람한테 빚지고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려줬다가는 자기를 의심하냐고 따져 물을 눈치여서 몸을 사렸다.
[파티] 신사 : 그리고 제가 제자를 키우고 있거든요
[파티] 블랙 : 네?
[파티] 신사 : 성직자 쪽에도 하나 있고 ㅋㅋㅋ 성기사는 블랙님으로 하려고요
주현도 모르는 새에 스승이 생겼다. 고작 하루 배웠는데 제자 삼겠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고, 주현이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하는 꼴도 어이가 없었다. 황당한 점이 한둘이 아녔지만, 트집 잡고 싸울 여력도 없거니와 길드 마스터인 신사와 분란을 만드는 건 주현에게 손해였다.
길드를 옮길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러기엔 정이 든 길드원이 너무 많았다. 서쪽이 신사를 싫어하지만, 지금껏 길드를 옮기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았다.
[파티] 신사 : 저 그럼 담배 좀 ㅋㅋ
[파티] 블랙 : 네
갈 거면 서쪽이라도 초대를 해 주지, 끝까지 파티에 둘만 남겨 놨다. 이렇게 꽉 막힌 사람하고 대화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름이 여자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토록 지독하게 엉겨 붙는데, 진짜로 성별이 여자인 유저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서쪽이 성별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몸소 체험 중이었다.
게임에 워낙 미친 인간이 많다고들 하지만 길드 마스터가 그럴 줄은 몰랐다. 주현에게 신사의 이미지는 자기 자랑이 심하지만, 길드에 애착이 크고 꽤 실력이 있는 성기사 유저였다. 그랬던 이미지가 와장창 박살이 나다 못해 부스러기가 되었다.
신사에게 이미 남자라고 말을 했고, 신사도 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백이라도 했으면 미친놈이라고 어디에 박제라도 해 둘 텐데, 그런 것도 아니라서 주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 하다 이런 일에 무력함을 느껴야 한다니.
주현은 해탈한 얼굴로 서쪽에게 떠보듯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같이 길드 나가실래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여자로 알고 있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남자라고 했는데도 안 믿어요 ㅅㅂ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성격이 신사 이상형인 거 아니에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더 싫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서쪽님 사탄 간다고 손들었는데도 파티에 초대 안 해주는 것 봐요
[귓속말] westone : ㅁㅊ ㅋㅋㅋㅋㅋㅋㅋㅋ 벌써 남친 행세하네요
신사가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운 동안 서쪽과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때, 주현의 캐릭터와 똑같은 제복을 입은 캐릭터가 불쑥 나타나 곁을 파고들었다. 신사의 머리카락 색이 붉다는 걸 알지만, 그간 받은 고통 때문에 판별력이 떨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캐릭터를 떨어뜨리자,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체] 밍채 : 제가 벌레예요?
왜 피하느냐는 말을 참 특이하게도 했다.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밍채의 캐릭터 뒤로 같은 옷을 입은 신사가 보였다. 저 인간이 저기에 서 있단 걸 아는데도 왜 그렇게 놀랐는지 주현도 알 수가 없었다.
[전체] 밍채 : 형 옷 바꿔요
[전체] 블랙 : 옷?
[전체] 밍채 : 기다려요
그 말을 남겨 두고 밍채는 거래소가 있는 상가 방향으로 캐릭터를 움직였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광장이에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귓속말] westone : 밍채님 상가에 있길래 여기 있으실줄
[귓속말] westone : 그럼 저도 광장으로 가야겠네요
서쪽이 광장에 도착하는 것보다 우편함 아이콘에 불이 들어오는 게 먼저였다. 반짝이는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하자, 밍채로부터 도착한 우편이 주현을 반기고 있었다. 다만…… 보낸 옷이 조금, 아니… 많이 난해했다.
캐릭터의 이목구비와 체형을 완전히 가려 버리는 인형 탈 아바타였다. 닉네임이 블랙이라고 까맣게 염색해서 준 모양인데, 불에 탄 행색 같아서 오히려 무서웠다. 눈동자는 왜 또 빨간 건지, 잔뜩 화난 것처럼 보였다.
보내 준 성의가 있어서 착용하자, 마침 광장에 도착한 서쪽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여왔다.
[전체] westone : 그게 뭐예요..?
[전체] 블랙 : 밍채가 줬어요
[전체] westone : 아..
[전체] westone : 전 커플 없이 살래요
[전체] 블랙 : 아니 이게 뭐가 어때서요
[전체] westone : 블랙님 많이 입으세요..^^
밍채가 선물한 옷은 <인형의 집> 던전을 콘셉트로 한 아바타였다. 목덜미가 뜯겨 솜이 삐죽 튀어나오고, 눈을 가로지르는 바늘 자국이 있고, 정수리에는 녹슨 도끼가 꽂혀 있긴 했지만, 밍채가 고심해서 보낸 아바타라고 생각하면 귀엽게 느껴졌다.
멀쩡한 곰돌이 버전도 있는데 왜 굳이 공포 버전을 보낸 건지 의중을 알 수 없긴 했다. 공포 버전은 할로윈 때나 입는 옷이었다.
주현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얻어터진 곰돌이를 선물한 건, 자신도 이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포부인 걸까?
이윽고 밍채가 광장에 도착했다. 밍채도 같은 공포 버전 곰돌이 인형 탈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게 염색한 탓에 털 곳곳에 묻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전체] westone : 쥐여 터진 곰돌이로 커플룩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전체] 블랙 : 쥐여 터졌다뇨
[전체] 월월월 : ???????????
때마침 레이드를 끝내고 광장으로 돌아온 월월월이 마주한 건 피로 물든 두 마리의 곰돌이 인형이었다. 안 그래도 <인형의 집> 던전을 싫어하는 월월월은 둘의 행색을 보고 기겁했다.
[전체] 월월월 : 옷도 많은데 왜 이걸???
[전체] westone : [귓속말] 월월월에게 : 두분 취향이래요
[전체] 월월월 : 아
[전체] 블랙 : ㅅㅂ 다 보이잖아요
[전체] 블랙 : 그리고 제 취향 아니에요
[파티] 신사 : 저 왔어요 ㅋㅋ
[파티] 신사 : 광장에 있는분들 다 초대하면 되나?
광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을, 구태여 파티 채팅으로 말하는 이유를 주현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길드] 신사 : 사탄 가실 분?
[파티] 신사 : 밍채님 가나요?
[파티] 블랙 : 네
[길드] 잔혹동화 : 저요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잔혹동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잔혹동화 : 엇 힐러 다 있네요?
밍채는 성직자, 월월월은 음유시인, 잔혹동화는 연금술사였다. 연금술사는 마법 가방을 무기로 사용하는 힐러 계열 직업으로 정령사, 소환사와 같은 마법사의 탑 출신이었다. 같은 힐러인 성직자와 음유시인보다는 공격에 특화되고 힐량이 적어 파티에 따라 역할이 다른 게 특징이었다.
[파티] 신사 : 그럼 이대로 ㄱ?
평소였으면 좋다고 냉큼 대답했을 서쪽이 조용했다. 다들 말이 없자 신사는 비공개 방을 개설했다. 대기실에 입장하면서 방 설정을 뜯어봤는데 웬일로 딜 기여도 표시 기능이 켜져 있었다. 아직도 밍채를 이기겠다는 헛된 목표를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기여도 켜져 있어요
[귓속말] westone : 2등 갑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쪽에게 알려 주자 예상대로 좋아했다. 신사가 서쪽의 직업인 포병을 빈집이라고 매번 깎아내리던 게 앙금으로 굳어 있었다. 서쪽은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고 늘 이를 갈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 되었다.
서쪽의 정보 창을 열어 랭킹을 확인하자 어느새 8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랭킹 왜 이렇게 올랐어요?
[귓속말] westone : 반지를 만들었으니까요~
<분노의 사탄>에서 나오는 재료로 만드는 게 반지였다. 최종 아이템인 만큼 장비를 늦게 구하면 랭킹이 뒤로 밀리는 구조였다.
이번엔 밍채의 정보 창에 들어가 랭킹과 장비를 확인했다. 아직도 새로운 반지를 구하지 않았고, 랭킹은 19위에 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이대로면 얼마 후 20위권으로 내려가게 된다.
[귓속말] westone에게 : 밍채 반지가 아직 음률인데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프러포즈 기다리시나 보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뭐라는 거예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반지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주현은 밍채와 달리 장비를 맞춰 줄 재력도, 그 장비에 치명타 확률 증가 옵션을 달아 줄 운도 없었다. 우연히 재료를 먹게 된다면 모를까,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음률이니까 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귓속말] westone : 반지가 음률이라고 밀릴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귓속말] westone : 블랙님이 죽지만 않으면 밍채님이 1등일 것 같은데요
주현이 죽게 되면 밍채가 부리나케 달려와 부활 스킬을 걸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몬스터가 자기를 두들겨 패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기에 성직자 기본 버프가 날아가면서 딜 기여도가 폭삭 깎였다.
[파티] 신사 : 곰돌이 귀엽네요 ㅋㅋㅋㅋ
밍채가 얼마만큼 딜을 낼지 서쪽과 함께 예측을 해 보는데, 느닷없이 신사가 둘의 코디를 언급했다. 광장에 서 있었을 때도 곰돌이 인형 탈을 입고 있었던 터라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기엔 시기가 이상했다.
[귓속말] westone : 와 ㅋㅋㅋㅋㅋ;;
채팅 창에 도착한 서쪽의 귓속말과 함께 주현은 경악했다. 신사가 곰돌이 인형 탈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사는 공포 버전 인형 탈이 없는지 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곰돌이였다.
[귓속말] westone : 눈치 진짜 레전드네요
[파티] 밍채 : 왜 따라 해요?
자꾸만 공통점을 만드는 신사의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주현만이 아니었다. 따져 묻는 밍채를 보고 주현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다른 옷은 몰라도 곰돌이 인형 탈만큼은 따라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어야 했다. 옷을 선물한 밍채의 기분을 고려하지 못한 건 주현의 실수였다.
[파티] 신사 : 원래 자주 입던 옷인데요?
[귓속말] westone : 자존심도 없나..
[파티] 밍채 : 자주 입었다고요?
[귓속말] 밍채에게 : 참아
[파티] 밍채 : 등산복이나 입고 다녔으면서
[귓속말]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월월월과 잔혹동화는 말이 없었고, 서쪽은 드라마 보듯 싸움을 즐겼다. 밍채가 말하는 등산복은 아무래도 [한낮의 바캉스 세트 (남)]를 말하는 듯했다. 당시 신사의 염색을 본 모두가 등산복 같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신사에게 말을 전하지 못했었다.
밍채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확실히 용감했다.
[파티] 신사 : 밍채님 좀... 어리신가?
[파티] 신사 : 유치하시네 ㅋㅋ
주현과 같은 생각을 한 신사가 나이로 공격해 오자 밍채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파티] 밍채 : 네 저 어린데요
까마득하게 어린애 이겨 먹는 것만큼 모양새 빠지는 일은 없었다. 신사는 결국 빨간 장미 브로치가 달린 검은 연미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주현은 이 쪄 죽을 만큼 더운 여름날에 곰돌이 인형 탈을 두고 싸우고 있단 게 믿기지 않았다.
[파티] 잔혹동화 : 시작할까요?
잠자코 지켜보던 잔혹동화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모두가 준비 상태였지만 밍채와 신사가 옷으로 말다툼하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졌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드디어 사탄이 있는 동산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파티] 신사 : 밍채님 미리 말해두는데 힐 안 할 거면 지금 파티에서 나가세요 힐 안 하는 힐러 필요 없습니다
[파티] westone : ?
[파티] 월월월 : 힐러 넘치는데 힐 안 해도 되지 않나염?
[파티] 잔혹동화 : 저랑 월월님이 힐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파티 분위기가 살벌해서 숨이 막혔다. 아직 사탄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 싸움이라니. 어떻게든 클리어까지는 가능하겠다만 누구 하나 사사게에 오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 치유의 가호 》
신사가 미리 경고해 둔 탓인지 단체 힐의 시작을 밍채가 열었다. 보통 다른 힐러가 있으면 밍채는 단체 힐을 묵혀 두다가 주현이 아파할 때쯤 사용했었다.
어린애한테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닌가. 힐은 밍채가 본래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주현은 괜히 구시렁댔다.
《 빛의 희생 》
밍채가 걸어 준 보호막이 주현의 캐릭터를 원형으로 감싸 안았다. 뒤이어 음유시인인 월월월이 공격력과 공격 속도 버프를 사용했다. 밍채는 그 위에 한 겹 더 공격력 버프를 쌓았다. 그에 신이 난 서쪽이 펑펑 포탄을 터뜨리며 요란하게 뛰어다녔다.
《 기사의 맹세 : 5초간 받는 공격의 피해량이 30% 감소합니다. 》
“……진짜 미쳤나.”
조금이라도 방심할 때면 신사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사의 맹세’는 주현도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었지만, 받는 처지가 되니까 소름이 끼쳐서 얼굴빛이 새하얘졌다.
[파티] 신사 : 블랙님 저한테 맹세 ㄱ
[파티] westone : 탱이 왜 탱한테 맹세를 주나요??
[파티] westone : 랭킹 하락해서 연약한 밍채님한테 주세요 ㅋㅋㅋ
서쪽은 분명 포탄을 쏘고 있는데 채팅을 어떻게 치는 건지 의문이었다.
[파티] 블랙 : 그냥 안 쓸게요
밍채한테 사용했다간 신사가 또 트집을 잡을 게 분명했다. 전적으로 밍채의 편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큰 싸움 없이 무사히 게임을 마치고 싶었다. 잔혹동화는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데 어쩌다가 휘말려 강제로 싸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대화가 단절되자 사탄의 체력이 깎이는 속도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1페이즈를 넘기고, 2페이즈가 열렸다. 여섯 명인 것치고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요즘 따라 계속 인원이 부족한 상태로 게임을 하니, 주현도 사람이 없는 것에 익숙해졌다.
발을 야단스럽게 굴며 사탄이 나무 위에 올라타자 주현은 버릇처럼 손가락을 뻗어 경직 스킬 단축키를 눌렀다. 주현의 캐릭터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 나무에 어깨를 부딪쳤다.
[파티] westone : 신사님
그 광경에 서쪽이 신사를 불렀다. 서쪽은 웬만해서 신사와 말을 섞지 않았다. 신사를 ‘님’이라고 칭해야 하는 것도 싫고, 말도 안 통한다는 이유였다.
[파티] 신사 : 네
신사가 서쪽에게 응답할 때, 사탄은 힘껏 가지를 흔들어 붉은 열매를 잔디 위로 떨어뜨렸다. 서쪽은 앞으로 이동해 붉은 열매 하나를 집어 먹고 말을 이어 갔다.
[파티] westone : 경직은 하셔야죠
[파티] westone : 가만히 보고 계시길래 ㅎㅎ;
[파티] 신사 : 어차피 블랙님이 하실건데 제가 또 마나를 써야하나요? ㅋㅋㅋㅋ
[파티] westone : 그렇게 따지면 밍채님도 힐할 필요 없지 않나요..?
[파티] 신사 : 그건 밍채님이 힐러분들이랑 상의해야죠 ㅋㅋㅋ
[파티] westone : 신사님은 블랙님이랑 협의가 됐다는 말인 거죠?
땅이 격자로 나누어지고, 안전지대에 빛이 들어오고, 다른 구역이 암흑에 휩싸여 쓸려갔지만, 누구 하나 죽지 않은 상태였다. 살벌한 언쟁이 오가는데도 레이드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파티] 신사 : 블랙님이 저보다 약하니까
[파티] 신사 : 경직하는 게 맞죠
이상한 논리였다. 물론 보통 파티에서 포지션이 겹치면 스펙이 낮은 사람이 경직을 맡는 게 맞았다. 하지만 신사의 말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펙이 낮은 사람이 귀찮은 일을 도맡는 거였다면, 신사는 밍채에게 힐을 요구해선 안 됐다. 밍채는 힐러인 셋 중에서 가장 랭킹이 높았으며, 실력 역시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빛이 들어오는 안전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밍채는 주현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말 한마디 없이 내내 조용한 게 불안했다. 주현은 제발 레이드가 무탈하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밍채의 캐릭터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다들 다른 구역으로 피하는데 둘만 붙어 다니는 게 신기한지, 마지막으로 피할 땐 신사가 같은 구역 안으로 들어왔다. 서쪽의 말대로 눈치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3페이즈에 진입하고 사탄이 닥치는 대로 열매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여섯이나 있어서 사탄의 시선이 분산된단 점이 좋았다. 듀오로 클리어했을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대검을 세우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사탄이 밍채를 향해 썩은 열매를 던졌고 밍채는 급작스럽게 몸을 틀며 책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는 것은 성직자의 기본 공격이었다. 밍채는 이 기본 공격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책을 펼쳐 일으킨 바람에 튕겨 나간 썩은 열매는 맞은편에 있던 신사의 옆통수를 강타했다.
[귓속말] westone : 와 개멋있어요
[귓속말] westone : 머리가 저렇게 작은데 어떻게 맞히시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는 주현은 환장하겠는데, 구경하는 처지인 서쪽은 감탄하다 못해 열광했다. 썩은 열매를 정통으로 맞은 신사는 당연하게도 숨이 끊겼고, 파티의 분위기도 덩달아 싸늘해졌다.
[파티] 잔혹동화 : 살릴까요?
[파티] 신사 : 그럼 누워있을까요?
[파티] 잔혹동화 : 살릴게요
잔혹동화가 신사가 있는 곳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허리춤에 맨 마법 가방을 열자 그곳에서 터져 나온 기묘한 보랏빛 연기가 신사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었다.
[귓속말] 월월월 : 블랙님......
[귓속말] 월월월 : 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저도 모르겠어요..
모니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왜 공기가 숨 막히게 느껴지는 걸까. 주현은 얼른 사탄이 죽길 바라며 힘껏 대검을 꽂아 넣었다. 무기를 진작에 20강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15강밖에 안 되는 무기가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가 없었다.
신사는 원래 답이 없는 인간이라고 쳐도, 밍채가 오늘따라 유독 예민했다. 성직자가 성능 하향을 당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고, 성직자를 받지 않겠다는 시시로의 말에도 순응하며 파티를 나가던 게 밍채였다.
지금까지 밍채가 싫어하던 사람은 해 봤자 양궁달인 하나인 것 같은데. 길드 창고 털이범인 양궁달인과 길드 마스터인 신사는 공통점이 없었다. 해 봤자 같은 재앙 길드라는 것 정도.
[파티] 월월월 : 와
[파티] 월월월 : 수고하셨어염
[파티] westone : 수고하셨어요~!
[파티] 잔혹동화 : 수고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수고하셨어요
어느덧 체력이 바닥난 사탄이 눈을 감은 채 잔디 위로 쓰러졌다. 사탄이 힘을 잃자 어둠에 좀먹혔던 언덕이 색채를 되찾았다. 다들 수고했다고 말을 나누는 와중에 밍채와 신사는 입이 무거웠다.
[SYSTEM] 신사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분노의 열매]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파티] 월월월 : ㅊㅊㅊ염
[SYSTEM] 밍채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잔혹동화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평소에 먹어 보지도 못했던 아이템이 주현의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정말로 밍채한테 프러포즈하라는 뜻인 걸까. 치명타 옵션을 띄울 자신은 없지만, 재료 얻은 김에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보상 메시지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모두가 기다리던 기여도 정산이 완료되었다.
《 1위 westone 23.79% 》
《 2위 밍채 21.01% 》
《 3위 신사 19.07% 》
《 4위 잔혹동화 15.91% 》
《 5위 블랙 10.32% 》
《 6위 월월월 9.90% 》
1위를 가져간 건 서쪽이었다. 본래 서쪽이었으면 대놓고 자랑했을 텐데, 파티 분위기가 엉망이라 자축하고 있는지 조용했다. 밍채는 반지를 구하지 못했는데도 힘들이지 않고 2위를 차지했다. 경직 스킬에 사용할 마나를 아껴 가면서 딜을 한 신사는 3위였다.
[파티] 신사 : 밍채님 제가 블랙님 지인이라서 참는거예요
[귓속말] westone : 지가 언제 참았다고
똑같은 생각을 한 서쪽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주현은 순간 스스로 친 채팅인 줄 알았다.
[파티] 블랙 : 신사님 평소에 밍채가 힐 안 하고 다닌 건 맞는데요
[파티] 블랙 : 딜사이클 어떻게 돌리든 본인 자유 아닌가요?
[파티] 신사 : 블랙님 ㅋㅋㅋ 다른 힐러들은 마나가 넘쳐나서 힐을 하나요?
[파티] 신사 : 월월님이나 동화님도 딜하고 싶은 거 참고 힐하는겁니다
[파티] 월월월 : 전 힐 좋은데염???
신사의 발언에 월월월이 딴지를 놓았다. 서쪽처럼 신사를 싫어해서는 아니었고, 월월월은 힐 하는 걸 좋아하는 몇 없는 힐러 유저였다. 프리딜[3] 타임이 오더라도 아파하는 유저가 있다면 마나를 힐 스킬에 양보하곤 했다. 그 때문에 딜 기여도가 힐러들 중에서도 꼴찌로 기록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파티] 블랙 : 그건 힐러들끼리 조율했어야 하는 일인데 신사님이 참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귓속말] westone : 전 이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싸우는 거 싫어하셨잖아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지금도 싫은데요??
[파티] 신사 : 음
예나 지금이나 말싸움하면서 힘 빼는 건 질색이었다. 안 그래도 피시방은 분당 돈이 차감되고 있는데 이렇게 다투면서 시간을 허비해야 하나 싶었다. 다른 때였으면 유들유들하게 그냥 넘어가고 말았을 일이지만, 밍채가 엮이면 그러기가 어려웠다.
[파티] 신사 : 네 뭐
[파티] 신사 : 제가 예민했던 것 같네요
아예 꽉 막힌 인간은 아니었는지 신사가 제 잘못을 인정했다. 싸움이 크게 번지는 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다행히 수습할 수 있어 보였다.
[파티] 블랙 : 밍채 너도 열매로 신사님 죽인건 사과하고
서로 사과하면 원만한 끝맺음이 될 테다.
웬만해서 유저끼리 척지지 않는 게 좋았다. 상위 던전으로 올라갈수록 유저의 숫자가 적어지고, 만났던 사람을 또 마주치는 탓에 대체로 아는 얼굴들이었다. 사람을 거르면서 파티를 만드는 것도 몹시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 되도록 싸움을 피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주현이 길드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거나, 밍채와의 커플이 끊긴다거나, 신사가 게임을 접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둘은 마주칠 소지가 다분했다.
주현은 밍채와 오래오래 무탈하게 게임을 하고 싶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
하지만 밍채의 생각은 달랐는지, 채팅 창에 보이는 건 사과가 아니라 파티를 탈퇴했다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귓속말] westone : 헐 밍채님 삐쳤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아니 왜요?
[귓속말] westone : 중학생 울리고! 너무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아니..
신사한테 사과하라고 말한 게 그렇게나 서운했나?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의 자존심을 잘못 건드린 게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을뿐더러, 밍채는 이미 로그아웃해 버린 상태였다.
[파티] 신사 : 어리시다니까....ㅋㅋㅋ
[파티] 신사 : 제가 이해할게요 ㅋ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유치하게 군 건 마찬가지면서 혼자 어른인 척하는 신사를 끝으로 파티가 깨졌다. 밍채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켜 놨던 친구 목록 창에서 신사의 이름이 지워졌다. 길드 채팅에 신사가 퇴장했다는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으니 로그아웃은 당연히 아니었다. 신사가 주현을 친구 목록에서 삭제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할 땐 놔주지도 않더니, 밍채 편들었다고 단번에 버림을 받은 상황이 주현은 어이가 없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 방금 신사한테 친삭 당했어요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되게 빡치셨네요
[귓속말] westone : 신사한테 님이라고 안 하시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길드 나갈 거예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안 나가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 길마 바뀌는 그날까지 같이 버텨봐요
신사야 원래 데면데면했던 사이였으니 그때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신사가 친구를 삭제하든 말든 관심 따위 없었다. 중요한 건 삐친 밍채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 주느냐였다.
밍채도 로그아웃했으니 더는 컴퓨터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무더위가 주현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선풍기로 어떻게든 버티자는 마음으로 게임을 종료했다. 밍채에게 반지를 만들어 주려면 제작 레벨부터 올려야 했다.
집에 가서 할 일을 그렇게 정리하고 있다가, 출입문을 지나치는 커다란 덩치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둑한 조명에도 존재감이 뚜렷한 녀석이었다. 이를 꽉 깨문 탓에 모자챙 아래로 드러난 턱 라인이 선명했다. 게임을 하다가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는지 얼굴 한번 살벌하다 싶었다.
주현은 마저 컴퓨터를 정리했다. 화면이 암전되는 걸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혹시나 잊은 물건이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속 식히느라 다 마셔 버린 음료 캔 뒤, 구석에 뒀던 투명한 컵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그대로 두고 피시방을 나왔다.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꾸역꾸역 챙기던 3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왜 임채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그간의 기억을 밟았다.
살면서 그렇게 황당하게 구는 놈은 처음이었고, 고백한 것도 아닌데 거절당한 게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나니까 자꾸 곱씹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쉬이 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진저리나게 싫기도 하지만, 채하가 보여 준 다정함이 좋았다.
그래 봤자 다 지난 일이었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풍기를 켠 주현은 컴퓨터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버릇처럼 혼돈의 설화에 접속한 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친구 목록을 훑었다. 서쪽과 월월월이 여전히 접속 중이었으며 밍채는 아쉽게도 로그아웃 상태였다.
한숨을 쉰 주현은 캐릭터를 움직여 채예스 상가로 향했다. 아이템 제작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제작 퀘스트부터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기와 방어구 제작은 대장간에서, 장신구인 액세서리 제작은 공방에서 배울 수 있었다. 초보자 시절, 이곳저곳 정신없이 쏘다닌 후로 공방에 들르는 건 처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풍경이 주현을 반겼다. 원목의 진열대, 그 위를 장식하는 공예품, 각종 도구.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노르스름한 햇볕이 불이 켜지지 않은 공방을 은은하게 밝혔다.
[NPC] 공방 주인 : 장신구 만드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 네.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
[NPC] 공방 주인 : 맨입으로는 안 되지! 마침 시곗줄이 필요했어. 구해 줄 수 있겠니?
【 네, 당연하죠! 】
공방 주인의 제안에 캐릭터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대화가 끝나자 화면 오른쪽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공방 주인이 요구한 [시곗줄]은 지난 수호자 퀘스트 때처럼 어느 일반 던전에서나 얻을 수 있는 재료였다.
[전체] 월월월 : 블랙님 ㅎㅇ염
[전체] 블랙 : 안녕하세요
공방을 나오면서 거래소 앞에 서 있던 월월월과 마주쳤다.
[전체] 월월월 : 악세서리 만드시게염?
[전체] 블랙 : 네
[전체] 월월월 : 그거 되게 오래걸릴텐뎀;;
[전체] 블랙 : 제작자 붙은거 갖고 싶어서 ㅎㅎ
아이템 제작을 배우는 이유는 유저들마다 다양했다. 돈을 벌고 싶어서, 거래소에 올라온 장비가 비싸서. 가장 많은 이유는 장비 제작자 표시를 자신의 닉네임으로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커플들끼리는 서로의 장비를 제작해, 상대의 닉네임을 제작자로 달아 놓기도 했다. 설명만 들으면 왜 그런 성가신 일을 자처하나 싶겠지만, 막상 그렇게 장비 제작자 닉네임을 통일해 놓은 유저들을 보면 나도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주현에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본인이 아이템을 제작하게 되면 옵션작도 스스로 해야 했는데, 운이 없는 주현 같은 유저들은 평생 하위 옵션을 달고 지내는 최악의 사태도 더러 있었다. 또 원하는 옵션을 띄웠다고 하더라도 거래소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이 나가는 탓에, 웬만큼 고인물 유저가 아닌 이상 옵션작이 끝난 장비를 사서 쓰곤 했다.
[전체] 월월월 : 그럼 지금 퀘스트 하러 가시는 건가염?
[전체] 블랙 : 네
[전체] 월월월 : 도와드릴게염 초대주세염
[전체] 블랙 : 감사합니다
선뜻 손을 내미는 월월월의 호의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냉큼 초대를 보냈다. 어떤 던전으로 할까 고민하던 주현은 수호자 퀘스트 때 밍채와 함께 돌았던 <망각의 숲>을 택했다. 짧은 길이의 던전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밀려오는 해변>, <얼어붙은 절벽>과 달리 길이 조금 꼬였을 뿐, 몬스터만 제때 잡는다면 그 어떤 던전보다 빠르게 끝마칠 수 있었다.
[파티] 월월월 : 망숲????
[파티] 블랙 : 바꿀까요?
[파티] 월월월 : 아념 망숲 고르는 분 처음 봐서염 ㅋㅋㅋ
[파티] 블랙 : 밍채랑 망숲 해보니까 빨리 끝나더라고요
[파티] 월월월 : 넴 ㄱㄱㄱ
대기실에 들어온 월월월이 준비를 마치자, 파티장인 주현이 게임을 시작했다. 둘은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숲으로 입장했다. 구름이 낀 하늘에선 가느다란 빗줄기가 끊어져 내리고 있었다.
월월월은 하프의 줄을 튕겨 만든 음표로 독버섯을 공격했다. 커다란 대검을 사용하는 주현은 공격 속도가 느려 월월월에게 얹혀 가는 수준이었다. 주현이 독버섯 하나를 잡을 때, 세 마리의 독버섯을 처치한 월월월은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포탈을 밟고 섰다. 주현은 속으로 월월월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올리며 스킵 버튼을 눌렀다. 혼자였으면 세월아 네월아 잡몹 처리하느라 던전에 갇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월월월이 하프를 연주해 다수의 독버섯을 잡는 동안, 주현은 거의 구경하는 수준으로 독버섯 한 마리의 숨을 끊어 놓았다. 포탈을 밟는 것도 월월월의 몫이었다. 성기사는 공격 속도도, 이동 속도도 느린 일반 던전 최악의 직업 중 하나였다.
조금 전 지나쳤던 첫 번째 장소로 복귀했다. 다시 도착한 풀숲에서 중간 보스인 이로가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이로를 보며 주현은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성기사와 음유시인은 속박 스킬이 없었다. 이로의 숨을 단번에 끊어 낼 수 있던 건 밍채가 성직자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가 떨어뜨린 마법 약이 눅눅한 땅 위로 스며들고, 그에 힘입어 스멀스멀 버섯 무리가 되살아났다. 광경을 지켜보는 주현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스쳤다.
《 영웅들의 합창 : 10초간 공격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
던전 선택에 실수가 있었단 걸 모르는 월월월은 스킬을 써 가면서 성실히 독버섯을 해치웠다. 하지만 바람을 자유롭게 가르며 마법 약을 흘리는 이로가 있는 이상, 독버섯은 몇 번이고 끈질기게 부활했다. 주현은 공중에 있는 몬스터를 잡기 힘든 탓에, 이로를 상대하는 월월월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로와 마지막 독버섯까지 말끔히 없앤 월월월은 그제야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로 해주세염 ㅠㅠㅠ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는 포탈을 밟고 선 월월월의 캐릭터가 지쳐 보였다. 딱히 월월월을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까 그를 고달프게 만들었다. <밀려오는 해변>과 <얼어붙은 절벽>을 뒤로하고 <망각의 숲>을 고른 주현은 의심받아 마땅했다. 열심히라도 했으면 모를까. 잡몹 처리는 월월월이 도맡았다.
[파티] 블랙 : 죄송해요.. 속박 없단 걸 까먹어서
[파티] 월월월 : 속박 있으면 다른가염???
[파티] 블랙 : 밍채는 이로 속박해서 잡더라고요..
[파티] 블랙 : 그러면 잡몹 리젠[4]이 멈춰서
[파티] 월월월 : 아 헐 그런 방법이 있었네염?
게임에 웬만큼 고인 월월월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간 보스인 이로의 끝도 없는 잡몹 리젠에 당해 보면 던전을 분석할 힘이 없어지긴 했다.
한 번 더 잡몹을 몽땅 처치하고 다시 첫 번째 구역으로 돌아온 둘은 드디어 최종 보스인 아니스와 마주했다. 주현은 푸른 빛이 깃든 대검으로 아니스의 머리를 갈랐다. 고꾸라지는 아니스를 바라보며 다시는 <망각의 숲>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SYSTEM] 블랙님이 [시곗줄]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월월월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월월월 : 바로 나왔네염
“……와.”
한 판 만에 재료를 획득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주현에게는 더더욱. 이 기세로만 가면 반지에 치명타 옵션을 띄우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파티] 블랙 : 월월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파티] 월월월 : 이제 제작하시나염?
[파티] 블랙 : 네
[파티] 월월월 : 재료 드릴까염???
[파티] 블랙 : 아뇨 괜찮아요
[파티] 월월월 : 나중에 필요하면 말하세염
[파티] 블랙 : 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주현의 불찰로 생고생한 월월월을 더 괴롭힐 순 없었다. 파티에서 탈퇴한 월월월은 곧장 레이드로 떠났다. 주현은 힘겹게 얻어 낸 시곗줄을 들고 공방 주인을 찾아갔다. 시곗줄을 건네받은 공방 주인은 액세서리 제작 레시피를 품삯으로 지급했다.
이제부터는 돈과 시간의 싸움이었다. 거래소에서 재료를 잔뜩 사들인 후 제작을 돌렸다. 제작 레벨이 오르면 다음 레시피가 열린다. 그렇게 되면 하위 제작 레시피로는 레벨을 올릴 수가 없게 되어 다음 레시피로 넘어가야 했다. 완성된 액세서리 품질에 따라 받는 경험치도 달라서, 틈틈이 제작 레벨과 열린 레시피를 확인해야 하는 귀찮은 작업이었다.
캐릭터가 같은 레시피의 목걸이를 한가득 만들어 놓는 동안, 주현은 밀린 빨래를 해결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싶으면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다음 레시피로 넘어갔다. 그러던 중 서쪽이 주현을 불렀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지옥의 컨텐츠에 발을 들였단 소문을 들었어요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역시 그분의 반지인가요?
공방에 붙박여 있단 얘기를 월월월을 통해 들은 모양이었다. 직작은 절대 도전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액세서리는 누가 봐도 밍채의 것이었다. [분노의 열매]를 얻기 전에 서쪽이 프러포즈 타령을 했던 것도 있었다.
[길드] 블랙 : 만렙까지 200 남았어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 괜히 지옥의 컨텐츠가 아니라구요
[길드] 블랙 : 치명 띄우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길드] westone : 그건 밍채님이 직접 띄우셔도 되지 않아요?
[길드] 블랙 : 무기 받을 때 치명 달렸었어요..
[길드] westone : 저런..
액세서리 제작 만렙은 온종일 돌려도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인데 주현은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적어서 문제였다. 당분간은 레이드 가는 시간을 조금 줄여야겠다고 결단했다.
다음 날 퇴근 후 혼돈의 설화에 접속한 주현은 어제 내린 결정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밍채의 닉네임이 로그아웃에 머물러 있었다. 주현은 밍채를 기다리며 공방에 들러 제작을 돌렸다. 이따금 눈알을 굴려 시간을 살펴봤지만, 새벽에 다다르도록 밍채의 닉네임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도 꼬박꼬박 게임 출석을 하던 녀석이 부재중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신사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던 게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신사랑 싸우든 말든 내버려 둘 걸 그랬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고작 하루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 거로 유난 떤다고 하겠지만, 게임 유저로서 하루치 보상의 가치는 자존심과 충분히 맞바꿀 수 있었다. 주현이었으면 몰래 접속해서라도 보상을 받았을 테다.
주현의 게임 인생에 비상이 걸렸다. 반지를 완성해도, 밍채가 돌아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오픈톡으로 말을 걸어볼까도 했지만, 더 마음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괜히 신경을 긁었다가 톡방까지 나가 버리면 연락할 방도가 없어졌다.
주현은 그렇게 기약 없이 밍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 * *
[NPC] 공방 주인 :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고?
【 네. 】
[NPC] 공방 주인 : 맨입으로?
그놈의 맨입. 원하는 게 있다면 빨리 말할 것이지. 목적이 뚜렷한 공방 주인은 일부러 대화를 질질 끌었다.
[NPC] 공방 주인 : 너의 힘을 보여 줘. 아무 레이드나 클리어하고 다시 나를 찾아오면 돼.
이번 퀘스트는 상당히 간단했다. 또 재료를 구해 오라고 하면 귀찮았을 텐데, 레이드 정도야 랜덤 매칭으로 한 판 돌리면 금방이었다. 아무 레이드나 가능하다고 했으니, 직접 던전을 고를 수도 있었다.
밍채랑 함께 파티를 맺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밍채는 오늘도 로그아웃이었다. 주현은 하는 수 없이 홀로 랜덤 매칭에 입장했다. 대기실에 들어간 주현은 마우스를 돌려 유저들의 무기를 훑었다. 검사, 대장장이, 사냥꾼, 정령사. 일반 레이드는 직업을 따지지 않는 편이지만, 힐러 모임을 결성하게 되면 아무래도 딜의 한계치가 있어 파티가 깨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무난한 조합에 걸렸다.
[파티] 새벽바람 : 안녕하세요 ^3^/
[파티] 야미 : 안녕하세요
[파티] 블랙 :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괜찮은 파티였다.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상한 유저는 아니었지만, 인사 잘하는 유저들은 대체로 사교성이 좋아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파티] 새벽바람 : 고고
가장 먼저 입장한 새벽바람이 파티장이었다. 모두가 준비 상태가 되자 로딩 화면을 지나 던전에 입장했다. 주현이 고른 레이드는 <인형의 집>이었다. 신사와의 끔찍한 기억이 묻은 던전이긴 하였으나, 현재 레이드로 취급되는 던전 중 가장 아래에 머물러 있어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인형의 집>보다 일찍 나온 레이드들은 이제 일반 던전으로 분류되어 레이드 취급도 받지 못했다.
《 함성 : 몬스터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
색색의 플라스틱으로 꾸며진 성에 들어간 주현은 첫 번째로 ‘함성’ 스킬을 사용했다. 대검을 하늘 높이 들어 힘차게 내리꽂는데, 옆에서 망치로 바닥에 충격을 주는 딜량감별사가 보였다. 딜량감별사의 직업은 대장장이로, 방금 쓴 건 주현처럼 몬스터의 눈길을 끄는 ‘주목’이라는 스킬이었다. 스킬 이름만 다를 뿐, 효과는 ‘함성’과 똑같았다.
주현은 출발 전 딜량감별사의 장비와 능력치를 확인했는데, 분명히 자신보다 아래였다. 함성이든, 주목이든 몬스터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건 한 명이었던 터라 이렇게 되면 한쪽이 마나를 날리게 된다. 딜량감별사는 자기가 더 약하단 걸 모르는 건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망치를 메아에게 휘둘렀다. 어그로를 먼저 가져간 딜량감별사를 보며 주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몬스터의 어그로를 관리하는 건 탱커의 몫이었으니 주현은 냅다 대검으로 메아의 어깨를 갈랐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메아의 시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티] 딜량감별사 : 어둠 무기 들고 개따이죠?
입장할 때 인사하지 않길래 입이 무거운 유저인 줄 알았는데, 딜량감별사는 선택적으로 채팅하는 놈이었다. 딜량감별사의 무기는 [+20 음률이 깃든 망치]로 주현의 무기와 큰 성능 차이는 없었다. 치명타가 뜨지 않으면 대미지로 질 수도 있는 건데, 어그로를 한 번에 못 뺏었다고 바로 조롱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파티] 새벽바람 : 시비 걸지 마세요
[파티] 딜량감별사 : 성기사랑 친구임? 친구 딜 따이니까 편 들어주네
[파티] 야미 : 차단함
[파티] 딜량감별사 : 랜매 지인팟 개극혐 ㅋㅋ
새벽바람도 야미도 오늘 처음 만난 유저였지만, 딜량감별사 덕에 친구가 되었다. 주현은 스킬을 사용해 푸른 빛이 담긴 검으로 메아의 정수리를 갈랐다. 운 좋게도 치명타가 떴다. 엄청난 대미지에 메아는 주현의 캐릭터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티] 딜량감별사 : 스킬충 ㅋㅋㅋㅋ
쓰라고 있는 마나와 스킬인데 그것마저도 비웃음이 뒤따랐다. 딜량감별사가 떠들든 말든 주현은 제 할 일에 몰두했다. 보스의 어그로를 가져가 파티원에게 공격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탱커의 역할이었다.
주현이 무시로 일관하자, 딜량감별사도 스킬을 이용해 망치로 힘껏 메아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메아가 눈을 번뜩이며 딜량감별사를 쫓았다.
[파티] 딜량감별사 : 어그로 뺏김 ㅋ
신사가 ‘함성’, ‘주목’ 스킬을 탱커 중 한 명만 쓰는 게 효율이 높다고 얘기한 데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신사와 함께 메아를 상대할 땐 확연한 스펙 차이 때문에 주현이 공격을 퍼부어도 어그로를 뺏어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한 수준이면 보스가 두 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그로가 튀게 되었다.
[파티] 야미 : qq님 뭐하세요?
와중에 qqqqw라는 유저는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스태프에서 뻗어 나가는 불덩이가 구석에 쌓여 있던 녹색 블록을 무너뜨렸다. 랜덤 매칭에서 자주 출몰한다는 중국인 유저 특유의 매크로였다.
[파티] 새벽바람 : 걔 중국인인듯
[파티] 야미 : 아; ㅋ
일반 레이드라서 망정이지, 악마 레이드였으면 중간에 파티가 해체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게임에 아무리 다양한 유저가 있다지만 한 판에 빌런을 둘이나 만나는 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허공과 싸우는 정령사, 고의로 어그로를 빼앗아 가는 대장장이. 이 난장판에서 벗어나려면 게임을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유독 밍채가 보고 싶었다. 그럴수록 힐 좀 안 했다고 밍채에게 쓴소리를 뱉던 신사가 원망스러워졌다. 딜러는 힐을 할 수 없지만, 밍채는 힐과 딜 모두 가능한 유능한 인재였다. 더 좋은 거 아닌가?
밍채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주현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파티] 딜량감별사 :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쥬
주현이 밍채를 떠올리는 동안 딜량감별사는 홀로 주절주절 떠들었다. 지금 본인이 장인이라는 건가? 어그로를 완벽히 가져가지 못한 채 비등비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만 봐도 딜량감별사의 실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엔드 스펙[5]인 신사를 음률 반지를 끼고 이긴 밍채 정도는 되어야 장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신경을 쓸 게 많은데 딜량감별사가 시비까지 걸어오니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몸부림치는 메아를 막아 내고 반격을 이어 가자,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메아의 눈동자가 완전히 주현에게 넘어왔다.
마침 스킬을 사용해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딜량감별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현은 때에 맞춰 대검으로 메아의 정수리를 갈랐다. 메아는 이번에도 주현을 택했다.
어그로를 뺏기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상대방의 공격에 맞춰서 똑같이 공격을 넣으면 된다. 몬스터는 더 큰 대미지를 입힌 쪽을 쳐다볼 테니, 딜량감별사가 치명타 대미지를 띄우지 않는 이상 주현을 이기기 힘들었다. 똑같은 타이밍에 공격을 넣는 게 약 올랐는지 딜량감별사는 급기야 욕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파티] 새벽바람 : 그냥 신고하세요
[파티] 블랙 : 그러려고요
[파티] 야미 : 딜량감별사는 무슨ㅋㅋ 못하면서 개나대네
[파티] 야미 : 수고하셨어요
채팅 창을 딜량감별사가 욕으로 도배할 때 셋은 힘을 합쳐 메아를 해치웠다. 보상이 들어오자마자 주현은 재빠르게 파티를 탈퇴했다. 딜량감별사가 귓속말이라도 걸어올 줄 알았는데, 새로운 희생양을 찾으러 랜덤 매칭으로 떠났는지 조용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서쪽님 딜량감별사라고 아세요?
랜덤 매칭을 자주 이용하는 서쪽은 왠지 그를 알 것 같았다. 주현은 질문을 던져 놓고 상가가 있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틀었다. 얼마 안 가 서쪽에게 답이 도착했다.
[귓속말] westone : 걔 사사게스타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westone : 만나셨어요?
[귓속말] westone : 탱커만 보면 시비 건다던데
하긴 성격이 그 모양인데 지금껏 사사게에 박제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신기한 일이었다. 주현은 캐릭터를 공방에 들여보내 놓고 창을 내려 오랜만에 사사게에 들어갔다. 딜량감별사의 닉네임을 검색하니 게시물이 무려 다섯 개나 나왔다. 피해자는 모두 어둠 무기를 든 탱커들이었다. 강화하다가 실수로 어둠 무기를 잃어, 질투에 눈이 돌아 버린 게 아니냐는 추측이 댓글로 달려 있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방금 만났어요
[귓속말] westone : 걔 잘하긴 해서 ㅋㅋㅋ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잘했나? 그렇게 잘한다고 느껴지진 않았는데. 서쪽은 당연하게도 주현이 딜량감별사에게 어그로를 뺏겼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제가 이겼는데..
그사이 계정주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딜 기여도가 뜨지 않는 설정 탓에 정확한 딜량을 확인할 순 없지만, 메아의 어그로는 내내 주현이 이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탱커로서는 충분히 이겼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귓속말] westone : 헐 진짜요?
[귓속말] westone : 걔 재수 없긴 한데 닉값은 하거든요
[귓속말] westone : 무기 20강 얼른 찍으세요 신사 이기러 갑시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장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친구 목록 한구석에 있는 밍채의 닉네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 *
최대 체력 향상, 최대 마나 증가, 방어력 향상 등. 다양한 옵션을 지나쳐 치명타 확률 감소를 만났다. 원하는 옵션이 나오지 않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그 사이에 섞인 감소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게 했다.
[길드] 블랙 : 치명타 증가 존재하는 옵션이 맞나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블랙님 장비에도 달려 있잖아요!!
강화는 스택이 쌓이고 보너스 수치가 올라가 천장이라도 있었지, 옵션작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 악마의 콘텐츠였다. 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원하는 옵션을 달지 못하는 구조라서, 주현은 장비를 맞출 때 옵션작이 끝난 것들로만 구했었다.
치명타 증가 옵션이 달린 수많은 장비가 거래소에서 판매 중이었으니 분명히 존재하는 옵션이 맞는데 주현에게는 숨바꼭질하듯 머리꼭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시간만에 치명타 증가 옵션을 달아 무기를 선물한 밍채가 새삼스럽게 경이로웠다.
[길드] 레아 : 그대로 선물해도 밍채님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길드] westone : 블랙님에겐 죄가 있어요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허얼
당시 로그아웃이었던 레아는 그날의 사건을 몰랐다. 채팅 창을 읽는 중에도 마우스 커서는 옵션 변경 버튼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얼른 치명타 옵션을 띄워 반지를 완성하고 싶었다. 물론 옵션작을 끝마쳐도 강화가 남았지만, 그것까지 해 줄 자신은 없어서 밍채에게 맡기기로 했다.
[길드] 레아 : 그러고 보니까 요즘 밍채님 안 보이시네요?!
[길드] westone : 블랙님에겐 죄가 있어요
[길드] 블랙 : ...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잔혹동화 : 레아님 되게 잘 때리시네요
[길드] 레아 : 네???
대화가 길어지자 그날 현장에 있었던 잔혹동화도 합류했다.
그에 주현은 접속 중인 길드원의 목록을 확인했다. 부지런하게도 어김없이 신사의 닉네임이 있었다. 길드 채팅은 신사도 볼 수 있는 공간인데, 신사를 앞에 두고 얘기하는 게 다들 껄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헉.”
생각 없이 옵션작을 돌리다가 불현듯 시야에 들어온 글자에 경탄했다. 주현은 손에 힘을 줘 마우스를 꽉 붙들었다. 하마터면 또 한 번 옵션 변경 버튼을 누를 뻔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주현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떠오른 옵션을 읽었다.
치명타 확률 증가. 그토록 바라던 옵션이었다. 치명타 옵션이 달린 반지를 사는 것보다 돈을 더 쓰긴 했지만, 제 손으로 옵션작을 성공했단 데에 의의를 두고 감명을 받았다.
[길드] 블랙 : 성공했어요
[길드] 블랙 :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
비싼 아이템을 먹고도 길드에 자랑 한 번 해 본 적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과시하고 싶었다. 채팅 창에 아이템을 태그하자 길드원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길드] 사멍꾼 : 축하드립니당
[길드] westone : ㅊㅊㅊㅊㅊㅊㅊ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 고생하셨어염
[길드] 잔혹동화 : 강화도 하시나요?
[길드] 레아 : 우와 블랙님 축하드려요!!!
[길드] 블랙 : 강화는 스스로.. 하는 거죠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옵션작도 끝냈으니 이제 밍채에게 반지를 전할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밍채와 연락을 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어 마우스를 쥔 손이 미끄러졌다. 게임 창을 내리고 PC 톡을 켜는 과정에 가슴이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작 레벨을 올리고, 수백 번의 옵션 변경을 거쳐서 힘겹게 만든 반지였다. 하지만 밍채가 받아 주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이 무의미할 뿐이었다.
주현이 현재 음률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으니 밍채가 거절한다고 해도 팔거나 직접 쓰면 될 테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료가 손에 들어왔을 때부터 밍채에게 주겠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긴 시간을 허비해 제 닉네임까지 새겨 넣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블랙] 밍채야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심하다가 냅다 이름을 불렀다. 다음 말을 고민하는 사이, 메시지 옆에 떠올라 있던 숫자 1이 사라졌다. 밍채가 금세 메시지를 읽어 버린 것이다.
[블랙] 뭐해??
하고 싶었던 말은 분명히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얼른 대화를 이어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읽고 씹혀도 마땅한 질문이었다. 뱉은 말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있을 때, 밍채로부터 답이 도착했다.
[밍채] ㅋㅋㅋㅋㅋㅋ
[밍채] 형 생각이요
역시 혼자 풀릴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정답이었을까? 웃으면서 장난으로 받아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모양이었다.
[블랙] 줄게 있는데
[블랙] 혼설은 언제쯤 들어와?
늘 로그아웃에 머물러 있는 밍채의 닉네임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던졌던 질문이었다. 물어본 지 얼마나 됐다고, 도착하지 않는 답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밍채가 답을 미루거나 게임을 접겠다고 선언하면 어떡해야 할까.
[밍채] 지금이요
조마조마했던 심정이 무색하게도 돌아온 건 긍정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눈을 내리감으며 깊은숨을 쉬었다. 심호흡을 끝내고 다시 게임 창으로 옮겨 가자 그곳엔 밍채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4채널에서 로그아웃을 했던 밍채는 주현의 캐릭터가 서 있는 채예스 광장 한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신사와 말다툼을 벌인 뒤로 한 번도 접속하지 않았던 터라 옷은 아직도 얻어터진 모습의 곰돌이 인형 탈이었다. 주현도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간 옷을 바꾸지 못했다.
머리에 나란히 도끼를 꽂은 곰돌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섰다.
[전체] westone : 와 밍채님 안녕하세요
[전체] 밍채 : 안녕하세요
그 광경에 시선이 이끌렸는지 서쪽이 다가와 밍채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체] westone : 드디어 화해하신 거예요?
아직 말도 못 꺼내 봤는데 앞서간 서쪽 때문에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밍채는 새침하게 답했다.
[전체] 밍채 : 생각 중이에요
[전체] westone : 블랙님 힘내요 ^^
[전체] 블랙 : 응원 아니잖아요
[전체] westone : 에이 그건 기분 탓이에요 ㅋㅋㅋ
이마가 피에 젖어 있는 곰돌이의 얼굴을 응시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밍채가 말하는 걸 보니까 그날의 응어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전체] 밍채 : 형 줄거 있다면서요
[전체] 블랙 : 맞아
캐릭터를 움직여 서둘러 우편함으로 걸어가는데, 채팅 창에 떠오른 밍채의 말이 발목을 붙잡았다.
[전체] 밍채 : 얼마나 대단한 거 주려고요
말투가 삐딱한 게 누가 봐도 비꼬는 모양새였다. 하긴 밍채가 반지를 못 구해서 안 바꾼 게 아닐 텐데, 지금 반지를 내민다고 하여 밍채의 기분이 썩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비웃음을 살까 봐 무서워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반지였지만 한 자릿수 랭킹을 노리는 밍채에게 선물하자니 갑작스럽게 초라해 보였다.
[전체] 밍채 : 형 닉네임 앞에 제 닉네임 넣어주세요
아무리 기다려도 우편이 도착하지 않자 밍채는 원하는 것을 뻔뻔하게 요구해 왔다.
[전체] westone : 아 블랙님 닉 30짜리인데 ㅋㅋㅋ
[귓속말] westone에게 : 재밌으시죠?
[귓속말] westone : 네
서쪽의 말대로 지금 닉네임은 30만 원 주고 산 거였다. 사람 이름도 작명소에서 돈 주고 지어오는데, 몇 년간 달고 다닐 닉네임에도 그 정도 돈은 투자해도 마땅했다. 공들여서 가져온 닉네임을 바꾸자고 하는 밍채에 주현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대답을 고민했다.
싫다고 하면 서운해할 테고, 그러겠다고 대답하기엔 닉네임에 애착이 컸다. 다른 건 몰라도 닉네임과 커스터마이징은 양보할 수 없었다.
[전체] 밍채 : 장난이에요
주현이 말이 없자, 다행스럽게도 밍채가 먼저 물러났다.
[전체] 밍채 : 얼른 주세요
밍채의 독촉에 주현은 캐릭터를 움직여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편에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를 첨부해 밍채에게 전송했다. 며칠간 인벤토리 한구석에서 골드를 끝도 없이 삼키던 아이템이 드디어 주인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보내고 나니까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별것도 아닌 거 주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밍채를 귀찮게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밍채] 형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네모난 메시지 알림창이 떴다. 게임 대화 창이 아닌 톡 메시지였다.
[밍채] 계좌 알려주세요
“……허.”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본인도 공짜로 무기를 안겨 줘 놓고, 돈을 내겠다며 계좌를 요구했다. 더군다나 밍채는 몇억의 값어치를 하는 강화석도 턱턱 얹어 줬었다.
[블랙] 선물에 돈 내는 사람이 어딨어
[밍채] 여기요
그렇다. 밍채는 말싸움에서 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첫 만남 때 질리도록 겪어 놓고 깜빡 잊어버렸다.
[밍채] 안 알려주면 거래소에다가 팔 거예요
[블랙] ?
[밍채] 판 다음에 그 돈 형한테 다 보낼 거예요
이제는 협박까지 일삼는 모습이 무척 깜찍했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밍채에 주현이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블랙] 1.0에 거래하자
[밍채] 거래소 가격이 5억 넘는데요
둘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주현의 입장에서 거래소 가격은 언제든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사탄 레이드가 출시된 지 얼마 안 되어 가격에 거품이 끼어 있었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값어치가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돈이 있어도 그게 얼마나 된다고 주겠다는 건지.
밍채의 입장은 달랐다. 가격이 내려가더라도 반지는 몇 년간 억 단위에 머무를 테니 1만 원에 거래하자는 주현의 제안은 터무니없었다. 5억이면 현금으로는 50만 원의 가치에 가까웠다.
[블랙] 원래 아는 사람한테 아이템 팔면 지인 할인해주잖아
[밍채] 지인인데 왜 등쳐먹어요
그렇게 대꾸하면 할 말이 없어졌다. 서쪽에게 늘 지인 할인 받아서 골드를 사던 주현은 그렇게 등쳐먹는 놈이 되었다.
[블랙] 그럼 커플 할인?
뱉어 놓고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헛소리해서 미안하다고 수습하려 하는데 밍채가 보낸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
[밍채] 네
그제야 얌전해진 태도에 주현은 말문이 막혔다. 지인 할인은 이해 못 하고, 커플 할인은 수긍하는 밍채의 머릿속을 파헤쳐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밍채] 이제 계좌 알려주세요
[블랙] 그냥 골드로 보내도 되지 않아?
신사 때문에 이름 팔리는 일에 예민해졌다. 밍채가 그럴 인간은 아닐 테지만, 이름 때문에 또 성별을 오해받는 일이 생길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딱딱한 어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밍채] 전 강화 무슨 돈으로 해요?
[블랙] 그러네..
황당함이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밍채의 물음에 0강짜리 반지를 선물한 게 부끄러워졌다. 주현은 순순히 대화방에 계좌를 불었다. 이 돈은 나중에 아이템으로 바꿔 밍채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얼마 후 입금자명 밍채로부터 1만 원이 도착했다. 와중에 이름을 숨기고 싶었는지 입금자명을 변경한 게 귀여웠다. 본명이 김민채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밍채] 형
[블랙] 왜?
[밍채] 키가 175예요?
느닷없는 키 타령에 주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키가 190cm라고 거짓말하는 밍채가 할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이름 때문에 또 의심을 받게 된 걸까.
[블랙] 키 작아 보이는 이름이야?
주현은 일부러 짓궂게 대꾸했다. 그 뒤로 밍채의 부정이 이어졌다.
[밍채] 아뇨
[밍채] 더 클 것 같아서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허무맹랑한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걸 보니, 기분 나빠할까 봐 괜히 수습하는 눈치였다. 주현은 가볍게 웃고 다시 게임 창으로 넘어갔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확성기가 아주 난리가 나 있었다.
[확성기] chaos : 강화석 가격 왜이래
[확성기] 숲을지키는자 : 누가 강화하나본데여
[확성기] 황혼 : 보호석은 다 어디 갔어
[확성기] 빛의대검 : 아니 ㅆ.ㅂ 누군지 모르겠는데 적당히 사야지
[확성기] 빛의대검 : 니가 그렇게 다 쓸어가면 시세 파괴되는거 모르냐?
[확성기] 안개숲 : 최고급 보호석 하나만 원래 시세에 팔아주실분 ㅜ.ㅜ 아니면 귓으로 시세 협의해봐용
[확성기] 빈닉이없어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확성기] 새벽녘 : 와진짴ㅋㅋㅋㅋ 싹다 쓸어갔네
[확성기] 찍먹중 : 나 ㅠ 도 ㅠ 강 ㅠ 화 ㅠ 하 ㅠ 고 ㅠ 싶 ㅠ 어
[확성기] 독주 : 아직도 이 망겜에 큰돈 쓰는 사람들이 남아있단게 신기할뿐임
[확성기] 주신리라의축복 : 늅늅?
[확성기] 마몬몬 : 어둠 강화석, 최고급 보호석 삽니다 >ㅁ<~♡ 귓주세요
강화석과 보호석의 매물을 쓸어 담은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친구 목록을 켜자 늘 로그아웃에 머물러 있던 밍채의 닉네임이 로그인 칸으로 옮겨 가 있었다. [CH.4] 대도시 채예스 - 상가. 주현은 밍채의 캐릭터가 거래소 앞에 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헉 ㅠ 강화해야되는뎅
[길드] 잔혹동화 : 강화석 좀 드릴까요?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헉 ㅠㅠㅠ 그래주시면 감사하져
[길드] 신사 : 오 가격 엄청 올랐나보네 팔아야겠다 ㅋ
[길드] 레아 : 뭔 일이에여?!!?!
[길드] 월월월 : 누가 강화하나본데염
[길드] 신사 : 보통은 비슷한 가격대 매물만 사가서 시세 유지가 되는데 ㅋㅋ
[길드] 신사 : 이렇게 다 쓸어가는 사람들은 돈으로 찍어누르는거라 ㅋ
주현은 길드 채팅을 힐끔 살피며 채예스 상가로 향했다. 신사의 말대로 보통 강화하는 유저들은 아이템 시세 유지를 위해 평균가보다 훨씬 비싸게 올라온 매물은 구매하지 않는다. 한 번 사주기 시작하면 그 가격이 평균가로 자리잡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보통의 유저들이 그렇다는 거지,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간혹 참을성 없는 유저들이 하루 안에 풀강[6]을 찍겠다며 모든 매물을 쓸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지금 밍채가 하는 짓 말이다.
밍채는 역시나 거래소 앞에 서 있었다. 장비 창을 열람하자 반지가 어느새 16강을 넘어 17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기나 방어구보다 강화 확률이 높다고 해도 가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실패했을 텐데 포기를 모르는 밍채의 집념이 대단했다. 기어이 실패 보너스 스택을 마지막 단계까지 찍고 강화 확률이 100%가 되어서야 밍채는 17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전체] 블랙 : 강화석 남은 거 있는데 줄까?
[전체] 밍채 : 아뇨
밍채가 잔뜩 넘겨준 탓에 아직도 인벤토리 한구석에 두둑이 쌓여 있었다. 밍채는 단번에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거래소 NPC에게 말을 걸었다. 뒤이어 길드 채팅이 시끌벅적해졌다.
[길드] 사멍꾼 : 강화석 올리자마자 팔리네요?
[길드] 신사 : 음?
[길드] 신사 : 내건 왜 안팔리지 ㅋ
거래소에 아이템이 올라오는 동시에 쓸어가는 모양인데, 바쁜 와중에도 신사 건 쏙쏙 피해서 구매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확성기와 길드 채팅이 강화석 얘기로 시끌벅적해지니, 레이드를 돌고 있던 서쪽도 금방 눈치를 채고 반응해왔다.
[길드] westone : 아 설마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블랙님 어디예요 저 구경 갈래요
[길드] 블랙 : 거래소요
[길드] 월월월 : 아 강화하는 거 밍채님이에염???
[길드] 암흑기사 : 맞네 성직자 랭킹 바뀌고 있네
재밌는 일에 빠질 수 없는 서쪽은 그새 레이드를 마치고 탄탄한 몸을 자랑하며 달려왔다. 주현의 캐릭터 옆으로 딱 붙어 선 밍채는 조용히 강화 중인지 착용한 [+17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에 강화 실패 스택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길드] 암흑기사 : 실패하자마자 바로 강화 박고
[길드] 암흑기사 : 돈 ㅈㄴ 많나보다
[길드] 암흑기사 : 밍채님 세컨 안 구하나요
[길드] 신사 : 저 랭킹대 유저들은 다 저렇게 해서 ㅋㅋ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골드 벌어서 강화하는건가여? 사는건가여?
[길드] 잔혹동화 : 밍채님은 벌어서 같은데요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돈이 저렇게 벌려여???
[길드] westone : 랭킹 높을수록 한판 클리어 시간이 짧거든요
[길드] westone : 본캐 끝내고 부캐 돌리는 분들도 많고
[길드] westone : 장비 이미 다 갖춰져 있어서 먹은 재료 바로 팔 수도 있고 여러모로 돈 남을 거예요 쓰는 만큼 버는 거겠지만요
서쪽의 말이 맞았다. 스펙이 좋을수록 레이드 클리어 시간이 짧아서 다른 유저들보다 피로도가 덜했다. 보통의 유저들이 현생 살고 와서 지친 몸으로 두세 판 돌리는 게, 고스펙 유저들에겐 다섯 판을 돌릴 시간이었다. 비슷한 스펙의 유저끼리 파티를 꾸려서 가니 패턴 숙지가 완벽해 호흡이 척척 맞았다. 랜덤 매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파티가 쾌적했다.
예전의 밍채였다면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 테지만…… 최근엔 주현 때문에 고스펙 파티에는 참여할 수 없었고, 악마 레이드는 서쪽의 소수팟에 이끌려 헛고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운이 좋은 탓에 비싼 아이템을 쉽게 획득하는 편이었다. 아마 밍채의 자금줄은 아이템 획득 운이 아니었을까.
[확성기] 민트향 : 밍채님^^^^^^^^ 재료 사재기 그만
[확성기] fresh : 누가 샀는지 어케 앎?
[확성기] 망고야 : 성직자 랭킹 보세영 ㅋ
[전체] westone : 와 20강 ㅊㅊㅊㅊ
헐벗은 서쪽의 캐릭터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벌써 20강이라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마우스 커서로 밍채의 캐릭터를 다급히 클릭했다. 열린 장비 창에는 정말로 [+20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밍채는 부재중이었던 동안 22위까지 랭킹이 내려갔었는데, 단번에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마침내 되찾은 등수에 주현이 더 만족스러워했다.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1위랑 2위랑 템 똑같은데 랭킹은 무슨 기준이에여?
[길드] 신사 : 타이틀이랑 업적도 합산이요
[길드] westone : 게임 오래 했으면 유리해요
[길드] westone : 10위까지는 템 차이 크게 없어요
밍채는 계정을 사서 그런지 타이틀과 업적 점수가 월등히 높은 모양이었다. 다른 직업보다 1위와 2위의 점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다음 액세서리인 반대편 반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1위 자리를 빼앗길 일이 없어 보였다.
[전체] westone : 밍채님 20강 띄운 기념으로 사탄 갈까요?
[전체] 블랙 : 아뇨?
[전체] 밍채 : 네
[전체] westone : 부부는 하나니까 ^^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밍채와 화해도 했고, 주고 싶었던 반지도 전했고, 밍채가 반지 20강을 띄워 성직자 1위 자리를 되찾았으니 할 일은 끝났다. 주현은 이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밍채가 사탄 레이드에 가겠다고 냉큼 대답을 해 버렸으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흐물흐물 몸이 의자에 무너진 상태로 파티 초대를 수락했다. 파티에는 이미 밍채가 들어와 있었고, 이어서 레아와 월월월이 납치되었다.
[파티] 월월월 : ????????
[파티] westone : 사탄 고고
[파티] 월월월 : 사람 의견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구염;;;;;;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익숙해지세요
인원이 절반인 다섯밖에 안 되었으나, 서쪽은 대기실에 파티원이 모두 입장한 걸 확인하고 잽싸게 출발해 버렸다. 그에 월월월이 또 우는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아 그대로 무시당했다.
인원이 적으면 사탄에게 어그로가 끌리는 횟수가 늘어서 게임이 피곤해졌다. 주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적당히 공격을 맞아가면서 플레이했다. 모든 공격을 막기에는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그간 밍채가 접속하지 않는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졸음이 몰려왔다.
캐릭터의 체력이 조금이라도 깎이면, 용케도 눈치챈 밍채가 곧바로 힐을 넣어 줬다.
[파티] westone : 다들 잘하시면서!
[파티] westone : 앞으로 엄살 금지예요
[파티] 블랙 : 아니..
[파티]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
단 한 번도 최대 인원 파티로 사탄에 입장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사탄에서만큼은 쉽게 죽지 않았다. 신사와 듀오 갔을 때 실수인 척 캐릭터를 암흑으로 밀어 넣은 게 사탄에서의 마지막 죽음이었다. 루시퍼조차 잡지 못해서 돈 내고 버스나 타던 시절은 과거에 남았다.
어느덧 사탄을 처치하고 언덕의 생기가 되살아나는 컷신에 진입했다.
[파티] westone : 얼른 다음 악마레이드 나왔으면 좋겠네요
[파티] westone : 일주일이 너무 심심해요
[파티] 블랙 : 이미 네 개나 있는데요..
[파티] westone : 날 잡아서 깨면 하루면 다 해요!
사람마다 체력이 다른 건 당연하지만, 서쪽은 유독 활력이 넘쳤다. 남들이 지쳐서 쉬고 있을 때, 서쪽은 부캐로 악마 레이드를 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서쪽을 보고 월월월은 혀를 내둘렀다.
악마 레이드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시간이 부족해 다 못 깨고 다음 주로 넘어가 횟수가 초기화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서쪽이 알았으면 경악하면서 파티로 끌고 갈 게 뻔해 주현은 늘 다 돈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월월월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다 돌았다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다가 들켜서 서쪽에게 끌려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파티] westone : 이어서 레비아탄 갈까요?
[파티] 블랙 : 저 출근..
[파티] westone : ㅠㅠㅠㅠ 가엾은 직장인
[파티] 밍채 : 형 무슨 일 해요?
사탄 레이드 내내 한마디도 안 하던 밍채가 처음으로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그동안 궁금해하지도 않더니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온라인에서 제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채팅을 치려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다. 서쪽이 답을 가로챈 탓이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유아교육과잖아요
[파티] 월월월 : ??????
[파티] 블랙 : ㅅㅂ 아니에요
[파티] westone : 수호자 나왔을 때 밍채님이 그러셨어요
[파티] westone : 어린애들한테 잘해준다고
[파티] westone : 근데 맞는 것 같아요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블랙님 진짜 그래요?
[파티] 블랙 : 아니에요..
나이가 어리다고 하면 관대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일단은 부정했다. 레아도 본 게 있는지 주현의 말을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길드원들이 시끌벅적하게 대화하며 질문에서 점점 벗어나자 기다리다 지친 밍채가 한 번 더 말을 꺼내며 독촉해 왔다. 이상한 곳에 집요하게 굴었다.
[파티] 밍채 : 형 그래서 무슨 일 해요?
[파티] 블랙 : 디자인
[파티] 블랙 : 왜?
[파티] 밍채 : 그럴 것 같았어요
[파티] westone : 두 분은 언제까지 얻어터진 곰돌이예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도 만들어 주고, 옷도 염색해서 선물을 해 줬으니 자연스레 미술 계통이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디자인 관련해서 말이 나온 김에 서쪽이 줄곧 신경 쓰였던 곰돌이 인형 아바타를 언급했다. 공기가 후덥지근해서 캐릭터마저도 가벼운 옷을 입는 여름날, 둘의 캐릭터는 아직도 정수리에 도끼가 박힌 곰돌이 인형 아바타를 착용하고 있었다.
서쪽의 지적에 밍채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주현이 언젠가 선물해 줬던 [지적인 학자 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