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어둠이 깃든 데이트 (4/13)

랜선 교체! 2권

지은이: 토라미

목차

4. 어둠이 깃든 데이트

5. 어둠이 깃든 프러포즈

6. 어둠이 깃든 약속

7. 어둠이 깃든 고백

4. 어둠이 깃든 데이트

[길드] eastone : ㅁㅊㅁㅊㅁㅊㅁㅊ

[길드] eastone : 드디어!!!!!!!!

서쪽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야 뻔했다. 네 번째 악마, <분노의 사탄> 티저 영상이 혼돈의 설화 홈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쪽은 신직업 수호자 출시 때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었는데, 이번 악마 레이드 업데이트 소식에는 몸 둘 바를 모르며 광장을 뛰어다녔다.

그러던 서쪽의 캐릭터가 별안간 사라졌다.

[SYSTEM] 길드원 eastone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westone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저희 얼른 예습하러 레비아탄 가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ㅅㅂ

[길드] 컁컁컁 : 예습이 왜 필요해염;; 보스도 다른데???;;

서쪽은 부캐를 수납시키고 본캐인 포병을 불러왔다. 예습은 핑계였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수단이었다. 주현은 모니터 중앙에 날아온 파티 초대를 서둘러 거절했다. 서쪽은 기쁜 나머지, 주현과 월월월이 현재 부캐 육성 중이라는 자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길드] westone : ㅠㅠ

[길드] 컁컁컁 : 부캐라구염 ㅠㅠ

[길드] westone : 왜 아직도 만렙이 아니죠??

주현은 180레벨에 진입하고 나서 서쪽, 월월월과 파티를 함께했는데 가장 먼저 만렙을 찍은 건 역시나 서쪽이었다. 밍채가 숙제하러 떠나고 주현과 월월월이 지쳐서 쉬고 온 사이, 만렙을 달성한 서쪽은 의기양양하게 둘의 캐릭터를 비웃고 있었다. 그런 서쪽을 보며 월월월은 제발 바지 좀 입어 달라고 눈물을 흘렸다. 월월월은 어김없이 피시방이었다.

[길드] 레아 : 사탄 공컷 어떨까요...? 장비 안 바꾸면 못 들어가겠죠 ㅠㅠ

[길드] 컁컁컁 : 서쪽님이 버스 운영하실 거예염

[길드] westone : 단체기믹만 없다면~~

[길드] westone : 저를 믿으세요

[길드] 레아 : 허얼... 제가 많이 사랑해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은 화기애애한 길드 채팅을 읽으며 캐릭터를 변경했다. 레아가 얘기를 꺼낸 김에 주현도 바꿔야 하는 장비가 있는지 점검하기로 했다. 보스 몬스터인 사탄의 능력치가 공개되기 전이라 장비 교체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엔 장비 가격이 하늘 높이 치솟아 버리니 하루빨리 사는 게 이득이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레비아탄 듀오로 가기 위한 캐릭터 변경인가요?

[길드] 블랙 : ㅅㅂ 아니거든요

[길드]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 블랙님 안심하세염 레비아탄은 듀오로 못깨염

[길드] 블랙 : 아 그렇죠

레아, 서쪽, 월월월 셋이서 레비아탄을 도전했다가 3페이즈에서 배 중심을 잡지 못해 클리어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다. 서쪽도 못 깨는 걸 알면서 장난으로 말을 꺼내 본 거라 주현에게 파티 초대를 보내진 않았다. 주현은 안심하고 제 캐릭터의 장비를 훑었다.

[길드] 숲의귀공자 : 버스 탈 생각하지 말고 스펙업을 하세요

[길드] 숲의귀공자 : 직접 깰 생각을 하셔야죠;

[길드] 숲의귀공자 : 웨스트님도 스펙 한참 미달인 사람은 태워주지 마세요

떠들썩하던 길드 채팅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길드 마스터인 신사의 채팅 아래로 정적이 흘렀다. 이 분위기를 깨뜨릴 만한 사람은 길드에 서쪽밖에 없었는데, 기분 상한 서쪽은 또 어디선가 신사의 욕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신사가 어떤 의도로 말을 늘어놓은 건지 이해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필요는 없었다.

[길드] 레아 : 네 ㅎㅎ 스펙업도 해야죠!!!

[길드] 레아 : 저 장비 뭐 바꾸면 좋을까요?!

꾸중을 듣고 말 꺼내기 무안할 텐데 레아가 해맑게 웃으며 장비 조언을 구했다. 사라졌던 서쪽이 냉큼 나타나 레아의 장비를 코치해 주기 시작했다. 주현도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의견이 낫다는 판단이 들어 채팅을 쳤다.

[길드] 블랙 : 전 장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길드] 컁컁컁 : 블랙님 사탄 입장할 수 있지 않나염? 능력치 모자라진 않을 것 같은뎀

[길드] 블랙 : 딜이 잘 안 뽑힐 것 같아서요

[길드] westone : 그럼 무기를 바꾸셔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들죠

주현의 무기는 [+18 음률이 깃든 대검]이었다. 장비에 무엇이 깃들었는진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악마 레이드 출시 전 마지막 보스였던 인어 레이드에서 나오는 재료로 장비를 만들면 주현처럼 음률이 깃들게 된다. 현재 최종 보스인 악마 레이드의 장비는 ‘어둠이 깃든’인데, 유저들 사이에선 중이병 같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서쪽은 간혹 ‘블랙님이 깃든’이라고 장난을 치곤 했다.

[길드] 숲의귀공자 : 사탄 나오면 재료 가격 떨어질텐데 무기 20강으로 강화하고 버티세요

[길드] westone : 지금 음률 강화하기엔 돈 아까운데

[길드] 숲의귀공자 : 딜 더 뽑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길드] 숲의귀공자 : 어둠 무기 지금 만든다고 해서 15강은 띄울 수 있겠어요?

이전 무기인 음률을 버리고 갈아타려면 어둠 무기를 적어도 15강까지 올려야 했다. 2주 후면 네 번째 악마인 사탄이 출시될 텐데 그때까지 15강을 찍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사탄 티저 영상이 올라온 후 새롭게 어둠 무기를 만드는 유저가 상당했고, 거래소에는 어둠 무기 강화 재료가 텅텅 빈 상태였다.

[길드] 블랙 : 그럼 20강까지 강화해야겠네요

[귓속말] westone : 저는 비추인데..ㅠㅠ

주현이 마음을 정하자 곧바로 서쪽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서쪽은 주현이 음률 무기를 강화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귓속말] westone : 파티겜인데 한 명쯤 날먹 좀 할 수도 있지 딜이 뭐가 중요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클리어 시간 줄어들면 좋잖아요

[귓속말] westone : 밍채님 둬서 뭐해요 더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ㅡㅡ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westone : 저희 길드 마스코트 블랙님을 데려갔는데 ㅡㅡ 더 고생하셔야 합니다

주현은 재앙 길드의 마스코트가 아니었지만 웃고 넘어갔다. 상가로 이동해 거래소에서 음률 강화 재료를 넉넉히 사들인 후 강화할 터를 찾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서쪽은 구경하기 위해 주현의 뒤를 졸졸 쫓고 있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강화하는 거 보러 오실 분?

[길드] 레아 : 저요!!!!

[길드] 컁컁컁 : 어디예염?

레아와 월월월이 광장으로 오길 기다리는데 때마침 밍채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전체] 블랙 : 7채널로 오세요

[전체] 컁컁컁 : ?????

주현은 채널을 변경했다. 7채널은 밍채의 길드인 평온의 본거지였다. 지금처럼 붙어 다니지 않았을 시절에 종종 밍채의 위치와 함께 뜨던 채널이었다. 7채널로 이동한 주현은 운 좋게도 광장에 서 있던 단공, 블루베리와 마주쳤다.

[전체] 단공 : 엉 뭐임? 블랙님 저 보러 온거임? (부끄)

[전체] blueberry : 오자마자 본게 김민채 접속 알림하고 니 개소리라니

[전체] 단공 : 멍멍ㅠㅠ

[전체] westone : 순간 월월님 부르시는줄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어스름 : 무슨 일이에요?

유저들 사이에서 근거 없이 도는 소문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주변에 친구나 길드원이 있으면 인원수만큼 강화나 아이템 획득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길드원들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어스름이 사람들이 모인 광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마침 광장에 모인 평온 길드원 모두 안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현은 염치 불고하고 그들에게 부탁했다.

[전체] 블랙 : 죄송한데 친구 좀 걸어도 되나요?

[전체] 단공 : 아 당연하죠!!! 우리 그때 친구였잖아요

[전체] 단공 : 김민채가 방해했지만........

[전체] 어스름 : ???

주현은 셋에게 친구 신청을 보냈다. 단공은 유쾌하게 웃었고, 어스름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금방 수락했다. 블루베리는 말이 없어서 불안했는데 마찬가지로 친구가 되어 화면 아래에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전체] 단공 : 근데 웬 친구?

[전체] 어스름 : 상견례?

[전체] 블랙 : 아니에요;;

[전체] 단공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레아 : 블랙님 강화하신대요!!!

[전체] 단공 : 올

[전체] 블랙 : 주변에 친구 많으면 강화 확률 올라간다고 하길래 ㅎ

[전체]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거 유명하죠

주현은 아이템을 사용해 강화 창을 열었다. 장비를 강화하려면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대장간을 찾아가야 했는데, 번거로워서 아이템을 사용하는 유저들이 훨씬 많았다. 강화가 터지면 대장장이 탓을 하려고 대장간에서 강화하는 유저들도 몇 있었다.

까먹지 않고 보호석까지 넣은 주현이 강화 버튼을 눌렀다. 게이지가 차오르며 심호흡하는 순간 주현의 앞에 밍채가 나타났다.

[전체] 밍채 : 형 바람피우는 거예요?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다. 밍채의 말풍선을 보며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데, 뒤이어 진짜로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주현의 캐릭터 등에 달려 있던 대검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전체] 단공 : 뭐야 ㅁ1친 왜 사라져?

[전체] blueberry : ?

[전체] 어스름 : 블랙님 보호석 안 넣으셨어요?

[전체] 블랙 : 넣었어요..

[전체] westone : 문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리 안 했다가 무기가 펑 터졌던 일은 오늘의 암시였을지도 모른다. 주현은 허망한 눈동자로 비어 있는 캐릭터의 등을 살폈다. 그런다고 사라진 무기가 돌아오진 않았다.

[전체] 밍채 : 형 최고급 보호석으로 넣었어요?

[전체] 블랙 : 그냥 보호석..

밍채의 말풍선을 보며 주현은 직감했다. 이건 필시 자신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기는 절대 돌려받지 못할 테다.

[전체] 어스름 : 아이고... 그냥 보호석은 15강 강화부터는 50% 방어밖에 못해줘요

보호석을 넣고 강화를 하다가 실패하면 거래할 수 없는 귀속 상태로 변한다. 대신에 장비가 사라지지 않고 보존이 되며, 실패 보너스 수치가 붙었다. 15강 강화부터는 무조건 무기를 보전해주는 최고급 보호석을 넣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매번 만들어진 장비를 사서 쓰던 주현은 몰랐던 점이었다. 본인의 실수가 명백해서 억울할 것도 없었다.

[전체] 단공 : 블랙님 무기 뭐였죠? 어둠이었나?

[전체] 블랙 : 음률이요..

[전체] 단공 : 아 그래도 개아깝다.....

어둠에게 밀리긴 했으나 음률도 아직 현역 무기였다. 무기의 가치를 따져 보던 단공은 탄식했다. 또 무기를 부쉈느냐고 비꼬아야 할 밍채마저도 조용하니 사태의 심각성이 확연히 느껴졌다. 남의 길드 채널 놀러 와서 분위기를 망쳐 놓은 주현은 언제 떠나야 할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전체] blueberry :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문의 넣어보시고요

[전체] blueberry : 무기는 돈 모아서 어둠으로 가세요

[전체] blueberry : 음률은 돈 아까워요

[전체] 단공 : ㅇㅈ 닉도 딱 어둠이랑 어울리네요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 네

무기 재료 시세를 확인하려면 거래소로 가야 했다. 주현의 캐릭터가 등을 돌리자마자 밍채가 불러세워 발목을 붙잡았다.

[전체] 밍채 : 지금 사지 마요

[전체] 단공 : 그럼 블랙님은 뭐 들고 싸움? 맨손? 격투가냐?

[전체] 밍채 : 사탄 나오면 가격 내려갈텐데 왜 지금 사요?

[전체] blueberry : 단공 거래소에 재료 올려둔 거 아냐? 바이럴인듯

[전체] 단공 :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네;;

[전체] 밍채 : 형 일단은 보급 무기 껴요

주현은 주섬주섬 구석에 보관해뒀던 보급 무기를 꺼냈다. 인벤토리 공간 차지한다고 버릴까도 고민했었는데, 그랬으면 정말로 맨손으로 싸워야 할 판이었다.

[길드] 숲의귀공자 : 블랙님 왜 보급 무기를 끼셨지?

[전체] westone : 아 쟤 또 시작했네..

[전체] 단공 : ????

[전체] westone : 길챗 얘기예요

[전체] 단공 : 아 ㅋㅋㅋㅋ

서쪽은 이제 장소 불문하고 신사의 험담을 주도했다. 누구 하나가 배신하면 바로 길드 추방행인데 서쪽은 사람들을 믿는 건지, 길드에 미련이 없는 건지 안일하게 굴었다. 주현도 신사에게 일러바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나머지도 아마 같으리라.

[길드] 사멍꾼 : 헉

[길드] 잔혹동화 : 무기 터지셨어요?

[길드] 블랙 : 네..

[길드] 숲의귀공자 : 보호석 안 넣었어요?

[길드] 블랙 : 최고급으로 넣어야 하는 줄 몰랐어요..

[길드] 숲의귀공자 : 저런....ㅋ

[길드] 숲의귀공자 :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다음이 있어야 조심하든가 할 텐데 당분간은 보급 무기와 함께 살아가야 했다. 무기 아바타 때문에 외형이 다르게 보이지만 약해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체] westone : 음..

[전체] westone : 레비아탄 ㄱ?

[전체] 컁컁컁 : 분위기 못 읽냐구염 ㅠㅠ

[전체] westone : 아닠ㅋㅋㅋㅋ 블랙님 무기 재료 얻어주자구요!!

[전체]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밍채 : 가요

《 밍채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밍채가 잽싸게 파티를 생성하고 초대를 날렸다. 서쪽을 제외하고는 가겠다고 말도 안 꺼냈지만,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파티에 납치되기 시작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westone : 앗싸~

[SYSTEM] 컁컁컁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어스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blueberry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컁컁컁 : 저 부캐인데염????

[파티] 어스름 : 밍채가 잡아주겠죠 ㅋㅋㅋ

[SYSTEM] 단공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단공 : ㅆㅂ 존나 무서운놈

[파티] 단공 : 받을 때까지 파티 초대를 하네;

[파티] buleberry : 알면 좀 그냥 받아

[파티] westone : 8인팟 설레네요

[파티] 블랙 : ㅅㅂ 그게 목적이었냐고요

[파티] 컁컁컁 : 스토리가 안 밀렸어염 ㅠㅠㅠㅠ

[파티] westone : 아 ㅡㅡ

* * *

<분노의 사탄> 업데이트를 기다리는 동안, 나머지 악마 레이드를 돌면서 무기 재료를 구해 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간절히 바랄수록 더 얻기 힘든 법이었다. 평소에 잘만 무기 재료를 먹던 밍채도 힘을 못 쓰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쪽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캐릭터를 바꿔 가면서까지 악마 레이드로 출정했다. 부캐 스펙이 어정쩡해서 모조리 헤딩팟으로 가야 했는데, 긴장감 있게 게임을 하는 걸 좋아하는 서쪽으로선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하루 만에 악마 레이드를 아홉 판이나 돈 서쪽이 얻은 건 잡템과 클리어 골드가 전부였다.

시간이 흘러 <분노의 사탄> 업데이트 날, 주현은 처음으로 혼돈의 설화 업데이트 날짜에 맞춰서 연차 쓰기에 성공했다.

《 westone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길드] westone : 왜요 ㅠㅠ

[길드] westone : 헤딩팟으로 갈건데

업데이트가 끝났다는 공지가 올라오자마자 게임에 들어간 주현은 먼저 접속해 있던 서쪽으로부터 파티 초대를 받았다. 보급 무기를 가진 주현으로선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 메시지를 받은 서쪽은 대놓고 서운해했다. 그러자 월월월이 말을 얹었다.

[길드] 월월월 : 공컷 없는 파티예염

[길드] 블랙 : 그래도 좀..

신사가 스펙 미달인 사람들 버스 태워 주지 말라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둘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신사는 벌써 사탄 레이드에 도전 중인지 말이 없었다.

서쪽과 월월월이 괜찮다고 말해도 수락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능력치 제한 없이 헤딩 파티를 만들게 되면 보급 장비만 둘둘 감은 유저들이 한가득 들어오는데, 그러면 둘이 감당해야 할 파티원은 주현 하나가 아니었다. 헤딩도 클리어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거지, 가망도 없는 파티는 해체가 답이었다.

[길드] westone : 부담스러우면 4인팟으로 가요

[길드] 블랙 : 더 싫어요

[길드] westone : ㅠㅠ

[길드] westone : 그럼 저희는 랜덤매칭으로 갈게요

서쪽은 레아와 월월월을 이끌고 랜덤 매칭으로 떠났다. 주현만 없으면 제대로 된 파티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얹혀 가고 싶지 않았다. 사탄을 잡으러 가겠다며 길드원들이 하나둘 떠나고, 주현은 홀로 광장을 지켰다.

[귓속말] 단공 : 블랙님 웬일로 이 시간에?

강화 확률 올리겠답시고 친구가 되었던 평온 길드원은 늘 친구 목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던 탓에 내버려 뒀었다. 이후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 접속 알림이 뜰 때마다 민망했다.

채팅 창에 등장한 단공의 닉네임에 주현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귓속말] 단공에게 : 연차 썼어요

[귓속말] 단공 : 아 직장인이시구낭ㅋㅋㅋ

[귓속말] 단공 : 저희 사탄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

[귓속말] 단공에게 : 아뇨.. 무기가 없어서

[귓속말] 단공 : ㄱㅊㄱㅊ 딜노예 어스름과 블베가 있어요

어스름과 블루베리는 단공에게 노예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 단공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귓속말] 단공 : 힝 ㅠ_ㅠ

주변에 왜 이렇게 무작정 납치하려는 사람이 많을까 싶었다. 주현은 습관처럼 파티 초대를 거절했다.

[귓속말] 단공 : 저희 진짜로 자리 남는건데?

[귓속말] 단공 : 블랙님 경직만 해주시면 되는데?

[귓속말] 단공에게 : 파티 모집을 하세요..

[귓속말] 단공 : 그럼 다음번엔 빼지 말고 같이 가요

[귓속말] 단공에게 : 네

다음이 있으려면 밍채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일단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평온 길드원들 닉네임 옆에 일제히 <분노의 사탄>이 떠오르며 그들도 던전으로 떠났다.

같이 가자는 제안들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솔직히 아쉽긴 했다. 던전 풍경이라도 구경해 보고 싶던 주현이 개인 출정이라도 해 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밍채의 접속 알림이 화면 한구석에 나타나 시선을 끌었다. 평온 길드는 방금 막 레이드로 출발했는데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밍채는 접속과 동시에 주현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 밍채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오늘 하루 모든 파티를 거절했던 주현이 처음으로 수락한 파티였다.

[파티] 블랙 :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파티] 밍채 : 저 기다렸어요?

[파티] 블랙 : 평온 방금 출발했는데

[파티] 밍채 : ?

조금만 일찍 접속했으면 평온 길드원과 함께 갔을 텐데, 파티를 구하는 수고를 자처하는 밍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파티] 블랙 : 파티 따로 구했어?

밍채는 랭킹이 한 자릿수인 데다가 직업도 힐러 계열인 성직자니 노리는 유저가 많았을 테다. 선택받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파티를 골라서 가는 쪽이었다.

[파티] 밍채 : 형 지금 파티 채팅 치고 있는 건 알죠?

[파티] 블랙 : ?

괄호 안에 파티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당연히 파티 채팅이었다. 당연한 걸 묻는 밍채가 의아해 주현이 물음표를 치는 순간, 파티원 목록 위에 작은 그림과 함께 익숙한 던전 이름이 생겨났다. 뾰족한 뿔을 가진 염소의 행색을 한 보스, <분노의 사탄>이었다.

[파티] 블랙 : 이걸 공컷 없이 공개방으로 깨자고?

[파티] 밍채 : 둘이서 할건데요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데이트인데 왜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요?

혼돈의 설화는 적어도 하루 안에 클리어 파티가 나오기 때문에 다른 게임에 비해서 퍼스트 클리어에 목숨을 거는 유저들이 없는 편이었다. 공략을 알고 장비만 갖췄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난이도라는 건데, 그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클리어한 파티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듀오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연히 공략도 없었다.

안 하겠다고 버텨 봤자 밍채는 뜻을 굽힐 놈이 아니었다. 단공에게도 받을 때까지 파티 초대를 보냈던 일이 있었다. 주현은 하는 수 없이 대기실에 입장해 방 설정을 둘러보다가 해제된 옵션을 발견했다.

[파티] 블랙 : 기여도 키면 안 되나?

둘이서 클리어하기에는 어려워 보였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혹시나 클리어했을 때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말을 꺼냈건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었다.

[파티] 밍채 : 굳이요?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ㅋㅋㅋㅋ 기대할게요♡

오랜만에 보는 하트였다. 뒤이어 방 설정이 딜 기여도 표시로 바뀌었다. 주현이 준비 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파티장인 밍채가 던전으로 출정했다.

이번 <분노의 사탄> 맵은 커다란 나무가 중앙에 자리한 푸른 언덕이었다. 풍성한 잎사귀를 가진 나무에는 발갛게 익은 열매가 맺혀 있었고, 나무 아래엔 다양한 색의 염소가 풀을 뜯어 먹으며 자유를 즐겼다.

밍채와 주현의 캐릭터가 다가가자, 염소 무리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 소란에 나무에 기대어 단잠에 빠져 있던 이가 눈을 떴다. 보스 몬스터인 사탄이었다.

사탄이 손에 쥔 삼지창을 둘에게 겨누자, 컷신이 끝나며 본격적인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빛의 희생 》 《 치유의 가호 》 《 주신 리라의 은총 》

온갖 버프를 주현에게 둘러준 밍채는 쏜살같이 사탄에게 달려가 빛 기둥을 때려 부었다. 주현도 밍채에게 피해량 감소 버프를 써 주려다가 밍채는 어차피 공격에 맞지 않으니 마나만 아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 신념의 방패 》

자신에게 스킬을 사용한 주현은 사탄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창을 휘두르는 동작을 파악하는데 엇박자라 그런지 쉽게 진입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첫 번째 도전 만에 깨는 건 불가능했으니 냅다 대검을 휘둘렀다.

그에 인기척을 느낀 사탄이 뒤를 돌았다. 주현은 서둘러 검날을 세웠고 사탄이 찌른 창을 막아 냈다. 방어에 성공하자 다음 공격이 들어왔다. 사탄이 주현의 뒤로 넘어가 등에 창을 꽂았다.

[파티] 블랙 : ?

캐릭터가 넘어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동시에 머리 위로 하얀 깃털 표식이 떠오르며 깎아진 체력만큼 차올랐다.

[파티] 블랙 : ㄴㄴ 마나 아까워

멀쩡한 무기 날려 먹고 보급 무기를 착용한 주현은 마지막 양심을 챙겼다. 힐할 마나 아껴서 딜에 보태는 게 밍채에게도 이득이었다.

주현의 캐릭터가 벌떡 일어나자 이번엔 사탄이 머리에 달린 뿔을 들이받았다. 사탄에게 무기란 들고 있던 삼지창이 전부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당황해 미처 방어하지 못했다. 치명타 대미지가 떠오르며 캐릭터가 뒤로 자빠져 숨이 끊겼다.

[파티] 블랙 : 아니.. 뭔 한 대 맞고 죽어

없는 건 무기였지, 방어구가 아니었다. 멀쩡했던 방어구들은 모조리 깨져 힘을 잃은 상태였다. 주현의 캐릭터가 이 정도로 아파하면, 아래 스펙 유저들은 어림도 없었다.

죽은 김에 밍채나 구경하자 싶어 마우스를 돌리자, 주현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는 밍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현의 앞에 도달한 밍채는 대뜸 사탄을 빛으로 속박하더니, 주현에게 빛을 불어넣었다. 부활 스킬이었다.

《 부활 : 원상태로 부활합니다. 5초간 무적 상태입니다. 》

힐러의 부활 스킬은 마나를 몽땅 소비하는 스킬이 아니었나? 사탄을 상대하면서 마나를 꽉 채워 유지하는 밍채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직전에 속박 스킬을 사용해 마나를 소비했었다. 경이로운 마나 회복 속도에, 이래서 장비가 중요한가 보다 하고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살아난 주현은 다시 자신에게 피해량 감소 버프를 걸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사탄은 주현의 머리통을 삼지창으로 내리쳤다. 이쯤 되면 바닥이 전용 침대였다. 잔디에 철퍼덕 쓰러지며 체력이 절반 넘게 깎였다. 이번에도 치명타 대미지가 들어왔지만, 다행히도 버프를 두른 탓에 저승길은 면했다.

[파티] 밍채 : 형 그냥 방어만 해요

어차피 보급 무기여서 사탄에게 최소 보정 대미지만 들어가는 처지였다. 캐릭터를 일으킨 주현은 검날을 세워 방어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따금 반격을 날리니 확실히 전보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여러 방법으로 주현을 두들겨 패던 사탄이 느닷없이 삼지창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현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파릇한 잔디 군데군데에 햇살이 내리쬐며 금빛의 동그란 공간이 생겨났다. 게임을 몇 번 해 본 유저들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주현은 재빨리 둥근 햇빛 구역 안으로 캐릭터를 집어넣었다. 밍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가까운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이윽고 흩어졌던 염소 무리가 돌아와 햇빛이 들지 않은 곳을 뿔로 치받으며 잔뜩 헤쳐 놓았다. 햇빛 안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뿔에 치여 죽었을 미래가 뻔했다.

사탄이 창을 아래로 끌어 내리자 염소들이 우르르 퇴장했다. 지금이 사탄을 맘껏 때릴 기회였다. 주현은 캐릭터를 달려 사탄의 앞으로 이동해 스킬을 사용했다. 푸른빛이 스며든 검이 사탄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때마침 정신 차린 사탄은 삼지창을 크게 휘둘러 주현의 캐릭터 복부를 강타했다.

주현의 공격은 완벽하게 들어갔다. 문제는 사탄에게 맞은 것도 완벽했다. 캐릭터의 숨이 끊기자 저 멀리서 빛 기둥을 때려 박던 밍채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파티] 블랙 : 그만 좀 살려 ㅅㅂ

부활 스킬 쿨타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밍채는 부활 아이템을 사용했다. 하필이면 속박 스킬도 쿨타임에 걸려 사탄의 몸을 묶어 놓을 수가 없었다. 맞아 가면서 자신을 살리는 밍채를 보고 주현은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활시켜 주면 분명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는데 도저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밍채는 노피격으로 기본 버프를 유지해야 하는 성직자였다.

밍채 덕분에 잠에서 깬 주현은 이번에는 정말로 방어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간간이 사탄이 빈틈을 보일 때마다 때리고 싶은 욕망을 꾹 참아 냈다.

[파티] 밍채 : 재도전할게요

참는다고 해서 레이드 클리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체력을 모두 잃은 주현이 또다시 바닥과 한 몸이 되자, 밍채가 던전 클리어를 포기하고 재도전 창을 띄웠다. 주현은 그제야 밍채의 목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주현이 살아서 깰 때까지, 던전 클리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 *

[길드] westone : ?

[길드] westone : 블랙님 왜 사탄이에요?

[길드] 월월월 : ????

[길드] 레아 : 허얼

[길드] 월월월 : 진짜네염?

포기를 모르는 밍채 덕분이라고 할까, 탓이라고 할까. 간신히 1페이즈를 넘기고 컷신에 진입한 주현은 황당해하는 길드원들의 채팅을 맞닥뜨렸다. 셋은 파티가 터졌는지 친구 목록에 던전 위치가 뜨지 않는 상태였다.

[길드] 블랙 : 밍채랑 둘이 왔어요..

[길드] westone : 헐 ㅋㅋㅋㅋㅋㅋ 처음부터 듀오로 해요?

[길드] 블랙 : 어쩌다가 보니까..

[길드] 블랙 : 서쪽님은 왜 나오셨어요?

[길드] westone : 아 파티에 중국인 있었어요 ㅡㅡ

[길드]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진짜예염...

원활한 던전 클리어를 위해 최소 능력치만을 요구하는 랜덤 매칭은 유독 이상한 유저가 많았다. 주현이 PvP 랭크전 랜덤 매칭을 통해 사사게 스타였던 채채를 만났던 것처럼, 레이드 랜덤 매칭에도 사사게 유저가 널린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최악인 건 말도 안 통하고 매크로를 사용해 자동 공격만 하는 중국인 유저였다. 어쩔 땐 허공을 공격하고 있었고, 단체 기믹에선 협조를 하지 않아 파티가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외국 서버도 따로 있는데 왜 자꾸만 한국 서버로 넘어오는지 모를 그들이었다.

레이드 업데이트 첫날, 첫판부터 중국인을 만났다니 이보다 더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길드] 블랙 : 단체 기믹 있나요?

[길드] westone : 말 안 해줄래요

[길드] 블랙 : ??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스포금지!!

어느새 컷신이 끝나고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사탄이 발을 굴러 요란하게 나무 위에 올라타더니 가지를 붙잡고 몸을 뒤뚱뒤뚱 흔들었다. 흐느적거리는 사탄의 몸을 따라 잎사귀와 열매도 함께 춤을 췄다.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더니 밍채와 주현의 발 앞까지 굴러왔다.

[파티] 밍채 : 형 빨간거 먹어요

[파티] 블랙 : ㅇㅇㅇㅇ

사이사이 익지 않은 녹색 열매가 섞여 있었다. 주현은 캐릭터를 움직여 앞에 있던 열매 하나를 습득하고 힐끔 밍채를 쳐다봤다. 밍채도 하나만 먹은 상태였다. <인색의 마몬>처럼 먹은 개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되는 게 아니길 바라며 사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린 사탄은 느닷없이 삼지창을 땅에 푹 박아 넣었다. 뾰쪽한 삼지창이 잔디와 흙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을 따라 땅이 쩍쩍 갈라졌다. 반듯한 격자 모양처럼 땅이 수십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뉘더니 몇 군데에만 반짝 햇볕이 들었다.

주현은 그곳으로 서둘러 캐릭터를 옮기는데, 밍채는 웬일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뒤이어 나머지 공간이 흑백으로 물들며 생기를 잃었다. 밍채의 캐릭터 역시 자세가 무너지더니 시든 잔디 위로 풀썩 쓰러졌다.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왜 죽었지

안 피해서 죽어 놓고 밍채는 어리둥절하게 혼잣말을 했다. 주현은 밍채를 살리려고 다가가다가 이어지는 암흑에 휩쓸려 캐릭터의 숨이 끊겼다. 전과 다르게 햇볕이 든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파티] 블랙 : 햇볕 든 곳으로 피해야 하나봐

[파티] 밍채 : 햇볕이요?

[파티] 밍채 : 안 보이는데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붉은 열매 먹어야 보이나봐요

패턴이 나오기 전에 주현은 붉은색 열매를, 밍채는 초록색 열매를 먹었었다.

[파티] 블랙 : 개수는 상관없는 건가?

[파티] 밍채 : 제가 섞어서 먹어볼게요

[파티] 밍채 : 형이 붉은 거로 두 개 먹어봐요

[파티] 블랙 : 알았어

오늘 나온 신규 레이드를 듀오로 가자고 했을 땐 참 별난 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게임을 시작하니까 집중하는 모습이 의외였다. 랭킹 숫자에 실력이 따라오는 건 아니었지만 밍채에겐 1위라는 자리가 잘 어울렸다. 주현은 화면에 떠오른 재도전 창에 수락을 눌렀다.

밍채가 붉은 열매와 초록 열매를 섞어서 먹고, 주현이 붉은 열매만 두 개를 먹자 둘 다 과식으로 사망했다. 그 상태 효과 메시지를 읽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파티] 블랙 : 경직 구간은 어디일까..

다시 재도전하기 전에 의견을 나눴다. 분명히 이번에도 경직으로 패턴을 단순화시킬 수 있는 구간이 있을 텐데, 커뮤니티엔 아직 정보가 올라오지 않았다.

[파티] 밍채 : 형 사탄이 나무 탔을 때 해볼래요?

[파티] 블랙 : 그거 괜찮다

[파티] 블랙 : 나무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

벌써 일곱 번째 재도전이었다. 인원이 둘이라서 2페이즈까지 가는 속도가 더뎠고, 무엇보다 주현의 무기가 멀쩡하지 않아서 밍채의 솔플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주현은 점점 지쳐 가는데 밍채는 힘들다고 내색 한 번 하지 않아서 쉬자고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

주현은 마우스를 다잡고 눈에 힘을 줬다. 10인 던전을 굳이 2인이어서 클리어할 이유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건 확실히 존재했다. 인원이 둘밖에 없어서 어그로[1]가 밍채 아니면 주현에게 왔고, 다양한 사탄의 공격에 맞아볼 기회가 있었다. 주현처럼 감각 없는 사람들은 두들겨 맞아 봐야 패턴을 익힐 수 있었으니 그런 점에선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도 맞아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사탄의 공격을 읽어 냈다. 허리 부근을 찌르는 창을 검날로 막아 내고 반격을 이어 나갔다. 크게 휘둘러진 검날이 사탄의 복부를 시원하게 긁었다.

이 짓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니 자연스레 외우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염소들이 난리를 피우는 구간도 순조롭게 넘겼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2페이즈에 진입했다.

사탄이 오두방정을 떨며 나무에 오르자 주현은 경직 스킬을 사용해 몸을 들이받았다. 나무가 흔들리고 잎사귀 몇 장이 떨어질 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역시 아니었나? 그렇게 헷갈리는 사이, 사탄이 가지를 털어 열매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와.”

[파티] 블랙 : 맞네

채팅을 치면서 육성으로 감탄했다. 잔디 위로 떨어진 열매는 오로지 붉은색뿐이었다. 촘촘한 간격으로 떨어져 잘못 주워 먹을 수도 있던 전과 달리 열매끼리의 거리도 널찍해 걱정이 없었다. 주현과 밍채는 나란히 붉은 열매를 하나씩 먹고 다음 패턴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탄은 들고 있던 창을 흙 깊숙이 쑤셔 넣었다. 땅이 찢기듯 정사각형으로 나누어지고 조금 전과 똑같은 장소에 따뜻한 볕이 들었다. 안전지대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번의 도전으로 햇빛을 볼 수 있게 된 밍채는 주현과 함께 볕이 든 구역으로 대피했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

“뭐야?”

밍채가 주현의 캐릭터를 바라보며 윙크했다. 양손을 붙여 작은 하트를 만들고 있는 꼴에 기가 막혔다. 레이드 패턴에 익숙한 숙련 상태도 아닌데 여유롭게 감정 표현이나 쓰는 밍채가 신기했다.

주현이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다른 세 개의 구역에서 빛이 들어왔다.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밍채가 뒤를 졸졸 쫓아왔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이번에는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며 애교를 떨었다. 장난을 치다가 삐끗해서 죽기라도 하면 한 소리 해 주려고 했는데, 주현도 아니고 밍채가 그런 실수를 범할 리가 없었다.

[확성기] 청포동 : 사탄 ㅈㄴ쉽네

[확성기] 궁수는못참지 : 깼다!!!!!!!!!!!!!!!!!!!!!

[확성기] 강화실패 : 깼으면 소리 그만 지르고 영상 좀 올려줘요 형들

시간이 지나니 슬슬 확성기에는 <분노의 사탄>을 클리어했다는 유저들의 아우성이 가득했다. 공략만 안다면 이전 악마 레이드인 레비아탄보다 쉽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길드] 신사 : 사탄 재밌네요ㅋㅋㅋ

[길드] 신사 : 우리 길드는 우리가 첫클리어인가?

[길드] 암흑기사 : 그런 듯 ㅆㅂ 아 개힘들었다

길드 채팅에도 신사와 암흑기사가 클리어 소식을 전해 왔다. 내심 서쪽이 먼저 클리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평소처럼 고스펙 방이 아닌 랜덤 매칭으로 떠난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릴 듯했다. 첫판부터 중국인에게 습격당한 것도 굼뜬 속도에 한몫했다.

[파티] 블랙 : 너희 길드는 클리어 했어?

주현은 채팅을 끝마치자마자 사탄이 던지는 썩은 열매에 맞고 캐릭터가 즉사했다. 3페이즈는 사탄이 유저들에게 열매를 던지는 괴상한 패턴이었다. 맞기 싫으면 받아치거나,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탄이 던지는 열매는 총 세 가지였는데, 익은 붉은색과 익지 않은 초록색, 마지막으로 까맣게 변한 썩은 열매였다. 열매의 색에 따라서 해를 입는 정도도 달랐다. 붉은색은 캐릭터가 잠시 굳었고, 초록색은 1분간 일정 속도로 피가 깎이는 디버프가, 마지막으로 썩은 열매는 맞는 즉시 캐릭터가 죽어 버렸다.

[파티] 밍채 : 형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인데 다른 사람 얘기를 한다고요?

길게 말을 한 건 오히려 밍채였는데, 남다른 타자 속도 덕분에 손쉽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묵직하게 날아오는 새까만 열매를 따돌린 밍채는 유유히 주현의 시체에 다가왔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던 몸에 빛이 스며들면서 캐릭터가 깨어났다.

[파티] 블랙 : 미안..

사탄 레이드 듀오를 과연 데이트라고 칭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주현은 빠르게 사과했다. 별로 미안하지 않았으나 밍채와 함께 지내다 보니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길드] 레아 : 와아

[길드] 월월월 : 수고하셨어염

[길드] westone : 누가 누워서 깨죠?

[길드]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

[길드] westone : 썩은건 누가 봐도 피해야 할 열매인데 ㅡㅡ

[길드] 월월월 : 혹시 버프 줄 수도 있잖아염...ㅠㅠㅠㅠㅠㅠㅠ

서쪽의 파티도 레이드를 클리어했는지 채팅이 쏟아졌다. 썩은 열매를 맞고 저승을 맛보고 온 월월월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월월월은 패턴 분석을 위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주현은 채팅 치다가 얻어맞은 거였지만, 썩은 열매에 당한 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은 어때요?

[길드] 월월월 : 듀오라서 말 못 하지 않을까염 ㅋㅋㅋㅋ

월월월의 말이 맞았다. 주현은 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이게 무슨 야구처럼 공을 치는 스포츠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대검을 세워 빠르게 다가오는 열매를 막아 냈다. 검날에 부딪힌 열매는 옆으로 튕겨 나가더니 펑 터지면서 과즙이 주륵 흘러내렸다. 힐끔 옆을 살피자 방어 기능이 없는 밍채는 캐릭터를 움직여 열매를 피하고 있었다. 주현이 야구라면, 밍채는 피구였다.

[길드] 신사 : 아 솔플이나 해볼까

[길드] 암흑기사 : 단체기믹 없어서 ㄱㅊ할듯?

[길드] 레아 : 악마 레이드는 주 한판 아니에요?

[길드] 신사 : 연습모드는 가능해서요 ㅋㅋ

[길드] 레아 : 아하!!!

휘몰아치던 열매의 습격을 이겨 내면 가까이 다가온 사탄이 주현에게 창을 내둘렀다. 이제 창 막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창과 검날이 부딪치며 챙! 맑은 소리가 울렸다. 주현은 마우스를 한 번 더 클릭해 반격을 날렸다. 캐릭터가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사탄에게 출혈을 남겼다.

사탄의 어그로를 주현이 끌고 있는 동안, 밍채는 자유롭게 빛 기둥을 때려 부었다. 그렇게 공격을 주고받던 사탄은 다시 주현과 거리를 두더니 나무가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 사탄이 나무의 몸통에 손을 얹어 흔들자 열매가 후두두 떨어져 잔디 위를 굴렀다. 사탄은 잽싸게 열매를 주워 둘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내던졌다.

주현은 깊게 숨을 쉬며 다시 검을 세웠다.

[길드] 월월월 : 아직 솔플은 안 나왔나염?

[길드] westone : 네

[길드] westone : 보통 파티클하고 솔클 도전하니까

[길드] westone : 저녁이나 내일쯤 나오지 않을까요

[길드] 레아 : 블랙님은 어쩌다가.........

밍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주현은 레이드에 큰 관심이 없는 룩덕 유저 중 하나였다. 첫 번째 악마 레이드인 <교만의 루시퍼>는 돈을 내고 버스 탔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도전할 생각조차 못 하고 가끔 영상이나 찾아봤었다.

괜찮은 장비를 맞춘 건 레이드에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지, 더 높은 던전이나 쾌적한 파티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워낙에 컨트롤이 부족하다 보니까 장비로 실력을 보완했고 우연히 랭킹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사게에서 랭킹값 못 한다고 욕을 먹더라도 그다지 상처 받지 않았다. 같이 던전을 도는 파티원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신규 레이드에 가겠다며 장비 강화를 시도했던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쪽이나 월월월이 함께 가자고 말을 꺼낼 때면 나중으로 미루고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밍채와 함께 게임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일까. 잘못하면 언제나 함께 묶여서 욕을 먹어서일까. 이제는 그때만큼 레이드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딜이 모자라더라도 밍채가 그만큼 채워 줄 테고, 혹시나 실수하면 밍채가 헛소리하며 분위기를 풀어 주는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파티] 밍채 : 형

밍채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채팅하는 중에도 밍채는 캐릭터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책을 펼쳐 든 밍채가 주문을 읊자, 선명한 원기둥의 빛이 번쩍이며 사탄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사탄이 눈을 감으며 몸뚱어리가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시들었던 잔디가 빳빳하게 살아나고, 맵 가장자리부터 출발해 살금살금 다가오던 햇볕이 언덕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푸르스름하던 풀밭이 햇빛을 머금어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나무의 열매들도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 광경에 넋을 놓은 채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분노의 사탄> 엔딩 장면이었다. 떠오르는 정산 창과 보상에 주현은 정신을 차리고 스크린 샷 버튼을 연타했다.

[SYSTEM] 밍채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인벤토리로 들어오는 보상은 역시나 잡템이었다. 주현은 심호흡하며 기여도 정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1위 밍채 95.93% 》

《 2위 블랙 4.07% 》

“와.”

기여도는 기대도 안 했던 터라, 4% 정도면 선방한 편이었다. 밍채는 주현이 기쁨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파티를 유지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파티] 블랙 : 사진 안 찍어?

[파티] 밍채 : 아

[파티] 밍채 : 형 찍고 싶어 하는 줄 몰랐어요

주현의 물음에 밍채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단 반응을 보였다. 4%밖에 기여를 안 한 주현도 이토록 자랑스러운데 덤덤한 밍채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잽싸게 스크린 샷을 찍지 않았다면 사진 하나 남지 않은 헛수고가 될 뻔했다.

[파티] 블랙 : 이거 자게에 올려도 돼?

[파티] 밍채 : 형 4퍼 했는데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4%밖에 안 해 놓고 자랑이냐고 창피를 주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밍채 화법에 익숙해진 주현은 다르게 읽었다. 낮은 기여도의 스크린 샷으로 자랑하면 욕을 먹는 경우가 꽤 있었다. 밍채는 그런 상황을 걱정하는 거였다.

욕쯤이야 먹고 오래오래 살면 되는 일이었다. 밍채가 얼마나 고생해서 깬 건데, 박수 한 번 받지 못하고 묻히는 게 더 억울했다. 스크린 샷을 제시하지 않고 깼다고 떠들어 봤자 믿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비웃음만 받을 테다. 밍채는 그런 면에서는 무심해서 그러든 말든 상관없겠지만, 주현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유게시판에 접속해 게시물을 훑어보자 가장 적은 인원 파티의 클리어는 6인이었다. 듀오 클리어는 물론 트리오도 없는 상황에 주현은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4% 정도야 밍채 혼자서도 채울 수 있는 딜량이었고, 주현이 빠졌다면 단기간 솔로 클리어라 더 관심받기 좋았을 것이다.

[확성기] 하프뿌셔 : 자게에 듀오클 떴다

[확성기] 오늘은진짜접음 : 사탄이 개쉽긴한가보다

[확성기] keeper : 저게 듀오임? 솔클 아님?

올리자마자 확성기가 떠들썩해진 바람에, 또 다른 듀오 클리어가 나온 줄 착각할 뻔했다. 이어지는 조롱에 주현이 올린 게시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유저들이 비꼬아도 딱히 타격감은 없었다. 못한 것도, 밍채에게 얹혀 간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무안을 줄 시간에 얼른 밍채 칭찬이나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드] westone : 와 블랙님 듀오 성공하셨네요?

[길드] westone : 저 지금 너무 감동했어요..

[길드] westone : 같이 레이드 가자고 하면 맨날 바쁜척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ㅠㅠ

[길드] westone : 사랑은 위대하네요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블랙 : 아니..

[길드] 신사 : 블랙님 축하해요

[길드] 블랙 : 감사합니다

[길드] 신사 : 55분클이라.... 난 50분클 해볼까나

축하받자마자 들어오는 견제에 입 안이 썼지만 딜을 겨루는 게임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점이었다. 굳이 신사가 아니더라도, 밍채와 주현의 기록을 단축해 클리어하는 유저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터였다. 주현은 사람들의 질투에 휩쓸리지 않고 오늘의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길드] 암흑기사 : 4퍼ㅋㅋㅋ 딜 귀엽네요

[길드] 암흑기사 : 4퍼면 거의 밍채님 솔플 아닌가?

[길드] westone : 부부는 하나입니다 ㅡㅡ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채팅으로 웃고 떠들던 주현은 뒤늦게 제 옆에 있는 밍채를 발견했다. 파티를 유지한 채로 얌전히 주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인가 싶어 밍채의 곁을 빙글빙글 돌자, 밍채가 주현의 뒤를 쫓아 기차를 만들었다.

[파티] 블랙 : 이제 쉴까?

기껏 낸 연차인데 사탄 때문에 기력이 없어졌다. 그만 침대에 눕고 싶은 주현은 밍채에게 넌지시 물었다.

[파티] 밍채 : 형 근데 왜 단공이랑 친구예요?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말하는 거 보니까 어스름 형도 친구 같던데

고작 텍스트인데 질문이 왜 이렇게 살벌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주현의 기억이 강화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주현이 한창 평온 길드원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고 수락을 기다릴 때, 밍채는 주현과 엇갈려 4채널에 머물러 있었다. 강화할 때가 되어서야 넘어왔으니 평온 길드원과 친구가 되었다는 걸 밍채가 그간 모르고 있는 게 당연했다.

[파티] 블랙 : 그러게

[파티] 밍채 : 형 바람피워요?

[파티] 블랙 : 지울까?

먼저 걸어 놓고 삭제하는 것도 웃기지만 밍채가 싫다면야 그 정도는 양보해 줄 수 있었다.

[파티] 밍채 : 됐어요

당장 지우라고 바락바락할 줄 알았는데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이제 조금 철이 들었나 싶어 주현은 가볍게 웃었다.

* * *

주말을 지나 월요일. 퇴근 시간에 맞춰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확인한 주현은 눈을 살포시 내리감고 느릿하게 심호흡했다. 그런다고 답답하고 열이 오르는 마음이 진정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얼굴에 표가 나진 않았다.

보통의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메일을 보내지 않고 내일로 넘겼을 텐데, 거래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급한 일이란 의미지만 퇴근할 준비를 마친 입장에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일을 마친 주현은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씻고 오자 날이 바뀌어 있었다. 당장 침대에 눕고 싶었으나, 출석 보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주현은 남은 기력을 긁어모아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깜빡깜빡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에 힘을 준 채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길드] westone : 어서오세요~~~

[길드] westone : 야근하신 건가?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ㅠㅠ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레아 : 블랙님 어서오세요!!

[길드] 블랙 : 안녕하세요

어차피 출석은 켜 놓기만 하면 되는 건데, 이대로 잘까 고민하던 차에 파티 초대가 날아왔다. 무심코 거절을 누르려던 손이 파티장의 닉네임을 읽고 방향을 바꿨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단공 : 블랙님 >w

[파티] blueberry : 아; 왜 저래 진짜

[파티]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만 있을 줄 알고 수락한 거였는데, 파티에는 평온 길드원이 함께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탈퇴 버튼에 마우스 커서를 얹자, 익숙한 닉네임이 쏟아졌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westone : 엥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레아 : 이거 뭐예요...??!!?!

[파티] 월월월 : ????

[파티] 밍채 : 사탄 가실래요?

[파티] westone : 저 지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요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어스름 : ???

[파티] 월월월 : 설렌다는 뜻이에염 ㅋㅋㅋ

[파티] 어스름 : 아 ㅋㅋㅋㅋㅋㅋㅋ

평온 사이에서 혼자 있으면 민망할까 봐 친한 길드원을 불러준 모양인데, 배려가 무색하게도 주현은 게임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던전에 입장하면 졸다가 사탄에게 얻어맞고 바닥에 누운 채로 클리어할 게 뻔했다.

[파티] 블랙 : 저 너무 졸려서 그런데 빠지면 안 될까요..

[파티] 단공 : 아잉 ㅠㅠㅠ

[파티] blueberry : 으....

[파티] 어스름 : ;;

[파티] 밍채 : 형 그냥 누워있어도 돼요

[파티] 블랙 : 그건 좀..

[파티] 단공 : ㅇㅈㅇㅈ 그냥 누우세용

<분노의 사탄>은 아직 출시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레이드였다. 그런 던전을 누워서 날로 먹기엔 양심이 아팠다. 무기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라 더더욱 그랬다.

주현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방이 만들어졌다. 최대한 버텨 보도록 결심한 주현은 눈을 찌푸리며 대기실에 입장했다.

[파티] 단공 : 이름이랑 캐릭터만 보면 블랙님이 재앙 길마인데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의 캐릭터 앞을 단공이 어슬렁거리며 평가했다. 닉네임도 그렇고,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도 어두컴컴한 느낌이라 유저들에게 길드 잘 들어갔다는 소리를 몇 번씩 들었었다.

[파티] 월월월 : 이거 공방인가염?

[파티] 레아 : 공방이면 블랙님 못 눕지 않아요?!

[파티] 블랙 : 안 누워요..

악마 레이드의 최대 인원은 열 명인데, 현재 파티원은 여덟이었다. 주현은 잠시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흐릿한 시야로 <분노의 사탄> 방 목록을 확인했다. 횟수가 초기화되는 월요일이라 그런지 방이 많아서 뒤 페이지에 묻혀 있었다.

[파티] 월월월 : 8인으로 갈까염?

서쪽도 아닌 월월월이 소수 인원 파티를 권장하니 주현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게임이 시작되었다.

[파티] 어스름 : ???

[파티] 월월월 : 잠시만염 ㅠㅠㅠㅠ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레아 : ??????

[파티] 월월월 : 마법의 주문이란 말이에염 ㅠㅠㅠㅠ 저렇게 말하면 사람 들어오는뎀 ㅠㅠㅠㅠㅠㅠㅠㅠ

주현도 뒤늦게 이해하고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인원이 부족할 때 ‘이대로 출발할까요?’ 하고 넌지시 물으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 상황을 농담으로 던져본 말인데 알아듣지 못한 밍채가 진담으로 받아들인 거였다.

[파티] blueberry : ㅋㅋㅋㅋㅋ 김민채 상대로 농담을....

여덟의 캐릭터가 맵에 입장해 푸른 언덕을 밟고 섰다. 신이 난 서쪽이 염소 무리를 향해 돌진하자, 염소들이 소란스럽게 흩어지며 사탄이 잠에서 깨어났다.

《 영웅들의 합창 : 10초간 공격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

《 독주 : 영역 안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 빛의 희생 : 받는 공격의 피해량이 일회성으로 30% 감소합니다. 》

월월월이 파티원들에게 버프를 걸어줄 때, 밍채는 주현에게만 보호막을 씌워 주고 있었다. 혼자 둥근 방어막을 달고 있는 게 민망했으나, 그건 주현 혼자만이 느끼는 부끄러움이었다. 밍채가 주현을 편애하는 걸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라 파티원들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 주신 리라의 은총 》

그래도 밍채는 버퍼라는 자각을 가졌는지 공격력 증가 상태 아이콘이 화면에 떠올랐다. 주현은 자신에게 피해량 감소 버프를 걸고 사탄에게 다가갔다.

탱커로 분류되는 대장장이와 성기사는 일정 시간 동안 몬스터의 시선을 끄는 스킬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반 레이드에선 어그로를 탱커가 관리했지만, 악마 레이드에선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어서 파티원들이 돌아가면서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직자가 기본 버프를 유지하기 힘든 치명적인 이유였다.

현재 사탄의 어그로는 포탄을 쏘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펑펑 터지는 요란한 폭발음의 박자에 맞춰 눈을 깜빡였다. 놓을 듯 말 듯 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주현은 사탄의 등 뒤로 이동해 대검으로 몸을 꿰뚫었다. 그 순간 사탄이 휙 뒤를 돌아 주현에게 창을 갈겼다.

보급 무기를 착용한 주현은 파티에서 가장 약했다. 쟁쟁하게 순위를 다투는 랭커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사탄은 야속하게도 주현에게 어그로가 끌렸다. 주현은 버릇처럼 검을 세웠다. 사탄이 재빠르게 창을 한 번 더 휘둘렀고, 그 역시 가볍게 막아 냈다. 이어 세 번째 공격까지 방어에 성공한 주현은 반격으로 검을 크게 내둘렀다.

[파티] westone : 저 지금 감동해서 울고 있어요..

[파티] 월월월 : 저도염 ㅋㅋㅋㅋ

공격을 막지 못해서 캐릭터가 바닥을 구르던 기억은 과거에 남았다. 졸려서 눈은 감기는데, 본능으로 마우스를 클릭해 방어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이런 데 쓰일 말은 아니지만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출혈 없이 모든 공격을 막아 내니 이번엔 사탄의 어그로가 블루베리를 향했다. 주현은 어차피 대미지도 약한 거 방어에만 집중하자 싶어 매크로처럼 검날을 반복해 세웠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가 섞여 소음이 만들어졌다. 주현은 그 소음을 자장가 삼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목덜미가 서늘하게 느껴져 눈을 번뜩 뜨니 캐릭터가 죽어 있었다.

서둘러 채팅 창을 확인하자 다들 이해하는 반응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캐릭터가 사탄에게 꽤 얻어맞았는지 밍채가 힐을 줬다는 채팅 기록이 남아 있었다.

[파티] 어스름 : 웬일로 힐 줌?

[파티] 밍채 : 형 받으라고 준 건데

[파티] 어스름 : 아...ㅎ

[파티] westone : 블랙님 전용 힐이랍니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주무시는 것 같은데염

[파티] 단공 : 나한테 그렇게 힐을 줘봐라

[파티] blueberry : 주겠냐?

[파티] 단공 : ㅠ_ㅠ

주현은 손등으로 볼을 두드려 정신을 차리고 키보드에 손을 얹어 사과부터 했다.

[파티] 블랙 : 죄송해요.. 졸았네요

[파티] 단공 : ㄱㅊㄱㅊ 처음부터 누워도 된다고 했음 ㅋㅋ

[파티] blueberry : 밍채가 2인분할 거예요

[파티] westone : 블랙님 절 믿으세요~!

[파티] 월월월 : 서쪽님 오히려 신난 것 같은데염?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주현의 시체 위로 말풍선이 떠오른 순간, 사탄을 상대하던 밍채의 캐릭터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주현에게 향했다. 그 때문에 사탄도 밍채의 뒤를 쫓았다. 다 아는 사이라서 망정이지, 초면인 유저들 섞인 공개 방에서 했으면 한 소리 들었을 비매너였다.

속박 스킬이 쿨타임에 걸렸는지 밍채는 사탄을 내버려 둔 채로 주현에게 부활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사탄이 창을 휘두르는데, 밍채는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맞아 주고 있었다. 그 광경이 기가 막혀서 슬슬 졸음이 달아났다.

[파티] 단공 : 와 김밍채 버프 깨지는걸 보네

[파티] blueberry : ㄹㅇ

빛이 스며든 주현의 캐릭터가 몸을 일으켰다.

《 부활 : 원상태로 부활합니다. 5초간 무적 상태입니다. 》

듀오로 플레이하던 그 날의 기억과 장면이 겹치는 듯했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부활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주현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재도전할까 봐 겁이 났다.

어느새 2페이즈로 넘어갔다. 사탄이 나무에 올라타자 주현은 스킬을 사용해 몸을 들이받았다. 뒤이어 똑같이 경직 스킬을 사용한 단공이 한 번 더 나무에 부딪혔다.

[ 밍채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 어스름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 월월월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 레아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파티] 단공 : 와 반응 속도 머임???????

[ blueberry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파티] westone : 블랙님 저 진짜 울고 있어요 ㅠㅠㅠ

[파티] 어스름 : 밍채... 사람한테 감사할줄 알았구나

[파티] 단공 : 와 그러네 ㅆㅂ 내가 경직할땐 한번도 안해줘놓고

경직을 성공한 주현에 파티 채팅이 시끄러워졌다. 밍채와 함께 연습한 탓에 타이밍 하나는 정확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잠시 당황한 사탄은 가지를 흔들어 붉은 열매를 잔디 위로 떨어뜨렸다. 파티원들은 흩어져서 열매를 하나씩 사이좋게 집어 먹었다.

가볍게 뛰어 나무 아래로 내려온 사탄은 들고 있던 삼지창을 바닥 깊숙이 꽂아 넣었다. 안전지대는 늘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주현은 볕이 들기 전에 먼저 캐릭터를 옮겼다. 당연히 밍채도 함께였다.

[파티] westone : ?

[파티] 단공 : 왜케 외롭지?

[파티] 블랙 : ??

안전지대가 한 곳이 아니었으니 본인에게 조금 더 편한 위치를 찾아 이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흩어져야 정상이었지만 단 두 구역에만 사람이 몰렸다.

암흑의 기운이 휩쓸고 지나간 후 볕이 든 장소가 바뀌자 똑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파티] 블랙 : 왜 다 같은 곳으로 피해요?

주현과 밍채를 제외한 나머지가 같은 구역에 모여 있었다. 다수가 모여 있으니 덩그러니 떨어진 둘이 이상해 보였다.

[파티] 월월월 : 팁게에 피하는거 공략 올라왔었어염

[파티] westone : 부부는 역시 다르네요

[파티] 블랙 : ㅅㅂ

팁 게시판의 공략을 파티원 모두가 따라 할 정도면 다른 유저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건데, 그러면 게임에서 다른 방법으로 피하는 건 밍채와 주현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팁 게시판을 꼭 확인해야겠다고 머리에 새겨 뒀다.

사탄과 공격을 몇 번 주고받으니 어느덧 3페이즈였다. 확실히 둘이서 도전할 때보다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페이즈를 휙휙 넘겼다. 이렇게도 쉬운 레이드였는데 밍채는 왜 고생을 사서 한 건지 아직도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사탄이 세 가지 열매를 섞어서 던지자, 주현은 넋을 놓은 채로 검날을 세웠다. 인원이 여덟이나 되니 막을 열매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렇게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분노의 사탄>을 마무리 지었다.

[파티] 블랙 : 와 빠르네요

[파티] 단공 : 그렇게 안 빠르지 않나?

[파티] westone : 블랙님은 첫판이 듀오여서 그래요 ㅋㅋㅋㅋ

[파티] 단공 : 아 맞다.... 민채 ㅁㅊ놈

[파티] 단공 : 블랙님 민채 버리고 저랑 커플 어때욤?

[파티] 단공 : 탱커 커플 >_<

[파티] blueberry : 역겨우니까 작작해

[파티]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

체력이 바닥난 사탄이 잔디 위에 쓰러진 채 눈을 감자, 죽어 있던 땅이 숨을 쉬며 되살아났다. 생기를 머금은 풀밭 위를 따스한 햇볕이 한 번 더 뒤덮어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대망의 보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SYSTEM] 밍채님이 [7대 악마 무기 재료 선택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어스름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단공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blueberry님이 [분노의 열매]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단공 : 뭐야 이 망겜

[SYSTEM] 블랙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단공 : 뭐야 블베????

[SYSTEM] 월월월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레아님이 [분노로 어그러진 삼지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blueberry : 앗싸

주현은 이번에도 얻은 건 잡템뿐이었으나 밍채라도 좋은 아이템을 얻어서 다행이었다. 가장 비싼 아이템을 먹은 건 블루베리였다. 모든 악마 레이드에서 나오는 [7대 악마 무기 재료 선택 상자]와 달리 액세서리 재료인 [분노의 열매]는 <분노의 사탄> 레이드에서만 획득할 수 있었다.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늘 파티를 유지해서 나오던 때와 달리 밍채가 파티를 해체한 탓에 주현은 마을로 쫓겨났다. 채예스 광장으로 돌아온 주현의 곁에는 어리둥절한 길드원들도 함께였다.

[전체] westone : 밍채님한테 감사하다고 하려 했는데.... 파티가 없네요^^

[전체] westone : 평온 길채 어디였죠?

[전체] 블랙 : 7채요

주현은 길드원들과 함께 평온이 있을 7채널로 이동했으나, 광장에 서 있는 건 블루베리와 어스름이 전부였다. 그사이 어디에 갔나 싶어 친구 목록을 확인하자, 밍채의 위치가 대련장이었다.

[전체] westone : 밍채님 어디 갔어요?

[전체] 블랙 : 대련장이요..

[전체] westone : ??

[전체]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 단공이 블랙님한테 커플 하자고 해서 그런가봐요

[전체] we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랭커끼리의 싸움이라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단공이 돌아온 건 금방이었다. 딱 봐도 단공이 진 것 같은데, 단공은 포기를 모르고 주현에게 다가와 질척였다.

[전체] 단공 : 저희 사랑의 도피를 떠나요 김민채 짜증나요 ㅡ3ㅡ

[전체] 블랙 : 전 괜찮아요..

[전체]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단공 : 아 상처.......ㅠ_ㅠ

[전체] westone : 밍채님은 어디 갔어요?

[전체] 단공 : 그러게요 어디갔징

대련을 한 건 둘인데 광장으로 귀환한 건 하나였다. 주현은 다시 친구 목록을 켜 밍채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상가에 가 있었다. 조금 전 얻었던 무기 재료를 팔기 위해 거래소에 간 모양이었다.

밍채는 재앙 길드원에게 기꺼이 골드를 나누어 줬는지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전체] westone : 골드 주신 거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전체] westone : 귓말 막혀 있으셔서 ㅎ

[전체] 레아 : 저두요!!!!

[전체] 월월월 : 저도 전해주세염

수호자 출시 때는 귓속말을 열어 뒀던 것 같은데 밍채는 금세 또 잠가놨다. 주현에게 전해 달라는 건지, 평온 길드원에게 부탁하는 건지 몰라 일단은 밍채가 광장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주무시러 안 가세요?

[전체] 블랙 : 아 그러네요

[전체] 어스름 : ㅋㅋㅋㅋ 늦었지만 푹 쉬세요

[전체] 블랙 : 네 ㅠ

밍채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아, 게임 종료를 위해 톱니바퀴 아이콘에 마우스를 얹었을 때였다. 느닷없이 우편함에 불이 들어왔다. 조금 전 길드원들이 골드를 받았다며 밍채에게 감사 인사를 했으니, 아마 밍채가 보낸 골드일 것으로 추측했다.

보낸 사람 : 밍채 (성직자)

우편 제목 : .

첨부된 아이템 : [어둠이 깃든 대검]

숨이 멈췄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졸린 나머지 벌써 잠이 들어 꿈일 수도 있었다. 손등으로 볼을 툭툭 쳤다. 손등에 치인 볼이 납작하게 눌렸다.

주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아이템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 정보를 확인했다. 이전에 쓰던 음률과 비교할 수 없는 확연한 능력치의 차이에 감탄하다가, 끝에 적힌 (제작자 : 밍채) 표시를 발견했다. 그게 뜬금없이 귀여웠다.

무기에는 그 비싸다는 치명타 증가 옵션도 붙어 있었다. 혹시 금액이라도 청구했나 살펴보았으나 걸려 있는 건 [어둠이 깃든 대검]이 전부였다.

무기를 잃었다고 해서 염치도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 밍채가 비싼 아이템 먹고 나눠 주는 돈도 몇 번이고 사양했었는데, 몇십 배에 달하는 무기를 덥석 받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전체] 블랙 : 이건 좀..

[전체] 단공 : 블랙님 개싫어한닼ㅋㅋㅋㅋㅋㅋㅋㅋ

마침 우편을 보내기를 끝낸 밍채가 광장으로 돌아왔다. 제 앞에서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밍채에 주현은 마음이 굉장히 심란해졌다.

[전체] 블랙 : 아뇨..

[ 밍채님이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

[전체] blueberry : 왜 저러는 거야?

[전체] 밍채 : 우리 사이에 그것도 못 줘요?

반송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밍채가 우물쭈물한 기색을 눈치채고 새침하게 대꾸를 해 왔다. 우리 사이……라고 하기엔 뭐가 없었지만, 그걸 말로 뱉으면 밍채가 서운해할 게 뻔했다.

[전체] 어스름 : 뭐 받으셨어요?

주현은 밍채가 보낸 우편을 받고 아이템을 채팅 창에 태그했다.

[전체] 블랙 : [어둠이 깃든 대검] 이건데..

[전체] 월월월 : 헐 그걸 그냥 주셨어염??

[전체] westone : 로맨틱하네요

[전체] 단공 : 와 ㅆㅂ 치명 달아서 주네

[전체] 레아 : 허얼......

[전체] 어스름 : 아 ㅋㅋㅋ

무기 직업에 따라서 가격이 다르지만 어쨌건 거래소에다가 내다 팔면 몇억은 쉽게 벌 수 있는 가치의 아이템이었다.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서 밍채는 태연하게 애교나 부리고 있었다.

무기를 쉽게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10위권으로 내려간 밍채의 랭킹이었다. 새로운 레이드인 <분노의 사탄>이 출시되면서 장비 액세서리인 반지도 함께 나왔는데, 밍채는 아직 반지 아이템을 맞추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가격 거품이 빠지길 몇 주 기다렸다가 아이템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어둠 무기를 착용하고 있는 밍채에게 [7대 악마 무기 재료 선택 상자]가 필요 없었단 걸 알지만, 그걸 팔아서 반지 사는 데에 보탰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우기 힘들었다.

[전체] 블랙 : 너무 비싸서 좀..

[전체] 단공 : 에이 블랙님 그냥 받으세요

[전체] blueberry : ㅇㅈ 걔 돈 많아요

[전체] westone : 맞아요 블랙님 랭킹 높을수록 돈 벌기 쉽고 돈 쓸곳 없어요~

[전체] 어스름 : 재료 하나 먹고 만든거라 돈도 그렇게 안 들었을 거예요 ㅋㅋㅋ

재앙 소속인 서쪽은 몰라도 평온 길드원은 밍채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눈앞에서 어린애가 몇억을 홀라당 뜯어먹혔는데 걱정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받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사람들 곁에서 주현이 아직도 고민하는 기색이자, 어스름이 서둘러 말을 얹었다.

[전체] 어스름 : 커플인데 그것도 못 사주면 헤어져야죠

[전체] blueberry : 그래서 길마님 커플이 없구나

[전체]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어스름 : ^^

[전체] 단공 : 저한테 와도 무기 해드릴 수 있는데?

[전체] 단공 : 치명작 옆에다가 공속도 띄워드림

뽑아 달라는 듯 자신을 어필하던 단공은 갑자기 밍채의 캐릭터와 함께 광장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친구 목록을 켜 위치를 확인하자 역시나 대련장이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서쪽님 골드 파세요?

[귓속말] westone : 앗 저 반지 만들어야 해서요 ㅠㅠ

[귓속말] westone에게 : 아 그러네요

밍채가 자리를 비운 동안 강화에 쓸 골드를 구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어려워졌다. 서쪽은 새로운 장비인 반지 때문에 골드를 모아야 했고, 월월월은 골드를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빨랐고, 레아는 주현처럼 장비를 맞추는 단계였다.

커뮤니티에서 골드를 구매하기엔 사기 치는 유저가 많았다. 고소장을 접수하기 전에 돈을 돌려 달라는 게시글이 하루마다 올라오고 있었다.

주현은 채팅 채널을 길드로 변경한 후 키보드 위 손가락을 움직였다. 길드에도 판매자가 없으면 게임 거래 사이트로 가 볼 예정이었다.

[길드] 블랙 : 혹시 골드 파시는 분 있나요?

[길드] 신사 : 얼마요?

[길드] 블랙 : 3억이요

[길드] 신사 : 귓 ㄱ

신사에게 귓속말을 보내기 전에 정보 창을 열어 봤다. 신사는 벌써 장비를 만들었는지 [+20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옵션도 치명타 확률 증가가 붙어 있었다. 유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완작이었다. 반지를 바꾼 신사는 랭킹이 두 단계나 상승해 성기사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귓속말] 신사 : 블랙님?

[귓속말] 신사에게 : 네

신사의 장비를 구경하느라 귓속말을 보낸단 것을 깜빡해 버렸다.

[귓속말] 신사 : 여기로 오세요

주현은 신사가 보낸 오픈톡 링크를 클릭해 대화방에 입장했다. 신사의 오픈톡 프로필 사진은 본인의 캐릭터였다. 까만 앞머리로 이마를 가린 남자 캐릭터가 정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블랙] 신사님

[신사] 천만당 9500 해서 285000원 입금주세요

커뮤니티 골드 시세가 9,000원이었고, 게임 거래 사이트는 수수료가 붙어 9,500원이었다. 아는 사람과 거래를 하면 사기당할 가능성이 줄어든단 게 장점이긴 한데…… 보통은 길드원에게 할인을 해 주지 않나? 서쪽이 판매하던 골드는 8,500원이었다. 서쪽만큼의 할인율은 바라지도 않지만, 모르는 사람이랑 거래하는 수준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블랙] 입금했어요

산다고 해 놓고 비싸다고 발을 빼는 것도 민망했다. 신사가 보낸 계좌에 입금을 마치고 메시지를 보내자, 말풍선 옆에 있던 1이 곧바로 사라졌으나 신사는 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드 마스터가 길드원을 상대로 사기를 칠까 싶어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신사] 확인했어요

[신사] 보내드릴게요 ㅋㅋ

다행히 신사가 금방 돌아왔다. 주현은 PC 톡 창을 내리고 게임 화면으로 복귀했다. 어느새 단공과 밍채가 결판을 내고 돌아왔는지 광장에 시끌벅적해져 있었다. 단공은 한 판 더 하자고 밍채를 도발했고, 밍채는 주현의 캐릭터 옆에 찰싹 붙어 무시로 일관했다. 누가 봐도 단공이 진 상황이었다.

신사가 골드를 보냈는지 우편함에 불이 들어왔다.

보낸 사람 : 신사 (성기사)

우편 제목 : 블랙님

우편 내용 : 강화하시려는 것 같아서 재료도 보내요 ㅋㅋ

첨부된 아이템 : [어둠의 강화석] 500개

첨부된 금액 : 300,000,000

골드 가격으로 투덜거렸던 게 부끄러워졌다. 신사는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이렇게 길드원들을 챙겨 줄 때를 보면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귓속말] 신사에게 : 신사님 강화석 감사합니다

[귓속말] 신사 : 강화 파이팅하세요 ㅋㅋ

[귓속말] 신사 :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 신사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얼떨결에 신사와 친구가 되었다. 친구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거절하려면 핑계도 대야 하고 결국엔 사이가 어색해지는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그런데 안 주무세요..?

[전체] 블랙 : 무기가 생겼는데 어떻게 자요..

[전체]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단공 : ㅇㅈ

[전체] 블랙 : 저 재료 좀 사고 올게요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강화 재료를 사러 상가로 향하는 주현의 뒤엔 진득하게 붙어 따라오는 밍채가 함께였다. 보호석과 강화 재료를 종류별로 쓸어 담고 광장으로 돌아온 주현은 대뜸 단공을 향해 절을 올렸다.

[ 블랙님이 단공님에게 절을 합니다. ]

[전체] 단공 : ????머임

[전체] 블랙 : 대장장이셔서 ㅎ

[전체] 단공 : 앜ㅋㅋㅋㅋㅋㅋㅋ 원트[2]에 붙여 드릴게요 무기!!!!

[전체] blueberry : 실패하면 니 탓

[전체] 단공 : ㅠ_ㅠ

절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직업이 대장장이인 단공의 기운이라도 받고 싶었다. 아이템을 사용해 강화 창을 연 주현은 보호석을 넣고 강화를 시작했다. 게이지가 차올라 막대 끝에 닿더니 성공 이펙트가 떠올랐다.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 어둠 무기 만드셨네요

[길드] 잔혹동화 : 강화 중이신 건가요?

[길드] 암흑기사 : ㅋㅋㅋㅋ 제작자 밍채님

그렇게 강화 단계를 쌓는 중에 길드 채팅이 술렁였다. 골드 사겠다고 길드 채팅으로 떠들었던 터라 바뀐 장비에 길드원들의 관심이 쏠렸다.

[길드] 암흑기사 : 치명작은 직접 띄운거?

[길드] 월월월 : 그것도 밍채님이염

[길드] 암흑기사 : 밍채님 세컨 안 구하나요?

[길드] 암흑기사 : 저도 사귀고 싶습니다

[길드] 블랙 : 아니.. 저도 안 사겨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밍채는 씀씀이가 헤픈 편이었다. 신사와의 내기에서 승리해 얻은 골드도 주현에게 넘겼었고, 레이드에서 비싼 아이템을 먹으면 파티원과 기꺼이 골드를 나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멍청하게 실수해서 무기 잃은 건 주현이었는데, 밍채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더 좋은 무기를 쥐여 줬다.

악의를 품은 누군가가 밍채의 재력을 노리고 제대로 뜯어먹었으면 금방 거지가 되어 나앉았을지도 모른다.

‘……좀 심각한 거 아닌가?’

아무리 게임 커플이라고 해도 현금으로 몇십만 원 하는 무기를 쉽게 선물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스름과 함께 버리느니 마느니 떠들었던 애가 밍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역시 코쿄아가 거짓말을 했던 건가?’

코쿄아와 밍채의 관계가 여전히 미궁 속에서 헤맸지만, 밍채에겐 절대 꺼내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강화 성공을 알리는 환한 이펙트와 함께 어김없이 밍채를 향한 의문이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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