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사사게 스타 채채 (1/13)

랜선 교체! 1권

지은이: 토라미

목차

1. 사사게 스타 채채

2. 사사게이스타

3. 거구의 중학생

1. 사사게 스타 채채

모든 건 업보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파티] 라면맛너구리 : 님 여자인가요?

[파티] 카민 : 여자겠음?

[SYSTEM] 라면맛너구리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SYSTEM] 새로운 파티원을 찾는 중입니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파티] 카민 : ㅎㅇ

[파티] 암살자눈나 : ㅎㅇ 몇 살?

[파티] 카민 : 마흔

[파티] 암살자눈나 : 연상 오히려 더 좋아

[파티] 카민 : ㅅㅂ

파트너 운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칭이 형편없었다. 파티가 맺어지자마자 성별을 묻는 건 당연한 절차였고, 남자라고 대답하면 냅다 나가는 놈이 다수였다. 아예 묻지도 않고 여자라고 생각하는 놈도 수두룩했다. 그런 놈들을 거르고 나면 패작[1]만 남았다.

이 시간대에는 정상인이 없나? 기어이 5연패를 기록하고 박살이 난 점수로 다시 매칭을 돌렸다.

주현이 하는 게임의 이름은 <혼돈의 설화>다. 창세 이후, 세계에 혼돈이 찾아오자 영웅들은 힘을 합쳐 땅속 깊은 곳에 마족을 봉인했다. 시간이 지나며 봉인이 서서히 약해지고, 풀려난 마족들 탓에 또 한 번의 혼돈이 찾아오게 된다. 태초의 세계를 지켰던 영웅의 제자들이 다시 힘을 모아 마족을 물리치는 게 게임의 주된 이야기였다.

유저들은 혼돈의 설화를 줄여서 ‘혼설’이라고 불렀다. 게임의 장르는 MMORPG.

혼돈의 설화에는 다양한 콘텐츠가 있다. 그중 주현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건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PvP 랭크전이었다. 유저들과 맞붙는 PvP의 경우엔 각 직업의 특성을 모두 알아야 했기에 주현이 거리를 두는 콘텐츠 중 하나였다. 하필이면 이번에 랭크전이 생기면서 두둑한 보상이 걸리는 바람에 더는 외면할 수도 없어졌다.

기존의 PvP 시스템과 랭크전의 차이점을 꼽자면, 랭크전은 무조건 2인 한 팀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팀원을 잘 만나는 운이 필요했다.

현재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 카민은 주현의 본캐가 아니었다. 본캐로 랭크전을 처음 겪어 본 주현은 곧바로 부캐로 도망을 왔다. 본캐의 랭킹이 꽤 높은 편이라 그런지 배치전에서부터 쟁쟁한 상대를 만났고, 파트너가 된 파티원 역시 실력 있는 유저였다. 문제는 주현이 PvP에 재능이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직업의 대표 스킬 몇 개만 알고 있는 정도이지, 그 스킬의 쿨타임[2]이 몇인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등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게임이 시작한 지 30초 만에 상대 팀에게 캐릭터가 죽어 버렸고, 같은 팀에게 패작이냐며 욕을 잔뜩 먹었다.

그래서 조금 낮은 수준의 유저를 만나기 위해 부캐를 꺼내 왔건만…… 이곳은 상대편 내 편 가를 것 없이 질 낮은 유저들만 모여 있었다.

[길드] 카민 : PVP 랭크전 원래 이렇게 이상한 유저밖에 없어요??

[길드] 월월월 : 어 랭크전 돌리는거면 저랑 같이 하실래염?

[길드] 카민 : 저 진짜 못해서 부캐로 연습하는거라 ㅋㅋㅋ 다음에 같이해요

[길드] 월월월 : 저도 진짜 못하는데염

[길드] westone : 님 티어를 보세요

[길드] 월월월 : 아 다 넘어왔는데염 ㅠㅠㅠㅠㅠㅠㅠ

[길드] 카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STEM] 새로운 파티원을 찾는 중입니다.

랭크전은 친구나 길드원과도 동반 입장이 가능했다. 그 탓에 상위 티어[3]에선 합이 좋은 듀오가 널려 있어 승리를 거머쥐기 더욱 어려운 편이었다.

주현은 길드원의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랭크전에 입장했다. 로딩 창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정상인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먼저 들이대면 안 그러지 않을까?’

[파티] 카민 : ㅎㅇㅎㅇ

[파티] 카민 : 형만 믿어♡

그렇게 채팅을 치다가 문득 이러면 자신이 욕하던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된단 걸 깨달았다. 파티원도 말이 없는 걸 보아 정상인이 확실했다. 헛소리를 내뱉지 않고 게임을 했다면 원활한 한 판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전체] 성직자상향좀 : 카민님

[전체] 카민 : ?

제 선택에 좌절하고 있던 차에 상대편 유저가 말을 걸어왔다.

[전체] 성직자상향좀 : 님 팀 채채

[전체] 성직자상향좀 : 사사게에 박제된애임

[전체] 티팟 : 실물 처음봄

[전체] 카민 : ?

게임이 시작되기까지 대기 시간이 있었으니 서둘러 창을 내리고 사건/사고 게시판에 접속했다. 사건/사고 게시판, 일명 사사게는 게임 내의 비매너 유저가 등단되어 다른 유저들이 해당 유저를 거를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시판이었다.

‘채채 >>랭크전 선시비, 패작, 욕설, 잠수 비매너’

찾을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화려한 제목이 주현을 반기고 있었다. 정상적인 닉네임을 가진 녀석이 왜 이런 짓을? 웬만한 두 글자 닉네임은 모두 먹힌 탓에, 채채는 꽤 레어닉에 속했다.

[비매너] 채채 >>랭크전 선시비, 패작, 욕설, 잠수 비매너

작성자 : 테입 | 댓글 : 102개 | 조회수 : 4068

PVP 랭크전에서 만났음

본인 연금술사, 채채 성직자

(_001.jpg)

힐 달라고 하니까 마나 아깝다고 안 줌

(_002.jpg)

그럼 버프라도 달라니까 그것도 마나 아깝다고 안 줌

(_003.jpg)

본인이 상대편 둘한테 공격받는데 가만히 있길래

뭐하냐고 물으니까 잠수

(_004.jpg)

하도 답답하게 굴어서 욕하니까 (제가 먼저 욱해서 욕한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뻔뻔하게 욕설 시전

* * *

[댓글]

* * *

- 쟤 저도 어제 만났는데 성직자면서 힐 한번 준적 없고 버프마저도 못 받음 ㅋㅋ 그렇게 공격만 하고 싶으면 소환사를 하든지

* * *

- 랭크전하면서 이새끼보다 더 ㅈ같은 새끼를 만나본적이 없음 힐러면 힐이나 하지 지가 힐러 선택해놓고 공격 스킬밖에 안씀

* * *

- 나랑 만났을땐 정상이던데 ㄷㄷ

* * *

↳ 저도요...

* * *

↳ 굳이 이 글에 댓글다는 이유가?

* * *

- 스샷 보니까 욕은 안했는데?

* * *

↳ 욕처럼 보일만큼 말을 좆같이 한단거지

다시 게임 창으로 돌아오자 제 옆에서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채채가 보였다. 보통 성직자들은 화이트 톤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채채는 외형에 관심이 없는지 기본 설정 커스터마이징에 옷은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뒷골목에서 볼 법한 검은 로브였다.

[파티] 채채 : 형만 믿을게요♡

이윽고 채채의 채팅이 올라오자 주현은 잘못 걸렸음을 짐작했다. 또라이를 피하려다가 레드카펫 깔고 맞이해 준 격이 되어 버렸다. 대기 시간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주현은 일단 캐릭터를 움직여 커다란 문을 열고 필드로 발을 내디뎠다. 까슬한 모래알이 신발에 부딪히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PvP 랭크전은 맵이 랜덤으로 선택이 되는데, 이번에는 노을이 지는 사막이었다. 지형에 장애물이 없는 탓에 캐릭터가 그대로 노출되어 정면으로 붙을 수밖에 없었다. 직업이 소환사인 주현의 캐릭터 카민은 마나를 사용해 골렘 소환 스킬을 사용했다.

주현이 빈틈을 보이자 상대편 성기사가 곧장 대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 순간, 주현의 캐릭터 위로 얇은 방어막이 씌워졌다. 게임 화면에 새롭게 생긴 아이콘을 눌러 보자 친절한 설명이 떠올랐다.

《 빛의 희생 : 받는 공격의 피해량이 일회성으로 30% 감소합니다. 》

‘……얘 같은 팀한테 스킬 안 써 준다고 하지 않았나?’

[전체] 티팟 :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매너 유저로 유명한 채채가 팀원에게 협력하다니. 상대편 성기사가 당황한 듯 물음표를 치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공격에 맞고 방어막이 볼품없이 깨져 버렸지만, 덕분에 골렘을 소환할 수 있었다.

골렘이 팔을 휘두르며 후방에 있는 성직자에게 다가가자, 성기사가 잽싸게 달려와 그 앞을 막아서며 스킬을 사용했다. 푸른빛이 스며든 검이 골렘의 머리를 시원하게 갈랐다. 골렘이 타격을 입자, 주현에게도 대미지가 들어왔는데 동시에 머리 위로 깃털 표식이 떠오르며 깎아진 체력이 다시 차올랐다.

‘……얘 비매너 유저가 맞나?’

채채는 그에 그치지 않고 성기사의 뒤로 넘어가, 상대편 성직자에게 디버프[4] 스킬을 걸었다. 성기사가 뒤늦게 눈치채고 검을 휘두르자 얄밉게도 모두 피하더니 주현에게 달려와 뒤에 쏙 숨었다.

‘공격을 좋아하는 힐러여서 의심을 받은 게 아닐까?’

사람들이 채채에게 너무 가혹했던 게 아닌가 고민까지 하게 된 지경이었다. 소환사의 운용 방법을 잘 모르는 주현이 버벅대며 플레이해도 채채는 쓴소리 한 번 안 하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을 마쳤다.

《 Win 》

처음으로 랭크전에서 승리했다.

마음 같아선 친구 신청이라도 보내 보고 싶지만 사사게에 박제된 유저와의 친분은 득보단 실이 더 크다. 채채가 그런 비매너 유저가 아니라고 대신 해명해 줄 정도로 오지랖 넓은 성격도 아니었으니 아쉽지만 이만 이별하는 게 옳았다.

[파티] 채채 : 형

[파티] 채채 : 저 덕분에 이겼는데 왜 아무 말 없어요?

오해는 무슨. 채채는 또라이가 맞았다. 주현은 혀를 차며 경기장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랭크전에 입장하려고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불현듯 점수를 바라봤다. 점수가 무려 50점이나 올라가 있었다. 보통 한 판 이겼을 때 20점 정도 오른다고 하지 않았나?

[길드] 카민 : 랭크전 한판 만에 점수가 50이나 오를수가 있나요?

[길드] 월월월 : 그게 되나염?????????

[길드] 시인짱짱 :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안오를텐데 ㄷㄷ

[길드] westone : 티어 어디예요?

[길드] 카민 : 저 실버요..

[길드] westone : 티어가 낮긴 해도 50점은 점수가 많이 큰데

[길드] westone : 진짜 잘하셨나본데요?

주현이 한 거라곤 골렘을 소환했다가 성기사에게 썰린 후 채채가 둘을 상대로 슈퍼플레이를 보여 주는 걸 마음속으로 응원한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날먹[5] 했다. 거의 버스 타다시피 했지만 한 팀이라 그런지 점수를 두둑하게 받은 모양이다. 채채는 한 판에 점수를 그렇게 받아 가면서 아직도 실버에 머무르고 있단 게 신기했다.

[SYSTEM] 새로운 파티원을 찾는 중입니다.

[SYSTEM] 파티원을 찾았습니다!

연승하면 점수가 더 오른다는 팁이 있었다. 제발 만만한 상대를 만나길 기도하며 매칭을 돌리자, 얼마 안 가 파티원이 잡혔다.

[파티] 카민 : 안녕하세요

[파티] 누구바 : ㅎㅇㅎㅇ

인사하는 걸 보아 정상인이 분명했다. 같은 팀이 된 누구바의 직업이 사냥꾼인 걸 확인하고 숨을 돌리며 안심하던 때였다. 전체 채팅으로 익숙한 닉네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체] 채채 : 여보 ㅋㅋ 상대편이네?

열 받은 티가 역력하게 느껴지는 말투. 조금 전까진 분명 형이었는데 어느새 호칭은 여보가 되어 있었다.

[파티] 누구바 : ??

[파티] 누구바 : 님 여친임?

[파티] 카민 : 모르는사람임;;

어차피 채채는 이쪽 파티 채팅을 훔쳐 볼 수 없을 테다. 재빨리 선을 긋자 사냥꾼은 별말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전체] 누구바 : 님 착각하신 듯

아니다. 착각이었다.

[전체] 채채 : ?

[전체] 채채 : 여보 내가 부끄러워?

[전체] 누구바 : ??

[전체] 앤비 : 누가 여보임?

[전체] 카민 : ?

혼자 말이 없으면 의심을 받을까 봐 재빨리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 갈고리 하나가 채채를 더 열 받게 만들었는지 분노가 꾹꾹 담긴 채팅이 떠올랐다.

[전체] 채채 : 형이 나없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전체] 앤비 : ㄷㄷ

[전체] 누구바 : 먼데 이거

[파티] 누구바 : 님 넷카마임?

[파티] 카민 : 넷카마라뇨;;

[파티] 카민 : 형이라고 하는거 안 보이세요?

[파티] 누구바 : 넷카마인거 들켜서 쫓아오는거 아님?

[파티] 카민 : 전판에 합 좀 잘 맞았는데 그거 때문에 아는척하는거예요;;

……넷카마라니, 어이가 없었다. 누구바가 혼자 소설을 쓰는 걸 막으려고 해명을 했지만, 딱히 믿어 주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판을 끝내고 로그아웃하는 수밖에. 계속 매칭을 돌려 봤자 채채를 만날 게 뻔했다.

차단하는 방법도 있겠다만, 같은 팀으로 매칭이 잡히는 걸 막는 수단일 뿐 상대 팀으론 언제든 만날 소지가 다분했다.

대기 시간이 끝나자 사냥꾼인 누구바는 캐릭터를 움직여 문을 벌컥 열고 상대편으로 돌진했다. 이번 맵은 상자가 가득 쌓인 창고였다. 횃불 몇 개가 빛을 잃은 상태라 시야가 어두컴컴한 편이었으나 캐릭터를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현은 제 캐릭터를 쓱 상자 뒤로 옮겨 놨다. 채채가 노리는 1순위는 자신일 테니까.

채채는 제게 달려오는 사냥꾼을 무시하고 무기인 책을 꺼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스킬이지?’

성직자를 키워 보지 않아서 채채가 쓰는 스킬은 힐을 제외하고 모두 낯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빛 한줄기가 쏟아지더니 주현의 캐릭터를 가려 주던 상자가 박살이 나 버렸다. 부서지는 잔해를 보며 넋을 놓자, 어느새 채채가 빛줄기로 주현의 캐릭터를 속박했다.

[파티] 누구바 : 님 머함?

[파티] 누구바 : 지원좀

[파티] 카민 : 저 속박 당함

[파티] 누구바 : ?

[파티] 누구바 : 푸세요

[파티] 카민 : 어케 푸는데요?

[파티] 누구바 : 그거 공격 맞으면 풀림

[파티] 카민 : 안 때리는데요;;

[파티] 누구바 : 그럼 풀어달라고 하세요;;

게임이 장난인 줄 아나…….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던지는 누구바에게 속으로 투덜대며 주현은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속박만 해 두고 죽이지 않는 걸 보아 주현을 만만하게 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심했을 때를 노려서 공격하면 된다.

속박이 슬슬 풀려 갈 때 주현은 서둘러 마나를 이용해 스킬을 사용했다. 커다란 스태프를 휘두르는 순간, 캐릭터 머리 위로 까만 해골이 떠오르더니 사용하던 공격이 사라져 버렸다.

‘뭐야?’

당황한 주현이 스킬을 여러 번 반복하여 누르자, 캐릭터의 피가 된통 깎이며 뒤로 자빠져 버렸다. 죽었다, 이 말이다. 일순간 죽어 버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캐릭터의 상태를 확인하자, 조금 전 채채가 걸었던 디버프의 설명이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 주신 리라의 축복 : 3초간 사용한 공격이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

스킬명은 주신 리라의 축복인데 내용은 불행하기만 했다. 디버프 걸린 줄도 모르고 공격을 쏟아 내다가 모조리 되돌려 맞고 죽은 모양이다.

얼마 안 가 홀로 상대 팀 포병과 대치하던 누구바도 시체가 되어 파티 채팅으로 욕을 쏟아 냈다. 이제 욕먹는 건 익숙해서 한 귀로 흘리며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 채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눈 돌아서 죽이려 들 땐 언제고 웬 친구 신청? 곧바로 거절하자 다시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다시 거절하니 다시 신청. 이쯤 되면 비매너가 아니라 사이버 스토킹으로 박제되었어야 했다.

[귓속말] 채채 : 형만 믿으라고 할 땐 언제고 저 다 써먹으니까 필요 없다고 버리는 거예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한순간 쓰레기가 된 주현은 분노의 타자를 쳤다.

[귓속말] 채채에게 : 장난이었어요;

[귓속말] 채채 : 전 진심이었는데요?

[귓속말] 채채에게 : 아 뭐래 진짜;

[귓속말] 채채 : 형만 장난이었으면 끝인거예요?

[귓속말] 채채에게 : 그럼 어떡하라고요

[귓속말] 채채 : 절 책임지세요

와, 이거 진짜 또라이네. 게임을 던지고 나가던 유저들이 나을 지경이었다. 이런 놈에게 걸릴 줄 알았다면 PvP 랭크전 같은 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다. 다행인 건 채채가 주현의 본캐 닉네임을 모른다는 거다. 어차피 주현은 부캐는 수납하고 본캐를 위주로 키우는 플레이 스타일이었으니, 카민 캐릭터 정도야 버리면 그만이었다.

[귓속말] 채채 : 설마 부캐라고

[귓속말] 채채 : 저 버리고 튈 생각은 아니죠

[귓속말] 채채 : 형?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귓속말] 채채 : 본캐라고 해봤자

[귓속말] 채채 : 같은 길드겠죠

[귓속말] 채채에게 : 저한테 왜 이러세요...

도망치기로 했던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채채와의 합의점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귓속말] 채채에게 :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귓속말] 채채 : 절 책임지라니까요?

[귓속말] 채채에게 : 어떻게 책임지는데요

[귓속말] 채채에게 : 같이 랭크전 돌리고 하면 되나요?

더 원하는 게 있어 봤자 함께 던전 도는 것쯤이라 여겼다.

[귓속말] 채채 : 저랑 커플해요

[귓속말] 채채에게 : ???

[귓속말] 채채 : 지금 절 두고 다른 사람이랑 커플하겠다고요?

또 혼자 열 받아 하는 채채를 내버려 두고 주현은 채채의 정보 창을 열어 봤다. 랭크전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실버 티어에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상당히 장비 아이템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실력도. 인성은 잘 모르겠지만…….

성직자 랭킹 490위. 높다고 할 순 없지만, 랭킹이 뜬단 것만으로 결코 얕잡아 볼 스펙도 아니었다. 이 정도 스펙과 실력이면 합을 이룰 비즈니스 커플 정도야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주현을 지목하여 구애할 이유가 없었다.

[귓속말] 채채에게 : 왜 저랑 하려고 하는데요?

[귓속말] 채채 : 형이 저 꼬셨잖아요

[귓속말] 채채에게 : ㅅㅂ 제가 언제요

[귓속말] 채채 : 형만 믿으라고 했잖아요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귓속말] 채채에게 : 저도 웬만해서 해드리고 싶은데요

[귓속말] 채채에게 : 채채님 스펙이 저랑 안 맞네요

[귓속말] 채채 : 형 랭킹도 안 뜨는데 양심 있어요?

[귓속말] 채채에게 : 아니; 이거 본캐 아니거든요?

주현의 본캐인 블랙의 직업은 성기사로 랭킹은 300위 초반대였다. 게임을 늦게 시작한 탓에 컨트롤이 남들보다 부족해 돈으로 찍어 누른 사례였다.

[귓속말] 채채 : 본캐 닉이 뭔데요?

본캐와 부캐가 같은 길드에 있는 이상, 채채가 수소문한다면 언제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못 알려 줄 것도 없었다.

[귓속말] 채채에게 : 블랙이요

[귓속말] 채채 : 성기사?

[귓속말] 채채에게 : 네

[귓속말] 채채에게 : 제가 저보다 약한 분하고 커플 맺기는 좀;; 손해라서요

[귓속말] 채채 : 안 약하면요

‘지금 나 실력 없다고 욕하는 건가?’

물론 본캐를 데려와도 채채와의 PvP에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이런 놈과는 절대 커플 따위 맺고 싶지 않았다.

[귓속말] 채채 : 기다리세요

[귓속말] 채채에게 : 뭘 기다리는데요?

[SYSTEM] 대화 상대가 로그아웃하여 채팅을 보낼 수 없습니다.

금세 로그아웃해 버린 채채 탓에 채팅이 닿지 못했다. 뭘 기다리라는 건지 몰라 광장 한가운데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대도시 채예스. 마을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커다란 규모의 도시였지만, 유저들 편의상 마을이라고 불렀다. 혼설의 대표 마을이라 소개되는데, 게임에 접속하면 채예스 광장에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밝은 베이지 톤과 반짝이는 다이아, 사파이어 보석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굉장히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또 채예스 광장 중앙 바닥엔 주신 리라가 남긴 힘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제작 콘텐츠가 채예스에 모여 있고, 조명도 화사해서 사진 찍기 적절해 가장 인기 좋은 마을이었다.

마침 광장 지나던 길드원이 주현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전체] 월월월 : 블랙님 랭크전 다 하셨어염?

월월월의 직업은 음유시인으로 성직자, 연금술사와 같은 힐러 계열이며 무기는 하프를 사용한다. 랭킹 320위. 꽤나 높은 랭킹에 비해서 게임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 스스로 즐겜 유저라고 외치며 홍보보단 친구 창에 있는 사람들과 던전을 간다. 캐릭터는 금빛 파마머리에 오묘한 청록색 눈의 키 작은 남자 캐릭터였는데,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강아지 귀와 꼬리를 착용한 덕에 귀여움이 극대화됐다.

월월월은 주현이 현재 길드에 가입하게 된 계기였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던 뉴비였을 시절, 월월월의 도움을 받아 쉽게 레벨을 올리고 장비 아이템을 맞출 수 있었다.

[전체] 카민 : 아 네

[전체] 카민 : 연습 좀 하려고 했는데 매칭이 별로네요

[전체] 월월월 : 아래쪽은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구염 ㅠㅠ

[전체] 월월월 : 본캐로는 안 하세염???

[전체] 카민 : 본캐는 배치전 중인데 제가 너무 못해서 ㅋㅋㅋ

[전체] 카민 : 부캐로 연습하고 있던거예요

[전체] 월월월 : 헉 그럼 저랑 같이 하는건 어떠세염??

[전체] 월월월 : 저 티어 그렇게까지 안 높아염

[전체] 카민 : 어디신데요?

[전체] 월월월 : 저 플래티넘이염

월월월은 양심을 잃은 게 분명했다.

PvP 랭크전의 티어는 마스터, 다이아, 플래티넘, 골드, 실버, 브론즈로 나누어진다. 가장 많은 유저가 분포한 티어가 골드였으니 플래티넘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티어라는 말은 맞았으나, 주현의 수준이 실버인 걸 고려했을 때 둘의 실력 편차는 무시 못 했다.

[전체] 카민 : 너무 높으신데요..

[전체] 월월월 : 이것도 다 팀 잘 만나서 그래염 ㅋㅋㅋ

[전체] 월월월 : 매칭 돌리면 저 맨날 수준 브론즈라고 욕 먹었어염

제 자존감을 채워 주겠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며 희생하는 월월월을 더는 못 본 척할 수가 없던 주현은 결국 로그아웃하고 본캐인 블랙으로 접속했다. 그러자 월월월이 뛰어오르는 점프 감정 표현을 사용하며 파티 초대를 보내왔다.

주현의 본캐인 블랙은 닉네임을 따라서 머리도 까맣고 옷도 시커먼 제복을 입은 남자 캐릭터였는데, 유일하게 눈만 붉은색이어서 그 점이 강조되는 편이었다. 주현의 캐릭터를 본 몇몇 사람들은 성기사가 아니라 마족 같다고 말하곤 했다.

[파티] 월월월 : 제가 이겨드릴게염

[파티] 월월월 : 헉

[파티] 블랙 : 왜요??

[파티] 월월월 : 저거 서버주 아니에염???

[파티] 블랙 : 서버주?

보통 서버주는 각 직업의 랭킹 1위를 칭하는 말이다. 그만큼 돈을 퍼부어서 아이템을 맞춘 사람들이니, 서버비를 책임진다는 뜻에서 나왔다.

스펙에만 신경을 썼는지 캐릭터는 꾸미다가 만 것처럼 기본 커스터마이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성의 없는 상태인 데다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난번 출석 이벤트로 뿌린 직업 아바타였다. 청소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 캐릭터가 성직자의 기본 설정값인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주현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파티] 월월월 : 저 서버주 처음봐염 ㅁㅊ 랭킹 1위

그리고 월월월과 주현이 서 있는 곳은 조금 전 채채와 헤어졌던 장소였다. 서버주의 직업이 같은 성직자고 닉네임에 ‘채’가 들어간 밍채라는 걸 고려했을 때…… 동일 인물일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보통 부캐로 같은 직업을 키우진 않으니 관련 없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전체] 밍채 : 형

[파티] 월월월 : 헐 밍채님 남자네염?

[파티] 월월월 : 누가 여자라고 하길래 그런줄 알았는데

[전체] 밍채 : 형?

아니다. 채채는 밍채가 맞았다.

주현이 대답하지 않자 밍채의 캐릭터가 가깝게 붙더니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파티] 월월월 : ???

[파티] 월월월 : 헉 블랙님 저분이랑 친하세염?

[파티] 블랙 : 랭크전에서 만난 또1라인데

[파티] 블랙 : 얘 많이 유명한가요?

[파티] 월월월 : ㄸ라이요?

[파티] 월월월 : 그런 말은 못 들어봤는데

[전체] 밍채 : 형 파티 있네요

[전체] 밍채 : 지금 저 두고 다른 사람이랑 파티 맺고 뭐 하는 짓이에요?

[파티] 월월월 : 또1라이 맞네염 ㄷㄷ

밍채의 편을 들어주려 하던 월월월은 빠르게 수긍했다. 주현은 밍채가 전체 채팅으로 또 어떤 말을 쏟아 낼지 몰라 월월월과의 파티를 깨고 밍채에게 파티를 걸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귓속말] 월월월에게 : 진짜 죄송해요 ㅠㅠ 얘 또1라이라

[귓속말] 월월월 : 랭크전은 다음에 하면 돼염 ㅋㅋㅋ

[귓속말] 월월월 : 그나저나 블랙님 잘못걸린거 아닌가염??;

[파티] 밍채 : 저 형보다 안 약하다고 했잖아요

[귓속말] 월월월에게 : 일단 얘기해볼게요..

[귓속말] 월월월 : 힘내세염 ㅠㅠ

[파티] 블랙 : 안 약한것보다.. 그냥 엄청 차이나는데요..?

[파티] 밍채 : 형 그래서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랭킹 달고 또라이짓을 하는 채채도 이해가 안 갔지만, 무려 1위를 달성하고도 컨셉질을 계속하는 밍채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랭킹이 높고 게임을 잘해도 비매너 유저로 낙인찍히는 순간, 게임 인생은 끝이었다.

[파티] 블랙 : 제가 사사게 보내면 님만 손해거든요

[파티] 블랙 : 알고 계세요?

[파티] 밍채 : 전 형이랑 사사게 게이스타로 남는 것도 좋아요

[파티] 블랙 : ㅅㅂ

주현은 밍채와의 첫 만남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일단 형만 믿으라고 채팅을 친 게 큰 도발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교제를 신청하셨습니다. 》

한숨을 쉬는 순간, 핑크빛으로 물든 시스템 창이 날아왔다. 커플명은 무려 ‘사사게이스타’였다. 남들 다 보는 커플명을 이따위로 한다고? 더군다나 밍채는 성직자 랭킹 1위였다. 장비 아이템을 맞출 때 랭킹권 유저의 정보를 열어 보는 걸 모르나?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교제를 신청하셨습니다. 》

거절할 걸 알았다는 듯 다시 커플 신청이 도착했다. 이번엔 그나마 정상적인 ‘여보’였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할 커플명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사사게이스타’ 같은 걸 봐서일까. 이전보다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놈과 커플이 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자 분노가 담긴 채팅이 빼곡하게 올라왔다.

[파티] 밍채 : 지금 저 먹고 버리는 거예요? 잘살고 있던 저를 꼬셔서 게이로 만들어놓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고요? 그 사람도 게이로 만들게요? 형은 혼설하는 사람들 다 게이로 만들 거예요? 전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요? 형이 먼저 형만 믿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전 형만 믿고 게임한 건데 형이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파티] 블랙 : ㅅㅂ 내가 미안하다...

도저히 이 녀석을 말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귓속말] 월월월에게 : 월월님......

이대로면 꼼짝없이 밍채와 커플이 성사될 게 뻔해 월월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월월월은 혼설의 고인물이었으니 이런 막무가내 유형의 인간을 쫓아내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았다.

[귓속말] 월월월 : 넴?

[귓속말] 월월월에게 : 밍채가 자꾸 커플 하자고 들이대는데 이거 어떡해야 하나요..

[귓속말] 월월월 : 헉... 블랙님...

[귓속말] 월월월 : 잠시만염 서쪽님 부를게염

주현과 밍채가 파티를 맺어 대화하는 동안, 월월월은 잠시 근처 벤치에 캐릭터를 앉혀 뒀었다. 월월월이 벌떡 일어나 둘에게 다가오자, 밍채가 고개를 돌려 월월월을 응시했다.

[귓속말] 월월월 : 아...;;

[귓속말] 월월월에게 : ??

[귓속말] 월월월 : 밍채님이 갑자기 대련 신청하네염;; 어우 놀래라

[귓속말] 월월월 : 두분 파티하고 계신가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네

[귓속말] 월월월 : 그럼 저랑 서쪽님 초대해주실 수 있을까염?!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에게 초대를 날리자, 단숨에 파티원이 불어났다.

[SYSTEM] 월월월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we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밍채 : ?

[파티] 블랙 : ㄴㄴㄴㄴㄴㄴ

밍채가 또 오해하고 망언을 내뱉기 전에 황급히 말렸다.

[파티] 블랙 : 님이 생각하는 그거 아니니까 일단 진정

[파티] 밍채 : 네

[파티] westone : 밍채님

[파티] westone : 블랙님이랑 결혼하고 싶으시다고요?

[파티] 블랙 : 아니 서쪽님

[파티] 월월월 : 결혼 아니고 커플이에염 ㅋㅋㅋ

[파티] westone : 아 커플

[파티] westone : 아무튼 커플이 하고 싶으시다고요?

[파티] 밍채 : 결혼도 하고 싶은데요

[파티] westone : 음 그럼 블랙님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거죠?

westone, 서쪽이라고 불리는 유저였다. 주현과 같은 길드이며, 월월월과 마찬가지로 뉴비였던 시절에 많은 도움을 줬다. 게임의 암묵적인 규칙을 몰라서 의도치 않은 비매너를 했을 때마다 서쪽이 나타나 해명하고 중재해 준 덕에 사사게에 올라가는 일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은인이라 믿었건만, 이번 일만큼은 서쪽이 주현을 배신했다고 느꼈다.

주현은 길드 채팅을 통해 물었다.

[길드] 블랙 : 아니 서쪽님 저 도와주시는 거 맞나요??

[길드] westone : ?? 당연하죠!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그냥 즐기시는 것 같은데염ㅋㅋㅋ

[길드] 블랙 : 월월님이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길드] 월월월 : 헉 들켰네염

[길드] 블랙 : ;;;;

[길드] 사멍꾼 : 뭔일 있나여?

[길드] 블랙 : 가벼운 시비가 걸려서요 ㅋㅋ 별일 아니에요 ㅎㅎ

[길드] 사멍꾼 : 헉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저만 믿으세요

아무리 봐도 서쪽과 월월월 둘 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현이 뉴비 시절부터 다양한 시비에 걸려 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커플 하자고 달려드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파티] westone : 밍채님!

[파티] 밍채 : 네

[파티] westone : 블랙님은 저희가 뉴비 때부터 키운 자식 같은 분이셔서요

[파티] 밍채 : 그럼 이제 제가 키울게요

[파티] 월월월 : 양육권 분쟁인가염 ㄷㄷ

[파티] 블랙 : 제 동의 없이 마음대로 정하지 마세요 ㅅㅂ

[파티] westone : 저랑 딜빵[6] 한번 떠보실래요? ㅎㅎ

[귓속말] 월월월에게 : 서쪽님 그냥 딜빵 뜨고 싶어서 온거 아니에요?

[귓속말] 월월월 : 그런것 같은데염 ㅋㅋㅋ

이 사태에 진심인 건 주현 하나였다.

서쪽의 직업은 포병으로 랭킹은 13위였다. 까무잡잡하게 태운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 캐릭터였는데, 늘 웃통 벗은 투명 아바타를 착용해 탄탄한 몸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 서쪽에게 남사스럽다고 대놓고 말하는 유저도 몇 있었으나, 서쪽은 오히려 그런 반응을 즐겼다.

[파티] 밍채 : 네

[파티] 밍채 : 방 만드세요

[파티] westone : 파티장 블랙님이셨나요?

[파티] westone : 루시퍼 방 만들어주세요!!

[파티] 블랙 : 루시퍼요..?

[파티] westone : 아 루시퍼 벌써 깨셨나요?

[파티] westone : 오늘이 초기화라서 다들 괜찮으실 줄

[파티] 밍채 : 가능해요

[파티] 블랙 : 되긴 되는데

[파티] 월월월 : 저두 가능염

‘진짜 해도 되는 건가?’

긴가민가한 상태로 비공개 방을 생성했다. 루시퍼는 7대 악마 레이드 중 하나로, 일주일에 한 번만 가능한 클리어 제한이 있는 전투였다. 물약 제한도 있고, 부활 아이템 사용이 두 번밖에 안 되는 데다가, 난이도가 기존 레이드에 비해서 어려워 높은 스펙을 요구했다. 최대 10인의 유저가 참가할 수 있는 레이드로 보통은 인원을 꽉 채워서 출발하지만, 가끔 소수로 도전하는 집요하고 독특한 유저들이 있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방 설정에 딜 기여도 표시 체크해주세요

아차, 깜빡했다. 서쪽의 채팅을 보고 기여도 설정까지 끝냈다. 직업 역할에 따라서 딜 기여도는 다를 수밖에 없어서 보통의 전투 때는 잘 쓰지 않는 기능인데, 가끔 유저끼리 서로 본인이 더 잘했다고 우기며 싸우는 경우가 있어서 서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다.

대기실에 들어온 캐릭터 모두 준비를 마치자, 주현은 걱정하며 출발했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한 대만 때리고 바로 죽으시면 돼염

[파티] 블랙 : ??

[파티] 월월월 : 보상받으려면 보스한테 대미지 입혀야 하거든염

[파티] 블랙 : 그럼 루시퍼는 누가 잡나요?

[파티] 밍채 : 제가요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 당연히 저희 둘이 잡죠!

[파티] westone : 눕고 다른거 하시면 됩니다

[파티] westone : 혹시 많이 바쁘세요?

[파티] 블랙 : 그건 아닌데..

‘이렇게 날먹해도 괜찮은 건가?’

7대 악마 레이드 중 루시퍼가 가장 처음 나왔다고 하나, 깔볼 보스는 절대 아니었다. 랜덤 매칭이나 홍보 방에서 요구하는 스펙이 안 되면 유저들이 보상을 위해서 골드를 지급하고 잠쩔[7]을 받곤 한다. 악마 레이드에서 획득할 수 있는 타이틀에 능력치가 붙어 있기도 하고, 값비싼 아이템도 두루 있어서 인기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장소는 천장이 날아간 고대 신전이었다. 큼지막한 대리석 기둥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돌 부스러기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루시퍼는 봉인이 풀리자마자 부리나케 신전으로 달려가 주신 리라 석상의 목을 갈랐다. 본래 주신을 돕던 천사 중 하나였으나, 주신을 배신하고 타락의 길을 걷는다. 7대 악마 레이드는 칠죄종을 모티브로 했는데, 루시퍼는 그중 교만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레이드의 이름도 첫 번째 악마, <교만의 루시퍼>였다.

서쪽의 캐릭터가 신전 밖 제단으로 돌진하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검붉은 달과 함께 인간형 보스인 루시퍼가 나타났다. 루시퍼는 등에 달린 검은 날개 여섯 개를 펄럭이며 땅을 밟았다.

서쪽이 포탄을 준비하고, 밍채가 책을 꺼내 주문을 외울 때, 월월월은 루시퍼에게 다가가 현을 냅다 튕기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월월월이 피하지 않자 루시퍼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사용해 근방에 원을 그어 저주를 내렸다.

[파티] 블랙 : 헐 월월님 왜 바로 녹아요?

월월월은 주현의 말 그대로 피를 다 잃고 쓰러졌다.

[파티] 월월월 : 헉 블랙님 장비 안 빼고 오셨나염?

[파티] 블랙 : ??

[파티] 월월월 : 한대만 긁으면 돼서 장비 빼고 오셨어도 돼염 ㅋㅋㅋ

[파티] 블랙 : 아..

안타깝게도 주현은 그걸 몰랐다. 일단 죽어야 하니 루시퍼에게 달려가 대검으로 어깨를 시원하게 그었다. 대미지가 들어간 걸 확인하고 가만히 서 있자, 캐릭터 위로 투명한 방어막이 씌워졌다.

《 빛의 희생 : 받는 공격의 피해량이 일회성으로 30% 감소합니다. 》

[파티] 블랙 : ???

[파티] 월월월 : 지켜주는건가염? ㅋㅋㅋㅋ

[파티] 블랙 : ㅅㅂ 필요 없어요

[파티] 블랙 : 죽게 놔둬

격렬하게 거부하자 밍채가 스킬을 취소해 방어막을 거두어 갔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루시퍼가 또 한 번 저주가 담긴 장판[8]을 깔았고, 공격을 피하지 않은 주현 혼자 캐릭터가 투명해졌다.

[파티] 블랙 : 이게 뭐예요?

[파티] 월월월 : 아 그거 언데드화라고 죽은 상태로 변하는건데

순간 주현의 캐릭터 위로 깃털 표시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체력이 단번에 날아갔다. 바닥으로 픽 쓰러지는 캐릭터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파티] 월월월 : 그 상태 때 힐을 받으면...

[파티] 월월월 : 저렇게 대미지로 들어와염 ㅠ

쉽게 설명하자면 밍채의 손에 죽었다. 죽으려는 게 목적이긴 했으나 밍채에게 죽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주현까지 죽고 나자 거슬리던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느꼈는지 둘의 공격 속도에 불이 붙었다.

힐러라고 힐만 주는 건 아니다만, 성직자로 공격 위주의 플레이를 하는 유저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충 만들어진 밍채의 캐릭터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루시퍼를 향해 빛 기둥을 퍼부었다.

파티원 여덟 명이 부족한 상태인데도 괜찮은 속도로 깎이는 보스의 체력을 보니 밍채가 꾸미기에 관심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 실력이면 내내 던전과 PvP만 해도 재밌을 테다.

[파티] 월월월 : 그러고 보니까 블랙님 루시퍼 잡으셨었나염?

[파티] 블랙 : 스토리 보려고 쩔만 한판 받았어요

[파티] 블랙 : 서쪽님 엄청 잘하시는데

[파티] 블랙 : 원래 쩔하시나요?

[파티] 월월월 : 아 ㅋㅋㅋ 서쪽님 잘하시죠!!

[파티] 월월월 : 가끔 공쩔[9]하세염

무거운 대포를 사용하면서 루시퍼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는 서쪽이 대단해서 감탄하자, 밍채가 노발대발하며 채팅을 쏟아 냈다.

[파티] 밍채 : 형 지금 저 말고 다른 사람 보는 거예요?

[파티] 월월월 : ㄷㄷ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고 있었는데.’

억울했지만 해명해 봤자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 레이드에서 서쪽이 승리하면 밍채와도 안녕이었다.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긴 했으나, 표면상으로 들이대는 건 그만하겠거니 싶었다.

[파티] 월월월 : 오오 진짜 빠르네염

어느새 루시퍼의 체력이 바닥났다. 루시퍼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놓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몸이 딱딱한 돌로 변하더니 등에 달려 있던 날개가 바스러지며 완전히 힘을 잃었다.

[파티] westone : 블랙님 다음주에 저랑 같이 루시퍼 가실래요?

파티 기여도가 정산되는 동안, 서쪽이 주현에게 제안을 해 왔다. 7대 악마 레이드는 다른 레이드에 비해서 어려워 미루고 있었는데 서쪽이 함께해 준다면야 주현에겐 이득이었다. 계속 레이드를 안 갈 수는 없으니 이참에 연습해 보자고 마음을 먹은 순간이었다.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파티] 밍채 : 제가 키운다니까요

[파티] 블랙 : 딜빵 지면 물러나는 거 아니었나요??

이윽고 정산 창이 떠올랐다.

[파티] 밍채 : 제가 이겼으니까요

[파티] 밍채 : 형 제 거예요

《 1위 밍채 51.60%》

《 2위 westone 48.38% 》

《 3위 블랙 0.01% 》

《 4위 월월월 0.01% 》

서쪽이 밍채에게 졌다. 주현은 서쪽과 수많은 던전을 함께 돌았지만, 서쪽이 딜로 밀리는 건 처음 봤다. 딜 기여도 시스템을 사용한 건 손으로 꼽혔으나, 매번 굳이 정산 창을 보지 않더라도 서쪽의 활약이 대단하단 것쯤은 본능으로 느꼈다.

[파티] westone : 아 힐러한테 지다니 ㅋㅋ

[파티] 월월월 : 힐러를 얕보지 마세염 ㅋ

[파티] 블랙 : 아니 서쪽님 지면 어떡해요

[파티] westone : 그냥 사귀면 안 되나요?

[파티] 블랙 : ?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밍채님 게임센스도 좋던데

[파티] westone : 전용 물약으로 사용하세요^^

[파티] 블랙 : 아니 남일이라고 막말하지마세요

[파티] westone : 아무래도 제 일은 아니라서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 블랙님 진정하고 일단은

[파티] 월월월 : 밍채님을 받아들여보는 건 어떤가염?

[파티] 블랙 : ㅅㅂ

마을로 나오자마자 또 분홍색 시스템 창이 화면을 뒤덮었다. 곧장 거절을 누르고 밍채가 또 신청하기 전에 재빨리 채팅을 쳤다.

[파티] 블랙 :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파티] 밍채 : ?

[파티] 블랙 : 밍채님 캐릭터가 제 취향이랑 안 맞네요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조건 맞추는 거 선보는 거 같네요^^

[파티] 블랙 : 아 아니라고요

서쪽이 놀리든 말든 뚜렷한 심미안이 있는 주현에게 밍채의 캐릭터는 불호에 가까웠다. 주현은 밍채가 이젠 하다 하다 커스터마이징으로 트집을 잡느냐며 화를 쏟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밍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하여 주현은 제가 뱉은 말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심했나?’

그렇게 반성하기 잠시, 밍채의 채팅이 올라왔다.

[파티] 밍채 : 어떻게 바꾸면 되는데요?

주현은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밍채의 커스터마이징이 취향과 동떨어진 건 사실이었으나, 주현은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었다. 커스터마이징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유저들끼리 캐릭터 얼굴을 욕하다가 싸움으로 번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만큼 민감한 사항이었다.

[파티] westone : 전 이 결혼 찬성이에요

[파티] 월월월 : 커플이라니까염 ㅋㅋㅋㅋ

[파티] westone : 아

[파티] westone : 교제 찬성이에요!

[파티] 블랙 : 아니 ㅅㅂ 누구 맘대로

[파티] 밍채 : 예쁘게 사귈게요

[파티] 블랙 : 아니 ㅅㅂ 님은 또 뭐야

[파티] westone : ㅋㅋㅋㅋ 블랙님 예쁜거 좋아하니까

[파티] westone : 미인캐로 만들어주세요

[파티] 블랙 :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쟤 진짠 줄 안다고요

당황해서 말을 한가득 쏟아 내자 옆에 서 있던 밍채의 캐릭터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키만 불쑥 자란 채로 돌아왔다. 본래 밍채 캐릭터의 키는 보통보다 훨씬 작아서 주현의 입장에선 정수리가 보이는 시야였는데, 이제는 마우스 휠을 밀어 올려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파티] 월월월 : 키만 늘려오신거 아닌가염? ㅋㅋㅋ

[파티] 밍채 : 얼굴은 못 건들겠어요

[파티] 블랙 : ?

설마 저게 취향인 걸까? 원하는 대로 바꾸겠다는 조금 전의 포부는 어디로 간 거지. 투덜거리던 주현은 뒤이어지는 말에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파티] 밍채 : 형이 만들어주세요

[파티] 밍채 : 파일 넘겨주면 그거로 할게요

노력해도 안 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밍채 캐릭터를 보며 성의 없다고 욕한 게 미안해졌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쟤 뭔가요?

[귓속말] westone : 진짜로 블랙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귓속말] westone에게 : 소름 끼치는 말 하지 마세요;;

밍채를 안타까워할 때, 서쪽은 은밀히 귓속말을 걸어와 또 주현을 놀리기 시작했다.

[파티] 월월월 : 블랙님 커마 엄청 잘만드시긴 해염 ㅋㅋ

[파티] 월월월 : 저도 처음에 보고 놀랐잖아염

[파티] 블랙 : 월월님은 저보고 게임 접으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월월월 : 그건 게임이 망겜이니까 그랬어염 ㅠㅠ

[파티] 월월월 : 커마는 예쁘다고 생각했다구염

[파티] 밍채 : 형

밍채에게만 대답하지 않으니 재촉해 왔다. 하는 수 없이 주현은 근심 섞인 숨을 내뱉으며 결정을 내렸다.

[파티] 블랙 : 저 커마 만들고 올게요

[파티] 밍채 : 형 닮게 만들어주세요

[파티] 블랙 : 뭐래 ㅅㅂ

[파티] westone : 진짜 부부 같아요

[파티] westone : 아 커플이랬지

[파티] 블랙 : 둘 다 아니라고요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이 캐릭터 선택 창으로 이동하자 자동으로 파티 탈퇴가 되었다. 새 캐릭터를 생성해 직업을 성직자로 고른 후 얼굴의 여백부터 조절했다. 밍채는 주현처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캐릭터로 뭐를 할 줄 알고 자신의 얼굴을 냅다 넘기겠는가. 주현은 제 취향인 미인을 생각하며 얼굴을 빚어냈다.

* * *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이제 커플 하시나염?

[길드] 레아 : 블랙님 커플 구하셨어요?!

[길드] 레아 : 그럼 저랑 하시지 ㅠㅠ

[길드] 블랙 : 어쩌다보니까 하게 된거라..

[길드] westone : 기다리던 운명이었을지도..

[길드] 블랙 : 아니라고요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쪽은 기다렸다는 듯 트집을 잡아 주현을 놀려댔다. 그런 서쪽을 애써 무시하며 밍채에게 귓속말을 보내려고 하는데…….

[SYSTEM] 밍채님은 친구/길드원에게만 귓속말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밍채가 친구/길드원 귓속말 허용 상태였다. 랭킹이 워낙 높으니 별별 사람이 귓속말을 걸어댔을 테다. 조치해 둔 밍채의 심정을 이해하며 친구 신청을 보내자, 친구 신청 거부 상태라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친구라도 해 두는 건데.

주현은 하는 수 없이 놀림당할 걸 각오하고 서쪽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서쪽님..

[귓속말] westone : 네

[귓속말] westone에게 : 혹시 밍채랑 친구인가요?

망설이다가 던진 주현의 질문에, 서쪽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음을 잔뜩 쏟아냈다.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westone : 남편을 왜 저한테서 찾죠?

[귓속말] westone에게 : ....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 저도 밍채님이랑 친구는 아니에요

[귓속말] westone : 왜 그러세요?

서쪽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럴 땐 게임 확성기를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마저도 밍채가 확성기 기능을 해제해 뒀다면 만나기 힘들단다. 주현은 인벤토리를 열어 소지하고 있는 확성기 개수를 확인한 후 채팅을 확성기 채널로 변경했다.

[확성기] 블랙 : 밍채님 귓 좀 열어주세요

큰맘 먹고 확성기를 날리자, 밍채가 아닌 월월월이 응답했다.

[귓속말] 월월월 : 공개고백인가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ㅅㅂ 아니거든요

주현이 월월월을 상대하는 동안, 서쪽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다시 대화의 운을 뗐다.

[귓속말] westone : 아 그런데

[귓속말] westone에게 : ?

[귓속말] westone : 밍채님 집착이면.. 기다렸으면 귓이든 친구신청이든 왔을 것 같은데

[귓속말] westone : 너무 서두른 거 아닌가 싶어서요

[귓속말] westone에게 :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요

[귓속말] westone : 전 재밌었으니까 확성기 값이라도 드릴까요?

[귓속말] westone에게 : 됐거든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약 밍채가 잠적했다면 주현에게도 이득이었다. 집착하던 게 일회성 관심이라든가, 아니면 또 랭크전에서 주현 같은 사람을 만나서 들이대고 있다거나, 아무렴 좋았다. 그렇게 밍채란 이름을 머리에서 지우던 중이었다.

《 밍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때마침 밍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 신청 메시지와 함께 주현의 캐릭터 앞을 가로막았다. 주현은 눈꺼풀을 깜박대며 당황한 낯을 지우지 못한 채 수락을 눌렀다. 등장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귓속말] 밍채 : 형 이제 저랑 사귈 마음 생긴 거예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ㅅㅂ 커마 주려고 찾은 거예요

[귓속말] 밍채 : 커마 받고 형 마음도 받을래요

[귓속말] 밍채에게 : 둘다 안줌

[귓속말] 밍채 : 형 역시 사사게이스타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죠?

[귓속말] 밍채에게 : 파일 어떻게 전해드리면 될까요? ㅎㅎ

이놈은 진짜다. 주현이 지금까지 지켜본 밍채는 농담 따위를 던질 놈이 아니었다. 랭킹권 성직자 부캐로 랭크전에서 난리 피우는 것만 봐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남들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서 힘겹게 진입하는 랭킹권인데, 그런 자리가 밍채에겐 심심풀이용 캐릭터에 불과했다.

곧이어 밍채가 제안을 던졌다.

[귓속말] 밍채 : 형 톡할래요?

[귓속말] 밍채에게 : 아뇨

[귓속말] 밍채 : 어차피 형 저랑 커플할거고

[귓속말] 밍채 : 그럼 톡으로 접속시간도 맞춰야죠

[귓속말] 밍채 : 오픈톡인데

[귓속말] 밍채 : 그것도 싫어요?

답이 없자 정적을 못 기다리는 밍채가 감정 표현을 사용했다. 밍채의 캐릭터가 쪼그려 앉아 엉엉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랭킹 1위가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게 신기한지 유저 몇몇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기도 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링크주세요

주현은 깊은숨을 내쉬며 밍채로부터 도착한 링크에 접속했다.

* * *

인사말도 없이 커스터마이징 파일만 얹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읽었단 표시가 떠오르고 화면 속 밍채의 캐릭터도 자리를 비웠다.

주현은 밍채가 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며 세워 놓은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일단은 밍채와 커플을 한다.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우긴다면 정말로 사사게 스타를 노리고 글을 쓸 놈이다. 커플 여부는 이제 포기하고 밍채에게 양보하기로 정했다.

대신, 밍채와의 이별을 노리기로 했다. 밍채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고 거슬리게 군다면 밍채도 실망하고 놓아주지 않을까? 실력 없는 주현이라면 단시간만에 밍채를 화나게 할 자신이 있었다. PvP 랭크전이야 비매너를 목적으로 부캐를 이용했으니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주현에게도 관대했을 테다. 본캐 던전을 방해하는데도 과연 밍채가 여유로울 수 있을까?

[귓속말] 밍채 : 형

주현이 준 파일로 커스터마이징을 변경한 밍채가 다시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주현이 설정한 은빛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는 어디에다 버려 뒀는지 모를 상태였다. 밍채가 주현에게 다가가자 같은 색을 지닌 검은 머리털이 흩날리며 하얀 이마를 드러냈다. 이어서 까만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선명한 붉은빛 눈동자가 주현에게 인사했다.

‘……뭐야.’

주현의 캐릭터, 블랙을 따라 했다. 주현의 취향을 빼다 박은 미인형 남자가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애교를 부렸다.

[귓속말] 밍채 : 형 이렇게 생겼어요?

유려하게 생긴 밍채의 캐릭터에 비해서 주현은 선이 굵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누가 자기 얼굴을 커마에 써요

[귓속말] 밍채 : 얘 좀 저 닮았는데

‘정상이 아닌 건 알았는데 허언증까지 있네.’

밍채가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뒤이어 고개를 살랑살랑 양옆으로 기울이며 부산을 떨었다. 애교 감정 표현이었다.

[귓속말] 밍채 : 형 취향이에요?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하는 밍채의 캐릭터를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확실히 잘 만들긴 했다. 선이 굵고 뚜렷한 미남인 주현의 캐릭터에 비해 부드럽고 예쁘장한 느낌이 강해서 인상이 색달랐다.

[귓속말] 밍채에게 : 왜 준대로 안 했어요?

[귓속말] 밍채에게 : 머리랑 눈 그 색 아니었을텐데?

[귓속말] 밍채 : 그래서 저 안 어울려요?

[귓속말] 밍채에게 : 그건 아닌데

머리가 까맣고 눈이 붉어서 그런지 성직자인 직업과 반대로 악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주현의 캐릭터를 보고 마족 같다고 말한 게 새삼스럽게 이해가 갔다.

[귓속말] 밍채 : 이제 저랑 교제해요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교제를 신청하셨습니다. 》

오늘만 세 번째로 보는 커플 신청 메시지. 주현은 결국 밍채에게 패배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커스터마이징까지 제 취향으로 바꿔 온 놈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주현은 허탈한 얼굴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애초에 막무가내에 고집까지 센 밍채를 어떻게 설득하려고 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둘의 캐릭터 머리 위로 꽃가루가 흩날리며 연인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 * *

“임채하 복학했더라?”

내뱉을 뻔한 숨을 도로 삼켜 냈다. 주현이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남의 속을 뒤집어 놓은 줄 꿈에도 모르는 경찬은 테이블에 놓인 주현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치며 시시덕댔다.

“너 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냐?”

“……언제 얘기를.”

그간 취업 준비 때문에 바빠서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다. 한턱내겠다며 주현이 경찬을 고깃집으로 불렀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치여 살면서 임채하란 이름을 깊숙이 묻어 뒀었는데, 공교롭게도 경찬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켜 줬다.

“걘 인기가 더 많아진 것 같더라.”

부러운 투로 중얼거리며 불판의 고기를 뒤집는 경찬에 주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 상판대기는 군대에 몇 년 있었다고 달라질 급이 아니었다. 심미안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던 주현이 인정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러면 뭐해. 걔는…….”

“걔는?”

“아니다.”

“너 지금 뭐 하냐?”

무심코 내뱉었다가 아차 싶어서 황급히 주워 담았다. 그 모습이 기막힌지 경찬이 바람 빠지게 웃으며 물어왔다. 주현은 어느새 끄트머리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고기를 응시하며 임채하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제대 후 복학한 2학년 1학기. 그때의 주현은 지금의 채하와 같은 나이인 스물셋이었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채하는 주현보다 세 살 어린 스물이었다. 채하를 마주친 것보단, 경영에 엄청나게 잘생긴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먼저였다. 이목구비만 제자리에 달려 있어도 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 인간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평범보다 조금 위일 거라고 판단했다. 또는 쏟아지는 과제에 미쳐 버린 학과생들이 심미안을 잃고 방황한다고 여겼다.

주현이 속한 미대와 채하가 있는 경영대 건물은 거리가 꽤 멀었던 탓에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주현은 좀 생겼다는 인간 하나 보려고 구태여 경영대를 찾아가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 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채하가 그 흔한 SNS도 일절 하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었다.

형체 없는 인간으로 유명한 임채하를 만난 건 2학기 교양 수업인 ‘쉽게 이해하는 유럽의 신화’에서였다. 쉽게 이해시켜 준다던 그 수업은 반어법을 이용한 강의였는지 더럽게 어려웠다. 특히 북유럽의 신화를 배울 땐 넋을 놓았다.

“조는 이름순으로 묶었습니다.”

교재에 필기를 끄적이던 주현은 대뜸 조별 과제를 하겠다고 선포하는 교수에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단상에 선 교수는 제 뒤에 있는 스크린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했다. 주현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제 이름을 찾아 나섰다.

윤주현. 어렵지 않게 제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름 뒤엔, 임채하가 있었다. 칭찬에 인색한 남자애들 몇몇도 채하에 대해 떠들어댔으니 그 잘난 얼굴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주현은 고개를 돌려 강의실을 빠르게 훑다가 문득 시선이 한곳에 멈춰 섰다.

주현과 마주친 상대가 눈꺼풀을 깜빡였다. 과제와 휴학, 자퇴밖에 모르던 미대생들이 왜 입이 닳도록 채하를 찬양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보다 조금 위? 채하를 깎아내린 지난날의 자신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임채하입니다. 1학년이에요.”

과연 학과생들 모두가 호들갑을 떨 만한 외모였다. 더군다나 키까지 커서, 작은 키가 아닌 주현이 목을 젖혀 올려다봐야 했다. 주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채하를 멀거니 응시했다. 채하는 그런 주현을 향해 말끔한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조별 과제 내내 채하는 유독 주현에게 살가웠다.

[임채하] 안녕하세요 선배님 경영학과 임채하입니다

조별 과제용 단톡이 따로 있는데도 갠톡을 걸어왔다.

[임채하] 혹시 과제 어디까지 하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윤주현] 제출 기간 많이 남지 않았나요? 자료조사는 거의 끝났고 정리 중인데 왜요?

[임채하] 제가 막히는 게 있어서 선배님 조언이 듣고 싶어서요

자료 정리를 하는데 왜 주현의 조언이 필요한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느닷없는 엉뚱한 부탁이었지만 잘난 껍데기에 넘어간 주현은 허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윤주현] 뭔데요?

[임채하] 혹시 시간 되세요?

밀린 전공 과제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바빠 죽겠으면서도 채하를 만나러 교외 카페로 향했다. 작업실 붙박이인 주현이 자리를 비운다고 하니, 숨겨 둔 여자 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거 아니냐고 동기들이 수군댔다. 물론 장난으로 가볍게 뱉은 말이었다. 당장 과제 제출이 코앞인데 느긋하게 연애 따위나 하기엔 학점이 위험했다.

카페에 도착한 주현은 곧장 채하를 찾아 과제부터 확인했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안부를 묻는 채하에게 대충 대답을 하고 마우스 휠을 굴렸다.

“어, 잘했는데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세 학번 위인 주현보다 나았다. 세 학번 위라고 해 봤자 학년으론 하나 차이지만. 조사와 정리 모두 완벽하게 해 놓고 선배한테 확인까지 받으려고 한 채하가 귀찮았지만, 한편으로 기특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채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를 달았다. 그리고 제 앞에 있던 기다란 컵을 주현의 앞으로 밀어냈다.

“입 안 댔어요. 드세요.”

“……괜찮은데요, 저 아메.”

“전 새로 주문하면 돼요. 그리고 말도 놓으세요.”

아메리카노 안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끊겼다. 어, 어. 설렁설렁 대답하며 제 앞에 놓인 컵을 그러쥐었다. 뜨끈하던 손에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난 과제가 많아서 이만 일어날게.”

“선배. 모르는 거 생기면 또 연락해도 괜찮을까요?”

언제는 내 의사를 물어봤나? 주현은 그렇게 불퉁한 생각을 하면서 내뱉는 말만큼은 친절했다.

“그래. 연락해.”

주현은 컵을 들고 카운터로 다가가, 먹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를 포장했다. 작업하는 내내 옆에 둔 탓에 지나가던 동기들이 고사 지내느냐고 물어왔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먹으라고 내어 주긴 싫었다. 대학 생활하면서 잘해 주고 싶은 호감 가는 후배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채하가 주현에게 그런 존재라고 여겼다.

채하는 이후에도 궁금한 게 생기면 단톡이 아닌 갠톡을 통해 주현에게 질문을 해 왔다. 전공 과제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는지 헷갈리긴 했으나, 아는 데까진 온 정성을 쏟아 답해 줬다.

[임채하] (사진)

[임채하] 선배 이 부분 추가했는데 괜찮은지 봐줄 수 있으실까요?

처음 보는 내용이 추가된 PPT 화면 전체 스크린 샷이 도착했다. 차근차근 내용을 읽다가 작업표시줄에 걸린 낯선 아이콘에 무심코 눈길이 갔다. 게임인가? 얘도 과제를 하다가 한눈을 팔긴 하는구나 싶어서, 새삼스러운 곳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교양 조별 과제 한다던 게 임채하였어? 생긴 애들끼리만 친구 하냐. 걔가 너 꽤 좋아하나 보다?”

주현의 모니터를 슬쩍 훔쳐보며 경찬이 지껄인 말에, 주현은 눈썹을 들썩이며 반문했다.

“이게?”

“단톡 두고 갠톡 하는 거야 뻔하지.”

“낯을 좀 가리나?”

안 그럴 것 같은데, 부끄럼 타는 게 의외라고 생각했다. 주현은 PC 버전 톡을 화면 구석에 밀어 두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채하는 어떤지 몰라도, 주현이 채하를 꽤 마음에 들어 한 건 사실이다. 쉴 틈 없이 과제를 하면서도 채하를 챙기는 게 그 증거였다. 사귀고 싶다거나 하는 연애 감정은 아니었고,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싹싹하게 구니까 그만큼 잘해 주고 싶었다.

“끝으로 발표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PPT 발표까지 마치자, 조별 과제로부터 해방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조원들과 인사를 나눈 주현은 개운한 낯으로 강의실을 나오면서 핸드폰 알림을 확인했다.

[임채하] 고생하셨습니다

[전여진]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장혜미] 고생하셨습니다~~ 점수 잘 받아봐요!

[윤주현] 고생하셨습니다

톡방을 제일 먼저 나간 건 채하였다. 주현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퇴장했다. 낯가린다는 경찬의 말이 옳았나 보다. 주현도 딱히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라서 채하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과제 하는 내내 힘들고 애썼을 게 뻔해 오지랖 넓게도 개인 톡을 보냈다.

[윤주현] 고생했어 내가 밥 사주고 싶은데 시간 언제 될까?

곧바로 읽었는지 메시지 옆에 있던 1 표시가 사라졌다.

[임채하] 선배 같이 밥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허. 주현은 헛웃음을 뱉었다. 누가 보면 자신이 먼저 치근덕거린 줄 알겠다. 별것도 아닌 거로 자꾸 메시지를 보낸 건 분명 채하였다. 처음엔 뻔뻔한 채하의 태도에 분노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엔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봤다. 아무래도 조별 과제 때문에 채하가 자신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채하가 맡은 분량은 완벽했으니, 주현이 무임승차를 하거나 잠적을 할까 봐 감시 비슷한 걸 한 모양이다.

조별 과제를 하면서 별의별 놈들을 만나니 사람에게 질린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잘난 얼굴을 어떻게 사용하든 본인의 몫이니 그 점도 존중했다. 그런데 이런 식은 좀 아니지 않나? 첫 만남부터 무시당한 게 기분이 나빴고, 제가 내비친 호의가 이렇게 돌아온단 게 황당했다.

그런데도 대놓고 따질 수 없던 건, 주현은 채하를 좋아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채하가 먼저 선을 그으니 비로소 깨달았다. 채하가 제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봐 창피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무튼, 나 걔랑 조별 과제 같이 하는데 하루에 한 번씩 분량 체크한다니까?”

울리는 경찬의 목소리에 주현은 회상을 끝내고 연기가 가득한 고깃집으로 돌아왔다. 경찬이 탄 부분을 가위로 잘라 내며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수강 신청 망하지만 않았어도…….”

경찬은 두 번이나 휴학을 한 탓에 아직 졸업을 못 한 상태였다. 입대하면서 한 번, 넘쳐나는 과제에 지쳐서 두 번. 거기다가 이번엔 수강 신청도 말아먹었단다. 주현은 혀를 쯧쯧 차면서 비어 있던 경찬의 잔에 술을 채웠다.

반면에 주현은 작년에 졸업했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채하가 복학할 때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과제와 함께 내달렸다. 경찬이 같이 휴학하자고 꼬드겼을 때,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꼼짝없이 놈과 재회할 뻔했다.

* * *

주현이 혼돈의 설화를 하게 된 이유로는 채하의 비중이 컸다. 졸업 작품 출품까지 마치고 숨을 돌리던 때, 웹 서핑을 하려고 인터넷 창을 켰다가 혼돈의 설화 광고를 만났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낯익은 아이콘에 골똘히 고민하다가 채하를 떠올렸다. 그렇다. 임채하가 하던 게임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뼈아팠지만, 채하가 학교에 없어서 그런지 조금은 덤덤해질 수 있었다.

주현은 홀린 듯 게임을 내려받았다. 그런 기막힌 성격을 가진 놈이 하는 게임은 어떨까 궁금했다. 어렸을 때는 게임을 이것저것 해 봤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과제의 노예가 되어 게임은 물론이고 잠잘 시간도 없었다. 이제야 그나마 여유가 생긴 주현은 바탕화면에 생긴 마법진 모양의 아이콘을 눌러 게임에 접속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캐릭터 생성에 들어가자 열 가지가 넘는 직업이 떠올랐다. 하나씩 눌러 설명을 읽어 보던 주현은 고심 끝에 성기사를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군을 지킨다는 소개가 멋있어 보였다.

직업을 고르고 나니 이번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차례였다. 원하는 부위를 선택해 늘렸다 줄였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주현은 흥미를 느꼈다. 외형이 정해진 게임만 하다가, 제 맘대로 꾸밀 수 있는 게임을 만나니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캐릭터 외형 설정에만 두 시간을 소요했다.

완벽한 외형을 자랑하는 캐릭터를 빚어내고 완료를 누르자, 닉네임을 정하라는 창이 떠올랐다. 웬만한 닉네임은 모두 중복이었다. 아는 단어들을 조합해 적다가 마침내 중복을 피한 닉네임이 생성되었다.

튜토리얼의 시작은 창세였다. 영웅들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마족을 봉인하고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쇠약해진 봉인이 풀리고, 활개 치는 마족 탓에 또다시 혼돈이 찾아왔다. 초대 영웅의 힘을 물려받은 새로운 영웅들이 세계를 지키는 이야기. 튜토리얼을 통해 조작법을 익힌 주현의 캐릭터가 드디어 마을에 입장했다.

주현은 마우스를 돌려 마을을 구경하다가, 때마침 제 앞을 지나가던 유저에게 말을 걸었다.

[전체] 빛의삼원색 : 저기요

[전체] 월월월 : 저염?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던 월월월이 걸음을 멈추고 주현에게 다가왔다. 금빛 파마머리의 소년 캐릭터가 주현을 응시하며 오묘한 색을 지닌 눈을 깜빡였다.

[전체] 빛의삼원색 : 네

[전체] 빛의삼원색 : 이 게임 뭐부터 하면 되나요?

[전체] 월월월 : 헉 로그아웃하고 게임 지우세염 ㅠㅠ

[전체] 빛의삼원색 : ?

한 게 튜토리얼밖에 없는데 느닷없이 게임을 지우란다. 어이가 없어서 월월월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친구 신청이 날아왔다.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인 듯했다.

[귓속말] 월월월 : 오른쪽에 퀘스트 목록 뜨는 거 보이세염?

[전체] 빛의삼원색 : 네

[귓속말] 월월월 : 귓속말은 탭 누르셔서 채팅채널 변경하시면 돼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네 감사합니다

채팅 채널 바꾸는 기초도 모르는 주현에게 월월월의 조언은 단비였다.

[귓속말] 월월월 : 퀘스트는 그닥 어렵지 않아서 스토리 보면서 천천히 깨시면 되구염

[귓속말] 월월월 : 나중에 레이드 퀘스트 나오면 저 불러주세염

[귓속말] 월월월 : 모르는거 있으면 편하게 귓주세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넵 감사합니다

[ 월월월님이 빛의삼원색님에게 인사합니다. ]

월월월의 캐릭터가 주현의 캐릭터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며 윙크했다. 저건 어떻게 하는 걸까. 캐시인가. 혼자 중얼대면서 일단은 퀘스트를 하기 위해 마을 NPC를 찾아갔다.

* * *

[귓속말] 월월월에게 : 월월월님

[귓속말] 월월월 : 넴

[귓속말] 월월월에게 : 돈은 어떻게 버나요?

[귓속말] 월월월 : 퀘스트하면 모이지 않나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부족해서요

[귓속말] 월월월 : 어디에 계세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메인 마을이요

월월월이 처음 보는 헐벗은 청년을 데리고 주현의 앞에 나타났다. 월월월은 잠시 말이 없다가 상태 확인을 끝냈는지 당황한 투로 내뱉었다.

[전체] 월월월 : 룩템을.. 사셨네염?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one : 혼설은 룩겜이죠

[전체] 월월월 : 그건 맞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큰돈 쓰시면 뒤로 갈수록 장비 맞추기 힘드실텐데염 ㅠ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빚어 놓은 얼굴이 투구 때문에 가려져 힘이 안 났다. 그래서 투명 모자를 샀는데, 이제는 투박한 녹슨 갑옷이 거슬렸다. 월월월의 캐릭터처럼 귀여운 옷을 입히고 싶어서 모은 골드로 하얀 후드티와 까만 잠옷 반바지 아바타를 구매했다.

[전체] 빛의삼원색 : 골드는 캐시로 살 수 없나요?

[전체] westone : 지갑전사셨네 ㅋㅋㅋㅋㅋㅋ

주현의 질문에 시원하게 웃던 까무잡잡한 남자가 대뜸 친구 신청을 보냈다. 주현은 얼떨결에 승낙했다.

[전체] westone : 친구비 드릴게요

[전체] 빛의삼원색 : 친구비요?

[귓속말] westone : 쓰고 부족하면 저 골드 파니까 저한테 사셔도 되고요

[전체] 월월월 : 헐 저도 친구비 드릴테니까 저희 길드 들어오실래염??

몇 초 뒤, 우편함에 알림이 왔다.

[전체] 빛의삼원색 : 웨스트원님.. 이거 너무 많은데요??

발가벗은 남자로부터 온 우편을 열어 보자, 주현이 샀던 옷을 다섯 벌은 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전체] westone : ㄱㅊㄱㅊ 하루 만에 버는 돈이에요

[전체] westone : 전 서쪽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전체] 월월월 : 빛님 기다리세염!!!!

[전체] 월월월 : 제것도 제발 받아주세염 ㅠㅠㅠㅠ

훗날, 이 게임은 원래 이렇게 소매넣기[10]가 유행하느냐 묻자, 서쪽과 월월월은 같은 답을 내놓았었다. 블랙님이 성기사여서 그랬어요. 혼돈의 설화에서 제일 귀한 게 탱커였다고 한다.

* * *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신사 : 어서오세요 블랙님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

[길드] 사멍꾼 : 어서오세영

길드원의 인사를 잔뜩 받으며 입장했다. 어제는 늦은 시간까지 경찬을 상대하느라 오전에 잠깐 접속한 게 전부였다. 주현은 접속하자마자 상가로 이동했다. 색색의 천막 아래, 그늘진 거리엔 다양한 가게가 즐비해 있었다. 장비 제작과 강화를 할 수 있는 대장간, 전투용 소모품을 판매하는 상점, 상시 구매가 가능한 아바타가 진열된 의상점 등.

그중 주현이 찾은 건 거래소 NPC였다. 거래소에는 단종된 희귀한 아이템이나 평균가보다 싼 매물이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주현은 평소 갖고 싶어 한 아이템의 이름을 차례차례 검색하며 매물을 확인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어서오세요

방금 막 던전이 끝났는지 서쪽이 뒤늦게 주현을 반겼다.

[길드] westone : 저 아까 레이드 랜덤매칭 돌리다가 블랙님 남편분 봤어요

[길드] westone : 커마 대박이던데요? 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남친이에염 ㅋㅋㅋ

[길드] 블랙 : ㅅㅂ 둘다 아니거든요

[길드] 사멍꾼 : 헉 블랙님 커플 있으셨나요??

[길드] 레아 : 저번에 커플 구하셨더라구요 ㅠㅠ 저랑 하시지!!!

[길드] forest : ??성직자 1위?

[길드] 사멍꾼 : ???

[길드] 사멍꾼 : 헐 진짜네여?

서쪽이 길드 채팅을 통해 밍채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탓에, 불씨가 붙었다. 이제는 해명하기도 지쳐 주현은 키보드를 놓은 채 멀거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길드원들은 주현의 캐릭터 정보 창을 열어 커플이 누군지 확인하곤,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길드] 레아 : 우와... 저런 분은 어디서 만나나요?!

[길드] 사멍꾼 : 블랙님은 워낙 스펙 좋으셔서 ㅎㅎ 상위 던전에서 만나신거 아닐까요?

[길드] 레아 : 아 블랙님 던전 랜덤매칭으로만 가셨죠?

[길드] 레아 : 성직자에 성기사면 조합 좋네요 너무 부러워요 ㅠㅠ

[길드] 월월월 : 파티 프리패스 조합이에염 ㅋㅋㅋ

[길드] westone : 두 직업 다 신전 출신..

[길드] westone : 정말로 운명일지도?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가 서쪽이 뒤늦게 커플명을 확인했는지 툴툴댔다.

[길드] westone : 아 뭐야 블랙님 커플명도 여보잖아요 ㅡㅡ

[길드] westone : 싫은척하는 것도 다 컨셉이셨네

[길드] 월월월 : 컨셉 ㅋㅋㅋㅋㅋㅋ 블랙님이 너무 하셨네염

[길드] 블랙 : 네.. 잘못했습니다.. 사죄합니다

어차피 당장 밍채와 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계속 붙어 다니며 놀림을 당할 거라면 길드원들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주현은 친구 창을 열어 밍채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번째 악마 레이드, <인색의 마몬>에 있었다. 컨트롤에 자신 없던 주현은 <교만의 루시퍼>를 잠쩔로 깨 본 경험이 다였지만, 영상을 통해 나머지 악마 레이드를 구경했었다.

첫 번째 악마 <교만의 루시퍼> 레이드를 클리어하면, 다음 레이드인 <인색의 마몬> 퀘스트가 열린다. 루시퍼가 주신 리라 석상의 목을 벨 때, 마몬은 궁전으로 향했다.

레이드 보스인 마몬은 탐욕이 넘치는 악마로, 까마귀를 닮은 조류형 몬스터였다. 현재 혼돈의 설화에 나온 레이드 중 가장 재화가 잘 벌리며,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금액이 유동적으로 변하는 게 특성이었다. 레이드 장소는 채예스 궁전의 연회장으로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주현이 접속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밍채는 말이 없었다. 같이 게임을 하자고 커플을 맺은 게 아니었나? 오픈톡까지 개설할 정도로 집착하던 놈이 여유롭다 못해 사람을 잊은 게 황당했다. 같이 레이드에 간다면 지옥에서 온 컨트롤을 보여 주리라 다짐했는데, 다 무용지물이었다.

[길드] 신사 : 블랙님 커플이 밍채님이셨군요

그때 길드 마스터인 신사의 채팅이 올라왔다. 대화 주제가 매번 자기 자랑이던 사람이었는데, 밍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의외였다.

[길드] 블랙 : 밍채 아세요?

[길드] 월월월 : 되게 친근하게 말씀하시네염

[길드] 블랙 : 아니 ㅅㅂ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요?

[길드] westone : 여보..랄까..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블랙님 반응이 너무 좋으셔서 계속 놀리는 것 같아요 ㅋㅋㅋ

[길드] 사멍꾼 : 저도 놀리고 싶네요

[길드] 블랙 : 참으세요

[길드] 사멍꾼 : 넵!

[길드] 신사 : 네 밍채님 유명하죠

신사의 직업은 주현과 같은 성기사였다. 랭킹은 3위로, 길드 내에서 가장 높았다. 신사는 늘 검은 연미복에 붉은 장미 브로치가 달린 아바타를 착용하고 다녔는데, 서쪽이 느끼하다고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길드] westone : 유명한가요? 랭커치고 본적 몇 번 없는데

[길드] 신사 : 웨스트님이 랭킹 안 높으셔서 그래요

[길드] 레아 : 웨스트님 13위이신데요???

[길드] 신사 : 포병에 사람 별로 없어요 ㅋㅋ 랭킹권 들기 쉬워요

[길드] 월월월 : 성기사가 더 빈집 아닌가염???

[길드] 신사 : 랭커는 성기사 쪽이 더 빡셉니다

주현은 채팅을 정독하며 혀를 찼다. 서쪽이 정말로 빈집을 털었든 아니든, 서쪽의 앞에서 빈집털이라고 운운하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서쪽도 기분이 상했는지 말이 없어졌다.

[길드] 블랙 : 밍채는 왜 유명한가요?

[길드] 신사 : 블랙님이 밍채님과 커플이셔서 이런 말씀 드리기 좀 조심스럽지만

[길드] 신사 : 랭킹에 비해서 좀 못하셔서요 ㅋㅋ

[귓속말] westone : ㅁㅊ 선 넘네 블랙님 저 말 믿지 마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안 믿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신사의 망언에, 밍채와 딜을 겨뤄 봤던 서쪽이 분노했다.

[귓속말] westone : 제가 기여도 키고 저 사람이랑 안 붙어봐서 그렇지

[귓속말] westone : 솔직히 저 사람 정도는 이기거든요?

게임 특성상 딜부심[11]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서쪽은 자신감 넘칠 만한 실력을 갖춘 유저였다. 루시퍼 레이드를 둘이서 깬 것만 봐도 그랬다.

[길드] 월월월 : 밍채님 잘하시던뎀

[길드] 신사 : 성직자가 힐은 안 쓰고 딜만 하던데요 ㅋㅋㅋ

[길드] 월월월 : 그런 점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잘하시더라구염 ㅋㅋㅋ

[길드] 신사 : 더 잘하는 성직자 많아서 ㅋㅋㅋ

[길드] 월월월 : 제가 본 성직자 중엔 밍채님이 젤 잘하셨어염 ㅋㅋㅋ

주현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잠시 고민했다. 길드 탈퇴할까? 관련도 없는 월월월은 왜 갑자기 나서서 밍채를 변호하는지 이유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신사를 따라서 키읔도 세 개씩 쓰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길드] 신사 : 아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신사 : 혹시 밍채님이랑 자리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ㅋㅋ

[길드] 신사 : 한번쯤 떠보고 싶었어서...ㅋ

[길드] 블랙 : 네?

[길드] 신사 : 저 이긴다면 1억 드릴 수 있다고도 전해주세요

[귓속말] westone : 진짜 근자감 미쳤네

[귓속말] westone : 밍채님한테 전할 거예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제 선에서 끊는 게 맞겠죠?

[귓속말] westone : 아뇨 ㅋㅋㅋ 전하세요

[귓속말] westone : 본인 수준을 알 때가 됐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은 친구 창을 켜 밍채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아직 마몬 레이드 진행 중이라 바로 답장이 오기엔 힘들어 보였다.

[귓속말] 밍채에게 : 밍채님

문득 든 생각에 주현은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밍채야

[귓속말] 밍채 : ?

밍채에게 바로 반응이 왔다.

[귓속말] 밍채에게 : 내가 형이니까 반말 좀 할게

[귓속말] 밍채 : 네 그러세요

[귓속말] 밍채 : 형 반말하니까 설레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ㅅㅂ

조금은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밍채에게 이 정도 장난은 끄떡도 없었다. 사실 밍채가 주현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 만났던 PvP 랭크전에서 주현이 자신을 형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주현이 밍채보다 나이가 많은진 모를 일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우리 길마가 너랑 딜빵.. 해보고 싶다는데

[귓속말] 밍채 : ㅋㅋㅋㅋ

[귓속말] 밍채 : 형은 어디에 걸었는데요?

[귓속말] 밍채에게 : 뭘 걸어?

[귓속말] 밍채 : 돈 걸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귓속말] 밍채에게 : 아 길마가 니가 이기면 1억 주겠다고 말했었어

[귓속말] 밍채 : 형은요?

돈을 걸 이유가 없다. 누가 이기든 주현과 관련 없는 일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굳이?

[귓속말] 밍채 : 그럼 제가 이기면 형 줄게요

[귓속말] 밍채에게 : ?

[귓속말] 밍채 : 저 나왔어요 초대주세요

레이드 이름이 적혔던 밍채의 닉네임 옆자리에 현재 위치가 떠올랐다. [CH.7] 대도시 채예스 - 광장. 보통은 던전 출정 시 맵 이름만 확인을 할 수가 있는데, 커플이라 그런지 채널과 위치도 표시가 되었다.

주현은 친구 창을 끈 후 길드 채팅으로 신사에게 승낙을 알렸다. 신사는 제 승리를 확신하는지 혹시 구경하고 싶은 길드원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관객을 모았다.

[귓속말] westone : 저러고 털리면 진짜 웃기겠네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이기면 어떡해요?

[귓속말] westone : 그럼 밍채님을 대리[12]로 신고하겠습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가 해킹을 당했다거나, 알고 보니까 대리였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밍채가 이긴다고 확신하는 서쪽이었다. 주현도 신사에게 초대를 받아 비공개 레이드 방에 입장했다. 마침 주현의 퀘스트인 <인색의 마몬>이었다.

[귓속말] 밍채에게 : 이거 너 아까 하던 레이드 아냐?

[귓속말] 밍채에게 : 악마 레이드 주 1회잖아

레이드 종목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밍채에게 바쁘게 귓속말을 보내는데, 대기실에 서 있던 주현의 캐릭터 뒤로 익숙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파티] westone : 흠...

[파티] 월월월 : 블랙님 싫은척하는거 컨셉이셨네염 ㅋㅋㅋ

[파티] westone : 머리랑 눈 커플로 맞춰놓고 싫은척이라..

[파티] 블랙 : 쟤가 맘대로 바꾼거예요

[파티] westone : 이젠 반말도 한다?

[파티] 블랙 : 아 억울해;;

[파티]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님 귀여워요

두 캐릭터를 놓고 보니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주현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커플 커스터마이징이었지만, 놀리는 걸 좋아하는 길드원들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월월월과 서쪽이 주현을 몰아가는 걸 지켜보던 레아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곧장 살벌한 갈고리가 올라왔다.

[파티] 밍채 : ?

[파티] 레아 : 아;; 죄송 ㅋㅋ...

냉랭한 반응에 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길드 채팅으로 옮겨 갔다.

[길드] 레아 : 어우 식겁했어요 ㅠㅠ

[길드] 월월월 : 마을로 돌아가면 바로 대련신청 와염 ㅋㅋ

[길드] 레아 : 허얼 진짜요???

[길드] 월월월 : 저도 알고 싶지 않았어염 ㅠ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가 커플 하자고 한창 주현을 쫓아왔을 때의 이야기였다. 월월월은 주현에게 다가온단 이유만으로 밍채에게 대련 신청을 받았다. 월월월이 빠르게 거절하며 어물쩍 넘어간 탓에 결론적으로 대련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월월월은 억울해했다.

[파티] 블랙 : 신사님 혹시 맵 바꿔줄 수 있으신가요?

[파티] westone : 남편분 주종목 아니라고 바꿔달란건가요?

[파티]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신사 : 밍채님 자신 있는 맵 말하세요ㅋ

[파티] 블랙 : 아니;; 그게 아니라.. 밍채 마몬 아까 잡았어요

[파티] westone : 남편분 스케줄도 다 아시네요

[파티] 블랙 : 악마레이드는 주 1회 클리어잖아요

[파티] westone : 엥?

오해할까 봐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주현을 서쪽이 끊어 냈다.

[파티] westone : 그럼 대기실 입장 못 하실텐데?

[파티] 신사 : 클리어 실패하셨나봅니다

[파티] 밍채 : 하다가 나왔어요

[파티] 신사 : ?

[파티] 레아 : 녜...?

레이드 도중 탈주하는 유저를 종종 보긴 했는데 주변에 있었을 줄이야. 비매너 행위를 해 놓고 당당한 밍채에 주현은 말을 잃었다.

[파티] 신사 : 비매너 아닌가요?

[파티] 밍채 : 솔플이었는데요

[파티] 레아 : 아 ㅋㅋ

[귓속말] 월월월 : 밍채님 오해해서 죄송하네염 ㅠ

[귓속말] 월월월에게 : 그걸 왜 저한테 말하세요?

[귓속말] 월월월 : 밍채님이랑은 안 친해서염

서쪽과 둘이서 클리어했던 루시퍼나, 밍채 혼자 도전한 마몬 레이드는 유저 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협동 기믹[13]이 없어서 소수팟[14]이거나 솔로 플레이로 클리어한 유저들을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비매너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지만, 중도 포기하면 좀 아깝지 않나? 주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파티] 신사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신사의 예고와 함께 화면이 암전되며 로딩 상태에 들어갔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고 반짝이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나타났다. 시점이 아래로 이동하며 엉망진창이 된 연회장을 훑었다. 오염된 식탁보, 깨진 유리잔, 바닥에 나뒹구는 식기, 황급히 연회장을 벗어나는 인간들. 난장판이 되어 소란스러운 연회장 가운데, 왕좌에 앉은 마몬만이 태연했다.

사람들로부터 빼앗았는지 날개로 보석을 쓸어 담던 마몬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파티] 레아 : 바로 죽으면 되는건가요?!

[파티] 월월월 : 한 대 때리구염

[파티] 레아 : 아아 넵!!!

월월월은 재빠르게 공격 속도 버프를 켜고 마몬에게 달려가 뺨을 얻어맞았다. 서쪽과 레아, 이번에는 잊지 않고 방어구를 벗고 온 주현도 사이좋게 마몬의 부리에 찔리며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쓰러지는 넷의 시체를 밟고 힘차게 튀어 오른 신사는 대검을 이용해 마몬의 어깨를 갈랐다.

공격을 쏟아 내는 신사에 비해 밍채는 여유로운 편이었다. 느긋하게 책을 펼친 밍채는 자신에게 버프부터 걸었다. 밍채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신사는 마몬의 심장에 대검을 욱여넣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신사님 잘하는 것 같은데요..

서쪽은 신사의 실력을 깎아내렸지만, 같은 성기사 직업을 가진 주현의 눈엔 밍채 못지않게 대단해 보였다. 신사가 검날을 빼내자, 마몬이 침을 뚝뚝 흘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귓속말] westone : 게임을 몇 년 했는데 저 정돈 해야죠

[귓속말] westone에게 : 죄송합니다..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 블랙님도 나중에는 저 사람보다 잘할걸요?

서쪽도 양심이 있는지, 지금의 주현에게 잘한단 말은 안 했다.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천장을 비행하던 마몬은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향해 힘차게 머리를 부닥쳤다. 그 아래에 서 있던 밍채는 재빠르게 옆으로 캐릭터를 굴렸다.

곤두박질친 샹들리에가 땅에 부딪히는 순간, 쨍그랑 소리가 나며 동전으로 변했다.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클리어 골드가 달라지는 게 바로 이 패턴이었다. 금화, 은화, 동화 사이에는 마몬이 만든 납 동전도 섞여 있는데, 가짜 동전을 하나 먹을 때마다 최종 클리어 골드에서 10%를 잃는다. 누적 합산이기에 가짜 동전을 열 개 먹으면 클리어 골드가 아예 없는 셈이다.

밍채는 캐릭터를 움직여 제 앞에 있는 금화 하나를 먹고, 책장을 넘겨 기본 공격으로 납 동전을 밀어냈다. 마침 은화를 먹던 신사가 납 동전에 맞고 강제로 획득하게 되었다.

[파티] 신사 : ?

[파티] 레아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월월월 : 와 밍채님 대박이네염

보통은 사람 없는 곳으로 밀어내는데 인성이 모자란 밍채에겐 꿈같은 이야기였다. 밍채는 신사가 당황한 사이, 앞으로 나가며 또다시 납 동전을 공격했다. 신사도 이번엔 대응하기 위해 대검을 세워 방어했고, 밍채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납 동전을 예상했다는 듯 받아쳤다.

[파티] 신사 : ;;

[길드] 레아 : 마몬 레이드 원래 이런가요?!

[길드] 월월월 : 아념 ㅋㅋㅋ 저거 공방에서 하면 비매너예염

[길드] westone : 하지만 딜빵엔 비매너가 없답니다

[길드] 레아 : ㄷㄷ

비공개 방이자, 딜을 겨루기 위한 목적으로 생성된 파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비상하던 마몬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아래로 내려와 밍채를 공격하려 부리를 들이대는데, 허공에서 빛줄기가 나타나 마몬의 날개를 옭아맸다. 밍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스킬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기둥이 연이어 마몬을 강타했다.

신사도 지지 않으려 달려와 푸른빛이 담긴 검으로 마몬의 머리를 갈랐다. 밍채가 잡아 놓은 마몬에 공격하는 모습이 얌체 같았다.

공격을 받고 속박이 해제된 마몬은 까악까악 울음소리를 내며 신사를 향해 날개를 휘둘렀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신사가 바닥을 구르자 마몬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신사의 복부를 짓밟았다. 신사가 밟히든 말든 밍채는 묵묵히 공격을 이어 나갔다. 밍채가 입힌 대미지 때문인지 마몬은 붉어진 눈으로 휙 뒤를 돌았다. 마몬이 밍채를 걷어차려 다리를 들어 올리는데, 웬일인지 밍채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다리가 닿으려는 순간, 마몬의 머리 위로 까만 해골 표시가 떠올랐다.

‘이거…….’

주현이 PvP 랭크전에서 당했던 기술이었다. ‘주신 리라의 축복’. 이름을 잘못 지은 게 아닌가 싶은 스킬. 3초간 사용한 공격이 반사되는 극악무도한 능력이다. 성직자가 해당 스킬을 사용할 때 특별한 동작도 없어서, 머리 위로 떠 오른 해골 표시로 디버프를 구분해야 했다.

대미지를 돌려받은 마몬은 괴로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밍채는 그 위로 자비 없이 눈부신 빛 기둥을 쏟아부었다. 신사는 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뻔뻔스럽게 대검을 휘둘렀다.

주현은 둘의 싸움이 진행되는 모니터를 우두커니 응시하는데, 채팅 창에 귓속말이 떠올랐다.

[귓속말] westone : 안 봐도 뻔하네요 ㅋㅋ

[귓속말] westone에게 : 그래도 성직자랑 성기사는 스킬이 차이가 나서..

[귓속말] westone에게 : 밍채가 이길 수 있을까요..?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성직자 안 키워보셨죠? ㅋㅋㅋ

[귓속말] westone에게 : 네..

심심할 때 부캐 몇 개 키워 보긴 했으나, 혼돈의 설화에는 워낙 직업이 많아서 모든 직업을 키우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주현은 본캐 위주의 플레이를 선호했다.

[귓속말] westone : 성직자는 처음부터 기본 공격력 버프를 갖고 시작하거든요

[귓속말] westone에게 : ?? 사기캐 아닌가요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은 신전 출신인데, 주신 리라는 성직자만 예뻐하는 모양이다.

[귓속말] westone : 그런데 한 대라도 맞으면 버프 깨져요

[귓속말] westone에게 : ..?

[귓속말] westone : 그래서 월월님도 밍채님 잘한다고 한 거예요 ㅋㅋ

[귓속말] westone : 밍채님이 딜 잘 뽑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귓속말] westone : 예전에 성직자 개편하면서 생긴건데

[귓속말] westone : 끝까지 기본버프 유지하는 사람도 몇 없고 ㅋㅋ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밍채님이랑 떠보니까^^..

[귓속말] westone에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성직자에게 제대로 된 방어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도망 다니거나 다른 파티원 뒤에 숨어서 공격해야 하는데, 그럴 땐 공격력 버프가 있으나 마나였다. 밍채처럼 나서서 싸우는 담력 큰 유저가 아니라면 욕할 업데이트였다.

[파티] 레아 : 헐!!! 이게 되네요?!

떠오른 레아의 채팅에 주현은 시선을 옮겨 밍채의 캐릭터를 찾았다. 마몬의 체력이 조금 남았는데 밍채의 캐릭터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파티] 신사 : ?

신사는 조금이라도 기여도를 더 차지하기 위해서 남은 마나를 쏟아붓고 있었다. 밍채가 향한 곳은 길드원들이 앞다투어 죽어 있는 시체 더미였다. 밍채는 책을 펼쳐 기본 공격으로 레아와 서쪽의 시체를 밀어냈다.

[파티] westone : 시체 비매너 뭐예요?

[파티] 레아 : 허얼

얘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주현이 주목하는 순간, 밍채가 주문을 외우더니 주현의 시체에 빛을 불어넣었다.

《 부활 : 원상태로 부활합니다. 5초간 무적 상태입니다. 》

찬란한 날개가 그려진 상태 아이콘이 떠오르며 주현의 캐릭터가 깨어났다.

[파티] westone : 기만 ㅡㅡ

[파티] 월월월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레아 : 진짜 서럽네요 ㅠㅠ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일반 레이드와 달리, 악마 레이드는 함께 던전에 입장한 파티원만이 죽은 파티원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부활 아이템으로 살아나게 되면 죽기 직전처럼 방어구가 깨진 상태인 데다가 파티 부활 횟수가 차감된다. 힐러 계열인 성직자, 연금술사, 음유시인의 부활 스킬은 원상태로 복구를 시켜 줄뿐더러 부활 횟수로 합산되지 않아서 스킬을 더욱 선호하는 편이었다.

다만 부활 스킬은 마나를 모두 소모하기 때문에, 긴급하거나 마나가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면 사용을 꺼렸다.

주현이 부활한 사이, 신사는 마몬을 무찔렀다.

[길드] westone : 진짜 혼설하면서 수많은 커플을 봤지만 제일 유난이네요 ㅡㅡ

[길드] 월월월 : 어이없어염ㅋㅋㅋㅋㅋㅋ ㅡㅡ

[길드] 레아 : 동의합니다 ㅡㅡ

[길드] 블랙 : 죄송합니다..

[길드] 신사 : 흠

다들 밍채 얘기만 하는 게 못마땅한지 신사가 말을 던졌다.

[길드] 레아 : 길마님! 이겼을 것 같나여?!

[길드] 신사 : 제가 실수를 좀 해서.....ㅋ

[길드] 신사 : 그래도 뭐.. 딱히 엄청나게 잘하시진 않네요

[길드] 월월월 : 밍채님 한 대도 안 맞으시던뎀

[길드] 신사 : 성직자는 노피격[15]이 맞고요

[길드] 신사 : 성기사는 특성상 맞을수밖에 없습니다ㅋ

정산 창이 떠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밍채가 말이 없는 걸 보아 정말로 신사가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은 신사를 싫어하지만, 주현은 신사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길드에 성기사 직업을 가진 유저가 신사밖에 없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가끔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줘서 서쪽이 반박하기도 했지만…….

[귓속말] 밍채에게 : 너 설마 졌어?

일부러 밍채의 신경을 긁었다. 이대로 이별까지 간다면 완벽했다.

[귓속말] 밍채에게 : 게임 못하는 애 별론데

[귓속말] 밍채에게 : 신사님 클리어골드 못 먹게 하려고 납동전을 그렇게 밀어내더니

주현은 양심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자존심 상한 밍채가 열 받은 말투로 채팅을 쏟아 내길 기다렸다.

[귓속말] 밍채 : 있는 기능 사용한 건데요

[귓속말] 밍채에게 : 그래도 매너라는 게 있는데

[귓속말] 밍채 : 먼저 붙자고 시비 걸었는데 매너가 어딨어요?

밍채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놀라운 건,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는 거다.

[귓속말] 밍채 : 그리고 제가 왜 져요?

뒤이어 돌아온 건 정말 궁금하다는 질문이었다.

《 1위 밍채 53.04%》

《 2위 신사 46.92% 》

《 3위 westone 0.01% 》

《 4위 블랙 0.01% 》

《 5위 월월월 0.01% 》

《 6위 레아 0.01% 》

동시에 떠오른 정산 창. 밍채가 왜 자신만만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서쪽과 겨뤘을 때보다 더 차이가 났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서늘하게 느껴져 주현은 파티 탈퇴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귓속말] westone : 밍채님은 현실 직업도 성직자일 것 같아요

[귓속말] westone에게 : 그러기엔 인성이 좀..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힐을 사용하지 않는 힐러임에도 밍채가 사사게를 피할 수 있던 건 아무래도 실력 덕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얘 왜 랭크전에서는 패작하고 다닌 거지?’

주현과 팀이 되었을 때나, 상대로 맞붙었을 때나 밍채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혼자 싸운다고 해도 상대 팀에게 질 것 같진 않은데, 밍채는 웬일인지 부캐로 심해를 헤엄치고 있었다.

역시 부캐인 채채는 버리는 용도가 분명하다. 본캐인 밍채를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는다면 주현은 머지않아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파티] 밍채 : 1억은 형 주세요

[파티] 월월월 : 와

[파티] westone : 결혼 찬성이요

[파티] 레아 : 허얼...

[파티] 블랙 : ??

그 말을 끝으로 파티가 터졌다. 파티장인 신사가 방을 나오고 파티를 해체한 탓이다. 신사는 얕잡아보던 밍채에게 진 게 꽤 분했는지 길드 채팅을 통해 화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길드] 신사 : 요즘 일 때문에 게임을 많이 못 해서 ㅋ 딜손실이 좀 있었네요

본인도 마몬에게 맞고 데굴데굴 구른 건 창피한 모양이다.

[길드] 신사 : 밍채님 맨날 로그인이시던데

[길드] 신사 : 게임만 하시나봅니다 ㅋㅋ

자기는 인생 열심히 사는 직장인이지만, 밍채는 집구석에서 게임만 하는 백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길드] westone : 밍채님이랑 친구예요? 로그인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건 주현도 궁금한 점이었다. 같은 최상위 랭커인 서쪽은 밍채와 만난 적이 없는데, 신사는 잘 아는 눈치였다.

[길드] 신사 : 지인이 그쪽 길드라서요ㅋㅋㅋ

[길드] 레아 : 밍채님 길드가 어디예요???

[길드] 신사 : 평온이요 거기도 만렙 길드죠

[길드] 사멍꾼 : 길드 이름 예쁘네요

[길드] 신사 : 저희가 더 예쁘지 않나요ㅋㅋ

주현의 길드 이름은 ‘재앙’이었다. 신사의 말에 길드원 중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한때 서쪽은 그 이름이 멋있어 보여서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도 다른 길드에 비해 썩 나쁜 편은 아니지만, 평온과 놓고 보면 그쪽이 더 취향이었다.

밍채에게 평온이라니. 심하게 안 어울렸다. 오히려 재앙이란 단어가 밍채에게 붙어야 마땅했다. 주현이 게임을 하면서 만난 인간 중 가장 큰 재앙이 밍채였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1억 받으셨나염?

[길드] westone : 블랙님 1억으로 뭐하실거예요?

아직 골드를 받지 못했다. 혹시 몰라 우편함을 확인하자 텅 비어있었다.

[길드] 신사 : 아 깜빡했네요 ㅋㅋ 지금 드릴게요

애초에 내기에서 이긴 건 밍채였고 아무리 주현이 커플이라고 한들 같은 길드원에게 돈을 받기엔 민망했다. 주현은 서둘러 밍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밍채에게 : 너 진짜 1억 안 받아?

[귓속말] 밍채 : 형 가져요

이 돈을 받으면 밍채에게 빚만 늘어갈 게 뻔했다. 하루빨리 밍채와 헤어질 방법을 찾는 주현에게 1억 골드는 큰돈이었다. 때마침 우편함에 불이 들어왔다. 주현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캐릭터를 움직여 거래소로 향했다.

* * *

[귓속말] 밍채 : ?

[귓속말] 밍채 : 뭐예요?

우편함 소매넣기를 당한 밍채가 황당해하며 귓속말을 걸어왔다.

캐릭터 정보 창을 열면 아바타 도감 점수도 확인할 수 있는데, 밍채는 정말로 캐릭터 외형에는 관심이 없는지 주현이 막 게임을 시작했을 때와 비슷했다. 주현은 처음부터 돈을 쏟아부어 아바타부터 모았으니 뉴비치곤 점수가 높았고, 밍채는 직업 랭킹 1위를 달성한 유저치곤 터무니없이 낮았다.

의도치 않게 밍채의 커스터마이징에 손을 댈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입고 다니는 옷은 이전과 똑같았다. 이벤트로 뿌렸던 직업 아바타. 염색도 하지 않은 순정 상태였다.

그리하여 주현은 거래소에서 밍채에게 어울릴 만한 아바타를 사들였다. 두루마기와 바지, 갓신을 들고 염색 NPC를 찾아갔다. 모자는 얼굴을 가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구매하지 않았다.

직업이 성직자인 걸 고려해 밝은 파스텔 색상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정작 밍채의 캐릭터는 까만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졌다. 마족 같은 놈. 주현은 그렇게 혀를 차며, 무난하게 검은색과 흰색을 택했다.

후에 아이템을 사용해 귀속을 해제하고, 밍채에게 우편을 보냈다.

[귓속말] 밍채 : 형

[귓속말] 밍채에게 : 왜?

기껏 대답해 주니까 밍채는 사라져 버렸다. 괜히 아바타를 선물한 게 아닌가 후회도 됐다. 아바타를 핑계 삼아서 더 들러붙을 놈이었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귓속말] 밍채 : 저 예뻐요?

검은 두루마기 옷자락이 주현의 캐릭터 앞에서 펄럭였다. 어느새 주현의 앞으로 다가온 밍채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누가 만든 커스터마이징인데, 안 예쁠 수가 있나. 마우스를 이용해 시점을 돌려가며 밍채의 차림새를 훑었다. 첫 만남을 떠올리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다만 주현과 함께 점점 악당처럼 변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귓속말] 밍채 : 형 친구 신청받아요

[귓속말] 밍채에게 : ?

[SYSTEM] 대화 상대가 로그아웃하여 채팅을 보낼 수 없습니다.

밍채는 상황 설명도 없이, 본인 할 말만 하고 퇴장했다. 로그아웃했다는 소식을 보며 주현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귓속말과 친구 신청이 나란히 도착하며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귓속말] 밈체 : 형

《 밈체님이 친구 신청을 보내셨습니다. 》

주현은 수락을 눌렀다. 성직자의 직업 아바타를 입은 낯익은 캐릭터가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뭐야?’

주현이 밍채에게 보내 줬던 커스터마이징이었다. 부캐에도 적용해 놨을 줄은 몰랐다. 커스터마이징 변경에도 캐시가 들기 때문에, 처음 만든 대로 체념한 채 지내는 유저들도 많은 편이었다. 반면에 밍채는 부캐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귓속말] 밈체 : 밍채 캐릭터는 티어가 형이랑 안 맞아서

[귓속말] 밈체에게 : 나 배치전인데?

[귓속말] 밈체 : 마스터예요

[귓속말] 밈체에게 : 그렇구나..

마스터면 파티가 불가하긴 하지. 배치전 파티 입장은 플래티넘, 골드, 실버 티어의 유저만 가능하다.

[귓속말] 밈체에게 : 넌 왜 성직자만 키워?

밍채, 밈체, 채채 모두 성직자였다. 밈체의 정보 창을 열어 보자 역시나 랭킹이 표기가 되었다. 성직자 402위.

[귓속말] 밈체 : 할게 없어서요

[귓속말] 밈체에게 : ?

[귓속말] 밈체 : 골드도 딱히 쓸곳 없고

보통 엔드 스펙을 달성하면 골드를 팔기 마련인데, 밍채는 그걸 부캐에다가 투자했단다. 어차피 같은 직업이면 스킬도 똑같은데 재미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밍채가 질문을 던졌다.

[귓속말] 밈체 : 형은 왜 성기사 키우는데요?

[귓속말] 밈체에게 : 멋있어서

아군을 지킨다는 소개가 멋있어 보여서 골랐다.

나중에 보니까 공격 구조도 간단하고 스킬도 단출하고. 컨트롤에 자신 없는 주현에게 딱 알맞은 직업이었다. 다만 대장장이와 함께 경직 스킬을 보유한 탱커이기에 할 일이 많아서,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면 쉽게 욕을 먹는다. 주현이 던전을 잘 가지 않는 이유였다.

[귓속말] 밈체 : 그럼 저 지켜주는 거예요?

내가 널 왜 지키느냐고 반박하려는데 파티 초대가 날아왔다. 초대를 수락하고 다시 채팅을 치려 하자, 이번엔 PvP 랭크전 입장 로딩이 떠올랐다. 밈체 캐릭터로는 PvP 랭크전을 하지 않았는지 주현의 블랙처럼 티어가 표기되지 않았다.

매칭이 완료되자 캐릭터가 랭크전 맵으로 입장했다.

[파티] 블랙 : 헐 잠깐만

[파티] 블랙 : 나 방어구 안 입었어

마몬 레이드 입장 전에 수리비 아낀다고 방어구를 벗어 뒀었다. 아바타를 착용하고 있어서 방어구가 보이지 않아 그 점을 깜빡해 버렸다.

[파티] 밈체 : 안 맞으면 돼요

[파티] 블랙 : ;

[파티] 밈체 : 어차피 지금 나가면 점수 깎여요

중퇴하면 패배로 처리되기 때문에 주현이 손해였다. 대기 시간이 끝나자, 밍채는 문을 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맵은 지난번과 같은 창고였다. 주현은 상대 팀 위치를 확인하며 밍채의 뒤를 쫓았다. 왠지 포지션이 바뀐 모양새였다.

주현이 주위를 살피는 동안, 밍채는 첫 번째 스킬을 사용했다. 주현의 캐릭터에 투명한 원형의 방어막이 덮이며,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을 막아 냈다. 방어막 덕에 받는 대미지가 줄긴 했으나, 방어구를 입지 않아 출혈 상태에 걸렸다. 동시에 머리 위로 하얀 깃털이 연이어 떠오르며 잃은 체력을 순식간에 되돌려놓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번엔 금빛 깃털 표식이 등장하며, 모니터에 아이콘이 생겨났다.

《 치유의 가호 : 1분간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체력 최대 50% 회복합니다. 》

주현이 포병에게 얻어맞고 있을 때, 밍채는 주현의 상태를 관리하면서 상대편 음유시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음유시인이 하프의 현을 튕기는 순간, 이마에 검은 해골 표식이 떠올랐고 주현은 조용히 묵념했다.

[SYSTEM] 파티원 밈체님이 도룡뇽님을 처치하였습니다.

본인의 실수로 죽는 것보다 더 화나는 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격 반사가 가능한 ‘주신 리라의 축복’은 유저들을 열 받게 만드는 스킬이었다.

[전체] 도룡뇽 : 아 ㅅ1발

밍채는 죽은 음유시인이 욕을 하든 말든 유유히 포병에게 향했다. 주현에게 포탄을 쏟아 내던 포병은 다가오는 밍채를 발견하고 포구의 방향을 돌렸다. 죽을 위기였던 주현은 안심하고 숨을 몰아쉬다가, 실수로 바닥에 남은 화약을 밟고 전사했다.

[파티] 밈체 :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밍채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밍채는 포병을 마저 해치우고 이겼다는 승리 표시와 함께 숨진 주현의 블랙에게 다가갔다.

《 부활 : 원상태로 부활합니다. 5초간 무적 상태입니다. 》

[파티] 블랙 : ㄱㅅ..

[전체] 도룡뇽 : 대리 신고함

[전체] 시계점 : 게임 ㅈㄴ 노잼 만드네 대리충새끼들;

배치전에 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버스충이라고 욕했으면 이해라도 했다. 억울했지만 상대편은 이미 퇴장한 뒤였다. 맵에서 나와 마을로 돌아온 주현은 서둘러 방어구를 챙겨 입었다. 우연인지 곧바로 랭크전 로딩이 시작되었다.

[파티] 블랙 : 너 근데

[파티] 밈체 : 네

[파티] 블랙 : 잘하면서 왜.. 사사게 갔어?

올라와 있는 게시글만 보면 비협조적인 놈이 분명한데, 같이 게임을 해 본 주현의 입장에선 버스 기사였다. 마나 아깝다고 봉인시켜 두던 힐과 버프도 주현에게만큼은 후했고, 모든 마나를 소모하는 부활 스킬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파티] 밈체 : 저 잘해요?

맵에 입장한 밍채의 캐릭터가 주현을 바라보며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였다. 객관적으로 잘하는 건 맞았으나, 대놓고 칭찬을 요구하니 그렇다고 답해 주기 싫었다.

[파티] 블랙 : 아니

[파티] 블랙 : 걍 봐줄만해

[파티] 밈체 : 그래요?

대기 시간이 끝나고 이번에도 밍채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우거진 숲이었다. 상대 진영으로 달려갈 줄 알았던 밍채는 문만 열어 두더니 주현의 뒤에 숨어 버렸다.

《 빛의 희생 : 받는 공격의 피해량이 일회성으로 30% 감소합니다. 》

《 치유의 가호 : 1분간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체력을 최대 50% 회복합니다. 》

《 주신 리라의 은총 : 10초간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책장을 넘기며 열심히 주문을 외우더니, 상태 아이콘이 연이어 화면에 떠올랐다. 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울리며 수풀 너머에서 포탄이 날아왔다. 주현은 본능으로 대검을 세웠다.

[파티] 밈체 : 형 잘하네요

울창한 나무들 탓에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간간이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 남은 하나는 산탄총을 사용하는 사냥꾼으로 추정되었다. 포병과 사냥꾼 둘 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캐릭터임을 고려하면, 주현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파티] 밈체 : 형 발소리에 집중해봐요

[파티] 블랙 : ?

[파티] 밈체 : 방패 쓰고 왼쪽이요

《 신념의 방패 : 5초간 본인이 받는 피해량이 30% 감소합니다. 》

일단 시키는 대로 스킬을 사용하긴 했는데, 왼쪽을 보면서 공격을 하라는 건지 방어를 하라는 건지…… 밍채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냅다 검을 휘둘렀다. 나무 뒤에 있던 사냥꾼이 화들짝 놀라며 방아쇠를 당겼다.

밍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킬을 사용해 빛의 사슬로 사냥꾼을 묶었다. 제 파트너를 구하려 포병이 연달아 포탄을 쏘자, 안타깝게도 포병의 머리 위에 까만 해골이 떠올랐다.

이쯤 되니 주현은 궁금해졌다. 저 반사 스킬이 사기인 걸까, 당하는 사람들이 아둔한 걸까. 그래도 포병은 눈치가 있었는지 깎이는 제 체력을 알아채고 공격을 멈췄다.

주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묶여 있는 사냥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미지를 받고 풀려난 사냥꾼이 코앞에 있는 주현을 향해 총을 쐈다. 사냥꾼의 산탄총은 가까울수록 명중률과 대미지가 올라갔다. 주현의 캐릭터가 총알에 맞고 비틀거리자, 머리 위로 깃털 표식이 떠올랐다.

[파티] 밈체 : 형

[파티] 밈체 : 공격 말고 반격을 해요

밍채는 포병과 대치 중인데 어떻게 채팅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공격과 반격이 뭔 차이인가 싶지만, 주현은 일단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기는 타이밍에 맞춰 검날을 세웠다. 몇 번 박자를 놓쳐서 총알에 얻어맞긴 했으나, 때마다 밍채가 힐을 해 준 덕분에 체력은 끄떡없었다.

마침 총알을 모두 사용한 사냥꾼이 탄창을 갈 때, 주현은 마우스를 클릭해 반격을 날렸다. 무작정 공격하는 것과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반격은 대미지부터 달랐다. 주춤하며 출혈하는 사냥꾼을 향해 주현은 마우스를 반복하여 클릭했다.

[SYSTEM] 파티원 블랙님이 DP12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전체] DP12 : 아;

[SYSTEM] 파티원 밈체님이 따싹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주현이 직접 상대 팀을 잡아 본 건 처음이었다. 사냥꾼이 죽고 나서 곧바로 포병의 시체가 배달 왔다.

《 Win 》

밍채 덕에 요즘 따라 자주 구경하는 승리 문구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반갑게 다가왔다.

‘……이기니까 좀 재밌는데?’

보상 때문에 억지로 하던 PvP 콘텐츠에 처음으로 재미를 느꼈다.

랭크전을 끝내고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가끔 길드원이 지나가는 게 전부였던 곳에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살펴보니 모두 평온 길드원이었다.

[전체] 어스름 : 재앙길드가 4채구나

재앙이라는 이름에 맞춰서 신사가 4채널로 설정해 뒀다. 길드 채널이라고 해서 재앙 길드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길드원들이 4채널 위주로 활동할 뿐이었다.

[전체] 단공 : 근데 여기 맞음?

[전체] blueberry : 맞겠지

평온 길드원이 왜 4채널로 몰려온 건지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주현은 왠지 저와 관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밍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밈체에게 : 뭐야 이 사람들?

[길드] westone : 광장에 평온 있는데 이거 뭐예요?

[길드] forest : 평온이 뭐였죠?

[길드] westone : 블랙님 남편분 길드요

[길드] 월월월 : 상견례 아닐까염? ㅋㅋㅋㅋ

[길드] westone : 그럼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길드] 블랙 : ㅅㅂ 아니에요

[귓속말] 밈체 : 모르는 사람이에요

돌아온 답은 기가 막혔다. 같은 길드인데 어떻게 모르는 사람일까. 대답은 그렇게 해 놓고 밍채는 평온 길드원에게 다가갔다. 걸어오는 밍채를 발견한 어스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전체] 어스름 : 왜 귓을 안 봐?

[전체] blueberry : 길마님 민채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 아닌지요?

[전체] 단공 : 김민채 원래 귓 안봄

이름이 김민채구나. 어쩌다 보니까 밍채의 본명까지 알게 되었다. 밍채는 제 본명이 전체 채팅으로 까발려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개인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데, 무심한 놈. 주현은 조심성 없는 밍채에 혀를 찼다.

[전체] blueberry : ㅇ? 얘 파티 있다는데요?

[전체] 밈체 : 랭크전 할건데

[전체] blueberry : 또 뭔 컨셉질하는데;

[전체] blueberry : 괜한 사람 그만 괴롭히고 본캐로 들어와

평온 길드원도 밍채가 정상적인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현은 눈치를 보다가 캐릭터를 움직여 밍채에게 다가갔다. 맵에서 마을로 돌아온 후 움직이지 않으면 캐릭터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주현에 밍채와 대화하던 블루베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전체] blueberry : 깜짝야;

[전체] blueberry : 아 이분이구나

주현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블루베리가 먼저 알아봤다. 벌써 소문이 난 걸까? 이러면 헤어져도 별다른 바 없어 보였다.

[전체] blueberry : 니 하다하다 겜으로 여자 꼬시냐?

[전체] 단공 : 민채야 형은 실망했다

[전체] 블랙 : 저 남잔데요..

머리와 눈동자 색이 밍채와 같다는 걸 간과했다. 평온 길드원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 같아 해명하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일순간 고요해진 광장의 분위기를 수습한 건 놀랍게도 밍채였다. 밍채가 나서서 길드원에게 주현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전체] 밈체 : 남친이에요

[전체] 블랙 : ㅅㅂ 말 똑바로 해

[전체] 밈체 : 아

[전체] 밈체 :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어요

[전체] 블랙 : 하..

[전체] 단공 : 아 ㅋㅋ....

[전체] blueberry : ...잘못 걸리셨네

[전체] 어스름 : 어쩌다가.....

길드원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걸 보아 밍채가 이런 일을 자주 벌인 것으로 추정됐다.

[전체] blueberry : 그래서 니 마몬 안 감?

[전체] 밈체 : 안 가요

이번 주 마몬은 이미 신사와 함께 잡은 상태였다. 밍채가 거절하자 블루베리는 느닷없이 주현에게 제안했다.

[전체] blueberry : 블랙님 가실래요?

[전체] 블랙 : 저 이미 잡았어요 ㅎㅎ

[전체] blueberry : 설마 쟤가 잡아줬어요?

잡아 줬다고 하기엔 내기가 걸려 있던 전투였다. 그렇다고 잡아 주지 않았다기엔 주현의 기여도는 0.01%였다. 마지못해 그렇다고 답했다.

[전체] 블랙 : 네..

[전체] blueberry : 님 도망가세요

[전체] 블랙 : 네?

[전체] 어스름 : 벌써 무섭다

[전체] 단공 : 내가 잡아달라고 할땐 무시하더니 ㅋㅋ

유난을 떠는 평온 길드원들 사이로 소름 끼치는 채팅이 떠올랐다.

[전체] 밈체 : 형은 특별하니까

[전체] 단공 : 뭔 형?

[전체] blueberry : 단공아... 너 부르는 건 아닌 듯

[전체] 어스름 : 근데 블랙님 쟤 어디서 만났어요?

[전체] 블랙 : 랭크전이요

[전체] 밈체 : 형이 먼저 고백했어요

[전체] 어스름 : 아...

어스름은 탄식과 함께 주현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어스름 : 아무래도 보복하려고 타이밍 보는 것 같은데 얼른 튀세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보통은 길드원의 편을 들어주지 않나? 평온 길드원이 입을 모아 도망가라고 말하니, 같은 길드원도 밍채의 악명에 혀를 내두르는가 싶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져 주현은 결국 호기심에 굴복했다.

[귓속말] 어스름에게 : 잘 몰라서 그런데요

[귓속말] 어스름에게 : 얘 원래 이러고 다니나요?

[귓속말] 어스름 : 음... 평소엔 조금 장난치는 정도이긴 한데요 ^^......

[귓속말] 어스름 : 이렇게 커플 하는 건 처음 봐서요

조금 장난은 사사게에 박제된 비매너 행위를 말하는 걸까? 힐 안 주는 성직자야 밍채 말고도 널렸으니, 어스름이 장난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또 댓글에선 본인은 힐 받았다는 목격담도 더러 있었으니, 본인만의 힐 주는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귓속말] 밈체에게 : 너 왜 힐 줬다가 안 줬다가 해?

[귓속말] 밈체 : 제가 언제 힐을 안 줬어요?

[귓속말] 밈체에게 : 아 나 말고 ㅎ

[귓속말] 밈체 : 마나 아까워서요

하긴 힐값 못 하는 애들한텐 마나가 아깝긴 하지. 속사정을 파헤쳐 보니까 그렇게까지 욕먹을 짓을 저지른 것 같지도 않았다. 딜 사이클[16]이야 유저마다 다른 법이고, 밍채도 효율을 위해서 힐 스킬을 안 쓸 뿐이었다.

[귓속말] 밈체 : 형 준비 끝났으면 다시 입장할게요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서 주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로딩이 떠올랐다.

[길드] 레아 : ?????

[길드] 월월월 : 왜염?

[길드] 레아 :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레아 : 블랙님 상대 저예요...!!!

길드 채팅을 읽고 문 너머 닉네임을 확인을 해 보니 진짜였다. 처음 보는 유저와 레아가 파티를 맺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 레아 : 밈체... 아니죠.....?

[길드] westone : 밈체?

[길드] 레아 : 아니라고 해주세요...ㅠ

[길드] 블랙 : ..ㅎ

[길드] 레아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월월월 : 검색해보니까 밍채님 부캐네염

[길드] westone : 어우...

[길드] 사멍꾼 : 파이팅입니다

아직 문도 안 열렸는데 레아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레아는 2년 만에 복귀한 유저로, 직업은 스태프를 사용하는 정령사였다. 실력은 주현보다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장비가 주현이 훨씬 좋은 탓에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PvP 시스템상 공정성을 위해 공격력과 방어력 등 대다수의 능력치가 보정이 들어가지만, 공격 속도와 치명타 저항 수치는 유지가 된다. 장비에 꽤 돈을 투자한 주현은 남들이 네 번 공격할 때, 다섯 번 공격할 수 있는 속도를 가졌다.

[파티] 밈체 : 제가 정령사 잡아요

레아가 봤으면 기겁할 채팅이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밍채는 주현에게 방어막을 씌워 주고, 어딘가 숨어 있을 레아를 향해 달렸다. 그러지 말라고 말리지도 못했다. 주현이 아는 밍채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심하게 구는 놈이었다. 장난 한번 쳤다가 밍채에게 게임 인생 저당 잡힌 자신이 그러했다.

[길드] 레아 : 저 사람 왜 저한테 와여 ㅠㅠㅠㅠㅠ

[길드] 월월월 : ㅠㅠ...

[길드] westone : 묵념..

밍채와 싸워야 하는 레아가 안타깝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주현의 목표는 승리였다. 주현은 대검을 질질 끌며 상대편을 찾아 나섰다. 맵은 전과 같은 삼림이라 그런지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숨어 있을 상대를 찾으려 마우스로 시야를 돌리는데, 그 순간 허공에서 나타난 빛줄기가 캐릭터의 몸에 감기며 속박했다.

[전체] 대퍄파 : ㅎㅇㅎㅇ

보통 PvP에선 채팅을 사용하지 않는 게 매너였다. 무슨 말을 하든 지는 처지에선 고까워 보이니 별것도 아닌 거로 시비가 붙는 일이 잦았다.

대퍄파는 밍채와 같은 성직자였다. 주현은 속박 스킬이 풀릴 때를 기다리는데, 풀리자마자 머리 위로 까만 해골이 떠올랐다. 공격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대퍄파가 책장을 넘기며 주현을 툭 공격했다. 작은 대미지가 들어왔다.

[전체] 대퍄파 : 귀엽다 ㅋㅋ

[전체] 대퍄파 : 봐줄까?

그렇다. 이상한 유저가 같은 편이 아니라고 해서 치근덕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주현은 한숨을 쉬면서 과연 이놈을 잡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궁리했다.

해골이 사라지자마자 대검을 세워 방어하려 하는데, 대퍄파가 먼저 스킬을 사용한 탓에 빛 기둥을 맞은 주현의 캐릭터 자세가 무너졌다. 대퍄파는 쉽게 죽일 생각이 없는지 기본 공격만을 사용하다가 스킬 쿨타임이 끝나자 또다시 주현을 속박해 왔다. 공격 한 번 못 먹여 보고 대퍄파에게 놀림당하니 짜증은 나는데, 제 실력으론 이기지 못할 게 뻔해서 얼른 죽여 주길 빌었다.

[전체] 대퍄파 : 봐주세요 해봐

때마침 반가운 알림이 채팅에 떠올랐다.

[SYSTEM] 파티원 밈체님이 레아님을 처치하였습니다.

[길드] 레아 : 전 진짜 최선을 다햇어요 ㅠㅠㅠㅠㅠㅠ

[길드] westone : 고생하셨어요~!

[길드] 레아 : ㅠㅠㅜㅜㅜㅜ

속박이 풀리기 직전에 대퍄파는 빛 기둥으로 캐릭터 정수리를 강타했다.

《 빛의 희생 》 《 치유의 가호 》

찰나에 방어막이 끼어들어 캐릭터가 바닥을 구르는 건 면할 수 있었다.

[전체] 대퍄파 : 아 방해하지마 ㅜㅜ

[전체] 대퍄파 : 우리 좋은시간 보내고있다고

[파티] 밈체 : 형 지금 바람피우는 거예요?

[파티] 블랙 : ㅅㅂ 그럴 리가 있겠냐고

[파티] 밈체 : 형 내거예요

채팅을 보고 열을 쏟아 내던 밍채는 마지막에 주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대퍄파에게 다가갔다. 대퍄파가 책을 고쳐 들자, 곧바로 이마에 새까만 해골이 떠올랐다. 저 해골이 반갑게 느껴지다니, 별일이 다 있다.

《 주신 리라의 은총 : 10초간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잊지 않고 버프까지 챙긴 밍채는 대파퍄를 향해 연이어 빛 기둥을 쏟아부었다. 때려 박았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만큼, 마나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전체] 대퍄파 : ㅇㄴ

[전체] 대퍄파 : 잠깐ㅁ만

[SYSTEM] 파티원 밈체님이 대파퍄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버스를 탔다. 대미지 한 번 먹여 보지 못한 주현과 다르게 밍채는 단번에 대퍄파를 제압했다.

[길드] 레아 : 오늘 대진운 너무....ㅠㅠㅠㅠ

[길드] 월월월 : 곧 시험기간이라 그래염 ㅋㅋㅋ

[길드] 월월월 : 기말 전에 티어 올려두려고 많이들 하더라구염

[길드] westone : 시험.........

[길드] 잔혹동화 : 시험 얘기 금지입니다 ㅡㅡ

게임 연령층이 다양한 편이었지만 길드엔 유독 20대가 많았다. 그중에 대학생이 꽤 있었는지 곧 다가올 기말시험에 치를 떨었다. 학생들이 많이 하는 게임은 시험 기간만 되면 접속률이 낮아지곤 했다. 혼돈의 설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길드원뿐만 아니라 밍채의 접속도 뜸해졌다. 애처럼 군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자신보다 어리다는 게 확연히 느껴지니 주현은 기분이 이상했다.

밍채는 보통 접속하면 레이드를 몇 판 돌다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늦게서야 주현을 찾았다. 커플 하자고 집착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주현에게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왜 평온 길드원이 밍채에게 컨셉 좀 버리라고 하는지 공감이 갔다.

처음엔 진저리 나게 싫었던 놈인데, 이제는 독특한 게임 친구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꺾이지 않고 위로 치솟는 PvP 랭크전 점수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밍채가 레이드에 갈까 봐 접속하자마자 PvP 랭크전 하자고 귓속말을 보낸 적도 있었다.

[파티] 밈체 : 형 저 지켜주는 거죠?

[파티] 블랙 : 넌 그 컨셉 언제까지 하는 거야?

[파티] 밈체 : 우리 사랑이 장난이에요?

[파티] 블랙 : ..미안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주현은 무사히 PvP 랭크전 1시즌을 다이아 티어로 마무리 지었다. 인벤토리로 들어온 보상을 보며 그동안 몇 번이고 땅을 구른 제 캐릭터를 다독였다.

PvP 랭크전 1시즌 종료와 동시에 학생들의 기말시험도 끝이 났다. 시험에서 해방된 서쪽은 부리나케 게임에 접속해 월월월과 주현을 끌고 루시퍼 레이드로 향했다. 주현은 1페이즈[17]가 끝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전사했다.

서쪽과 월월월이 루시퍼를 때려잡는 걸 멀거니 지켜보는데 밍채로부터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 밍채 : 형 지금 바람피우는 거예요?

친구 목록을 살피다가 우연히 주현을 발견한 모양이다.

[귓속말] 밍채에게 : 너도 레이드 하잖아?

[귓속말] 밍채 : 전 형이 레이드 싫어하는 줄 알고

[귓속말] 밍채 : 일부러 안 부른 거였어요

[파티] westone : 어..?

[파티] 월월월 : 헐

밍채와 귓속말을 하느라 한눈을 판 사이, 삐끗해서 실수한 서쪽이 루시퍼에게 붙잡혔다. 곧이어 스태프에서 나온 광선에 심장이 꿰뚫리며 피를 모두 잃고 쓰러졌다.

[파티] westone : 리트[18]해야할듯요 ㅜㅜ 죄송

[파티] 월월월 : 제 실력을 보여줄때가 왔네염

[파티] 블랙 : 리트하죠

[파티] 월월월 : 제 채팅이 안보이시나염?

[파티] westone : 재도전할게요

[파티] 블랙 : 넵

[파티] 월월월 : 서럽네염 ㅠ

월월월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남은 보스의 체력을 고려했을 때, 서쪽이 살아난 채로 처음부터 다시 잡는 게 더 속도가 빠르리라 판단되었을 뿐. 주현은 둘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파티] 블랙 : 저 혹시 한 명 불러도 되나요?

[파티] 월월월 : 넴 사람 많으면 좋져

[파티] westone : 어..?

[파티] 월월월 : ??

[파티] westone : 설마..?

[파티] 월월월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블랙 : ..초대주세요

파티장이 서쪽이라 파티원을 초대하는 것도 서쪽의 몫이었다. 주현이 민망해하는 사이, 밍채가 초대를 받고 파티에 입장했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westone : 안녕하세요~

[파티] 월월월 : 안녕하세염

[파티] 밍채 : 안녕하세요

[파티] westone : 밍채님도 시험이셨나요? 오랜만에 뵙네요

친화력 좋은 길드원들이 밍채에게 잘도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의 전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무시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 밍채가 대답을 했다.

[파티] 밍채 : 네

[파티] 월월월 : 헐 학생이세염?

[파티] westone : 전 블랙님한테 형이라고 하길래 어리신거 알았는데

[파티] 블랙 : 그건.......... 사정이 있어요

첫 만남을 설명해 봤자 놀림만 받을 게 뻔해서 주현은 말을 아꼈다.

[파티] 밍채 : 제가 어리긴 해요

[파티] 블랙 : 뭔 자신감이야?

[파티] 밍채 : 열다섯살이에요

[파티] 블랙 : 알았다

스물여섯 먹은 주현에게 열다섯은 아기에 가까웠다. 물론 열다섯이라는 건 농담 같아 보였지만, 주현보다 어리다는 건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파티] westone : 아 ㅋㅋㅋㅋㅋ 블랙님 도둑놈이셨네

유쾌하게 웃던 서쪽은 준비를 마친 파티원의 상태를 확인하고 레이드를 시작했다. 맵에 입장한 서쪽이 제단을 향해 달려갈 때, 밍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주현에게 방어막을 씌워 줬다.

검붉은 달과 함께 등장한 루시퍼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제 앞에 있던 서쪽을 향해 내리쳤다. 서쪽은 유연하게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했다.

《 영웅들의 합창 : 10초간 공격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

《 주신 리라의 은총 : 10초간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 독주 : 영역 안 파티원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서쪽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월월월과 밍채가 서둘러 버프 스킬을 쏟아 냈다.

[파티] westone : 미쳤다 ㅎ

[파티] westone : 공증[19]이 두개 ㅎㅎㅎㅎ

화면에 떠오른 상태 효과가 그렇게도 좋은지 서쪽이 웃음을 흘리며 시원하게 포탄을 갈겼다. 주현은 공격하는 척 검날을 휘두르며 슬쩍 밍채의 눈치를 봤다. 그동안은 PvP 랭크전에 전념을 했던 터라, 밍채와의 레이드는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시퍼 레이드쯤이야 주현 없이 가뿐히 클리어 하겠다만, 밍채가 어디까지 참는지 궁금해져 주현은 엇박자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러자 곧바로 귓속말이 날아왔다.

[귓속말] 밍채 : 형 허튼짓하지 마세요

밍채의 캐릭터는 머리를 향해 날아온 광선을 쓱 피하고 있었다. 보스의 공격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채팅하는 밍채가 신기했다.

[귓속말] 밍채 : 그런다고 안 놔줘요

어차피 이젠 밍채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고의로 죽으려 하는 건 서쪽과 월월월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주현은 시도 때도 없이 검을 세워 방어 위주로 플레이하며 이따금 반격을 날렸다.

[귓속말] 밍채 : 형 곧 루시퍼가 스태프를 왼손으로 옮기거든요

[귓속말] 밍채에게 : ㅇㅇㅇ

밍채는 길게 말을 할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주현은 아니었다.

[귓속말] 밍채 : 옮기고 10초 후에 경직 쓰면 언데드 패턴 캔슬돼요

밍채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퍼가 쥐고 있던 스태프를 왼손으로 옮겼다. 주현은 마음속으로 천천히 10초를 세고 경직 스킬을 사용했다. 주현의 캐릭터가 널찍한 어깨로 루시퍼에게 몸을 부딪쳤다.

[귓속말] 밍채 : 형

[파티] westone : 까비

[파티] 월월월 : 블랙님 저 감동했어염..ㅠㅠ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안 맞아서 패턴 캔슬을 실패했다. 월월월은 주현이 도전했단 데에 의의를 뒀는지 우는 감정 표현을 사용하며 감격한 마음을 전했다.

[귓속말] 밍채 : 설마 직접 센 거예요?

‘……어떻게 알았지?’

[귓속말] 밍채에게 : 그럼 어떻게 하는데?

속내를 들킨 게 민망해 애써 침착한 척 물었다.

[귓속말] 밍채 : 왼쪽 위에 던전 플레이 시간 나와요

정말이었다. 13:03. 던전에 입장한 지 13분 3초가 지났다는 뜻이다.

[귓속말] 밍채 : 형 귀엽네요

[귓속말] 밍채에게 : 잊어 ㅅㅂ

낯부끄러워서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현실이 아닌, 게임 속 세상이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밍채는 주현이 창피해하는 것도 모르고 새롭게 방어막을 씌워 줬다.

[파티] westone : 이게 사랑의 힘인가요?

[파티] 월월월 : 블랙님 ㅠㅠ

밍채가 지극히 정성으로 관리해 준 덕분일까. 주현은 악마 레이드를 처음으로 살아서 클리어했다. 루시퍼가 악마 레이드 중 가장 쉽다고 하나, 주현은 어쨌거나 제 실력이 늘었단 게 감격스러웠다.

[파티] westone : 내일은 같이 마몬 뿌셔요

[파티] 월월월 : 내일도 이렇게 가나염....?

[파티] westone : ?? 당연하죠

[파티] 월월월 : 10인 던전을 왜 4명이서 가는거예염 ㅠㅠㅠㅠㅠ

[파티] westone : 아 ㅋ 아직 혼설의 진짜 재미를 모르시네요

[파티] 밍채 : 저는 수학 학원 가야 해서 이만 나가볼게요

[SYSTEM] 밍채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서쪽과 월월월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밍채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져 불을 지펴 놓고 정말로 로그아웃을 해 버렸다.

[파티] westone : ......? 진짜 중2이에요?

[파티] 월월월 : ㄷㄷ 컨셉 아녔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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