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ello, new world
“흐읏, 아……!”
사이드 테이블 위의 스탠드 조명이 눅눅한 공기 사이로 희뿌연 빛을 내보냈다. 둥근 손끝이 간헐적으로 시트를 움켜쥘 때마다 빛깔의 궤적 또한 미세하게 일렁였다. 마치 침대 위의 들끓는 열감에 조명까지 녹아드는 듯 보였다.
“주, 태승 씨이. 거기 잠깐만.”
진서는 제 목덜미에 이를 박은 남자에게 달뜬 애원을 토해 냈다. 단단한 치아가 무딘 살갗을 짓씹는 감각이 선연했다.
너른 어깨를 미약한 힘으로나마 밀쳐 냈으나 태승은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지근한 손가락이 옷자락 안으로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그가 허연 옆구리를 간질이자 진서의 발가락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츠읍, 츱. 쇄골 근처를 아우르던 입술이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얕은 접촉에도 온몸의 신경 다발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진서는 색욕에 젖은 눈동자를 굴려 태승을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엉겨 붙었다. 단숨에 입술이 맞물리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쌍방이 번갈아서 숨결을 불어 넣고, 고인 타액을 핥아 목을 축였다.
진서는 혀뿌리가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태승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껍게 침입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태승은 더욱 세게 혀를 밀어 넣었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으, 아, 읍.”
살갗을 스멀스멀 훑던 손이 야트막한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건드리지도 않은 젖꼭지에 피가 몰렸다. 진서는 난잡한 신체 변화에 애달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파아, 하으, 지금 예민해서. 흣.”
“응, 누가 그랬어…….”
태승은 조곤조곤 속삭이며 진서의 머리통을 한 팔로 조여 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귓불과 달아오른 목덜미 따위에 자잘한 입맞춤을 흩뿌렸다. 칭얼대는 배우자를 달래면서도 손가락은 유두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선단이 손톱에 짓눌리자 마른 허리가 허공으로 바짝 튀었다. 유두가 긁히는 감각에 진서는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쏟아 냈다. 두 사람의 페로몬이 짙은 농도를 품은 채 허공을 눅진하게 부유했다.
유두를 간질이던 태승이 천천히 아래로 입술을 떨어트렸다. 목덜미, 어깨, 쇄골, 그다음 행선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기대와 흥분이 진서의 안에서 어지러이 뒤엉켰다.
수려한 아랫입술이 빳빳하게 선 과실을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주, 주태승 씨……!”
갑작스레 옷깃을 구기는 악력에 태승이 움직임을 멈췄다. 진서는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할딱이다가 그와 머뭇머뭇 시선을 맞췄다. 곧 자그마한 목소리가 육욕으로 젖은 공기를 갈랐다.
“깨무는 건 안 돼요.”
“왜.”
“진짜 아파요. 따끔거려.”
뒷덜미를 물린 토끼처럼 가냘픈 어조였다. 유륜 언저리를 맴돌던 입술이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미련 없이 떨어졌다. 태승은 잠시 눈동자를 굴려 진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몽롱한 표정의 진서가 습하게 젖은 속눈썹을 한 차례 깜빡였다.
“왜, 그렇게 봐요?”
물음에 돌아온 것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태승의 온기가 달아오른 눈가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대답은 그보다 몇 박자 늦게 들려왔다.
“그냥요. 예뻐서.”
안 그래도 배 속이 간질거리는데 낯 뜨거운 말을 들으니 장기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피부에 열이 올라 살갗 이곳저곳에 석류색 열꽃이 번졌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태승이 낮게 더운 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마디가 길쭉한 손가락이 유두를 살살 어루만졌다. 도드라진 선단을 건드리다가, 엄지와 검지가 돌기를 굴릴 때는 저절로 밭은 신음이 튀었다. 통증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쾌감이 짜릿하게 혈관을 내달렸다.
태승은 솟아오른 젖꼭지를 지분대며 나직하게 물었다.
“문지르기만 하는 건, 안 아파?”
답하기 위해 입을 열면 온전한 언어가 아니라 신음성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쩔 줄 몰라 시트를 걷어차는 발이 주인의 속내를 오롯이 내비쳤다. 제 오메가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태승에게는 모자람 없는 호응일 터였다.
태승은 유두를 희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서의 쇄골에 고개를 묻었다. 성감대가 동시에 자극당하자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었다. 꽉 깨물었던 아랫입술이 벌어지고, 힘겨운 울음이 입 밖으로 범람했다.
“흐윽, 아, 응.”
얄궂게도 흘러넘친 것은 신음만이 아니었다. 유두 근처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에 진서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당혹스러움에 눈길을 떨어트리자 뽀얀 유즙이 나와 태승의 손가락에 감겨드는 게 보였다.
태승 역시 그 광경에 빠져 있었다. 방울방울 고인 액체를 목도한 새까만 눈동자에 짙은 정염이 일렁였다.
“많이 좋은가 보네.”
갈라진 목소리에서 날것의 욕구가 또렷이 비쳤다. 그대로 태승은 자신의 손가락을 적신 유즙을 핥아 먹었다. 얼떨결에 배우자에게 젖을 먹인 진서가 원망스러운 투로 울먹였다.
“나, 나 창피해서 죽게 만들려고. 이거 다 주태승 씨가……. 주태승 씨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내가 여진서 임신시켜서.”
미움을 산 상대는 오히려 그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태승은 두둑하게 부푼 제 아랫도리를 진서의 사타구니에 꾹 밀어붙였다.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발기한 성기가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냈다.
태승이 흘리는 거친 호흡이 귓가를 간질였다. 이슬처럼 맺힌 쿠퍼액으로 얇은 바지춤이 서서히 젖어 드는 게 느껴져, 진서는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이 허리 밴드 안을 파고들었다. 맨살이 이불을 스치는 감각과 함께 진서는 눈을 감았다. 치밀어 오르는 질척한 열망에 이제는 몸을 맡겨 버리고 싶었다.
“빨리, 바지 벗…….”
애욕에 취해 제 알파의 목덜미에 스스로 입을 맞췄을 때였다.
으아아앙-!
별안간 퍼진 울음소리가 농익은 분위기를 대차게 찢어 놓았다.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은 침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진서는 태승을 붙잡은 채 상황을 파악하고자 애쓰다가, 곧장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아.”
“…….”
“가, 가운, 내 가운 어디 갔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진서는 침대 주변을 더듬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발견해 손을 뻗었으나 그보다 태승이 먼저 행동을 취했다. 그가 침착하게 진서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그냥 있어요. 내가 갈게.”
침대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한 사람 몫만큼 떨어져 나갔다. 빠르게 가운을 꿰어 입은 태승이 기민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덩그러니 남은 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둥글게 차오른 뺨에 아직 전희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진서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를 파닥댔다. 난감하게도 이번에는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민망함으로 이마가 뜨거워졌다.
하여튼 사이가 좋아도 탈이다. 조금 분위기만 타면 이 난리가 나니까. 배우자와 몸을 맞대고 누워 있는데 섹스는 조심해야 한다는 게 참 고역이었다.
설마 애가 들은 건 아니겠지.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할 터다. 정신을 놓다 보면 무의식중에 제멋대로 교성이 나가기도 했으므로.
방금 자신이 어떤 식으로 정신을 놓아 갔는지 회상하던 진서는, 허탈한 한숨을 쉬며 이마에 서린 땀을 훔쳐 냈다.
한편, 태승이 도착한 곳은 침실 맞은편의 작은 방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목 놓아 울어 젖히는 소리가 그를 반겼다. 아마 잠에서 깨어나 잔뜩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조그마한 게 정말 서럽게도 울어 댔다.
태승은 긴 보폭을 내디뎌 원목 테두리가 둘러진 아기 침대에 조용히 다가섰다. 여진서와 자신을 반씩 빼닮은 아기가 눈을 꽉 감고 입을 와앙, 벌렸다. 그 모습이 어미를 찾아 삐악삐악 울어 대는 작은 새와 닮아 있었다.
“주겨울, 쉬이…….”
“흐아앙, 윽, 흐끕.”
솜털처럼 가벼운 몸뚱어리를 안아 들자, 겨울은 히끅거리면서도 통통한 손을 뻗어 왔다. 태승은 아기가 제 얼굴을 마음껏 만지도록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태승이 능숙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맞춰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얼마나 진을 빼며 울었는지 토실토실한 살갗이 뜨듯했다. 몇 차례 울먹이던 녀석이 너른 품에서 조금씩 울음을 그쳐 갔다.
“칭얼대는 건 제 아빠랑 똑같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겨울은 어깨에 기댄 채 고롱고롱 숨만 내쉴 뿐이었다. 태승은 무덤덤한 낯으로 갓난쟁이의 열 오른 등을 쓸어내렸다.
언제 울었냐는 듯 아기는 금세 잠기운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침대가 갑절은 부드러울 텐데, 그래도 부모의 품이라고 이쪽을 더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꽃실처럼 늘어져 초초하게 달싹이는 속눈썹이 퍽 애교스러웠다.
끔벅끔벅 조는 겨울을 어르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급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승은 늘어진 겨울을 고쳐 안고 문을 응시했다. 곧 닫혀 있던 문이 살그머니 틈을 벌렸다.
“아이고, 어머나…….”
모습을 드러낸 건 입주 베이비시터였다. 머리카락이 다 산발이 되어 있는 게 어지간히 정신없이 뛰어온 기색이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겨울과 태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굳은 시터를 보던 태승이 짧게 문을 향해 턱짓했다. 무언으로 내리는 축객령이었다. 사부작대는 잡음에 잠든 아기가 깨면 곤란했으므로 그는 아예 문으로부터 몸을 돌려 버렸다.
다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겨울은 입술을 어물대며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시터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떠났지만 태어난 지 5개월 남짓한 영아는 봄철의 어린잎만큼이나 예민한 생물이었다. 감겨 있던 눈이 어물어물 뜨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우.”
“응, 아빠.”
태승이 답을 속삭이고는 둥근 머리통에 살짝 입을 맞췄다. 보송한 솜털 같은 머리털이 입술을 간질였다. 다행히 겨울은 울어 젖히는 대신, 태승의 실내복 카라를 꽉 붙잡고 어깨에 뺨을 찰싹 붙였다.
“아빠랑 잘 거야?”
“…….”
“침 닦고.”
당연히 갓난쟁이가 스스로 침을 닦을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태승은 겨울이 목에 두른 턱받이로 축축한 입가를 훔쳐 냈다.
다음으로 취한 행동은 조심스레 방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고요한 복도를 지나 배우자가 잠들어 있을 침실로 이동했다. 그동안 대견스러운 딸은 한 번도 울먹이지 않았다.
겨울이 우는 모습은 여진서와 아주 닮았다. 눈가에 보슬비가 내리면 입술을 말고 울음을 참는 꼴이 그렇다. 맨살을 정성스레 쓸어 주어야 울음을 그치는 점과 젖은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어여쁘다는 것까지도.
하여 태승은 겨울이 우는 게 답답하다거나 짜증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화가 나기는커녕 종일 들여다볼 수도 있을 듯했다. 아기가 보여 주는 풍경은 연인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신선한 빛깔을 띠었다.
다만 지금은 울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세상 모르게 자는 여진서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태승은 반쯤 열린 침실 문을 완전히 벌렸다. 몸을 씻고 온 건지, 방 안에서 은은한 보디 워시 향이 감돌았다. 진서의 살 내음이 지워진 탓에 그다지 달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침대맡에 다가서자 잠든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진서는 ‘겨울이는 주태승 씨랑 더 닮았어요.’라고 자주 종알대지만 그 부분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동그란 눈매 하며, 오밀조밀한 콧방울 하며 죄다 너를 빼다 박았는데, 무슨.
어느새 곤히 잠든 겨울을 가슴께로 당겨 안으며, 태승은 안락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두컴컴한 방에 두 사람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일정하게 퍼져 나갔다. 가늘게 뜬 눈이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시계를 훑었다.
새벽 네 시 반. 똑바로 잘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앞으로 한 시간 반 남짓이었다. 애매하게 자느니 차라리 밤을 새우느니만 못하겠다.
괜찮았다. 도리어 꽤 좋다고 생각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한 울타리에서 단꿈을 꾸고 있을 배우자와 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감이 차올랐다. 태승은 난생처음 손에 쥔 이 감정이 싫지 않았다.
종종 타인을 제멋대로 휘두른다고 여진서에게 타박을 맞고는 했다. 이 또한 순순히 동의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남의 인생을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바꿔 놓고, 그가 안긴 ‘처음’이 얼마나 많은지 저 잠보는 모를 터였다.
태승은 혀끝에 감도는 단맛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늘 직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 것은 새벽녘이 숨긴 비밀이었다.
***
간밤에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타이밍에 불이 붙기도 했고, 겨울의 활약으로 화려하게 산통이 깨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보통 새벽이 아니었기에 진서는 아침이 되어서도 잠기운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그냥 더 자지 그래요.”
맞은편에 앉은 태승이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 진서는 먹던 스콘을 꾸역꾸역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얼굴도 비추지 않고 잠만 자서야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나간다고?
스콘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이 멀거니 벌어졌다. 진서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가득 품은 채로 배우자를 여기저기 살폈다. 깔끔히 올린 머리카락과 남색 넥타이, 몸에 딱 떨어지는 정장까지 출근길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다만 진서는 그의 이런 모습을 상당히 오랜만에 마주했다.
“재택 아니에요?”
“오늘부터 며칠간 잠깐 일이 있어서. 내가 어제 말 안 했습니까?”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어제 침대에 누워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좌우지간 검은 슈트를 입은 걸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기에 잠시 둔감해졌으나 이 사람은 역시 붓으로 그려 낸 듯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괜히 낯이 뜨거워지는 듯하여 진서는 스콘에 잼을 바르는 척, 고개를 푹 숙였다. 태승은 별난 행동을 하는 배우자를 잠자코 바라보더니 물었다.
“입에 맞아요?”
“맛있어요.”
“저녁에 같이 병원 가기로 한 건, 기억하고?”
“아, 그건 기억나요. 산부인과.”
“기특하네요.”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진서는 잔여물을 한쪽에 몰아넣고 씹으며 태승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구경했다. 빵의 고소한 냄새에 섞여 도회적인 향수 냄새가 은은히 풍겨 왔다.
“지금 나가려고요?”
“응.”
“잠시만요, 저 다 먹었어요.”
때마침 시터의 품에서 분유를 먹던 겨울도 식사를 끝냈다. 진서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기를 옮겨 받아 팔에 안았다. 요즘 겨울은 유독 호기심이 많아져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죄다 만지려 들었다. 덕분에 마음껏 한쪽 뺨을 조물거리도록 내주어야만 했다.
“으아.”
“겨울아, 아빠 회사 간대.”
“우.”
하얀 살갗이 고사리 같은 손에서 구깃구깃 뭉그러졌다. 진서는 딸과 기묘하게 이어진 자세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나갈 채비를 마친 태승이 부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한테 인사받으려고 기다린 건가. 이런 식으로 은근히 자식 아끼는 티를 내고, 육아까지 도맡아 하는 모습이 퍽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그의 주변인은 주태승이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리라.
진서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내건 채 겨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살살 좌우로 흔들며 과장되게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보냈다.
“아빠, 빠빠이.”
낯선 음성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는지 아기의 얼굴에 환한 웃음보가 번졌다. 꺄아아, 요란하게 팔을 휘두르는 겨울을 안은 진서 또한 밭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배웅을 받는 당사자는 조용했다. 그가 특별한 반응을 내비치지 않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기에 진서는 평온히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와요.”
“응.”
잘 다녀오라는 의미인 듯, 겨울이 오동통한 손을 내밀어 허공에 두어 번 펼쳤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태승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딸을 만지려는 의도로 해석한 진서는 그가 닿기 쉽도록 아기를 고쳐 안았다.
그러나 태승이 다다른 곳은 예상 밖의 위치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그가 진서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짓눌렀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부드러운 살덩이가 가진 촉감과 온기가 확연히 와닿았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진서를 두고 태승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기습적인 입맞춤에 상대가 얼어붙은 동안 그는 차분한 태도로 돌아섰다. 현관문이 열릴 때까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아우, 으.”
삐빅, 한 사람을 내보낸 문이 경쾌한 전자음을 토해 냈다. 그에 맞춰 겨울이 조그맣게 옹알댔다. 멍하니 현관을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이 든 진서가 황급히 아기를 추슬렀다.
“으응……. 들어가자.”
왜 사람 놀라게 하고 난리냐고, 대상을 잃은 원망을 속에서 게웠다. 이미 입맞춤을 나눈 횟수는 셀 수조차 없는데 아직도 이토록 심장이 널뛰기를 하니 주책이었다.
살 떨리는 배웅을 마친 후, 진서는 후줄근한 잠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미리 스타일러에 넣어 둔 니트와 청바지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오늘은 플루트 레슨을 맡아 주던 민도희 교수와 모처럼 재회하는 날이었다. 겨울이를 낳고 줄곧 연습을 쉬었으니 얼굴 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슬슬 레슨 일정도 조율할 겸, 가볍게 담소를 나눌 생각으로 그녀를 초대했다.
머리를 말리고 나오자 커다란 장난감 문짝 앞에 주저앉은 겨울이 눈에 들어왔다.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가 닫는 데에 열중한 모습이 잔망스러웠다.
“겨울아, 재밌어?”
“으, 까흑.”
진서는 겨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문짝에 달린 전등을 켰다. 주황빛 조명이 번쩍 켜지는 데 흥미를 느꼈는지, 겨울은 소리를 지르고 까르륵 웃어 댔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갔다.
“우리 겨울이, 누구 닮아서 머리털도 이렇게 수북해.”
부모 둘 다 숱이 많은 편인 덕분일까? 그 결실인 이 녀석도 또래에 비해 머리통이 복슬복슬했다.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가 뚜렷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을 보는 듯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렇다면 이 콩깍지는 영영 벗겨지지 않겠지.
벌써부터 이렇게 예뻐서 어쩌나, 크면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 친구 생겼다고 데려오면 어떡하지. 아빠랑 놀기 싫다고 방문 닫고 휙 들어가 버리면…….
얼른 커진 겨울이와 만나고 싶으면서도 오묘한 서운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괜히 서글퍼져 진서는 팔을 뻗어 겨울을 부둥켜안았다.
“겨울이, 사랑해.”
“아으, 우.”
“너무 귀여워, 내 새끼. 사랑해.”
영문을 모르는 아기는 진서의 머리카락을 삐죽삐죽 잡아당겼다. 이러다 머리털이 다 뽑혀 대머리가 되어도 좋았다. 배우자 입장에서는 다소 유감스러울지 몰라도.
이런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주태승과 둘이 만들었다는 게 신비로웠다. 진서는 고운 밀가루보다 훨씬 여린 겨울의 뺨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성격은 주태승 닮으면 안 돼, 알았지?”
“…….”
“얼굴은 닮아도 돼. 벌써 좀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진서는 고개를 갸웃대며 배시시 웃는 겨울을 안고 한참 주책을 부렸다. 치솟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어 툭 불거진 뺨을 입에 넣고 우물대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배 속에 품고 고생한 날들 따위는 단번에 잊혀질 정도로.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겨울이 침 범벅이 되어갈 때쯤, 거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집주인보다 먼저 화면을 확인한 시터가 말을 건네 왔다.
“손님 오셨나 봐요.”
“벌써요?”
아기와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진서는 겨울을 번쩍 들어 시터에게 맡기고 현관을 열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러, 곧 품에 무언가를 한 아름 짊어진 민도희 교수가 얼굴을 내비쳤다.
“아이고, 진서 씨. 잘 지냈어요?”
“네……. 이게 다 뭐예요?”
“아기 있는 집에 빈손으로 갈 수 없죠. 겨울이 선물이에요. 본부장님이 사 주시는 거에 비하면 초라할 수도 있지만.”
도희가 들고 있는 상자를 대신 받아 드니 보이는 것처럼 무게감이 상당했다. 표면에는 보행기를 타고 있는 외국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진서는 묵직한 선물을 현관 주변에 내려놓고 말했다.
“감사해요. 겨울이가 좋아하겠어요.”
“보행기는 한 6개월부터 쓰는 게 좋아요. 저 손 좀 씻을게요.”
“아, 화장실 저쪽이요.”
도희 씨는 아들이 두 명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육아 선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서는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조촐한 다과가 차려진 식탁으로 걸어갔다. 두 개의 유리 찻잔에서 재스민 향을 실은 증기가 모락모락 일렁였다.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도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몸에 좋다는 것도 많이 먹어서.”
“진짜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아가 만나니까 좋으시죠?”
진서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옅게 미소 지었다. 겨울이를 처음 만나던 날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이 아프고자 하면 이렇게나 아플 수도 있구나, 했다.
골반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았고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시야는 흐릿했다. 그 사이로 비치던 불그스름한 살덩이. 내내 못살게 굴어 온갖 생채기로 뒤덮인 주태승의 손을 부여잡은 채 그토록 정신없이 울었더랬다.
-응, 여기 있어. 진서야, 진서야.
마찬가지로 평정을 잃은 태승이 내내 귓가에 쏟아 내던 말을 기억한다. 괜찮아, 사랑해, 옆에 있어.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의 눈도 실핏줄이 다 터져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고통스러운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아기는 우렁찬 울음소리로 첫인사를 건넸다. 진서는 그득히 고인 눈물을 뚝뚝 떨구며 비로소 다가온 겨울을 맞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온통 불그죽죽했다. 혼란한 와중에 어깨를 간절히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태승에게 폭 안긴 채로 진서는 서러이 흐느껴 댔다.
-고, 고구마 닮았어.
-……고구마?
-나 고구마 낳았어, 어떡해요. 흐어엉.
그 뒤로는 또렷하게 기억나는 부분이 없었다. 고구마 타령을 들은 주태승이 낮게 웃음을 흘렸던 것, 한편으로 그의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던 것, 다행이라고, 너를 잃을까 참 두려웠다고 애끓는 속내를 내비치던 목소리 정도가 파편처럼 흩어져 뇌리에 남았다.
과거를 회상하던 진서가 콧잔등을 두어 번 긁었다. 대체 고구마 이야기는 왜 한 건지 모르겠다.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었나, 그 예쁜 겨울이가 구황 작물로 보이다니.
오도독, 도희가 쿠키를 씹는 소리가 식탁 가운데를 갈랐다. 그녀는 찻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는 물었다.
“잠은 잘 잤어요? 아기 계속 깨서 힘들 텐데.”
“시터 이모님 계셔서요. 그리고 주태승 씨가 애를 잘 봐서 괜찮았어요.”
“본부장님이요?”
“네, 재택근무하면서요.”
“재택근무요?”
의외라는 듯, 연달아 깜짝 놀란 물음이 돌아왔다. 도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다가 황급히 제 입매를 더듬었다. 뒤늦게 변명 아닌 변명이 따라붙었다.
“어머, 죄송해요. 조금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서.”
“저도 놀랐어요. 안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죠? 그 얼굴에 맨날 무표정이니까 매칭이 잘 안된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그렇다. 얼마간 무뚝뚝한 얼굴에 적응하지 못한 겨울이도 자주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런데도 주태승은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끈질기게 육아를 도맡았다. 고용한 시터보다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시간이 길 정도였다.
그 결과, 이제 겨울이는 주태승의 팔을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느끼게 된 듯했다.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유칼립투스 나무에 붙은 코알라가 그려지고는 했다. 싱싱한 이파리 대신 실내복 카라를 열심히 질겅대는 아기 동물.
잠시 사이좋은 부녀를 떠올린 진서가 비죽비죽 웃음을 흘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희의 입꼬리도 살그머니 곡선으로 휘었다.
“아까 봤는데 겨울이가 진서 씨랑 본부장님 반씩 닮았더라고요.”
“정말요? 저는 주태승 씨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이목구비는 그런데, 방글방글 잘 웃어서 그런가. 분위기는 진서 씨랑 닮아서 유하던걸요. 알파예요?”
마지막에 들려온 물음에 진서는 저도 모르게 살짝 입매를 굳혔다. 크게 무례한 질문이 아니었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에 나온 아이였으니 알파일 거라 추측하는 건 당연했다. 다만 어쩐지 목구멍 안이 가시가 돋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불편한 감정을 빈틈없이 숨기지 못했기에 도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진서를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안색을 살폈다.
“진서 씨?”
“……아.”
겨울이의 형질은 흠결도, 죄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아이가 베타이든, 뭐든 간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진서는 아주 조금 일렁였던 마음을 추스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겨울이는 베타예요.”
“아, 그렇구나. 애가 재능이 많겠어요. 부모 두 분이 다 특출나시니까.”
충분히 의문을 가질 법한데도 도희는 형질에 대해 더 파고드는 대신 대화 주제를 돌려 주었다. 새삼 어른스럽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더불어 소소한 칭찬까지 건넨 덕에 진서는 뺨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감사해요.”
“그럼 레슨은 다음 주부터 다시 하고, 복직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
“음, 아직은 겨울이가 어리니까……. 걸어 다니고 슬슬 말하기 시작하면요.”
“저도 그때가 좋을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에 휴직이라고 말해 두기는 했으나 이 기나긴 시간 동안 연주자 자리를 비워 줄 거라는 기대는 일절 하지 않았다. 공백을 메울 실력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빈에 연락이야 해 보더라도 아마 복직을 하게 된다면 다른 적당한 악단에 지원해, 면접을 거쳐 입단하는 경로가 아닐까 싶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찻잔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마주 앉은 도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들 정말 빨리 커요. 정신 차리면 뛰어다니고, 눈 감았다가 뜨면 유치원 간다고 하고.”
“…….”
“플루티스트 여진서 씨, 금방 볼 수 있겠네요. 기대돼요.”
삐이, 삐이-.
멀찍이서 겨울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부터 어렴풋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보지 않아도 통통한 백설기 같은 손바닥이 버튼을 누르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저도요.”
안온하게, 나지막이. 진서는 햇살 틈을 반짝반짝 날아다니는 먼지를 시선으로 좇으며 대답했다.
***
우리 본부장님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LS 인터내셔널 비서실 소속의 남현우는 원래 주태승을 보좌하는 게 주요 업무가 아니었다. 하늘 같은 본부장님은 결혼 후로 내내 재택근무를 하셨기에 보좌는커녕, 직접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애초에 본부장 직속 비서는 그의 사수였으므로 자잘한 잡무가 아니라면 그다지 접점도 많지 않았다.
다만 본부장이 간만에 출근한 오늘, 하필이면 믿음직한 선배가 연차를 쓰고 말았다. 몇 가지 일정과 업무를 넘겨주며 선배는 ‘일만 잘하면 좋은 분이다.’라는 짧은 조언을 남겼다. 이 바닥에서 구른 햇수가 벌써 5년. 일 자체는 실수 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본부장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완벽히 재련된 강철과 유사했다. 사적인 대화는 일체 꺼내는 법이 없고, 귀신같은 판단으로 맡은 사업은 반드시 성공시킨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높은 직책을 맡았음에도 그의 자질에 대해서는 업계 관계자들 전부 이견이 없었다.
명성과 더불어 빼어난 외모, 우성 알파라는 형질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 상당했다. 그런 본부장이 별안간 누군지 모를 상대와 결혼하고 회사에 나오지를 않으니 여러 소문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다.
늦바람이 불어 어린 애인한테 정신이 팔려 있다느니, 배우자가 사실은 재벌의 사생아라느니. 같잖은 가십거리는 심심풀이로 씹는 껌처럼 잠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신뢰도가 떨어지는 만큼 빠르게 잊혔다.
그렇지만 현우는 본부장의 기행에 대한 소소한 호기심 정도는 남겨 두고 있었다. 아마 회사에 다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주태승이 결혼해서 아이를 돌보느라 재택근무까지 한다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한 건 당연하지 않나.
물론 호기심을 해소할 길은 없었다. 본부장의 서슬 퍼런 눈을 보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낼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며 다음 일정에 대한 요약을 전하는 게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일 터다.
일과를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 스케줄을 외우고 또 외우고 있을 무렵, 문제의 본부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본인 사무실에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LS 비서실 소속 남현우입니다. 오늘 서 비서님 부재로 대신 보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태승은 인사에 특별히 대꾸하지 않고 눈알만 굴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검은 비늘을 내두른 뱀과 닮은 눈빛에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시선이 맞닿은 시간은 아주 짤막한 순간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본부장은 타인을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도 모르게 현우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언뜻 본부장의 긴 약지에 얇은 반지 하나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정말 결혼한 게 맞긴 하구나. 얼어붙은 와중에도 이 사람이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로웠다.
“오늘 일정 먼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오후 한 시에 하청 업체 대표와 미팅이 있다는 말에도, 네 시에 철강 플랜트 사업 관련 회의가 있다는 말에도 본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나마 이쪽을 향한 올곧은 시선 덕분에 그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짧은 전달이 끝나자, 본부장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회사가 일하러 오는 곳이라지만 정말 출근하자마자 업무를 보려 든다. 현우는 천천히 마우스 휠을 내리는 태승을 흘끗거리며 물러났다.
상사가 일을 시작했으니 비서의 업무는 그가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본부장이 선호하는 커피 취향은 미리 들어 숙지한 상태였다. 설마 중년 꼰대 아저씨처럼 커피 잘못 탔다고 타박할 것 같지는 않다만, 워낙 기인으로 풍문이 자자하니 각별히 신경 쓸 생각이었다.
현우가 탕비실에서 커피를 가지고 문을 두드려, 사무실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본부장은 미동도 없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괸 채 모니터를 훑는 모습이 기계적이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는 몰입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현우는 아슬아슬하게 본부장의 시야에 들어가는 위치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머그잔에서 피어오른 볶은 원두 향이 순식간에 사무실 내부를 감쌌다.
내리 화면을 노려보고 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초조함에 가슴이 일렁여 현우는 경직된 상태로 본부장을 지켜보았다. 베타인지라 페로몬을 느낄 수 없는데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낮게 한숨을 쉰 본부장이 머그잔 손잡이를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뒤이어 그는 상당히 기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잘그락, 다부진 손목을 감싼 시계가 잡음과 함께 풀어졌다. 해외 고가 명품 브랜드의 것으로 잘 알려진 물건이 성의 없이 책상에 떨어지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현우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멍하니 본부장을 구경했다.
다음으로 본부장은 자신의 손목 안쪽을 자연스럽게 머그잔 표면에 갖다 댔다. 마치 커피가 뜨거워 입을 델까, 미리 온도를 재 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보통 다 큰 어른이 저렇게 신중하게 컵을 만져 보지는 않을 텐데.
얼떨떨한 심경으로 본부장을 지켜보던 현우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아이를 키우는 누나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래, 저거 애한테 분유 타서 먹이기 전에…….
“……아.”
별안간 본부장이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눈을 한 차례 질끈 감았다가 책상에 널브러진 시계를 다시 손목에 채웠다. 본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당황스레 그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곧 신경질적인 불똥이 튀었다.
“뭘 봐.”
“아, 네?”
잠시 느슨해졌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본부장은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보고서를 훑어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도네시아 그린 스틸 건 책임자 누구야.”
“그, 아, R&D 2팀 오상현 부장님이십니다.”
“지금 올라오라 해. 보고서 쓴 놈이랑 같이.”
표정만 봐서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로 화가 난 건지 점치기 어려웠다. 다만 말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개발팀에 폭탄이 떨어진 건 자명했다.
현우는 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구석의 내선 전화를 집어 들었다.
“비서실 남현우입니다. 오상현 부장님 되십니까?”
[맞는데, 무슨 일입니까?]
“본부장님께서 지금 본부장실로 오라고 하십니다. 사업 보고서 작성한 직원도 같이요.”
[본부장님이……? 하이고, 그 양반 출근하셨어?]
이런 식으로 부른 게 처음이 아니었는지, 목소리에서 익숙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뒤따라오는 짙은 한숨에서 본부장실에 불려 온 직원들의 말로를 알 수 있었다. 오상현 부장은 괴로워하면서도 올라가겠다는 답을 전해 왔다.
통화가 마무리되었을 때, 본부장은 서류철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그길로 날 선 기운을 풍기며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 2팀 오상현 부장과 부하 직원이 사색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뒤에 선 직원은 뭐라도 잘못 먹은 사람처럼 낯빛이 창백했다. 두 사람은 포승줄에 묶인 죄인처럼 비척비척 회의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현우는 우거지상의 직원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문 너머에서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걸음을 물렸다. 일상의 평온에 대파란을 맞았을 무리에게 심심찮은 애도를 표하며.
우편물을 처리하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전부 검토하니 사십 분 정도가 지난 상태였다. 커피라도 한 잔 타 올까 하여 비서실을 나섰을 무렵 맞은편의 본부장실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이제야 피드백이 끝난 모양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의 직원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리가 없는 유령이 되어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중 오 부장은 현우와 눈이 마주치고 서글픈 눈인사를 건넸다.
현우는 조금 고개를 숙여 호응하고는 본부장실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혼쭐이 나느라 경황이 없었던 걸까,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자잘한 실수가 본부장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철제 문고리를 잡았다.
미세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응, 밥은?”
잠시 현우는 본부장이 정말 안에 혼자 있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기실 한 시간도 전에 들은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음성 그 자체가 아니라 어조 때문이었다. 지금의 본부장은 놀라울 정도로 유한 억양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아가 말고 너.”
아가……. 라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점차 이 대화를 엿들어도 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퍼졌다. 하지만 딱 그 갑절만큼 용솟음치는 호기심을 억누르기 버거웠다. 현우는 침을 꼴딱 삼키고 개미 손톱만 한 문틈 사이에 눈을 가져다 댔다.
자세히 보니 본부장은 통화 중이었다.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친밀한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혼자 있어서 허전해요? 조금 이따가 볼 건데, 왜.”
그의 얼굴을 살핀 현우는 이제껏 1.0 아래로 떨어져 본 적 없는 자신의 시력을 의심했다.
그 본부장이 웃고 있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기에 유심히 지켜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으나, 확실히 입꼬리가 가느다란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가 있었다.
“어떡할까. 등에 이고 다닐 수도 없고.”
저게 방금 남을 쥐 잡듯이 잡고 온 작자 입에서 나올 말이 맞나.
역시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이 많았다. 적어도 이 건은 엿듣지 말라는 본능의 경고를 듣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현우는 난생처음 목격하는 본부장의 미소를 뒤로 하고 기이한 심경으로 뒷걸음질 쳤다.
인사에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하더니 분유 타던 버릇이 남아 커피 온도를 체크하고, 오랜만에 출근해서 부하 직원을 차례로 조지고는 몇 시간 전에 보았을 배우자의 안부를 다정하게 묻는다.
이제 사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의문을 되뇐다.
주태승 본부장은 어떤 사람인가.
***
큰사랑병원 산부인과.
지난 검진 이후로 병원에 방문하는 건 한 달 만이었다. 남성 오메가의 경우 자궁이 연약하기에 출산 이후에 주기적으로 예후를 살펴야만 했다. 다소 번거로웠으나 검진만큼은 칼같이 동행하려 드는 태승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배에 젤을 바르는 마냥 생경했던 감촉은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 기계가 뭉근하게 뱃가죽 위를 아우르고 있으면 잠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슬슬 겨울이를 만난 지 다섯 달이 다 되어 가니 검진도 곧 끝나지 않을까, 침대에 모로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검사를 마치고, 진서는 차가운 저녁 공기의 내음을 풍기는 배우자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섰다.
“진서 씨, 검사받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누워 있기만 했는데.”
“음……. 결과는,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평소와 사뭇 다르게 의사의 어투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서는 의아한 얼굴로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고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가 말을 고르는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요. 유산 흔적이 있었다고요.”
“아……. 네.”
유산 흔적이 있다.
처음 겨울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애초에 제게 일어난 일들 전부가 믿기 어려웠으나, 유산한 흔적이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이는 주태승과 여진서가 만들었던 뒤틀린 관계가 남긴 상흔은 아닐까 싶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유독 그 흔적만 함께 왔다는 게 마치 전생의 인연과 지금을 연결하는 실처럼 느껴졌다.
복에 겨워 잠시 잊었던 과거의 날들이 아득하게 뇌리 한복판을 스쳐 갔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도로, 넋을 잃은 채 하염없이 어딘가를 향해 내딛는 걸음, 한 차례 번쩍 명멸했다가 끝내 다시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촛불처럼 꺼진 시야.
지금은 주태승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 다만 감정은 연필로 휘갈겨 쓴 낙서가 아니었기에 남은 상처와 절망감을 깨끗이 지워 낼 수는 없었다. 진서는 저도 모르게 경련하는 손가락을 오므려 숨기려 들었다.
그러나 불현듯, 유약하게 쥔 주먹을 감싸 오는 이가 있었다.
진서는 강한 악력에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 주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도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아름다운 얼굴은 그림 속 정경처럼 완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저를 옥죈 손은 달랐다. 심지어 손아귀는 점점 조이는 힘을 더해 갔다. 여진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푸른 핏줄이 다 도드라지도록, 그렇게.
태승이 다른 쪽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진서는 서느렇게 다물린 입매를 보며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세상과 이별하던 그날은 어쩌면 이 사람에게도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푹 파인 자국에서 때때로 흐르는 고름 때문에 불안으로 점철된 밤을 지새웠을지도, 그리 보낸 밤들이 이 순간 손을 붙드는 힘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을지도.
진서는 제 손등을 덮은 손가락 사이를 벌려 조심스럽게 깍지를 꼈다. 서로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가 비스듬히 맞닿았다. 서약의 증표를 나누어 끼기 전부터 결심했었다. 속에 멍든 생채기를 안고, 그 이상의 행복을 기대하며 그와 살아가자고.
손을 마주 잡자 살갗을 옥죈 힘이 서서히 풀어졌다. 태승은 손가락이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엮은 채 책상 언저리로 눈길을 떨어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사가 머뭇머뭇 말을 이어 나갔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 쓰신 약이,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쪽에서도 미리 말씀을 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남성 오메가가 여성에 비해 자궁이 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진서 씨, 말씀드리기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만…….”
그녀는 내놓을 표현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진서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의사의 입이 열리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이제 더는 아이를 갖기 어렵습니다. 아기집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문득 불에 달군 무게추를 삼켜 버린 듯한 작열감이 내장에 퍼졌다. 진서는 얼얼한 흉부를 달래기 위해 연신 꿀떡꿀떡 침을 넘겼다. 이성적으로, 긍정적으로 사고를 돌리고자 뇌가 수없이 달음박질쳤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겨울이를 잃을 뻔한 상황에서 고작 아이가 베타로 태어나는 것만으로 부작용이 끝나는 건 지나치게 운이 좋았다. 분명히 신께 기도하기도 했었다. 제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겨울이는 무사하게 해 달라며, 절실히.
어쩌면 신이 기도를 들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겨울이의 목숨과 불임의 경중을 따진다면 압도적으로 전자가 무거웠다. 이 정도 후유증이라면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야, 애써 자신을 타이르며 진서는 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사가 입을 열 때부터 배우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밤바다와 같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진서의 얼굴을 느릿하게 아울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다만 바라만 본다. 진서는 미풍조차 일지 않는 그의 고요를 사랑했다. 기대고 싶었다. 엮인 손가락에 힘을 싣자 그 또한 단단한 온기를 전해 왔다.
두 사람을 걱정스러운 낯으로 살피던 의사가 다시금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수년에 걸쳐서 페로몬이 점점 옅어질 겁니다. 우성인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는 있으나 예외는 없어요. 히트사이클도 빈도가 많이 줄어들 거고요.”
“페로몬, 이요?”
“이제 알파를 끌어당길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그렇구나…….”
더딘 대답을 흘려보낸 진서가 멀거니 눈을 깜빡거렸다. 페로몬이 옅어지고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좀처럼 변화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가위로 종이를 잘라 내는 것도 아니고, 깔끔하게 아이만 가지지 못하게 되는 편이 더 이상했다. 이에 부가적인 증후가 수반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몸이 오메가이기를 포기하는 과정 같았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오메가는 베타나 다를 바 없었으므로 아주 틀린 추정은 아닐 것이다. 여러모로 징그러운 형질이었다.
일단 머리로는 납득했다. 다만 가슴으로 받아들여 순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의식을 휘감았다. 이 형질을 그토록 불편해했었는데, 막상 기능을 잃어 간다고 생각하니 신체 일부를 못 쓰게 된 듯한 기이한 상실감이 나돌았다.
“다른 부작용은?”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불안하면 내원하셔서 종합 검진 받아 보시는 방향도 있어요. 지금이 출산하고 5개월 되셨으니까, 한 달 정도 후가 좋겠네요.”
“그럼 예약 잡아 놔요. 한 달 후로.”
허공에 넋을 빼앗긴 배우자를 두고 태승은 의사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가 예약을 마칠 때도, 대신 겉옷을 추슬러 단추를 채워 줄 때까지도 진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갈 채비를 끝낸 태승이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 있는 진서를 일으켰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의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진서 씨.”
“…….”
“다른 곳은 크게 문제없을 거니까요. 아이도, 진서 씨도 건강해서 저는 너무 기쁘고 다행스러워요.”
옳은 소리였다. 분명히 그런데 침전하는 기분은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진서는 태승의 옷소매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집으로 돌아와서도 끈덕진 진흙처럼 달라붙은 우울감은 여전했다. 진서는 활기를 잃어 처지는 걸음으로 겨울의 방에 들어섰다. 아기 침대에 누운 천사는 백설기 같은 뽀얀 뺨을 자랑하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와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페로몬쯤은 잃어도 좋다. 그까짓 게 뭐라고,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억지로 낙관적인 최면을 걸자 지하에 처박혀 있던 컨디션이 그럭저럭 바닥까지는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웃는 시늉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했다.
애석하게도 저녁 식사는 생각이 없었다. 고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으나 태승은 아무런 타박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덩달아 식사를 거른 탓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라도 먹으라고 몇 번이고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기분 안 좋다는 내색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넘어가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숟가락질을 해야 그나마 덜 걱정할 텐데.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언제쯤 애새끼 티를 벗을까,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여린 묘목이 소나무가 되는 과정은 이토록 고역이다. 진서는 침실에 놓인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어두컴컴해지니 세상에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의식은 더욱 깊은 땅굴을 파냈다. 온갖 잡다하고 해로운 상념들이 우두커니 선 몸뚱어리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주태승과 만나게 된 계기부터 이어진 과정까지, 모든 것을 이끈 건 오메가라는 형질이었다. 물론 그 끝은 온전히 서로의 존재를 원하는 사랑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자꾸만 심란해졌다. 페로몬이 옅어지더라도 그는 지금처럼 이 몸뚱어리를 원할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마음이 식으면 어떡하지.
진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태승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기어이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에 대한 마음이 턱없이 깊어진 지금은 절대 이전과 같은 냉대를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나 자존감이 낮았던가. 태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지레 겁을 먹는 꼴이 한심했다. 그를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진다. 감당하기 어렵도록 만연하는 애정은 사람을 겁쟁이에 바보로 만든다.
한참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져 버둥대고 있을 무렵,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서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눈만 빼꼼 내밀어 불청객을 확인했다.
“무슨 불을 다 끄고 있어.”
방금 씻고 나온 듯,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걸친 태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말에 진서는 슬그머니 팔을 들어 사이드 테이블 위의 스탠드를 켰다. 곧 침실 전체가 노을빛을 본뜬 조명으로 은은하게 물들었다.
의기소침한 심정을 그가 달래 주었으면 했으나 침체된 이유까지 하나하나 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승은 무심한 얼굴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몸까지 돌린 그와 시선을 마주 보지 않고자 진서는 일부러 눈을 내리떴다.
“밥 왜 안 먹었어요.”
태승에게서 제비꽃 향을 닮은 냄새가 풍겨 왔다. 틀림없이 같은 욕실 용품을 쓸 터인데 그가 지닌 향은 보다 짙고 고혹적인 느낌이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섞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코를 두어 번 킁킁대던 진서가 웅얼거렸다.
“주태승 씨는 왜 안 먹었는데요. 배고프잖아요.”
“…….”
“덩치 크니까 많이 먹어야 할 거 아니에요, 오늘 일도 하고 왔고. 지금이라도 냉장고에 있는 간식거리 꺼내서 먹는 게…….”
“여진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회피성으로 아무렇게나 주절대는 건 나쁜 버릇이었다. 그리고 태승은 이를 꿰뚫고 있었다. 진서는 눈알을 굴려 그의 눈치를 보고는 입술을 어물어물 말아 물었다.
“저녁 왜 걸렀냐고 물어봤지, 내가.”
매일 몸을 부대끼며 살아도 저 서늘한 어조에는 기가 안 죽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의 타박이 더욱 까칠하게 와닿았다.
진서는 혼이 나 귀를 접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기색으로 바르작댔다. 좀스레 곱아 들어 간 발가락을 내려다보던 태승이 한층 무뎌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기 싫어요?”
“…….”
“계속 이러면 어떻게든 알아내야겠는데, 언제까지 굶을래.”
한 끼 굶었는데 참 징그럽게도 뭐라고 한다. 누가 보면 아사하기 직전까지 단식 투쟁이라도 한 줄 알겠다. 진서는 부둥켜안은 쿠션을 내려놓고 태승에게로 어깨를 바짝 붙이며 대답했다.
“내일부터는 먹을게요.”
“왜 그러는지는 비밀이고?”
이번에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승이 부가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에 침실에는 잠잠한 적막이 휘장과 같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내쉬는 작은 숨소리가 대화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웠다.
새삼 주태승이라는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집요하게 캐묻다가 이 자리에서 담판을 짓고야 말았을 터다. 타인의 기분을 생각해서 입을 다물어 준다는 배려 넘치는 행동을 그에게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진서는 태승이 자아내는 제비꽃 향을 들이쉬고자 두어 번 코를 킁킁거렸다. 이미 팔이 닿고 있는데도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여 소파 쿠션에 생긴 주름 어딘가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옆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태승은 늘 그렇듯, 녹음이 짙푸른 숲속에 고요히 드리운 호수처럼 진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서는 잠자코 나직한 눈빛을 받아 내다가 그의 허벅지를 짚고 말했다.
“안아 주세요.”
별안간 당돌한 요구를 들은 태승이 조용히 진서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이리 와요.”
그 말에 진서는 곧장 태승의 허벅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수려하게 뻗은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담뿍 파묻으니 상대 또한 등을 빈틈없이 감싸 안아 주었다. 두껍지 않은 실내복 아래 자리 잡은 근육이 은근히 존재감을 전해 왔다.
이제 애까지 있는 아저씨가 됐으면서 몸도 좋다. 진서는 태승의 쇄골에 머리를 기댄 채 단단한 가슴팍 언저리를 손끝으로 소심하게 쓸어내렸다.
“툴툴댔다가, 치대다가……. 하여간 제멋대로네.”
“뭐가요.”
“들었다 놨다 하면 재밌어?”
문장 자체는 나무라는 내용이었으나 이를 전하는 목소리에선 안온한 다정이 묻어 나왔다. 그의 난기를 마주할 때면 톡톡 터지는 어리광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제 마음이에요.”
“…….”
“머리 쓰다듬어 줘요.”
곧 크고 단정한 손이 고동빛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엄지가 이마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며 진서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미에게 그루밍을 받는 고양이가 이런 심정이려나 싶다. 역시 스킨십은 애정을 체감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였다.
얼마간 뒷머리를 토닥이고, 귓불이나 뺨 따위를 간질이던 태승이 살며시 손을 거두었다.
“또 뭐 해 줄까.”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체온이, 우울을 씻어 낼 달콤한 감주가 부족했다. 진서는 애가 타는 눈빛으로 태승을 바라보다가 반드러운 뺨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일부러 쪽, 소리가 나도록 맞춘 입술을 떼어 내고 빤히 응시하자 태승은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사람 부리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답을 듣기 위해 던지는 물음이 아닌 건 진서 또한 알고 있었다. 뒤이어 가느다란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며 태승은 제 입술을 세게 겹쳐 눌러 왔다. 호흡이 통째로 그에게 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질나는 입맞춤 따위보다 농밀한 결합이 잇따랐다. 진서는 흩어지는 신음과 함께 입을 벌렸고, 태승은 그 틈을 능숙히 파고들었다. 혀끝을 세워 예민한 입천장의 주름을 훑고는 젖은 살덩이를 빨아 낸다. 흐른 타액을 삼키는 목젖이 꿈틀거렸다.
“흐, 응…….”
혀뿌리가 조여드는 와중에 허리춤에 타인의 손길이 전해졌다. 진서는 맨살을 더듬는 태승의 손에 제 것을 얹었다가 그를 꽉 부둥켜안았다.
불이 붙은 심지는 순식간에 타들어 일렁이는 정염을 수놓았다. 숨이 차 잠시 입술을 떼어 내려 들어도 태승은 고개를 틀어 집요하게 혀를 쫓았다. 옷자락을 비집고 들어온 손은 어느새 등골을 매만지고 있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이 자극당하는 바람에 뒤통수까지 소름이 끼쳤다. 좁은 공간에 들어찬 두 개의 혀가 버거워 진서는 힘겹게 숨을 할딱였다. 호흡이 새는 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잡음이 한데 섞여 침실을 어지러이 유영했다.
살점을 속속들이 발라 먹을 듯이 입 안을 헤집던 태승이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은실처럼 늘어진 타액을 닦아 낼 새도 없이 그는 진서의 얼굴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겼다. 올라간 입꼬리와 턱 근처에 혀가 습한 궤적을 그려 냈다.
“읏, 하아.”
몽롱하게 입술을 벌린 진서가 연달아 가쁜 숨을 토해 냈다. 태승은 이를 세워 연약한 쇄골을 잘근거리다가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곧 더 아래로 내려갈까 싶었는데 태승은 좀처럼 목덜미를 벗어나려 들지 않았다. 남의 살냄새를 이토록 정성 들여 맡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윽.”
기진맥진하여 숨을 고르던 진서가 별안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페로몬은 주로 체취가 짙게 묻어 나오는 부위에 고이곤 했다. 아마 주태승은 흘러나온 페로몬을 열렬히 음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그가 정열적으로 페로몬을 탐하는 모습이 마냥 부끄럽기만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다소 상황이 달랐다. 가슴에서 슬금슬금 머리를 내미는 불안에 진서는 심란하게 몸을 굳혔다.
이제 그가 좋아하는 페로몬은 점차 옅어진다. 세월이 더 오래 지나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숨결을 독점할 수 있는 가슴 떨리는 시간도, 목덜미에 쏟아지는 따스한 애정을 맛보는 빈도도 줄어들지도. 그러다 보면…….
속으로 배우자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을 태승은 평온하게 진서를 고쳐 안았다. 머지않아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여진서 씨.”
“네.”
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진서는 태승이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그에게 매달려 어깨에 턱을 기댔다. 기분이 좋은 듯 그는 다정다감하고 느긋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 저녁에 나갈까요? 둘이서만.”
“겨울이는 어쩌고요?”
“시터 있잖아.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진서의 귓불에 입을 맞춘 태승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내가 너 마음껏 예뻐하고 싶어서 그래.”
사랑이란 어찌나 탐욕스러운 감정인지, 이토록 손에 넘치도록 쥐고 있음에도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까 두려워 몸을 바짝 움츠리게 만든다. 분명 주태승이 주는 애정은 부족하지 않았다. 진서는 그 충만함 속에서 불안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끝까지 얼굴은 너른 어깨에 파묻은 채, 동그란 머리통이 삐그덕삐그덕 위아래로 움직였다. 소심한 긍정의 표시를 읽어 낸 태승은 진서를 다시 한번 느른히 당겨 안았다.
***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한 태승은 오후 6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진서는 어제보다 나아진 기분으로 그를 맞았다. 좌우지간 단둘이 외출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으므로 미지근한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몸은 들떴다.
“겨울이,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
진서와 태승에게 차례로 입맞춤을 받은 겨울이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부모 중 어느 쪽도 잘 웃지 않았는데 이런 점은 누굴 닮은 걸까 싶었다. 둥글게 차오른 뺨이 마치 부푼 찹쌀떡 같아, 진서는 참지 못하고 연거푸 딸의 볼따구니를 쪽쪽 빨아 댔다.
“그러다 내일 아침에 가겠네요.”
“예쁜 걸 어떡해요.”
“매일 봐도 그렇게 좋아요?”
날아드는 핀잔에 진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겨울과 떨어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안는 태승의 품에 기대며 그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그럼요, 주태승 씨는 모르겠지만.”
“내가 왜 몰라.”
삐빅, 스마트 키의 버튼이 눌리자 주차된 차가 번뜩이며 위치를 알렸다. 가슴팍에 달라붙은 진서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태승이 느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매일 너 보잖아.”
제법 낯 뜨거운 소리를 했음에도 태승의 얼굴색은 평소와 한점 다르지 않았다. 하여간 철면피라서 참 좋겠다. 진서는 은근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고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운전대를 잡은 태승이 인도한 곳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급 호텔이었다. 이전에는 LS 그룹 산하의 호텔만 가 봤었기에 지나가다가 몇 번 구경한 것을 제외하곤 진서에게는 생소한 장소였다.
얼마일지 모를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샹들리에 아래를 지나, 두 사람은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중에서도 밤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룸이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테이블에 깔린 식탁보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을 자랑하며 손님을 맞았다.
겉옷을 벗고 앉은 진서는 물끄러미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여러 건물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서글픈 야근으로 만들어지는 풍경이라,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찬 도시의 밤을 마냥 아름답다고 여기기도 미안한 일이다.
“창밖에 재밌는 거 있어요?”
“아뇨, 그냥요.”
“그럼 나한테도 얼굴 좀 보여 주지 그래요.”
하긴 사람을 앞에 두고 창문만 보고 있는 건 실례였다. 진서는 태승이 있는 쪽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채 안면 근육을 씰룩거렸다. 태승은 그런 배우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기분 괜찮았어요? 뭐 하고 지냈어.”
“쉬었어요, 겨울이랑 놀고. 근데 겨울이 볼수록 주태승 씨랑 닮았어요.”
“나랑?”
“머리카락 색깔도 똑같고, 눈동자도 그렇고. 뭔가 분위기 같은 게……. 아, 그리고 겨울이가 물고기 나오는 애니메이션 좋아해요. 나중에 아가 크면 아쿠아리움도 가요.”
아까 물고기가 나와서 춤을 추는 프로그램을 보고 손뼉을 치던 겨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애니메이션에 비해 유독 격한 반응을 보여 기억에 남았다.
“아쿠아리움 가고 싶어요?”
“겨울이한테 물고기 보여 주고 싶어서요.”
진서의 말을 들은 태승이 미간을 살짝 구기고 물었다.
“넌 뭐 했어. 아가 말고.”
“저요? 전 별로, 똑같아요.”
“왜 그렇게 빨리 부모가 되려고 그래요. 난 여진서 이야기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겨울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진서는 멀거니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제 입가를 더듬거렸다. 태승의 어조에서 언뜻 서운함이 묻어 나오는 것이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본인이 만들었으면서.
“근데 부모 맞으니까 어쩔 수…….”
문장이 맺어지기 전,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말허리를 끊었다. 곧 룸 너머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미닫이문이 열리고, 번듯한 유니폼 차림의 서버가 카트와 함께 룸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서 딸려 나온 작은 접시 중 하나가 태승의 앞에 놓였다.
“아뮤즈 부쉬로 브리오쉬 스틱에 올린 캐비어 준비해 드렸습니다. 샤프란 소스와 함께 드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생소한 언어들을 이해해 보려 애쓰며 진서는 서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버가 세팅을 위해 허리를 굽히자, 문득 음식이 아닌 기묘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무의식중에 콧방울이 두어 번 움찔거렸다.
몸이 가까워짐에 따라 향취는 더욱 짙어졌다. 아니, 향취라기보다는 어떠한 기운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로 줄곧 우성 오메가로 살아온 여진서는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페로몬이다.
서버는 아무래도 오메가인 모양이었다. 아주 짙은 농도는 아니었으나 그가 페로몬을 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와닿았다. 진서는 눈동자를 굴려 서버를 훑어보다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왜 제대로 갈무리 안 하는 거지.
물론 평소라면 남이 페로몬을 흩뿌리든, 잔뜩 쏟아 범람을 시키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다. 하나 지금은 시기가 나빴다. 하필이면 페로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질투심인지, 뭔지 모를 뾰족한 감정이 식도를 타고 부글부글 올라왔다.
악의 없는 서버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진서는 입을 꾹 다물고 울화를 삭이려 애썼다. 툭툭 튀는 이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체 뭐에 심통이 난 것이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혼자 예민 떠는 꼴이 같잖기도 했다.
일을 마친 서버는 방긋 웃어 보이고 룸을 나섰다. 태승은 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 있었기에 그 미소를 본 건 진서뿐이었다.
걸쩍지근한 표정의 진서가 포크로 브리오쉬를 갉작이기만 하자, 그를 지켜보던 태승이 말문을 열었다.
“왜 안 먹고. 이거 싫어요?”
“좀 징그럽게 생겨서요.”
“그럼 다른 거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먹을게요.”
사실 무얼 가져오든 심란한 기분으로 맛있게 먹기는 어려울 터다. 진서는 포크로 브리오쉬 스틱을 반으로 토막 내곤 마지못해 입에 넣었다. 흔히 먹기 힘든 고급 식재료임에도 입 안에는 텁텁하고 비린 맛만이 감돌았다.
애석하게도 진서는 속내를 숨기는 데 능통하지 않았다. 의기소침한 낯을 읽은 태승은 곧장 서버를 불렀다.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또 안으로 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배우자가 이 옹졸한 마음을 알아채 줄 리 없었다.
재차 불려 와 사정을 들은 서버가 고개를 푹 숙여 보이고 접시를 카트에 넣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메뉴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아뮤즈 부쉬는 생략해 주세요.”
“그쪽이 편하실까요?”
이 사람의 페로몬을 주태승도 느끼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불안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어떻게든 이 끈적한 오물 같은 감정을 떨쳐 내고 싶었다. 진서는 테이블에 놓인 냅킨을 손톱으로 짓누르며 말했다.
“와인 지금 준비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태승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돌았다. 그가 진서의 뺨을 빤히 응시한 채 물었다.
“갑자기 술을 마셔?”
“먹고 싶어서요.”
몇 가지 요구 사항을 받은 서버가 조용히 룸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걸음이 남긴 궤적을 따라 페로몬이 둥실둥실 허공을 떠도는 듯했다. 같은 오메가에게도 느껴질 정도라면 우성 알파인 태승에게는 보다 확연히 전해지고 있으리라.
닫힌 문을 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태승이 먼저 질문을 던져 왔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은 왜 찾아요.”
“주태승 씨는 모르겠지만 살다 보면 술 한 잔에 모든 걱정 털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에요.”
“누가 와인을 걱정 털려고 먹습니까?”
“제 마음이에요.”
하, 태승이 황당하다는 듯 자그마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냅킨 위에 놓인 진서의 손가락을 잡고 말했다.
“술 마실 때마다 다시는 안 먹겠다고 후회하더니.”
“저 원래 제가 한 말 별로 안 지켜요.”
“…….”
“그, 그래서 주태승 씨도 다시 만난 거잖아요.”
“이게 입만 살아 가지고.”
처음엔 포개진 정도였던 손가락에 힘이 실려 그대로 마디 사이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진서는 깍지를 껴 오는 태승의 손등에 어영부영 제 손가락을 얹었다.
“취해서 잔다고 하기만 해.”
“왜, 요?”
“편히 재우려고 방 잡아 놓은 거 아니니까.”
말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진서의 볼에 옅은 분홍빛 홍조가 서서히 번져 갔다.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상승과 낙하를 반복한다. 눈앞의 배우자 때문에, 또 그에게 품은 연심 때문에.
똑똑.
한 차례 상승했으니 이제 곤두박질칠 때가 되었다. 기분이 나아지기가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구멍을 찔렀다. 신경을 건드리는 페로몬이 벌써부터 벽을 통과해 방에 퍼지는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윗니가 아랫입술을 쥐어뜯었다. 특별한 저녁에 대체 혼자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조바심 때문에 얼마나 속이 좁아진 건지, 서버와 주태승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다.
“머쉬룸 요거트 샐러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채소와 버섯, 컬리플라워에 리코타 치즈를 곁들였습니다.”
“…….”
“말씀 주신 와인 오픈하겠습니다.”
서버가 와인 라벨을 내보이며 간략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물론 와인의 복잡한 이름이나 원산지, 맛 따위는 진서에게 한 마디조차 흥미를 끄는 부분이 없었다.
곧 검붉은 포도를 연상시키는 액체가 잔의 수평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익은 과실의 새콤한 향이 코끝으로 은은하게 올라왔다. 진서는 가만히 와인 향을 맡다가 서버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의 페로몬은 와인과 닮았다.
“편안한 시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와인과 비슷한 페로몬이면 사람을 홀리게 만들기도 쉬우려나, 진서가 아무래도 좋을 잡념에 의식을 빼앗긴 사이에 서버는 카트를 가지고 룸을 떠났다.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와인을 마시려고 입을 대자, 잠자코 진서를 지켜 보고 있던 태승이 손으로 글라스 테두리를 막아섰다. 대뜸 입구가 막힌 잔을 본 진서가 방해꾼에게 아리송한 눈빛을 보냈다.
“샐러드 먼저 먹고. 빈속이잖아.”
“괜찮아요.”
“고주망태 되는 게 오늘 목표입니까? 섹스 하다가 오바이트하기 싫으면 말 듣지.”
“안 그래요.”
“뭘 안 그래, 내가 너 토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보기만 했나, 언젠가 뒤치다꺼리까지 시키고 침대에서 맨몸으로 정신이 든 적도 있었다. 상기되는 부끄러운 기억에 진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재빨리 샐러드를 잔뜩 입에 집어넣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채소를 몇 번 씹어 삼키니 주태승도 더는 음주를 막지 않았다. 진서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와인 잔을 기울여 포도 내음이 올라오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와인의 시큼한 맛과 더불어 알코올이 가진 열감이 위장을 묵직하게 휘저었다.
오랜만에 마셨더니 취기가 더 빨리 오르는 듯했다. 누가 비싼 술 아니랄까 봐 목 넘김이 부드러워 자꾸만 삼키게 되었다. 잔을 약간 채운 와인이 모자라 보여, 예절과는 상관없이 아예 병을 들고 가득 채워 넣기까지 했다.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진서를 구경하던 태승이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난리도 아니네.”
“……하아.”
“어제부터 애새끼처럼 말도 안 듣고.”
조금 걱정을 끼치기는 했어도 말이 심하지 않나. 눈썹을 일그러뜨린 진서가 와인을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흘려보냈다. 술이 들어가자 심드렁한 얼굴의 배우자에게 성의껏 투덜거릴 용기가 샘솟았다.
“애새끼……. 애새끼 홀랑 벗겨 먹으려고 방 잡았으면서.”
“주정뱅이 벗겨 먹는 건 예정에 없었는데.”
“안 취했는데요. 와인 한 잔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답 대신 차가운 눈빛이 진서의 뺨에 내려앉았다. 정신이 몽롱해져 가는 와중에도 저 시선에는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진서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며 샐러드를 입 안으로 와구와구 밀어 넣었다.
태승은 진서를 따라 와인 잔을 기울인 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갓 발견한 희귀종을 분석하려는 연구자처럼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속이 상했을까.”
“…….”
“밥은 굶고,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은 허겁지겁 마셔 대고. 난 여진서 씨가 말 안 해 주면 몰라요. 우린 많이 다르잖아.”
언뜻 문장을 전하는 어조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차분하지만 어딘가 그늘이 진 응달 같은 얼굴로 태승이 속삭였다.
“만약에 나 애태우려는 작정이면 성공했으니까 그만해요.”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당혹스러운 심정에 진서가 눈동자를 굴려 태승의 안색을 살폈다. 당신을 애태우려는 게 아니라 내가 애가 타서 그랬다고, 사소하고 자존심 상하는 이유라서 입 밖으로 내기 싫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조금만 솔직하면 되는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얄궂은 타이밍에 노크 소리가 퍼지고 말았다.
“메인 요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내 심기를 건드리던 서버의 페로몬이 단숨에 코끝을 치고 올라왔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한데 섞여 덩어리졌다.
쳐다보지 마. 말 섞지 마. 페로몬 느끼지 마. 주태승은 나만, 내 것만 들이마셔야 하는데.
술기운이 올라 울긋불긋한 뺨이 일그러졌다. 서버가 룸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진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 반동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테이블에서 참사가 벌어졌다.
챙강-.
와인 잔이 넘어짐에 따라 검붉은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뻗어 나간 줄기는 그대로 진서의 옷자락까지 축축이 적시며 곤두박질쳤다. 겉옷을 벗고 있던 탓에 옷으로 스며든 찬 기운이 그대로 피부에 전해졌다.
의도치 않게 술 벼락을 맞은 진서가 멀거니 눈을 끔뻑거렸다. 벌어진 동공에 차례로 담긴 건 놀란 서버의 얼굴과 구겨진 태승의 미간이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몸에 술을 끼얹었는데 도리어 취기가 싹 달아나는 듯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봤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모처럼 만든 둘만의 저녁 시간을 감정 하나 똑바로 통제하지 못해서 제대로 망쳐 버리다니.
“괜찮으신가요? 지금 타올 준비하겠습니다.”
당혹스러운 기색의 서버가 급하게 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진서는 와인이 물들어 가는 자신의 하얀 셔츠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태승이 넘어진 잔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
당연히 표정은 좋지 않았다. 굳은 낯의 태승이 다가오자 초조함은 끝을 모르고 더욱 덩치를 부풀려 갔다. 이 상황을 만든 자신에 대한 혐오는 그림자처럼 엉겨 붙어 뒤를 따랐다.
“죄송, 해요.”
정떨어졌으면 어떡하지. 이제 페로몬도 점점 안 나온다고 하는데 이런 꼴사나운 짓만 해 대면 대체 어쩌자고. 스스로 생각해도 이틀간 보인 행동은 한심의 도가 지나쳤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냅킨을 집어 든 태승이 묵묵히 진서의 셔츠를 눌러 물기를 닦았다. 테이블에 여전히 와인이 고여 있었기에 태승 또한 애꿎은 소매를 더럽히고 말았다. 단추 아래 튄 작은 얼룩을 본 진서가 괴롭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주태승 씨 말이 맞아요. 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
“먼저 올라가서 쉬고 있을게요. 밥, 먹고 와요.”
진서가 옷자락 위에 올라온 태승의 손을 머뭇머뭇 떼어 내려 들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배우자가 뜻대로 따라 줄 리 없었다. 태승은 진서의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대답했다.
“여진서 씨 두고 밥이 잘도 넘어가겠습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옷도 젖고, 밥도…….”
“사과 들으려고 한 소리 아니야.”
와인을 머금은 냅킨을 테이블에 휙 던져 버린 태승이 진서를 가로질렀다. 곧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을 가져온 그가 그것을 어깨에 덮어 준 후 말했다.
“가서 샤워부터 해요.”
“……네.”
끈덕지게 피부에 감기는 옷자락만큼이나 마음에 질척한 오물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부디 물줄기가 피부를 통과해 뼛속까지 씻어 내 주기를 바라며 진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
객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을 때 태승은 자리에 없었다. 어디 통화라도 하러 간 건가, 기분이 안 좋아져서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진 건가. 그의 공백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오만가지 잡념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서늘하게 미끄러졌다. 진서는 떨리는 눈으로 호텔 방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적막 때문에 적잖이 큰 방이 더욱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리고 고독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외로움은 체온을 앗아 가는 감정이었다. 진서는 가운의 매듭을 정돈하고 침대 위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천이 살짝 젖어 들어갔으나 이불에 몸을 푹 파묻으니 그나마 안정감 비스름한 게 올라왔다.
홀로 남은 침묵의 공간에선 침구가 스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긴 속눈썹이 이불과 느릿하게 마찰했다. 조금 기다려도 여전히 객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은 없었다.
진짜 답도 없다.
애도 아니고, 앞으로 다른 오메가 나타날 때마다 이럴 건가. 하물며 간섭하지 못하는 주태승의 시간에는 어떻게 하려고. 상상 속의 오메가를 만들어 대상 없는 투기심으로 속을 끓이고 있으려나.
파고들수록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져 진서는 애꿎은 이불을 구기적거렸다. 이 와중에 자리를 비운 태승이 야속하기도 했다.
사실은 두렵다. 좋든 싫든,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오메가로 살아왔는데 몸이 변해 간다는 것이. 또한 그로 인해 다른 무언가가 바뀌게 될까 봐.
미래에 아이를 낳을 수 없고 페로몬도 희미해진 내가 당신에게 여전히 매력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까.
내내 속에 콱 박혀 있던 마음의 자갈을 문장으로써 상기하니 가슴에서 아릿한 둔통이 퍼져 나갔다. 진서는 괜히 명치 언저리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한숨을 쉬었다. 나름 지쳤다고 팔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 더는 눈을 뜨고 버티기가 어려웠다. 결국 빛을 잃은 눈동자는 완전히 눈두덩 아래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찾아온 암흑에 기대 몸을 늘어뜨리며 진서는 조그맣게 자신을 원망했다.
주태승은 밤을 기대하고 있는데, 너는 대체 오늘 하루를 얼마나 망쳐 버릴 생각인 거냐고.
그리 까무룩 하게 눈을 붙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눈 떠.”
날 선 목소리에 진서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맑게 개는 일은 없었다. 투명한 이슬 같은 것이 연거푸 눈물샘에서 새어 나와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 우윽.”
말조차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진서는 그제야 제 입에 이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끝에서 비릿한 액체를 흘리며 제멋대로 안을 파고드는 건 다름 아닌 성기였다. 감당하지 못할 크기였기에 잔뜩 벌어진 턱이 빠져 버릴 듯 얼얼했다.
“내 얼굴 보고 입 똑바로 조여, 바로 목구멍까지 처넣기 전에.”
이미 헛구역질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진서는 입을 메운 기둥을 억지로 어물거리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닥친 상황은 단순했다. 침대에 누운 자신 위에 올라탄 태승이 발기한 성기를 과격하게 입에 물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형편에 놓이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귀두가 재차 입 안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왜?
경련하는 손으로 태승의 허벅지를 감싸 쥔 채 진서는 가까스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온기라곤 한 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 씹.”
오로지 성적인 욕구로만 점철된 저 눈빛과 표정을, 야성적인 짐승과도 같은 호흡을 진서는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치닫는 공포에 정수리까지 자잘한 소름이 끼쳐 올랐다. 태승은 궁지에 몰린 쥐 새끼처럼 굳어 버린 저를 빤히 응시하며 더운 숨을 토해 냈다.
입에 품은 성기가 막무가내로 속살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굳어 버린 몸으로 이를 세우지 않을 겨를 따위는 없었다. 태승은 윗니가 표피를 긁든, 혓바닥이 귀두를 밀어 내든 개의치 않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읍, 후, 우윽.”
돌덩이만큼 단단한 귀두가 목젖을 때릴 때마다 어깨가 들썩이고 타액이 입가를 더럽혔다. 진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손톱을 세워 태승의 피부를 긁어 대는 것뿐이었다.
상대가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공포,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이는 주태승과 처음 비참한 악연을 맺었을 때 느낀 감정들이었다. 실제로 당하고 있는 짓거리도 그 시절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두렵고 무서운데 재갈이 되어 입을 막은 성기로 인해 울음조차 마음껏 터트리지 못한다. 태승이 주는 애정에 익숙해진 무른 마음으론 이 냉대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성기를 받아 내는 입보다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심장이 갑절로 쓰라렸다.
하지 마, 아파, 무서워.
서러움이 몰아닥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러자 입천장 주름에 기둥을 문지르던 주태승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적당히 울어, 내가 지금 너 강간해?”
“흡, 흐윽, 으…….”
“네가 기어들어 왔잖아. 곱상하게 생겨서 좆 대가리 세우게 만들고.”
남을 가지고 놀았으면서, 도망가려 해도 어디에도 보내 주지 않았던 건 당신이면서. 그렇게 사람을 바짝 말려 억지로 옆에 붙들어 두었으면서.
청승맞게 울어 대는 꼴이 정확히 주태승의 심기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입을 찌르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따금 귀두가 목구멍을 파고들어 숨이 턱 막혀 오기도 했다. 진서는 손을 바들바들 떨어 대며 기침과 눈물을 동시에 쏟아 냈다.
“흐읍, 커흑, 윽.”
별안간 태승이 진서의 머리카락을 쥐고 성기를 깊게 밀어 넣었다. 목구멍까지 이물이 밀려드는 감각이 섬뜩했다. 귀두 끝에 맺힌 쿠퍼액이 식도를 넘어 그대로 위장에 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워 진서가 목구멍을 조이니 태승은 천천히 기둥을 담금질하며 열띤 숨을 내쉬었다.
“씨발, 구멍이란 구멍은 다…….”
울음 때문에 코가 막혀 어디로도 제대로 된 호흡을 하기 힘들었다. 그만하라고, 밖으로 낼 수 없는 애원 대신 손톱이 태승의 허벅지를 할퀴었다.
도구를 다루듯 그가 머리통을 당길 때마다 기둥 끝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뺨을 간질이는 까슬한 음모와 턱에 부딪히는 음낭 따위가 지금 얼마나 깊게 성기를 삼키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터무니없이 굵은 기둥에 마찰한 성대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진서의 목에서 껄떡껄떡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태승은 우악스럽게 성기를 빼냈다. 그가 위에 올라타 있었기에 진서는 불편한 자세로 기침을 해 대며 숨을 헐떡거렸다. 입가에 범벅이 되어 있던 타액이 뚝뚝 떨어져 시트에 맺혔다.
무정한 주태승은 찰나의 휴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진서의 무딘 가슴 위로 불쑥 올라와 살덩이를 그러모았다.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겁에 질린 진서는 아등바등 그의 팔을 밀어 내고자 바르작댔다.
“흑, 하아, 읏!”
태승이 엄지손톱으로 유두를 긁은 탓에 쇳소리를 닮은 신음이 샜다. 그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무표정이었지만 주변을 감싼 음습한 페로몬이 피부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대신 욕정을 전했다.
곧 자극을 받아 꼿꼿하게 선 돌기에 태승의 성기가 닿았다. 억지로 목구멍까지 귀두를 처박는 것보다 나았으나 이 또한 달갑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애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손길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흐으, 무서, 워요. 제발…….”
“어제는 이 악물고 한마디도 안 하더니, 오늘은 무섭다고 애원이야?”
“그런, 흣, 그런 적 없는, 아읏.”
“계속 울고불고해. 나무토막에 좆질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살을 주무르며 태승은 계속해서 기둥을 유두에 비벼 댔다. 귀두로부터 쿠퍼액이 묻어 불그스름한 선단이 번들거렸다. 그가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흘리고는 속삭였다.
“눈도 그렇게 뜨니까 꼭 처음 다리 벌릴 때 같네.”
“…….”
“고개 바짝 들어.”
자세를 일으킨 태승이 진서의 턱을 붙잡고 스스로 기둥을 쓸어내렸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집착적인 시선으로 진서를 내려다보다가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솟아오른 성기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말간 정액을 흩뿌렸다.
안 그래도 엉망이 된 낯에 정액까지 묻으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진서는 들릴 듯 말듯 숨을 고르며 바들바들 떨어 댔다. 어느 한 부위를 고르기 곤란할 만큼 온몸에서 경련이 멎질 않았다.
더욱 두려운 건, 한 차례 사정을 거치고도 사납게 발기한 성기가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주태승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뻔했다. 그 고통과 모멸감을 경험해서 알고 있기에 공포심은 더욱 빠르게 손을 내뻗쳐 목을 졸랐다.
“흐윽, 아……!”
상대가 패닉 상태에 이른 것과는 상관없이 태승은 마른 몸을 뒤집곤 뒷덜미를 강하게 짓눌렀다. 진서는 베개에 뺨을 묻은 채 뚝뚝 끊기는 울음을 토해 냈다.
창백한 엉덩이를 우악스레 주무른 후, 사이에 숨은 구멍을 강제로 벌리는 손길이 차례로 와닿았다. 진서의 허벅지가 얕게 후들거리자 태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섹스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했는데.”
“아, 흐으, 윽.”
“여기로 내 좆 받았잖아. 정액 냄새가 진동을 할 때까지 받아먹어 놓고, 이제 와서.”
강하게 수축하는 주름을 엄지로 문지르던 태승이 귀두 끝을 입구에 맞췄다. 그리고 그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성기를 단숨에 박아 넣었다.
“하, 아윽!”
전희 없는 삽입은 거의 생살을 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좁디좁은 내벽이 거대한 이물의 침입을 받아 내기 위해 힘겹게 움찔거렸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불러 오는 감각에 진서의 어깨에 오돌토돌한 소름이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깊게 들어와 있는데, 그간 항상 삽입은 아무리 흥분에 취해 있더라도 묵직한 둔통을 동반했었는데. 지금 오롯이 전해지는 건 쾌락뿐이라 진서는 당혹스러움에 숨을 들이켰다.
안을 파고들었던 귀두가 예민한 주름을 속속들이 건드리며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삽입에 가하는 힘이 강해 다리가 휘청거렸다.
“흐읏! 아, 읍, 으응.”
태승이 성기를 처박은 채로 귀두를 뭉근하게 돌리자 의식이 날아갈 듯한 쾌감이 솟구쳤다. 진서가 울먹이다가 시트를 부여잡으니 그는 또 세게 허리를 치받았다.
“이제 아프다고 죽는소리도 안 합니까?”
“윽, 후으, 아니, 야.”
“그저 좆이라면 다 좋다고, 남창 다 됐어.”
공기 중에 흩어지는 말이 불에 달군 쇠바늘이 되어 날아들었다.
남창. 그런 말을 듣던 시절도 있었다. 밤새 걸레짝이 될 때까지 시달리고 물건처럼 침대 위에 놓여, 살기 위해 마음을 죽이는 날들이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지도 모른 채 해진 넝마 같은 정신을 끌어안고 흘려보내던 시간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윤기 나는 여린 살갗이 돋아난 가슴으로는 무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문드러지는 듯한 설움은 신체적 고통 따위와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삼키는 눈물에서 짠맛이 났다. 진서는 성기를 받아 내느라 덜컹이며 울음 섞인 문장을 더듬더듬 내놓았다.
“흐, 윽, 그렇, 게 하지 마요.”
“…….”
“다정하게, 해 줘요. 아픈, 거 싫, 어요.”
할 수 있잖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런데 왜 이렇게 모질게 굴어. 왜 남의 가슴을 헤집어서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냐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니 겹겹이 쌓인 감정이 울컥 범람해 목이 메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로 베갯잇이 흥건하게 젖어 들어갔다.
연달아 엉덩이를 찔러 대던 움직임이 천천히 멈췄다. 적막이 내려앉은 방에 진서가 흐느끼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공백을 채웠다. 여전히 성기를 빼지는 않은 채, 태승이 별안간 진서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그렇게 진서는 타의로 인해 태승과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저 새까만 암흑과 같아 속을 알 수 없었다. 이 얼굴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한 기억이 동시에 살아나 진서는 아랫입술을 연약하게 떨었다.
“여진서 씨 눈에는, 내가 지금 당신 사랑해서 이러고 있는 걸로 보입니까?”
뺨을 꿰뚫을 정도로 집요하게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재차 물음을 던졌다.
“정말 그래요?”
“…….”
“귀엽네. 주제넘고.”
대답할 수 없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주태승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딴 질문도, 사람을 조롱할 용도로 귀엽다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는다.
이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주태승이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프고 버거웠다. 차라리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을 준 이가 휘두르는 칼날은 피할 수조차 없어 고스란히 쓰라림을 견뎌 내야 한다. 모진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진서는 태승이 좋아서 괴로웠다.
“흐윽, 아, 아읏!”
멈춰 있던 성기가 내벽 끝을 쾅, 치받았다. 진서는 눈물을 흘리며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뒤에서 흥분한 듯한 태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진서의 귓불과 뒷덜미 따위를 깨물다가 자신이 헤집고 있는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또 물어봐요.”
“흡, 윽, 하아, 뭐, 를.”
“널 사랑하냐고, 물어봐.”
참 끝도 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다. 진서는 그대로 땅 밑으로 가라앉아 침전하는 심정으로 성대를 울렸다.
“저, 흑, 읏, 사랑, 해요?”
대답이 들려오는 대신 구멍을 드나드는 성기에 더 속도가 실렸다. 비죽비죽 흐른 애액이 허벅지 안쪽까지 튀었다. 음낭과 부딪힌 볼기짝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눈물 젖은 탄성이 계속해서 진서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사랑하냐는 물음을 듣고 주태승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베개에 얼굴이 파묻혀 볼 수 없었다.
***
“흐, 악.”
밭은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진서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 반동으로 구슬 같은 눈물이 말간 옆얼굴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는 젖은 앞머리가 말라붙어 살갗을 찔렀다.
진서는 호흡을 가쁘게 할딱이며 다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정사의 열감과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체액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침대 위에 매달린 어슴푸레한 조명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낯선 풍경에 짧은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으나 진서는 이내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해 냈다.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저건 호텔 방의 불빛이었다.
다 꿈이었나.
현실로 일어난 일이 아님을 알았는데도 어깨가 미세한 경련을 반복했다. 허탈함이 밀려와 진서는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불안정한 심리를 내보이듯 눈가가 계속해서 젖어 들어갔다.
“……여진서 씨?”
별안간 목소리와 더불어 옆자리에 누워 있던 인영이 꿈틀거렸다. 낮게 갈라진 음성을 듣자 미약한 숨결마저 편히 내보낼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뺨 언저리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저 눈은 직전까지 저를 괴롭히고 몰아붙인 자가 지닌 것과 같은 빛깔이다.
“너 왜 울어.”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동요가 묻어 나오는 어조였다. 태승은 보다 또렷해진 목소리로 재차 물어 왔다.
“어디 아파?”
기다란 손이 뻗어 오는 게 보이자 진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으니 태승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아주 천천히 몸을 진서에게 가까이 붙였다. 겁에 질린 소동물한테로 다가서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나쁜 꿈 꿨어요?”
“…….”
“놀라지 말고. 그냥 안기만 할게요, 몸 계속 떨고 있잖아.”
이윽고 숨이 닿을 거리만큼 붙은 태승이 신중하게 진서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을 닮아 수려한 손가락이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을 훔쳐 냈다.
진서는 코끝을 감싸는 체취를 들이쉬며 야트막이 가슴을 들썩거렸다. 뺨에 스치는 온기와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이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안정되는 것 같으면서도 불안하다. 지금은 다른 걸 알지만 자꾸만 꿈에서 본 광경이 떠올라 가슴이 어지럽게 요동쳤다.
“왜 자꾸 울어. 나 옆에 있는데 지금도 무서워요?”
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제 가슴팍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맞닿은 태승의 것 같기도,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태승이 목젖이 일렁이도록 침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널 무섭게 만들어?”
무섭게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 허공을 관통했다. 진서는 무의식중에 태승의 옷자락을 은근히 거머쥐었다. 차분하지만 어딘가 노기가 서린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 아침까지 안고 있어도, 울음 그칠 때까지 키스해도 난 널 안심시켜 줄 수가 없나?”
점차 등을 조이는 힘이 강해졌다. 이토록 바투 붙어 있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달음박질하는 심장의 박동, 잔뜩 흐트러져 위태로운 숨소리.
“모자란 새끼라 할 줄 아는 거라곤 눈알 빨아 주는 것밖에 없는데. 내 품에서 덜덜 떠는 거 보니까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아.”
“…….”
“너 웃는 거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진서야.”
주태승이 날것의 진심을 드러내 올 때면 배 속이 아릿할 정도로 저며 온다. 저도 모르게 그의 표정을 만져 확인하고 싶어졌다.
진서는 천천히 손을 들어 태승의 얼굴에 얹었다. 고른 눈썹, 높은 콧대 따위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태승 씨.”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진서의 체온을 느끼던 태승이 살며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시선을 맞춘 채로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곧 무른 손바닥에 자잘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가벼운 접촉임에도 연달아 살갗을 누르는 입술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간지러워 손바닥을 움찔거리자 숨결은 젖은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늘 그렇듯, 태승은 세심하게 눈가에 맺힌 이슬을 혀로 훔쳐 냈다. 콧잔등과 열이 오른 뺨에도 입술이 닿았다. 어쩌면 그는 언어로 감정을 전하는 방법을 몰라 온기로서 게워 내고 있는 걸지도, 그래서 이 입맞춤이 더욱 절박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얼굴을 아우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목덜미와 쇄골에도 입술을 눌렀다. 진서가 으레 알고 있던 태승이 애정을 보이는 방식이었다. 몸을 만지는 건 똑같은데, 꿈에서 본 주태승과 눈앞의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거짓말처럼 달랐다.
“으, 주태승…….”
어쩐지 위축됐던 마음이 뭉근하게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서는 발긋한 뺨을 태승의 가슴에 가만히 기댔다. 이에 응하듯 다부진 팔이 옆구리를 감싸 당겨 안았다.
풀어진 가운 안으로 자연스럽게 손이 파고들었다. 태승은 이제 똑바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진서의 맨몸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도드라진 날개뼈와 옴폭하게 들어간 등줄기를 차례로 어루만졌다.
골반, 그 아래의 통통한 엉덩이까지 떨어진 손이 멈춘 건 그때였다.
하늘 위를 걷는 기분으로 손길을 느끼던 진서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태승은 가운이 아슬아슬하게 가린 사타구니에 묘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를 따라 제 아랫배 밑을 본 진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이건.”
허벅지와 배에 무언가 묽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단순히 땀에 젖어 찝찝한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조금 더 수치스러운 사정이 다리 사이에 숨어 있었다.
순식간에 뻗쳐오른 열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궜다. 진심으로 부정하고 싶었으나 자고 일어난 후에 정액으로 허벅지를 더럽힐 까닭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그런 꿈을 꾸고 몽정을 했다고?
악몽으로 몽정한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광경을 배우자에게 먼저 들키기까지 했다. 분명 꿈에서 쾌락을 느끼긴 했으나 몽정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진서는 어쩔 줄 몰라 허벅지에 놓인 태승의 팔목을 붙잡았다.
“보, 보지 말아요. 그렇게.”
창백했다가, 붉어졌다가 얼굴을 온갖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이고 있는 저와는 달리 태승은 웃음기 하나 없이 가라앉은 낯이었다. 그가 사타구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무슨 꿈 꿨어요?”
“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하기엔 태승의 표정이 너무도 진중했다. 진서는 슬그머니 가랑이를 좁혀 최대한 하체를 가리곤 더듬더듬 대답했다.
“옛날 꿈꿨어요. 이상한 게 아니고, 그냥.”
“옛날?”
“……주태승 씨랑 억지로 하는 꿈.”
태승의 손을 허벅지에서 떼고자 밀어 냈으나 그는 오히려 맨살을 지그시 눌러 왔다.
“그래서 울었어?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 사람을 상처 주게 되는 걸까, 설령 과거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로 그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진서는 괜히 다른 방향을 보며 애매한 호응을 내놓았다.
“잘 기억 안 나요. 운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피곤해서 다…….”
“내가 꿈에서 어떻게 했는데.”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 주면 좋을 텐데 태승은 집요하게 답을 요구했다. 허벅지를 붙든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언뜻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해 줘요. 부탁이니까.”
연신 입술을 어물거리며 눈을 피하던 진서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저 눈빛을 보면 이 상황만큼은 어떤 미려한 말솜씨를 뽐내도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의 잘난 언변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잡힌 허벅지를 살짝 흔들자 태승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다만 떨어진 팔이 이번에는 허리를 휘어 감았다. 진서는 마지못해 제 몸뚱어리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입으로, 빨게 하고……. 목구멍까지 넣었어요.”
“무서웠어요?”
“조금.”
사실은 조금이 아니라 정신을 놓을 정도로 두려웠다. 물론 그런 속내까지 말하기는 싫었으므로 진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잘 닫혔던 입술은 타의에 의하여 다시 열리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태승이 별안간 입을 맞대 온 탓이었다. 타이밍은 갑작스러웠지만 성급하게 호흡을 취하는 키스는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간질이듯 혀로 핥아 내고, 숨 쉴 틈을 주려는 것처럼 그는 몇 번 입술 사이를 떨어트렸다.
“흐, 응.”
진서가 얕은 신음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혀가 파고들었다. 온기를 품은 살덩이는 입천장의 매끈한 점막을 더듬으며 곳곳을 애무해 나갔다. 볼살과 치열까지 혀끝이 닿아 마치 입 안 전체가 먹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인 타액으로 목을 축이고 태승은 진득하게 혀를 엮어 왔다. 입이 이토록 자극에 약한 부위였던가, 키스를 나눈 것만으로 머리에 희뿌연 안개가 꼈다. 이미 서로 혓바닥을 휘감고 있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입술을 조인 채 혀를 빨아 대느라 야살스러운 소리가 퍼졌다. 맞닿은 피부가 점점 성감을 떠안고 달아올랐다. 납작한 배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긴 입맞춤을 나눈 후, 물기 어린 잡음과 함께 태승이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진서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르며 물었다.
“또, 내가 어떻게 했어.”
진서는 가물가물하게 풀린 눈동자를 굴려 태승을 올려다보았다. 곧 몽롱한 목소리가 답을 실어 흘러나왔다.
“목 눌렀어요. 뒤에서…….”
그 말을 들은 태승이 턱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빠져나온 혀가 살결을 죽 훑자 목에 난 솜털까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핏대가 선 부분을 이로 살짝 깨물 때는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흐, 아, 으응.”
목덜미를 지분대던 혀가 물 자국을 남기며 쇄골로 넘어왔다. 뒤이어 태승은 볼록한 뼈에 입술을 붙인 상태로 말했다.
“그리고?”
“가슴에다가, 그, 거기 비벼서 기분 이상했어요.”
“뭘 모르네. 여진서는 빨아 주는 거 제일 좋아하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외설적인 장면을 말로 표현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면에 태승은 여전히 진중한 표정이었다. 그가 진서의 가느다란 흉통을 붙잡고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빳빳이 곤두선 유두가 순식간에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 읏!”
따뜻한 혀가 선단에 감기는 감촉이 선연했다. 쾌감에 못 이겨 달뜬 신음이 속절없이 쏟아졌다. 나머지 한쪽은 손톱을 세워 긁어 대는 바람에 골반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진서가 어쩔 줄 몰라 머리를 밀어 내자 유두에 가해지는 자극이 더 강해졌다. 돌기를 혀로 굴리던 태승이 이를 세워 깨물곤 그악스레 핥았다. 덕분에 복숭아색으로 물든 발뒤꿈치가 몇 번이고 애꿎은 시트를 걷어찼다.
“아, 윽, 그거 안 돼요, 너무, 하아.”
몽정까지 한 주제에 전희만으로도 머리가 뜨겁다 못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주인의 마을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승에게 꼬집힌 과실에서 뽀얀 유즙이 새어 나왔다. 가슴의 둔덕을 타고 흐른 물줄기가 긴 손가락을 더럽혔다.
입으로 당하는 쪽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듯했다. 태승은 유두를 열렬히 맛보다 말고 뻑,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제 입술에 묻은 유즙을 훑고 물었다.
“이건 언제까지 나옵니까?”
“흐으, 이제 떼고 있단 말이에요. 그만 만져야 돼.”
“젖 떼고 있으면 이제 내 거잖아.”
순 억지였다. 절대 울퉁불퉁한 아저씨 먹으라고 나오는 게 아닐 텐데. 진서가 반박하기도 전에 태승은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내며 게걸스레 유즙을 빨아 마셨다. 한 손은 아예 즙을 짜내겠다는 듯이 엄지와 검지로 비틀었다. 그에 따라 선단의 작은 구멍에서 유즙이 연달아 방울방울 쏟아졌다.
“흐아, 으, 왜, 자꾸 먹어요.”
“여진서 씨도 맛 궁금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읍.”
손에 묻은 액체를 혀로 훔친 태승이 곧장 입술을 맞물려 왔다. 그가 타액과 함께 유즙을 넘긴 탓에 진서는 얼떨결에 그걸 삼키게 되었다. 미뢰로부터 올라온 묘한 단맛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입을 헤집으면서도 태승은 유두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발기해 배에 붙은 성기가 가렵다 못해 아플 지경이 되어, 진서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어 제 기둥을 태승의 복부에 문질렀다.
얼마간 혀를 얽고 놔주지 않던 태승이 거친 숨을 뱉었다. 그와 입술이 떨어지자 투명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진서는 기진맥진하여 흠뻑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음은, 뭐 당했어.”
“이, 이제 넣었어요.”
“안 풀고 바로?”
“으응.”
미간을 좁힌 태승이 진서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곧장 진서의 허리를 잡고 모서리까지 엉덩이를 당겨 왔다. 힘이 풀린 두 다리가 손쉽게 다부진 어깨에 걸렸다. 은밀한 부위가 훤히 보이는 자세였다.
“뭐 하려고, 읏.”
종아리를 붙든 채 태승은 진서의 허벅지를 약하게 깨물었다. 따끔거리는 감촉이 흥분을 부추겨 허공에 뜬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괴상한 신음이 터질 것 같아 진서는 무의식중에 제 검지를 입에 물었다.
허벅지 안쪽으로 떨어진 혀가 당연하다는 듯 회음부에 다다랐다. 태승이 뱉는 호흡이 구멍에 쏟아져 진서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이런 체위를 시작했을 때부터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막상 엉덩이에 코를 박은 상대를 직관하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흐윽, 아, 응……!”
콧대가 회음을 지그시 누르고, 그 아래의 주름에 혀가 미끄러졌다. 끝을 뾰족하게 세운 살덩이가 주름을 훑는 느낌이 선연했다. 진서가 고개를 젖히며 이불을 부여잡았다. 신음을 참겠다는 마음은 순식간에 잊혀지고 말았다.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애액으로 범벅이 된 구멍을 태승은 정성스레 핥았다. 그가 입구를 혀로 쓸어 낼수록 투명한 액체가 범람했다.
“아, 흐으, 잠깐만, 안 돼.”
넋을 놓고 신음하던 진서가 별안간 놀라 파드득거렸다. 태승의 손이 아프게 발기한 남근을 감싸 왔기 때문이었다. 체모가 없는 성기는 이미 회음부처럼 야살스러운 액체로 젖어 있었다.
태승은 기둥을 쓸어내리며 엄지로 귀두 끝의 구멍을 후벼 댔다. 그와 더불어 혀가 주름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감대를 한 번에 자극당하니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아, 읍, 우, 주태스, 태승 씨이.”
머리가 끓다 못해 펑 터져 버리기라도 했는지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짙게 퍼지는 알파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꿈에서 느낀 것과는 조금 다른, 녹아내릴 듯한 열기로 가득한 정욕적인 페로몬이었다.
다리 사이에서 애액이 혀와 마찰하는 소리가 처덕처덕 울렸다. 태승이 성기를 흔드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체액을 너무 쏟아 목이 탈 지경이었다. 진서는 스스로 뭘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태승에게 애원했다.
“아, 윽, 으응, 태승 씨, 제발, 제발요. 아!”
단말마의 신음과 동시에 성기가 하얀 정액을 울컥 토해 냈다. 태승이 손을 멈춰 주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진서는 자잘한 절정을 맞았다. 눈앞에서 폭죽이 형형색색 터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발가락부터 시작한 경련이 몸 전체로 이어졌다. 태승은 바들바들 떨리는 종아리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하얀 포말이 이는 파도가 잇따라 전신을 휩쓰는 기분이 들어, 진서는 여운에 취해 울먹거렸다.
내벽의 점막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더 큰 쾌감을 알고 있는 구멍은 기대감으로 빠끔거렸다. 진서가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표정을 지으며 태승의 어깨에 발바닥을 문질렀다.
“흐으, 빨리 좀…….”
당장이라도 기둥을 찔러 넣고 안을 긁어 줬으면 했다. 그러나 정염이 가득 실린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승은 얌전히 다리를 내려놓았다.
곧 삽입이 아니라 가벼운 입맞춤이 마른 몸 곳곳에 쏟아졌다. 뺨을 시작으로 눈, 콧잔등, 입술, 턱선을 거쳐 쇄골과 가슴에도 흔적이 남았다. 언뜻 장난스러운 입맞춤이라 애정이 느껴지면서도 애가 탔다.
안달이 난 진서가 태승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곤 뺨에 입을 맞추자 태승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손에 남은 정액을 음부에 바르며 속삭였다.
“얼른 넣어?”
“으응, 네.”
사박, 태승이 벗은 가운이 바닥에 떨어져 똬리를 틀었다. 뒤따라 아이 팔뚝만 하게 팽창한 기둥이 애액으로 엉망이 된 입구에 닿았다.
“이제 웃어 줘, 진서야.”
“…….”
“사랑하고 있어. 만지면 닳을까, 쥐면 부서질까 두려울 정도로.”
늘 이상한 타이밍에 고백을 한다. 한편으로 참 주태승다워, 진서는 눈물을 매달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원하는 바를 눈에 담은 태승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걸 왜 몰랐지. 병신같이.”
꾸국, 아래에서 언뜻 주름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천천히 배를 채워 오는 이물에 진서가 벅찬 신음을 내뱉었다. 달아오른 점막이 환희하며 기둥에 탐욕스레 엉겨 붙었다.
태승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내벽 끝에 다다를 때까지 기둥을 밀어 넣었다. 안에서 차오른 애액이 흘러넘쳐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적셨다. 진서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허공에 뜬 발가락을 비틀었다.
“욕심이 많네, 꽉 물고 안 놔주고.”
“하, 후으, 윽.”
“정액 쥐어짜려는 것 같아. 내 건 너처럼 단맛은 안 날 텐데.”
힘겹게 한숨을 쉰 태승이 가는 종아리를 붙잡아 제 옆구리에 감았다. 연결이 깊어진 탓에 두툼한 귀두가 자궁부를 압박했다. 그대로 그는 허리를 느긋하게 밀어붙여 성기 끝으로 점막을 애무하듯 문질렀다.
“히, 이윽, 안 돼, 배, 이상, 해.”
납작한 뱃가죽이 성기의 윤곽을 따라 불룩 부풀었다. 집요하게 귀두를 굴리던 태승이 허리를 뒤로 물리자, 내벽이 세밀히 긁혀 애액을 울컥 쏟아 냈다.
핏줄이 선 기둥이 흥건히 젖어 번들거렸다. 태승은 성기를 절반 이상 빼냈다가 단숨에 끝까지 처박았다. 진서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기둥이 빠져나갈 때마다 점막이 함께 딸려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 격렬한 섹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삽입이 반복되니 응축된 성감이 봇물 터지듯 들이닥쳤다.
“하, 아윽! 태승 씨, 너무, 흐으, 죽을 것 같아, 배가, 흐윽.”
“아파?”
“아픈, 후으, 마, 말을 못 하겠……. 흡, 으.”
차라리 도망가고 싶어져 진서가 다리에 힘을 줘 발버둥 쳤다. 그걸 본 태승이 도드라진 발목뼈를 붙잡았다. 귀두가 내벽을 치받음과 동시에 그가 발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흐으, 아, 윽! 그걸 왜, 더러워요. 아……!”
빠져나온 혀가 마디 사이를 속속들이 핥아 냈다. 연한 살을 간질이는 감촉이 흥분되어 정신이 나갈 듯했다. 거세게 처박히는 성기에 더해 발가락까지 빨리니 가히 폭력적인 쾌감이 밀려왔다.
열이 과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공에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가 아릿하다. 아랫배가 팽창해 무언가를 배출하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태승이 말랑한 발바닥을 이로 지분거리자 요의가 한계에 도달했다.
“흐, 으읍.”
핏, 연한 분홍색을 띤 요도에서 투명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진서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어 대며 시트에 뺨을 파묻고 흐느꼈다. 귀두에서 튄 물줄기는 정액을 내보낼 때와 다르게 소변처럼 묽었다.
태승은 난잡하게 절정에 이른 배우자를 관망하다가, 맥없이 경련하는 발등에 입을 맞추곤 입을 열었다.
“다 큰 어른이 애처럼 침대에 오줌을 다 싸고.”
“우, 흐윽, 오줌, 아니라고 전에…….”
“씻어야겠네, 아가.”
짧은 웃음을 흘린 후, 태승은 온몸을 체액으로 적신 진서를 안아 들었다. 성기를 빼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기둥이 깊은 곳으로 성큼 파고들었다. 절정에 도달해 예민해진 내벽을 두툼한 선단이 뭉근하게 비벼 댔다.
“히, 으, 아윽.”
떨어질까 두려워, 진서는 태승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울먹였다. 그가 발을 내딛자 마치 삽입하는 것처럼 성기가 꿈틀거렸다. 달아오른 구멍이 저절로 표피를 거세게 조였다.
“씻겨 준다니까 왜 좆을 끊어 먹으려 들어.”
“안에 너무 깊, 아, 걷지 말아요, 읏.”
“안 걸으면 어떻게 씻겨요.”
내벽의 주름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진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부딪히는 어깨를 깨물었다. 귀두가 연약한 점막을 잇따라 건드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너울 같은 절정이 찾아왔다.
“흐, 아, 여기 이상해, 또…….”
요도가 뻐끔거리며 체액을 방울방울 토해 냈다. 자극을 당해 남은 물까지 전부 게워 내는 듯했다. 허벅지를 타고 곤두박질쳐 바닥에 맺힌 물방울을 본 태승이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태승은 뽀얀 살이 붉어질 정도로 세게 엉덩이를 움켜쥐고 욕실로 들어섰다. 단숨에 진서를 샤워 부스 안의 벽에 몰아붙인 채, 그가 한 손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아, 으.”
등에 닿는 벽은 차갑고 얼굴에 떨어지는 물은 뜨거웠다. 진서는 위태롭게 뜬 다리를 가까스로 태승의 허리에 감았다. 곧 서로의 입술이 성급히 맞붙었다.
“흡, 응, 우, 으읍…….”
어떤 부분이 이성을 끊어 놓은 건지, 욕실에서의 관계는 가차 없었다. 지독한 쾌감이 괴로울 지경이라 자꾸만 울음이 터졌다. 흠뻑 젖은 뺨에 애처로운 눈물길이 트였다.
혀가 감기고, 곤두선 유두가 태승의 가슴에 뭉개졌다. 아래에서는 연이어 물기 어린 소리가 퍼졌다. 귀두가 내벽을 가르며 들어와 덩어리진 애액이 허벅지 사이로 꿀럭, 미끄러졌다.
태승의 흥분한 호흡이 입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숨결을, 진서는 달뜬 신음을 엮어 입 속에 가뒀다. 태승은 진서의 몸이 덜컥거릴 정도로 세게 허리를 쳐올리다가 목덜미로 입술을 옮겼다.
상체 이곳저곳에 새로운 울혈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진서 또한 태승을 힘껏 안고 그의 쇄골을 머금었다. 피부에 맺힌 물방울을 삼켜 갈라진 목구멍을 축였다.
“흐아, 응, 안에, 힘, 들어.”
흐릿한 수증기가 넘실대는 욕실이 마치 제 머릿속 같았다. 오로지 성욕으로 가득해 제대로 된 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이 뇌를 흐물흐물하게 녹이기라도 한 것일까.
힘이 빠진 진서가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그와는 상관없이 태승은 처진 몸을 단단히 붙잡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육중한 기둥 아래 돋아난 음모가 구멍에서 튄 애액으로 젖어 갔다.
격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한 진서의 한쪽 다리가 미끄러졌다. 혼자 서 있지 못해 벽에 기대자 태승은 다른 다리를 붙잡아 제 어깨에 걸쳤다. 후들거리는 발끝이 타일 바닥을 아슬아슬하게 짚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불안정한 자세로 재차 삽입이 시작되었다. 다리가 한계까지 벌어진 탓에 접합이 내벽을 뚫을 듯이 깊었다.
“흐윽, 아, 앙! 넘어질, 것 같아, 읏, 응!”
“응, 조금만.”
난폭하게 부풀어 애액이 잔뜩 묻은 기둥이 게걸스레 안을 드나들었다. 맞닿은 태승의 피부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달리 의지할 곳이 없었기에 진서는 태승의 머리통을 간절히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유두가 그의 입에 부딪혔고, 배우자는 눈앞의 먹이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젖은 입술이 곧장 꼿꼿이 선 과실을 머금었다.
“하, 아윽! 흐으.”
짜릿한 쾌감에 진서가 가슴을 뒤로 물리려 들었으나, 태승은 오히려 유두를 잘근잘근 씹어 대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로 강하게 조이며 입질을 가하니 끝이 퉁퉁 부어 버릴 듯했다.
“이상, 해, 몸, 흐윽, 우.”
“…….”
“이 자세, 하윽, 힘들어요, 응? 태승 씨이.”
절절한 애원이 통했는지 태승이 어깨에 걸친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가 거친 숨을 고르곤 진서를 돌려 욕실 벽을 짚게 만들었다. 마른 손등 위에 한 마디는 더 큰 손이 포개어진 상태로 삽입이 이어졌다.
태승이 자세를 낮춰 진서의 등에 입술을 파묻었다. 어디 하나 가리는 곳 없이 이를 세워 자국을 남기는 모습이 짐승과도 같았다. 절정에 가까워진 듯 내벽을 휘젓는 속도가 따라갈 수 없이 가팔랐다.
움직임이 사나워 딱딱한 타일에 유두가 마구 짓눌렸다. 진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쉰 목소리로 달뜬 비명을 질러 대는 게 전부였다.
“윽, 씹.”
짧은 욕설과 함께 성기가 점막에 하얀 정액을 가득 토해 냈다. 미처 담기지 못한 액체가 구멍 밖으로 울컥 넘쳐흘렀다. 휩쓸려 내려가는 물줄기에 말간 씨물이 외설적으로 섞여 들어갔다.
귓가에 연달아 태승의 숨이 덮여 왔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아, 진서는 침실을 향해 기어가려 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겹쳐 쥔 손에 더욱 힘을 싣고 있었다.
“히, 으, 아앗, 아!”
방금 사정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팽창한 성기가 다시 안을 찔러 왔다. 정액으로 가득 찬 구멍이 애액과 섞인 액체를 찔끔찔끔 흘려 댔다. 태승이 뒤에서 가슴을 조여 안은 채 유두를 꼬집었다. 큼지막한 뱀에게 온몸을 칭칭 감긴 기분이었다.
“진서야, 여진서…….”
이름을 불리는 것도, 몸을 겹치는 것도, 그가 예민한 곳을 괴롭히는 것도 전부 좋았다. 기력이 이미 한계에 달했지만 몸은 기뻐하며 체액을 줄줄 흘려 댔다.
진서는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을 느끼고 울음을 삼켰다. 태승에게 잡힌 손이 타일을 긁으며 뿌드득, 미끄러져 내렸다.
***
“여진서.”
멍하니 풀린 눈동자가 방 한쪽을 가득 채운 유리창을 시야에 담았다. 살짝 열린 커튼 틈으로 어슴푸레한 밤의 풍경이 비쳤다. 그토록 오래 몸을 섞었는데 아직도 새벽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병원 다녀온 뒤로 계속 기분 안 좋았지.”
불그스름한 열꽃이 핀 손목을 엄지로 문지르며 태승이 물었다. 정사 중과는 전혀 다른 차분함으로 무장한 어조였다.
진서는 판판한 가슴에 몸을 맡긴 채 멀거니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침대 헤드에 기댄 태승의 품에 안겨 있으려니, 마치 주머니 속에 들어간 새끼 캥거루가 된 기분이었다.
정사 후에 깨어 있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눈만 뜨고 있을 뿐, 기력은 바닥까지 떨어졌기에 몸을 씻거나 가운을 입는 과정은 태승에게 맡겨야 했다. 늘 군소리 없이 뒤처리를 하는 걸 보면 그를 다정한 배우자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개를 드니 입술이 태승의 턱에 간당간당하게 닿았다. 물음에 답할 생각보다 입을 맞추고자 하는 욕구가 앞섰다. 진서가 그대로 입술을 짓누르자 태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치근대는 건 좋은데, 대답은 해요.”
“…….”
“몸 때문에 그래요?”
역시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서는 괜히 태승의 가운을 꼬깃꼬깃 접으며 딴청을 피우다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주태승 씨는 아무렇지 않아요?”
“뭐가.”
“이제 아기도 못 낳고, 페로몬도 점점, 그, 사라진다는데.”
문장을 맺을 때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신체에 일어난 변화를 직접 말로 상기하려니 어쩐지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 태승이 좀스럽게 가운을 만지작대는 손을 꽉 쥐어 잡곤 덤덤히 대꾸했다.
“여진서 씨는 병원에서 뭘 느꼈는지 몰라도 난 큰 심경의 변화 같은 거 없어요.”
“…….”
“어차피 애 낳는 거 두 번은 못 보겠으니까.”
마지막 말을 들은 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에 귀국한 이후로 줄곧 그가 출산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겨울이가 나오고부터는 본인이 가장 아이를 예뻐하고 달라붙어 있지 않았는가.
“왜요?”
답을 대신해 머리 위에 짙은 한숨이 쏟아졌다. 진서는 태승에게 잡힌 제 손과 그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얼마간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태승은 진서를 한 차례 바짝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늘 두렵습니다. 언젠가 여진서 씨가 날 봐 주지 않는 날이 올까 봐.”
그가 얄팍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젖은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운 사이로 미끄러졌다. 이러고 있으니 그 냉혈한이 마치 기죽은 대형견처럼 보였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진서는 간지럽다는 생각도 잊은 채 태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원에 누워서 우는 네가 너무 약하고 말라서. 피가 저렇게 많이 나는데 이러다 널 잃으면 난 대체 어쩌라고. 눈을 감고 다시는 나를 봐 주지 않게 되면, 난.”
“…….”
“여진서 씨 닮은 아이는 나한테 있어서도 특별합니다. 아마 앞으로 점점, 더 큰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고.”
밀착한 피부로부터 그의 울대가 둔탁하게 타액을 넘기는 것이 전해졌다.
“근데 그게 널 잃어도 될 만큼은 절대 아니야.”
태승이 입을 다물자 침대에 침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가 내쉬는 묵직한 숨결이 나지막이 어깨에 흩어졌다. 진서는 눈동자로 허공을 덧그리며 직전에 들은 이야기를 되짚었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토록 남을 아끼고 있었으면 말로 표현을 할 것이지. 어쩐지 스스로 가지고 있던 고민이 굉장히 유치하고 철없게 느껴졌다.
복잡한 심경과 함께 순간적으로 태승에 대한 야속함이 치밀었다. 휙 뒤로 돌아앉은 진서가 대뜸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저 이제 안 아파요. 주태승 씨랑 실버타운 들어가서 백년해로할 거예요.”
“……실버타운을 굳이?”
“제때 밥도 나와요.”
“난 너랑 둘이서만 살고 싶은데.”
실버타운에서 둘이 살면 되지 않나, 집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노년기 생활에 대해 고찰하는 사이에 태승이 진서를 안아 제 무릎에 앉혔다. 체취와 더불어 은은한 페로몬이 두 사람 사이를 부유했다.
새삼 고혹적인 분위기였다. 페로몬도, 체취도 고고하게 핀 제비꽃이 떠오른다. 너른 어깨를 매만지던 진서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페로몬은요?”
“무슨 페로몬.”
“저 페로몬 안 나와도 괜찮아요?”
일순 그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태승은 미간을 구기고 진서를 응시하다가 짤막하게 반문했다.
“뭔 상관이야, 그게.”
꽤 직설적으로 물었다고 생각했으나 상대는 말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구구절절 부가 설명을 더하기에는 상당히 민망했다. 진서는 괜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어제 페로몬 맡았잖아요.”
“내가?”
“목에 코 박고 좋아했으면서, 킁킁거리고.”
어젯밤에 침실 소파에서 나눈 대화를 상기하는 듯, 태승이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보다 헛웃음을 짓는 게 먼저였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보낸 태승이 허무한 대답을 던졌다.
“그냥 네 냄새 맡은 거야, 여진서 살냄새.”
“살냄새?”
“살에서 단내 나는 거, 본인은 모르나.”
페로몬을 들이마신 게 아니었다고?
제 살갗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리가 만무했으므로 진서는 얼떨떨하게 눈을 키웠다. 좁쌀을 도둑맞은 참새 같은 표정을 짓는 배우자를 본 태승이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랑한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계속 심란해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페로몬이 나오든, 안 나오든 나한테는 다 똑같은 여진서인데.”
“주태승 씨도 알파니까……. 페로몬도 없고 히트사이클도 안 오면 마음이 식을 수도 있잖아요.”
“뭐 내가 너보고 발정 안 할까 봐 걱정했다, 그건가?”
지나치게 적나라한 표현이었으나 숨은 본질을 꿰뚫고 있긴 했다. 진서는 멋쩍게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작대는 꼴을 본 태승이 황당하다는 듯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머리통도 작은 게 별생각을 다 했네요.”
짙은 먹물색 눈동자가 고요히 진서를 담았다.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드문 일은 아니건만 겪을 때마다 낯이 뜨거워졌다. 침대 모서리 어딘가로 시선을 내리뜨고 있으려니, 태승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말했다.
“……어제도 너 자는 거 보면서 자위했어. 가끔은 네 손만 닿아도 발기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 줄줄 쏟아져, 진서는 입술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태승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섹스를 그렇게 해 대도 늘 모자라. 할 수 있으면 백날 맨몸으로 너랑 뒹굴고 싶어,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뭐, 무슨, 뭔 소리예요?”
“매번 사춘기 애새끼처럼, 읍.”
미친놈인가 보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저런 상스러운 감상을 줄줄이 쏟아 내도 되는 건가. 내버려 두면 그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진서는 황급히 팔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동자만 내려 입술에 덮인 손바닥을 본 태승이 혀를 내밀었다. 젖은 살덩이가 살갗을 핥는 감촉에 진서가 기겁하고 손을 떼어 냈다. 자유를 되찾은 입이 수월하게 다음 말을 전했다.
“원하면 지금 증명해 줄게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난 해야겠는데.”
선전 포고를 마친 태승이 진서의 어깨를 잡고 뒤로 넘어뜨렸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가운이 벌어져 울긋불긋한 몸뚱어리가 훤히 드러났다. 피부에 열꽃을 피게 만든 당사자가 그 위에 올라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 이런 방법밖에 몰라도, 마음 넓은 여진서 씨가 이해해 줘요.”
두 팔 사이에 갇힌 진서가 요동치는 눈으로 태승의 사타구니를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까지 안에 드나들던 물건이 또 덩치를 키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섹스를 해도 부족하다는 말은 틀림없는 진실인 듯했다.
뭐 이런 건강하고 파렴치한 놈이랑 결혼했지.
쪽, 쪽. 고개를 숙인 태승이 그대로 쇄골과 목덜미에 온기를 남겼다. 이래서야 가운을 입고 있는 시간보다 벗고 있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입맞춤에 반응해 서서히 예열되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진짜,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으니까.”
아무래도 둘만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
틱, 시동이 꺼지는 잡음이 들리자마자 진서는 차 문을 열고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시선은 오직 2층 주택의 입구에 고정된 채였다. 고작 하루 보지 않았는데 사무치게 그립고, 상상만으로 가슴을 뛰게 만드는 보물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갔다가 풀어 준 줄 알겠는데.”
뒤에서 어이가 없다는 투로 태승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진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큼지막한 차고를 나서, 어린 묘목이 자리 잡은 뒤뜰을 지나, 씨앗이 잠든 정원을 넘었다.
이윽고 현관에 다다르자 진서의 입가에 행복을 가득 품은 꽃이 만개했다.
“겨울아!”
시터의 품에 안긴 겨울이 방긋 웃으며 손을 뻗어 왔다. 머리털이 보송보송 난 아이는 그저께보다 조금 더 예뻤다. 아마 내일은 이보다 갑절은 사랑스러울 터다. 아이를 눈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지겠지.
진서가 아이를 받아 안아 열렬히 입을 맞췄다. 으갸, 아. 애정에 답하듯, 겨울은 까르르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진서의 코를 꾹꾹 눌러 댔다.
“밥 맛있게 먹었어? 잘 놀았어? 잠 많이 잤어? 오늘도 물고기 봤어?”
아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질문 폭격이 쏟아졌다. 뒤늦게 도착한 태승은 온갖 호들갑을 떨어 대는 배우자를 바라보다가, 시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일 없었습니까?”
“네, 제때 밥도 잘 먹었고요. 밤에 조금 보채긴 했는데 금방 잠들었어요.”
“고생했습니다. 이제 내가 볼 테니까 들어가서 쉬어요.”
시터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태승은 진서의 품에 안긴 겨울을 내려다보고 백설기 같은 뺨에 입술을 붙였다. 아이가 그쪽으로 팔을 뻗었기에 진서는 장난스럽게 웃음 짓곤 태승에게 겨울을 넘겼다.
“주태승 씨가 더 좋은가 봐요.”
“더 자주 안으니까 편한가 봅니다.”
“좀 질투 나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요.”
확실히 안는 자세에 안정감이 있었다. 눈에 띄게 덩치가 큰 태승의 팔에 안겨 있으니 갓난쟁이가 더욱 자그마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으면서도 은근히 보기 좋았다. 얼굴은 똑같이 생겨서는.
“배고파요, 밥 먹어요.”
“뭐 먹고 싶은데.”
주말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에 감겨 왔다. 진서는 소중한 보금자리에 선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김치볶음밥, 주태승 씨가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