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2)
덩치는 산만 해서, 난데없이 쓰러지면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주태승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 넣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힘이 들어 이토록 경련하는 건지, 놀란 심장이 비명을 내지르느라 이런 건지는 확언할 수 없었다.
“하아, 주태승 씨.”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불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현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내 손으로 원수를 집에 들이는 꼴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출처 모를 두려움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거의 끌다시피 주태승을 옮겼다. 고된 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눕힌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미친놈이 고집은 세서 병원도 안 가겠다 하고. 어디가 아픈지를 알아야 처치를 하든, 말든…….
가까스로 주태승을 침대에 내려놓자 그의 무게만큼 쿠션이 푹 꺼졌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하며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볼은 여전히 발긋하고 긴 눈매를 덮은 속눈썹이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주태승의 이마를 덮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의 피부가 화로에 달군 듯이 뜨거웠다. 초조함이 더욱 짙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장 열이 나니까 일단 체온을 내리는 게 급선무일 터다. 해열제는 늘 거실 서랍장에 구비해 두고 있었다.
나는 곧장 약을 가져와 벌어진 입술 틈에 밀어 넣었다. 침실에 가져다 놓은 물잔을 입에 대 주자, 주태승은 아이처럼 고분고분 해열제를 삼켰다. 아픈 게 무섭긴 하다. 이 인간이 이렇게 맥을 못 추고.
“저기요, 내 말 들려요?”
“……응.”
비몽사몽간에 주태승이 조그맣게 대답을 내놓았다. 의식은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시트에 손을 짚고 심란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부진 몸을 감싼 옷가지가 무척 불편해 보였다.
“잠깐 허리 좀 들어 봐요.”
말은 이렇게 했으나 환자에게는 내 요구를 따를 기력이 없을 듯했다. 나는 힘겹게 주태승의 상체를 들어 올려 코트를 벗겨 냈다.
남한테는 따뜻하게 입으라니, 뭐라니 잔소리를 해 대는 주제에 본인은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는 건지. 그가 몸에 두른 것이라고는 코트와 와이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이제…….”
나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음 대책을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에 열이 나면 엄마가 젖은 수건으로 살갗을 닦아 주던 게 생각났다.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칭얼대다 보면 어느새 열이 내려 멀쩡해지고는 했었다.
이 개새끼,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하나.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그냥 내버려 둘까 싶었다. 그러나 눈도 뜨지 못하고 앓는 주태승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를 오랜 시간 동안 보았지만 이토록 약한 모습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빈틈을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문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가만히 서서 주태승을 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혼자 사는 집에 당연히 대야는 없었으므로 최대한 넓은 그릇을 골라잡았다. 물을 적신 수건까지 챙기니 그럭저럭 간병의 모양새는 갖출 수 있었다.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주태승이 길바닥에서 쓰러져 내 침대에 누워 있다. 꿈에서조차 이런 장면은 안 나오겠다.
물이 찰랑이는 그릇을 침대맡에 내려놓고, 나는 주태승이 입은 와이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이걸 풀어야 하는데 선뜻 손을 뻗기 망설여졌다. 맨몸을 처음 보는 게 아니면서 그런다. 보기만 했나. 만지고, 입 맞추고, 물어뜯고, 아주 생난리를 쳐 대던 날도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또 은근슬쩍 고개를 세우려 들었다. 나는 머뭇머뭇 주태승의 목을 조인 단추를 풀어냈다. 툭, 옷깃이 벌어짐에 따라 잔근육이 박힌 살갗이 조금씩 손끝을 간질였다.
“윽…….”
별안간 주태승이 목을 긁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깜짝 놀라 내 손이 건드린 부위를 살폈다. 와이셔츠를 팔에서 빼내던 와중에 낸 소리였으니, 이 근처에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절로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부진 어깻죽지를 더듬었다. 그러자 주태승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여, 여기 아파요?”
“…….”
“많이……. 아파요?”
어깨 부근이 이상할 정도로 다른 쪽에 비해 뜨거웠다. 아무래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주태승을 끌어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하아.”
굳게 닫혀 있던 주태승의 눈이 가느다랗게 벌어졌다. 살짝 드러난 눈동자가 몽롱했다. 그는 괴로운 숨을 흘리며 벽으로 머리를 젖혔다. 이마에 아슬아슬 매달린 땀방울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왜 아프고 지랄이야.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나는 죄 없는 입술을 꾹꾹 짓씹다가, 아주 소심한 태도로 와이셔츠를 젖혔다. 자연스럽게 주태승과 몸이 가까워졌다. 그가 뱉는 숨이 내 쇄골 부근에 은근히 쏟아졌다.
“아……?”
어깨를 확인하자, 입에서 저절로 탄식 비스름한 게 터졌다. 드러난 살갗이 엉망진창이었다. 상처를 봉합한 흔적이 어깨에서 날개뼈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벌겋게 부어 건드리기만 해도 무척 아플 듯했다.
“이거, 무, 이거 뭐예요?”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어깨를 들여다보았다. 추측해 보자면 상처가 덧나 열이 오르는 듯싶었다.
주태승이 이렇게 심하게 다칠 일이 있기나 한가? 왜 이 지경인데 치료를 안 받은 거지? 여러 의문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뭐냐고요, 이게. 왜 다쳤어요?”
대답해. 차마 어깨를 잡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주태승의 팔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내게 두고 말했다.
“알아서 뭐 하려고.”
“또 그렇게 나만…….”
울분을 꾹꾹 눌러 담아 쏘아붙이자, 주태승이 내 손가락을 느릿하게 감쌌다. 맞닿은 피부가 난로처럼 비정상적으로 뜨끈했다.
“아니야, 그런 거.”
“뭐가 아니에요?”
“……정말 알 필요가 없어서 그래요. 바보 만드는 거 아니야.”
내 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한 설명이었다. 남의 속은 신경도 안 쓰면서 왜 이럴 때만.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내게 해로운 사람이다. 자꾸 머리가 복잡해지잖아.
“이거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병원 가야 돼요.”
“…….”
“일어날 수 있어요? 옷 입어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허리를 감싸는 힘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주태승은 팔을 조이며 제멋대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우뚝 멈춰 섰다. 예민한 살결을 맴도는 숨결 때문에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곧 낮고 간절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알았으니까 너무 가라고 하지 말아요.”
“……주태승 씨.”
대답하는 대신 주태승은 개처럼 내 살 내음을 들이마셨다. 성적인 자극이라기보다는 절박하게 숨을 쉬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열이 오른손이 내 옷자락 안으로 들어와 등허리를 매만졌다. 이 또한 흥분을 돋우는 손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 떨쳐 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멀거니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내 기분에 동화된 건지, 아랫배에 품은 겨울이가 약하게 꿈틀댔다.
나는 목덜미에 콧잔등을 비비는 주태승을 내버려 둔 채 말했다.
“착각하지 마요. 전으로 돌아간 거 아니니까.”
일순, 주태승이 내 체취를 취하는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목의 도드라진 혈관에 입술을 붙이고 대답했다.
“알아요.”
“…….”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되나.”
주태승은 투정을 부리는 아이와 같이 품으로 파고들었다. 좁은 가슴으로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당겨질수록 내가 안기는 형태가 되었다.
“파렴치한 새끼, 여진서 씨가 불쌍하게 여겨 줘요. 난 이렇게라도 너랑 같이 있어서 좋은데.”
잘도 저런 말을 한다.
주태승의 뻔뻔함을 증오했던 적도, 사랑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떻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를 미워함과 동시에 그리워한다.
감정의 무게는 천칭에 매달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경중을 따질 수도 없다. 그저 뻐근한 둔통이 파도가 되어 가슴을 조여 올 뿐이었다.
나는 자꾸만 밀착하려 드는 주태승을 힘주어 밀어 냈다. 아파서 제대로 갈무리도 못 하는 건지,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본래 그가 가진 것보다 옅은 농도였으나 이대로 가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형질에 휘둘려 어물쩍 배를 맞추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디 가려고.”
주태승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내가 답변을 내놓기 전에 덧붙였다.
“가지 마.”
애도 아니고 왜 이래.
“그럼 페로몬 똑바로 추슬러요. 불편하니까.”
나는 미간을 좁히고 젖은 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태승의 팔을 붙잡아 살을 문지르자, 그는 얌전히 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열이 좀 내리면 좋겠는데. 한편으로 돈도 많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적어도 숨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것 같다. 내 허리를 감싼 팔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래, 괜히 사람 건드리지 말고 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
주태승의 눈이 감긴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살폈다. 대체 어쩌다 다친 건지 못내 신경 쓰였다.
몸 쓰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야외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맨몸으로 밖에 자주 돌아다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까지 크게 다칠 일이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다음에 제대로 물어볼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얼마 뒤, 나는 한 박자 늦게 마구 고개를 저었다. 뭔 소리야. 날 밝으면 바로 쫓아낼 건데. 그리고 다시는 안 만날 거다.
하여튼 이 작자랑 엮인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인 건 분명했다.
나는 뒤숭숭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주태승의 몸을 꼼꼼히 닦아 냈다. 덩치가 컸으니 열을 내리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후우…….”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오늘 똑바로 잘 수는 있을까.
***
어디선가 익숙한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계속 맡고 싶으면서도 미묘하게 거부감이 드는, 독이 든 사과가 풍기는 내음과 비슷했다. 나비가 꽃에 이끌리는 것처럼 저항하기 힘든 감각이 나를 홀렸다.
나는 잠결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어쩐지 시트의 감촉이 보통 때와 조금 달랐다. 아무리 이불을 꽁꽁 두르고 있다지만 이건 너무 따뜻한 거 아닌가.
아니,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침대에 누운 기억이 없는데 왜 이불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어?”
사고가 거기까지 전개되니 자연스럽게 눈이 뜨였다. 당장 코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를 어처구니없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주태승의 품속이었으며, 머리에 괴고 있는 건 그의 팔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나는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기에서 벗어난 몸을 싸늘한 공기가 휘감았다.
“귀신이라도 봤습니까?”
주태승은 텅 빈 자신의 옆자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온한 상대와 달리, 나는 그와 거리를 벌리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어제는 주태승을 간호하다가 잠든 것 같다. 그 뒤에 침대에서 눈을 뜬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내 발로 걸어 들어갔거나, 주태승이 나를 옮겼거나. 어느 쪽이든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아까.”
그럼 당장 깨우지, 왜 음침하게 자는 사람 구경이나 하냐는 말이다. 나는 눈에 띄게 인상을 구기며 사이드 테이블 위의 휴대 전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6시. 다행히도 오래 자지는 않았다. 출근 준비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으나, 나는 주태승을 피하고자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 더 안 자고.”
“씻으려고요.”
“같이 누워 있는 게 그렇게 싫어요?”
“네.”
주태승은 웃지도, 살벌하지도 않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멀거니 눈을 끔뻑이는 모습이 마치 사람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기계 같았다.
나는 정자세로 침대에 앉아 있는 불청객을 두고 욕실로 들어섰다. 물론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있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래도 어제 밤새 들여다본 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 저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빠르게 양치와 샤워를 끝마치고, 나는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쌌다. 부른 배가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이제 임신 사실을 다 들킨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내가 선택한 옷은 품이 큰 갈색 니트였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침실로 나오자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주태승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동하는 경로에 맞춰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건 무슨 주인 기다리는 개도 아니고.
나는 플루트 케이스와 겉옷을 챙겨 거실로 나가며 말했다.
“다 나았으면 알아서 집에 가요.”
“이 시간에 뭐가 그렇게 분주해요.”
뭔 상관이야. 목 끝까지 올라온 반박은 구태여 내놓지 않았다. 내가 코트 매무새를 정돈하는 동안, 주태승은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했다. 나갈 준비를 마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케이스 손잡이를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부터 월요일. 앞으로 5일간은 또 진흙탕을 아등바등 굴러야만 한다. 두꺼운 현관문이 전쟁터로 이끄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일방적으로 남의 화살을 받아 내야 하는, 나 혼자만의 종군.
가기 싫다. 정말, 너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무겁게나마 나를 집 밖으로 이끌었다. 사람은 입에 단 과실만 먹고 살아갈 수 없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을 견뎌야 원하는 바를 손에 넣는다.
알아, 아는데.
“저 갈 테니까, 주태승 씨도…….”
내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두꺼비가 꺽꺽대는 것처럼 성대를 쥐어 짜내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이리도 순식간에 가라앉은 건지.
애써 부정하고 싶었으나, 지난밤 나를 감싸던 타인의 온기가 작은 위안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이제 그 품에서 벗어나 다시 냉혹한 현실과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무고한 현관문이 괜히 얄미웠다. 철제 손잡이를 보니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또 내장이 뒤틀리는 통증과 함께 구토감이 밀려왔다. 나는 문을 열려던 손을 거두어 입을 틀어막았다.
등골에서 올라온 소름이 뒤통수를 저릿하게 마비시켰다. 다리가 풀려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결국 현관문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힘들어, 억울해.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해.
어른이니까, 부모이니까 혼자 이겨 낼 힘이 있어야 한다. 없어도 쥐어짜 내야 한다. 버텨야 돼. 똑바로 걸어. 최선을 다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다짐들이 강박적으로 쏟아졌다.
그래도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울 좋은 소리는 진심을 다한다 한들 위로가 되지 못한다. 가혹하게 채찍질을 해 봤자 싫은 일이 좋은 일로 바뀌지는 않으니까.
바스락-.
그때, 별안간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나는 파리하게 질린 낯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쭈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춘 주태승이 보였다. 그는 진중한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왜 울어.”
다음 순간, 타의에 의해 몸이 기우뚱 넘어갔다. 주태승이 가진 온기가 살갗을 성큼 덮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단번에 밀어 내기에는 체온이 너무도 따스했다.
“네가 이렇게 우는데 어떻게 보내.”
안 우는데 왜 운다고 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듯이 기분이 가라앉았으나, 눈이 젖은 느낌은 없었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태승은 더욱 깊게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다쳤으면서 이렇게 힘을 줘도 되는 건가.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외로운 모양이었다.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위로에 가슴이 조금은 보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는 맛은 무서웠다. 몸은 주태승의 표현을 기억하고, 슬픔을 달래 주는 포근함을 상기했다.
내 뒤통수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좋았다. 속에서 실소가 터졌다. 역시 주태승을 완벽히 미워하지 못하는구나.
왜 이렇게 미련하지. 또 휘둘리고 상처받으려고?
주태승은 내가 잘 아는 그의 방식을 취했다. 열감을 품은 입술이 버석한 눈가에 내려앉았다.
“내가 도와줄까?”
“…….”
“무슨 일이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할까. 여진서 안 울게.”
저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주태승의 손이 닿으면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고난 정도는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힘에 기대 어른 뒤에 숨은 아이처럼 굴던 시절도 있었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그가 내준 집에서, 그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마냥 편안하게.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나는 주태승의 가슴팍을 짚고 살짝 밀어 냈다. 억지로 버티는 힘이 없었기에 수월하게 거리가 벌어졌다.
“괜찮아요.”
검은 눈동자가 우리 사이에 놓인 공백을 묵묵히 훑었다. 언뜻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바닥에 앉은 주태승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위로는 충분히 받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주태승은 여전히 내가 주저앉았던 타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플루트 케이스를 쥐며 문을 열었다. 겨울의 냉랭한 바람이 나를 현실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었다.
“병원 꼭 가요.”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나는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굳이 주태승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나를 향해 보내는 고요한 물음이 들려왔다.
“이게 네가 주는 벌이야?”
“…….”
“손 놓고 바라봐야만 하는 게.”
작은 음성이었으나 뜻은 분명히 전해졌다. 나는 폴라 티에 얼굴을 묻었다가,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현관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빈틈없이 아가리를 닫았다.
***
가장 미워하는 이와 나눈 포옹은 우습게도 듬성듬성 허물어진 다리의 디딤돌이 되었다.
나는 조각난 마음을 기워 한 걸음 나아갔다. 강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들풀일지라도 꺾이지만 않으면 언젠가 곧추설 수 있다. 바람이 불고 난 후에는 반드시 볕 들 날이 올 것이다.
이제 몬트 교향악단은 정기 연주회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개인 연습보다는 합주가 주로 이루어졌다. 분위기는 변했으나 나를 대하는 단원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무시와 뒷말이 반복되었고, 때때로 협주 시간에 멋대로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향악단 단원들 수준이 참 별거 없었다. 처음엔 당황을 한 아름 안겨 주었던 일들도 당하다 보니 점점 무뎌져 갔다. 마음껏 빠지고 마음껏 욕해. 결국 손해 보는 게 어느 쪽일지는 자명했다.
연습을 마치고, 나는 뭉친 배를 문지르며 짐을 챙겼다. 오늘도 날이 추우니 집에 가서 뜨끈한 김칫국이라도 끓여 먹을 작정이었다.
『진서, 가려고요?』
마찬가지로 퇴근 준비를 끝낸 조슈아가 말을 붙여 왔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목시계를 한 차례 들여다보고 물었다.
『그, 같이 저녁 먹을래요?』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로 조슈아와는 조금 어색한 관계가 되었다. 굳이 다음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고민하며 불편한 식사를 하기보다는, 속 편하게 김칫국에 밥 한 공기 말아 먹고 싶었다. 나는 코트 단추를 꼼꼼히 채우며 말했다.
『선약이 있어서요.』
『아…….』
『다음에 먹어요.』
나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이니까. 나는 악기를 챙기고 담백하게 연습실을 나섰다.
악단 건물을 통과하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또 언제 가냐. 나는 잡음이 나기 시작한 배를 틀어쥔 채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나름 수도 한복판에 지어진 건물이었기에 주변에 시선을 끄는 가게들이 꽤 많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물건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길을 걷다 말고 어느 아기자기한 가게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시선 끝에 걸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아기 신발이었다.
메리 제인이라고 하던가. 손바닥만 한 크기에 발등을 가로지르는 끈이 귀여웠다. 앞코에 자그마한 리본이 달려 있어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앙증맞은 신발이 나를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진열창에 붙은 가격은 아이 물건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가였다. 그러나 자꾸만 머릿속에 신발을 사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들이 떠올랐다.
겨울이도 발이 있으니까 신발을 신어야 돼. 얼굴은 본 적 없어도 분명 귀여울 테니, 신발도 그만큼 예쁜 녀석을 신어야 어울린다. 원래 비싼 물건 사서 오래 쓰는 게 좋다.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근거가 적절히 채워졌다. 결국 가게를 나서는 내 손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쇼핑백이 함께였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부류가 있다고 했다. 나는 전혀 그쪽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으나, 신발을 손에 넣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참 특이하다. 내 물건도 아닌데, 이게 부모 마음이라는 건가.
오늘 계획에 없는 돈이 나갔으므로, 며칠은 냉장고에서 남은 음식 꺼내 먹어야겠다.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 보니 집 앞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추위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머릿속에는 온통 뜨거운 국물로 속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팔에 덜렁 매달린 쇼핑백이 춤을 추며 뒤를 따랐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문에 꽂으려던 때였다.
“어…….”
별안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종이 상자가 발에 치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검은 표면에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로 브랜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지, 이게.
나는 코를 훌쩍이며 상자를 안은 채 문을 열었다. 세련된 포장 상태에서 미루어 보면 값이 꽤 나가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이웃집 택배가 잘못 배달되기라도 한 건가. 적어도 내 주변에 이런 선물을 놓고 갈 만한 위인은 없었다.
궁금하긴 하니까 열어 볼까.
나는 쇼핑백과 상자를 나란히 식탁 위에 두고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요란한 겉 포장을 최대한 손상이 없도록 신중히 걷어 내자, 그 자체로 비싸 보이는 또 다른 상자가 드러났다.
설마 이대로 상자를 열면 상자가 계속 나오는 구조는 아니겠지. 그럼 이건 올리브가 장난으로 두고 간 거겠다.
쓸데없는 상상을 일축하듯, 이번 상자는 곧장 알맹이를 토해 냈다. 내용물은 놀랍게도 검은 구두 한 켤레였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이며 구두를 꺼내 들었다.
툭-.
꺼낸 건 구두인데 난데없이 카드 한 장이 덩달아 곤두박질쳤다. 이건 또 뭐야. 나는 구두를 손에 끼운 채로 검은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카드에는 어떠한 문장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금박으로 나의 영어 이름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아.”
상황이 거기까지 파악되자, 나는 이런 선물을 놓고 갈 만한 위인이 없다는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한 명 있었다. 이렇게 불쑥 값비싼 물건을 두고 갈 인물이.
이름 한 글자 써 놓지 않아도 단번에 그 정체를 알 수 있다니. 여러모로 유별난 사람이었다.
“웃기고 있네.”
나는 식탁에 줄지어 놓인 나와 겨울이의 구두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부엌을 향했다.
***
연주회는 오스트리아 빈 시내에서 가장 큰 홀에서 개최되었다.
이제껏 한국의 내로라 하는 공연장에서 연주를 해 보았으면서도 이토록 웅장한 규모는 처음이었다. 겉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근대 유럽의 건축물을 개조하여 만든 장소라고 했다. 그래서 무대 뒤 통로의 계단 따위가 무척 가파르단다.
대기실 내의 풍경은 졸업 연주회와 비슷했다.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단원들이 각자 담소를 나누고, 한쪽에서는 머리 손질과 화장이 한창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위해 악기를 손질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준비를 마친 조슈아가 웃으며 다가왔다.
『공연장 좋죠? VIP 박스에는 유명한 사람도 많이 와요.』
『발코니에 있는 거요?』
『네. 아, 끝나고 디너파티도 있어요.』
오케스트라 공연은 어딜 가나 대강 비슷하구나. 나는 무심하게 턱시도에 매달린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 몸에 맞는 옷을 고를 수 있나 싶었는데, 이럴 때 마른 체형이 도움이 되었다.
『진서, 긴장되겠어요.』
확실히 아무리 콩쿠르에 참가하고, 무대 경험을 쌓아도 많은 관중들 앞에 서는 건 언제나 떨린다. 오늘 연주할 곡들은 이제 손이 저절로 운지를 짚을 수준까지 연습했어도 그렇다. 관용적인 표현을 넘어 문자 그대로 어깨가 무거웠다. 피로가 많이 쌓인 듯했다.
공연 끝나면 며칠 쉬든가 해야지. 나는 건조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꾹꾹 지압했다.
연습에서도, 리허설에서도 실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한 대로만 하면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다 잘하고 있어, 괜찮아. 나는 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 지금 올라가야 하나 봐요.』
문득 조슈아가 대기실 입구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태프 명찰을 착용한 여성이 무어라 소리쳤다.
오케스트라는 막이 오르기 전에 무대에 대형을 갖추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지시를 받은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 또한 파도와 같은 인파에 휩쓸려 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큰 공연을 앞둔 상태였기에 사람들은 금방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마 각자 나름의 긴장을 품고 있을 터였다.
복도와 무대 위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가 세포 하나하나에 달라붙어 하중을 가했다.
그 보이지 않는 경계를 통과했을 때 비로소 통감한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값진 돈과 시간을 투자해 나의 재주를 보러 온 관객들이다. 그들의 눈과 귀는 누구보다 객관적이며, 완벽한 상태의 음악을 즐길 자격이 있다. 그렇기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연주자는 무결한 무대를 내보여야 할 의무가 있다. 내게 어떤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해도 결국 관객이 마주하는 건 플루트의 음색뿐이다.
나는 한 차례 악기를 꽉 쥐었다가, 의연하게 지휘자 단상 옆자리에 섰다.
막을 올리는 곡은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2번.> 애증으로 점철된 시간을 버티고 일궈 낸 결실을 평가받을 때가 왔다.
이윽고 수십 개의 조명에 불이 들어오고,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막이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수백 쌍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설렘과 부담감으로 가슴 한쪽이 울렁거렸다.
나는 객석 앞줄을 전부 눈으로 훑은 후, 당혹스러움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황당하게도 기이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하려 해도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터무니없는 감정의 근원은 결손이다. 꽉 찬 객석에 어느 부분이 불완전하고, 무엇이 갖춰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객석에 주태승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주태승을 초대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는 그를 밀어 내는 태도를 취했다. 지금도 이성적으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능이 내놓는 의견은 달랐다.
몸은 가장 최근의 공연, 졸업 연주회를 기억했다. 그때 주태승에게 붙들렸던 시선과 촘촘히 곤두섰던 신경이 의식에 무언가를 아로새겼다. 나는 아마 객석에서 주태승이 나를 보고 있는 상태를 온전하다고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나 자신을 향한 조소가 입에 걸렸다. 모순적으로 그와 동시에 바보 같은 섭섭함이 퍼졌다. 진짜 돌았나. 그 새끼 보기 싫어서 도망간 건데 대체 뭐가 허전해. 부르지 않은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건 당연한 거잖아.
인사를 마친 단장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가 단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지휘봉이 곡선을 그리기 직전이었다.
……근데 정말 안 왔어?
불현듯 허공을 헤매던 나의 시선이 발코니를 향했다. 귓가에 조슈아로부터 들은 말이 맴돌았다. 공연장에 VIP 박스가 있다고. 어쩌면 거기 있을지도 몰라. 짝을 잃은 점이 하나의 선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온했던 점은 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주태승은 발코니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커튼이 그를 반쯤 가리고 있어도 존재감은 확연했다. 이 확신이 그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건지, 증오에서 비롯된 건지는 모른다. 단지 내게 있어 이 공연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태승이었다.
거리가 멀었다. 서로의 시선을 확인할 수 없는 자리였다. 다만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태승의 인영에 오래 시선을 주었다가, 재차 객석을 바라보았다.
지휘봉 끝이 유려한 궤적을 그렸다. 곧 바이올린이 내는 경쾌한 음이 공연장을 가득 채워 나갔다. 활이 현을 어루만지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어여삐 나를 기다리는 악기에 가만가만 입술을 눌렀다.
시작은 알레그로 아페르토(Allegro aperto), 빠르고 명확하게.
***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끝으로 연주회는 막을 내렸다.
은은한 플루트 소리로 시작하여 절정에 이르러 모든 관악기와 현악기가 폭발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내뿜는 곡이었다. 드넓은 홀 전체를 쾅쾅 울리던 소리가 멎자, 곧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끝이다. 나는 가슴에서 차오르는 고양감에 취해 관중을 바라보았다. 살갗 아래가 쿵쿵 박동했다. 겨울이와 나의 심장이 동시에 뛰고 있다. 아이가 내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함께 기뻐해 주는 듯했다.
연주가 마무리되었음에도 아직 귓가에 관현악의 울림이 생생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네어 드럼, 환희하듯 춤추는 현악기, 음계를 넘나들며 뛰노는 관악기의 조화가 마치 갖가지 요소가 잘 어우러진 그림과도 같았다. 나는 아마 이 여운을 잊지 못하여 플루트를 잡고 있는 것이리라.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전부 아름답게 보였다. 어쩐지 무대 위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내걸고 벅찬 숨을 추슬렀다.
머리 위에 매달린 조명이 무대와 객석을 단절하듯, 서서히 점멸했다. 아쉬움에 시선이 저절로 허공을 더듬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단상에서 내려온 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단장은 덤덤하게 나를 스쳐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와 어깨가 맞닿은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가 사람 잘 봤네.』
특별한 칭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짤막한 문장은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한 단비였다. 나는 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단장의 뒤를 따랐다. 단원들은 입장할 때와 비슷하게 하나의 물결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를 떠나자 이윽고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다만 관자놀이 부근에서는 <볼레로>가 계속해서 울렸다. 참 중독적인 선율이었다. 이거 집에 갈 때까지 맴돌지도 모르겠다.
『진서, 정말 잘했어요. 최고였어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조슈아가 기분 좋은 찬사를 건넸다. 나는 드물게 헤실거리는 얼굴로 화답했다.
『고마워요.』
『더 해 주고 싶은 말 많은데, 디너파티에서 할게요.』
그는 눈을 찡긋거리고 나보다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끝났어.
나는 옅은 웃음과 함께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됐어. 보여 줬어. 이제 집에 가서 푹 쉬어야지.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잠도 원 없이 자고. 따뜻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다가 넷X릭스 볼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달콤한 상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주태승에게도 와 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나. 그가 클래식에 조예가 없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나 때문일 터다.
참, 기분이 좋으려니 별짓을 다 하려고 하지.
속으로 <볼레로>의 음계를 읊조리자 저절로 손가락이 박자를 맞췄다. 스페인의 춤곡이라고 했는데, 이 정도면 밤이 새도록 춤을 출 수도 있겠다.
“……아.”
나는 어둑어둑한 복도에 잠시 멈춰 섰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 왜 불을 다 꺼 놓은 거야. 하마터면 아예 다른 대기실로 들어갈 뻔했다.
생각해 보면 주태승과 처음 만난 순간도 이렇게 어두운 대기실에서였다. 홀로 복도를 걷고 있다 보니 그와 조우한 날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눈이 아니라 배를 먼저 맞췄던, 나를 휘두른 비일상의 시작이.
그때의 나는 페로몬에 이끌려 만난 남자와 이다지도 모질게 얽히는 사이가 될 줄은 꿈에 몰랐겠지.
발걸음이 재차 어둠에 휩싸인 통로를 내디뎠다. 멀찍이 가파른 계단 위에 악단이 사용하는 대기실의 불빛이 보였다. 간간이 웃음소리와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타닥, 타닥.
귓가에 계속해서 스네어 드럼 소리가 퍼졌다. 이다음은 바순 독주, 그리고 클라리넷. 나는 이어지는 연주를 상상하며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벽에 스위치가 있을 텐데 위치를 몰라 불을 켤 수 없었다.
어차피 금방 올라갈 거니까…….
나는 가장자리에 붙은 야광 테이프에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아예 앞이 안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걷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아직 몇 사람이 계단 근처에 있는 건지, 암흑 속에서 간간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좋아?』
문득 개미가 기어가는 것만큼이나 작은 소리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옆에 사람이 있다. 다만 어두워서 얼굴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고개를 돌렸다.
『Gute laune?』
독일어다. 순간적으로 계속 귓가를 맴돌던 <볼레로>의 음악이 작아졌다. 저게 무슨 말이지. 간단하고 짧은 문장이었기에, 나는 이국의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그 순간이었다.
퍽-.
강한 힘이 내 어깨를 밀쳤다. 계단은 가파르고, 나는 무방비했고, 완력은 갑작스러웠다. 나는 멍하니 난간을 놓치는 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작아졌던 합주 소리가 다시금 크기를 키웠다.
뒷걸음질 쳐도 밟을 땅이 없었다. 발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찰나, 나는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귀에서 날카로운 플루트 소리가 들린다. 이건 곧 큰 심벌즈 소리로 변하겠구나, 본능적으로 그런 예감이 들었다.
몸이 바닥에 닿기 바로 전, 내가 취한 행동은 하나였다. 힘껏 배를 감싸는 것. 고작 그 보잘것없는 몸짓이 내게 가능한 전부였다.
나는 그대로 난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숨이 턱 막히는 아픔이 잔인하게 신경을 관통했다. 뭐야, 뭐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희미한 잡음이 들렸다. 뒤이어 낯선 발소리 따위가 땅을 울렸다.
도와줘, 아파.
도움을 요청해 보아도 극심한 고통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수없이 배를 더듬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해 허리가 저절로 새우처럼 곱아 들었다.
『아아악!』
여성 단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체를 반으로 가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숨을 할딱였다.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누가, 누가 의사 좀……!』
어째서?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열심히 했는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남한테 민폐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혼자 딛고 일어섰다고 생각했는데.
배 아파.
예리한 칼날이 뱃가죽 아래를 헤집는 감각과 더불어, 엉덩이 사이가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어깨를 약하게 흔들었다. 다급히 이름을 부르며 나를 깨웠다.
시끄러워.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클라리넷, 오보에, 플루트, 색소폰, 호른, 피콜로, 오보에, 오보에, 트럼본…….
볼레로가 멈추지 않는다.
***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하체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 듯이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나는 감은 눈을 뜨고자 눈두덩에 힘을 실었다. 속눈썹이 파드득, 자잘하게 경련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는 탓에 시야가 흐리멍덩했다. 오감 중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나는 가까이에 맺힌 잔상을 넋 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바라본다는 말보다 동공을 그곳에 두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여진서.”
볼품없이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 눈높이가 맞는다. 아마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태승……?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저 사람이 왜 옆에 있으며, 여기는 어디인지. 신경이 마비되기라도 한 건지 사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간헐적으로 눈을 깜빡이자 주태승은 발작하듯 다급하게 내 뺨을 감쌌다.
“눈……. 나 봐, 제대로. 여기, 봐.”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보라는 말밖에 못 알아듣겠다.
나는 주태승이 원하는 바를 들어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마른 입술, 실핏줄이 곤두선 눈을 시야에 담았다. 그는 밭은 호흡으로 숨을 쉬며 나를 쓰다듬었다. 살갗에 닿는 손가락이 형편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저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어쩌면 하체에서 퍼진 통증을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자꾸 감기려는 눈을 간신히 뜨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파.
애석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붕어처럼 몇 번이고 입을 빠끔댔다. 주태승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나를 지켜보다가, 쥐어짜 내는 듯한 음성을 내놓았다.
“아파?”
“…….”
“괜찮아. 내가 여진서 안 아프게……. 다 해 줄게, 괜찮아.”
본인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었다. 아픈 건 난데, 오히려 주태승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눈 감지 마. 나 죽이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주변의 소음이 점점 커졌다. 이제 보니 주태승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몇 명이 내 근처에 서 있었다. 언뜻 그들이 조용히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저, 본부, 아니, 보호자 분.”
말을 듣고도 주태승은 의사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나저나 한국어가 들리는 걸 보면 한인 의사라도 있나 보다. 듣기 편해서 좋아.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 만족스러워, 나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명확히 병명을 진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외상으로 인해 태반에 손상이 생겼습니다. 초음파상으로 봤을 때는 빠르게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
“환자도, 아이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왕 절개술을 추천드리나 이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아이가…….”
지금 저게 다 뭐라는 거지.
알아듣기 힘든 의학 용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한 가지는 똑똑히 깨달았다. 내 배를 갈라서 겨울이를 꺼내겠다고.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수술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돼.
겨울이는 안 돼. 내가 아직 해 준 것도 없는데, 신발도 사 놨단 말이야.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 돼. 할 게 너무 많아, 아직 나 겨울이랑 아무것도…….
그러나 내 속을 모르는 주태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애를 떼.”
공기 중에 흩어지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냉랭했다. 그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거 다 해. 배를 째든, 약을 들이붓든. 얘 못 일어나면 그땐.”
“…….”
“각오해야 될 거고.”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나는 힘이 모조리 빠진 팔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말할 기운도 없는데 눈가가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축축한 물길을 만들어 냈다.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눠 봤다. 딸이라고 했어. 당신하고 나를 닮았으면 분명히 예쁠 거야. 헤어지게 하지 마. 왜 내 불행한 인생에 겨울이까지 말려들어야 돼. 제발, 제발.
나는 가까스로 주태승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오그라든 성대에서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겨우, 안, 돼. 아기, 안 돼요.”
주태승은 놀란 눈으로 제 소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음이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겨울이는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나쁜 짓은 나만 했어. 그러니까 나만 아프고 괴로워야 이치에 맞아.
“……여진서, 너는 진짜.”
괴로운 듯한 한숨이 병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갈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태승과 눈을 맞추며 마음이 닿기를 바랐다. 닦지 못한 눈물이 입으로 비죽비죽 새어 들어갔다.
지금 눈을 감으면 겨울이를 구할 수가 없는데, 자꾸만 의식이 흐려졌다. 태어나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타, 부탁이에요. 겨울이, 응?”
나를 보던 주태승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는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짓씹듯 문장을 뱉어 냈다.
“의사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너 위험할 수 있다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
“……흐, 윽.”
“너는 네 목숨이 그렇게 가벼워? 왜 너밖에 몰라. 나를 얼마나 더 병신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않았다. 주태승은 분을 추스르려는 것처럼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진서야.”
“…….”
“한 번만 내 말 들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부탁이야.”
첨예하게 다듬은 날붙이가 가슴을 도륙 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주태승이 내게 무언가를 이토록 절실하게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 오늘 마주한 그는 어떤 순간보다 인간다운 모습이었다.
주태승의 이런 얼굴을 조금만 빨리 마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우리는 괜찮은 상황에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했을지도 몰라.
“이제 다시는 나 안 본다고 해도 돼. 네가 원하면 사라질게. 돈을 달라면 주고, 집을 달라면 줄게. 너 하고 싶은 만큼 미워해. 온 힘을 다해서 죽으라고 빌어.”
“주, 태승.”
“그러니까 너부터 살자, 제발.”
아니야, 아니야.
왜 지금 저런 말을 해. 죽기를 바랄 만큼 주태승을 미워한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겨울이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파도와 같은 울음이 하염없이 북받쳐 올랐다.
“겨울, 이.”
다 끊어져 가는 목소리를 들은 주태승의 낯이 절망으로 번졌다. 그는 혼자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퀭하게 파인 눈매에서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그놈의 겨울이.”
주태승이 감정을 절제하려 애쓰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 뺨에는 계속해서 구슬을 닮은 눈물이 굴러다녔다. 나는 아픈 게 익숙하나 겨울이는 아니었다. 세상에 나와 아이가 마주할 모든 것이 따사로웠으면 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얼마간 나를 지켜보던 주태승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옆에 선 의료진을 향해 물었다.
“다른 방법은?”
의사들이 저들끼리 외국어로 의견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대화가 멎자, 그들 중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가 머뭇머뭇 앞으로 나왔다.
“약물이 하나 있긴 합니다.”
말해 보라는 듯, 주태승이 살짝 목을 까딱였다. 더 듣고, 봐야 하는데 눈동자에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았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타액을 꿀꺽 삼켰다.
“남성 오메가의 자궁이 불안정해 개발된 약인데, 후에 환자나 아이에게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권하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부작용.”
“그걸 알기 어렵습니다. 아버지 쪽에 있을지, 아이 쪽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나랑 겨울이가 둘 다 살 수 있어?
부작용이 있다는 말 따위는 마음에 남지 않았다. 그저 어떤 형태로든 좋으니까 겨울이의 얼굴을 보는 게 가능하다면, 나는 어디 한구석이 잘못되어도 끌어안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맡에 보이는 주태승의 손가락을 더듬더듬 쓰다듬었다. 사실은 꽉 쥐고 싶었지만, 이 몸뚱어리로는 고작 그 정도가 한계였다. 팔을 뻗은 대가로 두개골이 징징 울려왔다.
“주, 태승 씨…….”
의식을 잃기 직전, 끝으로 망막에 맺힌 건 주태승의 고통스럽게 구겨진 눈매였다. 그가 입을 여는 장면이 흐릿한 잔상으로 비쳤다. 청각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나는 결국 수마에 못 이겨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기억 속에 묻힌 장소에 서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깨달았다. 벽에 매달린 커다란 종이 달력, 곰돌이가 그려진 머그잔, 단 두 명을 위한 자그마한 식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32평 아파트 부엌의 풍경이며, 나와 엄마가 살던 정겨운 보금자리였다.
왜 지금 여기…….
부엌 안쪽으로부터 매운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싱크대에 널린 덜 마른 행주에서는 짙은 생활감이 느껴졌다. 나는 우두커니 정지해 바보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나 분명히 병원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이었나? 아닌가, 병원? 왜 병원에 가게 됐었지. 무엇 하나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 멀뚱멀뚱 서서 뭐 하고 있어?”
곧 익숙한 목소리가 굳어 버린 나를 깨웠다. 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이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어여쁜 소리.
“아들, 앉아.”
손에 팔팔 끓는 김치찌개를 든 엄마가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동공을 휘둥그레 키웠다가, 얼떨결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내 몫의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치찌개가 식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군침 도는 김이 허공에 일렁였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국자로 내 몫의 찌개를 퍼 주었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손이 저절로 움직여 숟가락을 쥐었다.
나는 참치 건더기가 통째로 들어간 국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치에, 햄에 살코기가 참 많이도 들어갔다. 개중에 널따란 다시마 한 장도 섞여 구석을 유영하는 게 보였다.
“……무슨 김치찌개에 다시마가 있어.”
“얘, 다시마로 국물 내야 맛있어.”
“미역국 같아.”
“모르는 소리 하네. 안 먹을 거면 엄마 주세요.”
“아니야, 먹을래.”
나는 얼른 미끈미끈한 다시마를 입에 욱여넣었다.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잇새로 한가득 퍼져 나갔다. 국물을 내는 용도라 그런지 딱히 맛은 없었다.
“계란말이도 먹어. 엄마가 방금 한 거야.”
“응.”
엄마는 예전부터 계란말이에 일가견이 있었다. 파와 당근, 양파 따위가 복작복작 자리를 채우는데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모양이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지단과 아삭한 채소의 맛이 행복하게 혀를 간질였다.
내가 밥을 먹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엄마는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마셔도 이상하게 목이 멨다. 나는 괜히 코를 훌쩍대며 열심히 쌀밥을 입으로 실어 날랐다.
“천천히 먹어. 아, 너무 여유롭게 먹지는 말고?”
“왜?”
“먹고 일하러 가야지. 늦으면 어떡해.”
일해야 하는구나.
가슴 속에서 서러움이 비죽비죽 고개를 들었다. 엄마랑 있고 싶어. 가면 또 외롭고, 힘들고, 공처럼 굴러 부딪치고 깨져야 하잖아. 이제 너무 지쳤어. 혼자 있는 거 너무 괴로워.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가기 싫어.”
“왜 아기가 됐어.”
“힘들어. 몸도 아프고, 쓸쓸해.”
숟가락을 내려놓은 엄마가 차분히 나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여 내 낯을 살피며 물었다.
“아구, 세상에 우리 아들 편이 한 명도 없어?”
내 편이 전혀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박상훈도 있고 오민지도 있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에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한 명이 스쳐 갔다.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는 게 이토록 애매한 사람은 아마 그가 유일할 터다. 몸도 가까이 있고, 마음이 통할 때도 있으나 나는 주태승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좋아하기도 한다.
“……있어.”
“그럼 뭐가 문제일까?”
“헷갈려서.”
나는 복잡한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내 편 아닌 것 같은데 내 편 같기도 하고, 좋은데 싫고, 날 도와주는데 날 망쳐.”
“으응, 특이한 분이네?”
선이 고운 손이 식탁을 가로질러 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엄마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감한 손짓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우리 아가, 고민이 크겠어.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데.”
멋쩍은 마음에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엄마 눈에는 다 큰 아들도 마냥 아가로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부둥부둥 어르는 취급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뭉근하게 풀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을 때는 그냥 진서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차가운 물이 찰랑이는 잔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엄마는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내건 채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인생에 옳은 길 같은 건 없어. 더 쉬운 길이 있을 수는 있겠다.”
“…….”
“근데 길을 걷는 중에는 어디가 지름길이고, 어디가 가시밭길인지 몰라.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아- 이게 괜찮은 길이었구나. 하는 거지.”
이렇게 따스한 조언은 오랜만에 듣는다. 그동안은 누구도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나는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반쯤 비어 버린 밥공기를 내려다보았다.
“네 인생은 너밖에 살아 볼 수가 없으니까, 길을 만드는 것도 우리 진서 몫이야.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진서가 해야 돼.”
“응.”
“그래도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든 간에, 엄마가 옆에 있을게.”
옆에 있을게.
긴 문장 끝을 장식한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았다. 입 안을 돌아다니는 밥알에서 짠맛이 났다. 나는 얼얼하게 조이는 목구멍을 축이고자 물을 삼켰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무슨 시간? 어디 가기라도 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탓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식탁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맨밥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네가 행복한 게 엄마 소원이야. 어디에서든, 누구와 있든.”
“나, 나도 엄마 행복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이미 행복해. 내 아들이 진서라서.”
“…….”
“많이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 또 부족한 엄마랑 같이 살아 줘서 고마워. 진서는 평생 엄마의 소중한 보물이고, 자랑이야.”
입술이 떨려서 더는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 나는 최대한 우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아들, 사랑해.”
나는 결국 울음과 함께 엄마를 불렀다.
“……엄마.”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기도, 밥그릇도 그대로인데 엄마가 앉아 있던 의자만이 홀연히 여백을 드러내고 있었다. 빈 공간을 확인하자 뒤늦게 시큰한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으, 흐윽, 읍.”
나는 울먹이면서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한 술을 퍼먹었다. 언제 또 엄마가 해 준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코가 막혀 맛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식기 전에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싶었다.
국과 밥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도 엄마 얼굴을 더 오래 볼 걸 그랬다. 기억에 오래오래 남도록, 그 햇살을 닮은 미소를 원 없이 눈에 새겨 두었어야 했는데.
“엄마, 엄마아.”
다음에 또 와 줄 거지.
나는 열심히 행복해질게. 엄마 소원 이뤄 줄게. 그러니까 나 잘 보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약속이야.
***
얼마나 잠을 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을 관통하는 고통만큼은 명확했다. 수마에 빠져드는 순간에도, 깨어나 의식을 되찾는 순간에도 묵직한 통증이 함께였다.
아픔 때문일까, 꿈의 여운이 남은 탓일까.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옅은 신음과 함께 묵직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온 세상에 희뿌연 안개가 서린 것처럼 시야가 불분명했다.
의식을 찾았으나 몸은 아직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장 난 시력을 되찾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행히도 눈두덩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눈앞이 또렷해졌다.
세 번 정도 눈을 깜빡인 순간, 나무껍질처럼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진서.”
누군가에게 손이 붙들려 있다. 눈동자를 내려 온기의 주인과 시선을 맞추자, 마디를 감싼 악력이 더욱 강해졌다. 주태승은 그리도 절박하게 내게 매달린 채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나 보여?”
버석하게 마른 살갗도, 실핏줄이 터져 새빨간 눈알도, 부르튼 입술도 잘 보였다. 나는 그의 낯을 멀거니 살피다가 한 차례 더 눈을 깜빡였다.
“내 목소리 들려?”
“…….”
“힘들면 손가락만 까딱해.”
성대를 쥐어짜 보면 어떻게든 말을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타액을 삼켜 가뭄이 온 목구멍을 축였다. 뒤이어 목에 힘을 실으니, 쇠를 긁는 소리와 엇비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 려요.”
주태승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요동쳤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내 이목구비를 빠르게 살폈다. 어정쩡하게 뻗은 손은 차마 몸뚱어리를 안지 못하고 애처로이 허공을 맴돌았다.
“왜 울어. 아파서 그래?”
내쉬는 숨이 뚝뚝 끊겼다. 주태승은 크게 호흡을 들이쉬기도, 자잘하게 뱉어 내기도 하며 주먹을 쥐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의 불안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어떻게 해야 안 아플래.”
어쩐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문장처럼 들렸다.
나는 멍한 시선을 유지한 채 팔을 뻗었다. 아주 조금씩 나아간 손끝이 이윽고 주태승의 손에 닿자, 그는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려한 얼굴은 곧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낯으로 변모했다.
주태승의 갈라진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광경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는 마치 팔다리가 얼어붙은 사람과 같이 움직임을 멈췄다. 내 미약한 손짓 하나가 이 커다란 남자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참 묘했다.
나는 긴 엄지를 빈틈없이 감싸 쥐고 주태승을 훑어보았다.
“왜 무릎, 꿇고 있어요.”
주태승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은 빛을 냈다. 나는 말하는 게 힘에 부쳐 색색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문장을 더했다.
“그렇게 있으면 다리 저려요.”
“……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의문스러운 어조가 허공을 꿰뚫었다. 주태승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자기 자신과 나를 번갈아 오갔다. 그는 곧 살을 찢어 낼 기세로 입술을 짓씹었다.
“이딴 게 눈에 들어와?”
아, 화나게 만들었나 보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죽다 살아난 주제에 지금 내 다리가 저리든, 부러지든. 대체 그게 왜 궁금해.”
분명 주태승의 눈가는 건조하게 말라 있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목소리가 젖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범람한 감정이 성대를 통해 오롯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주태승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내게 몸을 붙여 왔다. 내가 좋아하는 체취가 코끝에 편안하게 감겨들고, 깃털을 다루듯 세심한 손길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와는 정반대로 너른 어깨는 모래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떨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못하게 하면서 왜 남의 속은 다 헤집어 놔, 또 이렇게 넌…….”
“으, 콜록.”
“아주 절벽에서 밀었다가, 손잡고 끌었다가. 사람 가지고 노는 게 취미지.”
대답을 하려 했으나 까슬한 목구멍에서 기침이 터졌다. 나는 고롱고롱 숨을 내쉬며 주태승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에 주태승은 조심스럽게 내 등을 쓸어내렸다.
“누가 할 소린데.”
따뜻하다. 나는 아마 이 체온을 그토록 좋아했던 거겠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낮지만, 단단한 안정감을 가진 이 온도를.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다부진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가만히 킁킁댔다. 주태승은 심하게 걱정하고 있는 듯했으나 아픔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정말 중요한 건 이 몸뚱어리가 아니었다.
주태승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불현듯 다급하게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아가는, 겨울이는 괜찮아요?”
물음을 토해 낸 직후, 낮은 한숨이 내 뺨 언저리에 쏟아졌다. 주태승은 심기가 뒤틀린 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애가 문제야? 네 걱정은 언제 할래.”
“제 걱정은 주태승 씨가 해 주고 있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이 얼굴을 콕콕 찔러 댔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주태승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말없이 내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입이 열리기 전 내려앉은 공백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빨리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조바심이 나 얌전히 기다리기 어려웠다.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나는 달라붙은 주태승을 본능적으로 밀쳐 내려 들었다.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꼴을 하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태승의 악력에 의해 나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몸을 떨어트려야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의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기력이 없는 와중에도 정직하게 뺨으로 열기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빈에서 이리도 유창한 한국어를 들으니 다소 어색했다. 어떻게 한인 의사가 있는 병원을 찾아냈을까. 재벌가 능력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피부로 와닿았다.
“통증이 있을 겁니다. 참기 힘드실 때 링거 옆에 버튼 누르시면 좀 나아요.”
“네.”
가까이 다가온 의사가 언뜻 주태승의 눈치를 살폈다. 주태승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손으로는 내 팔목을 줄기차게 지분대고 있었다.
“검사 결과, 다행히 도드라지는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태아 쪽도 큰 문제는 없었고요.”
“아…….”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만다행이다. 팽팽히 부풀어 있던 긴장의 끈이 느슨히 풀어졌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입가에 내걸고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정말 잘됐다. 겨울이를 만날 수 있어서.
“아이도, 아빠도 정말 잘 견디셨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을수록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참 대견스러웠다. 내 작은 분신에게는 늘 미안한 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어쩌면 부모보다 더 굳세게 버텨 주어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고마웠다.
나한테 오기에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아이다. 겨울이를 향한 애틋함이 훌쩍 커졌다. 나는 스멀스멀 너울거리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 끝에 힘을 실었다.
의사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다만 부작용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 입원하면서 예후를 지켜봐야 합니다. 아직 해야 할 검사도 남았고요.”
“…….”
“당장은 이상이 없으나 태아의 경우 출생 이후 문제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부작, 용…….”
부작용이라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
어느 날 느닷없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걸을 수 없게 되거나, 혹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차라리 내게 문제가 생기는 게 겨울이가 아픈 것보다는 나을 터다. 최소한 나는 세상에 얻어맞는 법은 알고 있잖아.
빠르게 뿌리를 뻗은 두려움이 나약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릇된 감정에 지지 않기 위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겁내면 안 돼. 둘 다 무사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야.
“거기까지 하지.”
별안간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가로질렀다. 입을 연 장본인은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주태승이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의사를 바라보며 문장을 이었다.
“이제 쉬게 하고 싶은데.”
음습하게 일렁이는 페로몬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당장은 용케 잘 갈무리하고 있으나, 본래 성질대로라면 병실의 공기가 몇 배는 탁해졌을 것이다.
의사의 낯에 금세 당혹감이 번졌다. 그는 어중간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덜컥, 잡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의사가 병실에서 퇴장하는 데에는 몇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주태승은 닫힌 문에 머무르던 시선을 돌려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여진서 씨.”
“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자요.”
바로 자라고? 사람이 스위치를 내리면 꺼지는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원하는 때 곧장 잘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내가 무어라 반박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야가 암흑 속에 뒤덮였다.
주태승은 묵묵히 서서 내 눈가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짚었다. 피로한 눈두덩에 체온이 닿으니 차차 긴장이 풀려갔다. 마치 온열 안대를 쓰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망가진 몸이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는 걸까. 우스울 정도로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정신은 제자리를 찾았어도 신체는 멀쩡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얼굴을 가린 큼직한 손을 붙잡고 아래로 살짝 치워 냈다. 흐리멍덩한 시야 너머에 비치는 주태승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은 심해의 색을 띠고 있었다.
코끝에 닿은 손가락에서 시원한 향이 났다. 나는 주태승의 손바닥에 입술을 뭉개며 웅얼거렸다.
“……어디 가지 마요.”
왜 이런 소리를 하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눈을 떴을 때 혼자 있는 건 싫었다.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면 상대는 주태승이기를 바랐다.
이 감정에 대해 고찰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그냥, 그게 좋았다.
주태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내려간 손을 다시금 눈가 위로 미끄러뜨렸다. 이 별것 아닌 손길이 가슴에 편안한 충만감을 가져다준다. 마치 몸이 길들여진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으레 이런 식으로 나를 재우고는 했으니까.
문득 주태승과 함께 갔던 바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내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짚은 채 잠들기를 기다렸다.
귓가에 고즈넉한 파도 소리가 울린다. 병실의 형광등은 은은한 스탠드 조명으로 변하고, 늘어진 환자복이 부드러운 가운이 된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나는 연인과 나눈 과거의 밤을 되짚었다.
수마에 붙들린 몸뚱어리가 나른했다. 오늘은 추억을 더듬는 꿈이 나를 찾아올 듯했다.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
주태승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단잠에 까무룩 빠져들었다.
***
이 1인실 병동에 입원해 침대 신세를 진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좀 쉬고 싶다고 애달피 염원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누워 있는 것도 일이었다.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아 몸에 욕창이 돋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따금 돌아누우며 어깨나 등 따위를 슬쩍 쓸어 보고는 했다.
주태승은 병실을 지키는 장승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옆에 있었다. 특별한 대화를 주고받는 건 아니었다. 검사를 할 때 보호자 역할로 동행하고,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밤에는 소파에 앉아 함께 잠을 청했다.
퇴원까지 이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가. 그럼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주태승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손에 든 책 페이지를 느릿하게 넘기다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왜.”
주태승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를 내치고 싶을 정도로 싫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기묘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게 적과의 동침인가? 주태승을 적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난 이 사람과 뭘 하고 싶은 거지.
나는 밤바다의 물결과 같이 차분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주인은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다물린 입매에서 날카로운 성정이 다 드러나는 듯했다.
“주태승 씨.”
“응.”
“밖에 나가고 싶어요.”
정신 못 차렸다고 혼나려나.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눈만 빼꼼 내밀어 본 주태승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움츠러든 내 어깨와 팔에 매달린 링거를 차례로 훑어보고 책을 덮었다.
검은 폴라 티를 입은 주태승이 찬찬히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평소에도 정장 차림이면서 사복까지 죄다 거무죽죽하다. 본인 외모와 썩 잘 어울리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주태승 옷 입는 취향까지 평가하고 나선 걸 보면, 내가 정말 심심하기는 한가 보다. 무의식중에 입꼬리가 떨떠름한 곡선을 그렸다.
“아.”
별안간 접근해 온 손이 내 무릎을 지그시 눌렀다. 주태승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발목을 움직여 보거나, 다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기행을 벌인 끝에는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채 눈을 흘겼다.
“뭐, 해요.”
“걸을 수 있어요?”
“병실은 걸어 다녔잖아요.”
누가 보면 갓 태어난 사슴이라도 돌보는 줄 알겠다. 나는 멋쩍은 기분에 창문 쪽으로 목을 틀고 주절거렸다.
“계속 누워 있으니까 심심하고, 허리 아프고, 공기도 안 좋은 것 같고.”
“어딜 가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냥 병원 산책만이라도요.”
“산책?”
물음을 던진 주태승이 나를 따라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 너머에는 단출하게 가꾸어진 화단이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병실 안에만 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날씨도 겨울치고 포근해 보였다.
“잠깐만 다녀오면 좋겠다.”
“…….”
“임신했을 때 규칙적인 운동해 줘야 하는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쏟아 내며, 나는 눈동자를 굴려 주태승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내 소망을 듣고 고민에 빠진 듯했다.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건 왜 망설이는 거야. 좀이 쑤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운동했습니까?”
주태승은 뜻밖의 허점을 찔러 왔다. 당연히 출퇴근길에 걸어 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운동 따위 한 적 없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애꿎은 이불을 손바닥에서 꾸깃꾸깃 굴렸다.
그 광경을 본 주태승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영 시원찮은 기색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 차례 더 깊은숨을 내뱉었다.
들어주려는 건가? 무슨 대학 합격 기다리는 고등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알겠으니까 앉아요, 옷 입게.”
“우리 산책 가요?”
“따분해할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내가 말을 유쾌하게 하는 재주가 없기도 하고.”
“맞아요……. 재미없어요.”
순간적으로 주태승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너무 솔직하게 떠들었나.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앉았어요. 옷 주세요.”
“하여간, 입만 살아서.”
핀잔을 놓으면서도 주태승은 순순히 자신의 캐시미어 코트를 가져왔다. 늘어진 링거 때문에 소매에 시원하게 팔을 찔러 넣을 수 없었다. 하여, 그는 먼저 큼직한 담요를 내 어깨에 두르고 그 위에 자신의 두툼한 코트를 덮었다. 내 몸뚱어리가 눈사람처럼 불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추우면 바로 말해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뭘 어떻게 돼. 바로 다시 들어가는 거지.”
입을 점잖게 놀려야겠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겉옷을 챙겨 입은 주태승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살갗이 워낙 돌덩이같이 견고했기에 전혀 위태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태승은 신중하게 나를 부축하고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대단한 여정을 떠나는 게 아닌데 가슴이 설렜다. 이인삼각 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마한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VIP 병동을 지나, 느직느직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다.
주태승이 링거 거치대를 대신 끌어 준 덕분에 팔이 홀가분했다. 그야말로 말하는 짐 덩어리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나 기분은 좋았다. 절뚝절뚝, 부지런히 발을 내딛자 금방 건물 출구가 눈에 들어왔다.
“와아.”
자동문이 열리니 차갑고 신선한 겨울의 공기가 가득 코에 들어찼다. 나는 개운하게 숨을 들이켜고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지개도 힘껏 켜고 싶었으나 어깨를 꽁꽁 싸맨 탓에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산책로는 건물 뒤쪽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겨울이라 꽃은 없었으나 추위에 빛이 바랜 나뭇가지도 나름 운치를 자아냈다.
나는 주태승의 품에 파묻혀 여유롭게 걸었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무리가 가지 않으려면 살살, 천천히 보폭을 벌려야 했다. 거치대 바퀴가 덜그덕대는 소리가 성실히 뒤를 따랐다.
조금 몸을 움직였더니 배가 꿈틀거렸다. 약간 뱃가죽이 저린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겨울이까지 해서 셋이 산책하고 있구나.
나는 볼록 솟은 배를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떡볶이 먹고 싶어요.”
“뭐?”
“배고픈 건 아닌데요. 빨간 음식 먹고 싶어요. 떡볶이랑, 김치찌개랑, 제육볶음이랑, 오징어 두루치기 같은 거요. 아, 양념치킨도요.”
내가 이렇게 많은 음식 종류를 알고 있었나? 스스로 의구심이 들 정도로 갖가지 먹을거리가 청산유수로 쏟아졌다. 주태승은 내게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먹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아요.”
“저 살쪄서 그래요.”
“의사가 저체중이라던데.”
“그럼 저 중에 세 개만 먹을래요.”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왜 욕심을 부려요. 배탈 나서 병원 출근 도장 찍으려고?”
안 된다는 거 참 더럽게 많다. 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따박따박 반박해서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게 얄미워 죽겠다.
내가 가자미눈을 뜬 채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주태승은 턱을 당기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
일순간 주태승의 무표정이 깨졌다. 그리고 바람 빠진 웃음이 내 이마에 쏟아졌다. 그가 고개를 돌린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도드라지게 웃는 모습을 본 건 손에 꼽았다. 오스트리아에 온 이후에는 처음이었다.
뭐야, 원래 저렇게 웃었나.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주태승은 잠시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퇴원하면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요.”
퇴원하면. 문장은 미래의 계획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에 걸린 겨우살이를 멀거니 내다보다가 물었다.
“퇴원하고도 만날 거예요?”
“만나기 싫어요?”
나를 보는 주태승의 눈빛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가 내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싣는 게 느껴졌다. 오만한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얼굴 대신 손짓으로 조바심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요.”
애를 태우기 위한 저울질도, 얄궂은 장난도 아니었다. 정말 나도 내 의중이 혼란스러웠기에 저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슴에 남은 상처는 찔린 형태 그대로 푹 파여 있다. 이제야 그 위에 얼기설기 새 살이 돋아나고 있으나 흉터는 남을 것이다. 나는 이 상흔을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병원 뒤뜰로 통하는 오솔길을 넘자, 기다란 나무 벤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 오던 참에 잘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벤치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오랜만에 운동을 했더니 아랫배가 뻐근했다. 배 속에 웅크린 겨울이가 살갗을 발로 콩콩 차 대는 감각이 퍼졌다.
이제 겨울이와 지낸 지 5개월 하고도 2주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초기에 비해 태동이 잦아진 느낌이었다. 이렇게 배를 두드리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은가 보다.
“힘도 세다.”
무심결에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쪽을 향하는 주태승의 시선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는 뭉친 배를 만지작대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주태승은 내 배를 물끄러미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속 모를 인간이라도 제 새끼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긴, 사진은커녕 배 한 번 만져 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 겨울이……. 딸이래요.”
주태승은 겨울이의 또 다른 아빠이고, 부모 중 한 사람이고, 따지자면 동업자인 셈이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하기가 까닭 없이 부끄러웠다. 나는 중지 손톱을 정리하는 척, 애써 딴청을 부렸다.
“태명은 여진서 씨가 지었어요?”
“지금이 겨울이니까 겨울이에요.”
“잘 지었네.”
주태승은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아랫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슬슬 부담스러웠다. 타인이 신체 일부를 이토록 유심히 관찰하는 게 익숙할 리 없었다.
“널 닮았으면 좋겠는데. 딸이든, 아들이든.”
들릴 듯 말 듯, 주태승이 희망 사항을 중얼거렸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는 못 들은 척하며 그를 곁눈질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듯했으나 커다란 손이 머뭇머뭇 허공을 덧그리고 있었다.
나는 주태승의 수려한 옆얼굴을 바라보고 물었다.
“만져 볼래요?”
주태승은 눈동자만 움직여 나와 눈을 맞췄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부모였으니 태동을 느낄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허공에 떨어진 손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배에 갖다 대었다.
내심 주태승의 반응이 궁금했다. 놀라는 표정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단지 가느다랗게 뜬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릴 뿐이었다.
이 사람이 아빠라는 걸 알아봤는지, 겨울이가 뱃가죽에 세게 발길질을 가했다. 분명 선명한 태동이 느껴졌을 텐데도 주태승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러면 웃음도, 감동도 없이 그냥 배를 만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 손을 떼 줬으면 좋겠는데, 주태승은 잠자코 손을 붙이고 있었다. 슬쩍 뒤로 도망갈까 했으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마 본인 나름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으니.
나는 주태승을 내버려 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구름이 탁 트인 파아란 도화지 위를 유영한다. 언젠가는 겨울이도 이 계절의 경치를 함께 바라볼 날이 오겠지. 헌 옷을 벗어 던지고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나무와 골목길에 쌓여 땅과 이별하는 눈송이 따위를.
태교에 딱 좋을 법한 겨울날의 풍경이었다.
***
일광욕을 즐기고 돌아왔을 때, 병실 앞에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방 주인이 부재중인 탓에 복도를 서성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그가 누군지는 단번에 깨달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그맣게 불청객을 불렀다.
『조슈아?』
『진서!』
내 목소리를 들은 조슈아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는 빠른 보폭으로 내게 다가오려다, 곁에 선 주태승을 보고 멈춰 섰다. 주태승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을 짓고 조슈아를 응시했다.
『이 사람은 전에 진서 집 앞에서…….』
조슈아는 의아한 듯이 왼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게 당연했다. 일전에 그리도 살벌하게 싸웠으면서 지금은 딱 달라붙어 부둥켜안고 있었으니까.
나는 주태승을 슬며시 밀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바로 그가 다시 허리에 팔을 두르는 바람에 무의미한 행동이 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진서가 크게 다쳤으니까 걱정돼서요. 여기 입원했다고 들었어요.』
『일단 같이 들어가요.』
조슈아는 불편한 기색으로 주태승을 흘끗대며 병실로 들어갔다.
한편 주태승은 내 외국인 친구를 투명 인간 취급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살짝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민망함은 전부 내 몫이었다. 그나마 이불을 덮어 준 후에 순순히 떨어졌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저 남자는 계속 옆에 있는 건가요?』
노골적으로 심드렁한 어조였다. 조슈아는 아무래도 주태승이 못마땅해 보였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내걸고 대답했다.
『내 보호자예요.』
『보호자?』
『네…….』
더 뭐라고 설명을 덧붙여야 하지.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에 조슈아는 한 차례 혀를 찼다. 잡음이 퍼지자 주태승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둘을 병실에 오래 두어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조슈아, 그럼 무슨 일로 왔어요?』
『진서 괜찮은지 보고 싶기도 하고, 전할 말도 있고요.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단장이 빨리 쾌유하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진서는 훌륭한 연주자였다고요.』
참 고마운 말이었다. 계단에서 떠밀린 게 공연을 마친 다음이라 좀 나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전했다.
『고마워요.』
조슈아는 나와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날 어쩌다 발을 헛디딘 거예요? 나는 바로 대기실로 올라가서……. 진서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발을 헛디뎌요?』
듣다 보니 말이 조금 이상했다. 조슈아는 사실과 다른 정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밀린 것이지,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 설마하니 단원들은 내가 상해가 아니라 사고를 당한 줄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억울함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기 위해 그 어두운 곳에서 일을 저질렀구나. CCTV는 없었나? 있었다고 해도 분간이 안 되려나. 나는 졸지에 범인도 모르는 상태로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건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 언저리를 짚자, 조슈아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진서, 아픈 거예요? 괜찮아요?』
『발을 헛디딘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찢어 죽일 새끼를 어떻게 찾아내지. 나는 그렇다 쳐도 겨울이까지 위험에 빠트린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내서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범인을 찾으려면 일단 공연장에 가서 CCTV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CCTV를 돌려 보고, 없으면 그날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황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법원에 가서 소송을, 아, 내국인이 아닌데 절차를 밟을 수 있나? 독일어로 진술서는 어떻게 써야 하지. 형사로 걸어야 하나, 아니면 민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에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에 저항하듯 관자놀이에 통증이 일었다.
『조슈아, 저기…….』
고통을 꾸역꾸역 억누르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별안간 미지근한 손이 내 이마를 감쌌다. 곧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단단한 복부에 머리를 기대게 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이만 가 봐요.』
고저 없는 어조의 축객령을 내린 건 주태승이었다. 손가락에 가려져 그의 낯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 여진서 대신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주태승, 씨?”
주태승이 천천히 내 얼굴을 덮은 손을 거두었다. 조슈아는 잠자코 나와 그를 차례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진서, 다음에 또 올게요. 푹 쉬어요.』
조슈아가 먼저 자리를 뜨고, 주태승이 그 뒤를 따르려 들었다. 나는 멀어지려는 온기를 꽉 붙잡았다.
“어, 어디 가요?”
그 물음에 주태승이 몸을 틀어 내 미간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다만 시선은 조슈아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그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호자 노릇 하러.”
보호자……?
언뜻 비친 눈동자에 서슬 퍼런 살기가 가득했다. 나는 그가 언제 저런 눈빛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 집에 들어온 서정후를 바라볼 때와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였다.
이거 그냥 캐묻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주태승의 옷깃을 잡은 손에서 차차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를 저지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빨리 와요.”
“응.”
짧게 호응한 주태승이 병실을 나섰다.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한결 가시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짐이 이거밖에 없나?”
나는 팔에 덜렁 낀 코트 한 장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심지어 이것도 내가 처음에 입고 있던 게 아니라 주태승이 어디선가 구해 온 옷이었다. 공연장에서 떨어지자마자 실려 와 집에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당연한가.
오늘은 2주 남짓한 병원 신세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그동안 주태승은 끈질길 정도로 내 옆에 붙어 돌봄을 자처했다. 조슈아가 왔다 간 이후로 통화를 하러 나가거나 잠시 외출하고는 했으나 나를 오래 혼자 두는 일은 없었다. 그 덕분에 긴 입원 생활이 외롭지만은 않았다.
이제 주태승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될까.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어 내기 위해 오스트리아까지 도망쳤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절절 끓던 증오가 미적지근한 온수로 변했다. 이는 우리 관계의 형태로 오롯이 나타났다. 연인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 애정과 상처를 둘 다 떠안은 애매한 사이.
사랑하기에는 밉고 미워하기에는 사랑한다. 주태승이 내게 품은 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다 챙겼습니까?”
편안한 차림의 주태승이 코트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으며 물었다. 짤랑,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에 쥔 것은 차 키일 것이다.
그동안 늘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만 보았는데, 이제 폴라 티나 니트 따위의 평상복이 눈에 익었다. 일이나 본인 생활은 제쳐 두고 내 옆에 붙어 뒤치다꺼리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그 바쁜 주태승이, 나를 위해.
……정말 회사 잘리는 거 아니겠지?
능력도 좋다는데 설마 자르겠어. 재벌가 일원이니까 쌓아 둔 돈 많을 거야. 지금도 이 비싼 1인실 입원비 본인이 다 수납하고 왔잖아. 그러니까 너무 불편해하지 말자.
속으로 되뇌어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자, 가까이 다가온 주태승이 자세를 낮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또 뭐가 걸려서 대답도 안 해.”
“아뇨, 그냥.”
나는 고급스러운 코트를 쭈뼛쭈뼛 팔에 꿰어 넣었다. 아무래도 입원하면서 주태승의 돈과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듯하여 신경 쓰였다. 다시 멀어질 사이라면 이렇게 빚을 지는 건 달갑지 않은데.
“제가 밥이라도 한 끼 살까요?”
대뜸 뜬금없는 제안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도하고 뱉은 말이 아니었기에 당황의 여파로 뺨이 일그러졌다. 주태승 또한 의아했는지, 입을 여는 대신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벼, 별건 아니고요. 그냥 주태승 씨한테 신세 진 것 같아서요.”
“…….”
“싫으면 괜찮아요. 병원비는 계좌 이체로 보낼게요.”
“계좌 이체?”
주태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허탈한 웃음 비스름한 것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놈의 계좌 이체는 전부터 포기를 못 하네. 선 긋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
그럼 현금으로 준다고 할 수도 없지 않나, ATM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어색하게 코트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주태승은 잠자코 내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돈은 됐으니까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습니까?”
“밥 먹자고요?”
“그건 아닌데, 배고파요?”
“아뇨.”
밥 먹는 게 아니면 뭘 하자는 거지. 주태승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따라가기가 망설여졌다.
아픈 사람 데리고 호텔이라도 가자는 건 아닐 테고. 아, 보통 사람과는 사고가 다르니까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보여 준 모습으로 봐서는 나름 배려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알쏭달쏭하다. 한결같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점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모양이었다. 의식하고 얼굴을 펴자 일그러져 있던 눈썹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주태승은 물끄러미 내 행동을 지켜보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엉뚱한 곳 데려가려는 거 아닙니다. 그래도 안 내키면 거절해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주태승은 좋겠다. 본인은 남의 생각을 아는데 남은 본인 생각 몰라서. 그가 얄궂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주태승을 위해 약간 정도는 시간을 내고자 마음먹었다.
“아니에요, 가요.”
“괜찮겠어요? 나랑 있는 거 싫어하잖아.”
“내내 붙어 있었으면서.”
“그건 여진서 씨 보호자가 필요 불가결한 상황이었고, 지금은 멀쩡한 시간을 나한테 쓰라는 거니까.”
언제는 뭐 동의 구해서 찾아왔나. 안하무인으로 굴지 않는 주태승이 꽤 낯설었다. 오늘따라 묘하게 정중한 것 같기도 하다. 표정 변화가 없는 건 여전하지만. 나는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길고 수려한 손이 허공을 가로질러 내 앞에 멈춰 섰다. 너른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얹자, 주태승이 팔목의 각도를 바꿔 깍지를 껴 왔다. 그의 손가락이 마디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갈까요.”
손을 마주 잡은 주태승과 나, 배 속에 들어 있는 겨울이. 연결된 세 사람은 그렇게 따스한 볕에 감싸인 병실을 나섰다.
***
조수석에 나를 태운 주태승은 처음 가 보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점점 건물과 인적이 드물어지는 것으로 보았을 때, 도심 외곽을 향해 달리고 있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리에 비치는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유럽풍의 건물이 있던 자리를 푸르스름한 소나무가 대신했고, 활기를 띤 도시의 소음은 편안한 고요로 바뀌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데 내가 생활하던 곳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빈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나는 겨울 숲이 우거진 풍경을 홀린 듯이 눈에 담았다. 내가 부산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려도 주태승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어느 공터 앞에 멈춰 섰다. 주태승은 목적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나는 먼저 내린 그를 따라 조수석 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현실과 동떨어진 장면이었다.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고즈넉한 별장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 하나가 정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는지, 밖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저게 뭐예요?”
유리 건물에 시선을 빼앗긴 내가 묻자, 주태승은 짧게 답을 내놓았다.
“보면 알아요.”
저기 들어가려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주태승이 또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유치원생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은근한 배려가 싫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주태승은 나를 데리고 유리 건물의 문을 열었다. 어영부영 들어간 그 장소에서, 나는 인생에서 처음 보는 특이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
겨울에 웬만해서 맡을 수 없는 짙은 신록의 향이 코를 찔렀다. 둔감해져 있던 후각이 감긴 눈을 뜨는 느낌이었다. 꽃과 나무, 풀의 줄기에서 풍기는 신선한 냄새가 건물 내부를 유유히 감돌았다.
유리 건물의 정체는 온실이었다. 커다란 규모 때문에 마치 작은 숲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대로 자리에 굳어 버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녹색 빛이었다. 밖은 혹한의 계절인데 오직 이곳에만 봄이 온 것만 같았다.
구석에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화단이 보였다. 장미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파란 수국, 앙증맞은 튤립에 이름 모를 꽃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주태승은 연달아 탄성을 내뱉는 나를 지켜보다가 온실 가운데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테이블에는 자그마한 찻주전자와 찻잔, 약간의 다과가 놓여 있었다. 나는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주태승은 묵묵하게 내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여 주었다. 곧 연한 갈색빛이 나는 차가 느릿하게 잔의 바닥을 채웠다.
뭐야, 대체.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다만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주태승의 얼굴이 너무도 진중해 보였다. 혼자 깊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를 곁눈질하며 내 몫의 차로 목을 축였다.
따뜻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감과 동시에 꽃내음이 입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맛있다. 이거 무슨 차일까. 애석하게도 찻주전자에는 차의 종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각자 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배 속에 무언가 들어가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근처에서 풍겨 오는 라벤더 향 또한 안정에 한몫을 더했다.
얼마간 침묵을 유지하던 주태승은, 내가 차를 반쯤 비우고 나서야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여기.”
완벽히 내 취향을 사로잡았다기보다는, 좋은 풍경을 보아 자연스럽게 마음이 편안해진 것에 가까웠다. 아마 길가는 행인을 붙잡고 데려와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터다. 이 산뜻하고 평안한 장소를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질문에 화답했다. 내내 찻잔을 보고 있던 주태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담아냈다.
곧 얕게 갈라진 목소리가 우리 사이의 공백을 파고들었다.
“여진서 씨가 전에 그랬죠, 우리가 한 게 연애 놀음이라고.”
주태승이 꺼낸 건 예상 밖의 주제였다. 연애 놀음. 우리가 주고받은 불완전한 시간을 일컫는 단어였다. 나는 그 말을 들먹이며 그에게 분노하고, 울고, 내가 휘두른 언어의 칼날에 스스로 상처 입었다.
나도 모르게 눈매가 구겨졌다. 주태승은 내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훑어보았다. 다만 흐르는 음성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잘 몰라요. 보통은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매달려야 하는지.”
“무슨…….”
“그래서 흉내 냈습니다. 이렇게라도 여진서 씨 잡아 보고 싶어서.”
참 주태승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타인의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가 이런 온실에 감흥을 느낄 리 없었다.
언젠가 주태승에게 울분을 쏟은 적이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우리가 한 건 연애가 아니라고, 너는 나를 가지고 놀았고, 나는 놀아났을 뿐이라고. 그토록 미련하게 당신을 좋아했더라고 원망을 토해 냈다.
주태승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온실은 평범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는 어여쁜 풍경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연인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사랑을 모르는 주태승은 이리도 서툴게 나를 잡아 보려 하고 있었다.
“내가 여진서 씨 망친 거 알아요.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진솔함은 다듬어져 있지 않은 날것의 형태를 띤다. 그렇기에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주태승의 미숙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이곳에 와서 알았습니다. 여진서 씨는 내 손이 없어도 설 수 있고, 나를 지나쳐 갈 수 있고, 진심으로 홀로 버틸 각오를 하고 왔다는걸.”
“…….”
“어쩌면 시간이 흘러, 나를 전부 잊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내가 당신과 보낸 날들을 잊을 리가 없잖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도, 아픈 순간도 다 당신과 함께였는데.
목구멍이 따갑게 조여 왔다. 하지만 차로 목을 축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겨우 타액을 넘겨 가슴의 둔통을 억누르려 들었다. 주태승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짤막한 문장을 입술 사이로 내보냈다.
“근데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게 안 될 것 같아.”
언뜻 덤덤한 목소리 끝이 살짝 경련하고 있었다. 주태승이 전하는 진심은 그렇게나 간절하고, 애달픈 것이었다.
“네가 나를 미워하고 멸시해서 영영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그런 너를 계속 사랑할 것 같아.”
짜증 나. 주태승 주제에 저런 절절한 소리나 해 대고.
“진서야.”
“…….”
“너를 괴롭게 만든 게 나니까, 책임도 내가 지면 안 될까.”
나는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울음 섞인 웃음을 게워 냈다. 저 책임지겠다는 말이 참 주태승다워서, 이게 그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인 것 같아서. 그래서 웃음이 났다. 이 확신에 찬 태도를 사무치게 미워하고, 지독하게 사랑했었다.
“남들이 하는 보통 사랑은 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난 그 이상을, 여진서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줄게.”
“흐, 으.”
“이제 울지 않고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
“그러니까 기회를 줘.”
고백하는 거야, 뭐야.
진짜 약아 빠졌다. 저런 말을 들으면 난 또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아는 사랑은 당신이 전부인 거 알잖아. 개새끼가 나를 박하게 키워 놔서 다정한 말을 들으면 바로 울 것 같단 말이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자, 나를 보는 주태승의 눈빛이 유약하게 떨렸다. 마치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주태승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당장 같이 살자는 거 아니야.”
연애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했던 것처럼 같이 사는 줄 아나 보다. 이 화상한테 뭘 어떻게 알려 줘야 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손끝에 걸리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가, 입에 대지 않고 내려놓았다.
“차가 너무 식었어요.”
나는 괜히 찻잔의 표면을 톡톡, 소리가 나도록 건드렸다. 목까지 차오른 감정의 응어리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했다. 주태승은 올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언제든 다시 데울 수 있어.”
아.
그 말에 꾸역꾸역 참았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얀 테이블의 표면에 맺히는 투명한 방울을 보고, 나는 더욱 숨죽여 흐느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뺨을 소매로 벅벅 닦았다. 빈을 벗어날 때와는 달리, 창문 밖을 내다보는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부어 있다. 단지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꼴이 엉망이 되었다.
이놈의 나라는 왜 맨날 눈이 내리는 거야, 근데 눈 오니까 더 예쁘네.
모순으로 똘똘 뭉친 불평을 내놓으며 나는 오기로 바깥을 구경했다. 주태승은 이따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으나, 먼저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사실 풍경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자꾸만 시선이 돌아가려는 것을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창문은 담아낸 장면을 빠르게 바꾸어 나갔다. 수풀이 우거진 산림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낯익은 빈의 도시가 유리에 비쳤다. 집에 가까워져 아는 골목이 모습을 드러낼수록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차가 노란 아파트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째깍째깍, 비상등을 켠 차체에서 초침 소리를 닮은 잡음이 퍼져 나갔다. 이제 차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하지만 어쩐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아, 나는 정면을 보고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핸들에서 손을 뗀 주태승이 아예 조수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입은 코트에서 나는 체취와 은근한 페로몬이 코끝에 맴돌았다. 도무지 일렁이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여진서 씨.”
“네.”
“난 내일모레,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고,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언제까지나 오스트리아에 붙들려 허송세월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내 표정을 살피던 주태승이 운전석 옆의 콘솔 박스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언가 딸려 나왔으나 손등에 가려져 확인하기 어려웠다.
“오스트리아에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
“이제 단원들이 여진서 씨한테 피해 줄 일 절대 없을 테니까, 마주치지도 않을 거고.”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주태승은 내가 악단에서 겪은 고초를 다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계단에서 민 범인도 찾았을까.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안 듣는 편이 태교에 좋을 것 같았다.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이전에 해코지를 했던 서정후도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못했으니. 내가 그동안 골머리 썩던 문제가 주태승의 손에서 쉽게 해결되는 모습이 조금 허무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거.”
주태승이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놓인 물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물건의 정체는 자그마한 쪽지와 열쇠였다.
“아까 갔던 온실 뒤 저택 열쇠랑 주소입니다.”
“네?”
그게 주태승 소유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별장인 건지, 설마하니 나 때문에 구매한 건지.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간에 보통 사람은 범접하기 어려운 사치였다.
나는 차마 열쇠를 받지 못하고 굳어 버렸지만, 주태승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열쇠, 하나밖에 없어요. 여진서 씨가 열어 주지 않으면 나도 못 들어가.”
툭, 금속 열쇠와 종이가 내 손에 떨어졌다. 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주태승은 오롯이 나만의 장소를 만들어 주려는 듯했다. 집을 선물한 그조차 동의를 구해야만 하는, 내가 꼭꼭 숨어서 쉴 장소를.
“빈 시내에서 멀지 않아서 출퇴근하기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차 필요하면 말해요, 면허 먼저 따야겠지만. 여진서 씨가 원하면 사용인도 고용해 두겠습니다.”
“그…….”
“내가 준 집에서 사는 게 아무래도 찝찝하면 그냥 처분해도 되고.”
마지막 말을 전할 때는 목소리가 다소 침체된 것처럼 들렸다. 나는 갑작스레 받은 어마어마한 선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내 병실에 붙어 있었으면서 언제 이런 준비를 다 한 건지 의아했다.
긴 문장을 뱉은 주태승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한 박자 늦게 운을 뗐다.
“만약 혹시라도, 여진서 씨가 내게 기회를 줘서…….”
이번에는 앞선 계획을 설명할 때보다 망설임이 길었다. 주태승이 내쉬는 호흡이 널찍한 차 내부에 얕게 흩어졌다. 덩달아 초조해진 나는 손에 열쇠를 쥔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이 한국 가고 싶으면 내일모레 3시까지 공항으로 나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이 끝나자 주태승은 하얀 봉투를 건네주었다. 크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비행기 티켓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버석거리는 봉투를 얼떨떨하게 받아 들었다.
“하고 싶은 말 끝났습니다. 이제 여진서 씨 몫이에요.”
주태승은 그렇게 내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맡기고 말을 마쳤다. 열쇠와 티켓. 내 손에 놓인 물건은 너무도 가벼운 것이었으나 물건이 가진 의미는 더없이 묵직했다. 그는 내게 마음을 주었고, 우리의 미래를 고를 권한을 주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깊은 고민을 거쳐야 할 터다. 내가 꼼짝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리자, 주태승은 잠자코 내 옆모습을 응시했다.
곧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됩니까?”
정중했으나 깊은 욕구가 서려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나는 열기를 머금은 주태승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주태승은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조금 다급한 포옹이 이어졌다. 나는 너른 품에 안겨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등을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빈틈없이 나를 안으면서도 배가 눌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향취를 듬뿍 맡자 가슴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입을 맞춰도 된다고까지는 안 했는데, 주태승은 내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으응.”
미지근한 손이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감각을 기억에 새기려는 듯, 주태승은 내 살결 이곳저곳에 손을 뻗었다. 각자 페로몬을 그럭저럭 추슬러 두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여기서…….
나와 주태승은 충분히 서로를 안고, 체온을 교환한 후에 몸을 떼어 냈다. 온기가 멀어지자 안타까움이 못내 밀려왔다.
“조심히 들어가요.”
“주태승 씨도요.”
담백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차 문을 열었다. 몇 개월간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던 작은 아파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막막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피어오른 하얀 아지랑이가 허공에 곡선을 그렸다. 뺨에 닿는 겨울 공기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
“하암…….”
침대에 푹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켜, 나는 비스듬히 일어나 앉았다. 부은 눈가가 팽팽하게 당겨 왔다. 뺨이 까칠하고 건조해진 게 느껴졌다. 아마 필시 머리카락도 새집처럼 헝클어져 있을 터였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주태승과 헤어진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졌으니 반나절은 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 사위가 밝은 게 이상했다. 나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반나절이 아니라 하루를 꼬박 잔 것이었다.
“정신 나갔네.”
떨리는 눈이 몇 차례나 휴대 전화 화면을 훑었다. 진득하니 고민 좀 해 보려고 했더니 몸이 버텨 주지를 않는다. 주태승의 출국은 내일이었다. 그나마 하루 정도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뒤숭숭한 심정으로 느직느직 침실을 나섰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들이 전부 꿈만 같았다. 주태승과 함께 온실에 가고, 고백 아닌 고백을 받고, 차 안에서 포옹을 나눈 것까지 현실감이 없었다.
나른한 걸음이 부엌에 다다랐다. 나는 테이블 위를 보고 얕게 미간을 찌푸렸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를 증명하듯 열쇠와 티켓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이제 선택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쪼르륵, 차가운 물이 유리잔 안에 한가득 쏟아졌다. 나는 냉수를 들이켜며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열쇠를 보는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말을 험하게 할지언정 주태승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 아마 단원들과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도, 집을 주겠다는 말도 전부 사실일 터다. 내가 원한다면 그 이상의 지원도 기꺼이 보태 주리라.
어제 본 별장은 내가 본 집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마 저 호화로운 곳에서 지내면 부족함 없이 겨울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몬트 교향악단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교향악단이었다. 특히 지휘자인 다니엘 리히터는 젊은 나이에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단원들과 여러모로 잡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경력을 쌓기에 더할 나위 없는 직장이었다.
나는 플루트를 사랑한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내 전부가 되었다. 애정이 있었으니 당연히 인정받고 싶었다. 유명한 플루티스트가 되는 건 엄마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다.
다만 그 이전에 엄마와 나눈 가장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행복하자.
오스트리아에 남아 몬트 교향악단에서 버티고, 겨울이 와 둘이 살아가면 나는 행복할까. 그야 행복하겠지. 연주자로서 성공했으며 어여쁜 아이도 있으니.
나는 소리 없이 비행기 티켓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국에 가면 주태승과 함께하게 된다. 플루트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고, 겨울이에게 온전한 가족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애초에 한국이 본거지인 사람이니 오스트리아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욱 편안한 환경을 안겨 줄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속적인 고민이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 마음은 어떤데?
주태승을 증오했다. 너무 미워 그를 벗어나 머나먼 타국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게 순수한 증오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미워하는 만큼이나 그 사람을 사랑했다. 모순적인 감정은 마음의 바다에서 파도처럼 일렁여 내내 사투를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주태승의 여러 일면을 보게 되었다. 감정이 없는 그가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며, 내 말에 기뻐하고, 때로는 무너졌다. 눈을 돌리려 해도 그가 나로 인해 변하는 과정이 가슴을 조여 왔다.
내게 사과하던 주태승, 살아 달라고 빌던 주태승, 책임을 지겠다는 주태승.
내가 맞닥뜨린 주태승들이 머릿속을 가만가만 스쳐 갔다. 기억을 상기하니 목이 타고, 절절 끓는 용암을 삼킨 듯 배 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에게서 갈증을 느낀다. 애달픈 기갈을 해소하는 법은 하나뿐이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별수 없다. 나는 주태승을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하여 이 사람이 남긴 상처가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살아가는 날 동안 종종 떠올라 나를 괴롭히고, 우리 사이의 장애로 남아 눈물로 밤을 지새게 할지도 모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꿈결을 헤매며 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해 준 말이 귓가에 원을 그렸다.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을 때는 그냥 진서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길을 만드는 것도,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나의 몫.
마음이 가리키는 이정표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로 뛰쳐 들어갔다. 헐레벌떡 챙긴 것은 캐시미어 코트 한 벌이었다. 소매를 팔에 꿰고 단추를 채우는 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휴대 전화로 손을 뻗었다.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누르고 기다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를 든 채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지금 단장님 계신가요?】
쾅, 두꺼운 현관문이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