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1)
『잘 지냈어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의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익숙지 않은 이국의 언어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꾸벅이고 의자에 앉았다. 목덜미를 감싼 까끌까끌한 니트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아.』
내 얼굴을 살피던 의사가 뒤늦게 옅은 신음을 흘렸다. 독일어로 건넸던 인사와 달리, 이번에는 유창한 영어 문장이 귓가에 들어왔다.
『살이 점점 붙고 있네요.』
영어는 독일어보다 훨씬 알아듣기 쉬웠다. 의사 또한 그 부분을 알고 나를 배려한 것일 터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폴라 티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살갗을 벅벅 긁으니 가려움이 한결 나아졌다.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요. 그게 아이한테도 좋으니까. 물은 가급적 많이 마시고요.』
아이한테 좋다.
나는 가만히 품이 큰 니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납작한 가슴팍과 명치를 지나 아랫배에서 손이 멈췄다. 다른 부위와 달리 미약하게 부피감이 느껴졌다. 드러나기 시작한 신체적 변화가 낯설어, 눈매가 저절로 구겨졌다.
정말 이 안에 애가 있긴 한가 보다.
아주 가끔 배 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아이를 가진 게 처음이 아니었으나, 몇 개월이나 품고 있어 본 적은 없었기에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그와 더불어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짝 와닿았다.
『밤에 잘 때 불편하지는 않나요?』
어떻게 해야 하지.
계획에 없는 임신은 사고와도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막연함은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배가 부풀어 오를수록 불안은 커져 갔다.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었으니, 설령 낳게 된다고 하더라도 잘 키워 낼 자신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해야 하는데 계절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3개월째나 됐을 때 덜컥 임신 사실을 알았으니 당연하다. 식이 장애나 피로 따위의 증상을 안일하게 넘겼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서 씨?』
도망치듯 오스트리아로 날아와 지난 한 달 동안, 수도 없이 아이를 지우는 길을 생각했다. 몇 번은 정말 실행에 옮기고자 병원에 간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번번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멍청하게 꼴에 부성애라도 자라난 걸까.
어쩌면 오메가의 본능이 두 번씩이나 아이를 잃을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참 지랄 맞은 형질이었다. 지금 주인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자각도 못 하냐고.
이성과 감성은 이 순간에도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야트막한 아랫배를 꽉 감싸 쥐었다. 더 늦으면 선택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좌우지간 나는 빠르게 더 나은 판단을 해야만 했다.
짝-.
갑작스레 코앞에서 파열음이 났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선을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의사의 손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한 차례 더 손뼉을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나요?』
『아, 아뇨.』
『초음파 검사 결과 이야기를 좀 할게요. 다행히 아이는 무척 건강해요. 영상을 보면…….』
의사가 컴퓨터 화면으로 팔을 뻗었다. 무의식중에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아이의 모습을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거부감이 있다기보다는, 겁이 났다.
『안 보여 주셔도 괜찮아요.』
『네?』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내 뺨에 따라붙었다. 저 파란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나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책상 모서리 끝을 보고 말했다.
『건강하면, 그, 됐어요.』
의사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내 낯빛을 속속들이 관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세상에 어떤 오메가가 제 새끼 보기 싫다며 땅에 고개를 처박을까.
잠시 진료실에 정적이 흘렀다.
차라리 지금 이 타이밍에 아이를 지우겠다고 말해야 하나.
당연히 입이 냉큼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부르튼 아랫입술이 이도 저도 못 하고 달싹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뭘 망설이고 있어. 그럼 애 혼자 낳아서 키울 거야?
『그럼 이거라도.』
의사의 주름진 손이 무언가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짓누르다가, 마지못해 책상 위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았다. 보기 싫어도 눈이 자연스럽게 거무스름한 형태를 훑었다. 아직은 사람보다는 세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게 후에 나를 반 정도 닮은 얼굴로 변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검은 게 아기집이에요.』
『아기, 집.』
『귀엽죠?』
아, 이러면…….
나는 머뭇머뭇 손을 뻗어, 얼른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좀도둑질처럼 거친 손길에 모서리가 약간 구겨졌다. 내 꼴을 본 의사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다음 정기 검진 때 뵈어요.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바로 병원으로 오시고요.』
『네.』
짧은 인사가 오가고, 나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은 조용한 마을의 외진 건물 2층에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흔치 않은 일이지만, 혹여나 아는 이를 마주칠까 선택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입단한 단원에게 애가 있다는 소문이 따라붙어 봤자 좋을 건 없을 것이다.
나는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계단을 내려갔다. 품이 널찍한 옷을 입으니 임신 상태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른 체형이라 그런 건지, 남성 오메가인 탓인지 배도 아주 조금만 나온 편이라 다행이었다.
“읏.”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시린 손을 쑤셔 넣었다. 오스트리아의 공기는 한국보다 시려웠다. 어쩌면 이 나라에 홀로 떠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태승과 헤어진 후, 내가 선택한 건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일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교수님께 건 전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다.
사실 정신은 아직도 그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빗속에서 주고받은 통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주태승, 도망치듯 오른 택시에서 들은 굉음.
그렇게 오스트리아에 왔으나 한동안 방구석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엉엉 울었다가, 소리를 질렀다가 하며 우울과 충격에서 허우적댔다.
지금도 믿기 어려웠다. 죽은 내가 살아나 주태승과 다시 만났다니.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감이 없었다.
심지어 배에 그의 아이를 가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야속한 상흔이 우리의 질긴 인연을 증명하는 듯했다.
주태승을 떠올리면 온갖 격한 감정이 사무쳤다. 첫 번째 만남에선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고, 두 번째에서는 나를 가지고 놀았다. 심지어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으로 사람 마음을 헤집었다.
그래서 나는 병신같이 그 새끼를.
짜증이 난다. 타인을 그토록 깊게 마음에 품은 건 처음이었다. 따라서 배신감은 애정만큼, 아니, 그보다 갑절은 컸다. 마음이 거무스름한 증오에 잠식되어 새하얀 애정을 목 졸라 죽여 버리는 듯했다.
집까지 가는 길이 아득히 멀었다. 나는 길가에 멈춘 택시 한 대에 올라탔다.
『어서 오세요.』
『이 주소로 가 주세요.』
아파트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받은 택시기사가 매끄럽게 차를 몰았다. 몇 걸음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피로감이 몰려왔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사진이 잡스러운 소음을 냈다.
나는 잔상처럼 흩어지는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연심을 사과에 비유한다.
멋모르고 시작하는 첫사랑은 연둣빛 풋사과를 닮았으며, 서로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는 사랑은 달콤한 홍옥과 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움켜쥔 건 파과였다. 앞선 싱그러운 계절을 다 보내고, 바닥에 떨어져 온갖 생채기를 안은 채 문드러지는. 상한 자국으로 점철된 과실이었다.
***
오스트리아의 아파트는 한국의 빌라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좁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담한 보금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지는 않으나 나름 침실도 따로 갖춘 집이었다. 악단의 배려로 괜찮은 아파트에서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대충 코트를 벗어 던지고 부엌을 향했다. 굶주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몇 주 전부터 이상하게 식욕이 늘었다. 꼭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따져 보면 배 속에 진짜로 뭐가 있긴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한인 마트에서 산 김치와 햄 따위가 늘어져 있었다. 거창한 요리를 차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충 김치볶음밥이나 해서 먹어야겠다.
김치와 햄, 햇반이 차례로 선반에 올라갔다. 나는 기계적으로 채소를 다지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축 처진 기분과는 상관없이 입에 침이 고였다.
치익-.
새빨간 김치가 노르스름하게 익어 갔다. 이제 여기서 살려면 서양 음식에도 적응해야 하는데 자꾸 한식에 손이 간다. 지금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은 게 내 의지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한국인들 자식 아니랄까 봐, 아이가 쌀밥을 찾아 대는 건가 싶다.
나는 무신경하게 볶음밥을 휘젓다가, 계란을 부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누군가 있다면 대신 프라이팬을 봐 달라고 할 텐데. 벌써 살짝 탄내가 풍겨 왔다.
-주태승 씨.
-네.
-저 계란프라이 해야 하니까 이것 좀 봐 주실래요?
아, 씨발.
-왜?
-뭐가 왜예요. 진짜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보고 있으라며.
왜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오르냐고. 나는 손에 쥔 계란을 그대로 와작, 깨 버렸다. 끈적한 흰자가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사실 깨고 싶은 건 계란이 아니라 내 머리통이었다. 추억이랍시고 무의식중에 주태승을 생각하는 뇌가 한심했다. 프라이팬에 눌어붙는 볶음밥을 보니 화가 들끓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볶음밥을 프라이팬째로 들어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빨갛게 물든 밥알이 후드득 미끄러졌다. 물이 닿은 팬에서 하얀 증기가 요란스레 피어올랐다.
미친놈 하나 때문에 멀쩡한 밥도 못 먹는다. 나는 자리에 있지도 않은 주태승을 또 원망하며 손을 씻었다.
김치볶음밥은 먹기 싫어졌지만, 허기는 여전했다. 냉장고에 간단히 먹을 거라고는 아침 식사용으로 사다 놓은 모닝빵이 전부였다. 나는 빵을 봉지째 들고 미적미적 침실로 걸어갔다.
벗어 던진 코트 주머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초음파 사진이 보였다. 나는 빵을 입에 물며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하.”
눈도, 코도, 입도 없다. 이게 나중에 사람이 된다니.
엄마는 날 가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뭔지 모를 까만 점 따위를 마주하고서도 기뻤으려나. 부모 된 자의 마음이란 그런 건가.
빵 하나로는 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물렁물렁한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새 빵을 꾸역꾸역 씹어 댔다. 수분이 없어 목이 턱 막혔다. 태어나서 이 정도로 식욕이 터진 적이 없는데, 아마 배 속의 이 녀석 탓이리라.
“너 왜 이렇게 많이 먹어.”
피곤하고, 배고프고 아주 난리가 났다. 나는 빵 두어 개를 손가락에 끼운 후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와 더불어 입으로는 부지런히 음식을 삼켰다.
“그렇게 배고파?”
아이는 입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슬슬 배가 차니 잠이 쏟아졌다. 눈꺼풀을 닫자 초음파 사진 속 점박이가 아른거렸다. 뜬금없이 부모로서의 애정이 생겨난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이 났다.
“우리 진짜 어쩌냐…….”
입가에 맥 빠진 웃음이 걸렸다. 방금 한 말은 꽤 진심이었다. 나는 손등을 이마에 얹고 실실거렸다.
씨발, 그냥 얘랑 둘이 살까.
어떻게든 돈 모아서……. 많이 부족해도 일단 살면 살아지려나. 계약금 안 쓰고 월급 저축하면 둘이 지낼 집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녀석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 같은 부모를 만나서.
나는 뜨끈한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다가 끔뻑 잠이 들었다.
***
커다란 연습실에 현악기와 관악기가 내는 소리가 웅장하게 퍼졌다. 나는 그 가운데 서서 열렬히 플루트에 숨을 불어 넣고 있었다.
♪-.
협주 뒤의 바이올린 독주를 끝으로 곡은 마무리되었다. 관현악단에서 하는 연습은 대학생 때의 합주와 차원이 달랐다. 긴장감으로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나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팔을 내려놓았다.
『고생했어요. 30분 쉬었다가 합시다.』
지휘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나는 각각 무리 지어 연습실을 떠나는 단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동기들이 말을 걸어 주는 게 당연했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사람들은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혼자 연습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배고프다. 집에 가서 뭐 먹지. 가는 길에 빵이나 사 갈까, 냉장고 안에 있는 거 다 먹었는데.
아무래도 좋을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머리 위에서 들릴 리 없는 고향의 언어가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어눌하기는 해도 분명 한국어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키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 앞에 선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슈아?』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요?』
조슈아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악단에 온 날부터 내게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면 늘 먼저 다가와 나를 챙기고는 했다. 전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보다 네 살 정도가 많았다. 아직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또래 동료가 있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조슈아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걸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어디쯤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인사밖에 몰라요. 진서가 한국인이니까 어제 배웠지.』
『아…….』
『앞으로 더 공부해 올게요. 인사 말고도, 밥 먹었는지나 잠은 잘 잤는지 같은 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참 타인에게 호의적이다. 당장 내가 본 조슈아는 대형견 같은 인상이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멀거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조슈아가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딸려 나온 건 작은 초코바였다.
『배고프죠? 이거 먹어요.』
『고마워요.』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초코바를 받았다. 포장지가 내용물에 딱 붙어 있어 까기 쉽지 않았다. 손톱이 계속 봉지 끝에서 헛돌았다.
『오스트리아는 지낼 만해요?』
조슈아는 본인 몫의 초코바를 손쉽게 뜯었다. 나는 잠시 적절한 대답을 생각하느라 손을 멈췄다.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데, 먼저 한국어로 생각한 다음 영어로 바꿔 말하려니 더 대화가 늦어졌다.
『좋아요. 공기가 맑아서.』
『한국은 아니에요?』
『한국은, 차가 많아요. 사람들은 항상 바쁘고.』
찌익, 끈질기게 버티던 포장지가 이윽고 입을 벌렸다. 나는 손가락 크기의 초코바를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단 걸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다.
문득 뺨을 간질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이쪽을 쳐다보는 조슈아를 애써 무시했다. 왜 저렇게 보지. 다소 부담스러웠으나 주전부리를 먹는 입은 성실히 움직였다.
『햄스터 같아요.』
조슈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뒤이어 대뜸 큰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서양에서는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건가. 나는 당황한 마음에 그의 손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의 뺨을 자주 만지작대는 사람이 있었다. 손 크기가 엇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그쪽은 체온이 더 낮고, 보통 뺨을 지분대다가 키스로 이어지고는 했다.
……아니, 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스킨십 한 번 했다고 바로 주태승이 떠오르는 게 싫었다. 내 표정이 굳어지자 조슈아는 얼른 손을 떼어 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싫었어요?』
나는 입 안에 남은 초코바를 꿀꺽 삼켰다.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려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애 가진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뭐만 먹으면 무의식중에 자꾸 배를 만지게 된다.
『좀 놀랐어요.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하지만 외국어로 완곡하게 둘러대는 표현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런 말 들으니 서운한데.』
조슈아가 씁쓸한 투로 중얼거렸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건 사실인데 뭘 저렇게 기가 죽어. 불퉁한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은근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대충 괜찮다고 할 걸 그랬나 보다.
『저, 조슈아.』
『친해질 겸, 다음 휴일에 같이 놀러 갈까요?』
사람 기분이 이렇게 휙휙 바뀔 수가 있나.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조슈아의 낯빛에서 시무룩한 기색이 말끔히 지워졌다. 어느새 그 자리를 빛나는 활기가 채웠다. 언뜻 엉덩이뼈 위에서 꼬리가 팔랑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따라가기 버겁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한 눈에서 긍정적인 답을 원하는 기운이 풀풀 풍겨 왔다.
『갑자기요?』
『나도 미국에서 왔어요. 그래서 처음 적응할 때 힘들었거든요. 진서 보면 그 생각이 나요.』
나는 조용히 조슈아의 이목구비를 관찰했다. 전부터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베타다. 적어도 히트사이클에 어영부영 몸을 섞는 불상사는 없을 터다. 그놈의 형질 때문에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했다. 그가 베타라는 것이 그나마 안심이었다.
『너무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그 말을 덧붙이며 조슈아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뭐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 개방적인 표현법은 아직 어색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의지의 외국인은 끈질기게 졸라 댔다.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생필품도 사야 하잖아요?』
『…….』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구경은 몰라도 생필품을 사야 하는 건 맞았다. 변변한 접시와 컵이 없어 일회용품을 몇 번 재활용 하거나 생수병을 통째로 들이켜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니 생활할 환경은 어느 정도 갖춰야 할 것이다.
다 먹은 초코바 포장지가 내 손에서 이리저리 접혔다. 나는 심드렁하게 비닐을 딱지 모양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언제까지고 외로움을 친구 삼아 지낼 수는 없다. 좌우지간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취업했고, 이곳에 발을 붙여야만 한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어서야 천 년을 살아도 녹아들기 어려우리라.
『그래요.』
『와, 약속했어요?』
조슈아는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연습이 끝난 후, 마트에 들러 빵을 사서 나오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오스트리아의 추위는 만만치 않았다. 그 와중에 하늘에서는 눈까지 내리고 있었다. 한숨을 쉬자 뽀얀 입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한국에서는 겨울에도 좀처럼 눈을 보기가 힘든데, 이곳은 눈발이 꽤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벌써 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인 곳도 보였다.
집에 가서 뭐 따끈한 거라도 먹어야 살겠다. 나는 코트 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맵고 팔팔 끓는 국물이 점점 절실해졌다.
눈 내리는 거리는 고요했다. 뽀드득, 내가 발을 옮기는 곳마다 옴폭한 자취가 남았다. 일곱 살짜리 아이도 아닌데 묘한 쾌감이 일었다. 내일이면 빙판길에 넘어질까 노심초사하겠지만.
나는 옆구리에 빵 봉지를 끼고 멀거니 눈을 밟았다. 내놓은 얼굴에 조금씩 감각이 사라졌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코트 따위로 견딜 추위가 아니었다. 휴일에 옷도 좀 사야겠다. 한국에 짐을 몽땅 두고 오는 바람에 급하게 산 옷 서너 벌을 돌려 입는 실정이었다.
하여튼 세상 밖에 나오면 돈 들어갈 일투성이였다.
골목 구석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눈 오는 날에 강아지와 아이가 뛰어다니는 건 만국 공통인 모양이었다. 나는 단란한 풍경을 멀찍이서 내다보다가 아랫배를 한 차례 더듬었다.
이 아이도 나중에 저 장면의 일부가 될까.
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으니 아이를 자주 울게 만들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녀석을 낳아야 할지, 말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불안하고, 부족하고, 외로운 반쪽짜리 인간이 타인을 책임질 수 있을까.
“……미안.”
내 사과가 공기 중에 맥없이 흩어졌다. 배 속 아이는 부모의 감정을 공유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방금 또 죄를 저지른 거다.
길가의 소음이 멀어졌다. 나는 다시 고요 속을 걸었다. 고장 난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다.
가볍게 앞머리를 털자 하얀 눈이 떨어졌다. 나는 꽁공 얼어붙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열쇠를 어디에 넣어 놨더라. 빨리 집에 들어가 온수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다.
아, 있다.
열쇠를 찾은 내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거무스름한 인영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주변에는 누구도 없었다. 당연하다. 들뜬 아이들을 제외하면 이 추위에 굳이 밖에 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무슨 사연인지 저 인영은 건물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에 눈이 쌓이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아파트에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찝찝했다. 저 윤곽이 이상하게 낯익다. 본능적으로 목 근처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파삭-.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퍼졌다.
남자가 내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땅을 헤매다가 내게로 향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흐, 읍.”
반사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한순간도 저 검은 눈동자를 잊은 적이 없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상대의 목을 조르는 뱀 같은 눈. 다 그대로였다. 그는 여전히 서릿발을 닮은 눈매를 달고 있었다.
“주태승……?”
눈이 나를 담는다. 곧 잡아먹힌다. 또, 또 진흙탕에 빠진다.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달았다. 복잡한 감정은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나는 신음하며 목울대로 타액을 넘겼다.
주태승의 입술이 빠끔거렸다. 무어라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내 쪽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이든 나는 두 번 다시 그에게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몸은 머리보다 판단이 빨랐다. 나는 곧장 뒤로 돌아 눈 쌓인 거리를 내달렸다. 혼란한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쉴 수 없었다. 최대한 속히 이 장소와 멀어져야 했다.
저 개새끼가.
내가 왜 타국까지 떠나왔는데, 누구 때문에 혼자 버티는데. 왜, 왜. 이제 겨우 아등바등 살아 보려고 하잖아.
근데 당신은, 씨발, 내 노력을 단번에 물거품으로 만들려고…….
“하아, 하, 씹.”
아물지 못한 내면의 상처가 핏물을 왈칵 토해 냈다.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어설픈 모래성 같은 내 세상이 한 번의 파도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아듣게 말했잖아. 다 들었잖아,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미워하는지. 근데 어떻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나냐고. 단단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짜증을 못 이겨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손에서 빠져나간 빵 봉지가 눈밭을 뒹굴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할딱할딱 숨을 들이쉬었다. 하얀 김이 안개처럼 입가를 맴돌았다.
***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어젯밤을 떠올리면 좋을 턱이 없었다. 나는 이틀째 입는 니트를 손가락으로 들추고 킁킁거렸다. 올라오는 건 포근한 섬유유연제 냄새뿐이었다. 그러나 찝찝함은 여전했기에 자꾸만 인상이 구겨졌다.
옆에서 바이올린 활에 송진을 바르던 조슈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진서, 무슨 일 있어요?』
나는 그에게 한 차례 눈길을 주었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참 큰일이 있기는 했었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전전해야만 했던 사건이.
지금도 아파트 앞에서 본 풍경이 눈앞에 생생했다. 어깨에 눈을 짊어진 채 나를 바라보던 눈은 분명 주태승의 것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좋든, 싫든 그와 마주하며 보낸 계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란스러웠으니까.
몸이 멀어지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레 마음도 침식되리라 믿었다. 깎이고 깎여 언젠가는 과거를 떠올려도 괜찮은 날이 올 거라고. 하지만 주태승의 등장 한 번으로 감정은 잠잠해질 새도 없이 범람하고 말았다.
대체 왜 나타나서.
애초에 사고 난 거 아니었나? 물론 직접 목격한 게 아니었기에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 큰 소리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눈에 홀려서 헛것이라도 본 건가.
『진서?』
『아, 네.』
『괜찮아요? 안색이 나빠요.』
나는 괜히 까칠한 뺨을 매만졌다. 억지로 묵게 된 호텔은 침구가 엉망이었다. 시트는 딱딱했으며, 이불에 정체 모를 얼룩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떠올리니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또 이상한 얼굴.』
조슈아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슬쩍 목을 틀어 손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에요. 잠을 못 잤어요.』
무안하지도 않은지, 조슈아는 입가에 환한 웃음을 내걸었다. 그가 허공에서 헤엄치던 손을 물려 연습실 출구를 가리켰다.
『근데 진서, 피곤할 일이 늘었어요.』
『뭐가요?』
『단장이 찾아요. 따로 할 말이 있나 봐요.』
막 입단했을 때를 빼면 불려 간 일이 없었기에 다소 의아했다. 나는 단장의 사무실로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후, 조슈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덩달아 머리를 꾸벅 까딱였다.
그 길로 나는 계단을 따라 사무실로 올라갔다. 교향악단이 이렇게 호화로운 건물도 가지고 있고, 역시 음악의 도시였다.
무슨 볼일이 있길래 찾은 걸까. 나는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했다. 커다란 나무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경을 끼고 있는 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만날 때마다 긴장되는 사람이었다.
다니엘 리히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였다. 그의 커리어를 하나하나 읊자면 입이 아픈 수준으로, 대학에 다닐 때도 해외에서 공연을 보고 온 동기가 들떠서 후기를 늘어놓고는 했다.
나는 신중하게 단장에게 다가갔다. 단장은 모니터를 보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왔어요?』
『네, 저 찾으셨다고…….』
『할 말이 있어서. 연습은 잘 돼요?』
『네.』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는 것 치고는 무뚝뚝한 어조였다. 설마 이런 시답잖은 문답을 이유로 부른 건 아닐 터다.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단장은 내 표정을 한 차례 살피고 곧장 본론을 토해 냈다.
『이번 정기연주회에서 플루트 협주곡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네.』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2번’, 알아요?』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이었다. 나는 짧은 대답으로 긍정했다. 단장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에 졸업 연주회 영상 봤어요.』
『어, 네?』
그게 영상이 있었어?
그럼 무대에서 우는 꼴도 다 봤다는 이야기였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황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나와 정반대로, 단장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덤덤하게 나를 부른 목적을 전했다.
『플루트 솔로, 진서가 맡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어요?』
『제가요?』
협주곡의 독주를 맡은 연주자는 자연스레 어깨가 무거워진다. 몇 분도 아니고, 홀로 몇십 분의 무대를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협주는 합주와 다르다. 무대에 선 모두가 독주하는 이를 돋보이도록 보조해야 하는 구조였다.
이제 막 입단한 신참이 받기에는 과분한 역할이었다. 영상을 얼마나 감명 깊게 봤길래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리 대단한 실력도 아니었는데. 유능한 마에스트로는 범인과 다른 기준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내게는 기회였다.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데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대가 커요.』
단장은 나를 보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뒤이어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말했다.
『가 봐요.』
『네.』
여러모로 담백한 인상이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달린 나무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곧장 개인 연습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나는 계단이 있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갈 때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띄었다. 한 무리의 단원이 계단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단원들은 내 쪽을 흘겼다가, 저들끼리 귓속말을 속살거렸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호의적인 시선이 아닌 건 확실했다. 오히려 은근히 깔보는 듯한 눈빛이 적나라했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자 인파를 지나쳤다. 개 중 일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과장된 몸짓으로 길을 내 주었다. 키가 작은 남성 단원 하나는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잡아당겼다.
설마 인종 차별 하는 건가? 나 저렇게 안 생겼는데.
『……Fresse haben.』
단원 무리는 이제 대놓고 나를 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죄다 복잡한 독일어를 쏟아 냈기에,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왜 지랄이야.
상대하기 귀찮았다. 유치한 텃새에 대해 고민하기에는 이미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개인 연습실을 향했다.
***
연습을 끝내니 늦은 저녁이 되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높은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로는 오늘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반복되는 일상에 사고는 점점 단순해졌다.
파스타 해서 먹을까. 왜 자꾸 매운 게 먹고 싶은 거지. 나나 주태승이나 매운 음식은 선호하지 않는데, 누구를 닮아서.
아, 씨.
또 생각났다. 배 속에 주태승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었다. 주머니 속에 든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애꿎은 안감을 구겼다.
설마 오늘도 집 앞에 있는 건 아니겠지.
진짜 주태승이 맞긴 맞았나?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으니, 아예 환영을 본 걸지도 모른다. 정신이 지쳐 있으므로 아주 생뚱맞은 추측은 아니었다.
나는 나름의 깊은 고찰을 하며 보폭을 옮겼다. 이놈의 건물은 쓸데없이 호화롭고 계단이 많았다. 가뜩이나 요즘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어 심기가 불편했다.
몇 개의 계단을 넘어 이윽고 발이 평지에 닿았다. 정류장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오늘따라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마음이 삐딱하니 바닥 타일의 문양도 촌스러워 보였다. 꽃을 새겨 넣는 것보다 더 나은 디자인은 없었을까. 시선을 땅에 처박고 타일을 째려본 탓에 목뒤가 얼얼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멈췄다.
“……미친.”
길가에 서 있는 검은 차, 그 앞에 익숙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어젯밤에 본 게 헛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그런 물음은 무의미했다. 사는 집까지 알아냈는데 직장도 마찬가지겠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 트인 길가에 숨을 곳 따위 없었다. 그 와중에 다리는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질려 사고가 정지했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있긴 한 건가?
정면을 보던 주태승이 무언가 깨달은 듯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어제와 같이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치치 못했으므로, 나는 오롯이 그의 눈동자에 갇혔다.
둘 사이의 여백이 점차 좁아졌다.
나는 다가오는 검은 구두를 보고 작게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아랫배가 살짝 당겨 왔다. 눈동자가 동요를 담아 볼품없이 요동쳤다.
주태승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내 앞에 섰다. 나는 입을 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고 가라앉은 눈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눈길이 지나간 자리에 소름이 돋았다. 콧잔등과 뺨, 목덜미, 옷에 숨은 어깨까지 주태승의 시선이 감겼다. 커다란 바위가 기도를 턱 막고 있는 듯했다. 숨 쉬는 게 불편해 목구멍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너무 춥게 입은 거 아닙니까?”
주태승이 흘린 첫마디는 그랬다.
그 말에 많은 잡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저게 지금 할 소리인가, 뭐 하는 거야,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왔어, 꼴도 보기 싫어,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거야, 나는 힘들었는데.
나는, 정말…….
“뭐 하는 짓이에요?”
꾸역꾸역 짜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냥 두면 눈물이 맺힐 것 같아 일부러 눈에 힘을 줬다. 주태승은 내 날이 선 표정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한 차례 달싹였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일렁이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주태승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잖아.”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뻔뻔함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치 헤어지던 날, 빗속에서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를 없는 셈 치려는 것 같았다.
환멸이 난다. 나는 숨을 씨근거리며 주태승을 노려보았다. 그는 내 반응을 모조리 읽고 있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검은 눈에 잠식되는 순간이 괴로웠다.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말로 해서 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시하는 편이 나았겠다. 나는 주태승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걸음을 떼어 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자리에 덜컥 멈춰 서게 되었다.
주태승이 내 팔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가 잡은 부위가 아려 왔다. 나는 노골적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차 타고 가.”
“차?”
나는 결국 턱 끝까지 차오른 웃음을 뱉어 냈다. 주태승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여전히, 또 저 사람의 생각을 모르겠다.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힘을 줘 주태승을 뿌리치자 그는 순순히 팔을 내렸다. 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속에서 울컥 터진 화를 내보냈다.
“주태승 씨 제멋대로 구는 거, 아직도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은 어떨지 몰랐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동요한다. 목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는다. 존재 자체로 나를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주태승은 대꾸하는 대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내 뺨 언저리에 고정한 채였다. 그를 계속 마주하면 복잡한 감정을 다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에 덧그려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주태승과의 거리가 성큼 멀어졌다. 애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신경이 온통 뒤통수에 쏠렸다. 정확히는 나를 보고 있을 그에게.
이런 내가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싸늘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나는 신음하며 베갯잇에 뺨을 문질렀다. 반가운 휴일이었기에 조금 더 이부자리에서 뒹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그렇지, 뭐 이렇게 춥나.
나는 밤사이에 벌어진 잠옷을 대충 추스르고 일어났다. 침대에 남은 온기와 멀어지려니 짙은 아쉬움이 퍼졌다. 집 안에 감도는 찬 공기 때문에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한국에서 온수매트라도 공수해야 하나 싶었다. 배송비가 얼마나 나올지 가늠이 안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품고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당장은 매트가 없으니 따뜻한 커피로라도 속을 데울 계획이었다.
대강 찬장을 뒤적거리자 낱개로 돌아다니는 티백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컵에 티백과 뜨거운 물을 때려 넣고 기다렸다. 허옇게 피어오른 김이 턱 언저리에서 살랑살랑 넘실거렸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열을 실은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물이 남긴 궤적을 따라 식도가 달아올랐다. 이제야 좀 속에 온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하아…….”
피로가 쌓여 정신이 몽롱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러모로 고달픈 요즘이었다. 아직 오스트리아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불청객까지 끼어들어 그렇다. 사실 그런 가벼운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부스스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커피 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침대맡에 올려둔 휴대 전화가 시끄러운 벨 소리를 냈다. 어지간해서는 휴일에 전화 올 곳이 없었으므로 의아했다. 나는 구부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걸려온 건 심지어 영상 통화였다. 누군가를 마주하기엔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발신인을 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여보세요.”
[여진서!]
카메라 렌즈에 오민지의 발랄한 미소가 한가득 들어찼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너 방금 일어났어?]
“응.”
[거기 몇 시지?]
“아침 열 시.”
한국과는 시차가 여덟 시간이었으니, 지금 오후 여섯 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오민지라면 한참 팔팔하게 돌아다닐 시각이었다.
[고생이다. 갑자기 한국 뜬 벌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좀 적응했어.”
[혼자 있으니까 외롭지? 나랑 박상훈이 막 그리워?]
실없는 소리였지만 사실이었다. 혼자 보내는 타지 생활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사실 명백히 따져 보면 배 속의 아이를 합쳐 두 사람이기는 해도 태아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오롯이 내보이고 말았다. 덩달아 오민지 또한 입꼬리가 슬금슬금 내려갔다.
[누가 괴롭히지는 않아? 모셔 갔으면서 대우 똑바로 안 해 주면 가만 안 둬.]
“뭘 모셔 가. 그냥 잘 맞은 거지.”
[그래도, 우리 여진서가 어떤 인재인데.]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세상에는 나보다 날고 기는 유능한 연주자들이 많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너 졸업식은 올 수 있어?]
졸업식이 2월이었나. 참석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잠시 텀을 두고 말했다.
“아니.”
[아, 그래. 바쁘니까…….]
납득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오민지 뒤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엄마가 밥 먹으래. 앳된 음성에 오민지가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 나 끊어야겠다. 저녁 먹으라네.]
“알았어. 다음에 또 연락하자.”
[응, 기죽지 말고. 시간 나면 한국 와.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그 말을 전하기 전에 휴대 전화 화면이 까맣게 꺼졌다. 나는 허무한 통화를 끝내고 얕게 한숨을 쉬었다. 한국어로 살가운 대화를 나눈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른다. 순식간에 내려앉은 정적에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나는 멍하니 휴대 전화를 바라보다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문 밖을 향했다.
날이 춥다 했더니, 밤새 내린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이제 찬 바람이 불면 꽁꽁 얼어 빙판길이 만들어질 터였다. 출근하다 미끄러져 병원 신세를 지는 건 사양이었다.
휴일에는 아파트 관리인도 쉬는 건가. 출구 아래 펼쳐진 도보가 눈에 덮여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딱히 누가 대신 길을 치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하얀 눈을 응시했다. 아이 때문에 몸도 무거운데 얼음길에서 넘어졌다가는 크게 다치고 말 것이다.
역시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 하는 건가.
“아, 씨.”
결국 나는 겉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
사박, 사박.
조용한 풍경 속에 빗자루가 땅을 긁어내리는 소리가 삭막하게 울렸다. 나는 목을 꽁꽁 싸맨 목도리에 얼굴을 더욱 묻으며 비를 고쳐 쥐었다. 찬 공기를 오래 맞아 손가락 끝이 발그스름한 색으로 물들었다.
혼자 보는 이국적인 풍경은 나름 운치가 있었다. 동화에 나오는 듯한 아기자기한 집들 가운데에서 고요에 잠겨 있으니, 생각을 정리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래서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추슬러 보려 했었다. 불과 10분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아까부터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모습이 꼭 꽃게와 닮았다.
내가 빗자루로 쓸고 다니는 곳마다 꽃게는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쌓인 눈을 모았다. 어린 시절 땅따먹기를 할 때 저런 언덕을 본 기억이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바닥을 쓸던 손을 멈췄다. 그러자 꽃게도 그 자리에 우뚝 정지했다. 빼꼼 드러난 코끝이 올망졸망했다. 겉으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뭐 해?』
서툰 독일어가 새하얀 눈밭에 흩어졌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발음이 많이 안 좋았나 싶다.
『집 만들어.』
『그렇구나.』
『왜 청소 안 해?』
비질을 해야 눈을 편히 모을 수 있으니, 아이는 내가 일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나는 고분고분 땅을 쓸어 걸어 다닐 만한 길목을 만들었다. 깜찍하게 묶은 양 갈래 머리가 또 쪼르르 내 빗자루 끝에 따라붙었다.
지푸라기가 엉긴 눈을 향한 몸짓은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가, 재차 비질을 중단했다. 아이는 또 통통한 뺨을 바짝 올린 채 나와 초롱초롱한 눈을 맞춰 왔다.
『왜 안 해?』
『이거 더러운 눈이야.』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불현듯 눈을 한 움큼 퍼냈다. 뒤이어 눈 무더기가 향한 곳은 황당하게도 입가였다. 아이는 나뭇잎이 묻은 얼음덩어리를 우걱우걱 베어 물기 시작했다.
『어어?』
갑자기 왜 저래.
나는 곧장 빗자루를 바닥에 던진 후, 헐레벌떡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자세를 낮췄다. 그 사이에 아이는 손에 쥔 눈을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행동에 너무도 근본이 없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애들은 다 이런 건가.
『먹으면 안 돼.』
『맛있어.』
『맛없을걸?』
『아니야, 맛있어. 맛있으면 깨끗한 거야.』
『그런 거야?』
나는 대강 대답하며 앙증맞은 입가에 묻은 눈을 털어 주었다. 경계심도 없는지, 아이는 낯선 이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 냈다. 하지만 작은 손은 다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뽀얀 손바닥에 소담하게 쌓인 눈이 불쑥 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대신 멀거니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같이 먹어.』
『어?』
나도 먹어야 돼?
곤란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주먹밥 같은 눈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맹랑하게 손을 내 입가에 가까이 가져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먹어.』
나 뭐 하는 거지. 잔잔하게 몰려오는 자괴감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의 손가락을 내 손으로 감쌌다. 체온 때문에 녹기 시작한 얼음 결정을 머금으니 입 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더불어 찝찝한 흙냄새가 점막 가득 퍼져 나갔다.
『맛있지? 먹으면 입이 차가워져.』
『흙 맛 나는데.』
『꿀 뿌려서 먹으면 맛있어.』
꿀 뿌리면 다 맛있을 텐데, 토를 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나는 침착하게 입에 남은 자잘한 모래 따위를 타액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감싸 쥔 아이의 손이 차가웠기에 살살 쓰다듬어 살갗을 녹이고자 애썼다.
『따뜻해.』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무구하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니 가슴 한편에 열감이 돌았다. 나는 마주 웃으며 쌓인 눈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눈 많이 먹으면 나중에 배 아파. 내가 토끼 만들어 줄게.』
『토끼?』
『으응.』
기대가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는 쌓인 눈을 한 주먹 잡아 타원 모양으로 빚었다. 토끼라고는 했지만, 막상 실물은 별거 없었다. 그저 눈 위에 나뭇잎 두어 개를 붙여 귀를 만들면 끝이었다.
『토끼 눈이 없어.』
허접한 눈 토끼를 본 아이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얼른 길가에 돌아다니는 자갈을 가져다 눈알을 만들어 냈다. 그제야 먹구름이 낀 듯 서글펐던 안색이 환하게 피었다.
아이라는 존재는 참 신기했다. 시무룩한 표정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환한 미소를 보면 함께 기분이 좋아진다. 남의 아이를 봐도 이렇게 감정이 좌지우지되는데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까.
나도 모르게 손이 아랫배를 더듬었다.
너도 이 보잘것없는 눈 토끼 하나에 기뻐해 주려나. 만약 네가 이 세상에 나온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나날을 보내며 살아갈지, 앞날이 마냥 춥고 고달픈 겨울은 아니었으면. 찬 바람이 불어도 가끔 내리쬐는 햇살에 포근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랐다.
새삼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는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인 건가. 무의식중에 둘의 미래를 생각하는 자아가 놀라웠다.
그때, 멀찍이서 부부 한 쌍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올리브, 여기서 뭐 하니?』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이가 바닥에 앉은 딸을 일으켜 세웠다. 올리브는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놀았어. 눈 토끼 만들어 줬어.』
그제야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가 독일어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 옆에 선 남편이 내 손을 덥석 잡아 왔다.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눈까지 치워 주시고.』
『아니에요.』
『이 아파트 사세요?』
『네.』
부부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의식해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결 알아듣기가 편해졌다.
『저희는 302호 살아요. 언제 한번 식사 대접이라도 할게요.』
『아, 네.』
설마하니 처음 보는 사람을 진심으로 초대하지는 않을 테고, 외국에도 인사치레가 있나 보다. 나는 멋쩍은 마음에 목뒤를 긁었다. 아파트 주민과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올리브, 감기 걸리겠다. 들어가서 코코아 마시자.』
아주머니는 올리브의 찹쌀떡 같은 뺨에 입을 맞추고 내게 미소 지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안녕!』
나와 놀던 올리브는 이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 멀어졌다.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한 풍경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애정을 먹고 자라는 아이. 나는 내 아이에게 줄 수 없는 것들.
저절로 주태승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 지금 품은 감정이 어떻든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다. 아직 그가 미웠다. 싫었다. 함께 있으면 괴롭고 화가 난다. 몸은 지난날의 상처를 기억했다.
다만 스쳐 간 시간이 남긴 건 상흔뿐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아주 조금은, 그와 나눈 행복한 계절에 대한 미련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태승을 완벽하게 증오하지도 못하고, 구석에 묻은 애정을 다시 끄집어내지도 못한다.
마음을 파고들면 사고는 자연스럽게 주태승에 대한 원망으로 직결된다. 차라리 아예 모질게 굴 것이지. 왜 단맛, 쓴맛을 다 보여 줘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개새끼.”
나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빗자루를 정리했다.
***
『여보세요?』
나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광장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아직 철거하지 않은 새해맞이 플래카드가 찬 바람에 나부꼈다.
【나 동상 앞에 서 있어요.】
이곳저곳을 헤매던 시선이 우뚝 멈춰 섰다. 타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인영이 불룩 튀어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눈에 띄는 금발 머리 서양인에게 다가섰다.
『진서, 잘 지냈어요?』
『평일에 만났잖아요.』
『그래도 휴일에는 처음 보니까요.』
조슈아는 넉살 좋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사람은 스킨십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걸어서 불편하다. 나는 등을 감싼 팔뚝을 곧장 치워 내며 말했다.
『휴일에 나오게 해서 미안해요. 정말 저 혼자 가도 괜찮았는데.』
『내가 데이트 신청한 거잖아요. 마음 쓰지 말아요.』
이 아침에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딱히 취미가 없었으므로, 주말 아침에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조슈아가 불러냈다. 이전에 약속한 쇼핑을 오늘 함께 하고 싶다는 까닭이었다.
당장 옷가지와 생필품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기에 타이밍이 잘 맞았다. 어제는 아파트 주민, 오늘은 직장 동료. 살가운 외국인들 덕분에 이틀을 보람차게 보내게 되었다. 피곤한 건 둘째치고 말이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조슈아는 본인이 더 들떠 콧노래를 불러 댔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내걸고 물었다.
『오늘 살 거 뭐 있어요?』
『옷이랑 그릇이요.』
『그럼 옷 가게부터 갈까요? 내가 자주 가는 곳이 있어요.』
이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 있어 편하긴 하겠다. 헤매는 시간도 아낄 수 있고.
나는 조슈아에게 이끌려 광장의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근대 유럽풍의 건물 안,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민 상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중 가장 구석에 있는 가게의 문을 열었다.
『조쉬!』
요란하게 꾸민 남자 점원이 조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 얼마나 마당발인 거야. 조슈아 또한 지지 않고 점원을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텐션에 벌써 피로감이 몰려왔다.
점원은 조슈아와 독일어로 대화를 주고받다가, 옆에 멀뚱멀뚱 선 내게 미소를 보냈다. 나는 어영부영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 대충 인사를 받았다.
『편하게 구경해요. 아니면 내가 추천해 줄까?』
『괜찮아요.』
애초에 누군가 옷을 골라 줘야 할 정도로 괜찮은 옷걸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필요한 건 두툼한 패딩 점퍼와 집에서 입을 실내복, 평상복 두어 벌 정도였다.
옷을 선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패딩은 거무죽죽한 게 제일이었다. 실내복은 세트로 된 면 잠옷을 사면 된다. 주태승의 집에서 생활할 때 입었던 옷만큼 좋은 재질은 무리겠으나, 어느 정도 비슷한 물건을 발견했다.
베이지색 니트와 청바지, 하얀 와이셔츠까지 집어 들고 나니 팔이 꽉 찼다. 나는 성실하게 가게를 둘러본 후 카운터에 옷들을 내려놓았다.
『빨리도 골랐네.』
점원이 낮게 감탄을 토해 냈다.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사이즈가 좀 크지 않아?』
『큰 게 편해서요.』
『몸도 예쁜데, 치수에 맞게 입지.』
펑퍼짐한 옷 위주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불러 가는 배를 가능하면 숨겨야 하니까. 언제까지 꽁꽁 싸매서 시치미를 떼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패딩이랑 와이셔츠는 따로 배송해 주세요.』
『그래요.』
나머지는 당장 내일부터 입어야 하므로, 나는 쇼핑백 두 개를 손에 짊어지게 되었다.
옷 다음은 그릇을 볼 차례였다. 조슈아는 자연스럽게 내 손에 있는 쇼핑백 하나를 빼앗아 들고 또 골목 어딘가로 나를 안내했다. 타지 사람이라더니 꽤 성실하게 오스트리아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가게가 나를 맞았다. 문까지 새빨갛게 칠해 아주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머리 위에서 짤랑짤랑, 경쾌한 종소리가 났다. 눈이 파란 여성 점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어차피 혼자 사니까 1인용 식기만 구비해 두는 게 좋을까. 나는 대강 가격을 가늠하며 선반에 진열된 접시를 바라보았다. 둥근 테두리에 새겨진 꽃무늬가 어여뻤다.
『그거보다는 이쪽에 있는 게 깔끔하지 않아요?』
조슈아가 가리킨 것은 하얀 바탕에 파란 선으로 테두리를 두른 접시였다. 나는 신중하게 두 접시를 비교했다. 확실히 꽃무늬보다 더 세련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진서가 화려하니까, 꽃은 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뭐야?
설득을 참 기묘하게 한다. 너무 거창한 칭찬을 하니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꽃무늬 접시를 골랐다. 조슈아는 실망스러운 듯이 접시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나는 그를 뒤로하고 선반을 더 구경했다. 갖가지 모양의 식기 가운데, 문득 유아용 숟가락과 포크가 눈에 밟혔다. 끝에 곰돌이 모양 고무가 달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지금 먹는 거로 봐서는 나와서도 잘 먹을 것 같은데.
그래도 윙크하는 곰돌이가 제법 귀여웠다. 물론 지금 여기서 유아용 식기를 살 수는 없었다. 혹여라도 임신했다고 의심받을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혼자 와서 사든가 해야겠다.
나는 눈으로 식기를 점찍어 두고 조슈아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
쇼핑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나는 양손에 전리품을 안고 귀갓길에 올랐다. 짐을 들어 주겠다는 명목 아래 조슈아도 함께였다. 장시간 돌아다닌 여파로 무릎 언저리가 얼얼했다.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금방 곯아떨어질 듯했다.
『무겁지 않아요?』
조슈아가 내 손의 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접시가 들어 있는 쪽이 더 무거울 텐데,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고마워요. 다음에 밥이라도 살게요.』
『뭘요, 즐거웠어요.』
뽀드득, 이불처럼 쌓인 눈이 밑창에 밟혀 으스러졌다. 나는 가까워진 노란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집이라고 반가움이 앞섰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줘도 돼요.』
『무겁잖아요. 현관 앞까지 같이 가요.』
다정하다. 친구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구나. 나는 조슈아를 뒤에 달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2층이었다. 덕분에 체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2층에 다다라 집 열쇠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어, 손님이 온 것 같은데요?』
별안간 조슈아의 목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손님?
나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손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정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였다. 타국에서 예고 없이 집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삽시간에 입꼬리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주태승은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나와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깊게 잠긴 검은 동공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어이가 없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투기라도 드러내는 건가, 본인이 무슨 자격으로?
겨울밤 공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섞여 들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조슈아는 아리송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주태승에게 턱짓하며 물었다.
『누구예요?』
주태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괜히 조슈아가 속을 긁어 화를 입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내가 아는 주태승은 충분히 그렇게 할 위인이었으니까.
나는 옛 연인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
『그냥 한국에서 잠깐 알던 사람이에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낮게 실소를 터트렸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그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긴 팔이 다가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태승은 그대로 제 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강압적인 힘에 의해 나는 억지로 너른 가슴에 몸을 기대게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태승은 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곧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쏟아져 내렸다.
“너랑 내가 잠깐 알던 사이야?”
나는 주태승의 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한때 가장 사랑했던 체취가 풍겨 왔다. 익숙함을 느끼는 몸이 싫어 분노가 더욱 치밀었다.
“미쳤어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주태승이 내 허리를 감싼 손에 지그시 힘을 실었다. 그 모습을 본 조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바보 같은 싸움을 더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화를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조슈아, 먼저 가요.』
『진서 지금 곤란한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요.』
못내 신경이 쓰이는지, 조슈아는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주태승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로몬을 흘리는 것도 아닌데 숨이 턱턱 막혔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요.』
조슈아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느직느직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눈에 새기던 주태승이 온기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 새낀 뭔데 네 집 앞까지 드나들어.”
“알아서 뭐 하게요.”
“그럼 애인 바람 나는 거 손가락 빨고 구경할까?”
누가 당신 애인이야. 웃기지도 않았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목소리가 꼴사납게 떨려 왔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이제 주태승 씨랑 상관없잖아요.”
“…….”
“얼마나 제멋대로 굴 생각이에요? 꼴도 보기 싫다는데 왜 자꾸 찾아오냐고요.”
동요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나와 달리, 주태승은 새벽녘에 내린 서리처럼 차분했다. 싫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 된 것 같잖아. 이해 못 할 행동을 하는 건 본인이면서.
“제멋대로 구는 게 누군데.”
주태승은 음절을 하나하나 짓씹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너 혼자 마침표 찍지 마. 난 아직 안 끝났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몇 번을……!”
크게 쏘아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옆집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으나, 이곳은 타인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씨발, 진짜.
나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주태승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내 도피처에 나를 도망치게 만든 장본인을 밀어 넣었다.
***
“하아…….”
단전에서 치달아 오른 열이 목덜미를 뜨겁게 달궜다. 속에서 절절 끓는 불꽃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고자 숨을 할딱거렸다.
주태승은 망부석처럼 서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휘둘려 엉망이 되어 가는 놈을, 그저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듯 무던하게 관망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전부터 그랬다. 주태승은 늘 저 사람 열받게 만드는 무표정으로 나를 대했으니까.
나는 마른 입술을 물어뜯었다가, 얕게 경련하는 목구멍을 쥐어짜 냈다.
“또 뭐가 하고 싶은 건데요?”
주태승이 나를 본다. 마치 그 행위에 특별한 의미라도 담겨 있다는 듯이. 그의 태도에 신경이 쏠리는 게 싫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년을 괴롭히고도, 또 만나서는 모른 척 가지고 놀고. 이번에는 도망간 애인 붙잡으러 오는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졌어요?”
“…….”
“알아듣게 이야기했잖아요. 주태승 씨 머리 좋잖아요. 난 이제 당신 상대해 주기 싫다고, 말했잖아요.”
문장을 잇다 보니 제풀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배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역류해 코끝이 얼얼했다. 한심하게 울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주태승에게서 날 선 시선을 떼지 않았다.
“원하면 다 가질 수 있으면서. 나보다 훨씬 잘나고 그렇게 환장하는 예쁘장한 얼굴 가진 오메가 데리고 살면 되잖아.”
“……뭘, 데리고 살라고?”
주태승은 나를 내려다본 채 느릿하게 되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토해 냈다. 사실 섞여 나온 건 울음이었으니, 헛울음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 원래 남의 이야기 따위 들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지. 대화가 통할 거라고 여긴 내 과오였다.
울분이 한도를 넘어서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주태승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진즉에 이렇게 해야 했는데.
나는 주태승에게 향해 있던 눈길을 거두고 겉옷을 벗었다. 보푸라기가 일어난 검은 코트가 바닥에 툭, 곤두박질쳤다.
뒤이어 손이 뻗어 나간 곳은 와이셔츠 단추였다. 목을 조인 옷자락이 차차 느슨해져 갔다. 벌어진 틈 사이로 허여멀건한 살갗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추를 세 개쯤 풀었을 때, 주태승이 팔을 붙잡아 나를 저지했다.
“뭐 하는 짓이야.”
“주태승 씨도 옷 벗어요.”
“여진서.”
“한 번 자 줄 테니까, 저 놔주세요.”
주태승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잘 듣는 붓으로 그려 낸 듯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내 손목을 휘감은 악력이 강해졌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말이 안 될 건 뭔데요. 이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뭐가 아니야. 대체 어쩌라는 건데, 나 보고. 정신 멀쩡히 박힌 것처럼 구는 거 안 어울려.
허물어진 마음의 둑으로부터 격양된 감정이 울컥 범람했다. 절대 내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남창처럼 굴어 줄게요. 주태승 씨 그런 거 좋아하지 않아요?”
“…….”
“더 해 달라고 아양도 떨고, 다리도 알아서 벌리고. 입으로도 해 줄까요? 처음 만났을 때 시킨 게 그거였지. 지금은 더 잘할지도 몰라요.”
단어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한다. 억지로 주태승의 것을 입에 머금었던 고통스러운 밤이 뇌리를 스쳐 갔다.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은 칼날이 되어 무른 살갗을 아프게 헤집었다. 내가 쏟아 낸 문장이 나를 상처 입혔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상기된 뺨 위로 뜨거운 물길이 흔적을 그렸다. 나를 담은 주태승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울음 섞인 숨이 기침처럼 파열했다.
그렇게 대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왜 지금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하겠다잖아! 다, 흐윽, 해 준다고. 이 안 세우고, 좆 물 받아먹고, 당신 질리도록 처박게 내버려 둔다니까!”
입가에 미끄러져 들어온 눈물에서 짠맛이 났다. 나는 잡힌 팔을 마구 비틀며 악을 써 댔다.
나를 바라보던 주태승이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흘렸다.
“찢어발겨서 피를 내든, 깨물어서 뼈를 아작 내든, 마음대로 하라고! 원 없이 따먹고 끝, 읍…….”
오기로 쏟아 낸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주태승이 내 뺨을 부여잡고 입술을 짓누른 탓이었다. 타액과 눈물로 범벅이 된 입 안에 말랑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뚝뚝 끊기는 호흡이 여린 점막을 가파르게 맴돌았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주태승은 나를 구석까지 밀어붙였다. 단단한 벽이 등에 닿자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흐읏, 으.”
주태승은 나를 벽에 가둔 상태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단지 혀가 얽혀 들고 있을 뿐인데, 마치 뱀에게 온몸을 휘감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으레 나누던 키스의 방식이었다.
긴 엄지가 소리 없이 내 눈가를 덧그렸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물방울이 젖은 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마 다음 차례는 눈 위를 혀로 핥아 내는 것일 터다. 내가 울면 주태승은 그런 식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했으니까.
익숙함에 잠식되기 전에 나는 있는 힘껏 주태승을 밀어 냈다.
“하아, 흐…….”
체온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나는 곧장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조금 떨어진 주태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스만 해도 밀어 내는 주제에 뭘 해.”
“…….”
“그딴 식으로 말해서 본인 깎아내리면, 좀 후련합니까?”
누가 누굴 깎아내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내가 쏟아 낸 말은 이전에 주태승이 내게 저지른 행위의 나열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주태승 씨가 나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흐트러진 옷차림에 눈물로 얼룩덜룩한 얼굴. 초라한 나와 달리 주태승은 멀끔했다. 이상한 건 저 새끼인데 나만 이렇게 넝마 조각이 되었다.
주태승은 증오로 가득한 시선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받아 냈다. 나는 그를 흠집 내고 싶어서, 저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싶어서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양날의 칼을 끄집어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당신 처음 만났는지 모르죠. 이제 스폰받으니까 더 열심히 해서 보답해야겠다,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몸 팔라는 거였는데.”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에 내 울먹이는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돈 받았으니까 날 어떻게 대하든 주태승 씨 마음이죠. 근데 그렇게 했으면, 나한테 사랑을 기대하지는 말았어야지.”
“…….”
“당신 연애 놀음 상대로 날 세우는 게 말이 돼요? 사람이면, 주태승 씨한테 감정이라는 게 있으면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내가 당신 좋아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어요, 네?”
주태승은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펑펑 솟아나 뺨을 흥건히 적셨다. 너무 울어 목구멍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체력도 슬슬 한계에 달했다. 나는 바닥을 드러낸 힘을 짜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흐윽, 이제 멀쩡히 살아 보겠다는데, 왜 갑자기 찾…….”
애원에 가까운 원망을 토해 내려는 순간이었다. 내내 일자로 다물려 있던 주태승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리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미안해.”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벽에는 입이 없으니, 방금 들은 건 주태승의 목소리가 맞았다.
“오스트리아, 여진서 씨 망치려고 온 거 아닙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한 번만, 얼굴만 보고 돌아가도 좋으니까. 그래서 왔어요.”
속눈썹이 한 차례 내 시야를 가렸다가 물러났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주태승의 일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멀끔하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에 잔머리가 빠져나와 있었다.
“얼굴을 보니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입을 맞추고 싶고, 여진서 씨를 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
“너는 내가 싫다고 울면서 악을 쓰는데, 난 네가 예뻐서 죽을 것 같아.”
주태승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게 뒤늦게 보였다. 잠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떨었다.
“여진서 씨 말이 맞아요. 내가 상처 주고, 망가뜨렸습니다. 난 여진서 씨가 뭘 소중하게 여기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어요. 알 생각도 없었고.”
“그, 무슨…….”
“연애 놀음하자고 다가간 게 아닙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여진서 씨는 누구인지. 다 잃고 나서야, 그게 궁금해졌어요.”
지금 뭐라는 거야.
“여진서 씨 애인으로서 진심이 아니었던 적 한 번도 없습니다. 갖고 놀 여유 따위도 없었어. 오히려 네가 날 휘둘렀으니까.”
주태승이 이토록 길게 속내를 털어놓는 건 처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증오가 엉겨 붙은 감정의 덩어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초조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실은 웃는 게 제일 예뻤는데, 내가 그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주태승이 손을 뻗어 오는 게 보였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흔들리는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듯해, 나는 그의 손을 세게 쳐 냈다.
휘둘리지 마.
대화 한 번으로 해결될 감정의 골이었다면 애초에 타국까지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태승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유약함을 그대로 드러낸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나는 타인의 손을 타기 전에 스스로 눈물을 닦았다.
“주태승 씨가 그거 뒤늦게 깨달았다고, 내가 그러셨어요? 하고 받아 줘야 되나요?”
주태승은 거부당한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침잠한 눈에 나를 담았다. 내 눈동자에, 뺨에, 입술에 깊은 시선이 머물렀다. 나는 타는 목을 타액으로 축이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이제 남은 거 없어요.”
어쩐지 눈길이 내 배 언저리를 더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지레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아랫배를 감싸고 중얼거렸다.
“애는 알아서 할 테니까.”
소리를 지르고 울어 젖힌 탓에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애처롭게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일어났다.
몸은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았기에 무릎이 형편없이 휘청였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주태승이 나를 부축하려 자세를 낮췄다. 나는 절뚝절뚝, 우스운 걸음걸이로 그와 거리를 벌렸다.
“여진서.”
주태승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원룸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찰칵, 차가운 금속음이 주태승과 나의 공간을 단절시켰다.
***
주태승과 보낸 밤은 악몽이라기엔 애달프고, 단꿈이라기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거실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눈두덩을 누르며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남자의 행색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발갛게 짓무른 눈가와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 따위에 어제의 소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물과 함께 기억도 씻어 낼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오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데도 녀석은 끈질기게 매달려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추운 밤의 거실이 선연히 그려졌다. 지쳐 보이는 주태승,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 내려앉은 공기를 가르고 오간 말들.
똑, 똑.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몇 개 곤두박질쳤다. 나는 젖은 얼굴을 수건에 닦아 냈다. 상념에 잠겨 웅크리고 있으려 해도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는 대충 매무새를 가다듬고 출근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차에 오른 내내 눈을 감은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악단에 도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른 시간에 먼저 도착한 단원들은 각자 악기를 조율하거나 개인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개인 연습실을 향하고자 플루트를 꺼냈다.
『진서!』
나를 발견한 조슈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리가 긴 덕분인지, 그는 단숨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걱정스럽게 일그러진 시선이 내 얼굴 언저리를 바쁘게 오갔다.
『안색이 안 좋아요. 어제 역시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아, 나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갔으니 염려를 쏟아 내는 것도 당연하다. 이 외국인 친구에게는 참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다.
『괜찮아요.』
『거짓말이죠. 눈이 부었어요. 역시 집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역시 얼음찜질이라도 좀 하고 나왔어야 했다. 나는 짓물러 각질이 일어난 눈가를 어설프게 손으로 가렸다. 그래봤자 조슈아의 진지한 탐색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내 얼굴에 눈길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그 수상한 남자가 그랬어요?』
『…….』
『누군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아니네요. 이렇게 울리는 걸 보면.』
울리면 나쁜 사람, 웃게 하면 좋은 사람. 그럼 소금과 설탕을 둘 다 떠안기는 건 어떤 사람인 거지.
조슈아의 말은 분명히 옳은 소리였으나, 내게 있어 주태승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오롯이 악인으로 여기는 게 가능하다면 이토록 속앓이할 이유도 없을 텐데.
나는 타인에게 주태승과의 관계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길을 선택했다. 연신 내 안색을 살피던 조슈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곧 그는 자세를 낮춰 눈을 마주치려 들었다.
『오늘 연습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음식으로 기분 달래는 건 만국 공통인가. 하지만 지금은 가급적이면 조슈아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데, 오늘처럼 기분이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날에는 남의 밝은 분위기마저 해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조슈아는 주태승을 함께 마주친 사람이었다. 대화하다 실수로라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털어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다음에 먹자고, 에둘러 거절하려던 때였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
단원 중 하나가 별안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전에 계단에서 본 무리의 일원이었다. 조슈아는 호의적인 표정으로 그에게 답변했다.
『같이 저녁 먹자는 이야기.』
『아아.』
단원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내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나를 훑어보는 느낌에 뺨이 따끔거렸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슈아에게 무언가 말을 전했다. 다만 이번에는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였기에 나는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조슈아는 아예 단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나는 졸지에 그 앞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이러고 있는 것도 시간 아깝다. 공연까지 남은 기한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내가 연습실 쪽으로 걸음을 내딛자 깜짝 놀란 조슈아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붙들린 팔뚝을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진서, 그, 오늘요.』
단원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선약이 있는 걸 잊어서요. 저녁은 다음에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아, 네.』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황당했다. 고백도 안 했는데 반려당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거절할 예정이었기에 크게 유감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변명하듯 눈치를 살피는 상대의 반응이 난감할 뿐이다.
『아직 환영회를 안 해서 진서가 낯선가 봐요. 조만간 자리 마련해 볼게요.』
조슈아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며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늘어놓았다. 그 환영회라는 건 꼭 해야 하는 건가. 이미 나를 향한 단원의 태도가 호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정말.』
『신경 쓰지 말아요.』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았으면 했다. 문득 오민지와 박상훈이 특출하게 성격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를 데리고 끈질기게 똘똘 뭉쳐 다녔으니.
나는 조슈아를 두고 연습실이 있는 층으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피로가 몰려오는 게, 순탄하지 않을 듯한 하루였다.
***
날이 추웠다. 얕게 숨을 내쉬어도 입김이 하늘에 뽀얀 궤적을 만들어 내는 계절이었다. 패딩을 구비해 두기를 참 잘했다.
나는 목깃의 보들보들한 안감에 뺨을 비비며 걸었다. 이제 이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동화처럼 예쁜 풍경이 봄에는 어떤 빛깔을 띨지, 여름에는 어떻게 색을 바꿀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한 걱정도 함께 딸려 왔다. 이제 배 속에 생명을 품은 지 4개월 반. 언제까지 동여매서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도 지금처럼 일할 수 있을까. 피하기만 해서야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어떻게 하는 게 옳은 방식인지 확신이 없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발길이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땅에 처박았던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어!』
별안간 앳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익숙한 꽃게 모양의 실루엣이 시야에 반짝 들어왔다.
『토끼!』
윗집 아이, 올리브가 양 갈래 머리카락을 팔랑팔랑 흔들며 내게 걸어왔다. 보아하니 오늘도 집 앞에서 코가 발갛게 물들 때까지 논 모양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곡선으로 휘어졌다.
나는 올리브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말했다.
『토끼가 아니라 진서라고 불러.』
『진서.』
『혼자 놀고 있었어?』
『아니, 엄마랑.』
올리브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통통한 손끝 너머에 키가 큰 여성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퇴근하시나 봐요?』
살가운 성격이 모친을 닮았나 보다. 올리브의 어머니가 먼저 반갑게 말을 걸었다.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네.』
『손에 든 건 악기인가요?』
『아, 플루트예요.』
『멋져요. 취미로 배우나요?』
『아뇨, 교향악단에서 일하거든요.』
너무 나불나불 떠들어 댔나. 아이가 옆에 있다 보니 마음이 풀어진 탓이었다. 나는 플루트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는 올리브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메리예요. 이 녀석은 올리브고요.』
그 말과 함께 메리가 악수를 청했다. 한국에서는 바로 옆집 사는 사람과도 말 한마디 안 섞고 지냈는데, 새삼 이웃 주민과 인사를 나누려니 어색했다. 서양인들이 개방적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 시선이 내려가다 보니 특별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메리의 배가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유난히 불룩했다.
『올리브가 내년에 누나가 돼요.』
메리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임신한 상태였구나. 나는 부른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이한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아.”
문득 아랫배가 꿈틀대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아이가 움직인 것 같았다. 이제껏 태동을 감지한 적이 없었기에 무척 생경한 자극이었다.
『진서?』
메리의 의아한 물음이 뒤를 따랐기에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당혹감을 얼굴에서 지워 냈다. 손바닥에 찬 식은땀은 바지춤에 대충 닦아 버렸다. 나는 괴상하게 입매를 비틀어 웃음을 만들어 내고 말했다.
『축하해요.』
『뭘요. 아, 저녁 먹었어요? 오늘 호박파이를 구웠는데, 괜찮으면 나눠 줄게요.』
『엄마 파이 맛있어.』
호박파이 맛있겠다. 이 혼란한 순간에 얼토당토않은 식탐이 앞서는 건 배 속에 있는 녀석 때문이다. 나는 꼬르륵대는 아랫배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던 와중, 메리의 뒤에서 또 하나의 인영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마찬가지로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이 가족은 아파트 입구에서 상봉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메리, 올리브!』
별안간 메리의 남편이자, 올리브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기다란 숄을 짊어진 채였다. 그는 가쁜 숨을 고르며 헐레벌떡 메리의 어깨에 숄을 칭칭 감았다.
『춥게 입지 말라니까.』
『따뜻하게 입었어. 걱정도 많네.』
숄에 둘러싸인 메리는 도롱이 벌레와 닮은 꼴이 되었다. 그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참 따스해 보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지나간 계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답답해요.
-그래 보여요.
-풀어도 돼요?
-그 꼴에 감기까지 걸리고 싶은가 봅니다.
주태승도 저렇게 서툰 손길로 내 몸에 담요를 감아 준 적이 있었다. 남 일이라고는 일말의 관심도 없을 사람이 보여 준 허술한 다정. 나는 아마 그런 일면에 조금씩 마음을 내어 줬을 것이다.
입이 말라 타액을 꿀꺽 넘겼다. 온기가 가득한 부부의 모습을 마주하자 아름답지 않은 감정이 일렁거렸다. 뽀드득, 뒷걸음질로 밟은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퍼졌다.
부러웠다.
그리고 사무치게 외로웠다. 나도 힘들어, 사랑받고 싶어.
타지에 홀로 도망쳐 아등바등하는 나와 충분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숄을 얹어 주는 반려가 함께인 메리와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명했다.
마치 서늘한 음지와 볕이 잘 드는 양지의 경계를 피부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림자에 숨은 타인이다. 잘 짜인 화목한 가정의 풍경을 절대로 가질 수 없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메리와 그녀의 남편이 내는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지금 나는 어떤 추악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비의 심정을 아는지, 배 속에 품은 아이도 더는 살갗을 두드리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외로움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진서? 파이는요?』
『괜찮아요. 다음에 먹을게요.』
나는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가 펴며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휑한 뒷덜미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외로움을 해소하게 되었다.
『여기 맥주 추가!』
『네-.』
제각각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이 거슬리게 귓가를 간질였다. 개중 어떤 이는 의미 모를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노려보았다. 구불구불한 독일어가 늘어져 알아볼 수 있는 단어가 몇 개 없었다. 잠을 줄여 공부를 더 하든가 해야지, 불편해서 못 살 지경이었다.
『진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다행히도 옆자리를 차지한 조슈아가 나를 배려했다. 배는 고팠으나 딱히 끌리는 음식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덜너덜한 메뉴판 끄트머리를 괜히 지분거리다가 대답했다.
『닭고기요.』
『그럼 치킨도 시킬게요.』
『고마워요.』
조슈아가 점원을 불러 주문하는 동안, 내 시선은 주변 테이블을 한 바퀴 맴돌았다. 맞은편과 근처 테이블에 앉은 손님은 전부 악단의 단원들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모임은 명목상 나를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식사 자리였기 때문이다.
흘리듯 지나친 말을 진심으로 행동에 옮길 줄은 몰랐다. 사실 단원들과 사적으로 어울리는 게 달갑지는 않았으나 조슈아의 얼굴을 봐서라도 약속을 깨서는 안 됐다. 게다가 이곳에서 살려면 둥글게 지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 정도는 해야 했다.
분명 내게 호의를 가진 느낌은 아니었는데, 흔쾌히 참석한 단원들에게 다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조슈아가 워낙 친화력이 뛰어난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잘해 주는 거 아니야? 애도 아니고.』
맞은편에 앉은 여성 단원이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손에 쥔 포크로 앞접시를 득득 긁는 잡음이 신경 쓰였다.
『혼자 주문 못 해?』
농담조로 던진 말에 가시가 박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슈아는 살짝 표정을 굳힌 채 물음에 응했다.
『오스트리아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도와줘야지.』
『조쉬는 사람이 참 좋네.』
꼬투리를 잡아 따지기도 애매한 화법이었다. 대학에서도 저렇게 말하는 사람을 종종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나는 조용히 잔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잠시 기다리자 점원이 주문한 음식들을 빠르게 가져왔다. 치킨과 커틀릿,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라쉬가 테이블 가운데 놓였다. 가장자리에는 통으로 칼집이 난 소시지가 여백을 채웠다.
단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크를 들었다. 나도 치킨 조각을 하나 가져와 깨작거렸다. 안주로 나온 음식답게 간이 무척 강했다. 적어도 치킨은 한국이 훨씬 맛있는 듯했다.
『근데, 있잖아.』
문득 소시지 하나를 삼킨 단원 하나가 운을 뗐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와 눈을 맞췄다.
『오메가라고 했나?』
『네.』
『좋겠다. 편하게 살잖아. 알파 하나 잘 만나면 인생 펴고.』
다분히 꼬인 언사였다. 이 사람들은 아주 바쁘겠다. 인종차별도 해야 하고, 형질로 시비도 걸어야 하고. 내가 오메가라서 겪었던 일들을 알면 절대 저런 말은 입에 올리지 못할 텐데.
남성 단원은 포크로 소시지의 몸통을 푹, 찌르며 말을 이었다.
『솔로 파트도 그렇게 얻어 낸 건 아니지?』
순간적으로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다들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닫고 내가 어떤 반응을 취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저 말이 하고 싶었구나. 내가 로비라도 했다고 여기는 건가.
무례한 질문에 굳이 호의적으로 대처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아하하, 농담인데 그렇게 볼 거 없잖아.』
『털 세운 고양이 같네.』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단원들이 제각기 한마디씩을 던졌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조슈아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 말 말고 술이나 마시죠. 장난이 지나쳐요.』
결국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술이었다.
나는 잔에 채워지는 금빛 액체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배에 아이가 있는 이상 음주는 가급적 삼가야만 했다. 가능하면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편이 좋다. 병원에서도 방문할 때마다 신신당부한 부분이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조슈아는 테이블에 앉은 모두의 잔에 맥주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히 속삭였다.
『조슈아, 저 술은 좀…….』
『응? 술 잘 못 마셔요?』
『약 먹고 있는 게 있어서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자 조슈아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빈 잔과 내 잔을 바꿔 주었다. 다른 단원들도 언뜻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각자 술을 나눠 마시고, 단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전 연주회에서 어떤 대단한 관객이 왔었다는 둥, 지휘자가 까탈스러워 피곤하다는 둥. 대부분 몇 개월 전의 일에 대한 화제였다.
나는 집중해서 듣는 척을 하다가 포기하고 치킨 껍데기를 깨작거렸다. 연습이 끝나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으나 양껏 들어가지 않았다.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는 게 낫겠다.
나를 제외한 무리의 얼굴에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테이블 한쪽에 쌓인 술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맞다.』
별안간 아까 시비를 건 단원이 운을 뗐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이즈가 큰 잔을 테이블에 쾅,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또 뭘 하려는 거지.
이제 그냥 넘기는 것도 슬슬 지친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진서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단원은 술병을 열어 정체불명의 액체를 콸콸 부었다. 잔이 큰 탓에 꽤 많은 양을 쏟아도 수면은 중간 지점에서 흔들렸다.
『그럼 슈납스도 못 마셔 봤을 거 아니야.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해야지.』
그 말대로라면 잔에는 슈납스만 채워졌어야 했다. 그런데 단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맥주를 꺼내 들었다. 곧 이미 반쯤 찬 잔에 맥주가 쏟아지며 하얀 거품을 만들었다.
『전에 봤는데, 한국에는 이런 문화가 있다면서. 환영의 의미로 말이야.』
『어머, 좋은 풍습이네.』
『우리는 진서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별, 씨발.
서양에는 분명 음주 강권 문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짓까지 하는 게 유치하고 치졸했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저러고 싶은가.
주변 단원들은 저 기이한 행동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추임새를 넣으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조슈아의 입꼬리가 차차 얼어붙었다. 그가 단원들을 말리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마실게요. 진서는 술 못 마시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조쉬 환영 파티가 아니잖아?』
환영 파티에서 잘하는 짓이다. 깊지 않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왜 꾸역꾸역 여기 붙어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가 내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원래는 그 길로 가게를 나가 버릴 생각이었다. 다만, 단원의 도발하는 듯한 마지막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Straßenhure…….』
못 알아듣는 거 뻔히 알면서 또 독일어로.
바짝 치달아 오른 분노가 뒤통수를 탕, 때렸다. 나는 홧김에 맥주잔을 들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울대가 한 차례 움직일 때마다 잔이 쑥쑥 비워져 나갔다. 위장에 직통으로 술을 쏟아붓는 듯한 감각이었다.
오로지 술만으로 배가 가득 찼다. 나는 오기로 잔을 전부 비운 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돌발적인 행각에 단원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구경했다.
“……어디서 꼴같잖은 거 보고 와서.”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외국인들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나마 속이 좀 시원해졌다. 나는 곧장 치솟는 토기를 억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
“읍, 우윽, 웩…….”
말간 액체가 하얀 눈 위에 주르륵 쏟아졌다. 나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몇 차례 구역질을 반복했다. 음식을 그다지 먹지 않아, 나오는 건 노란 빛깔의 술뿐이었다.
그냥 참았어야 했나. 골목 구석에 토악질하는 꼴이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 애까지 가졌다는 새끼가.
참지 못하고 술을 들이켰으나 가게를 나서자마자 아이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었다. 정말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
미안해, 아가야. 이딴 게 아빠라서.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나는 죄책감과 함께 술을 게워 냈다. 토해 낸다고 술을 마신 게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욱 나쁜 영향을 끼칠 것만 같았다.
진짜 바보짓도 골라서 한다. 분명히 유연하게 대처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신경이 예민해진 탓에 이성을 놓고 말았다.
어느 정도 속을 비우고 나는 담벼락을 손톱으로 긁으며 대충 입을 닦았다. 두개골이 징징 울리는 감각이 불쾌했다.
나는 가쁜 숨을 할딱대다가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재수가 없으려니 눈까지 내렸다. 이 도시는 눈만 내리면 사위가 고요해진다. 그럼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뭘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바로 자야지. 혹시 모르니까 조만간 병원 가서 진료도 받아 봐야겠다. 제발 내 헛짓거리가 큰 해악으로 돌아오면 안 되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더니 오한이 들었다. 구토의 여파로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릿했다. 나는 짜증스럽게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았다.
주머니에 넣은 휴대 전화가 진동을 반복했다. 아마 조슈아가 아닐까 싶었다. 도저히 누군가와 통화할 기력이 없었다. 그저 팔다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이부자리의 감촉이 절실했다.
걸음을 쉬지 않은 덕분에 금세 아파트가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골목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했다. 그런데 가로등 아래, 멀거니 선 사람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
또 멍청하게 저러고 있네.
미동도 없이 서서 바닥을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주태승이었다.
오늘 무슨 온 세상이 사람 괴롭히는 날인가 보다. 저 가로등을 지나치지 않으면 아주 멀리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억지로 발을 옮겼다.
바스락-.
내가 낸 소리에 주태승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는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청객을 지나쳤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이 속눈썹에 걸렸다. 나는 머리카락에 쌓인 눈을 털어 내고자 바르작거렸다. 주태승은 아무렇지 않게 몇 걸음 뒤에서 나를 따라왔다. 놀랍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가요.”
대꾸할 마음도, 힘도 없었다. 오늘따라 짧은 거리가 참 멀게 느껴졌다. 나는 주머니에 든 열쇠를 의미 없이 주물럭댔다.
“술이라도 마셨습니까?”
마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옷 좀 더 따뜻하게 입지 그래요.”
패딩 입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입으라고.
“눈 오는데 우산은 왜 안 챙겨. 모자라도 뒤집어써요.”
본인도 우산 없으면서.
답이 돌아오지 않는데 주태승은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그 소리에 일일이 속으로 빈정거리는 나도 우스웠다. 슬슬 아파트 입구가 가까워졌다. 이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계획인지 모르겠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안 아파야 힘내서 나 미워할 거 아니야.”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우뚝 멈춰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주태승이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태승 씨.”
마침내 내가 입을 열자 주태승의 얼굴이 미약하게 풀어졌다. 눈을 대체 얼마나 맞고 서 있었는지 몰라도 피부가 창백했다. 나는 얼른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말했다.
“일 안 해요?”
“무슨 일.”
“회사 안 가냐고요.”
대기업 무역 회사 본부장이라는 인간이 타국에서 허송세월 보내고 있어도 되는 건가. 주태승이 아니라 회사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그러다 잘리면 어쩌게요.”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건 알았다. 능력이 좋으니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고 온 거겠지. 더군다나 재벌가 일원인데 믿을 구석이 없을까. 새삼 한심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주태승은 의외로 성실하게 내 말을 긍정했다.
“여진서 씨 말이 맞아요. 이러다 잘릴 수도 있겠네.”
그럼 이러고 있지 말고 집에 가면 되잖아.
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주태승을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요동치는 게 보였다. 곧 조금 잠긴 목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그래도 너 먹여 살릴 만큼은 벌어 놨어.”
짤그랑, 주머니 속의 열쇠가 경쾌한 잡음을 냈다.
나는 주태승을 내버려 두고 말없이 집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더 이상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
며칠 후, 나는 예정일보다 이르게 병원을 방문했다. 홧김에 저지른 실수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초음파 검사였다. 임신 18주. 이제는 검사를 위해 입는 가운이 제법 익숙해졌다. 배에 미끈미끈한 젤을 펴 바르는 순간에도 더는 소름 돋지 않게 되었다.
『여기 보이시죠?』
새까만 화면에 흐릿한 형체가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다른 건 몰라도 도드라지게 늘어진 뼈가 척추라는 건 알겠다. 그 위의 둥글둥글한 건 머리겠고.
『머리랑 배 둘레도 정상이에요.』
『아.』
흑점으로 보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제법 사람처럼 생겼다. 이렇게 납작한 뱃가죽 아래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뽀얀 배와 모니터를 홀린 듯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전에 기형아 검사도 별 이상 없었고, 건강하게 잘 크고 있네요.』
정말 이 안에 있어.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하나의 막연한 현상과도 같게 느껴졌던 임신이 비로소 바짝 피부로 와닿았다. 곧 부모가 된다. 아니, 이미 아버지다.
아이는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완벽한 신체를 갖춰 갈 것이다.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건강해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모순적인 감정을 품은 채 꿈틀대는 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를 닮았을까? 아니면…….
아이를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또 다른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배에 묻은 젤을 문질거렸다.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진료실에서 또 자세히 말씀드려야 하니까.』
의사가 젤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아이를 비추는 화면이 서서히 점멸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벌어진 가운 틈의 아랫배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네.』
나는 탈의실로 들어가 보드라운 니트를 목에 끼워 넣었다. 품이 큰 옷자락이 헐렁거렸다. 아랫단을 끄집어 내리니 배부른 표시가 나지 않았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오자, 의사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초음파 사진 두어 장이 놓인 게 보였다. 그녀는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아기 성별을 알 수 있어요. 형질은 더 지나야겠지만.』
『성별이요?』
『사진에서도 보이는데, 여자아이네요.』
딸이구나.
나는 얼떨떨하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엄청나게 귀엽겠다. 올리브가 애교를 부려도 가슴이 살살 녹는 기분이 드는데, 나를 닮은 아이가 웃어 주면 애간장이 몽땅 타 버릴 터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이전에 아이를 점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와 달리, 사람의 형태를 갖춘 걸 확인하자 실로 색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언뜻 생명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숨어 있던 책임감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눈, 코, 입조차 없는 아이의 생김새가 무척 궁금해졌다. 부모가 될 준비도 못 했으면서 뻔뻔하기도 하다. 나는 시원하게 곡선을 그리지도, 바닥으로 늘어지지도 않은 애매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의사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다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부모 두 분 다 우성인가요?』
『아, 네.』
『그럼 아이도 우성으로 발현할 가능성이 높아요. 극히 드물게 베타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알파든, 베타든, 오메가든 간에 건강하게만 자라 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지난날에 저지른 짓이 무척 후회되었다. 곧장 토해 냈다고 해도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쌍한 아가한테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쓰레기도 아니고. 예민해져서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자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속을 굴러다녔다.
나는 애꿎은 옷자락을 지분대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제가 며칠 전에 술을 마셨는데요.』
『네?』
『아이한테 나쁜, 많이 나쁜 영향이 갔을까요?』
의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알코올은 태반에 흡수되기 쉬워요. 당연히 태아에게 안 좋습니다. 이미 마신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입에도 대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아이한테 미안해야죠. 혼자 쓰는 몸이 아닌 거 명심하셔야 해요.』
진짜 멍청하다. 너무 부끄러워 차라리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번들거리는 목제 책상에 머리를 마구 처박는 내가 눈앞에 그려졌다. 앞에 의사가 없었다면 아마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휘둘렸다고, 외로워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다고.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아이를 혼자라도 키우기로 결심한 이상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힘을 주면 꺾이는 한심한 작자가 아니라.
문득 아랫배에서 뭉근하게 태동이 느껴졌다. 서툴기 짝이 없는 부모를 위로하듯, 아이는 살가죽을 두드렸다. 마치 자그마한 공기 방울이 피부 아래에서 톡톡 터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누구를 닮아 이토록 다정한 건지.
이 녀석은 살아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체온을 나누며 자라나고 있다. 나는 배를 쓰다듬다 말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려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겨울이.”
별안간 내 입에서 뜬금없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서양에도 태명을 짓는 문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아이를 겨울이라고 부르고자 했다. 이 추운 계절에 너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너를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으니까.
이름을 짓는 행위는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태명 세 글자에는 내가 품은 애정과 각오가 담겨 있다. 아마 겨울이라는 이름을 되뇔 때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볼 때마다 애착은 점점 짙어질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카페인도 많이는 안 돼요.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시고 가벼운 산책도 해 주면 좋아요.』
내 고백에 진심으로 염려를 느꼈는지 의사는 주의 사항을 잇달아 읊었다. 아, 얼마 전에 커피도 마신 것 같은데 정말 생각이 없었구나. 아이의 형태를 눈으로 확인한 오늘에서야 구체적인 충고가 진심으로 마음에 새겨졌다.
『잠이 안 올 수 있어요. 우유 따뜻하게 데워서 한 잔 마시면 좀 나을 거예요.』
집 가는 길에 우유도 사야겠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것이 또 필요한지를 가늠했다. 철분제도 살까, 돌아가서 영양제 종류도 검색해 봐야지. 벌써 4개월이나 넘게 품고 있었던 주제에 이제야 부산스러운 꼴이 우스웠다.
진료가 끝나고 나는 코트 자락을 빈틈없이 여미고 병원을 나섰다.
일단은 부모이니까, 단지 불안한 심정에 병원을 방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알음알음 생긴 뼈와 미숙한 머리 따위를 마주하자 뜻밖에도 자식을 향한 애틋함이 오븐 속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이를 원하지도, 그럴듯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충만하게 가슴이 채워지는 게 놀라웠다. 이 또한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까.
나는 약간 부른 배를 매만지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곧장 큰길가에서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도로변에 정차한 택시가 몇 대 눈에 들어왔다.
택시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뒤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진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바람에 거리가 가까워지고 말았다. 나는 마지못해 아는 척을 해 온 남성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웬일로 영어를 다 써 준다. 황송해서 돌아가시겠네.
이 단원은 이전에 얼떨결에 술을 마시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도저히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혹시 아는 이를 마주칠까, 일부러 멀리 있는 곳에 병원을 잡은 의도가 무색해졌다.
나는 최대한 차분함을 가장하고 곁눈질로 건물을 훑었다. 산부인과는 2층, 그 위의 3층에 아기자기한 과자점이 입점한 게 보였다.
『과자 사러요.』
『오, 과자 사러 멀리까지 나왔네?』
『좋아하는 과자를 여기서만 팔아서요.』
아하, 단원이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냈다. 더 함께 있다가 괜히 불필요하게 시비를 걸릴지도 모른다. 나는 큰길로 걸어가 택시 문을 붙잡고 말했다.
『먼저 가 볼게요.』
『어.』
바람에 흘려보내는 듯한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기껏 들뜬 기분이 한순간에 어그러졌다.
***
저녁에는 조슈아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는 아마 본인이 계획한 환영회가 엉망이 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주한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술집과는 다르게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이었다. 따로 영어 메뉴판까지 구비해 둔 식당이었기에 나는 편안히 메뉴를 고를 수 있었다.
『여기 시금치 토마토 파스타가 괜찮아요.』
『그럼 그걸로 할게요.』
조슈아는 능숙하게 점원을 불러 각자의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유리잔에 찰랑이는 물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진서, 전에는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또 사과한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운발이 더러워서 이상한 놈들이 꼬인 거지, 이 사람 탓이 아니다. 남들이 나를 미워하고 멸시해도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래도 특별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아니꼬운 건가. 아니면 인상이 좀 나쁜가. 앞으로 박상훈처럼 허허실실 웃으면서 살아야 하나.
내가 괜히 뺨을 주물거리자,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왜 그래요?』
『아뇨……. 그냥 생긴 거에 문제가 있나, 해서요.』
『진서가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으나 조슈아의 눈빛이 한결 심각해졌다. 그는 진중한 태도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예쁘기만 한데.』
『아, 네. 감사해요.』
『정말이에요. 눈 색깔도 보석 같고, 코도 귀엽고.』
이런 소리를 듣고자 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장점을 열거하기 시작한 조슈아를 두고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점원이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들고 와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파스타를 포크로 대충 휘저었다. 익은 시금치와 더불어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솔솔 올라와 턱 안쪽이 시큰하게 당겼다. 꽤 입맛을 당기는 냄새였다.
맛도 겉보기만큼이나 좋았다. 나는 포크에 둘둘 감은 면을 집중해서 우물거렸다. 너무 짜지 않아 겨울이에게도 괜찮아 보였다. 요즘 부쩍 먹을 것을 많이 찾는 탓에 옆구리에 살집이 늘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건데, 아이 핑계를 대고 있는 걸지도.
나는 잘게 부서진 음식물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조슈아는 입 안에 고깃점을 열렬히 넣으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진서,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요?』
『혹시 지금 애인 있어요?』
특이한 걸 궁금해한다. 나는 시큰둥하게 물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없어요.』
『아, 그래요?』
잘생긴 낯빛이 약간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어느 정도 미묘한 분위기가 읽혔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겠으나 조슈아는 은근한 호감을 내비치고 있는 듯했다.
달그락, 식기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관통했다. 조슈아는 함께 나온 와인을 한 모금 넘기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진서는 다른 사람 좋아해 봤어요?』
점점 질문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변한다. 내 예감이 사실이라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조슈아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전혀 없었다. 나는 번들거리는 포크를 복잡한 심경으로 만지작거렸다.
『네, 뭐.』
『알파?』
『네.』
조슈아가 쥔 칼날이 고기의 표면과 잘게 마찰했다. 갈색빛이 도는 살덩이에서 질척한 육즙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내 시선이 느릿하게 난도질당하는 살점을 훑었다.
『스테이크 먹어 볼래요?』
『괜찮아요.』
『먹어 봐요. 맛있어요.』
포크에 꿰뚫린 고기 조각이 내 접시에 떨어졌다. 나는 결이 오롯이 드러난 스테이크와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타랑 오메가도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그리고 난 형질 같은 거 신경 안 써서요.』
『…….』
『베타는 싫어요?』
말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다. 외국어를 해석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단어에 담긴 저의를 알고 있다. 다만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등의 반응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생각했을 리가 없지.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하며 버겁도록 감정의 바다에서 허덕인 건 주태승과 보낸 날들이 유일했으니까. 나는 알파밖에 모른다. 정확히는 주태승밖에.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조슈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끼긱, 탁.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고, 파스타에 스민 풍미가 입 안을 간질인다. 나는 젖은 시금치를 서걱서걱 씹어 삼켰다.
***
몬트 교향악단 단원으로서의 첫 연주회가 머지않았다.
관현악 합주와 플루트 협주 내의 솔로 파트만 해도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 미운털이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완벽하게 연주를 끝마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터다.
따라서 연습에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울이를 위해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가지려 해도 좀처럼 부담을 내려놓기 어려웠다. 나는 심란한 기분을 억누르고 계단을 내려갔다.
도착한 곳은 지하에 마련된 개인 연습실이었다. 각자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지, 방음실 창문에 악기를 매만지는 단원들의 모습이 엿보였다.
나도 그중 빈방에 자리를 잡았다. 보면대를 세워 악보를 펼치고, 플루트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자 금방 연습할 환경이 만들어졌다.
가장 처음 연습하고자 하는 곡은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2번>이었다. 20분이 넘는 연주 시간을 가진 데다가, 플루트 솔로로서 중요한 위치에 서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앞섰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세 번째 악장의 론도(Rondo)에서 호흡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연습을 반복해 실수를 방지해야 한다.
나는 속으로 박자를 맞춘 후 플루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힘을 주어 호흡을 불어 넣음과 동시에 청량한 음색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지금 연습하는 곡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지닌 곡이었다. 나는 서정적인 선율을 살리고자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이 곡 말고도 다른 곡에서도 플루트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 몸이 열 개가 되어도 모자라다. 마음이 다소 급해졌다.
여기서 알레그레토, 템포가 조금 빠르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방음실 입구에서 찬 바람이 성큼 들어왔다.
뭐야.
연습을 제대로 방해받은 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취구에서 입을 떼어 냈다. 두꺼운 철문이 뻑뻑하게 아가리를 벌렸다. 그 앞에 선 장본인은 나를 고깝게 보는 무리의 남자 단원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환영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뭡니까?』
개인 연습을 훼방 놓는 건 암묵적인 금기사항이었다. 전문 악단에서는 물론이고, 대학에서조차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연습 시간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기본적인 배려가 없는 태도가 나에 대한 의식을 반증하는 듯했다.
단원은 나를 내려다보다가 마찬가지로 표정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그가 내가 펴 놓은 보면대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치워.』
『왜?』
『연습실 정해져 있는 거 몰라?』
각자 연습실이 지정되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하물며 이때까지 연습하는 동안 누구도 이런 간섭을 해 온 적은 없었다. 나는 안으로 쿵쿵 들어서는 단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모른 사람 잘못이지. 이래서 덜떨어진 동양인은…….』
『뭐?』
지하에 흐르는 탁한 공기가 점차 살벌해졌다. 나는 적의에 지지 않고 단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사건건 유치하게 텃세를 부리는 게 꼴사나웠다. 저 주근깨를 확 손톱으로 긁어 버릴 수도 없고.
『원래 예약제야. 이 방은 내가 먼저 예약했어.』
예약제랬다가, 지정제랬다가 말도 제멋대로였다. 한 소리 쏟아 낼 틈도 없이 단원은 방음실 내부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보면대에 늘어진 악보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맥없이 휘날리는 악보를 보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고자 심호흡했다. 이렇게 분노에 휘둘려서 좋을 게 없다. 겨울이가 있으니까, 이러면…….
툭, 악보와 더불어 플루트를 닦기 위한 손수건까지 곤두박질쳤다. 일단 저 막무가내 외국인부터 막아야겠다. 나는 그의 팔뚝을 붙잡고 보면대를 엉망으로 만드는 손길을 저지했다.
『적당히 해.』
『Straßenhure, Lass mich in Ruhe.』
나보다 덩치가 큰 단원이 독일어를 내뱉으며 어깨를 들이밀었다. 정말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었다. 나는 뒤로 밀리지 않으려 억지로 버텼고, 단원은 강한 힘으로 잡힌 팔을 비틀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 타인의 손바닥이 닿은 건 그때였다.
도톰한 아랫배가 꾹 눌리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아……?』
단원은 멍청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곡선으로 뒤틀린 눈썹에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불안감이 엄습해 온몸의 피가 기민하게 핑핑 순환했다.
빨리 벗어나야 돼, 더 말이 붙기 전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에 보이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구겨진 악보와 손수건 따위가 차례로 케이스에 쑤셔 박혔다. 단원은 물끄러미 서서 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쓰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요.』
달칵, 소지품을 전부 삼킨 케이스가 꾸역꾸역 잠겼다. 나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자 노력하며 돌아섰다. 손끝과 발끝이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이도 나를 따라 덩달아 겁을 집어삼켰는지, 태동하지 않았다. 아빠가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를 숨게 만든다. 나는 애꿎은 입술을 짓씹으며 방음 처리가 된 철문을 닫았다.
“하아…….”
연습실을 벗어나고 나니 언제 다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복도가 나를 맞았다.
동요하지 마.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이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발걸음이 떨어졌다. 나는 플루트 케이스를 들고 구석의 빈방을 향해 무거운 보폭을 옮겼다.
다만 도마에서 내려와도 불안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일렁이고 있었다.
***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여 끼니를 거를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인터넷에 레시피를 검색하여 더듬더듬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 냈다. 한인마트에서 대충 재료를 갖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전에는 주태승이 멋대로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게 그토록 싫었는데, 이제는 내 손으로 찾아 먹고 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물렁해진 시금치를 가득 퍼냈다.
전자레인지에서 즉석밥을 꺼내고, 간단한 반찬을 내놓자 그럭저럭 조촐한 식탁이 완성되었다. 나는 국에 밥을 말아 멀거니 한술을 떠먹었다.
맛있다. 역시 사람은 한식을 먹어 줘야 하는데.
특별히 음식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오스트리아 음식은 기름기가 많았다. 거기에 불필요하게 간이 세서 물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내 입맛에는 된장국 정도가 딱 맞았다.
뭐 볼 거 없나, 그리 생각하며 나는 의미 없이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이전에 임신에 관련한 정보를 검색한 탓에 자동으로 남성 오메가의 임신에 대한 칼럼이 화면에 추천되었다.
따로 보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칼럼에 손이 갔다. 나는 덤덤하게 긴 줄글을 읽어 내렸다.
칼럼에 따르면 남성 오메가는 여성에 비해 자궁벽이 불안정하다고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배가 덜 나오고, 조산 위험도 크다고 했다. 대충 봐도 특별히 장점은 없어 보였다.
약한 만큼 신경을 더 써야겠지. 더군다나 이 몸뚱어리는 한 차례 아이를 잃은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그간의 소홀함이 마음에 걸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살이 좀 찐 것 같기도 하고.
육안으로 봐도 복부가 약간 볼록해졌다. 앙상하게 말라 뼈가 도드라지던 시절 보다는 훨씬 건강해 보였다. 나는 괜히 말랑한 옆구리 살을 조물락거리며 국물을 마셨다.
“어?”
슬슬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 휴대 전화 액정이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발신인은 박상훈이었다. 나는 메신저에 표시된 파란 버튼을 꾹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스트리아가 저녁 7시 반이었으니, 한국은 새벽의 한 중턱에 놓인 시점이었다.
[너 안 자냐?]
“여기 저녁이야. 너나 자.”
[아 맞다, 맞네……. 아아.]
누가 봐도 음주 후 주정 부리는 전화였다. 하루 종일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가 간질간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접시를 한 곳에 겹쳐 놓으며 수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너는 우리 보고 싶지도 않냐?]
“보고 싶어.”
[그럼 한국 왜 안 오는데. 혼자 사니까 좋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한국을 어떻게 가. 나는 웃음기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친구는 있어? 또 사납게 구는 거 아니지.]
“그냥, 그래.”
[있냐고, 없냐고. 친구 있으면 서운하다. 나는 여진서랑 개힘들게 친해졌는데.]
“없어.”
[왜 없어. 너 왕따처럼 밥도 혼자 먹고, 그래?]
어쩌자는 거야. 역시 취객과의 대화는 경청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박상훈은 이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웅얼웅얼 나열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여진서. 흐암, 아니 근데 별로 안 불쌍하기도 하고. 아 졸리다. 순댓국 먹고 싶어.]
“그럼 먹어.”
[너 불쌍하다. 순댓국도 못 먹잖아.]
“너도 못 먹고 있잖아, 지금.”
[순댓국 못 먹는 것도 불쌍하고……. 너 누가 괴롭히지는 않냐? 힘든 거 없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이었다. 말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나와 보니 진짜 너만 한 친구가 없더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타액과 함께 삼켰다.
[넌 맨날 괜찮다고 하잖아. 힘든 거 말 안 하고 혼자 꾹꾹.]
“…….”
[고양이도 아니고, 지가 꾹꾹이 하고 있어.]
그 꾹꾹 아니야.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박상훈 또한 그 혼자만의 고민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을 터다. 굳이 내 불행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커피로 가려던 손을 멈추고,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랐다.
“그럼……. 가끔 이렇게 전화나 해 주든가.”
친구의 실없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내 말을 들은 박상훈이 실소를 터트렸다.
[야, 당연하지. 받기나 해. 그리고 돈 모아서 오스트리아도 갈 거야.]
“그래.”
[근데 네가 한국 오는 게 빠르겠다. 좀 와라, 좀.]
했던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거나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박상훈은 이제 온전한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을 쏟아 냈다. 오늘 안주로 반건조 오징어 먹었다, 오민지가 김치찌개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 진서가 학교 앞 김치찌개 참 잘 먹었는데,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한바탕 헛소리를 늘어놓은 다음에는 휴대 전화가 떠나가도록 코를 골았다. 나는 귀가 저릿해질 때까지 그 소음을 듣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뺨이 뜨겁게 상기 되었다. 눈치채지 못했으나,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뜬 듯했다. 나는 하얀 접시를 싱크대에 담고 물을 틀었다.
부엌에 난 작은 창문 밖, 굵직한 나뭇가지에 걸린 눈이 곤두박질쳤다. 나직한 파열음이 듣기에 괜찮았다.
하루하루가 이 저녁처럼 평화로웠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
평온을 바란 것이 무색하게, 형태가 없는 불안은 곧 실체가 되어 밀려왔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화장실에서였다.
손을 씻는 와중에 시선을 느꼈다. 애초에 이 악단에서 호의적인 눈길을 받은 횟수가 드물었으므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다만 오늘은 그 농도가 조금 짙었다. 간간이 저들끼리 수군대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기도 했다.
왜, 또.
정말 질려 버리겠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대충 옷자락에 닦고 화장실을 나섰다. 여기까지는 평소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괜찮았다.
눈에 띄는 변화를 알아챈 건 협주 시간이었다.
합주실에 들어설 때부터 흐르는 공기가 며칠 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면대 앞에 선 나를 보자, 몇몇 이들은 반사적으로 각자 시선을 교환했다.
『아, 가 봐야겠네.』
얼음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잠긴 합주실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1 바이올린을 맡은 단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는 문장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악기를 정리했다.
연습해야 되는데, 뭐 하는 짓이야.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한 명 정도가 빠지는 건 드물게나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군거리던 단원들 중 일부가 제1 바이올린에 이어 합주실을 나갔다. 나를 스쳐 가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탓에 뺨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뭔…….”
나는 우두커니 서서 드문드문 빈 대형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린, 첼로 할 것 없이 대부분의 포지션에서 단원의 부재가 도드라졌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협주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사람들 제정신인가. 심지어 오전에는 멀쩡하게 합주 연습을 했던 터라 더욱 황당했다. 속된 말로 나를 물 먹이는 거나 다름없었다.
약속한 듯이 내 솔로 파트가 있는 곡을 연습할 때 개인 사정이 생겼다고, 무책임하게 구는 것도 정도껏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유치하다 못해 졸렬하기 짝이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당혹스러움에 굳어 있으려니, 바이올린 파트를 맡은 조슈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 진서.』
말을 거는 목소리에 망설임이 가득 묻어 나왔다. 이 사태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보며 그에게 이끌려 합주실 구석으로 들어갔다.
조슈아는 내 팔목을 잡은 채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속이 답답해졌다. 참다못한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상대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혹시 들었어요?』
뭘 들어. 내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문장이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무슨 소리예요?』
『아니, 음.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요.』
언제까지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할 셈이지. 조슈아는 입에 무게추라도 달아 놓은 듯이 또 입술을 우물거렸다.
내 얼굴을 향해 있던 파란 눈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멀거니 그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상대의 시선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내 아랫배 언저리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발가락 끝에서 등골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설마.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요. 진서, 혹시…….』
덜컥-.
문장이 맺어지기 직전에 별안간 합주실의 문이 열렸다. 나와 조슈아는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단장, 다니엘 리히터였다.
단장은 무언가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곧 그는 보폭을 옮겨 거리를 좁혀 왔다.
『잠깐 봅시다.』
그 말을 던진 후, 단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합주실을 떠났다. 아마 대화 장소는 정해져 있을 터다. 나는 요란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그를 쫓았다.
단장실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무척 가파르게 느껴졌다. 열이 오른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단장은 나무 문을 붙잡고 내게 눈짓했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초조함에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미혼부라는 소문이 퍼지는 게 공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명문 교향악단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파트를 잃을 각오까지도 했어야 할 것이다. 워낙 보수적인 집단이었으니.
그러나 외국의 경우, 하물며 이 유능한 지휘자의 의중은 점치기 어려웠다. 직접 들어 봐야 내 처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단장실로 발을 내디뎠다.
식은 커피와 몇 겹의 서류철이 놓인 책상이 나를 맞았다. 나는 간헐적으로 뚝뚝 끊기는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고요한 단장실에 내 숨소리가 이질적으로 퍼졌다.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단장은 조슈아가 그토록 주저하던 말을 정직하게 쏟아 냈다.
『임신했다는 거, 사실입니까?』
아.
좋지 않은 예감은 왜 항상 딱 들어맞을까.
감히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 여겼다. 공연에서 중요한 역할을 받은 이상, 맡은 바는 완벽하게 끝마치리라 다짐했다.
단장은 진의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내 배를 덤덤하게 훑어보았다. 나는 두툼한 옷자락 아래 숨은 아랫배를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감췄다. 오히려 이 행동에 확신을 얻은 듯, 상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배 계속 부를 텐데 연습 똑바로 할 수 있겠어요?』
능숙하지 못한 영어가 이럴 때는 참 매끄럽게 귀에 꽂혔다. 물론 피로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임신한 게 흠은 아닙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
『추문이 도는 것도, 저항받는 것도 진서가 감당할 몫이죠. 나는 공연만 무사히 끝마칠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나는 귓구멍에 박히는 빠른 말들을 가만가만 속으로 곱씹었다. 어조는 분명 차갑게 단호한 뉘앙스였으나, 목소리에 싸인 알맹이는 그다지 따가운 내용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심정에 저절로 올라간 시선이 단장의 얼굴을 향했다.
허공에서 얽힌 단장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그는 내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키워 보고 싶어서 솔로 파트 줬습니다.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해요. 대체자 없는 거 아니니까.』
단장이 내게 가진 정확한 인식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는 내게 선택할 권한을 내주려는 듯했다. 안도감과 부담이 한데 섞여 밀물과 같이 가슴에 쏟아져 들어왔다.
내게 닥친 일이 버겁고, 앞으로 걸을 길이 살얼음이 박힌 빙판이라고 하여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제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었다. 나는 잔뜩 경직되어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았다.
『하고, 싶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건이 단시간에 닥쳤다. 어떤 실수가 소문을 만들어 냈는지, 누가 퍼뜨린 것인지, 앞으로 무슨 곤혹을 치르게 될지 아무것도 깊이 고찰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위기를 넘기고 나아가야만 했다.
『믿어 주세요. 공연 완벽하게 끝내겠습니다.』
대답을 내놓는 목소리를 가다듬지 못해 말끝이 덜덜 떨렸다. 단장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로 돌아서는 모습이 느릿하게 궤적을 그렸다. 축객령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재차 고개를 숙여 보이고 머뭇머뭇 뒤로 물러났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두통이 아릿하게 관자놀이를 들쑤셨다. 그와 동시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구토감이 올라왔다. 전부터 으레 정신적인 고난에 놓이면 이런 식으로 몸이 반응하고는 했다.
진정하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지금처럼 하면 돼.
멸시하는 시선을 무시하고 평정을 되찾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하던 대로 해. 원래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안 쓰잖아. 괜찮아. 나만 잘하면, 나만…….
들이쉬는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가슴께에서 부풀어 오르는 응어리를 억지로 타액과 함께 삼켜 냈다. 배 속으로 굴러 들어가, 그대로 위액과 희석되기를 바라며.
***
“하아…….”
나는 보푸라기가 일어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단전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한숨을 맥없이 내보냈다. 그러자 열심히 눈사람의 머리를 두드리던 올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서, 슬퍼?』
『조금.』
『왜?』
『……눈사람에 코가 없어서.』
올리브가 만든 눈사람은 크기는 컸으나 코가 없었다. 나는 곧장 코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 나선 그녀를 벤치에 앉아 구경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부족함 없이 곡을 연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일 내내 집중력을 끌어 쓴 탓에 머리가 멍했다. 분명 플루트를 연주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지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내일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군분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진저리가 났다. 지금 일요일 오후 5시의 평화가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무너져도 시간은 흐르겠지.
괜히 살갗을 감싼 목도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천 조각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살갗을 긁다가, 어디선가 잡초를 주워온 올리브에게 물었다.
『코가 너무 시든 거 아니야?』
『당근이 없어.』
눈사람 코는 당근이 정석인 모양이었다. 하나 사다 줄까. 나는 멍하니 마트까지 가는 길을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대략 10분은 넘게 걸릴 듯하여, 아이를 혼자 두고 가기는 마음이 쓰였다.
나는 잡초를 어떻게든 눈사람에 붙이려고 애쓰는 올리브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같이 찾을까? 나뭇가지로 코 만들어 주자.』
『나뭇가지는 팔이야. 코는 당근.』
『여기 당근은 없어. 같이 사 올래?』
『올리브네 집에 있어.』
아이답게 간단한 독일어 표현이 주를 이뤄 다행이었다. 올리브는 양털이 보송보송하게 달린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올리브, 집 다녀오려고?』
『응……. 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올리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본 거지. 나 또한 의아한 마음으로 그녀의 시선이 다다른 곳을 살폈다.
“아.”
가슴이 직전과는 다른 의미를 띠고 뻐근해졌다.
나는 하얀 눈 위에 도드라지게 거무스름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기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나 싶었다. 하긴, 순순히 남의 말을 들어주면 주태승이 아니다. 꾸역꾸역 얼굴을 비치는 꼴이 달갑지 않았다.
문득 내 옆에 선 올리브가 주태승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잘생긴 아저씨 또 왔어.』
네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알아. 나는 당황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브는 큰 눈을 깜빡이며 주태승을 가리켰다.
『근데 아저씨 좀 이상해.』
『저 아저씨 원래 이상한 사람이야.』
『얼굴이 빨개.』
뭐?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주태승을 곧장 동공에 담았다. 이제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늘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를 덮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위태로워 보였다.
넓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나와 주태승의 시선이 부딪혔다. 뱀처럼 서슬 퍼렇던 눈빛이 오늘은 안개가 낀 듯이 탁했다. 올리브의 말대로 투명한 피부에 서린 홍조가 눈에 들어왔다.
“주태승 씨?”
확실히 평소와 다르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주태승을 향해 떨어졌다. 그의 풀린 눈동자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나를 훑었다. 다 갈라지고 잠긴 음성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괜찮아요?”
이야기가 들리긴 하는 건지, 주태승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또 아프려고 작정…….”
훈계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휘청이던 주태승은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쏟아져 내린 몸뚱어리를 받아 내게 되었다. 나는 축 늘어진 그를 다급하게 끌어안았다.
무거운 건 둘째치고, 맞닿은 살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소리쳤다.
“주태승 씨, 정신 차려요! 주태승 씨!”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내쉬는 숨이 불안정했다. 이 미친놈이 갑자기 왜 이래. 철인 같은 주태승이 무너지는 광경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아저씨 아파?』
덩달아 놀란 올리브가 주태승의 코트 소매를 붙잡았다. 나는 뜨끈뜨끈한 목덜미를 최대한 팔로 감싸고 말했다.
『올리브, 병원, 구급차 불러야 되는데.』
휴대 전화 어디에 뒀지. 아이한테 시킬 게 아니라 내가 불러야겠다. 얼른 주머니를 뒤져보려던 순간, 주태승이 강한 힘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 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미친놈이.
팔을 빼내려고 용을 써도 주태승은 기이한 악력을 발휘해 나를 놓지 않았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나는 결국 그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일어났다.
“알았으니까 좀만 버텨요, 응?”
체격 차이가 상당한지라 주태승을 부축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 더듬더듬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귓가에 쏟아지는 숨이 너무 뜨거워 겁이 났다.
정신없는 와중에 울상이 된 올리브가 옆을 따라왔다.
『아저씨 어떡해?』
『괜찮아. 올리브는 집에 들어가.』
집에 상비약이 남아 있을 거다. 일단 해열제 먹여 보고 정신 좀 차리면 병원을……. 아니, 그냥 의사를 집에 부르면 안 되나? 아니면 침대에 눕혀 놨다가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접전을 벌였다. 두려움으로 엉망이 된 가슴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