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2)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고통이었다. 몸이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다. 입술, 팔과 다리, 엉덩이까지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턱을 당겨 내 몸뚱어리를 살폈다. 엉망진창인 속과 달리 멀끔한 모습이었다. 분명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살갗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그 위로 좋은 향기가 나는 셔츠가 덮여 있었다. 물론 내 옷은 아니었다.
허리를 일으키자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깜짝 놀라 입가를 매만졌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져 비릿한 내음이 느껴졌다.
새삼 실소가 흘러나왔다. 진짜 여기저기 난리가 났구나.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 남아나는 곳이 없었다. 겉에 드러난 피부도, 피부에 싸인 속살도, 속살에 숨은 깊은 곳까지.
“일어났어요?”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주태승이 내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손에 든 물이 찰랑거렸다. 요동치는 수면의 움직임과 가까워지는 슬리퍼 소리가 영화 속의 편집된 장면처럼 느릿했다.
차분한 걸음걸이는 그동안 내가 알던 주태승의 것이었다. 내 시선이 앞에 선 알파를 담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 티끌 한 점 없는 피부, 혈색 좋은 입술. 전부 내가 좋아하는 그를 이룬 요소들이다.
눈길이 멈춘 곳은 푸르스름한 멍이 든 목덜미였다. 그 상흔이 내가 어제 마주한 광경을 증명하는 듯했다.
꿈이 아니야. 나는 저 목을 조르고 등에 손톱을 세워 생채기를 냈다. 배 속에는 맥동하는 성기를 품은 채.
숫제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정사 중에 겪은 일들은 다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밤에 보낸 시간은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연인의 말과 귓가에 쏟아지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성, 그리고 울컥 치밀던 두려움까지.
달칵, 주태승이 잔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가까워진다. 내가 사랑하는 체취가 풍겼다. 심장이 바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고동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팔랐다.
“여진서 씨, 어제는…….”
주태승의 손이 내 뺨을 감싸기 직전이었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공기를 찢었다. 닿지 못한 손가락은 덧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커다란 손을 쳐 낸 손등이 화끈거렸다. 그 열기에 오히려 내가 놀라고 말았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눈에 띄게 요동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왜 이러지.
주태승을 밀어 낸 건 갑작스레 치달은 거부감 때문이었다. 사과해야 하는데 우습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번 박자가 어긋난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잠깐의 정적 후, 주태승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입술, 상했네요.”
“…….”
“내가 그랬습니까?”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하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게 한 말들도 잊고 있을 터다.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라고, 끝내 목까지 조르게 만든 잔인했던 지난 밤을 전부.
“……상처 줄 생각 없었는데.”
주태승의 음성이 스러지는 촛불처럼 꺼져 갔다. 그가 내 입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러트였잖아요, 제가 원해서 잔 거였어요. 뱉어지지 않는 문장이 입 안을 맴돌았다.
한편으로 내 입술 따위를 신경 쓰는 주태승이 바보 같았다. 그러는 본인은 목에 흉측한 멍 자국을 달고 있으면서. 보이지 않으나 등과 어깨도 상처로 가득할 것이다.
답답하다. 이 감정을 뭐라 정의하기 어려웠다. 주태승을 좋아하지만 그가 꺼림칙했다. 전날 밤의 폭력적인 섹스 때문인지, 정사 중 들은 이상한 말 때문인지 나조차도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함께 있는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것. 나는 급조한 거짓말을 둘러대며 입은 셔츠 단추를 풀어 나갔다.
“저, 저 약속 있어서 가 볼게요.”
맨몸을 내보인다는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나는 품이 큰 셔츠를 훌렁 벗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몸뚱어리가 드러났다. 문득 내 상황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은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었으면서 멀쩡함을 가장하는 꼴이 그렇다.
내 옷은 침대 헤드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내가 분주히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는 장면을 주태승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반바지를 꿰 넣을 때까지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일부러 옷을 입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요란히 몸을 들썩이자 뭉친 근육이 쑤셨다. 나는 카디건을 걸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장 엉덩이와 골반에서 신호가 왔다. 얼얼한 둔통이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가랑이 사이가 찢어진 사람처럼 뒤뚱거렸다.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추하다는 걸 알기에 더 열심히 걸었다. 가능하면 이런 모습을 오래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 했을 때, 나를 응시하기만 하던 주태승이 움직였다. 강한 악력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좀 누워 있어요. 아직 힘들잖아요.”
붙들린 건 팔인데 다리가 휘청였다. 나는 곤혹스럽게 주태승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가 내게 닿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 몸으로 누굴 만난다고 고집을 부려.”
주태승은 한 차례 숨을 골랐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거면……. 그냥 집에 가요. 데려다줄 테니까.”
“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내 팔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연약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주태승의 불안정한 호흡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진서 씨 좋아하는 맛있는 거 사 줄게요. 흰죽 말고 전복죽으로. 잠들 때까지 머리 쓰다듬어 주고, 계속 옆에…….”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해도 이 상황에 그런 걸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말하는 주태승의 어투에서 농담기는 찾아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건 주태승 나름의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드러내는 게 익숙지 않은, 그가 나를 붙잡는 방식.
나는 주태승을 괴롭게 바라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내 팔을 잡은 손아귀가 서서히 풀려 나갔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주태승은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는 절뚝이며 방을 나섰다. 온전치 못한 걸음이 하느작하느작 지친 몸을 옮겼다. 거무스름한 인영이 내 뒤를 따랐다.
난 주태승에게 토라진 걸까. 시간이 지나면 이 마음이 추슬러질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주태승을 밀어 내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 자신이 의문스러웠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그를 보면 속이 상했다. 그런데 도저히 함께 있지는 못하겠다.
난폭한 정사가 원인이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XX처럼 굴어 봐.’ 그 말을 들었을 때 몰아친 수치심과 공포가 떠올랐다. 내가 모르는 주태승, 몸에 남은 두려움, 늪에 빠지는 감각. 가닥가닥 엉킨 실이 풀 수 없는 복잡한 매듭을 만들었다.
긴 복도를 지나 이윽고 현관 앞에 도착했다. 나는 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태승은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욱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러트 때 자신의 행동을 되짚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내 입술에 상처를 내고 억지로 아래를 범했던 그 행위들이 나를 이리 만들었다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나는 비스듬히 그에게 시선을 주고 물었다.
“본부장님.”
“…….”
“저희 혹시, 전에 만난 적 있었나요?”
주태승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일렁였다. 살짝 입술이 벌어졌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정신 나간 소리 같겠지.
나는 주태승이 무어라 입을 떼기 전에 덧붙였다.
“아니에요, 저 가 볼게요.”
덜컹, 묵직한 철문이 아가리를 벌렸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찼다. 나는 손잡이에 체중을 실으며 눈을 감았다.
***
나는 며칠간 주태승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 알림을 확인하면 나는 문자로 이제 휴대 전화를 봤다고 전했다. 그럼 그쪽에서 전화를 걸었고, 주태승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덤덤하게 물어 왔다.
얼핏 보면 일상적인 연인의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희미하게 번지는 균열을 느끼고 있었다. 비단 관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일상에도 틈이 벌어졌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여겼던 그 안일함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여진서, 정신 안 차릴래!”
졸업 연주회를 대비한 합주가 끝나고 들은 소리였다. 늘 인자하게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교수님은 크게 화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죄인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함께 연주하는 동기들은 올빼미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다들 말은 못 하고 있지만, 교수님과 같은 생각일 터다.
“너 이게 몇 번 째야. 잘하는 녀석이 대체 왜 이래? 연주 망칠 거야?”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면 플루트 솔로 파트 뺄 수밖에 없어. 게다가 너 독주는 어떻게 할 거야, 이따위로 해서. 무슨 1학년도 안 하는 실수를 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트리플 텅잉을 요하는 부분에서 박자를 똑바로 맞추지 못했고, 엉성한 비브라토는 연주의 맥을 끊었다. 그간 교수님의 신임을 잔뜩 얻은 덕에 이번 곡은 솔로 파트까지 있을 정도로 플루트 비중이 높게 편곡되었다.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네가 원래 못하면 말도 안 해. 중요한 파트도 안 줬어.”
“…….”
“잘할 수 있는 놈이 컨디션 조절 못 해서 난리 치는 꼴 보니까 화가 나. 알아들어?”
진짜 바보 같다. 공사 구분 못 하고 흔들리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땀이 묻은 플루트를 꽉 쥐었다. 이마에 교수님이 뱉는 한탄이 쏟아졌다.
“한국대 졸업 연주회가 다른 곳이랑 같아? 알파고 오메가고, 세상 잘난 사람들은 다 보러 오는 공연인 거 너도 알지. 누군가한테는 정말 큰 기회야. 여진서 너도 마찬가지고.”
“네.”
“참, 내가 너를 어떻게 챙겼는데…….”
교수님은 홀로 분에 못 이겨 입술을 짓씹다가, 겨우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맺었다.
“너 지금 여진서 아니야. 실망시키지 마. 다음 시간에 두고 볼 거야.”
“죄송, 합니다.”
“가서 쉬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게 교수님은 합주실을 빠져나갔다. 한 차례 파란이 지나간 후에도 무대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그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타액으로 마른 목을 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심하고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겠다. 주변에서 재능 있다는 소리 몇 번 들으니까 대강해도 될 줄 알았나. 집중력 흐트러지면 바로 실수 연발인 주제에 플루티스트는 무슨,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 시간 같은 일 분이 흘렀다. 얼음장 같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제 악기를 정리한 오민지가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 플루트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진서야.”
“미안.”
“뭐가 미안해. 괜찮아.”
연주가 엉망이 되어 본인도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오민지는 다정하게 내 어깨를 쓸어내렸다. 곧 묵직한 첼로를 짊어진 박상훈도 모습을 보였다. 그가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교수님 예민하시네. 그렇게 화낼 필요 있나, 애들 다 있는데.”
“진서한테 기대가 크셔서.”
“여진서 풀 죽은 거 아니지? 너 교수님 말 흘려듣는 거 잘하잖아.”
그건 잘하긴 하지. 서글픈 와중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어깨를 만지던 오민지가 아예 내 등에 매달렸다. 그녀가 특유의 밝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혼나서 배고플 텐데 밥 먹으러 가자.”
애석하게도 지금은 식욕이 없었다.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입맛이 없어서.”
“또 입원한다, 너. 그러다. 샌드위치라도 먹여야겠어.”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상훈이 손목을 들었다. 그가 시간을 확인하고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나 알바 때문에 같이 못 먹을 듯?”
“그럼 나랑 여진서 둘이 가야지 뭐.”
챙겨 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진심으로 내장에 뭐가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교수님께 저런 말을 듣고도 태평하게 밥을 먹을 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못했다. 하물며 이미 주태승과 관련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도부터 막히는 타입인가 보다. 그저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나도 그냥 집 들어가야 될 것 같아.”
“아, 그래?”
발랄한 대답과는 달리, 오민지는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놓지 않았다. 뭐야. 나는 그녀와 이어진 손가락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귓가에 평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관 앞에 카페 갈까? 거기 햄치즈 기가 막혀.”
“아니, 나 집에 간다니까.”
“그건 네 사정이고. 난 너랑 카페 가기로 방금 정했어.”
정말 막무가내가 따로 없다. 황당함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으려니 오민지는 나를 끌고 그대로 합주실을 나섰다. 영어 학원 가기 전에 집에서 좀 쉴 생각이었건만,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 이 친구는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오민지.”
오민지에게 이끌리며 한 차례 그녀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건 본인 행동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냥 보내면 또 굶으려고. 어림도 없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학생회관 맞은편의 카페였다. 오민지는 멀뚱멀뚱 선 나 대신에 메뉴판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진동 벨을 손에 쥔 그녀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왜 그렇게 피곤해?”
“나?”
“그냥 힘들어 죽겠다고 얼굴에 다 써 있어. 또 무슨 일인데?”
얼굴에 그렇게 티가 났나. 나는 얼떨떨하게 뺨을 만지작거렸다. 곧 주문한 음료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우리는 트레이를 들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따끈따끈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오민지가 말했다.
“하긴, 바빠서 피곤할 만도 하지. 너 영어 학원도 다니잖아.”
“오늘도 가는 날이야.”
“열심히 하네. 여진서 유학 가면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
샌드위치 냄새를 맡아도 전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나는 커피로 목을 축이고 대답했다.
“정해진 건 아니야.”
“그래도 재능 있으면 유학 가는 게 낫지. 친구로서는 서운하긴 한데.”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도 미래를 떠올리면 막연했다. 그저 아직은 한국에 있고 싶었다. 해외로 나가면 당장 주태승도 못 볼 거고, 지금이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됐지만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오민지가 물어뜯은 빵에서 치즈가 주욱 늘어졌다. 그녀가 면을 빨아 들이듯 치즈를 흡입하며 물었다.
“그럼 피곤해서 자꾸 실수하는 거야? 진짜 별다른 건 없고?”
“…….”
“또 스토커 같은 거 생긴 거면 가만 안 둬. 서정후는 이제 안 보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자퇴라도 한 건가. 서정후에 대해서는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됐다.
나는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는 오민지를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는 스토커 사건을 털어놓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더라도 일단 말이라도 해 볼까 싶었다.
“그, 민지야.”
“응?”
“자꾸 모르는 장면이 보이고, 이상한 목소리 들리고 그러면……. 나 어디 아픈 건가?”
“엥?”
오민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잘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저게 다야. 요즘 좀 그래.”
“……귀신 들린 거 아니야?”
역시 오민지도 초반의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런 오컬트적인 현상이라기에는 의문이 많았다. 딱히 귀신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TV에서 묘사되는 빙의와 내가 겪은 일들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 정말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나. 확실히 일련의 스토커 건으로 큰 충격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 처음 이 증상을 겪은 건 스토커가 생기기 이전이었다.
과거를 되짚어도 뾰족한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애꿎은 빨대를 툭툭 건드렸다.
“에이, 근데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그렇지.”
“내 생각에는 너 넷X릭스 중독이라 그럴 수도 있어. 몸이 피곤한데 드라마 과몰입해서, 뭐.”
그렇게까지 드라마를 열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민지도 본인의 말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이 내 손등에 손을 얹었다.
“스트레스 너무 받는 거 아니야? 부담 갖지 마.”
“으응.”
“아니면 병원 한번 가 보든가. 요즘 현대인은 정신 질환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잖아. 부끄러운 일 아니야.”
병원이라. 나는 미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끌리지 않는 선택지였다. 병으로 치부하기에는 증상이 드문드문했으니.
오민지는 내 반응을 주시하다가, 샌드위치 안의 햄을 끄집어내 아무렇지 않게 내 입에 물렸다. 곧 치즈와 양상추도 함께 입가에 들이밀어졌다. 먹여 주는 건 좋은데 왜 다 분해해서 먹이는 거야. 나는 다소 억울하게 속 재료들을 씹어 넘겼다.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온 건 잘게 찢은 빵이었다.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기묘한 방법으로 샌드위치를 먹인 오민지가 빙그레 웃었다.
“이거 겉촉속바네.”
“뭐가?”
“겉은 촉촉한데 속은 바닥이 났잖아.”
그 말대로 내용물이 텅 빈 샌드위치는 소스에 전 속만 촉촉한 빵 쪼가리가 되었다. 하지만 뭐랄까, 겉촉속바 보다는 그냥 엉망진창이 된 샌드위치 같은데. 내가 너덜너덜한 빵을 내려다보자 오민지는 변명하듯 말을 얹었다.
“통째로 먹이면 안 먹을 것 같아서, 아쉬우니까 내용물만이라도 먹으라고…….”
그것참 고맙다. 나는 웃음 섞인 한숨을 흘리며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
오민지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학원에 갈 때가 되었다. 그래도 빈속이 아니라서 아까보다는 기분이 좀 나았다. 나는 가방에 든 교재를 확인하고 학교 정문을 나섰다.
휴대 전화를 꺼낸 건 버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딥니까?]
“저 학교요.”
[데리러 가겠습니다. 한 20분 걸려요.]
뜬금없이 왜 온다는 거야. 나는 당혹스러움에 다소 큰 목소리로 주태승을 저지했다.
“잠깐만요. 지금 오시게요?”
[싫어요?]
“오늘은, 좀.”
주태승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바로 영어 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를 운전기사로 쓰기도 미안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박자 늦은 물음이 들려왔다.
[왜?]
“저 영어 학원 가는 날이라서요.”
[갑자기 무슨 학원.]
그러고 보니 주태승한테 말을 안 한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모든 걸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기에 그가 내 일상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물론 내가 연락을 성의 있게 하지 않은 탓이었지만. 나는 은근한 죄책감을 품고 더듬더듬 설명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교수님도 추천하셨고요.”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학교 졸업하면요.”
[졸업하고 해외라도 갈 생각이에요?]
그럴 생각 없었다. 주태승 씨가 한국에 있으니까 남아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부터 그가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안심시켜 주고 싶은데 입이 왜 말을 안 들을까.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지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번호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휴대 전화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잘, 모르겠어요.”
차들이 도로를 달리는 잡음이 크게 났다. 주태승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정적이 무거웠다. 나는 가만히 눈을 끔뻑이며 소란스러운 도로를 내다보았다.
주태승이 작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가 나서 분을 삭이고 있나. 섭섭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국내에서도 괜찮은 커리어 쌓을 수 있을 텐데요.]
“네?”
[졸업하자마자 시립 교향악단에 자리 만들어 주겠습니다. 유학을 죽어도 가고 싶으면 몇 개월 정도는 연수 차원으로 다녀오든가.]
“…….”
[나라는 독일로 해요. LS에서 후원하는 대학 있으니까.]
그게 뭐야.
[영어 못해도 곤란할 일 없게 사람 붙여 줄게요. 학원은 적당히 재미 보다가 그만둬요.]
내 미래에 대한 설계를 손쉽게 짜 버리는 주태승이 이해되지 않았다. 본인이 왜 내 자리를 만들고 유학 갈 나라까지 정해 주려는 거지. 그와 연인이라고 하여 깔아 둔 밥상을 넙죽 받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 혼자서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걸 왜 본부장님이 정해요?”
왜 남의 커리어를 마음대로 정하냐고, 꼭 손안에 두고 통제하려는 것처럼. 나는 뒤틀린 심기를 숨기지 않고 덧붙였다.
“제 스폰서도 아니고.”
[뭐?]
빠앙, 눈앞을 지나가는 차가 경적을 울렸다. 바람이 이마를 간질이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주태승은 얼마간 조용했다. 유독 침묵이 잦은 통화였다. 말이 조금 심했나. 이러려던 게 아닌데 자꾸 그와 틈이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요, 스폰서 아니니까.]
“…….”
[그 좆같은 본부장님 소리 좀 안 할 수 없나?]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내가 주태승을 본부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나? 눈치 못 챘는데 왜 그랬지. 더불어 주태승은 어째서 저 호칭에 예민하게 구는 걸까. 속이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본부장 맞잖아요.”
[애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불편합니까? 이때까지 잘만 불렀잖아.]
“그건, 그런데.”
본인이 전에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해 놓고.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상대 역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끊겠습니다. 학원 잘 다녀와요.]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던 통화는 씁쓸하게 끊어졌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싸우려고 전화를 받은 게 아니었다. 속으로는 더없이 좋아하는데 자꾸만 벌어지는 간극이 속상했다. 다음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얼굴을 봐야겠다. 진정된 후에 대화를 주고받으면 괜찮아질지도 모르니까.
지각이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
시간은 야속하고 이기적이라 제 길을 따라 달려가기만 할 뿐이다. 결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계절은 이제 완연한 가을의 한 중턱에서 겨울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화로 작은 다툼을 벌인 후로 주태승은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단순히 해외에 출장을 나간 걸 수도, 내 태도에 질려 버린 걸 수도 있다. 먼저 연락할까 싶어 그의 연락처를 눌렀다가 그만두는 일이 반복되었다.
왜 주태승이 하는 말들이 못마땅한지, 러트 때 느꼈던 거부감이 사라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차가워진 바람이 가슴을 싸늘하게 식혀 버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과 함께 몸도 지쳐 갔다. 합주를 실수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몸뚱어리는 하나인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간신히 연습량을 늘려 완벽한 연주를 만들어 내면 눈과 손가락이 녹초가 되었다. 넝마가 된 상태로 학원까지 다니려니 기력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나는 일상을 덮친 물결에 휩쓸려 부표처럼 하릴없이 떠내려갔다. 간헐적으로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계속 억눌렀다. 말수가 부쩍 적어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교단 앞에 선 강사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0시였다. 몇 분 전에는 잘 듣고 있었건만, 어느새 또 집중을 놓은 모양이었다.
짐을 챙긴 수강생들이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가방을 메고 그 무리에 합류했다. 승강기를 타고 1층에 들어서자 시린 공기가 뺨을 에었다.
대학 입시 준비할 때보다 더 피곤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버스 정류장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여름도 아닌데 살갗에 달라붙는 바람이 습했다. 기분 나쁘다. 참 별게 다 신경을 건드렸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아 속이 허했다. 배가 고픈 탓에 날씨가 유독 춥게 느껴졌다. 꾸역꾸역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휴대 전화를 꺼내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아, 미친.”
액정을 확인하자 저절로 욕이 나왔다.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배차 간격이 말도 안 되게 길었다.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자그마치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진짜 되는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고작 차로 두 정거장 가자고 30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멀쩡하게 두 다리 다 붙어 있으니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겠다. 아주 먼 거리도 아니었고.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서늘한 밤공기에 비린내가 섞여 올라왔다. 나는 퀭한 눈을 비비고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멨다. 가방에 든 필기구가 덜그럭거렸다.
나와 보라고! 개새끼야-.
멀찍이서 술에 취해 꽥꽥 고성을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시끄럽다. 술 마셨으면 곱게 들어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나는 보이지도 않는 이기적인 취객을 향해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통증이 올라왔다. 뭐 얼마나 움직였다고 벌써 아파. 운동 부족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정도가 심각했다. 한편으로 후회가 되었다. 얌전히 버스나 탈걸, 그거 잠깐 기다리는 걸 못 참아서 사서 고생을 한다.
주태승이랑 안 싸웠으면 데리러 오라고 할 텐데.
나는 입술을 말아 드문드문 올라온 각질을 씹어 댔다. 지금이라도 전화하면 주태승은 반드시 올 것이다. 내 몸이 상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미 상태가 나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이제 와서 데리러 오라고 하기는 망설여졌다. 애초에 주태승은 내가 학원에 다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멋대로 굴면서 필요해지니까 도와 달라고 하자니 양심에 찔렸다. 그나마 집이 가까워 다행이었다.
반 정도 왔으려나. 휴대 전화를 꺼내 길 찾기 애플리케이션을 열었을 때였다.
액정에 투명한 물방울이 동그랗게 맺혔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뒤이어 또 다른 물줄기가 휴대 전화 화면을 톡, 때리고 미끄러졌다.
“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감탄이 나왔다. 불운의 화룡점정이었다. 갑자기 비가 온다고?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운 데서 알아챘어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생각 없이 걸어가겠다며 설쳐 댔으니 이 또한 내 업보였다. 짜증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나는 얼른 주변에 편의점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걷고 있는 곳은 텅텅 빈 골목이었다. 일이 꼬이다 못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내 속도 모르고 빗줄기는 점차 두꺼워져만 갔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집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등골과 팔뚝에 소름이 올라왔다.
책이 젖지 않도록 가방을 품 안에 숨기고, 휴대 전화도 아예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목구멍에 차마 꺼내지 못한 욕설이 맴돌았다. 달리 탓할 사람도 없는데 머릿속이 원망으로 가득 찼다. 왜 하필 이럴 때 비가 오냐고.
젖은 옷가지가 진흙과도 같이 끈덕지게 몸을 짓눌렀다. 뿐만 아니라, 벌어진 옷 틈 사이로 얼음장 같은 빗물이 굴러 들어왔다. 피부가 실시간으로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내 모습은 점차 사람에서 물에 빠진 생쥐로 변모해 갔다.
쏴아아-.
가을비가 이토록 매서운지 처음 알았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아스팔트를 뛰노는 빗방울을 밟았다. 체온을 빼앗긴 탓에 오한이 들었다.
가서 과제 해야 하는데. 공부고 뭐고 일단 샤워부터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할 듯했다. 나는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을 닦아 내며 한숨을 쉬었다. 몸은 싸늘한데 이마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조금씩 숨을 내쉬는 게 버거워졌다.
무거운 다리와 사투를 벌이기를 십 여분, 이윽고 시야에 익숙한 고급 빌라가 들어왔다. 나는 품에 안은 가방을 더듬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 현관 들어가도 되는 건가. 머리카락, 속옷, 양말, 죄다 엉망으로 젖어 어디 하나 남아나지가 않았다. 나는 물을 잔뜩 빨아들인 옷자락을 대충 짜냈다. 물줄기가 굵직한 궤도와 함께 주르륵 쏟아졌다.
뭐부터 해야 하나.
몸이 요구하는 것들이 많았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 일단 들어가서 씻는 게 제일 먼저다. 다음은 더러워진 바닥을 닦자. 밥은 나중에 해결하고, 두통약……. 빈속에 먹어도 괜찮겠지.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짓누르다가, 더듬더듬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의도치 않게 자꾸만 눈이 감겼다. 숨결이 뜨거웠다. 문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미약한 경련을 반복했다.
삐빅, 무너져 가는 나와 달리 기계음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바닥난 힘을 짜내 겨우 현관문을 열었다. 고지가 코앞이거늘, 당장이라도 현관에서 뻗어 버릴 것 같았다.
젖은 발을 바닥에 디딘 순간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뚜렷하게 귓구멍을 관통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나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건 주태승이었다. 당혹스러움에 눈동자가 벌어졌다.
“주태승 씨?”
왜 왔지, 온다는 말 없었는데. 깊게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멍했다. 나는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휘청였다. 다리가 풀려 몸이 제멋대로 기울고 말았다.
다행히도 넘어진 건 바닥이 아니라 너른 품 안이었다. 나는 주태승의 가슴에 기대 숨을 할딱거렸다. 얼어붙은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귀가 먹먹해 상대가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저 서늘한 표정을 보면 틀림없이 또 혼을 내려는 것이다. 나는 어영부영 손을 들어 검은 와이셔츠를 잡았다.
“화내지 마세요.”
“…….”
“비 맞고 와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무어라 말하려던 주태승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비를 쫄딱 맞았는데 혼나기까지 했으면 참 서러울 뻔했다.
물을 흠뻑 뒤집어쓴 나를 따라 주태승의 옷도 스멀스멀 젖어 갔다. 나는 답답할 만큼 어깨를 꽉 부둥켜안은 그를 살짝 밀어 냈다.
“저 이제 괜찮으니까 놔주세요. 주태승 씨도 젖어요…….”
내 말과는 반대로 나를 죄어 안은 힘이 강해졌다. 가슴팍이 뻐근하게 눌릴 정도였다. 혼내는 건 참았지만 이 요구는 들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코에 가득 스미는 주태승의 체취가 달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나는 묵직한 눈두덩이가 시야를 완전히 덮도록 내버려 두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 주태승이 가만히 중얼거리는 문장이 들려왔다.
“진짜 병신이 따로 없어.”
“흐, 읏.”
“너도, 나도.”
그래도 둘 다 정상이 아니라서 외롭지는 않겠다.
***
“공복에 복용하면 안 됩니다. 환자분 일어나면 꼭…….”
주태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듯이 몸에서 열이 끓었다. 온몸을 꽁꽁 싸맨 이불을 죄다 걷어 차 버리고 싶었다.
“피로하면 면역력이 떨어져요. 게다가 비까지 잔뜩 맞았으니.”
“네.”
“오메가들은 선천적으로 알파에 비해 체력이 약합니다. 본부장님께서 신경 써 주세요.”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눈을 덮었다. 살갗에서 주태승 냄새가 났다. 그는 내가 아플 때 이런 식으로 열을 재고는 했다.
미지근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질어질한 기운에 취해 재차 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사위가 고요했다. 내 눈동자는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눈이 떠져서 뜨고 있을 뿐이었다. 내버려 두면 다시 감길 듯했다.
사박, 불현듯 누군가 이불을 더듬는 느낌이 들었다. 곧 다부진 손이 내 어깨를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힘이 빠진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여진서.”
“네에.”
“혼자 못 앉겠어?”
“으응.”
주태승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축 늘어진 나를 이불째로 안아 들었다.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몸에 자잘한 진동이 왔다. 그리고 그 울림은 자연스레 두통으로 이어졌다.
걸음이 멈춘 곳은 침실의 소파 앞이었다. 주태승은 나를 무릎에 앉혀 그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나는 가슴에 뺨을 묻고 힘없이 색색거렸다. 목이 간지러워 잘게 기침이 나왔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이 입가를 두드렸다. 속이 메스꺼워 영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입술을 어물거리자 주태승이 타이르듯 속삭였다.
“입만 벌리고 있어.”
“먹기 싫은데.”
“말 들어, 착하지.”
애도 아니고. 나는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뜨끈한 미음이 혓바닥 위로 흘러들어 왔다. 목구멍이 부었는지 음식을 넘기는 게 고역이었다.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 번 더.”
진짜 싫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주태승의 차분한 음성이 쏟아졌다.
“빈속이라 그냥 약 먹으면 안 돼.”
“…….”
“낫기 싫어서 칭얼대?”
그게 아니라 목이 아프다고, 못 먹겠다는데 왜 자꾸 먹이는 거야. 오기가 일어 입을 벌릴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고집스레 입술을 꽉 닫은 채 고개를 돌렸다.
“계속 두 번 말하게 하네.”
주태승이 짧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투정을 순순히 받아 주는 상대가 아니었다. 곧 다소 강압적인 힘이 내 턱을 쥐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입을 벌리고 억지로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으, 읍.”
미처 삼키지 못한 미음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주태승을 노려보았다. 가시가 잔뜩 돋은 장미 줄기를 먹은 것처럼 목구멍이 쓰라렸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그대로 토해 내려 할 때였다.
‘여진서는 항상 두 번 말하게 하네.’
주태승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환청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얌전해지자, 주태승은 내 턱을 놓고 죽 그릇을 집어 들었다.
‘윗입 말고 다른 쪽으로 먹고 싶어서 그래?’
싫어.
“입 벌려.”
싫어, 싫어, 싫어.
순간적으로 강렬한 증오심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나는 주태승의 품에서 난폭하게 몸을 뒤틀었다. 그 탓에 주태승이 쥐고 있던 죽 그릇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릇이 깨지는 굉음이 침실에 울렸다.
“여진서.”
“싫다고 하잖아. 싫다니까. 왜, 왜 내 말을 안 들어.”
주태승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나는 흐느끼다 못해 마구잡이로 악을 써 댔다.
“당신이 주는 거 다 먹기 싫다고. 나 좀 제발, 제발!”
“…….”
“옆에 있으면 돌아 버릴 것 같아. 개 취급하지 마, 창놈 취급하지 마. 당신이 뭔데, 당신이…….”
배 속에 무언가 더러운 게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뱃가죽을 벅벅 긁었다. 차라리 피가 나서 끔찍한 ‘이것’이 빠져나갔으면 좋겠는데.
“흐, 읏.”
“알았어.”
별안간 주태승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맞닿은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 그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움푹한 등줄기에 손을 얹었다. 긴 손가락이 굽어 내 옷자락을 바짝 긁었다.
“알았으니까 숨 똑바로 쉬어.”
“흐윽, 으, 나 좀 놔줘. 차라리, 불쌍하게 생각해서. 나 좀.”
주태승은 있는 힘껏 나를 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가만가만 이야기했다.
“안 돼. 난 너 못 놔.”
“이, 개새끼야, 그럼, 흐윽.”
내 주먹이 주태승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가격했다. 나는 폭력적으로 그를 내리치며 서럽게 울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비슷한 흐느낌이 바락 터져 나왔다.
“예쁘다고 해 줬으면, 안아 줬으면 나는, 난…….”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전하지 못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넓은 침실을 바라보았다. 열감이 가시지 않은 뺨이 화끈거렸다. 모스 신호를 보내듯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자 불분명한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비를 잔뜩 맞고 집에 들어온 건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곧장 쓰러진 것 같은데, 어떻게 멀쩡히 침대에서 눈을 떴나 의문이었다.
코로 숨을 들이쉬기가 조금 어려웠다. 나는 손가락으로 콧방울을 누르고 몇 차례 킁킁거렸다. 비를 그렇게 맞았으니 아무래도 감기를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정신은 전날보다 개운해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잔 건지, 지금 몇 시나 됐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아.”
다음 순간, 무심코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짝에 기대고 선 인영 때문이었다. 주태승이 입을 굳게 다문 채 표정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침대맡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수려한 손이 허공을 가로질러 내 이마를 향했다. 주태승에게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건 알았다. 잘 알고 있으나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피해 얼굴을 돌렸다.
“저, 가까이 오지 마세요.”
“…….”
“감기 옮을 수도 있어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재차 팔을 뻗었다. 약간의 강제성을 담은 손길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나는 눈가를 미세하게 구기며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어요?”
주태승은 이마를 짚어 열을 재고서 차분히 손을 거두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어제. 나는 속으로 전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물을 머금은 솜이 되어 쓰러졌던 현관과 열이 올라 주태승에게 기댄 장면 따위가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고 드문드문한 잔상이었다.
그럼 옷을 갈아입힌 것도, 침대까지 옮겨 준 것도 주태승이겠구나. 나는 괜히 보송보송한 옷자락을 매만지며 코를 훌쩍거렸다. 혈관이 부었는지 코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코맹맹이가 됐네.”
내 상태에 대해 간결한 감상을 내놓은 주태승이 가볍게 이불을 젖혔다. 슬슬 일어나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민망한 기색으로 콧등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필 또 이런 꼴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밖에 죽 있어요.”
“죽이요?”
“먹기 싫어도 좀 참아요. 약 먹어야 되니까.”
먹기 싫다고 한 적 없는데. 나는 굶주린 배를 감싸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태승은 내 발이 바닥을 딛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무슨 약이요?”
“밤에 의사 왔다 갔잖아요.”
“아…….”
“기억 안 납니까?”
툭, 주태승이 안겨 준 카디건이 내 손에 떨어졌다. 나는 소매에 팔을 꿰 넣으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도록 머릿속은 새하얗게 표백될 뿐이었다. 언뜻 생각나는 장면조차 손상된 필름처럼 빈약했다.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바보가 되어 가나. 연달아 멍청한 질문을 반복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게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문득 주태승의 왼손에서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방금 내 이마를 짚은 것과는 다른 쪽이었기에 이제야 눈치를 챘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한번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나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무심결에 왼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눈은 틀리지 않았다.
“손, 왜 그래요?”
나도 모르게 심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내게 잡힌 주태승의 손이 움찔거렸다. 굳은살 하나 없는 고운 손바닥에 깊은 상처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충 봐도 굉장히 쓰라릴 듯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를 다그쳤다.
“어쩌다 다쳤어요?”
오히려 다친 장본인은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그가 조용히 몸을 틀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곧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걱정돼요?”
“당연하죠. 뭘 했길래 약도 안 발랐어요.”
저 정도면 꿰매야 하는 거 아닌가? 내버려 두면 흉 질 것 같은데.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피딱지가 앉은 상흔을 어루만졌다. 주태승은 내가 손바닥을 주물럭거리도록 얌전히 힘을 빼고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네.”
“뭐가요?”
“아닙니다. 그냥 어제 실수로 그릇을 깼어요.”
그 주태승이 실수를 했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본인이 그랬다는데 뭘 어떡하겠는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거실로 나갔다.
발길이 닿은 곳은 상비약을 보관해 두는 서랍장이었다. 어지러이 널린 약들 사이, 연고와 밴드가 손에 잡혔다. 나는 치료 도구를 챙겨 멀거니 선 주태승에게 다가갔다. 찢긴 살결은 다시 봐도 미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안쓰러웠다.
무슨 정신으로 조각을 치웠길래 손을 이렇게 다쳤을까.
“으, 따가울 수도 있어요.”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연고를 상처 위에 살살 펴 발랐다.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우습게도 주태승의 상한 손을 보니 내가 아픈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내가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동안, 주태승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 다친 게 신경 쓰여요?”
아까부터 뭔 소리야.
“그렇다고요.”
대답을 들은 주태승은 말없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영 불편한 마음으로 카디건 옷자락을 구겼다. 코가 막혀 숨을 쉴 때마다 색색, 잡음이 났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주태승의 눈동자가 다시금 움직여 나를 담았다.
“식탁에 죽 있으니까 먹어요.”
“저만요?”
“난 여진서 씨 일어나기 전에 먹었습니다.”
저 말이 사실일까. 나는 강박적으로 엄지손톱을 꾹꾹 누르다가 주태승과 함께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의 말대로 식탁 위에는 푸르스름한 전복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가 의자를 끌어 앉자 주태승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뭉근하게 뒤적거렸다. 김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끓인 지 꽤 된 모양이었다. 저들끼리 얽힌 질척질척한 밥알이 덩어리째로 툭 곤두박질쳤다.
적당량을 퍼 입에 넣으니 미적지근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이 정도면 안 데우고 먹어도 괜찮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몇 숟가락을 떠먹었다.
주태승은 내가 죽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취한 태도 같았다. 부엌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불편하게 숟가락을 문질거리다가 먼저 머뭇머뭇 말문을 텄다.
“전에 전화로 화내서 죄송해요.”
“화?”
“스폰서 어쩌고 했던 거요.”
말을 하는 도중에 목이 건조해졌다.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시 숨을 정돈했다. 주태승은 미동도 없이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그, 요즘 피곤해서 그랬어요.”
예민하게 군 이유가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주태승 씨가 저 신경 써 주려는 거 알아요, 아는데.”
“…….”
“그래도 제 길은 제가 찾아볼게요.”
이 정도면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더는 내 장래 문제로 그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반쯤 비운 죽을 저으며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마음의 짐과 같던 이야기를 털어 냈는데 아직도 속이 답답했다.
주태승은 내 이야기를 듣고도 조용했다. 이제 그를 못 본 척하고 밥이나 먹으면 되었으나 자꾸만 눈이 맞은편을 향해 돌아갔다. 누가 태생 서민 아니랄까 봐 양반은 못 된다.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그를 보챘다.
“무슨 생각 하세요?”
주태승의 시선이 내 뺨 언저리와 목덜미를 맴돌았다. 그는 눈으로 나를 더듬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여진서가 그린 미래에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지. 그런 거.”
순간적으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문은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고, 주태승은 나와 눈을 맞춘 채로 묘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날아가는 새를 붙잡는 방법, 나는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밖에 모르는데. 예전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했겠고.”
“…….”
“그런데 지금은 새가 울면 눈깔이 뒤집힐 것 같아서.”
듣는 내가 더 혼란스러웠다. 지금 나를 새에 비유하고 있는 건가. 그럼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소리는 꽤나 섬뜩했다. 나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저 새 아닌데요. 날아가지도 않아요.”
“그래요.”
어느새 식은 죽이 끈끈하게 굳어 갔다. 이제 식욕을 충분히 채웠으니 상관없었다. 주태승은 차가운 죽이 달라붙은 내 숟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장을 바람에 흘려보내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입에 안 맞았습니까? 전복죽, 먹고 싶어 했잖아요.”
“많이 먹었어요.”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해요.”
“괜찮아요.”
그때, 갑자기 주태승이 내 손을 꽉 쥐어 왔다. 손바닥의 상처가 아릴 텐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한 악력 탓에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러다 아문 살이 터져서 또 피를 볼지도 모른다.
“주태승 씨, 손……!”
내 다급한 목소리에도 주태승은 힘을 빼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잡힌 손목이 뻐근히 저려 왔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래서야 연고로 처치를 한 게 죄다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나는 힘껏 팔을 비틀며 소리쳤다.
“피 나잖아요! 놔요, 좀!”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결국 상처가 덧나 밴드 아래에 고인 핏물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다시 약상자를 꺼내고자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있어요.”
나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주태승이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지친 눈매가 살짝 구겨졌다가,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약 먹고 쉬어요.”
“지금 가시려고요?”
주태승은 입을 여는 대신 고요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정욕을 품어 타오르는 것 같기도, 오히려 차가운 눈보라처럼 서늘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꺼내 놓았다.
“눈, 핥고 싶으니까.”
“…….”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내가 말을 잊은 사이 주태승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정말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의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맥락에 한참 어긋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곧 졸업 연주회 해요. 얼마 안 남았어요.”
이런 식으로 알리려는 건 아니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어이가 없었다. 후에 제대로 말할 기회가 있을 텐데, 왜 하필 지금.
“주태승 씨가 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그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요. 연주하는 거. 그러니까 와 주세요.”
좋아한다는 것도, 연주하는 걸 보여 주고 싶다는 것도 전부 진심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은 그랬다. 비죽비죽 솟는 거부감과 나를 침식하는 기억에 잡아 먹혀 둘의 관계가 변하더라도, 당장의 여진서는.
주태승이 옅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내게 모호한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끔찍이도 예쁘겠네.”
***
“오늘 연습 여기까지 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합주의 끝을 알리는 말이 연습실 내부를 우렁차게 채웠다. 나는 취구에서 입술을 떼고 가쁜 호흡을 정돈했다. 오후 내내 계속된 강행군에 턱 근육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상황은 다들 마찬가지인지, 사람들은 저마다 어깨와 목덜미에 뭉친 근육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국대 졸업 연주회는 여느 콘서트와 다름없는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 각자의 개인 독주를 두 곡, 단체 합주는 세 곡 정도를 준비해야만 했다. 과장 없이 연주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졸업생들은 전부 학교에 틀어박혀 연습에 체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연습실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플루트를 손에 쥔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곁에서 바이올린을 정리하던 오민지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의 눈에 일순 동정이 가득 담긴 기색이 스쳐 갔다.
“여진서, 너는 대체 어떻게 서 있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요즘 더 마른 것 같아. 병원 갈 생각 없어?”
그 정도인가. 나는 소매 아래에 감춰진 앙상한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플루트를 정리해야 하는데 케이스가 너무 멀리 있다.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손을 뻗어 보았다.
“한의원 가서 보약이라도 지어 먹든가. 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보약은 좀 오바 같은데.”
“거울은 보고 사냐? 너 팔 거의 나무젓가락 수준이야. 허여멀건해서 이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돼.”
유난이 심하다. 나는 앉아서 케이스를 끌어오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여진서. 너도 피자 먹을 거지?”
이번에는 오민지가 아니라 동기 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피자가 아니라 좀 더 가벼운 것을 먹고 싶었다. 쌀국수라든가.
“나랑 여진서도 먹을 거야.”
대답을 내놓은 건 뒤에 있던 오민지였다. 내 몫을 빼 달라고 정정하려다가 그만뒀다. 무기력했다. 그냥 피자 먹지 뭐, 어차피 지금 먹지 않으면 집에 가서 따로 무언가를 챙겨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면.”
“응.”
“너 연주회 끝나고 병원 꼭 가. 알았어?”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연습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별안간 멀지 않은 곳에서 곰과 닮은 형체의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곰은 내가 누운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내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얹어 놓았다.
“여진서 오늘은 안 혼났네.”
곰이자, 박상훈은 내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며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타고난 악력이 센 탓인지 그가 살살 만져도 근육이 저릿거렸다. 나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린 채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었다.
“어어, 움직이지 마. 냄새 나니까.”
“뭐?”
“너도 피자 먹지? 여진서랑 같이 먹어야겠다. 더 많이 먹게.”
그렇게 말하면 악착같이 한 조각이라도 더 먹고 싶어진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박상훈을 노려보다가 비죽 튀어나온 한숨을 그대로 토해 냈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다 귀찮으니까 먹든지, 말든지.
이대로 눈을 감으면 잠들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소파와 한 몸이 되려는 것처럼 팔걸이에 코를 처박았다. 팔짱을 낀 오민지가 내 널브러진 손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너 독주 무슨 곡 한다고 했지?”
“안데르센 ‘요정의 춤’이랑 ‘사랑의 인사’.”
“곡 선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앞에 건 교수님이 시켜서, 사랑의 인사는 그냥 하고 싶어서.”
엄마와 인생에서 처음 들은 클래식이며, 최근에도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에 함께한 곡이었다. 중요한 졸업 연주회에 이 곡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근데 난 좀 아쉬워.”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오민지가 시무룩하게 운을 뗐다. 갑자기 왜. 나와 박상훈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졸업하는 거. 이제 너희랑도 자주 못 만나고, 사회에 내던져지는 기분.”
“너 부모님이랑 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존나 무드가 없는 새끼네, 이거.”
나도 박상훈과 비슷한 생각을 했으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욕을 얻어먹는 건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다.
“우리 약속하자. 졸업하고 연 끊는 새끼들 뒤지게 패 버리기로.”
“보통 그런 걸 약속이라고 하나?”
“그럼 연락 꼬박꼬박하면 되잖아.”
“아니, 그러긴 할 건데.”
나는 소파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실실 웃었다. 입매가 풀어진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여러모로 지쳐 있었으니까. 정신이나 몸이나,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듯한 기분.
잠시 친구들이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연습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넓적한 피자 박스를 든 동기들이 삼삼오오 내부로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오민지에게 피자 한 판을 건넸다.
“셋이서 한 판 오반데.”
피자를 내다본 박상훈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한 조각이나 똑바로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오민지가 피자 박스를 열자 느글느글한 치즈 냄새가 훅 풍겨 올라왔다. 하얀 치즈 위에 윤기 나는 불고기가 올라간 피자였다. 박상훈의 말로는 요즘 인기가 많은 ‘고기 듬뿍 피자’라고 했다. 이름대로 토핑이 넘쳐 나다 못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닉값 지렸고.”
경박한 감상을 쏟아 낸 박상훈이 피자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민지는 소파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내 손가락에 피자를 끼워 주었다. 도우 위에 샛노란 갈릭 소스까지 뿌려진, 겉으로는 참 맛있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나는 피자를 받아 뾰족한 끄트머리를 앞니로 깨작거렸다. 은근히 흘러들어 오는 기름 때문에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하도 안 먹어 버릇했더니 이제 피자도 못 먹는 몸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큼직한 피자가 박상훈의 입 안에서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무덤덤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진서랑 친해질 줄 몰랐는데.”
“갑자기 추팔을 한다고?”
“네가 졸업 이야기 꺼내서 그런 거 아니야.”
박상훈은 오민지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여진서 몇 년 전에는 맨날 인상 쓰고 다녔잖아. 세상에 불만 존나 많은 사람처럼. 말 걸어도 무시하고.”
“아, 맞아. 그때 진서 별명 음대 밤비였을걸. 인기 꽤 많았어.”
“얼굴이 밤비면 뭐 하냐, 성격은 개지랄 맞아서 애들 다 떨어져 나갔는데.”
밤, 뭐? 그런 낯간지러운 별명이 붙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애매하게 표정을 굳히고 질문을 던졌다.
“지랄 맞았어?”
“지랄 맞다고 해야 하나. 벽 치는 느낌? 엄청 예민해 보였어. 너 팀플했을 때 버스 탄 선배 이름 그냥 빼 버리지 않았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었으면 그냥 융통성 있게 넘겼을 것이다. 어렴풋이 과거의 내가 왜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나 예상이 갔다. 오민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대신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답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어머님 편찮으셔서 그런 거, 나중에 알고 속상했어.”
오민지와 박상훈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었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 나는 피자 조각을 내려다보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땐 그랬다. 세상 모든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사고의 흐름은 억울함에서 시작했다. 왜 하필 우리 엄마가 아파야 하는 건지.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엄마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을까, 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래된 고목의 줄기처럼 뻗어 나가는 우울은 내 일상을 숨이 막히도록 짓눌러 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는 돈과 내 전부인 사람이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나날이 괴로움에 허덕거렸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창에서 벗어난 건, 모순적으로 엄마와의 이별을 거친 후부터였다.
물론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는 해일과도 같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얼굴보다 모든 걸 끝내고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편했던 것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덜 치열하게 대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게 성장인지, 퇴보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진서야?”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운 건 오민지의 걱정스러운 물음이었다. 괜한 화제를 꺼냈다고 자책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미안. 어머님 이야기 꺼내서.”
“지난 일인데, 괜찮아.”
“조만간 납골당 갈 거지? 너 중요한 연주회 때 어머님 보러 가잖아.”
말 나온 김에 오늘 가 볼까 싶다. 마침 엄마한테 응석 부릴 일도 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민지는 손에 든 피자를 억지로 내 입에 욱여넣었다.
“너 그렇게 마른 거 보면 어머님이 슬퍼하셔. 지금이라도 빨리 먹어.”
그렇겠지. 나는 영 내키지 않는 피자를 꾸역꾸역 삼켰다.
***
[그래서, 오늘 늦는다고.]
“네…….”
[끝나면 전화해요. 데리러 가게.]
“괜찮아요.”
오늘 집에 오려고 했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괜찮은 게 참 많아졌네, 우리 여진서가.]
서운해하는 건가.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른 화제를 꺼내 놓았다.
“손은 좀 어때요?”
[애초에 깊은 상처도 아니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흉 지면 어떡해요.”
[누가 들으면 손가락 잘린 줄 알겠네요.]
고운 손에 상흔이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정작 다친 장본인은 담백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나랑 안 만나도 되는데, 들어갈 때는 연락해요. 기사 불러 놓을게요.]
“만나기 싫은 건 아니에요.”
[다행이네. 난 너 계속 봐야겠으니까.]
애매하게, 미지근하게 자신을 대하는 나를 보고 주태승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속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기이한 집착을 보이는 그가 신기했다.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다.
나는 주태승과의 통화를 끝내고 납골당 안으로 들어섰다. 늦게까지 여는 곳이라 참 다행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늦은 시간에 찾게 되는 게 죄스러웠다.
엄마는 납골당 깊은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사진 앞에 섰다. 사람이 없는 고요한 공간 속에 내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엄마,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
이전의 연주회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게나 죽고 못 살았는데, 역시 자식새끼들은 살아가면서 밥 먹듯이 불효를 저지른다.
“나 조금 있으면 졸업이야. 엄마가 대학 졸업하는 거 보고 싶다고 했잖아. 얼마 안 남았어. 내년이면 어디에서든 플루트 연주하면서 살 것 같아.”
엄마는 늘 내가 유명한 플루티스트가 되기를 바랐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를 누비며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음악가. 엄마와 헤어진 후로 소홀해졌던 꿈이었으나 지금은 이래저래 그 바람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그, 나 너무 말랐지. 밥을 잘 못 챙겨 먹었어. 힘들어서……. 그래도 어디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긴 문장을 흘려보내고 잠시 숨을 정돈했다. 이런 말 하면 엄마가 걱정하려나. 약간 망설여졌지만, 지금 내가 품은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꺼내 놓기로 했다.
“엄마가 마지막에 한 말, 기억나? 나보고 행복하라고 했잖아.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우리 아들은 꼭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순간적으로 목이 칼칼해졌다. 나는 타액을 삼켜 따가운 목구멍을 달랬다.
“나 전에 잠깐 행복했어. 엄마랑 지낼 때만큼.”
아주 잠깐이라 자각도 하지 못한 찰나였다.
“근데 지금은 좀 이상하다. 행복한데 엄청 불행하고, 좋아하는데 같이 있으면 괴로워지는 사람이 있어. 감정이 제어가 안 돼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이게 진짜 행복해지는 과정인가?”
엄마는 이제 질문을 던져도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았다. 허공에 맥없이 흩어지는 문장일지언정, 다 듣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도……. 언젠가는 행복할 거야. 엄마가 그랬으니까.”
할 말이 많은데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엄마한테서 말주변을 물려받지 못한 건 조금 아쉽다.
“아, 연주회에서 ‘사랑의 인사’ 하려고. 엄마가 좋아하는 곡이잖아. 얼마 전에 나도 더 좋아하게 됐는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나는 곁눈질로 납골당 한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혼자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기 오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 플루트 시켜 줘서, 우리 엄마 해 줘서 고마워.”
전할 수 있을 때는 쉬이 나오지 않던 이야기들이 왜 이제야 술술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 하고 싶어.”
나는 내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미소에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
유독 매서운 추위가 살갗을 에는 날, 졸업 연주회가 그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학생들이 바쁘게 대기실을 오갔다.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 위에 거무죽죽한 패딩을 걸친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마저도 냉기와 싸우기는 부족해, 각자 손에는 앙증맞은 핫팩을 쥔 채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박상훈은 꼭 수능 치는 날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생각해 보면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에 닿는 서늘한 공기나 팽팽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따위가 그랬다.
“밖에 차 존나 많아.”
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박상훈이 다리를 덜덜 떨어 대며 말했다. 요동치는 허벅지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바지 위를 콱 움켜쥐자 휴대 전화처럼 진동하던 다리가 서서히 멈춰 섰다.
“씨발, 심장 멈추겠다.”
“어제 연습 많이 했잖아.”
“그, 근데 개떨려. 추워서 그런가.”
손으로 붙잡고 있는데도 박상훈의 다리에 재차 지진이 일어나려 했다. 나는 팽팽히 땅긴 허벅지 근육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손 존나 맵네.”
“약하게 때렸어.”
“넌 안 떨리냐?”
“그냥, 괜찮은 것 같아.”
지금의 심정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졸업을 앞둔 후련함과 연주회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컸다. 마치 몸이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듯이 들뜬 기분이었다.
“관객석에 또 알파들 우글우글할 텐데, 괜찮아?”
“나 왜?”
“전에 억제제 없어서 난리 났었잖아.”
“아.”
생각해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아마 그때 주태승과 처음 만났던가. 나는 대기실 구석에 달린 모니터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히트사이클도 아니고, 억제제 미리 먹고 왔어. 혹시 몰라서.”
“다행이다. 와, 씹. 지금 하는 건가?”
모니터에 조명 아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동기 한 명이 비쳤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관객석과 어색하게 굳은 그의 몸짓이 차례로 스쳐 갔다. 아무리 대학 생활 중에 무대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해도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졸업 연주회가 갖는 의미는 꽤 무거웠다.
“구찬혁 떤다. 첫빠라서 개떨리나 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바이올린에 턱을 괴는 동기를 바라보았다. 곧 가느다란 활이 내뿜는 선율이 넓은 무대에 울려 퍼졌다. 고작 두 뼘 남짓한 바이올린이지만,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연주하기가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한 곡이었다. 시작부터 활이 음계를 빠르게 오르내렸다. 다소 긴장한 기색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구찬혁은 완벽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나갔다.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박상훈이 중얼거렸다.
“난 진짜, 씨, 첫 순서로 나가라고 했으면 무대에다가 토했어.”
그럼 그거 누가 치워…….
“지금 벌써 울렁거려. 뭔가 페로몬인지, 그거 느껴지고 있어. 늦게 발현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뭔 소리야.”
“나도 억제제 좀 먹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박상훈은 주머니에서 청심환을 꺼냈다. 허무맹랑한 소리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한약의 쓴 냄새가 대기실 전체에 물씬 풍겼다.
그사이 연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갔다. 이제 구찬혁은 어설픈 대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프로 연주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정적을 유지하는 관객 무리를 살펴보았다.
저 안에 주태승도 있을까. 바쁜 사람한테 졸업 연주회까지 와 달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부탁이었으려나.
“으아아아, 미친!”
별안간 멀지 않은 곳에서 구둣발을 구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와 박상훈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금빛 드레스를 입은 오민지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중이었다. 실핀으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부여잡고 허둥대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다음 나야. 어떡해?”
아직 구찬혁의 무대가 끝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하지만 야무진 오민지도 순서가 다가오니 어지간히 패닉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녀를 본 박상훈이 주머니에서 청심환을 주섬주섬 꺼냈다.
“너도 먹을래?”
“아, 어. 땡큐!”
청심환을 허겁지겁 입에 구겨 넣은 오민지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 다음 여진서지? 넌 안 먹어?”
“난 됐어.”
“근데 너 메이크업한 거야? 얼굴 작아서 화장품도 덜 들었겠네.”
“그 정도는…….”
나는 멋쩍게 뺨을 만지작거렸다. 살이 많이 빠진 탓에 면적이 줄어들기는 했다. 그래 봤자 낯빛이 퀭해서 보기 좋게 마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열, 역시 음대 밤비.”
흥얼거리듯 농담을 건네는 박상훈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놈의 밤비. 건장한 20대 청년에게 붙을 별명이 아니었다. 나는 뒤틀린 심기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박상훈을 노려보았다.
그때, 당황한 표정의 다른 동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오민지. 너 여기서 뭐 해! 빨리 대기해.”
“어? 미친, 나 정신 나갔나 봐.”
“여진서도! 바로 다음이잖아.”
긴장을 너무 풀어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구석에 놓인 플루트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냈다. 조율을 마친 플루트가 손아귀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제야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하던 마음에 커다란 바위가 던져졌다. 가슴 언저리가 일렁이는 게 선연히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어깨에 걸친 패딩을 벗고 오민지를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주태승, 왔을까?
홀로 물가를 돌아다니는 새끼 오리가 된 기분이었다. 주태승 없이 거친 연주회가 몇 번인데 오늘따라 왜 그가 이토록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오지 않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이르며, 나는 검은 천막 사이로 들어갔다.
***
오민지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멎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서서히 암전됐다. 공연장은 삽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
무대 아래에 선 스태프가 나를 향해 눈짓했다. 나는 플루트를 감싸 쥔 채 침착하게 호흡을 정돈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연약하게 떨려 왔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관객석을 채우고 있을 텐데도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내 가슴이 박동하는 울림, 가쁘게 내뱉는 숨결이 전부 그들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오른손에 땀이 비죽비죽 배어 나왔다.
이윽고 나는 무대 중앙에 다다랐다. 밝은 조명이 머리카락 위로 쏟아졌다.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혈액을 벌컥벌컥 뿜어냈다. 온몸을 돌아다니는 피의 순환이 무척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리허설 때와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나는 좌석을 가득 채운 관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첫 번째로 연주하는 곡은 요아힘 안데르센의 <요정의 춤>. 잔잔한 템포로 시작해 점차 역동적이고 화려한 테크닉을 요하는 발라드였다.
♪-.
익숙한 피아노 반주가 무대라는 텅 빈 악보를 오선지로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위에 음계를 수놓는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아주 소중한 연인에게 입을 맞추듯이 취구에 입술을 눌렀다.
곧 맑고 경쾌한 울림이 관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연습했던,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음이었다. 머리보다 영리한 손이 자연스럽게 다음 운지를 짚어 나갔다.
쉬운 곡이 아니었기에 실수 없이 완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했다. 나는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달달 외운 악보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호흡이 달리고 굳은 입술이 약간 저릿했다. 연주가 잘 되어 가고 있다는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지금 내보이는 무대는 내 4년간의 플루트를 증명하는 자리다. 어머니의 노력, 교수님의 기대, 나 자신의 긍지가 전부 이 곡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가락 끝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곡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갈수록 흥분감이 고조되었다. 내가 곡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곡이 나를 지배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실수 따위 나올 리 없었다. 몸은 플루트를 다루는 방식을 완벽하게 기억했다.
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된 시작을 넘어,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에 무대는 확신으로 채워져 갔다. 그리고 그 마무리는 환희였다. 마지막 숨을 불어 넣은 순간,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웠다. 관객은 취구에서 입을 떼어 내는 나를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그들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리본이 달린 하얀 구두, 갈색 단화. 바닥을 딛고 있는 낯선 신발들이 시야를 스쳐 갔다.
그중 검은 구두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주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여유롭게 꼰 긴 다리, 너른 흉통, 더 위로 올라가면 일직선으로 굳은 입매가 보인다.
“읏…….”
주태승이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식하니 목울대가 마비된 것처럼 움찔거렸다. 나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플루트를 들어 올렸다.
두 번째 곡은 <사랑의 인사>였다. 주태승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때, 그 별장의 소파에서 함께 들은 곡이었다. 많이 달라진 관계 속에서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 곡을 들을까.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반주가 공연장을 음악의 정원으로 이끌었다. 나는 가슴 속에서 절절 끓는 무언가를 호흡과 함께 토해 냈다. 허공에서 주태승과 나의 시선이 서로를 핥았다.
주태승이 나를 본다. 운지를 짚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술을. 나를 듣는다. 음계 사이사이에 섞이는 숨소리를, 플루트가 자아내는 선율을.
‘잘하네, 예쁘게.’
언젠가 들어 본 듯한 말이 희미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문득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러이 우는 것과는 달랐다. 그저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눈가가 젖어 들었다. 마치 여진서가 아니라 이 몸뚱어리가 울고 있는 듯했다.
주태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를 마주하니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쏟아졌다. 나는 양쪽 눈을 적시면서 플루트를 불어 나갔다. 음악이 나아감에 따라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녹아 피와 하나가 되었다.
어렴풋이 왜 그토록 주태승을 기다렸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를 보고자 했던 게 아니다.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나의 가장 찬란한 순간, 한때 당신이 모조리 앗아 갔던 빛을.
***
졸업 연주회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학업을 건너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수능과 닮았다. 연주회를 마치고 들뜬 분위기를 안은 채 졸업을 앞둔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평소와 같이 교양 수업을 듣고 밀린 과제를 해내는 날이 이어졌다.
물론 변화가 찾아온 부분도 존재했다. 겨울은 끝의 계절이다. 이별과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허연 김을 뿜어내는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편한 자세를 고쳐 앉기를 몇 차례, 이윽고 나를 초대한 이가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손에는 본인 몫의 커피를 쥔 채였다.
“고생했다. 하니까 되잖아.”
첫마디는 그랬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나는 어정쩡한 웃음을 입가에 내걸었다. 교수님은 느긋하게 종이컵을 기울여 커피를 홀짝였다.
“일부러 사람 놀리려고 연습 때 실수한 거야? 응?”
“아뇨.”
“그래, 앞으로도 컨디션 조절 잘하고. 그때 혼낸 건 다 너 잘되라고 한 거야.”
“네,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뜨거운 커피를 꿀떡 삼켰다. 온기를 가득 품은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근데 너 왜 울었냐? 퍼포먼스야?”
“네?”
“죄다 그렇게 슬픈 사랑의 인사 처음 듣는다고. 뭐 힘든 일 있었나?”
왜 울었냐고. 벌써 다섯 번째 받는 질문이었다. 내가 한 행동이지만 왜 그랬는지 명확한 대답을 내놓기 힘들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의도한 일이 아니었기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 나왔나 봐요.”
“오히려 잘 됐어. 곡도 좋았는데, 네가 그래서 더 사람들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야. 쟤 누구냐고 연락 많이 왔다.”
“아…….”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오고.”
스카우트 제의.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결정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나는 종이컵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꾹꾹 짓눌렀다. 교수님은 오히려 나보다 더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국내 교향악단에서 두 개, 해외에서 두 개. 지금까지는 그래. 근데 더 기다릴 것도 없어. 다 쟁쟁한 곳이라 너 커리어 쌓기는 충분해.”
“어딘데요?”
“내가 제일 추천하는 곳은……. 너 전에 외국 손님들이랑 밥 먹은 거 기억하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스쳐 가는 장면들을 되짚었다. 한창 스토커에 시달려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연주회가 끝나고 교수님이 주선한 식사 자리에 어울린 적이 있었다. 영어를 잘 몰라 조용히 밥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양반들이 오스트리아 관현악단 사람들이야. 너 눈여겨보길래 자리 마련했고.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스카우트 들어왔다.”
“……그래서 영어 배우라고 하신 거예요?”
“거기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제 막 대학 졸업한 풋내기는 감히 문도 못 두드려. 네가 진짜 특별한 케이스야.”
확실히 과분한 기회이기는 했다. 오스트리아야, 과거부터 현재까지 음악으로 얼마나 유명한 나라인지는 설명하기도 입 아프다. 플루티스트로서는 아마 최고의 커리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해외라는 점이 마음이 걸렸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 적응하다 보면 서러운 일이 굉장히 많이 생길 터다. 더불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역시 주태승과의 관계였다. 이런 식으로 몸이 멀어지기는 싫은데.
“감사한데, 왜 저 같은걸.”
“여진서, 스타성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네?”
“네 캐릭터가 재밌잖아. 일단 젊고 실력도 좋아. 얼굴도 미인이야. 거기에 예술에 재능 타고난다는 오메가네. 이미지 예쁘게 만들면 잘 팔리게 생겼지.”
무슨 말인지 선뜻 와닿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실력 외적인 부분들이 플러스 요소가 된다는 소리인 듯했다. 좋은 건가. 내가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교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이건 내 사족이고. 한 귀로 흘려.”
“아, 네.”
“국내는……. 대기업에서 널 후원하고 싶단다.”
갑자기 기업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의아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어조로 반문했다.
“네?”
“국내 교향악단 입단하고, 네가 원하면 해외 연수도 보내 주는 조건이야. 워낙 돈이 많은 기업이라 금전적인 부분은 아마 제일 잘 쳐 줄 거다.”
뭔가 꺼림칙했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조건이었다. 별안간 내려앉은 불안이 살갗 곳곳에 손을 뻗쳤다. 나는 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빈 종이컵을 감싸 쥐었다.
“……기업 이름이 뭔데요?”
“LS.”
미친.
귀에 익다 못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순간적으로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약한 종이컵이 손바닥 안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나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고 싶은 심경을 애써 억누른 채 물었다.
“거기서, 저를요?”
“한 자리 차지하는 양반이 네 연주가 인상 깊으셨다고 하네.”
“…….”
“가면 돈 걱정은 없겠지. 가끔 LS 행사 같은 거 있으면 연주하고. 조건 괜찮아.”
뒤에 따라온 부연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이 후원을 제안한 사람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했잖아, 내 길은 알아서 찾겠다고. 굳이 등을 떠밀고 잡아 주지 않아도 새는 혼자 날 수 있는데.
그저 나를 통제할 수 있으면 내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인가?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수님의 의문스러운 눈길이 내 행동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당장 화가 끓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어어, 그래. 가 봐.”
연구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슴 속에 퍼진 동요로 가득했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차분하게, 차분하게.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고자 노력했지만, 가슴은 머리가 시키는 일을 들어주지 않았다.
두어 번의 연결음이 울렸다. 나는 휴대 전화를 쥐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여진서 씨.]
“어디에요?”
[운전 중입니다.]
하필 운전 중이야. 눈알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인 나와 달리, 주태승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한껏 다정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없어요.”
[그럼 집에서 정할까요.]
“아뇨.”
[왜 또 불퉁대.]
불퉁댄다는 애교스러운 말로 나를 표현하는 게 거슬렸다. 그렇게 얕잡아 보니까, 바보라고 생각하니까 멋대로 스폰서 제의나 넣은 거겠지. 나는 아프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냥, 빨리 와요.”
[별일이네요. 그렇게 쳐 내더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극심한 분노로 가슴이 들썩거렸다. 주태승과의 간극이 더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집에 도착해 냉수를 들이켜도 속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되짚을수록 서운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두 잔째의 물을 거칠게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이제 슬슬 주태승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여튼 타이밍은 더럽게 잘 맞는다. 끔찍하게 안 맞는 성격과 비교되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스스로 이토록 보폭이 넓은지 처음 깨달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묵직한 철문이 서서히 아가리를 벌리는 장면이 보였다. 바쁜 걸음이 현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검은 코트 차림의 주태승이 겨울 냄새를 안은 채 들어섰다. 그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언뜻 의아하다는 듯한 기색이 감돌았다.
“현관에서 기다릴 정도로 보고 싶었습니까?”
뻔뻔한 소리에 대꾸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주태승과 눈을 똑바로 맞추고 가까이 다가갔다. 감정이 격양되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려 왔다.
“저기요.”
나를 담은 주태승의 눈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꺼졌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서늘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참 잘난 얼굴이었다. 외모도, 재력도, 능력도 무엇 하나 꿀릴 게 없으니 타인을 이해 못 하는 거겠지.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을 거고.
“제가 전에 이야기했죠. 제 길은 제가 찾겠다고.”
“그게 왜.”
“왜 스폰서 제의했어요?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세요?”
주태승은 내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심기가 상한 듯했다. 그가 황당하다는 투로 반문했다.
“저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본인은 나를 무시해 놓고 사소한 호칭 따위를 거슬려 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나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언성을 높였다.
“제가 왜 살갑게 불러야 돼요?”
“…….”
“지금 딱 남처럼 굴고 있으면서, 저기요 소리 듣는 건 기분 나빠요?”
아니, 남보다 못하게 굴고 있다. 이렇게 주태승과 어긋나고 싶은 게 아닌데 자꾸만 벌어지는 균열이 야속했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에서 애정이 줄줄 새어 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를 애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세요?”
“……여진서.”
“내 입장은 왜 생각 안 하는 건데요. 주태승 씨랑 만나면서 받은 게 많은 거 알아요. 근데 싫다고요. 스폰서까지는.”
지금까지 그가 해 준 것들은 앞으로 갚아 나갈 생각이었다. 나도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고, 좋은 곳에 데려가서 그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힘으로 그렇게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것만큼은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는데.
“주태승 씨랑 말할 때마다 벽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에요. 나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 거예요?”
“너 말 다 했어?”
“아니면, 키우는 개나 고양이쯤으로 생각해요?”
개, 주태승, 스폰서.
내가 뱉어 낸 말들을 생각하니 별안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하필 지금 두통이 오는 거냐고. 갑작스레 머리를 공격하는 둔통과 싸우느라 눈매가 찌푸려졌다. 아픔을 견디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뾰족한 손톱이 살갗에 반달 모양의 상흔을 남겼다.
“너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머리 아파.
“애인이라고 생각하냐느니, 스폰서라느니. 바보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쾅-.
주태승의 손이 신발장을 세게 가격했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와 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쉬는 숨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마주친 동공에 비치는 안광이 섬뜩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발길질을 가하는 듯한 둔통이 점점 극심해졌다.
“진짜 남처럼 대하면, 네가 감당할 수는 있어?”
알파의 페로몬이 나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 또한 분기에 페로몬조차 갈무리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와 별개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두통에서 시작된 고통이 폐부를 잠식해 갔다.
“흐으, 끄.”
개, 주태승, 스폰서, 현관, 신발장.
나는 목을 감싸고 가쁘게 숨을 할딱거렸다. 혀가 저절로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리 입술을 빠끔거려도 호흡이 부족했다. 목울대에서 껄떡껄떡,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주인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어?’
‘…….’
‘그럼 비서한테는 절대 안 줄만 한 거 줄 테니까, 잘 받아먹어 봐.’
내 배 속에 뭘 뿌린 거야?
나도 모르게 손이 아랫배를 더듬었다. 비정상적으로 가쁜 호흡 때문에 눈앞이 흐리멍덩하게 번졌다. 나는 숨을 똑바로 내쉬지 못하고 연달아 들이켰다. 공기가 아니라 더러운 모래를 마시는 것 같다. 바들바들 떨리던 다리가 부러진 나무처럼 꺾였다.
“여진서!”
주태승이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 와중에도 과호흡은 계속되었다. 내 벌어진 동공에 현실과 다른 풍경이 맺혔다.
짐승 같은 섹스. 그걸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
‘제가, 읏, 후으, 잘못했으니, 까. 그만 해요. 이런 거……!’
당신이 그랬어? 당신이 나를, 나는, 어떻게.
“정신 차려, 숨 똑바로 쉬어.”
성기의 형태를 따라 불룩하게 솟는 뱃가죽. 골반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 잡아먹힐 듯한 공포심과 치욕. 단편적인 장면과 감정이 저항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싫어! 미친 새끼야, 하지 마. 그만해!’
나한테 노팅했어.
살갗을 감싸는 페로몬이 그때와 같았다. 나는 텅 빈 눈으로 주태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바짝 당겨 안은 채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내 몸을 짓밟고 제멋대로 취한 주태승이, 나를 걱정해 어깨를 연약하게 떨고 있다.
증오가 애정을 잡아먹는다. 흰색은 결코 검은색을 이길 수 없다. 하얀 도화지에 검은 잉크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지금 의사 부를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응?”
다른 사람 부르지 마.
나는 있는 힘껏 주태승의 팔을 붙잡았다. 흐느낌이 섞여, 불안하게 요동치는 음성이 입술 사이로 샜다.
“저, 더 세게 안아요.”
“뭐?”
“안고, 키스해요.”
뭐라도 해. 나를 잡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듯이 굴어. 그러면 어떻게든 내가, 내가 당신을 다시 사랑해 볼게. 그러니까…….
잠시 망설이던 주태승이 내 뺨을 감쌌다. 곧 부드러운 입술이 내 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는다. 나는 굳게 닫힌 그의 잇새를 혀끝으로 꾹 짓눌렀다.
주태승과 혀가 엮였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래서는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울먹였다.
“사랑한다고 해요.”
“…….”
“날 안으면서, 키스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제발.”
아니면 증오에 사로잡혀 미워하게 될 것 같으니까.
내 어깨를 죄는 힘이 강해졌다. 주태승은 서로의 가슴이 짓눌리도록 나를 당겨 안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어느 때보다 절박해,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사랑해.”
“흐, 우, 으윽.”
“사랑해, 진서야. 사랑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당장 돌아 버릴 것처럼, 내가 널…….”
사랑해. 날아가는 바람을 붙잡으려는 듯이 주태승은 내 몸을 죄었다. 나도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부족해.
나는 그대로 입술을 들이밀어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주태승 또한 기꺼이 혀를 내놓았다. 직전보다 격렬한 키스였다. 교환하는 타액에서 짠맛이 났다.
부족해, 부족해. 이제는 정말.
아아, 나는…….
***
주태승은 얽힌 혀를 열렬히 빨아 대며 나를 안아 들었다. 짙은 페로몬 때문에 피부의 솜털이 하나하나 곤두서기 시작했다. 나는 물 먹은 종이처럼 맞닿은 흉통에 바짝 몸을 붙였다.
혀끝이 입천장을 건드리는 감촉을 느끼는 사이, 주변을 둘러싼 배경이 바뀌었다. 나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주태승은 입술을 떼어 냈다.
툭, 툭. 서로의 숨소리만 가득한 침실에 옷가지가 떨어지는 잡음이 섞여 들었다. 나는 눈물과 함께 가쁜 호흡을 골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코트와 넥타이가 시야 끝에 비스듬히 걸렸다.
러트 이후로 꽤 오랜만의 섹스였다. 나는 울음을 삼키고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흥분한 것 같기도,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그리고 따스한 입술이 눈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흐으, 아.”
혀가 눈물을 핥아 낼 때마다 배 속이 간지러웠다. 주태승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흠뻑 젖은 속눈썹을 쪽 빨아 들였다. 눈을 시작으로 얼굴 이곳저곳에 입맞춤이 쏟아졌다. 눈물 길이 남은 뺨과 가느다란 턱선에도 그는 입술을 짓눌렀다.
밖은 겨울인데 침실의 공기가 뜨거웠다. 주태승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그가 몸을 가린 셔츠를 벗었다. 다부진 맨살에 자리 잡은 근육이 움찔거렸다.
“하, 윽.”
자세를 낮춘 주태승이 내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그의 손은 내 니트 속을 파고들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손바닥으로 너른 등판을 짚었다.
“옷, 그냥 벗겨요.”
“…….”
“살 닿는 게, 으응, 좋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태승이 옷자락을 끄집어 올렸다. 후줄근한 니트가 침대 밖으로 곤두박질쳤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 따위에 게걸스러운 입질이 가해졌다.
주태승의 손이 가슴께로 느릿하게 미끄러졌다. 뒤이어 단단한 엄지가 유두를 지문으로 살살 굴려 댔다. 자극에 약한 선단이 발딱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아, 으응, 읏.”
목덜미와 유두를 동시에 괴롭힘당하는 건 괴로웠다. 어깨가 자꾸만 제멋대로 움츠러들었다. 내 반응을 확인한 주태승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도드라진 돌기가 그의 손안에서 꼬집히고, 야살스럽게 뒤틀렸다.
목선을 덧그리고 내려온 입술이 젖꼭지를 단번에 머금었다. 츠읍, 난잡한 소리를 내며 혀가 유두에 감겼다. 마른 발가락이 질끈 곱아 들었다.
“주태승 씨, 그렇게, 하, 아으.”
아무리 어깨를 밀어 내도 주태승은 집요했다. 나는 흐느끼며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마치 호응하듯 이가 유두를 잘근잘근 짓씹었다. 따끔한 통증과 더불어 쾌감이 치밀었다.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페로몬은 마약과도 같았다. 그저 성감에 휘둘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섹스밖에 모르는 백치가 되면 좋을 텐데. 육욕에 취한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주태승은 유두를 혀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명치 사이를 길게 훑었다. 이러다 몸 전체가 타액으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반쯤 풀려 흐물거리고 있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감각에 맥없이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혀끝이 얼토당토않은 곳을 파고들었다.
“아! 거기, 왜……!”
앙상한 뱃가죽 위를 유영하던 혀가 배꼽을 꾹 짓눌렀다. 난생처음 겪는 생경한 자극이었다. 찔린 건 배꼽인데 골반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엉덩이 사이의 구멍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 때문에 속옷이 묵직해졌다. 주태승은 사타구니와 배꼽 사이에 입을 맞추며 옷가지들을 한 번에 벗겼다. 볼품없이 말라 뼈가 불룩 솟은 하체가 드러났다.
체모가 없는 기둥이 배에 바짝 붙어 물을 질질 흘리는 꼴이 난잡했다. 주태승의 손바닥이 질척한 표면을 한 차례 쓸어 올렸다. 그 미세한 자극만으로도 가볍게 절정에 이를 듯했다.
내 성기를 매만지던 주태승이 귀두 끝에 살짝 입술을 댔다. 펠라티오라도 할 생각인가? 낯선 행동에 덜컥 겁이 나, 나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에 찾아온 건 전혀 다른 종류의 전희였다.
강한 악력이 다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덩이가 허공에 떴다. 주태승이 얼굴을 묻은 곳은 성기가 아니라 그 아래의 음부였다.
“자, 잠깐만, 안 돼. 주태스, 하, 아읏!”
머리를 세운 혀끝이 주름을 진득하게 핥아 냈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쾌감이 화살처럼 신경을 관통했다. 무수히 몸을 섞는 동안 여길 입으로 애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흥분이 극에 달해, 붙잡힌 넓적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고의인지, 뭔지 주태승은 갈증을 달래듯이 구멍에서 나온 애액을 빨아 마셨다. 너무도 적나라한 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혀와 입술이 힘을 실어 구멍을 희롱하는 감각이 생생했다.
“흐아, 아, 이상해. 우윽.”
나는 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허리를 비틀어 댔다. 미지의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눈물이 되어 뚝뚝 흘러넘쳤다.
정성스레 주름을 애무하던 혀가 그 사이로 슬슬 파고들었다.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에 혀를 집어넣었어. 심지어 살덩이는 내벽을 하나하나 더듬겠다는 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몸에서 가장 은밀한 부위를 빨리고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끙끙 앓아 대며 신음을 참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주태승이 엉덩이에서 입술을 떼어 내고 말했다.
“눈 돌리지 마.”
“후으, 그게, 그…….”
“나 똑바로 봐.”
정사를 시작한 후로 그가 뱉은 첫 마디였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유독 절절하게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주태승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도르륵, 쏟아졌다.
“그냥 너는 기분 좋은 것만 생각해.”
그 말이 끝나자 주태승은 다시 내 다리를 끼고 머리를 처박았다. 혀가 내벽을 찌르고, 입술이 구멍을 조이는 세기가 점차 강해졌다.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갈 듯했다. 만지지도 않은 성기가 사정 직전과 같이 꺼떡였다.
그래, 어쩌면 주태승이 한 이야기가 정답일지도 모른다. 쾌락은 모든 복잡한 잡념을 잠시나마 지워 주니까. 가슴에 얽힌 감정 따위는 섹스로 해소하면 된다. 그렇게 몸을 섞고, 속을 게워 내고, 서로가 텅 비어 버릴 때까지.
나는 경련하는 발꿈치를 주태승의 어깨에 문질렀다. 울음 섞인 음성이 더운 공기를 타고 흩어졌다.
“그럼, 더 좋게 해 줘요.”
주태승이 낮게 숨을 골랐다. 어떠한 의미든 저 문장이 그에게 자극을 준 건 확실했다. 덜그럭,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바짝 핏줄이 서 번들거리는 성기가 퉁겨져 나오는 게 보였다.
“당장 넣어 달라는 말로 들리는데.”
“…….”
“맞아?”
올라와 나를 꽉 끌어안은 주태승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눈알을 굴려 땀에 젖은 연인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초조한 것처럼 성기를 구멍에 밀어붙이고 물었다.
“묻잖아. 내가 필요하냐고.”
난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근데 상관없잖아. 당신 몸에 애가 타든, 당신 자체를 갈구하든. 그저 뇌가 녹아 버릴 듯이 강한 쾌락을 바란다. 스러지는 마음에 불을 붙여 이 시간을 태워 버릴 수만 있다면, 난.
나는 멍하니 풀린 눈으로 주태승을 응시하다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나를 보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참 이상하다. 분명 다정한 접촉이었는데도 내 알파는 상처 입은 동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태승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꾸드득, 두툼한 귀두가 좁은 입구를 밀고 들어왔다. 나는 페로몬이 짙게 풍기는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신음했다. 굵직한 성기를 받으며 오는 충족감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흐, 아윽!”
철썩, 푹 젖은 구멍에서 자잘한 물보라가 튀었다. 주태승은 처음부터 내벽 끝을 깊게 찔러 왔다. 뒤통수에 소름이 끼치고 일순 눈앞이 점멸했다.
삽입만으로 내 성기에서 허연 정액이 울컥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주태승이 건조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절정에 달해도 허리 짓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예민한 내벽이 짓눌리며, 나는 잘게 떨었다.
“아으, 흐, 으응……!”
맨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주태승의 이마에서도 이슬이 떨어져 내 가슴팍을 적셨다. 열감에 휩쓸린 숨소리가 우리 사이의 공백을 떠돌았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덮고 짓눌렀다.
“더, 흐윽, 더 안아요.”
나는 허우적대며 주태승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안 그래도 깊은 접합이 더욱 견고해졌다. 성기가 내 안에서 덩치를 불리는 게 느껴졌다. 가죽만 남은 아랫배가 귀두의 형태로 불룩 튀어나왔다.
“여진서.”
나를 바짝 끌어안은 채 주태승은 기둥을 쑤셔 넣었다. 그가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 좆을 계속 처박고, 키스해서.”
“아, 으읏.”
“물고, 빨고, 씹어 삼켜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을 현실로 이루겠다는 듯, 주태승이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몸은 설탕 과자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먹지 못한다. 나는 그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등판을 쓰다듬었다.
“읏, 하아, 나 삼키면 안 돼요.”
“…….”
“근데 좆은 계속 박아도 돼.”
주태승이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가 내벽 주름을 귀두로 두드리는 감각이 퍼졌다. 귓가에 성대를 긁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잔인하네.”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주태승을 혐오하고 싶지 않다며 섹스로 눈을 돌린다. 온 정신을 육욕에 몰두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려 애쓰고 있다. 나 망가졌구나. 그런데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섹스 하고, 같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어 줬으면. 혼자 고장 나면 너무 외로우니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주태승이 내벽을 치받는 속도가 빨라졌다. 터지는 신음이 입 안에 갇혀 뭉그러졌다. 나는 혀를 내밀어 넘어오는 타액을 받아 마셨다. 배 속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응어리를 녹여 낸다.
벌써 몇 번인지 모를 사정감이 치달았다. 나는 입술을 떼어 내고 정신없이 할딱거렸다. 눈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아마 또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태승 또한 절정에 이르렀는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가 내벽의 부은 곳을 성기로 짓누른 순간, 내 귀두가 투명한 물을 울컥 토해 냈다. 이제 정액조차 나오지 않는 기둥이 파들파들 떨렸다.
“하아, 읏, 흐응!”
배 속이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주태승은 나를 끌어안고 얼마간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쾌락이 지나쳐 현실감이 없었다.
“아, 윽.”
절정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주태승은 곧장 내 몸을 뒤집었다. 참 체력도 좋다. 나는 인형처럼 널브러져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구멍에 박힌 성기가 여전히 팽팽했기에 상대가 사정을 하긴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태승의 가슴이 내 등에 맞붙었다. 그의 체온으로 둘러싸인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아, 배 터질 것 같아…….”
자세가 바뀌니 자극당하는 부위도 달라졌다. 나를 당겨 안은 주태승이 내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굴렸다. 넘치는 체액을 견디지 못한 구멍에서 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굴러떨어지는 방울이 달아오른 허벅지를 간질였다.
온몸이 다 성감대로 변한 것 같다. 나는 주태승에게 전신을 맡기고 하느작거렸다. 액체처럼 힘이 빠진 몸이 억지로 붙들렸다.
“아, 우윽, 읍.”
성기에 찔릴수록 머리가 멍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난 지금 좋은데, 쾌락 속에 파묻혀 있는데 눈물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점차 달뜬 교성이 서러운 울음으로 변해 갔다. 나는 침대 시트를 꽉 쥐고 꺽꺽 흐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의 범람이 멈추지를 않았다.
주태승의 팔이 나를 조여 안았다. 그가 내 귓바퀴에 입술을 붙였다. 쉼 없이 입을 맞추며, 연인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제발 울지 마.”
“…….”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나는 그저 울먹였다. 그리고 신경을 기울여 나를 달래 줄 쾌락을 찾았다. 그러나 거센 설움에 알량한 성욕 따위는 점점 작아졌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온몸을 쿵쿵 울렸다.
울지 말라는 말에도, 가지 말라는 말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솟아나는 눈물을 삼키느라 그렇다. 울음이 멎어야 목소리를 낼 텐데.
“나 좀 봐, 부탁이니까.”
주태승이 억지로 내 턱을 붙잡고 눈을 맞췄다. 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어느새 내벽을 파고드는 움직임도 잦아들었다. 눈물이 화끈거리는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두려워서, 미안해서, 미워서, 좋아서, 답답해서, 억울해서, 아파서, 그래서 울었다. 확신이 없었다. 나는 이 사람을 어쩌고 싶은 거지.
“주태승 씨, 흐윽, 나, 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돼. 공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나를 진흙 밭으로 끄집어 내렸다.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
이불에 파묻혀 의식을 찾는 게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참 고역이었다. 수차례 비빈 눈가가 짓물러 가만히 있어도 살갗이 따끔거렸다. 나는 한동안 눈에 손을 얹고 고통을 참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파?”
귓가에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누운 주태승이 나를 조금 더 가까이 당겨 안았다. 그가 내 건조한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내저었다.
곧 주태승은 느릿하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눈을 가린 방해물을 치우고, 그가 아린 피부에 살짝 입을 맞췄다. 미세한 접촉에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아무래도 살이 많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긴 엄지가 나를 달래듯이 손등을 어루만졌다.
나는 가만히 누워 눈가에 내려앉는 입맞춤을 받았다. 주태승은 자꾸만 자신의 체온을 내게 전하려는 것처럼 몸을 붙였다. 분명 빈틈없이 그와 엮여 있었으나 오히려 팔다리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추워요.”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주태승은 아예 나를 부둥켜안았다. 뒤통수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서툴렀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데 왜 따뜻해지지 않지. 심지어 어깨를 조여 안은 팔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만…….”
나는 조심스레 주태승을 밀어 내며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떨어져 헐벗은 맨몸이 드러났다. 울긋불긋한 정사의 흔적이 목덜미와 가슴 따위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디디려던 때였다. 강한 힘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나는 볼록한 뼈를 틀어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대꾸했다.
“옷 입으러요.”
팔을 당기자 주태승은 의외로 쉽게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 과정이 기계적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무시하고 옷을 입었다.
텅 빈 거실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복도에 서서 멀거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정처 없이 떠돌던 시선이 멈춘 곳은 구석에 자리 잡은 화분이었다. 발길이 홀린 듯이 그 앞으로 걸어 나갔다.
푸릇하게 자란 방울토마토는 잎만 무성할 뿐, 결실을 맺을 기미가 없었다. 나는 보들보들한 이파리를 맥없이 쓰다듬었다. 어쩌면 열매가 열리지 않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애정을 기울여 돌봐 주지 못했으니까.
앙증맞은 식물은 그 흔한 이름조차 없었다. 데리고 올 무렵만 해도 주태승과 함께 이름을 짓겠다고 들떠 있었지. 지금은 어딘가로 숨어 버린 설렘이었다.
“아.”
잎을 덧그리던 손이 문득 허공에 멈췄다.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감싸 왔기 때문이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팔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주태승이 끌어안든, 말든 넋이 나가 정면을 주시했다. 그 역시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고요히 서 있었다.
긴 정적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주태승 씨.”
“네.”
“처음 만났을 때, 왜 저랑 잤어요?”
지금 묻기에는 다소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주태승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그가 내 옆얼굴을 보고 반문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궁금해서요. 그냥 병원 보내든가, 모른 척해도 됐잖아요.”
주태승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창문을 향해 있었다. 조용한 것을 보면 대답을 고르는 중인 듯했다. 말문이 막힐 만도 하다. 나조차 내가 왜 지금 이것을 궁금해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잠시 후, 주태승이 내놓은 답은 명료했다.
“이유랄 게 있나. 대기실 구석에서 바들바들 떠는 네가 그렇게 예뻤는데.”
참 그에게 어울리는 답변이었다. 예뻐서. 나는 주태승의 말을 곱씹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그날 주태승 씨가 복도를 안 지나갔으면, 우린 만날 일 없었을까요?”
내 배를 지분대는 손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나는 물끄러미 주태승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잘 뻗은 손가락이 안으로 서서히 오므라들고 있었다.
“글쎄요. 난 어떻게든 여진서 씨 찾아냈을 것 같습니다.”
“왜요?
“눈에 밟혔으니까.”
저절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새삼 주태승은 주태승이었다. 저 현실성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만든다. 워낙 특이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이 아무리 눈에 밟혀도…….”
나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약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점차 일직선으로 바뀌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연주회 때 처음 보고 호감을 가졌다는 건가. 나는 가만히 주태승과 처음 몸을 섞은 밤을 떠올렸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뇌리를 스쳐 갔다. 당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기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으나, 정사 중에 어렴풋이 그가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그동안 이걸 왜 잊고 있었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고. 유명한 것도 아닌 일개 음대생 이름을, 재벌가 우성 알파가.
나는 내내 고정했던 고개를 돌려 주태승을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밤바다 같은 눈동자에 굳은 표정의 내가 비쳤다.
과연 이 사람은 그날 나를 처음 본 게 맞을까?
이제껏 그저 이상한 성격이라고 치부했던 언행이 차례로 잔상처럼 지나갔다. 무서울 정도로 과한 집착,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말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리에 의심은 차례로 돌을 던졌다.
만약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기억들이 단순한 내 망상이 아니라면…….
식도에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속이 따끔거렸다. 타액으로 아무리 목을 축여도 목구멍은 점점 말라 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허리를 조인 팔을 풀어냈다.
“또 어딜 가고 싶어서.”
곪은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과 같이 온전치 못한 정신에서 불안이 퍼져 나간다. 내 멍한 시선이 주태승의 것과 맞닿았다. 지금 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겨울에 무슨 바람. 얼마 전에 감기 걸려서 고생한 거 잊었어요?”
주태승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전에는 저 얼굴에 품은 저의를 알지 못해 고생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언뜻 침착해 보이는 말투에 사실 그 나름의 걱정과 우려가 담긴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주태승과 한 걸음 거리를 벌렸다. 그의 눈길이 우리 사이에 벌어진 공백을 더듬었다. 뒤이어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가요, 그럼.”
주태승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서 더 멀어졌다.
“혼자 있고 싶어요.”
사실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주태승을 두고 돌아섰다.
***
일단 충동적으로 집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건 아니었다. 옷이라도 똑바로 입었어야 했는데.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솔솔 피어올랐다. 나는 도톰한 카디건 위를 비비며 갓길을 따라 걸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아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무언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 정체를 몰랐기에 속은 계속해서 갑갑해졌다.
내놓은 손가락 끝이 발갛게 얼어붙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문득 진동을 느끼고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주태승이면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
발신인은 박상훈이었다. 나는 다소 멋쩍은 얼굴로 수신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여진서 뭐 하냐?]
“나 잠깐 밖에 나왔어.”
음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단번에 부수는 목소리였다. 한마디로 쾌활하기 짝이 없었다. 저 눈치 없는 명랑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밖은 왜?]
“그냥.”
[할 거 없으면 우리 집이나 와라.]
얘도 어지간히 심심해서 전화했나 보다. 어떻게 할까. 나는 머릿속으로 박상훈의 자취방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며 물었다.
“왜?”
[나 마라탕 먹고 싶은데 최소 배달 금액 맞춰야 돼.]
세상에서 가장 시답잖은 이유였다. 입도 큰 새끼가 그냥 잔뜩 시켜서 오랫동안 처먹을 것이지.
“사리 추가하면 되잖아.”
[그니까 사리 추가하고 싶으니까 오라고. 분모자도 먹고 싶고, 양고기도 먹고 싶고, 피시볼도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
“근데 왜 나를 불러?”
[네가 조금 먹으니까 그만큼 내가 더 많이 먹을 수 있어서.]
미친놈인가. 나를 지갑으로 쓸 생각인 듯했다. 박상훈을 한 대 패 주고 싶은 한편, 슬슬 배가 고팠다. 동기는 불순해도 춥고 갈 곳 없는 나에게 딱 맞는 제안일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와, 개꿀. 너 온다고 했다?]
“어.”
어쩌다 보니 혼자 있겠다는 말은 거짓이 되었다. 나는 가슴에 불편함을 얹은 채로 택시를 잡았다. 꽁꽁 언 공기가 부은 눈매를 헤집었다. 벌에 쏘인 듯한 아픔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
“난 중국 당면 진짜 별로야.”
넓적한 당면을 잡은 박상훈이 투덜거렸다. 나는 양념이 덕지덕지 묻어 지저분해진 젓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당면이 미끄덩, 국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박상훈은 마라탕을 준비한 상태였다. 그가 제멋대로 추가한 사리들이 넘쳐 탕이라기보다 전골에 가까웠다.
“그럼 빼 달라고 하지 그랬어.”
“손해 보는 느낌이야. 내가 먹어 줘야지, 뭐.”
일회용 배달 용기에 담겨 있던 당면이 박상훈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 넓고 질긴 걸 잘도 한 번에 먹는다. 아니, 마신다.
박상훈은 목이버섯과 꿔바로우를 동시에 우적우적 씹어 댔다. 그 광경에 입맛이 저절로 떨어졌다. 나는 밥 위에 먹던 소시지를 내려놓았다.
“왜 안 먹냐?”
“배불러서.”
“너 오민지가 벼르고 있어. 병원 안 가면 죽인다더라.”
“걘 평소에 사람 죽이고 싶어서 어떻게 참는대.”
뭐만 하면 죽인다고 한다. 이제 연주회도 끝났으니 그녀의 말대로 병원을 가 봐야 할까 싶었다. 가서 종합 검진이라도 받고 취업해야 폐를 안 끼치겠지.
“야, 근데 너.”
“응.”
쪽, 박상훈이 엄지에 묻은 양념을 빨아 먹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나는 서비스로 받은 쿨피스를 만지작거렸다. 종이 갑이 지문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LS에서 후원 들어왔다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뭐 그런 것까지 말하고 다니실까. 물론 자랑스러운 마음에 나왔을 행동이란 건 알지만, 달갑지 않았다. 나는 국물에 떠다니는 포두부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거절할 거야.”
“왜? 개이득이잖아. 사모님 마음에 들기가 어디 쉬운가.”
마라탕을 괴롭히던 젓가락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박상훈을 똑바로 쳐다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사모님?”
“어.”
“너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별안간 박상훈이 내가 뒤적거린 포두부를 공깃밥 위에 얹었다. 그는 건더기를 밥과 함께 삼키며 대답했다.
“LS 전자 사장 부인이랬나. 원래 클래식에 조예가 깊으시다더라.”
태연한 기색의 박상훈과 달리, 내 낯빛은 점점 당혹스러움으로 질려 갔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무고한 주태승에게 쏟아 낸 가시 돋친 말들이 차례로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당황은 금세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화를 내더라도 자세히 알아본 후에 저질렀어야 했다. 감정을 제어하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건가. 경솔한 나 자신을 몇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사과해야 하는데.
나는 초조하게 주머니 속의 휴대 전화를 매만졌다. 그러나 선뜻 꺼내지는 않았다. 오해한 부분에 있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주태승에게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아니라고 말하지, 왜 가만히 욕이나 들어 먹고 있냐고.
나는 휴대 전화를 내려보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애꿎은 주태승을 탓하는 것까지 참 한심하다.
“갑자기 웬 한숨?”
“아니야.”
“먹고 넷X릭스 보자. 나 영화 골라 놨어.”
계획 한번 알뜰하게도 짰다. 나는 땀이 차도록 주무른 휴대 전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 조금만 미루자.
우리는 마라탕 냄새가 풀풀 풍기는 테이블을 닦고 바닥에 앉았다. 곧 박상훈이 가져온 노트북에서 유명한 코믹 영화가 재생되었다. 연기 아주 잘하는 배우가 나온다는데 나는 도통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
몰입은커녕, 따뜻한 바닥에 불을 끄고 앉아 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자꾸 옆에서 말을 거는 박상훈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어제 몸을 혹사한 피로감이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시청을 포기하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푹신한 침대가 뒤통수에 닿는 느낌이 포근했다.
잠깐 눈만 감고 있어야겠다. 나는 영화에 몰입한 박상훈의 옆모습을 흘끗대다가 눈꺼풀을 닫았다. 금방 세상이 고요해지고 의식이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응…….”
정말 잠들 생각은 없었다. 체감상으로는 단지 몇 분 정도 눈을 붙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막상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뜨끈한 방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귓가에 박상훈이 코를 고는 소리가 선연하게 울렸다.
뭐야.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바닥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액정을 들여다보니 황당함이 더욱 가중되었다. 화면에 표시된 시계는 이제 막 자정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경악과 함께 내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알림 표시 줄에 뜬 부재중 전화가 무려 15통이었다. 발신인은 전부 같았다.
바람 쐬러 나가 놓고 밤 12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함께 있는 게 불편했으나 그의 속을 태우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얼른 문자 애플리케이션을 켜 주태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친구 집에 있어요」 오전 12:01
쩝쩝, 박상훈이 잠결에 입맛을 다셨다. 타인의 잠버릇을 직관하자 나까지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주인 잃은 침대에 기어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초침을 옮겼다.
***
쌓이는 부재중 전화를 못 본 척하고 나는 박상훈의 집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그는 굳이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식비가 굳었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돌아가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제 슬슬 원래 자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회피하기만 해서야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오늘은 비행 아닌 비행을 끝내겠다는 결심을 하며 나는 박상훈과 학교로 향했다.
학기가 끝나기 직전의 강의실은 어딘가 산만했다. 시험이라는 최종 관문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종강에 대한 설렘은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 오늘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교양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이 강의실도 이제 몇 번만 더 들어오면 끝이구나. 4년간의 대학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니 아쉬움이 남았다.
소란스러운 강의실 속, 옆에 앉은 오민지와 박상훈 또한 열띤 토론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비 오니까 무조건 파전이죠? 반박 안 받아요.”
“응, 아니야. 제육 먹을 거야.”
“넌 대가리 속에 제육밖에 안 들었냐? 우리나라 돼지란 돼지는 네가 다 처먹겠다.”
“파전을 왜 돈 주고 사 먹냐? 그냥 잡초 뜯어서 부쳐 먹지.”
꽤나 치열한 접전이었다. 나는 그들의 언쟁을 한 귀로 흘리며 가방을 정리했다. 그러자 얼굴이 벌게진 오민지가 난데없이 나를 물고 늘어졌다.
“여진서는 뭐 먹고 싶은데? 네가 정해.”
왜 이쪽으로 불똥이 튀어.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기에 더욱 곤란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음식 생각을 하니 속에서 신물이 넘어오기까지 했다.
“난 안 먹을 건데.”
“뭐? 또?”
아무래도 저 발언이 오민지의 스위치를 건드린 듯했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맹렬한 기세로 내게 쏘아붙였다.
“아니, 올해 초만 해도 안 익은 김치찌개까지 맛있게 먹던 애가 요즘 왜 그러는데?”
“모르겠어.”
“뭘 몰라? 너 병원 안 갔지. 내가 귀에서 피 나도록 말했잖아!”
오민지가 너 병원 안 가면 죽이겠대. 박상훈이 전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투를 보면 진심으로 한 소리인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열받은 친구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관짝 들어가서 갈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가려고 했어.”
“언제 갈 건데? 지금 말해.”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구경하던 박상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재밌나.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위기를 타파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오민지는 내게 충분한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 가.”
“오늘?”
“더 미뤄서 뭐 해? 졸업 연주회 끝났으니까 딱 좋네.”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말싸움으로 오민지를 당해 낼 자신이 없었으나, 나는 꾸역꾸역 변명을 웅얼거렸다.
“밖에 비 오는데.”
“병원이 야외야? 지붕이 비 다 막아 주는데 뭐가 문제야.”
“그, 어…….”
“너 우산도 있잖아.”
얘 왜 맞는 말만 하지. 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민지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가, 지금.”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민지는 나를 제압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박상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파전 먹어.”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었겠지. 나는 박상훈과 오민지를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
내가 찾은 곳은 학교 근처의 종합 병원이었다.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입구에 서서 바쁘게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접수처로 걸어갔다.
“건강 검진 받으려고 하는데요.”
“예약하셨어요?”
“아뇨.”
접수처 직원이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가 경쾌했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띤 상태로 물었다.
“일반 건강 검진은 가능하세요. 여기 항목 체크해 주시고요. 오늘 식사는 하셨을까요?”
“빵……. 먹었는데요.”
“그럼 내시경은 어려워요. 혹시 형질이 어떻게 되시나요?”
“우성 오메가요.”
그 말을 들은 직원이 검은 펜을 들어 내 문진표 한쪽에 동그라미를 쳤다.
“남성 오메가 분들은 검진하실 때 보통 산부인과 진료도 함께 보시는 경우가 많아요. 타 형질에 비해 예민한 부분이 있어서요.”
“아, 네.”
“추가하시겠어요?”
남들도 다 하는 거라니까.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를 마친 직원이 친절하게 문진표를 돌려주며 말했다.
“작성하시고 대기실에서 옷 갈아입으시면 돼요.”
나는 문진표를 받아 터덜터덜 구석으로 걸어갔다. 체크할 항목이 많지는 않았다. 지병은 없고, 담배는 안 피우고, 최근 식사에 어려움이 있었고. 대강대강 항목을 훑는 눈과 칸마다 체크 표시를 만들어 내는 손이 동시에 빠르게 움직였다.
그다음은 안과에 들러 시력을 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검진을 받는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평소에 어렴풋이 몸과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기에 검사 결과가 약간 두려웠다.
혈압을 재고 채혈을 위해 팔에 주사기를 꽂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다음 검사를 위해서는 조금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살살 피가 배어 나오는 주사 자국에 알코올 솜을 문지르며 의자에 앉았다. 지루한데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휴대 전화에 손이 갔다.
몇 분 전에 온 부재중 전화 알림이 나를 반겼다. 발신인은 역시나 주태승이었다.
타닥, 발가락 끝에 걸린 슬리퍼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깜빡깜빡 점멸하는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병원 복도를 스쳐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지금 병원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나는 괜히 문자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여진서 씨.”
타이밍이 안 맞는다. 나는 보던 휴대 전화를 집어넣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 남짓한 건강 검진의 마지막은 초음파 검사였다. 일은 기계와 의사들이 했으나 나까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제 진료만 보고 집에 돌아가면 된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산부인과 병동으로 들어섰다.
대기실 의자에 줄지어 선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어둡다 못해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사람, 설렘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사람, 휴대 전화로 무언가를 바삐 전하고 있는 사람.
그 중 어느 부부의 대화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이름 생각했어? 어머님한테 지어 달라고 할까.”
“난 동글이가 좋은데.”
“애 이름을 무슨 동글이라고 지어. 미쳤어?”
핀잔을 놓으면서도 배가 부른 산모는 행복하게 생글거렸다. 나는 그들을 빤히 지켜보다가 시선을 떨어트렸다. 부부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즐겁게 주고받으며 멀어졌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잔상이 되어 복도에 남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보다 먼저 대기하던 이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의자에 혼자 남은 지 2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윽고 진료실에서 간호사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진서 씨?”
“네.”
“들어오세요.”
나는 차분하게 간호사를 따라 문으로 들어섰다.
진료실 내부는 삭막한 겉모습과 반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지를 뛰노는 기린과 토끼가 그럭저럭 귀여웠다. 그와 별개로 병원 특유의 긴장감 또한 공존했다. 아마 이 병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었을 것이다.
멍하니 진료실 벽지를 보고 있으려니, 인상이 좋아 보이는 의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혼자 오셨어요?”
첫인사치고는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혼자 오는 게 드문 일인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는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나는 그 말을 따라 고분고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입맛을 다셨다. 마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종양이라도 있나? 의사의 기묘한 반응에 덩달아 나까지 불안해졌다. 나는 엄지손톱을 검지로 긁으며 상대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검사 결과는 특별한 이상 없습니다. 페로몬 수치도 정상이고요.”
“아…….”
근데 표정이 왜 저래. 나는 의아한 눈으로 의사가 붙들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흘끗거렸다. 물론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작성해 주신 문진표를 봤는데 착오가 있으신 듯해서요.”
“무슨 오류요?”
“여기 보면 임신 여부에 아니라고 체크를 하셨어요. 그래서 혹시나 모르고 계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나는 얼떨떨하게 의사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뭘 모른다는 거지. 들린 문장을 곱씹을수록 좋지 않은 예감이 잔물결처럼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의사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치달은 긴장이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의사가 망설이고, 고민하고, 끝내 입을 여는 장면이 천천히 망막에 맺혔다.
“여진서 씨, 임신하셨습니다. 10주 차에서 12주 차 정도로 추정되네요.”
“……네?”
분명 귓구멍을 관통한 건 명확한 문장이었으나,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너무도 현실감이 없어 저게 나한테 하는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퍼지는 당혹감에 머리의 사고 회로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임신했다고? 내가?
크게 벌어진 동공이 납작한 아랫배를 담았다. 이 조그마한 공간에 나 이외의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경련하는 손으로 배꼽 언저리를 더듬거렸다. 당장 만져 봐도 평소와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의사는 12주 차라고 말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었다. 그리 오래전의 과거가 아니었기에 결론은 금방 도출되었다. 주태승의 러트를 함께 보낸, 그 밤이다.
숨통이 조여든다. 굳어 있던 머리가 빙빙 회전한다. 등골을 따라 싸늘한 식은땀이 미끄러진다.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
맞아, 그때 피임 안 했어.
창문 밖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정적을 꿰뚫었다. 점점 와닿는 현실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동요가 가득한 눈으로 창문을 내다보았다. 탕, 탕 굵은 비가 유리와 함께 내 의식을 때렸다.
내 벌어진 입술에서 꺼질 듯이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배, 안 나왔어요. 아기가 있을 리가…….”
“워낙 마른 체형이시고, 임신 초기에는 티가 안 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하지만, 그, 저는, 그게.”
“식사가 힘드셨다고 문진표에 체크를 해 주셨어요. 아마 입덧일 가능성이 큽니다.”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으나 오한이 들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꽉 감싸 쥐었다. 심장이 뇌까지 올라간 듯이 관자놀이가 쾅쾅 울려 댔다.
어지럽다. 머리가 아팠다. 빗소리가 시끄러워 커튼을 치고 싶었다.
“놀라신 건 알지만, 진정하세요. 여진서 씨 같은 경우에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해요.”
아직 뭐가 더 남은 건가. 아득해진 시야에 하얀 진료실 천장이 두 개로 겹쳐 흔들렸다. 어느새 내 쪽으로 건너온 의사가 어깨를 바짝 붙들었다. 그녀의 눈매가 안타깝다는 듯이 구겨졌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가관이었다.
“초음파상으로는 이전에 임신 경험이 있었던 걸로 보여요. 저도 이런 형태는 처음인데, 벽에 난 상처가 유산 흔적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온몸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였다. 귓구멍을 통해 들어온 문장이 심장에 걸려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임신 경험이 있었던 걸로 보여요. 유산 흔적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임신, 유산.
빗소리가 천장을 뚫을 듯이 커져 갔다. 심장이 박동하는 속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최고조를 향해 달리던 두통이 갑작스레 멎었다. 삐익, 뻗어 나온 한 줄기의 이명이 머릿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넋이 나가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동공에 담긴 건 그녀였으나 눈앞에 비치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한낮의 백일몽은 나를 과거로 이끌기 시작했다.
‘축하드려요. 임신하셨습니다.’
아주 차가운 물에 잠겨 죽어 가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 손가락 끝부터 나를 얼린 냉기가 은근히 다가와 목을 조른다. 의사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다른 장소였다.
이제껏 겪어 온 증상과 다른 양상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두통 따위는 동반되지 않았다. 심장이 마구 벅차올랐다가 제멋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따끔거리는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잘하네, 예쁘게.’
뒤틀리고 망가진 관계를 이끈 첫마디.
‘……돈은 정말 주시는 거죠?’
스스로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는 미련한 나의 모습.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이 난다. 주태승과 함께한 2년간 언 가슴이 녹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 이야기는 추운 겨울의 습지와 닮았다. 축축하며, 음습하고,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는 얼어붙은 물에 가라앉아 몸을 웅크린 채 살았다.
제 몸을 팔아 돈을 받는 남창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했다. 참 분수에 맞는 결말이었다. 나는 배 속에 죽도록 미운 알파의 아이를 품고 죽었다. 요란한 플루트 소리에 둘러싸여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서 식어 갔다.
불안정하게 흩어져 있던 조각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기억이 완성되는 순간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시끄럽게 고막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망상이 아니었어. 다 이전에 겪은 일인 거야.
온몸에 새겨진 듯한 이 미치도록 선명한 감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 기억들은 분명 진짜다. 가짜일 리가 없다. 하지만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역시 주태승은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나에게…….
빠앙, 창문 너머에서 울리는 경적이 나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굴려 의사를 응시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이 커요. 여진서 씨 영양 상태가 아이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부디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해요.”
하하, 내 입가에 마른 웃음이 걸렸다. 혐오스러운 반복이었다. 주태승과 만든 아이가 또 배 속에 들어 있다. 나는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아랫배를 멀거니 쓰다듬었다.
“너무 마르셔서 마음이 안 좋아요. 다음에 오실 때는 보호자분도…….”
의사가 주먹을 말아 쥐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고운 손톱에 내 시선이 옮겨 갔다.
보호자 없는데.
이럴 때는 보통 아이의 아버지를 보호자라고 일컫던가. 우스운 일이었다. 주태승이 나를 보호한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보듬고 돌보는 행위는 그와 가장 동떨어진 짓이었다. 사람을 짓밟아 바닥을 기게 만드는 거면 몰라도.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의 눈길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무어라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병원 복도에 적막이 흘렀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 중 하나가 수명을 다한 듯,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버티고 싶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벽을 짚어 고꾸라지는 것은 면했다.
어떤 정신으로 수납을 마쳤는지 모르겠다. 나는 데스크를 나서며 커다란 문밖을 내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하나가 아닌 둘, 청승맞게 쏟아지는 빗줄기,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전부 눈에 익은 그날의 풍경이었다.
텅 빈 걸음이 병원 출구에 멈춰 섰다. 뒤늦은 깨달음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나 돌아갈 곳이 없구나.
밖은 추웠다. 비도 왔다. 뒤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나를 스쳐 병원을 빠져나갔다. 이 장면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발을 옮겼다.
가방에 우산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꺼내서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산으로 비를 막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잡한 간이 지붕 아래에서 그저 먹구름이 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한 건 그때였다.
「주태승.」
그 세 글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검은 액정을 바라본 채,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망설이는 사이에도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수신을 알렸다. 둥근 버튼이 쿵쿵 뛰며 전화를 받기를 종용했다.
나는 자동차 바퀴가 물을 튀기는 모습을 관망하며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분을 참지 못해 격양된 목소리. 익숙하면서도 모순적으로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본인 감정을 드러냈었지. 사람 새끼가 아니면서 사람처럼 군다.
[넌 내 속을 얼마나 뒤집어 놔야 만족하는 건데. 남을 종일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도대체가…….]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씨근거리는 주태승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어디야.]
이 정도면 맞을 만하려나. 나는 우중충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얀 운동화가 지저분한 물을 머금어 얼룩졌다.
“병원이요.”
[병원을 왜 가. 아파?]
“네.”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빗줄기가 차가웠다. 냉기를 품은 물방울은 머리에 그치지 않고 온몸을 적셔 나갔다. 체온을 빼앗긴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아픈 건데. 어디 다쳤어?]
“네.”
주태승의 어조가 다급해졌다. 동요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직전보다 언성을 높이고 나를 타박했다.
[대답 그딴 식으로 하지 마. 병원에서는 별말 없어?]
“…….”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입 꾹 처닫고 혼자 끙끙대면 누가 칭찬이라도 해 줘?]
헛웃음이 나왔다. 주태승이 나를 걱정해서 화를 낸다. 아픈 걸 말하지 않았다고 나무란다. 수도 없이 아프다고 이야기해도 무시했으면서. 그렇게 나를 바짝 말려 죽여 갔으면서.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가 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임신했어요.”
[……뭐?]
“배 속에 주태승 씨 애새끼 들어 있다던데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문장이 전해지자 순간적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귀에 댄 휴대 전화에서 잡음이 났다. 그 또한 실내가 아닌 듯했다. 나는 젖어서 속이 다 비치는 옷자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감기 걸리면 애도 걸리는 건가. 아무래도 괜찮았다.
[거기 있어. 만나서 이야기해.]
“저 주태승 씨 만날 생각 없는데.”
[병원이라고 했지. 기다려.]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주태승은 꾸역꾸역 본인 혼자만의 약속을 잡았다. 댐에 가두어 놓았던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한계까지 넘친 수면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금 가고 있으니까 카페라도 들어가. 비 맞지 말고.]
“하…….”
싫다고. 안 만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줄 건데.
가슴에 큰 소란이 일었다. 제멋대로 구는 주태승의 태도는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어떻게든 본인 뜻을 관철하려 들었다.
“제 말 그냥 넘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시네요.”
[…….]
“주태승 씨 그런 면이 정말 싫었어요.”
나는 도보 한 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휴대 전화를 쥔 손이 애처롭게 경련했다.
“걱정돼요? 주태승 씨가 무슨 자격으로요?”
그동안 나를 무시해 놓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해 놓고. 이제 와서 당신이 뭔데.
[여진서.]
“우리 연주회에서 처음 만난 거 아니죠.”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도, 주태승은 나를 알고 있었다. 그간 보여 준 의미심장한 모습과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이 순간의 침묵이었다. 주태승은 부정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입꼬리가 멍청히 올라갔다. 그와 반대로 마음은 절벽 아래로 한없이 추락했다.
“왜 또 나한테 왔어요? 2년 괴롭힌 걸로는 성에 안 차서?”
연달아 토해 낸 물음에도 주태승은 말이 없었다. 차라리 좋았다. 가증스러운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왜, 왜 나여야만 했냐고요, 당신 손에서 놀아나는 게. 내가 주태승 씨한테 뭘 그렇게 큰 죄를 지었어요.”
악에 받친 목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흩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가슴에서 솟아나는 말을 전부 게워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 갖고 노니까 재밌어요? 같잖은 연애 놀음 해 보니까 어때요?”
[…….]
“깔릴 때마다 좋아 죽으니까 따먹을 맛은 나셨겠네요.”
따먹는다느니, 창놈이라느니. 다 주태승이 나를 짓밟을 때 쓴 말들이었다. 그 단어를 가져와 자신을 헐뜯으며 나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태승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 대신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와 차 문을 닫는 듯한 소음이 차례로 전해졌다. 언뜻 그의 거친 호흡이 함께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난 진심이었는데. 다…….”
허공을 떠도는 말에 울음이 잔뜩 끼었다. 내내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북받쳐 올랐다. 뜨거운 물방울이 차게 식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 심장 언저리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끅끅 흐느꼈다.
“진짜 당신 좋아했다고요. 주태승 씨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려도 그저 좋아서. 바보같이.”
지금 이토록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연락을 기다리고, 나를 만지는 손길 하나에 설레 얼굴을 붉히던 순간들이 참 소중했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이 떠올라도, 흐윽, 계속 좋아하려고, 나는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나한테 어떻게, 어떻게 이래.”
[너 어디야.]
“후회돼서 미칠 것 같아. 신나서 먼저 고백하고, 행복하다고 착각한 게 한심해서…….”
주태승 씨를 좋아한다며 펑펑 울어 버린 병실. 평화로운 음악 아래 입을 맞추던 소파. 서로의 몸을 열렬히 더듬다가 지새운 밤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이제 숨이 찰 지경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전부 주태승이 알려 주었다. 그를 온전히 증오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끝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다.
“왜 그랬어, 왜! 나한테 왜 그랬냐고.”
[여진서.]
“우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냥 서로 모르는 사이로 사는 게 나았어. 이렇게 상처받고 힘들 바에야, 그냥.”
[진서야.]
자꾸 이름을 부른다. 나는 억하심정으로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런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맞은편 횡단보도에 낯익은 인영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주태승은 우산이 없었다. 그 역시 나만큼이나 흠뻑 젖었다. 나는 눈동자를 커다랗게 벌리고 굳어 버렸다.
양가적인 감정이 속에서 메아리쳤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안겨서 위로받고 싶은 동시에 그를 밀쳐 내고 싶었다.
그때,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왜 말 안 들어.]
“…….”
[비 맞지 말라니까.]
씨발, 또 다정하게.
“……하지 마, 그만해.”
신호는 아직 빨간 불이었다. 저 빛깔이 푸르게 바뀌면 주태승이 이쪽으로 걸어올 것이었다.
“말했잖아요, 안 본다고. 주태승 씨가 싫어서 미치겠다고요.”
[싫어해. 네가 원하는 만큼.]
두려웠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또 범람할 내 마음을 마주하는 게.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렸다. 어디든 좋았다. 이 장소만 아니면 된다. 눈물이 흘러 시야가 희뿌옇게 번졌다. 갑작스러운 뜀박질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터질 듯이 아픈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싫어, 무서워.
때마침 길가에 정차한 택시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중년의 택시 기사가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니, 무슨 비를 이렇게…….”
“빠, 빨리 가 주세요. 아무 데나요.”
택시 기사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얼른 페달을 밟았다. 작은 승용차가 매끄럽게 도로를 가르고 나아갔다. 나는 손에 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화면에 아직도 통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끊기지 않은 전화를 억지로 멈추고자, 버튼에 손가락을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끼이익, 쾅-.
휴대 전화 스피커와 창문 밖에서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택시 기사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본능적으로 창문을 향해 기어갔다.
설마…….
유리에 바짝 달라붙어도 반대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멈춘 차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애꿎은 창문을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 뒤를 확인한 택시 기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앞으로 차를 몰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보지 마.
북적거리는 도로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뺨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끊어진 휴대 전화 화면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