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45화 (45/58)

45화.

“하, 진짜 막 나가네?”

돌아선 정윤오의 눈빛이 무표정하게 저를 보고 있는 태건에게로 향했다.

“설은하 얼굴에 먹칠하는 짓 하지 마. 그런 개짓거리 하다가 걸리면 그땐 한방으로 안 끝나.”

“…….”

“어디 갈 데 있으면 연락하세요, 도련님.”

돌아서는 제 친구를 정윤오는 잡지 못했다. 모든 게 뜻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렵게 쥐고 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 * *

“얼굴 좋아 보이네?”

“덕분에요. 그 집에서 나오니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은하의 얼굴에 강유화의 표정은 사납게 굳었다. 하여튼. 어렸을 때부터 맹랑하게 대드는 게 맘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찌 됐든 정호승 집안과의 결혼으로 제 효용 가치는 다 했으니, 입 안이 씁쓸해도 순순히 넘어가 줄 용의는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잘 생각했어. 이렇게라도 한 몫 잡아야 그나마 네 인생 펴고 살지.”

피식, 별말 없이 웃음을 흘리는 은하의 뒤로 노크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들어오는 오진주의 목소리에 날 선 분위기가 잠시나마 흐트러졌다.

“늦어서 죄송해요.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앉으세요.”

상견례를 하기 전 양가 어머니들이 먼저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혼수나 예단 등을 정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사실 모든 것은 정호승이 부담하기로 했으니 딱히 챙길 것도 없었다.

“갑자기 이런 자리 마련하게 돼서 놀라셨죠? 실은 저희도 은하 양 말 듣고 놀라긴 했어요. 설 대표님 내외 야망 크신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네?”

“은하 양, 설준수 판사 딸이라면서요?”

자리에 나오기 전, 은하와 오진주는 대충 말을 맞추었다. 최대한 일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서 밝힐 건 밝히고 지나가자고.

능글맞게 이야기하는 오진주의 말에 강유화의 눈이 순간 사나워졌지만, 조용히 차를 홀짝이던 은하는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저희로서는 더 달갑기는 해요. 어쨌든 은하 양 출신이 분명해진 거니까. 그전엔 아무래도 소문이 좀……, 이해하시죠?”

“네.”

떨떠름한 강유화의 대답에도 오진주는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동안 친정에서 못 받은 사랑 저희 쪽에서 잘 채워 주려고 합니다. 결혼 준비도 저와 벌써 시작했어요. 그러니 사부인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 이게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결혼이라는 게…….”

“아무 말 말고. 해 주겠다는 거 받고 결혼식 자리만 지키시면 돼요.”

짐짓 교양을 떨며 입을 여는 강유화의 말을 은하가 단호히 막았다.

“이제 와서 얘가 왜 이러나 싶겠지만, 나 진짜 그쪽 집안이랑 하루라도 빨리 연 끊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설 대표님과 필요한 것만 정리해서 말씀해 주세요. 아버님, 어머님도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다 해 준다고 하셨으니까.”

아버님, 어머님. 은하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단어들을 강유화는 조용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뭘 어떻게 말했길래, 장차 시어머니가 될 사람 앞에서 이렇게 이를 다 드러내는 걸까. 뭔가 찝찝하다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지만, 일단 모욕을 받은 느낌이 더 커서 강유화는 얼른 이 자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래 끌 것 없겠네요. 그이랑 상의해서 조만간 다시 연락을…….”

똑똑.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린 후 문이 열리더니 오늘 이 자리에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보.”

“어머, 설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말씀 중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설준호의 모습에 은하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고개를 들어 그런 은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 막 얘기를 마치려던 참이었어요. 결혼식 준비는 정 대표님 쪽에서 다 하기로…….”

“송구합니다만,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해야겠습니다.”

“네?”

놀란 오진주의 목소리가 제대로 박히기도 전, 매서운 설준호의 눈빛이 은하에게로 날아들었다.

“다 딸자식을 잘못 키운 제 탓입니다. 평소에 품행이 바르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윤오 군 친구와 그렇게까지 할 줄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차태건. 윤오 군 친구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태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오진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설준호는 퍽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약혼을 하기 싫다고 울며 떼를 쓰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에 치기 어린 소리라고 듣고 넘겼는데……. 실은 약혼식 날, 두 사람이 몰래 도망치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차태건이랑 둘이 도망을 가기로 했다구요?”

와, 재주 좋네. 어떻게 알아냈지.

설준호를 바라보는 은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은하에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와 제 내자는 은하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동생이 아버지에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내쳐져서 제 딸로 들였고, 아픈 제수씨도 제 돈으로 열심히 부양했구요. 제수씨가 죽은 걸 숨긴 이유는,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약혼식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숨겨 본다는 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설준호의 지지부진한 설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태건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부터 이성을 잃은 오진주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은하와 태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만이 계속 되새겨졌다.

“어렸을 때부터 충동적인 기질이 강해 훈육하기가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하는 만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부족했습니다.”

“설 대표님.”

“다 제 흠이고, 치부라 이런 말씀 드리기 어려웠습니다만, 눈 감고 모자란 딸자식 치워 버리고 말자니, 도저히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는 설준호의 모습에 오진주의 얼굴이 은하 쪽으로 홱 돌아갔다.

“은하, 무슨 할 말 없니?”

“흠, 글쎄요.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으실 것 같은데.”

별다른 변명도 하지 않는 은하에 오진주는 팩하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기 전, 은하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경멸의 기운 말고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 그녀의 모습에 설준호는 따라가 보라는 듯 제 와이프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룸 안에 순식간에 침묵이 쌓였다.

“뭐가 겁나서 그렇게 헐레벌떡 오셨어요? 대충 받을 거 받고 끝낼 줄 알았더니.”

먼저 침묵을 깬 건 은하였다. 그런 은하를 바라보는 설준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찝찝한 거 못 참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일이 네 뜻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게 가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겨우 그것 때문에 정호승 대표를 놓친다구요? 계산이 많이 느려지셨네요.”

“네까짓 거 안 팔아도 그 사람 설득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꼭 정호승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되고.”

“아아, 그러시구나.”

어떻게든 빨리 설준호를 성공시키고 싶었다. 누구의 힘을 빌려서든 얼른얼른 위로 올려서 빨리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근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 은하는 허탈감에 웃음을 흘렸다.

“기어오를 생각 하지 마. 아무리 애써 봤자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지금껏 하던 대로 그냥 죽은 듯이 있어.”

“네, 큰아버지. 오늘도 이렇게 세상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정대는 표정으로 은하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설준호가 말없이 뒤돌아서려던 그때였다.

“혹시 내 아버지도 그랬어요?”

“뭐?”

“이렇게 사사건건 당신을 괴롭혔나? 성가시게 하고, 일을 방해하고. 그래서 그렇게 싫어했나?”

“입 다물어.”

“세상에 어떤 인간이 자기 동생의 죽음을 부모에게 숨길 수 있을까, 정말 많이 생각해 봤거든요.”

“입 다물라고 했어.”

싸늘한 설준호의 눈빛이 은하의 몸을 꿰뚫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은하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단순히 돈 때문만이라기엔 이유가 너무 빈약하잖아. 그래서 여기저기 좀 알아봤어요. 그러다 주워듣게 됐죠. 설준호란 인간이 자기 동생에게 얼마나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두현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는 생각 외로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차석으로 연수원 졸업을 했을 때 큰 이슈가 되었던 것, 그런 아버지를 처음부터 로펌 대표로 생각하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계획.

얼굴만 봐도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설준호가, 저보다 한참 잘난 동생에 대해 얼마나 큰 열등감을 느꼈을지 짐작이 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차라리 이해가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가 인간으로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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