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만. 그만해, 은하야.”
치켜든 은하의 손을 감싸 쥐고, 태건이 은하를 제품에 꼭 껴안았다.
“저런 애한테 눈물 보이지 마. 지금껏 지켜 왔잖아.”
태건은 알고 있었다. 느닷없이 뺨을 맞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은하의 모습을.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건 은하만의 자존심이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어떻게든 견뎌 내고 말겠다는 제자신과의 약속. 그랬던 그녀가 겨우 저 피라미 같은 여자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태건을 볼 수 없었다.
“이거 놔.”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태건의 말대로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은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진심만은 끝내 막을 수 없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진짜 다…….”
“그래. 알아. 네 마음 알겠어.”
잠시 상황을 가늠하던 이두현은 얼이 빠져 있는 설은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완전히 설은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은하는 그제야 무너져 내렸다.
“…….”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참는 그녀 주위를 사람들이 무성의한 눈빛으로 스쳐 갔다. 태건은 그런 은하 앞에 무릎을 꿇고, 흠칫흠칫 경련하듯 우는 그녀를 혼신을 다해 껴안았다.
“……흑 ……읍.”
아, 온몸으로 우는 게 이런 거구나.
기를 쓰고 참으려는 모습에 가슴이 너무 저려서, 태건은 끌어안은 팔에 그저 힘만 주었다. 이번에는 제가 대신 울어 줄 수도 없었다.
“얼굴 잠깐만.”
알코올 솜을 든 태건이 지친 표정으로 침대에 앉은 은하의 밑에 자리 잡았다. 발갛게 부은 눈두덩이 아래로, 찢긴 듯 움푹 팬 상처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게 나 있었다.
“따끔할 거야.”
태건의 경고에도 은하는 그냥 눈만 끔뻑이고 말았다. 감정을 쏟아 낸 여파가 너무 커서 잠시 소강상태에 이른 듯했다. 샤워 후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일 때까지 은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차태건.”
“응?”
“나랑 자자.”
은하가 입을 연 것은 치료를 마친 태건이 그 흔적을 정리하고 일어서던 때였다. 나직이 흘러나오는 은하의 말에 태건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왜. 이제 정윤오랑 결혼할 거라니까 께름칙해? 전엔 괜찮았잖아.”
“설은하.”
“아직 식도 안 올렸는데, 그전까지 좀 즐기는 게 어때서. 나랑 자자. 너도 좋아하잖아.”
태건은 다시 은하의 밑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손에 다 들어오는 그녀의 뺨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일단 좀 쉬자. 너 피곤해 보여.”
“나 너랑 자기 전에 정윤오랑 잔 적 있어.”
영혼이 다 빠진 눈빛으로 은하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태건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일렁였다.
“아까 그 남자, 설은진 남자 친군데도 내가 꼬셔서 잤고.”
“은하야.”
“나 더럽지? 쓰레기 같지?”
“아니. 아냐, 안 그래.”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태건은 은하를 제 품에 가두었다. 단단한 품에 갇힌 은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답답해서 미칠 거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
“그러니까 하자. 내가 말했잖아. 잠자리로 답답한 게 해소된다고. 응?”
눈물로 얼룩진 은하의 눈가에 태건은 입술을 내렸다. 입술에 느껴지는 기운이 몹시도 뜨거웠다.
“사랑해, 은하수.”
무람없이 흘러나온 태건의 말에 은하의 눈이 질끈 감겼다. 이어서 힘겹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잔뜩 맺혀 있었다.
“……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이건, 내가 어떤 사람이건 중요한 건 이거 하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
“네가 누구와, 몇 명의 사람과 잤든 상관없어. 살려고 그런 거니까.”
숨 쉬려고 그런 거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저를 꼭 껴안고 조곤조곤 말해 주는 태건의 목소리에 은하는 몸을 떨었다.
“우리, 딱 한 번만 마음 가는 대로 살면 안 될까?”
“…….”
“결혼하지 마, 은하야.”
은하는 그동안 지탱해 온 어떤 것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와는 상관없이 태건을 버리고 그냥 이렇게 망가진 채로 살려고 했는데. 이렇게 태건 앞에만 있으면 결국 무너져 버렸다.
“은하야. 은하수. 나랑 살자. 내 곁에 있어 줘. 응?”
허공을 맴도는 간절한 목소리를 선뜻 붙잡지 못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두통이 머리를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 * *
사그락.
이불이 스치는 소리에 창밖에 향해 있던 은하의 시선이 태건에게로 돌아왔다.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은 모두 사라지고, 어느새 말간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잘 잤어?”
“어.”
태건의 목소리는 깊게 잠긴 채였다. 아직 잠이 붙은 그의 눈가를 살살 매만지는 은하의 손길이 따뜻했다.
“차태건. 네 잘못 아니야.”
“어?”
“어쩌다 나 같은 사람 만난 거. 네 잘못 아니라고.”
“무슨 뜻이야?”
“혹시나 걱정돼서. 우리 헤어지고 나서, 난 왜 이런 연애밖에 못 했을까 네가 자책할까 봐.”
“은하야.”
“생각해 보니 웃겨. 우리 만난 지 반년도 안됐잖아. 고작 몇 개월 본 거 가지고, 이렇게 애틋하게 구는 거 너무 성급하지 않니?”
“감정이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이건 아닌 거 같아.”
어떻게든 태건을 밀어내기 위해 은하는 무슨 말이든 할 생각이었다. 끝내 아무 말로도 안 되면 무조건 떼라도 쓸 생각이었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난 자격이 없어.”
“무슨 자격.”
“생각해 봐. 이게 드라마나 영화였으면 난 여자 주인공 실격이었을걸? 그만큼 흠도 많고 성격도 꼬여 있어서.”
자조하듯 웃는 은하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쳤다.
“널 더 이상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하자.”
사실은 자신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늪을 경험하는 것도 사절이었다. 그래서 은하는 또 이별을 통보했다. 잔인하게 돌아서 놓고 다시 붙잡은 주제에, 이렇게 재차 상처를 줘 버렸다.
“내가 지쳐서 그래. 기다리는 것도 하지 말고, 소원도 없던 걸로 해.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태건은 이게 은하의 진짜 마지막 통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하지만 담담한 은하의 눈빛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들어줄 수밖에 없잖아.
이마를 짚고 눈을 감은 태건을 은하는 말없이 내려 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아주 멀리서 나누었다.
* * *
“네? 결혼이요?”
수화기를 든 설준호의 미간이 움찔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유화의 눈도 매섭게 빛났다.
“일단 알겠습니다. 나중에 또 말씀하시죠.”
전화를 끊은 설준호의 곁에 강유화가 들러붙었다. 통화음이 커 대화가 얼추 들렸음에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하가 그쪽 집안이랑 결혼한다구요?”
“…….”
“여보.”
“무슨 생각인 거지.”
설준호는 선천적으로 의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동생인 설준수의 사고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아버지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중을 위해 미리 걱정하고 의심해서 이상한 것을 뿌리부터 뽑아 놓는 것. 그것이 지금껏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무슨 생각은. 이제 끈 떨어진 연이니까 결혼이라도 해서 팔자 펴고 싶은 거겠지. 그 집이 돈은 많잖아요.”
“지하실에 3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꺼내 달라는 말 한 번 안 하던 애야. 그렇게 독한 애가 자기 엄마 죽은 걸 숨겼는데 그냥 이렇게 넘어간다고?”
“그럼 뭐, 걔가 복수라도 할까 봐요?”
“복수. 복수라.”
지금 은하의 위치가 딱히 그럴 만한 위치가 아니긴 했다. 근데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어쨌든 당신한테는 잘된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별스럽지 않게 대꾸하는 강유화의 말에도 설준호의 미간은 펴질 줄은 몰랐다. 당장 갈피가 잡히지 않던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날 잡아서 당신이 만나 봐. 은하도 꼭 같이 보자고 하고.”
“알겠어요.”
아내를 내보낸 후, 설준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난데, 사람 하나만 찾아봐.”
나직이 지시를 내리는 그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 * *
“다시 일하게 해 달라고 구걸했다더니, 존나 여유롭다?”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운 태건의 시야로 정윤오의 삐딱한 얼굴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건이 무릎에 팔을 걸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나가게?”
지금 당장 차를 대령하려는 듯 일어나는 태건의 어깨를 정윤오가 발로 툭 쳤다. 털썩, 쓰러진 태건의 시야가 바짝 올라갔다.
“설은하 내 눈앞에서 치워. 둘이 좋아 죽겠다면서 왜 나한테 들러붙고 지랄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냐. 그럴 이유도 없고.”
“차태건!”
“정윤오.”
무감하게 그를 부르는 태건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았다.
“너보다 내가 더 좆같아.”
“뭐?”
“사랑하는 여자, 친구 와이프로 보내야 하는 내가 너보다 더 좆같은 기분이라고.”
“그러니까 가져가라고! 아님 내가 다 터뜨려 줘? 진짜 절친과 잤던 사이라고 말이라도…….”
퍽! 정윤오가 말을 마치기도 전 둔탁한 파열음이 공기를 갈랐다. 한쪽으로 홱 돌아간 정윤오의 입가에 피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