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40화 (40/58)

40화.

“근데요, 언니. 차태건은요?”

“……어?”

“혹시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언니의 그 우유부단함이 차태건을 10년 동안 괴롭혔다는 생각. 알고 있었잖아요. 걔가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단지 건이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을 뿐이야.”

“상처받지 않는 거, 아프지 않은 거, 좋죠. 근데 제 경험상 그게 최선은 아니더라구요. 어떨 땐 싸우고 깨지고 부딪치고. 그렇게 끝까지 가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더라구요.”

“…….”

“언니의 그 애정, 옆에서 보면 굉장히 편파적이에요. 그럴 거면 차라리 차태건을 내치지. 그랬으면 걔가 10년 동안 멍청하게 지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건, 우리 세 사람은…….”

정은수는 머뭇거렸다. 복잡한 세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자니 이런저런 사건들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했다간 누군가에게 또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정확히는 정윤오에게.

하지만 이어져 나온 은하의 말은 그런 정은수의 걱정을 하등 쓸모없게 만들었다.

“물론 정윤오를 살리기 위해서란 핑계가 있었겠죠. 근데 언니,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정윤오 같이 한번 죽었다 깨어난 애들은 특히 더. 그 이후로 걔가 뭐 한 적 있어요?”

아, 건이가 말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도망까지 치려고 할 정도로 서로 좋아했다는데, 이런 속 깊은 얘기 하나 하지 않았을까. 정은수는 문득 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언니랑 차태건이 보살펴 줘서 안 죽은 게 아니라, 무서워서 안 죽은 거예요. 아픈 거 알았거든. 죽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그래서 그냥 주위에 난장이나 피우고 사는 거예요.”

“은하야.”

건조하게 말을 내뱉는 은하의 모습에 정은수는 기분이 싸해졌다. 어떻게 알아? 넌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어?

“하아,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지긴 했는데, 어쨌든 저한테는 상관없는 일이네요. 알아서들 하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태건이 보고 가. 금방 올 거야.”

돌아서려는 은하를 정은수가 황급히 붙잡았다. 태건이 연락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은하를 잡고 있는 게 제 일이었다.

“제가 왜요?”

“태건이가 많이 기다렸어. 한 번만, 응?”

정은수의 애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그때였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 한숨을 내쉰 은하가 뒤를 돌아보고는 이내 미소를 지어냈다.

“안녕.”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태건이 서 있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은하의 가슴속에는 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손잡이를 들어 입술을 조금 축인 은하가 차분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보았다.

“나 많이 찾았다며. 왜? 무슨 할 말 있어?”

은하가 병원에서 사라진 지 2주 만이었다. 태건은 효주에게 가 사정을 해 봤지만, 효주는 은하가 건강을 잘 회복하고 있다고만 할 뿐, 끝내 행방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혹시나 책방에 들르지는 않을까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지만, 은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아버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은하가 집에 왔다는 소식이었다.

오랜만에 본 은하의 얼굴에는 그새 살이 더 내려 있었다. 애써 화장으로 가렸지만 창백한 피부는 좀처럼 핏기가 없었고, 눈빛은 공허했다. 냉정함을 가장한 채 건조하게 말을 뱉는 그녀의 모습에 태건은 가슴이 울컥했다.

“괜찮아?”

“뭐? 아, 엄마?”

효주가 태건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댔나. 은하는 별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주 괜찮지는 않지. 사람이 죽은 건데. 근데 뭐, 이미 지난 일이고. 따지고 보면 20년 가까이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사람이니까. 잘 털었어.”

“은하야.”

“지금껏 붙잡고 있었던 내가 미련한 거지.”

덤덤하게 말을 내뱉는 은하의 표정은 처음 제대로 그녀를 보았을 때를 상기시켰다. 정윤오와의 식사 자리에서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던, 아주 건조한 모습이었다.

“혹시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어? 미안하지만 난 안 미안한데.”

“…….”

“나 뻔뻔하지? 근데 이게 진짜 내 모습이야. 그동안 내숭 떠느라 힘들었어.”

태건은 애써 입을 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얹을 시간에 은하의 목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같이 도망치자고 했던 거, 너 안심시키려고 그랬던 거야. 약혼식 방해하면 안 되니까. 막판에 좀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할 일 해야지.”

“……할 일?”

“응. 정윤오랑 결혼하려고.”

결혼. 전혀 생각지 못한 그 단어에 태건은 숨을 잠시 멈추었다.

“되게 정떨어지지 않니? 여태껏 속인 것도 모자라서, 사과는 한마디도 없이 이젠 결혼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거 보면.”

“아냐. 그렇지 않아.”

태건은 곧바로 부정했다. 너무 빠른 그의 반응에 은하는 그냥 웃어 버리고 말았다.

태건은 그런 은하를 아주 길게 바라보았다. 너무 그리워하던 얼굴이 눈앞에 있어서 그런지,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오래전부터 다짐한 바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 말고는.

“도와줄게.”

“뭘. 결혼식 준비를?”

“뭐든.”

“하. 차태건.”

어이없다는 듯 보는 은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태건의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디 갈 일 있으면 말해. 데려다줄게. 짐들 일 있거나 뭐 다른 거 필요할 때라도…….”

“태건아.”

심상치 않은 부름에 태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상하게도 이런 식으로 불리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 너 안 사랑해.”

“…….”

“내기였어. 너랑 한번 자 보려고 거짓말한 것뿐이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은하 또한 태건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너 이겼잖아. 네가 얻기로 한 거 얻고 그냥 즐겨.”

짧은 당부를 마지막으로 은하는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태건은 조용히 제 다짐을 중얼거렸다.

“뭐든 설은하가 원하는 대로, 설은하가 행복한 대로.”

태건의 그 결심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결심은, 단순히 결혼 준비를 돕는 데서 끝나진 않을 터였다.

* * *

“일찍 왔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거.”

잔만 가볍게 쥐고 있던 은하의 손 옆으로 갈색 큰 서류 봉투가 놓였다. 손짓으로 직원에게 제 와인 잔도 요청한 이두현이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도움 될까 싶어서 가지고 왔어. 너 여기 있다는 건 그냥 감으로 때려 맞힌 거고.”

“감 좋네요.”

“열어 봐.”

봉투를 열어 그 안의 자료를 확인하는 은하의 눈빛이 작게 요동쳤다. 그가 건넨 것은 설준호가 설은진 앞으로 돌려놓은 자산 목록이었다.

세운로펌의 수장이었던 설수호가 사경을 헤맬 무렵, 설준호는 법인 자금을 변칙적으로 유출하여 채 제 딸에게 편법으로 증여했다. 강남에 아파트 두 채와 꼬마 빌딩 한 채, 그 외에 땅을 포함한 100억 원 정도의 재산이 그 당시 여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설은진의 이름으로 돌려져 있었다.

“와아.”

설준호가 정치에 뜻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은하는 조금씩 그의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 왔다. 회사 내에서 직원들과 문제를 일으킨 것들, 접대를 나가면서 여자를 불렀던 흔적, 집에서 저를 폭행하는 강유화와 설은진의 녹취본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자잘한 것들로는 설준호를 망가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은하는 원래 제 아버지인 설준수에게 돌아왔어야 할 유산에 집중했다. 국세청 고위 공무원인 이두현의 아버지를 만나고자 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솔직히 말해 은하가 제 정체를 밝히고, 설준호의 탈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름통을 들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이운형이 설준호에게 한 마디라도 흘렸다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마찬가지로 은하의 도움 요청에 이운형이 반응할 가능성도 반반이었다. 아니, 반반도 아니고 정확히 9대1 정도.

하지만 은하는 도박을 걸었다.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사실 하나를 이운형에게 드러내면서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다.

언젠가 강유화와 설은진이 휴가를 간 사이, 회식에 참석한 설준호가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 날이 있었다. 기사와 함께 그를 안방에 옮겨 놓은 은하는 문득 그의 휴대폰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나 뭐 하나라도 건질 건 없나 싶어서.

평소에 그렇게 철두철미한 설준호도 만취한 상태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그의 지문으로 손쉽게 잠금 화면을 푼 은하는 그의 휴대폰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운형과 관련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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