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38화 (38/58)

38화.

“무슨 일 있었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정윤오와 일련의 사건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친구들과 연을 끊었다는 얘기가 목에 걸렸다. 그것들을 설명하려면 제 과오도 전부 털어놓아야 했는데, 자신에게 실망할 부친의 얼굴이 조금은 두려웠다.

“얼굴이 그게 뭐야. 잠은 자고 다니는 거야.”

“네. 푹 자고 밥도 잘 먹고 있어요.”

혹시라도 은하가 또 다른 마음을 먹을까 봐, 태건은 매일 은하의 주위를 배회했다. 은하가 병실에 있을 땐 병실 밖 창문에서 그곳을 올려다보았고, 가끔 은하가 산책을 나올 때면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다. 간혹 효주와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를 모른 척해 주었다.

“아버지.”

“응.”

“정 대표님 일, 그만하시면 안 돼요?”

불쑥 튀어나온 태건의 말에 천천히 수저를 놀리던 부친의 손이 딱 멈췄다. 조금 당황한 듯 보이는 부친의 모습에, 태건은 머쓱하게 제 이마를 긁었다.

“죄송해요. 말이 헛나왔어요.”

절대로 계획한 말이 아니었다. 이런 얘기는 어렸을 때 정윤오 때문에 억울하게 야단을 맞던 때에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윤오 때문에 그래?”

“…….”

“윤오가 우리 아들 또 괴롭혔어?”

부친의 음성은 그리 다정한 편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오히려 퉁명스럽게 느낄 정도로 무뚝뚝하고 딱딱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도 태건은 애정을 느꼈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생긴 거구의 차태건이 종종 제 부친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네.”

“…….”

“그 새끼 완전 미친놈 같아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태건은 일부러 농담 삼아 내뱉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를 보는 부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것을 태건은 알아채지 못했다.

“밥 먹자.”

“네. 아버지도 얼른 드세요.”

입맛은 없었지만,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야 오늘도 은하 곁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시원하게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고 주위만 뱅뱅 도는 한심한 신세였지만, 역시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좋았다. 태건은 제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은하의 곁만 공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네? 퇴원이요?”

“네. 두 시간쯤 전에 수속 마치고 퇴원했어요.”

부친과 헤어진 후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태건은 매일 같은 시간 산책을 나서던 은하가 보이지 않아 병실로 올라가 보았다. 놀랍게도 침대는 비어 있었고, 당황한 그에게 간호사는 은하가 퇴원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든 태건이 효주에게 전화를 돌려 보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 울리다 마는 것을 보면, 제 연락처를 차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어떡하지. 다시 책방에라도 가 봐야 하나. 하지만 가서 뭘 어쩌려고.

기껏 은하를 만났지만 제대로 용서를 빌지도 못했다. 저를 보고 더 아파할까 봐, 저 때문에 안 좋았던 기억을 다시 상기할까 봐.

“아……. 진짜 어떡하지.”

터덜터덜 병원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았다. 가만히 서서 위를 올려다보는 태건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설은하. 난 이제 뭘 해야 할까. 어디서 널 찾을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설은하가 원하는 대로, 설은하가 행복한 대로.

그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정말로, 그게 무엇이든.

은하수를 위하여.

6. 해피엔딩

“오빠, 진짜 이러기야?”

“그만 좀 해. 지겹지도 않냐?”

오늘따라 설은진의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미간을 구긴 채로 술만 들이켜는 이두현에, 그를 향해 있던 설은진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오빠 진짜 변한 거 알지? 도대체 왜 이래?”

“칭얼대는 것도 적당히 하자. 네 투정 받아 주는 것도 힘들다.”

교제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설은진과 이두현은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이두현의 아버지인 이운형이 설준호의 중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대학 졸업 후 행시에 붙은 그는 국세청에 적을 두자마자 곧바로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길을 다졌다.

이운형은 은하의 부친 설준수와 죽마고우이기도 했다. 워낙 오래전부터 왕래가 잦았던 탓에, 처음 설은진이 이두현을 좋아한다며 고백을 했을 때 두 집안의 부모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두현이나 설은진이나 아직 어렸다. 이두현은 한 여자에게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설은진은 유혹에 약해 클럽에 자주 가거나 가볍게 다른 남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교제하는 사이에 헤어졌다가 다시 붙은 것만도 서너 번. 지난번 은하 때문에 헤어졌던 것도 두 사람에게는 지나가는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혼자 토라져서 휴대폰이나 하고 있는 설은진을 보며 이두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문득 은하가 떠오른 탓이었다.

은하는 평소엔 세상 귀찮다는 듯 나른하게 눈을 뜨면서도, 관계를 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변했다. 외모와 몸매도 이제껏 만나 온 사람 중에 최고였고, 궁합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어쩌다 한 번 피임을 하지 않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오래 갈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때그때 쿨하게 지냈었는데, 이번에 은하의 약혼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이두현은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실은 저도 놀랐다. 내심 일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에.

“아, 아빤 왜 또 나한테 난리야.”

“왜.”

“몰라. 설은하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약혼식 날 도망쳤다는 은하와 연락이 되지 않은 게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꽁꽁 숨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자연스레 흐르는 생각에 이두현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나 갈래.”

“조심히 가라.”

잡지도 않는 이두현을 샐쭉하니 보던 설은진은 그대로 가방을 들고 나가 버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이두현이 다시 위스키 잔을 들이켤 때였다.

위이잉.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이두현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여보세요, 서둘러 전화를 받은 그는 건너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오빠, 저예요, 은하. 내일 잠깐 시간 돼요?

미친놈이라도 된 듯, 잔뜩 가라앉은 은하의 목소리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야? 묻는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 * *

“유학 준비 서두르자. 말 나온 김에 해야지, 안 그럼 윤오 걔가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몰라.”

제 방에 들어와 부산스럽게 구는 모친의 모습에 정은수는 보던 책을 가지런히 덮었다.

“너 여권 어디 뒀어? 일단 제일 빠른 비행기표부터 예약하고…….”

“저 안 가요, 엄마.”

“뭐?”

제 딸을 돌아보는 오진주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눈가를 문지르는 정은수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아직 학기 남았어요. 이렇게 무책임하게 훌쩍 떠나 버릴 수 없어요.”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밖에서 더 좋은 학교 들어가면 될 걸, 뭐 좋자고 한국에 눌러 붙어 있어? 허튼소리 말고 내 말 들어.”

“아뇨. 싫어요.”

“은수야.”

목소리를 높이려던 오진주는 곧바로 작전을 바꿔 애처로운 눈빛을 해 보였다.

“내가 이제껏 윤오한테 몹쓸 소리 들으면서 이 집에 눌러앉은 이유가 뭔데. 다 너 하나 잘되라고 그런 거잖아. 응? 내 딸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고 싶어서, 그 수모 다 참고 산 거라고. 너 알잖아.”

예전 같았으면 이런 모친의 하소연에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은수는 이제 깨달았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도망칠래?’

언젠가 태건이 낮은 목소리로 저에게 묻던 때가 떠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태건이와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날이었다. 엄마는 또 별채를 찾아가 태건의 뺨을 때리고 난리를 쳐 댔었다.

‘요즘 왜 이렇게 답답하냐. 엄마도 그렇고, 윤오도 그렇고, 이젠 아버지까지. 진짜 딱 한 달만 도망치고 싶다.’

‘도망칠래?’

‘……어?’

‘내가 도와줄게. 같이 도망치자.’

그때 이미 태건의 마음속에는 은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는 그 몹쓸 짓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겠지. 어쩌면 모든 것이 망가지기 전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은 아니었을까, 정은수는 고심하고 고민했다.

“은수야.”

애절한 눈빛으로 저를 잡으려는 모친의 팔을 떨칠 때였다. 유독 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방문객을 핑계 삼아 자리를 피한 정은수는 도우미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에 발걸음을 멈췄다.

“언니 집에 있었네요?”

세상의 빛을 모두 머금은 듯,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선 그 사람은 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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