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무슨 짓 한 거야.”
“뭐가.”
“설은하.”
“아, 그거.”
약혼식이 깨진 것치고 정윤오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고급 호텔 방 안에 들어앉아,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애프터눈 티 코스를 시켜 놓고서.
“그냥 너한테 했던 거랑 비슷한 제안 하나 했지.”
“뭘 해 달라고 했는데.”
“너 동정 떼 달라고.”
“……뭐?”
“너 정은수만 보고 있는 거 존나 짜증나서. 자 달라고 했다고.”
순간 이게 인간인가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저런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이는 인간이 정말 10년 넘게 봐 온 내 친구가 맞나?
하지만 태건은 이내 실소를 내뱉었다. 왜 그래, 몰랐던 것도 아니고. 너도 그런 정윤오의 제안을 덥석 물었잖아.
“걔 잘하지? 나도 딱 한 번 해 봤는데 괜찮더라고. 하긴 얼마나 괜찮았으면 계속했겠어.”
“내 동정을 떼 달라고 했다고.”
“어.”
“그리고 뭘 주기로 했는데?”
“약혼식. 그리고 아파트.”
하. 망할 약혼식. 진짜 그게 뭐라고. 순간 태건은 토하고 싶을 정도로 숨이 가빠졌다.
‘어렸을 때부터 기대 같은 걸 안 하고 살아서 소원이랄 것도 딱히 없는데, 그래도 진짜 바라는 거 한 가지는 있었거든. 그 집에서 나오는 거.’
‘…….’
‘정윤오랑 약혼하면, 그래서 결혼까지 하면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을 거 같았어. 나중에 이혼을 하든 뭘 하든, 일단 결혼만 하면 내 할 일은 끝나는 거니까.’
‘설은하.’
‘좋아해, 차태건.’
‘…….’
‘내 이름 은하수를 걸고, 온 우주를 걸고. 너를 좋아해.’
버석한 목소리였지만 눈빛만은 한없이 떨렸더랬다. 그때 입술 위에 닿았던 그 온기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지금 보니까 알겠다.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날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그런데…… 나 진짜 이번엔 그 집에서 나와야겠거든.’
참고 참으면서 살다가, 겨우 찾아낸 탈출구가 이 모양이었다. 이런 말 같지 않은 제안에 응할 만큼, 그만큼 은하가 몰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눈에 핏발이 서고 툭 눈물이 떨어졌다.
“야, 너 울어?”
“…….”
“이 새끼. 재미없게 굴지 말자고 했더니, 진짜 설은하 좋아한 거야?”
“왜 그랬어.”
“…….”
“왜 그랬냐고.”
재차 묻는 태건의 질문에 정윤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랬을 거 같은데.”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글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정윤오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좀 성가셔서 그랬나. 너랑 정은수 보는 거 짜증나서.”
“뭐?”
“그냥. 별 건 아니고. 존나 심심하고 짜증나 죽겠는데, 마침 설은하가 등장했네? 그래서 접붙여 본 거야. 어떻게들 놀아나나 싶어서. 네가 이기든, 설은하가 이기든 난 손해 볼 거 없으니까. 네가 이겨서 설은하 떼어 내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설은하가 이겨서 네가 몸 좀 함부로 놀리고 다니면 그나마 내 속이라도 시원할 거 같고.”
“미친 새끼야.”
“나 이런 인간인 거 몰랐어?”
빈정대는 정윤오의 말투에 문득 은하가 툭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모욕을 준 정윤오를 어설프게 대변해 주려다 들은 말이었다.
‘정윤오 나쁜 놈 맞아. 그것도 완전 개새끼.’
그때도 넌, 다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약혼식 깨기로 한 거, 설은하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제발. 제발.
“처음부터.”
아니길 바랐지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은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았노라고. 처음 파트너 제안을 건넨 이유도, 거듭되는 고백으로 저를 꾀어내려던 얄팍한 술수도.
“정윤오, 진짜 개새끼 맞네.”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태건을 정윤오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넌 기어이 주변 사람을 다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지.”
“…….”
“정은수에, 나에, 설은하까지. 아니, 따지고 보면 네 엄마가 처음인가?”
“뭐?”
순간 태건을 향하던 정윤오의 얼굴이 싹 굳었다. 눈을 뜬 태건의 얼굴에는 빛이 다 사라져 있었다.
“네 어머니 돌아가신 거 대표님 때문 아닌 거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죽인 거잖아. 네가 입 잘못 놀려서, 그래서 돌아가신 거잖아.”
열여섯 살 무렵의 정윤오는 이미 삐뚤어져 있었다. 볼 때마다 아버지의 여자는 계속 바뀌어 있고, 어머니는 우울증 약을 달고 살며 정신이 간당간당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정은수였는데, 정윤오의 모친은 제 아들이 정은수를 만나는 것을 몹시도 반대했다. 겨우 어린애에 불과한데도 마치 당장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 듯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녀는 이미 오진주와 정호승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평소에 저를 언니, 언니 하며 따르던 오진주를 어느 한 순간부터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했으니. 그래서 더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는지도.
정윤오는 그런 모친을 견디지 못했다.
‘평소에는 아들이고 뭐고 눈에 뵈지도 않더니, 갑자기 왜 이 지랄을 하는 건데!’
비가 많이 오던 그날, 정윤오의 모친은 정은수를 만나러 나가겠다는 그의 방문을 걸어 잠갔다. 평소에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사람에게 무슨 힘이 났는지, 혈기 왕성한 아들을 방에 가두고 문가에 못질까지 쾅쾅 해 댔다.
‘씨발, 이거 열어! 문 열라고!’
그전에도 몇 번이나 방에 갇힌 적이 있었던 정윤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말을 쏟아냈다.
‘씨발, 엄마라고 있는 게 맨날 약이나 처먹고. 그럴 거면 그냥 뒈지든가!’
악을 바락바락 쓰는 정윤오의 비명 소리가 막 집 안으로 들어서던 태건의 귀에 꽂혀 들었다.
‘자식이라고 낳아서 해 준 게 뭐가 있어! 맨날 쳐 싸우기만 하고, 물건이나 부수고, 약 먹고 해롱거리고! 아, 씨발! 진짜 내가 죽어야 그만할 거냐고!’
정윤오의 발악에 말없이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단순히 충격을 받은 걸로 끝날 줄 알았던 그 일은, 그녀가 세 시간 후에 욕실에서 목숨을 끊음으로서 결딴이 났다. 기어이 문을 부수고 나온 정윤오는 생생하게 그 모습을 목격했다.
“누가 보면 참 효자인 줄 알았겠지. 씨발, 양아치도 이런 양아치가 없는데.”
몇 년간 아무도 모르고 있던 비밀이 튀어나오자, 정윤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차태건.”
“죄책감에 정신 못 차리는 거 보고 너도 인간이다 싶었어. 더 엇나가는 거 보면서도, 제정신이면 지 엄마 죽음에 일조하고 버틸 수 없지,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그러지 말걸 그랬다. 그냥 그때 죽여 버릴 걸. 정은수 창고 가두고 지랄했을 때, 더는 말 못하게 입이라도 조져 놓을걸.”
태건도 알고 있었다. 모친의 죽음에 정윤오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주 조금뿐이라는 것을. 원래도 그녀는 우울증이 심각했었고, 심각한 정서적 학대를 정윤오에게 가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윤오가 이런 인간이 된 것을 합리화할 순 없었다. 똑같이 어려워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제 와서 그딴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하얗게 질린 낯으로도 정윤오는 비소를 머금었다.
“그냥. 너 존나 싫다고. 패 죽이고 싶다고.”
정윤오는 모른다. 설은하에게 약혼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에게는 그저 유희의 수단이었던 그것이, 그녀에게는 인생의 유일한 기회이자 희망이었다는 것을.
“건아.”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태건의 뒤로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돌아본 곳에 정은수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달고 서 있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어디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건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얘기하기로 했다. 그래야 제 잘못도 정리할 수 있으니까.
“정윤오가 설은하한테 내기를 제안했대. 나랑 한 번 자면 약혼해 주겠다고.”
“뭐?”
“난 너 유학 보내 주는 조건으로, 설은하 꼬셔서 약혼식 깨 주기로 했고.”
“그게 무슨.”
“마지막 선물로 그거 하나 해 주고 싶었거든. 너 자유롭게 살라고.”
“건아.”
“근데 내가……. 씨발, 내가 진짜 미친놈이지.”
다가오려는 정은수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멈칫하는 그 움직임에 정은수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떡하냐. 나 진짜 너희가 질린다.”
그중에서 제일 질리는 건 나고.
결국 놀아난 셈이다. 정윤오라는 미친놈 하나에 은하도 저도 놀아났다. 근데 탓할 수는 없었다. 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핏발 선 태건의 눈이 정윤오에게 향했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네 앞에서 손목이라도 긋고 싶은데, 그렇게 안 해. 설은하 찾아야 하니까. 근데 이제 다신 보지 말자. 네 친구였던 차태건, 죽었다고 생각해.”
“…….”
“네가 죽인 거야.”
떨리는 정윤오의 눈빛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죄로 묶인 발걸음 하나하나가 움푹 가슴을 내리찧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