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고맙다. 어디 가고 싶은지 나라 정해 놔.]
메시지를 확인한 태건의 손에서 전화기가 툭 떨어졌다. 형편없이 갈라진 액정을 바라보며 태건은 잠시 하얘진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고맙다고? 뭐가? 왜?
“흡.”
순간 호흡이 가빠진 태건이 주먹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은하가 공항은 물론 약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왜…….”
혼란에 빠진 태건의 눈빛이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맸다.
“어디에…… 어디에 있어.”
설은하.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태건의 세계가 무너졌다.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란 절망감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 * *
“됐지?”
“어.”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는 정윤오에 은하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시선은 어두워진 창밖으로 향한 채였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나한테 내기 걸고, 차태건한테 내기 걸고. 그래서 너한테 남은 게 뭐야?”
탓하는 투는 아니었다. 진짜 궁금했을 뿐. 담담한 은하의 말에 정윤오는 어깨만 가볍게 들썩였다.
“말했잖아. 존나 심심했다고. 재밌다는 거 말고 다른 이유 있겠어?”
“재미……. 그래, 끝까지 너답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가을장마 시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좀 찝찝하긴 해. 따지고 보면 둘 다 이긴 거잖아. 약혼식도 잘 망가졌지만, 결국 너도 차태건이랑 자긴 했으니까.”
“아니. 차태건이 완벽하게 이겼어.”
“뭐?”
“나 걔 사랑하거든.”
정윤오를 돌아보는 은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미련 없다는 듯 가방을 챙겨 드는 그녀를 향해 정윤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집으로 가?”
“가야지…… 집에.”
내기는 끝났다. 설은하의 완벽한 패배로. 하지만 차태건에게 말한 것처럼 미안하지는 않았다.
“비 온다, 정윤오.”
“…….”
“조심해서 가.”
열없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은하는 먼저 거리로 나섰다. 순식간에 거세진 빗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겨들었다.
은하는 침식했다.
4. 침식 ⑴
‘야, 너 나 좋아하냐?’
‘……어.’
‘씨발. 고맙다?’
빈정거리는 말투, 비웃는 듯 휘어지는 눈가.
‘근데 너 첩년 딸이라며?’
그리고 쐐기를 박는 강력한 한 마디.
‘씹, 별 게 다 들러붙네.’
고등학교 1학년. 3개월을 몰래 간직해 온 짝사랑은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 한편에서 그렇게 끝이 났다.
‘윤오, 가자!’
‘어.’
‘쟤 뭐야?’
‘몰라. 미친년.’
한 가지 다행이라면, 정윤오를 향했던 마음은 그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불쌍해? 불쌍하면 한 번 자 주든가.’
한 가지 불행이 있다면, 그 후로도 정윤오를 마주쳐야 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일곱 살 꼬마 설은하수가 어느 날 갑자기 설은하가 된 이야기.
나이가 들어, 어쩌다 한 번 몸을 섞은 정윤오에게서 제 친구 차태건을 속여 먹자는 제안에 응하게 된 이야기. 그러다 결국, 그 차태건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
클리셰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 * *
“이런 말씀 드리면 팔불출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은하가 얼마나 성실한지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전교 5등을 벗어나 본 적 없고, 보시다시피 외모도 아주 출중하구요. 애가 독해서 자기 관리에 철저하거든요.”
하, 그냥 대충 살걸.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해 대는 강유화를 보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아주 잘 키우셨습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적당히 대꾸하며 미소짓는 남자의 옆에서 정윤오가 삐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얼굴을 보게 된 건, 그가 고등학교 시절 내 고백을 예의 없이 거절한 이후 처음이었다.
법적 아버지이자 생물학적 큰아버지인 설준호가 갑자기 약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봄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새로 알게 된 부동산 투자가가 있는데 그 집의 아들을 한번 만나 보지 않겠냐고. 어울리지 않게 먼저 의견을 구하는 모습이 참 어색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하아, 씨발. 진짜 이러기예요?”
아까부터 계속 인상을 구기고 있던 정윤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짜고짜 던져진 욕설에 모두 움찔했지만, 대놓고 그를 욕하지는 않았다.
여전하네. 저 돼먹지 못한 성격은.
그랬다. 이 자리는 하나의 촌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망나니로 소문난 정윤오와 입양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첩 딸이더라, 하는 소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설은하. 각자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골칫덩어리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겠다는 일종의 덤핑이랄까.
“어른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앉아.”
“됐고. 먼저 갈게요.”
정은수 어디야.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나가는 정윤오를 바라보다 잠시 상념에 빠졌다. 수십 년 저를 키워 준 제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는 저 망나니를 과연 어떤 여자가 컨트롤할 수 있을까.
“저, 은하 양. 나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정윤오가 빠진 점심 식사가 끝나고, 그의 계모라는 여자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오진주. 이름처럼 동글동글한 인상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매서웠다.
“다른 게 아니고, 은하 양에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조곤조곤 제 할 말을 하는 오진주의 입을 바라보며 나는 오랫동안 학습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에는 포기와 순종을 담는.
정윤오와의 첫 재회는 그렇게 빠르게 스쳐 갔다.
* * *
“아들 하나 낳아 달라던데?”
“뭐?”
국수로 늦은 점심 식사를 하는 효주의 입에서 면발이 튀어나왔다.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에 인상을 찌푸리자, 효주가 다급히 휴지로 그것들을 훔치며 재차 내 말을 확인했다.
“그 인간들이 그러디? 너한테 정윤오 애 낳아 달라고??”
“어.”
“와, 완전 미친 것들 아냐? 무슨 씨받이 들여?”
정윤오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까지 같은 곳에 들어온 은하와 효주였다. 그런 두 사람은 경영학과 개망나니 정윤오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수업에 불성실한 태도는 기본에, 일주일에 세 번은 클럽에서 목격되고,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여러 다리를 걸치는 바람에 치정 싸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효주는 어렸을 때 나와 정윤오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알고 있기에 더 흥분하는 것도 있었지만.
“조건은 나쁘지 않던데.”
“야.”
“아들 하나만 낳아 주면 강남에 40평대 아파트 하나 내 이름으로 해 주겠대. 자기 아들이 제대로 인간 구실 못 할 거 같으니까, 손주라도 낳아서 잘 키우고 싶나 봐.”
“지랄.”
“큭.”
가감 없는 효주의 욕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너 행여나 이상한 생각 하지도 마. 정윤오? 아파트? 아드으을?”
으, 미친것들. 어깨를 떨어 가며 효주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 효주의 앞에 좋아하는 단무지를 듬뿍 쌓아 주었다.
* * *
찰싹! 뺨에 달라붙는 마찰열이 이번엔 꽤 거세게 느껴졌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은 탓에 볼 안쪽이 얕게 씹혀 피를 보고 말았다.
“너 때문에 목이 하루 종일 까끌거려 죽겠어! 일부러 그랬지.”
“아니야.”
“아니긴. 목구멍에 가시 찔려 죽어 봐라 이러면서 일부러 안 뺀 거잖아.”
저녁 식사 시간에 나온 생선을 발라 설은진의 접시에 놓아준 사람이 나였다. 이 집안 사람들은 그렇게 대단한 가문도 아니면서, 이런 것 하나조차 제 손으로 못했다.
“아, 진짜 짜증 나!”
“주름 생겨. 인상 쓰지 마.”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강유화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설은진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그래라.”
“조심할게.”
설은진 멍청한 년.
매번 그러면서도 매번 당했다. 한 번이라도 제 손으로 뒤적거려 볼 생각은 없는 거야? 뺨을 맞는 건 아팠지만 소소하게 복수를 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러다 진짜 목구멍이라도 찢어져 주면 좋고.
“그나저나 너 요즘 일찍 들어온다?”
“응?”
“요즘엔 남자 안 만나?”
“남자?”
설은진의 말에 반응한 것은 강유화였다. 평소에는 나에게 관심도 없던 그녀가 정윤오와의 선 자리 이후 부쩍 신경을 썼다.
“엄마, 얘 학교에서 소문 진짜 거지같이 났잖아. 완전 걸레야. 아니다, 자동문이랬나? 암튼.”
그때그때 가볍게 잠자리를 갖긴 했지만, 드러내 놓고 방종하게 다닌 건 아니었다. 소문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내어준 것도 아니고, 나름 내 기준에 맞는 사람들만 만났다. 몸 좋고, 뒤탈 없을 것 같은. 근데 입들은 가벼웠나 보네.
“가진 게 저 몸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가 보지. 계속 그렇게 싸게 굴어. 그러다 보면 정윤오라는 애도 넘어오지 않겠어?”
“네, 그럴게요.”
입가를 환하게 끌어 올리며 웃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강유화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여튼 한마디를 안 지지. 올라가. 꼴 보기 싫어.”
“안녕히 주무세요.”
나에 대해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두 여자를 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하아, 피곤하다.”
다음 날까지 번역 마무리를 해서 넘겨야 할 자료가 있었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은 안경을 챙겨 쓰고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하얀 화면에 커서가 깜빡이고, 머리도 깜빡깜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