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나마 정신을 차린 정윤오를 다시 절망에 빠뜨린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정윤오의 부친 정호승이었다. 봄에 와이프를 떠나보낸 그는 그해 겨울, 정은수의 모친 오진주를 두 번째 부인으로 집에 들였다.
‘저 인간 제정신 아냐. 제정신이면 이럴 수 없어.’
‘제발 그만해. 진정하라고!’
제 아버지를 찢어 죽여 버리겠다며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설치는 정윤오를 보면서도 정호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더 꼭 붙들지 못하는 태건을 못마땅하게 볼 뿐이었다.
‘진정되면 병원으로 다시 보내.’
제 엄마랑 똑같이 약해 빠져서. 돌아서는 정호승이 흘리듯 내뱉는 말에 순간 정윤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그럼 잘난 당신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봐.’
칼을 쥔 정윤오가 손의 방향을 바꿔 제 손목을 그은 건 일 초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말뿐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상처는 그 손상 부위가 아주 깊었고, 그렇게 정윤오는 과다 출혈로 일주일 동안 또 의식 불명에 빠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식을 차린 정윤오는 이번에는 말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제 앞에서 눈물 짓는 정은수를 노려보며 똑똑히 말했다. 꺼져, 라고.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안 꺼져?’
‘윤오야, 내가 어떻게 가…….’
온 얼굴에 눈물이 철철 넘치는 정은수를 정윤오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태건은 혼란스러움과 증오가 가득 찬 그의 눈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래. 그럼 계속 내 옆에 있어. 이제부터 네 인생 내가 조져 줄게.’
그때 어떻게든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놨어야 했던 걸까. 태건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은 또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 * *
“뭐 해.”
“벌써 일어났어?”
“뭐 하냐니까.”
“그냥. 비 구경.”
새벽부터 예고치 않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정윤오는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지랄병이 났기에 이런 날에는 태건도 정은수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번 여행 완전히 망했다, 그지?”
1층 거실에 앉아 무릎을 그러모으고 앉은 정은수가 허탈한 듯 입을 열었다. 얇은 담요 한 장을 어깨에 덮은 그녀의 얼굴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윤오는?”
“조용해.”
언제나 두 사람에게 공정하려고 애썼던 정은수이지만, 그 방향이 은근히 정윤오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태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질투의 감정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태건에게 중요한 건 정은수의 행복이었으므로. 설사 두 사람이 남매 사이로 엮이지 않고, 애정 관계로 발전했다 해도 태건은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괜한 일 했나 봐.”
“어?”
“은하. 이제 가족이 될 사이니까, 친해지면 좋겠다 싶어서 부른 건데.”
가족이 될 사이라.
정은수는 모른다. 저를 보상으로 두고 정윤오와 차태건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 가운데서 애꿎은 설은하는 또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괜히 정윤오가 오버하는 거야. 너 잘못한 거 없어.”
태건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별거 아니다,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이런 입에 발린 것들 말고는.
“응. 고마워.”
어설픈 태건의 위로에 무릎에 뺨을 댄 정은수가 희미하게 미소 지을 그때였다.
“나 먼저 서울 올라갈게.”
2층에서 짐을 챙겨 내려온 정윤오가 무심히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깜짝 놀란 정은수의 고개가 벽에 걸린 시계 쪽으로 돌아갔다. 시계는 겨우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올라간다니.”
“존나 답답해서 못 있겠어. 택시 불렀으니까 알아서들 올라와.”
“정윤오!”
불쑥 현관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정윤오를, 정은수는 다급히 신발을 신고 쫓아 나갔다. 현관문 바로 앞에서 뭐라 뭐라 설득하는 소리가 세찬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기다려. 금방 내려올 테니까.”
다시 정윤오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정은수는 태건을 한번 보더니 얼른 2층으로 올라갔다. 태건은 정은수가 정윤오를 쫓아갈 것임을 짐작했다.
“설은하는 네가 데려다줘. 이 김에 잘 꼬셔보든가.”
약혼을 깨 주는 조건으로 정은수를 태건에게 붙여 주겠다고 한 정윤오의 마음은 알 듯 모를 듯했다. 어차피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거,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 차태건에게 넘기겠다는 건가. 그럴 거면 그냥 넘기지 왜 굳이 제 약혼녀를 꼬시라는 건지.
세상 단순하게 살아가는 태건에게 정윤오는 너무 복잡하고 미스터리했다.
“건아, 도착해서 전화할게.”
정말 5분도 되지 않아 정은수는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여자들은 챙길 게 많아, 짐이 많다더니 정작 손에 들린 것은 작은 핸드백 하나뿐이었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아니, 은하와 둘이 남겨진 태건은 고요해진 집 안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창밖에서는 빗줄기가 끊이지도 않고 계속 내렸다.
“흠,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봐?”
5시쯤 1층으로 내려온 은하는 저와 태건만 남겨졌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흘렸다. 황당할 만도 하지. 명색이 약혼자 가족과 함께 온 여행에 이상한 조합으로 남게 되었으니. 게다가 찝찝한 감정의 찌꺼기를 눈치챈 후였으니 더욱 기가 막힐 법도 했다.
잠깐. 설은하가 이 사실을 알았으니, 약혼은 물 건너간 거 아닐까? 그럼 굳이 얘를 속이거나 꼬시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문득 태건은 이 달갑지 않은 내기를 더 이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머리가 개었다.
“어쨌든 여기 좀 더 있어도 된다는 거지?”
“어?”
“이왕 온 김에 푹 쉬고 싶어서. 멀미 때문에 힘들었는데 바로 또 고생하기도 싫고.”
“아.”
은하가 일어나자마자 서울로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던 태건은 발그스레하게 돌아온 그녀의 혈색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제 진짜 얼굴 안 좋았으니까.
“다시 2층에 올라가기는 귀찮고, 영화나 볼까?”
리모컨을 들고 영화 채널을 검색하는 은하를 보며 태건은 엉거주춤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상 둘이 남게 되니 지금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좀 빌려주라.”
“어?”
어리둥절한 태건의 표정에 은하는 대답 없이 그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이고, 아무렇게나 뒹굴어 다니던 담요를 어깨 위로 끌어 올렸다.
“어제 신경 쓰여서 한숨도 못 잤어. 나도 나지만, 너희도 더럽게 복잡하다.”
“…….”
TV에서는 배경 음악이 빵빵 터지는 히어로물이 방영되고 있었다. 잠을 설쳤다는 게 정말인지 설은하의 눈이 가물거리는 게 보였다.
“비나 좀 그쳤으면 좋겠네. 축축 처지기나 하고, 진짜 별로야…….”
TV 소리가 시끄럽지도 않은지, 태건의 다리를 베고 누운 은하는 금세 잠이 들었다.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줄인 태건의 시선이 불빛이 산란하는 은하의 얼굴 위로 길게 가닿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약혼자 친구의 다리를 베고 누운 이상한 여자.
태건은 은하가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 이 약혼을 못 하겠다고 집에 선포하는 그림을 그려 보았다. 그럼 모든 일이 아주 간단하게 끝날 텐데. 하지만 은하가 그럴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태건은 아주 늦게야 알았다.
* * *
태건이 눈을 떴을 때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제가 잠든 것도 몰랐던 태건은 홀로 남은 거실을 둘러보다 통창 너머 마당에 보이는 은하의 모습에 시선을 멈췄다.
이런 날씨를 두고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고 했던가.
쨍한 햇빛에 보슬비가 보석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단추가 달린 흰 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은하는 맨발로 물웅덩이를 하나하나 밟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간혹 박자에 맞춰 몸을 통통 튀는 걸 보면, 귀에 덮어쓰고 있는 빨간색 헤드폰에서 신나는 노래라도 흐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는 비인데.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놀고 있는 은하가 걱정돼 수건을 챙겨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문득 고개를 든 은하의 눈빛이 줄곧 그녀에게 향해 있던 태건의 눈과 서로 마주쳤다. 순간, 은하의 눈이 사르륵 휘어졌다. 한쪽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하는 그 얼굴에, 태건은 갑자기 가슴 한쪽을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일어났어?”
“뭐 하는 거야?”
“비가 되게 예쁘게 오길래. 좀 맞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온 은하의 종아리는 흙탕물이 튀어 엉망이었다. 은하는 태건이 건네는 수건을 한쪽에 던져 놓고, 그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왜? 뭐?”
“나와 봐. 시원해.”
저를 이끄는 아주 미약한 힘에 태건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웬걸, 태건이 발을 내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심술이라도 부린 듯 빗줄기가 굵어졌다.
“어! 이게 뭐야.”
태건의 팔을 잡고 마당 한가운데로 가던 은하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가 막힌 듯 웃고 있는 그 얼굴에 빗방울이 빠르게 낙하하고, 태건은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빠르게 벗어 내 은하의 머리 위로 둘렀다.
“이제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다.”
“차태건.”
낮게 깔린 은하의 목소리에 태건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촉촉이 젖은 앞머리를 귀에 꽂아 넣으며, 은하가 제 맑은 얼굴에 미소를 걸어 냈다.
“여기서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