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태건은 1층 거실에 앉아 있는 은하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멀미가 좀 난다더니,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입술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 오랜만에 멀리 나와서 놀랐나 봐. 수영하려고?”
“어.”
“여기 오면 루틴인가 보네. 은수 언니랑 정윤오는 먼저 나갔어.”
더위가 일찍 찾아와 준 덕에 이번엔 수영장 개시가 빨랐다. 거실 창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살짝 꺾어야 나타나는 수영장은 길이도 넓고 꽤 깊은 구석이 있어, 운동 겸 헤엄치며 놀기에 적당했다.
“나 아직 준비 운동 다 안 했다고. 야!”
“누가 보면 다이빙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야! 정윤오!”
정은수의 짧은 비명과 함께 풍덩 소리가 건너왔다. 모르긴 몰라도 정윤오가 정은수를 물에 빠뜨린 것 같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던 태건을 은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올려다보았다.
“세 사람 관계 참 재밌다.”
“어?”
“애정인지 애증인지 저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가 끊임없이 흐르고, 넌 그 사이에 끼어서 뭘 맡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진 정확히 모르겠고.”
“함부로 넘겨짚지 마.”
“오, 화났어?”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나간 목소리에 은하가 눈을 둥글게 뜨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는. 못내 불쾌했던 태건이 대충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어져 나오는 은하의 말에 발길을 멈칫했다.
“네가 먼저 말했잖아. 은수 언니 잊고 싶다고. 그 말 진심이긴 하니?”
“……잊을 거야.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어쩌다 나온 말이었지만 태건은 이제 정말 정은수를 제 마음속에서 놓을 생각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기도 했고, 이제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도 동의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형적인 삼각형을 이루고 살 수는 없었다.
은하에게는 미안하지만, 태건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제 살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다 잘될 것이다. 정은수가 유학을 가면, 정윤오도 지랄을 좀 덜 떨면서 살 수 있겠지.
흠, 신음 소리와 함께 뭔가를 생각하던 은하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더 분발할게.”
“뭐?”
“내가 말했잖아. 받기만 하는 스타일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리는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쉬어.”
밖으로 나서는 태건을 은하는 더는 잡지 않았다. 분발하기는 뭘. 안 그래도 양심이 찔려 죽겠는데 선뜻 절 돕겠다고 구는 설은하에 태건은 적응이 안 됐다.
* * *
“은하 속이 많이 안 좋니? 아직 얼굴이 안 좋아.”
“괜찮아요, 언니. 하룻밤 자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분위기 깨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따라온 거야?”
“시간 어렵다는 거 내가 졸라서 온 거야. 넌 그냥 술이나 마셔.”
투덜대는 정윤오의 말을 황급히 막으려 정은수가 얼른 와인을 따라 주었다.
오후 늦게까지 수영을 하다가 별관에 자리한 선룸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겸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는 중이었다. 항상 하던 대로 관리인에게 부탁해 스테이크와 와인에 곁들일 만한 안주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지 은하는 몇 시간째 생수만 겨우 몇 모금 들이켜고 있었다.
안에 쌀이 있던가. 죽이라도 끓여야 하나, 태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은하는 지금 하는 일 괜찮아? 번역한다고 들었는데.”
“네. 재밌어요. 다행히 일이 꾸준히 들어와서 먹고 살 만하구요.”
“부럽다.”
“부럽긴요. 언닌 전시회 준비 중이잖아요.”
“아, 그거. 그래, 그렇지.”
서양화를 전공하는 정은수가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는 제 엄마의 강요에 못 이긴 것이었다. 교수 타이틀이라도 있어야 불륜녀 딸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괜찮은 집에 시집갈 수 있다고, 제 말이라면 거역 못 하는 딸을 끊임없이 닦달한 결과였다.
그나마 교수의 눈에 잘 들어 주목받는 신인 작가전 끄트머리에 작품을 들이밀게 되었지만, 정은수의 꿈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순둥순둥한 듯 보여도 마음속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꿈은 여행가였다.
“사실 난 그림 그리기 싫었거든.”
“그래요?”
“응. 취미로 그릴 때나 좋았지. 예술입네, 뭐네 하면서 그리기 시작하니까 너무 버겁더라고.”
“몰랐네요.”
“난…… 그냥 막 떠돌아다니고 싶었어. 발길 닿는 대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자유롭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고, 그렇게.”
정은수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게 굴어도 제 마음속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설은하에게 이런 얘기를 하다니.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는 말투로 변한 걸 보니, 아무래도 주량인 와인 세 잔을 넘긴 모양이었다.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정은수를 정윤오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 말 듣지 않고…….”
“내가 네 앞길 막았냐?”
주절주절 읊어 대던 정은수의 넋두리가 정윤오의 싸늘한 한마디로 뚝 잘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정윤오에게 옮겨졌다.
“왜. 나 때문에 너 유학도 못 간다는 말까지 다 하지.”
“윤오야.”
“그딴 말로 부르지 말라고, 씨발.”
정은수의 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정윤오였다. 한때는 열렬히 계획을 토해 내는 정은수의 말에 슬며시 제 존재를 끼워 넣을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정윤오도 변했고, 그는 정은수가 제 허락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제가 하고 있는 짓을 꼬집히면 아주 기분 나빠 했다.
“본처 아들놈이 존나 개새끼라서, 불륜녀 딸내미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고 아주 광고를 해. 그러게 네 엄마한테 꼬리 좀 적당히 치라고 하지 그랬어. 왜 하필 이 집에 들어와서 이 지랄을…….”
“그만해, 정윤오.”
점점 과열되는 정윤오를 막은 건 설은하였다.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린 정윤오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왜, 같은 첩년 딸이라서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냐?”
“정윤…….”
촥! 당황한 정은수가 뭐라 말리기도 전, 은하가 제 앞에 놓여 있던 와인을 그대로 정윤오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그가 뚝뚝 흐르는 와인을 훔치는 사이, 은하가 빈 잔에 생수를 가득 부었다.
“정신 차려. 그나마 네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 다 떠나기 전에.”
와인 잔을 테이블에 놓은 은하는 정윤오에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씨발! 욕을 짓씹으며 손으로 잔을 내친 정윤오의 손등에 생채기가 생겼다.
“윤오야!”
“내가 저거랑 같이 오기 싫다고 했지.”
싸늘하게 한마디 남긴 정윤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정은수의 모습에 혼란스러움이 번졌다.
“은하야, 미안해. 윤오가 지금…….”
“괜찮아요. 그보다 먼저 가 보세요. 쟤 다친 거 같은데.”
“어, 알았어. 건아.”
자리를 떠나기 전 정은수는 태건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구급상자는 2층 거실에 있을 거야.”
“그래. 먼저 들어갈게.”
다급히 본관으로 들어가는 정은수를 마지막으로 선룸에는 고요함이 들어찼다. 뚝뚝, 테이블 위에 흐른 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항상 이런 식이야?”
“뭐가.”
“너 말이야.”
태건을 올려다보는 은하의 시선이 몹시 건조했다.
“아깐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
“너, 아무것도 아니네.”
불쌍하다, 차태건. 은하의 마지막 말에 태건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짚은 그것은 그동안 태건이 모른 척하고 있었던, 아니 세 사람이 모두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 * *
‘비켜, 차태건.’
‘진정해.’
‘씨발, 비키라고!’
태건과 정윤오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해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남편의 타고난 바람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정윤오의 모친은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 욕실 창을 활짝 열어 놓고 제 손목을 그었다. 정윤오는 옷을 홀딱 벗은 채 비루하게 죽음을 맞은 제 엄마의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고, 그 즉시 기절했다 깨어난 이후 3개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정윤오의 곁을 지킨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태건과 정은수였다. 태건은 정윤오가 짐승처럼 악을 쓰며 발광을 할 때 혀를 물지 못하게 잡아 주었고, 정은수는 지쳐 쓰러져 있는 정윤오의 귓가에 끊임없이 뭔가를 말해 주었다. 세 사람의 기이한 삼각형은 이 기간 동안에 확연히 굳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