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2화 (2/58)

2화.

“뭔 소리야.”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꼭 이런 거 하다가 진심이 돼서 사랑하니 어쩌니, 뭐 그러잖아.”

“되면 되는 거고. 약혼녀 뺏길까 봐 겁나?”

“퍽이나. 하긴, 일평생 정은수 해바라기인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차태건, 난 너 믿는다. 우리 인생 그렇게 재미없게 살지 말자, 어?”

“꺼져. 약속이나 지켜.”

“개새끼.”

결국 태건은 정윤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입이 썼지만, 정은수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건아!”

운전석 창가로 뛰어든 정은수가 창문에 걸쳐진 태건의 팔을 붙잡고 환하게 웃었다. 정은수의 손은 언제나 그렇듯 온기가 가득했다.

“빨리 타. 존나 배고파.”

“하여튼 넌 입 좀.”

정윤오를 향해 투덜거리던 정은수가 뒷좌석에 오르고, 시동이 걸린 검은색 스포츠카가 유려하게 거리를 달렸다. 다시 라디오를 작동시킨 태건은 차창에 팔을 괴고 무심하게 음악을 흘려들었다.

평범한 날이었다.

정윤오의 차를 몰고, 정은수를 데리러 가 함께 밥을 먹으러 간 날. 기분은 그저 그렇지만, 첫사랑의 미소는 여전히 반짝거리던, 보통의 하루.

그 하루로 인해 태건의 인생은 바뀌었다.

1. 착수

‘세운로펌이라고 2년 전에 아버지가 새로 거래 튼 데야. 거기 장녀.’

설은하.

공식적으로는 일곱 살 때 설준호 대표 내외에게 입양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설 대표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는 소문이 도는, 정윤오의 예비 약혼녀.

‘몇 번 집안사람들끼리 만났는데 집에서도 겉도는 거 빤히 보이고, 과 인간들 얘기 들어 보면 인성도 뭐.’

그녀에 대해 정윤오에게서 들은 몇 개 안 되는 정보는 죄다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웬만한 일에는 콧방귀나 뀌고 말았던 정윤오가 이 정도로 질색하는 걸 보면, 제 예비 약혼녀가 싫기는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네 쪽에서 눈치껏 안 나오는 게 예의 아닌가?”

“글쎄?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서.”

오늘은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정윤오와 설은하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석 달 뒤에 있을 약혼식을 위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양가 부모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약혼에 긍정적인 설은하는 거부할 의사가 없었고, 요즘 가뜩이나 부친과 갈등이 많았던 정윤오는 괜히 큰소리를 내기가 싫어 마지못해 응했다. 아, 물론 오늘은 태건으로 하여금 그녀를 마주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걔 꼬시는 거 별로 안 어렵다던데? 애가 애정 결핍인가. 그렇게 안 생겨서는 엄청 치댄다더라고. 하긴, 오죽하면 별명이 자동문이겠어.’

정윤오의 계획은 단순했다. 식사 자리에서 설은하에게 최대한 모욕을 준 자신이 자리를 뜨면, 우연을 가장한 차태건이 등장해 설은하를 위로해 주며 얼굴을 튼다. 일단 얼굴을 트고 연락처만 주고받으면 그 뒷일은 알아서 된다는 듯,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는 계획이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돼?”

“말해.”

“네 엄마, 창녀였냐?”

두 사람의 테이블 옆에서 조용히 수저를 놀리던 태건이 멈칫했다. 하여튼 저 미친 새끼. 저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설은하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그랬으면?”

“씹, 그럼 더 찝찝하잖아. 애초에 설 대표가 친부가 맞긴 해? 아, 유전자 검사는 했겠구나.”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며 혼자 문답을 하는 정윤오의 얼굴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악의 없이 멀끔하기만 했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니?”

“얼마든지.”

“네 엄마 자살하셨다며. 느낌 어땠어?”

끼익. 정윤오의 나이프가 접시를 길게 긁었다. 순간 무너진 그의 표정을 보는 설은하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너 말하는 거 보면 가끔 사이코패스 같아서. 한번 느껴 보라고. 공감 능력 굉장히 떨어져.”

“하, 씨발년.”

“피차 어른들 뜻 거역 못 하잖아. 서로 피곤하게 굴지 말고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자.”

“너도 알지? 너 존나 밥맛 떨어지는 거.”

“밥 생각 없으면 먼저 일어나든가.”

냅킨을 테이블에 던져 놓은 정윤오가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누군가를 향해 눈짓했다. 두 사람이 잘 만나고 있는지 지켜보게끔 세운 쪽에서 붙여 놓은 사람이었다.

“봤죠? 얘가 먼저 나 깐 거. 오늘은 내 잘못 없습니다.”

휴대폰을 챙겨 든 정윤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정윤오를 지켜보던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했다.

“대표님입니다.”

메마른 표정으로 보던 설은하는 건네받은 전화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떨어져 앉은 태건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만큼 목소리가 아주 컸다.

밖에서 낳아 왔다고 해도 어쨌든 자기 자식이 아닌가. 열없는 그녀의 얼굴에 이런 일이 아주 일상적이라는 것을 태건은 알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극히 건조한 대답을 끝으로 설은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건넸다. 이로써 볼일이 끝난 건지 남자는 그런 그녀를 두고 지체 없이 돌아섰다.

설은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디저트로 나오는 레몬 셔벗에 커피까지 모두 챙겨 먹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 그것이 태건에게 박힌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 * *

화려한 꽃에는 벌레가 많이 꼬인다. 이 말은 설은하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가늠하다 어느 한쪽으로 오랫동안 걸었다.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플 텐데도,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음악을 듣지도, 산책을 하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지도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며 걷는 그녀를 태건도 조용히 뒤따랐다.

목적지도 없이 걷는 것 같았던 그녀는 어느 작은 건물 지하에 있는 바로 사라졌다. 안까지 따라 들어가기엔 좀 그랬던지라, 태건은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인지, 정윤오가 삼십 분 전부터 계속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하아. 이 새끼는 내가 무슨 전설의 제비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적당히 답장을 보낸 태건이 새로운 커피를 주문한 후 다시 테이블에 앉을 때였다.

“아악!”

“이 씨발년이!”

통창 밖으로 보이는 소란스러운 광경에 태건의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그렇게 기다리던 설은하가 한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머리채가 잡힌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한 대 맞은 모양인지 왼쪽 뺨이 부어오른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야, 이년아, 네가 먼저 꼬리 쳤잖아. 근데 어디서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고 있어.”

“하.”

피식 웃음을 흘리는 설은하의 모습에 남자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웃어?”

“양아치 새끼.”

“이게 진짜!”

솥뚜껑 같은 남자의 손이 다시 한번 은하의 얼굴로 날아들려던 그때였다.

“너 뭐야, 새끼야?”

찰나의 순간, 남자의 손을 막고 선 태건과 머리채가 잡혀 삐뚤어진 은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도와줘?”

“…….”

“도움 필요하냐고.”

남자도 덩치가 컸지만, 키가 190센티미터를 넘는 전직 유도 선수 출신의 태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태건에게 붙들려 벌벌 떨리는 남자의 손과, 그런 그를 붙잡은 태건의 두꺼운 어깨, 날카로운 무쌍의 눈. 모든 것을 찬찬히 뜯어보던 은하의 입가에 진한 호선이 그려졌다.

“어, 도와줘.”

남자를 떼어 놓는 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엎어 치기 한판이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태건이 의도하지 않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렇게 소란스러운 듯 소란스럽지 않게 시작되었다.

* * *

“나 먼저 씻을게.”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은하는 명함을 한 장 꺼내 던져 주었다. 고소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하지만 피차 쌍방 과실이니 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설명도 친히 곁들였다.

능숙하게 제 모습을 추스른 은하는 멀뚱히 서 있는 태건에게 저를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근처에 있는 모텔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어지는 동선에 태건도 얼떨결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애정 결핍이라더니.”

진짜 쉽네.

태건은 그리 몸이 동하지 않았다. 마음이 없는데 몸부터 섞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음을 준 사람이 정은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동정이었고, 제 동정을 어쩌다 만난 여자에게 적선하듯 줄 마음은 없었다.

“안 씻어?”

느슨하게 가운을 맨 설은하가 반쯤 말린 머리를 타월로 마저 말리며 밖으로 나왔다. 화장을 진하게 한 줄 몰랐었는데, 다 씻고 나온 얼굴은 아주 말갰다. 왼쪽 눈가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까만 점까지 콕 박혀 있었다.

“아, 혹시 여자 친구 있어? 샴푸 냄새 나면 안 되겠구나. 그럼 그냥 하고.”

화장대에 수건을 던져 놓은 설은하가 태건의 목을 감고 턱에 제 입술을 붙여 왔다. 순식간에 달큼한 체향이 훅 끼쳐 왔지만, 태건은 그런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아 침대에 내려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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