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40)화 (140/140)

140화

황제에 대한 일을 모두 마무리한 카이스는 마지막으로 클로디안과 독대했다.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탓에 클로디안은 무척이나 수척한 모습이었다.

늘 웃음기가 어려 있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가를 바꾸지 않고 내버려 둔 건 널 용서해서가 아니다.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함이지.”

황가를 바꾸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 체계는 물론 국가의 기조가 달라지는 것이라 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정세 변화는 대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터.

한 달 동안 수습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 말은 곧 황가를 유지하는 것이 아기오의 뜻이란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클로디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그는 데이먼 사건 이후부터 카이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사실 카이스는 클로디안을 마주할 때마다 살의가 들끓었다.

하지만 아기오가 허락지 않은 생명에 손을 댈 수는 없는 터라 분노를 꾹꾹 내리 눌렀다.

이제야 겨우 에이바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신벌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카이스는 전할 말만 빠르게 전하고 일어날 생각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황가의 저주는 풀릴 것이다.”

클로디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녹안이 크게 벌어졌다.

“황가를 용서해서가 아니다. 선조가 지은 죄로 고통을 당해야 할 후손과 그 저주로 인해 희생될 상대가 가여워서 내린 결정이지.”

아기오가 황가의 저주를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카이스는 모든 결정을 에이바에게 맡겼다.

이건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클로디안의 녹안이 잘게 떨렸다.

“다만 너는 데이먼과 손잡고 에이바를 죽이려 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희망으로 차올랐던 클로디안의 얼굴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너는 평생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

크게 뜨인 녹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차마 살려 달라 빌지도 못하고 온몸으로 충격과 슬픔을 참아내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카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앞으로 아카르트 제국은 에칼레시아 대륙에서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다. 속죄하며 신의 자비를 구해라.”

그러면 언젠가는 용서해 주실 거다. 아기오님은 자비로우시니.

그러나 카이스는 뒷말을 전하지 않았다.

“이건 에이바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에이바가 제게 무언가를 보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클로디안이 당황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걸 먹으면 과거 기억을 볼 수 있을 거다.”

“……과거 기억이요?”

“이 세계는 두 번이나 시간이 되돌아갔었지.”

“……?”

“모두 에이바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죽였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클로디안이 혼란스러워했다.

“이걸 사용해 보면 알게 될 거다.”

카이스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잠시만요.”

인사도 없이 떠나려는 그를 클로디안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성가시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카이스 앞에 클로디안이 무릎을 꿇었다.

“카이스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고작 말 한마디로 황가와 제가 저지른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떨군 클로디안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로웨나가 에이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클로디안은 자신이 선조와 똑같은 죄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아마 황가의 상황이 급박하지 않았다면 몇 날 며칠이고 방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널 용서할 수가 없다. 그건 에이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이스는 그 말만 남기고 빠르게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클로디안은 그대로 엎드린 채 숨죽여 울었다.

* * *

카이스가 황가 일을 처리할 동안 나는 내 주변을 정리했다.

카밀라와 벨라를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사업 관련 일들도 정리했다.

내 나름대로의 작별 선물을 전했지만 벨라는 그것이 작별 선물인지는 몰랐다.

내가 신수라는 것과 이 세계를 떠날 거란 사실은 카밀라에게만 알렸기 때문이었다.

카밀라는 내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지 말라고 펑펑 울었다.

나도 결국 눈물이 터져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가까스로 진정한 카밀라는 한 달의 시간이 너무 짧다며 우리 집에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와 백작저 식구들과는 파티를 열어 마지막 추억을 만들었다.

한 달 동안 아버지와는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내게 정말 가족이었기에 이별이 쉽지 않았다.

자꾸 눈물이 나서 숨기는 데 힘이 들 정도였다.

나는 틈만 나면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의 온기를 새기고 또 새겼다. 잊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애런이었다.

미리 연락하지 않고 방문했음에도 공작저 집사는 나를 반겨주었다.

“도련님께 말씀 올렸으니 금방 내려오실 겁니다.”

집사는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준 뒤 다과를 준비하러 나갔다.

갑자기 찾아온 터라 오래 기다릴 각오도 했는데 애런은 금방 내려왔다.

다급하게 내려온 것인지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문을 열어놓고도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 나도 애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터라 쉬이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애써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며 먼저 말을 건넸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아니. 괜찮아.”

애런은 그제야 천천히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데이먼을 처리한 날 내가 신술로 모두를 치유했기에 그의 몸은 멀쩡할 터였다.

그럼에도 물은 건 그가 데이먼 사건 때 입은 부상을 이유로 들어 두문불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네 덕분에.”

나지막한 대답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집사가 다과를 가지고 들어온 덕분에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따뜻한 걸 마시자 들쭉날쭉한 감정도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애런은 차는 마시지 않고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나 조금 있으면 떠나.”

애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떠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알잖아.”

애런은 내가 에이바로 변했던 모습을 보았다.

거기다 카이스와 가디언들의 반응을 통해 내가 신수이며 대공의 반려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역시나 애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공 전하도 함께 가시는 거야?”

“응.”

“어디로 가는데?”

“천계로 돌아갈 생각이야.”

다른 세계에 관해서는 말해줄 수 없으니 카밀라 때처럼 천계를 언급한 것이었다.

“……꼭 돌아가야 해? 대공 전하는 대륙의 수호자시잖아.”

“카이스도 나도 너무 지쳐서. 이곳에서 아픈 일이 많았잖아.”

애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동안 데이먼과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백작님께서 슬퍼하실 거야.”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수런거렸지만 아기오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가다듬었다.

“……나도 슬플 거야. 우린 어릴 적부터 함께였잖아.”

애런의 둥근 눈매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안 가면 안 돼? 친구마저 잃고 싶지 않아.”

간절한 눈빛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타까워서도, 헤어짐이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온전히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용서할 수도 없는 우리 관계가 조금은 서글펐다.

“애런, 나는 네가 아는 로웨나가 아니야. 내가 로웨나가 된 건 18살, 봄의 연회 때부터거든.”

지금 회차만 따지면 애런과 보낸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로웨나의 몸을 잠시 빌렸어. 내 육신을 다시 소생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거든.”

“그게 무슨…….”

“그러니 난 네 소꿉친구라 할 수 없어.”

혼란으로 흔들리던 애런의 눈동자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깊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내가 말한 시점부터 내 성격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럼, 로웨나는?”

“돌아오게 될 거야. 그러려면 내가 떠나야 해.”

그 이유 때문에 떠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말하면 좀 더 납득하기 쉽겠지.

“그동안 고마웠어. 친구로서 나를 지켜줘서.”

지난 회차의 너는 날 죽였지만 이번 회차는 너는 목숨 걸고 날 지켰지.

그 간극이 너무 커서 나도 혼란스럽지만 그렇다고 네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애런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지 연거푸 마른세수만 했다.

“이건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손바닥만 한 상자를 내밀자 애런이 물끄러미 상자를 응시했다.

메마른 얼굴 위로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갔다.

상자를 가져가 조심스럽게 열어 본 애런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어의 눈물이야. 이걸로 과거 기억을 볼 수 있어.”

“이걸 왜?”

“이 세계는 두 번 시간이 되돌려졌어. 모두 내가 죽었기 때문이지.”

“…….”

“지워진 시간이 궁금하면 사용해 봐.”

원래 인어의 눈물은 지정한 하루만 볼 수 있고, 지워진 시간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애런에게 건넨 것과 카이스를 통해 클로디안에게 전달된 것은 한 회차분의 기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아기오가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나는 네가 과거의 기억을 봐주면 좋겠어.”

그래야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너도 알게 될 거 아니야.

내가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의 죽음이, 그들의 배신이 더 이상 나만 아는 고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잘 지내.”

내가 전할 말은 다 전했기에 자리에 일어섰다.

“자, 잠깐!”

문으로 걸어가는 나를 애런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는 나를 붙잡아 놓고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부드럽게 손을 떼어내자 애런이 길 잃은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푹 고개를 떨군 애런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 정리를 끝낸 나는 카이스 그리고 가디언들과 함께 대륙 정화 작업에 나섰다.

이건 아기오가 부탁한 것이었다.

카이스와 함께 보내주는 대가라나 뭐라나.

데이먼이 워낙 많은 땅을 오염시켜 놓은 덕분에 정화 작업은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 * *

마침내 모든 작업을 마치고 아기오와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에이바의 모습으로 카이스와 함께 대공저 정원에 섰다.

“준비됐어요?”

“긴장은 그대가 한 것 같은데?”

“티 나요?”

“엄청.”

카이스가 옅게 웃었다.

늘 바라왔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쪽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어 두렵기도 했다.

나는 폭주 기관차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달래려 심호흡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함께 있잖아.”

카이스가 내 손을 강하게 잡아왔다. 그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띠링!

그때 오랜만에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끔찍할 정도로 지긋지긋했던 알림음인데 지금은 반갑게 들렸다.

『최수현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소통했던 거군.”

“어? 카이스도 보여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오가 그도 볼 수 있게 해준 모양이었다.

흥미롭게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는 카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 볼까요?”

카이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메시지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며 우리를 휘감았다.

더는 아프지 않기를. 함께 내딛는 길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아기오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완(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