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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39)화 (139/140)

139화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황제 폐하 몰래 이곳까지 모셨는데 제가 농을 할 리가요.”

“내 상사화의 대상이 로웨나라는 걸 알자마자 그녀를 제물로 바치라는데 내가 어떻게 자네를 믿을 수 있겠나.”

“저도 놀랐습니다. 판타시아 궁으로 모셔야 할 분이 케인 영애라서요.”

데이먼이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제가 왜 이리 급하게 비밀 서고로 모셨겠습니까? 전하의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고통스러우실 테니 걱정이 되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기름칠 잘된 혀를 굴리며 클로디안을 살살 달래었다.

“전하의 첫사랑 상대가 하필 대공의 반려를 살릴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데이먼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클로디안을 계속 설득했다.

“대공의 반려를 되살리면 신도 황가를 용서해 주실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저주가 풀린 황가의 미래를요.”

찰나 클로디안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를 놓치지 않은 데이먼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가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테고요.”

데이먼은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를 살린다 한들 진정 행복할 수 있겠느냐며 클로디안의 죄책감과 불안을 자극했다.

“사랑은 또 찾아옵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이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막 움튼 마음이니 극복하는데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클로디안을 살살 꼬드겼다.

“판타시아 궁이 사라진다면 자네도 곤란해질 텐데.”

그러나 넘어갈 듯하던 클로디안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꽤나 예리한 지적임에도 데이먼은 당황하지 않았다.

“저도 대공의 반려를 죽인 공범이지 않습니까? 신의 용서를 받게 되면 폴루티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답니다.”

여유롭게 웃은 데이먼은 클로디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클로디안은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무거운 저주를 짊어져야 할 후대를 외면하지 못했다.

또한 이후로도 계속 희생될 수많은 제물도 모른 척하지 못했다.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이깟 마음은 금방 잊힐 거라고, 사랑은 언제고 다시 찾아올 거라 스스로를 속이면서.

나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클로디안은 내 연인이기보다는 황태자이길 선택했다.

클로디안에 대한 마음이 사랑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아픈 걸까.

그를 신뢰했기 때문일까? 함께 한 시간 동안 쌓인 정 때문인 걸까?

뭐가 됐든 아팠다. 정말 많이.

클로디안은 이번 회차에서도 나를 죽이려 했다. 제 연인을 위해서.

주술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이었음에도 진심이라 믿은 그는 거침이 없었다.

2회차 때 내게 품은 애정이 진심이었음에도 날 버렸으면서 말이다.

갑자기 이 모든 게 너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한참 동안 실소를 흘렸다.

만약 내가 기억을 찾지 못했다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카이스의 사랑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기에 의연할 수 있었다.

다만 클로디안에 대한 분노만큼은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내 감정에 반응한 것인지 눈앞에 흘러가던 장면들이 파르르 떨며 멈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이 분할되더니 똑같은 장면이 양쪽으로 나타났다.

아니, 똑같진 않았다.

왼쪽에는 애런이, 오른쪽에는 클로디안이 제단 앞에 서 있었으니까.

마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듯 정지되었던 환영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려는 건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며 화면에 집중했다.

“아아악!”

제단 위에서 암흑에 삼켜진 순간 내 몸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봉인되어 있던 각인이 심장 위로 떠올랐다.

날개 모양의 각인이 번쩍하고 빛난 순간.

출입문이 산산이 부서지며 한 사내가 달려왔다.

“안 돼!”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온 이는 카이스였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경악, 초조와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들렸던 절규가 내내 가슴에 맺혔었는데 카이스여서 그랬던 거였어.

‘나만 아픈 줄 알았는데. 당신도 나처럼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있었구나.’

칼에 베인 것처럼 심장이 너무 아파 왔다.

카이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에게 가고 싶어.’

나를 둘러싸고 있던 환영이 갑자기 조각조각 부서지더니 이내 환한 빛에 휩싸였다.

눈을 감았다 뜨자 다시금 아기오가 보였다.

“궁금증은 다 풀렸느냐?”

“네.”

아기오가 애틋하게 바라보며 내 손을 도닥였다.

내가 감정을 가라앉힐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준 아기오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그는 후련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했다.

* * *

나는 꿈에서 깨자마자 신술을 이용해 대공저로 이동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카이스가 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깨어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카이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놀란 듯 굳어 있던 카이스가 나를 마주 안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

제단 앞에서 절규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토닥토닥.

카이스가 다정하게 나를 다독였다.

그의 온기와 애정 어린 손길에 마음이 충만해졌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

“그대가 돌아온 게 꿈만 같아서 잠이 안 오더라고.”

표정은 담담했지만 내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엔 옅은 떨림이 묻어났다.

그제야 그가 잠들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이 혹여 꿈은 아닌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며 얼굴을 기대었다.

“꿈 아니에요. 나는 돌아왔고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말없이 내 온기를 느끼던 카이스의 얼굴에 서서히 안도와 기쁨이 차올랐다.

“그대는 왜 잠들지 못했나?”

“아기오님을 만나고 왔어요.”

맞닿은 몸으로 그의 긴장이 느껴져 손을 뻗어 토닥였다.

“안심해요. 당신과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작게 숨을 토해낸 카이스가 나를 훌쩍 안아들고는 침대로 향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그의 품에 편안히 기댄 나는 아기오와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애런과 클로디안에 관한 일도.

카이스는 그들의 배신에 조용히 분노했지만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죽던 순간 카이스가 달려왔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매번 늦었군. 반려로서 실격이야.”

죄책감 어린 음성이 무거웠다.

“결국은 구했잖아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이제는 그만 아파했으면 좋겠는데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은 도통 밝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다보면 카이스도 나도 편안해지겠지?

먼 훗날에는 담담하게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우리 행복해져요. 과거의 고통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카이스를 끌어안자 그가 마주 안으며 몸을 기대었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듯 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아기오님께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드려 봤어?”

카이스가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아기오는 이 세계를 떠나겠다는 나와 카이스의 결정에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다만 카이스는 신의 사자라 조율할 문제가 많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낯선 세계라 여러 모로 힘들 거예요.”

“괜찮아. 그대를 잃었던 시간에 비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고마워요. 힘든 결정을 내려줘서.”

“그대가 견딘 고통에 비할까.”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카이스의 눈빛이 애틋하게 젖어 들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야.”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둠을 삼킬 듯 타오르는 금안을 마주하자 덫에 걸린 짐승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느릿하게 입가를 배회하는 손길에 숨조차 쉬이 내뱉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온 그가 사냥감의 퇴로를 막듯 등을 감싸더니 이내 얼어붙은 입술 위로 덮쳐왔다.

달래듯 부드럽게 훑던 입술은 점차 조급함을 드러냈다.

화인을 찍듯 여린 살갗 위로 새겨지는 열기에 호흡이 가빠져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숨을 틔운 입술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격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오래 참아왔던 애정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애정에 흠뻑 취해 혼곤해질 때쯤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사랑해.”

화답해 주고 싶었으나 내 말은 그대로 그에게 삼켜졌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우리를 축복하듯 머리 위로 새벽빛이 촘촘히 내려앉았다.

* * *

아기오가 마지막 메시지에 3일을 제시했던 건 내게 고민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결정을 내린 시점에 그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대신 아기오는 우리에게 한 달의 시간을 추가로 주었다.

차원의 문이 그때 열리기도 했고 떠나기 전 정리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선 황가의 일부터 처리했다.

카이스에 관한 금제가 풀린 덕분에 그가 황가를 치죄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100년 전 황가가 저질렀던 죄뿐만 아니라 현 황제가 저지른 죄까지 낱낱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황가의 저주가 알려진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아니, 숨겨줄 수도 있었으나 카이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의 사자인 카이스의 뜻을 따랐고, 황제 또한 권능을 모두 찾은 카이스에 맞서지 못했다.

황가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비난의 여론은 점점 더 거세졌다.

결국 황제는 요수와 손잡고 폴루티아 확대에 협력한 죄 그리고 노예와 죄수들을 제물로 사용한 죄로 처형이 결정되었다.

판타시아 궁은 카이스에 의해 소멸되었고 그곳에 있던 황제의 정부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클로디안이 황위를 이어받긴 했지만 황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라 황권을 바로 세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했다.

카이스가 클로디안을 만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가 용서를 빌러 온다고 해도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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