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럼, 제가 두 번이나 회귀할 동안 데이먼을 그냥 두셨던 이유는요?”
“카이스도 너도 직접 데이먼을 처리하고 싶을 거라 생각했다.”
“1회차 때 처리하게 해주실 수는 없으셨어요? 카이스도 1회차 때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요.”
불쑥 원망이 솟아올랐다.
왜 굳이 3회차까지 치러야 했을까. 왜 카이스는 3회차가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을까.
기억을 찾고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세계의 균형과 인과율 때문에 내가 직접 인간계에 개입할 수는 없었단다. 그래서 네 영혼만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내 육신을 되살리려면 다시 태어나야 했는데 데이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잠시 다른 세계로 보냈던 것이라고.
“너를 다른 세계로 보낼 때도 그랬지만 다시 데리고 올 때도 많은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래서 시스템이라는 형식으로밖에 대화할 수 없었고 내게 신력이며 권능도 부여해줄 수도 없었다고.
게다가 내가 다른 세계에서 환생을 한 탓에 이 세계에서는 이물질로 여겨져 이 세계에 붙들어 놓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단다.
그 점을 고려해 이 세계의 인물인 로웨나에게 빙의시켰음에도 인과율의 제약이 거셌다며 아기오가 탄식을 흘렸다.
“퀘스트 조건에 호감도를 내건 것도 그 이유 때문이란다. 네가 이곳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수록 이 세계가 널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날의 고생이 떠올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인과율의 제약이 줄어들어야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거든.”
“그러다 제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네가 메인 퀘스트를 성공하면 봉인된 기억을 풀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아기오가 슬그머니 내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카이스와 내가 반려 각인을 맺었다는 점을 믿고 실행한 일이겠지만 내가 죽지 않았다면 분명 곤란한 일이 생겼을 것이다.
‘에휴, 다 끝난 일인데 이제와 따져봐야 뭐하겠나.’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불만을 애써 삼켰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데이먼은 절 어떻게 알아본 거죠?”
“너는 내 가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를 알아본 모양이더구나.”
“가호요?”
“시스템. 그것으로부터 네가 보호받고 있지 않았니. 아마 시스템창을 사용할 때 가호가 더욱 강해졌을 거야.”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데이먼의 요력이 강한 터라 나와의 접촉으로 알아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궁금했겠군요. 왜 일개 인간에게서 신의 가호가 느껴지는 것인지.”
아기오에 대해 비틀어진 애정을 가지고 있는 데이먼이라면 일개 인간이 그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게 참을 수 없었겠지.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어떻게든 빼앗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게 카이스를 투영했을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나를 죽인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네가 두 번이나 죽고 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아, 그래서 3회차에 게임 체계가 바뀐 것인가?
“마침 힘도 돌아왔고, 너도 더는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어 선택의 여지가 넓어졌거든.”
“카밀라가 미래를 아는 것도 아기오님께서 하신 일인가요?”
“그래. 더는 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단다. 퀘스트 성공을 방해할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어.”
역시 카밀라가 ‘그녀’였던 건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입 안이 씁쓸했다.
“알고 싶은 게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회차에 애런에게 배신당하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궁금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괴로울 게다. 그래도 괜찮겠니?”
“네. 보고 싶어요.”
아기오는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다 내 손을 꼭 잡았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하거라.”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뱉자 깊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 * *
잠시 후 주위가 밝아진 것 같아 눈을 뜨자 황궁 정원에 서 있는 카밀라와 애런이 보였다.
혹여 나를 알아보는 건 아닌지 잠시 긴장했지만 그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했다.
예전에 봤던 것처럼 애런은 낸시에게 괴롭힘을 당한 카밀라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그에 따라 카밀라에 대한 애런의 관심도 점점 커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연민인지 애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이 카밀라에게 기울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심지어 나와 연인이 된 후에도 애런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카밀라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진 듯했다.
우연한 만남에 그치지 않고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카밀라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랬으면서 내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던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깊은 인연에 허탈함과 함께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는 수런거리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눈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이야기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카밀라를 발견한 애런은 그녀를 피신시킨 뒤 클로디안을 찾아갔다.
“전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황태자의 호위가 되어서도 한 번도 개인적인 부탁을 한 적 없던 애런이기에 클로디안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나?”
“에슬라 후작 부인을 도와주십시오.”
“후작 부인?”
애런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인물이 언급되자 클로디안이 의아해했다.
애런은 클로디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카밀라를 남편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청했다.
“부부간의 일이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오나 전하, 이대로 두면 후작 부인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퍼 경, 하나만 묻지. 혹시 후작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약자를 보호하고 위험에 처한 이를 돕는 건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기사도를 말하면서도 애런의 얼굴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가만히 그를 관찰하던 클로디안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에슬라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게 내주겠나?”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농담일세.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나.”
클로디안이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시켰지만 애런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자네의 충성 서약이야.”
“전하의 호위로 임명받을 때 바쳤던 충성엔 변함이 없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 말고 자네의 목숨을 건 맹세가 필요해.”
주술로 맺은 서약이 필요하다는 말에 애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나는 확실한 내 편을 원해. 마음 놓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내 편 말일세. 해 줄 수 있겠나?”
“……전하의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 이미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고맙네. 후작 부인 일은 걱정하지 말게. 그녀가 다시 후작가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애런이 나가자 클로디안은 바로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로웨나 케인을 데려올 방법이 생겼다.”
“그거 잘된 일이군요. 안 그래도 제가 직접 나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클로디안이 찾아간 이는 바로 데이먼이었다.
“정말 로웨나 케인 한 명만 있으면 내 대에는 더 이상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만약 거짓이라면 폴루티아 일에 더는 협력해 주지 않을 걸세.”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클로디안은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했지만 더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클로디안과 애런은 다음날 다시 만났고 두 사람은 주술로 서약을 맺었다.
물론 주술을 시전한 사람은 데이먼이었고 그 주술엔 세뇌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 하하.”
애런이 술법에 당해서 나를 데려갔던 거였어?
나를 죽인 건 애런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배신하고 죽였음에도 온전히 미워할 수 없음에 억울하다 호소해야 하는 걸까?
나를 기만한 건 맞잖아.
나와 사귀고 있었으면서 카밀라를 마음에 둔 건 사실이잖아.
기사도? 웃기고 있네.
클로디안에게 목숨을 내걸고 부탁할 정도의 마음이 단지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말이었다.
‘애런, 난 네가 불쌍하지 않아.’
비록 데이먼의 술법에 당해 나를 죽였다고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어.
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도대체 어디에 토로해야 하는 것일까?
들끓는 마음에 눈앞이 벌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 더 남아 있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눈앞의 광경이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2회차 때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내가 클로디안과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해가 뜨고 잠에서 깨어난 클로디안이 제 왼쪽 손목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는 상사화 표식이 나타나 있었다.
‘저게 나타났었다고?’
1, 2회차 때는 능력이 봉인되어 표식을 볼 수 없었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상대는 누구일까? 클로디안이 말한 ‘그녀’인 건가?
클로디안의 표식은 테두리만 그려진 상태였다. 즉, 마음을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몇 번이고 표식을 확인한 클로디안은 그 길로 황제를 찾아갔다.
“아버지, 판타시아 궁을 만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침 댓바람부터 허둥지둥 달려온 아들이 내뱉은 말에 황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그가 클로디안에게 물었다.
“상대가 누구냐.”
“……로웨나 케인입니다.”
‘뭐? 나라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사고가 정지되어버렸다.
내가 ……상사화의 주인이었다고?
애런과 클로디안에게 배신당한 후 그들의 호감도는 그저 인간적인 호감만 반영된 모양이라고.
그것도 아니면 버그나 오류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게 애정이 있었던 거라고?
그럼, 왜 나를 죽인 거야? 설마 클로디안도 주술에 당한 건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렸다.
클로디안은 황제의 주선으로 데이먼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상대가 로웨나 케인이라고요?”
“그렇다. 문제라도 있나?”
내 이름을 들은 데이먼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미 내가 아기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거구나.’
그렇다면 역시 클로디안도 주술에 당한 걸까?
“전하, 내일 제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무슨 일로 그러는 거지?”
“판타시아 궁과 관련하여 긴히 보여야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지못해 승낙한 클로디안이 다음날 보게 된 것은 황제의 침실에 숨겨진 비밀 서고였다.
그곳에서 황가에 저주가 내려진 진짜 이유를 알게 된 클로디안은 좌절했다.
데이먼은 그에게 내 알 조각을 내밀며 뱀같이 속삭였다.
“제게 대공의 반려를 되살릴 방도가 있습니다.”
“지금 나를 농락하는 것인가? 백 년 전에 죽은 이를 어찌 살린단 말인가.”
“이 알 조각은 그녀의 신체 일부나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다행스럽게도 여기엔 아직 그녀의 신력이 남아 있답니다.”
클로디안은 황당해하면서도 데이먼의 말을 외면하지 못했다.
“이미 제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죽을 운명의 사람도 살리는데 죽은 이라고 살리지 못할까요?”
“그럼 왜 진작 하지 않았던 거지?”
“판타시아 궁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제물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제물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된 클로디안이 경악했다.
데이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급기야는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설마 대공의 반려를 살리는데도 제물이 필요한 건가?”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신수를 되살리는데 당연히 많은 제물이 필요하지요.”
“그런 거라면 나는…….”
거절하려는 걸 알아챈 데이먼이 클로디안의 말을 자르며 얼른 나섰다.
“단 한 명만 있으면 됩니다.”
“……뭐?”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없이 많은 제물로도 어렵겠지만 신의 가호를 입은 인간이라면 한 명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가?”
“실재하더군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전하께 천운이 깃든 모양입니다.”
“그자가 누구인가.”
“로웨나 케인입니다.”
“뭐?”
경악한 클로디안이 그대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