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37)화 (137/140)

137화

이 세계에서 난 이방인이었으며 시스템에게 목숨줄이 잡힌 아바타였다.

매 순간이 살얼음판이었고, 항상 불안했었다.

살기 위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공략캐릭터에게 애정을 갈구해야 하는 처지가 비참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그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더 많았다.

특히 두 번의 죽음은 뼈에 아로새겨질 정도로 끔찍했다.

그러니 이 세계에 정을 붙일 수 있을 리가.

무엇보다 다른 세계에 있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가족이었으니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진즉 미쳐 버렸을 것이다.

기억을 되찾은 지금도 이 세계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었다.

에이바로 있을 때도 이 세계는 나를 죽이고 카이스와 떨어뜨려 놓았으니까.

하지만 이곳엔 카이스가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됐는데. 이별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당장이라도 이 세계를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과 카이스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왜 그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내게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요.”

시스템 창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이 상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편하게 말해도 돼.”

내가 곤란해하는 걸 알아차린 카이스가 부드럽게 나를 달래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우선 아기오가 내 영혼을 다른 세계로 보냈던 일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임 시스템과 메인 퀘스트에 대해서도 말했다.

두서없는 이야기임에도 카이스는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하는 건가?”

“3일 내로 선택해야 해요.”

시스템이 내게 시간을 준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판단이 서지 않았으니까.

나는 혹시라도 카이스가 내 마음을 오해할까 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또다시 헤어질 순 없어요.”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격해지려는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세계가 싫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런과 클로디안이 있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건 아직은 내게 버거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방법만 있다면 카이스와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함께 가줄 수 있겠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삶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카이스는 복잡한 심경에 입술만 달싹이는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그와 이전 세계를 두고 고민한다고 서운해하면 어쩌나 긴장했는데 그는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 나를 다독였다.

울컥 눈물이 솟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방법을 찾아보자.”

예상치 못한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를 위해 이곳에 남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야. 나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이곳을 떠나도 괜찮은 거예요?”

“에칼레시아 대륙의 수호자로서 할 만큼 했어. 이젠 내 반려를 지킬 때라고 생각해.”

언뜻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마음을 어지럽히던 고민들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고마워요, 카이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깃털로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에 웃음이 새어나았다.

그때 땅의 울림이 느껴졌다.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말발굽 소리도 들려왔다.

“누가 오는 모양이군.”

잠시 후 석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황실 기사단이었다.

클로디안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람도 함께였다.

“로웨나!”

뚫린 천장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카밀라가 애타게 나를 찾고 있었다.

‘안전하게 피해 있으라고 보냈는데 왜 다시 돌아온 거야?’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를 걱정하여 달려와 준 것이 고마웠다.

“우선 수습부터 해야겠네요.”

“그래야겠군.”

카이스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꾸했다.

나는 우선 신술로 로웨나의 모습으로 바꾼 뒤 카밀라와 클로디안을 맞이했다.

카밀라는 무사한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고 클로디안은 안도하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데이먼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자세한 내용은 묻지 않았다.

가장 신기했던 건 황실 기사들이 카이스를 신의 사자로 예우했다는 점이었다.

금제가 풀렸다더니 카이스의 정체를 모두 알게 된 모양이었다.

대강 정리를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고 나서야 우리가 있었던 곳이 라모스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모스 숲은 샤밀란 백작가의 달빛 저택 근처에 있는 곳으로 길이 고르지 않고 빽빽한 나무들로 어두운 편이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데이먼에게 요력을 공급해 주었던 제단이 달빛 저택의 후원 지하에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클로디안의 지휘 아래 황실 기사단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애런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내게 꽂혀 있었는데 아마도 내 본 모습은 물론 신수로서의 능력까지 모두 목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 탓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를 만나게 되었다.

* * *

“아가야.”

언젠가 들어봤던 친근한 음성에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내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대공저 정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경관에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꿈인가?’

뺨을 꼬집어 봤지만 딱히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구나.

긴장이 풀어지자 그제야 주위 경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여긴 지난번 기억 속에서 본 곳 같은데.’

낯설지 않은 풍경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몸을 돌리자 인자하게 웃고 있는 백발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처음 보는 이였지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이 세계 창조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흐뭇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쁘게 자랐구나.”

아기오는 온몸에 두르고 있는 광휘가 아니었다면 신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신은 자유자재로 외양을 바꿀 수 있으니 아마도 일부러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선택한 것 같았다.

내게 친근하게 보이기 위해서.

“내 너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저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찾기 전에는 나를 이 세계에 불러들인 시스템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이었고.

이후로는 풀지 못한 의문들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망스러웠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이 가만히 있자 그의 눈이 슬프게 젖어 들었다.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하구나. 잘 버텨주어서 고맙다.”

어깨를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에 마음이 울컥했다.

그를 향해 원망이 솟아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노고를 인정해 주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살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카이스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신 것도.”

“네가 견뎌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가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차나 한잔 할까?”

아기오가 정원 한편에 마련된 고풍스러운 정자로 나를 이끌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자 금세 테이블 위로 다과가 차려졌다.

달큼한 꽃내음 사이로 향긋한 차향이 퍼져 나갔다.

아기오는 한동안 차를 음미하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스는 신의 사자 중 막내로 태어났단다. 데이먼은 바로 손위였지. 여섯 명의 아이들은 우애가 깊진 않아도 서로 존중하며 잘 지냈단다.”

신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태어난다.

아기오가 직접 빚어 탄생시키는 경우와 생명의 나무에서 태어나는 경우로 나뉜다.

생명의 나무란 아기오의 권능으로 탄생된 신성한 나무로 천계의 중심이자 생명의 근원이었다.

지금까지 아기오가 직접 빚은 신수는 신의 사자들밖에 없었다.

가디언들과 나는 모두 생명의 나무에서 태어난 신수들이었다.

보통 신수들은 독립적인 성향을 지녔기에 서로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

하지만 신의 사자들은 같은 아버지를 두고 그의 권능을 이어받았기에 다른 신수들보다는 유대감이 깊은 것이었다.

“카이스가 워낙 감정에 무딘 녀석이라 처음에는 몰랐단다. 자라면서 알게 되었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일부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충성심은 강한 데 반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사랑과 애정 같은 감정들은 결여된 채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비로서 걱정이 되지 않았겠니?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카이스에게 너를 맡긴 것도 그 녀석이 알지 못하는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단다.”

“저는 말도 못하는 상태였는데요?”

“가디언들도 알일 때부터 보살피지 않니. 매사 무심한 녀석이 가디언들은 나름 챙기는 걸 보고 희망이 생기더구나.”

물론 다른 신수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카이스에겐 큰 변화였다며 강조했다.

“너를 보살피다 보면 새로운 감정들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다시피 성공했고.”

카이스가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카이스의 변화를 직접 목도한 터라 그의 말에 동의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데이먼에겐 차별로 느껴진 모양이야. 모두 내 잘못이지.”

회한의 한숨을 내쉰 아기오가 권능을 발휘해 환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데이먼이 카이스를 질투해 벌인 일들이 영상으로 펼쳐졌다.

카이스는 대륙 전쟁만 언급했었지만 데이먼이 저지른 일은 그보다 더 많았다.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데이먼은 카이스가 수호자로 있는 에칼레시아 대륙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땅과 물을 오염시키기도 했다.

매번 카이스에 의해 계획이 실패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결국 분노한 아기오가 데이먼에게서 권능을 회수하고 그를 천계에서 추방시켰다.

“그때 소멸시켰다면 너와 카이스가 그 고통을 당하지 않았겠지.”

“다시 기회를 주시려고 하셨던 거군요.”

“카이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데이먼도 내 아이이지 않니. 참회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단다.”

아기오가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그런데 너에게까지 손을 댈 줄이야. 미안하구나.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해 너와 카이스가 너무 고통을 받았어.”

아기오가 내 손을 잡고 도닥이며 사과와 위로를 전했다.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이 떠올라 감정이 복받쳤지만 애써 내리눌렀다.

“데이먼이 저를 납치해 죽이려 했을 때 왜 나서지 않으신 건가요? 카이스는 신벌을 받았는데 데이먼은 왜 그냥 두신 거예요?”

“내가 이 세계를 만들긴 했으나 세계의 균형과 인과율 탓에 인간계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는 없단다.”

다만 신의 사자들에 대해서는 예외라고 했다.

그들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파수꾼이자 인간들을 지키는 수호자로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에 개입이 가능하다고.

“데이먼은 사자(使者)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데다 더는 천계 소속이 아니니 내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어.”

인간계의 일은 신의 사자를 통해 개입해야 하는데 카이스가 내 죽음으로 눈이 뒤집힌 상황이라 통제가 되지 않았다고.

데이먼뿐만 아니라 제국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했으니 카이스부터 막을 수밖에 없었겠지.

“사실 너를 다시 데려오기 전까지는 일부러 내버려 둔 것이기도 했다.”

“데이먼이 참회하기를 기다리신 건가요?”

“아니. 너를 죽이고 카이스를 배신한 인간들이 괘씸해서. 신의 가호를 잃고 고통을 당해보라고.”

“…….”

“데이먼이 너무 잘해주니 그건 또 그것대로 마음이 아프더구나.”

옅게 미소 짓고 있음에도 왠지 그 얼굴이 슬퍼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