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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36)화 (136/140)

136화

“카이스, 저주를 풀려면 해머를 사용해야 해요. 괜찮겠어요?”

카이스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머를 몇 번 휘두르며 타격력을 가늠한 다음 카이스를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퍽!

다행히 힘을 조절한 덕분에 그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일은 없었다.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잠시 살펴볼게요.”

저주가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이스의 소맷자락을 살짝 걷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기억을 되찾아서 그런가? 단지 상처를 살펴보는 것뿐인데도 괜히 얼굴이 홧홧해졌다.

나는 서둘러 저주 부위를 확인하고는 바로 손을 뗐다.

기이한 문자와 검은 연기는 모두 사라진데 반해 썩어 들어간 부위는 그대로였다.

‘고약하네.’

보통은 저주가 사라지면 상처들도 모두 회복되는데 이 저주는 보란 듯이 상처를 남겨 놓았다.

역시 비열한 데이먼이 만든 저주다웠다.

카이스의 손을 잡고 바로 치유술을 시전하자 손에서 뻗어나간 새하얀 빛이 상처 부위들을 감쌌다.

고름이 차고 까맣게 죽어가던 부위들이 금세 아물어 매끈해졌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금빛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에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는데 기억을 찾고 마주하니 태양처럼 찬연한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데이먼부터 처리해요.”

“……그래.”

목이 메인 듯 카이스의 대답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데이먼은 여전히 ‘열화의 구속’에 결박된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젠장.”

힐끗 시선을 든 그가 카이스의 저주가 풀린 걸 확인하고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참아내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데이먼이 낑낑대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상체를 일으킨 그가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대로 나만 죽을 순 없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다 같이 죽자.”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 공기가 데이먼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타작으로 바닥까지 내려갔던 요력 게이지가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게 보였다.

경고하듯 깜빡거리는 게이지 바가 불길해 카이스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단죄’를 사용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럼, 내가 마무리해도 될까요?”

데이먼의 폭주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폭주로 인해 그의 영혼까지 소멸될까 불안해서였다.

카이스를 증오하는 데이먼이라면 그에게 잡혀 지하계로 끌려가느니 스스로 소멸을 택할 테니까.

영혼이 소멸된다는 건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죄를 물을 수도, 벌을 줄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데이먼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아스테르의 단죄.”

내가 권능을 발동하는 것과 동시에 데이먼의 폭주가 일어났다.

번쩍하고 섬광이 일며 검은 돌풍에 휩싸인 데이먼에게로 거대한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과광!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희뿌연 연기가 사방을 에워쌌다.

다행히 빠르게 방어막을 펼친 덕분에 우리는 물론이고 가디언들과 애런도 무사할 수 있었다.

뻥 뚫린 천장 탓에 이전보다 실내가 밝아졌지만 폭발의 여파로 인해 여전히 시야가 맑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데이먼이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곳은 아직도 뿌연 흙먼지에 휩싸여 있었다.

‘성공한 건가?’

마치 내 물음에 답해주듯 주먹만 한 구슬 하나가 흙먼지를 가르고 내게 날아왔다.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주인을 알아본 것 마냥 구슬이 내 손 위에 안착했다.

검게 일렁이는 구슬은 데이먼의 영혼으로 ‘아스테르의 단죄’가 성공적으로 시전된 것이었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전경에 데이먼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폭발의 여파로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을 뿐이었다.

‘아슬아슬했어.’

정말 간발의 차이로 영혼을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발악하듯 세차게 일렁이는 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토록 공포스러웠던 존재가 이렇게 작은 구슬로 변한 걸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카이스도 복잡한 심경이 드는지 한참동안 구슬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 끝내야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슬을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심판의 천칭 앞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술법을 시전하자 검은 구슬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데이먼은 지하계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텅 빈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움켜쥐었다.

‘드디어 ……끝났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눈가가 시큰해지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다정한 손길이 눈가를 쓸었다. 나를 향한 애틋한 눈빛에 목이 메어왔다.

“꿈은 아니겠지요?”

“아니야.”

“……내가 해냈어요.”

“그래.”

나는 결국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겼어. 내가 살아남았어.

그제야 현실감이 들며 깊은 안도가 물밀듯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나를 카이스가 붙잡아 주었다.

그의 품에 안긴 게 처음도 아니건만 기억을 되찾은 직후라 그런지 감회가 남달랐다.

알 속에 있을 때 하루빨리 알을 깨고 나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카이스와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그 바람은 점점 더 간절해졌다.

카이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대화하고 싶었고 그에게 닿고 싶었다.

너른 품에 안겨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도 싶었다.

‘영원히 못 만날 줄 알았는데.’

황궁 쓰레기장에서 죽어갈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아니었다.

카이스를 다시는 못 보게 될까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었다.

“보고 싶었어요, 카이스.”

“……나도.”

손을 뻗어 카이스의 얼굴을 찬찬히 덧그렸다.

이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내가 매일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려봤다는 걸 당신은 알까.

‘당신, 이렇게 생겼구나.’

이미 익숙해진 얼굴이지만 새삼 감격스러웠다.

카이스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가만히 내 손길을 음미했다.

우리는 그렇게 시선을 나누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이 순간 함께 있음을 새기고 또 새겼다.

“미안하다.”

애틋한 분위기를 가르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스였다.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널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애처롭게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내 마음도 먹먹해졌다.

나는 카이스가 황금사슬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뜯겨 나갈 것 같았는데.

나를 잃고 시체도 찾지 못한 그는 오죽했을까.

그 당시 제국을 불태워버리려 했던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그랬을 테니까.

그가 얼마나 자책하고 괴로워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마음이 미어졌다.

“혼자 남겨둬서 미안해요.”

두 손으로 카이스의 얼굴을 감싸자 그의 표정이 울 듯 일그러졌다.

“이제야 널 알아본 날 용서하지 마라.”

“나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는걸요.”

“그건…….”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그러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말아요.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시간들만 생각해요.”

“……그래.”

그제야 미소 지은 카이스가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나도 당신 곁으로 돌아와서 기뻐요.

익숙하고도 다정한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자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이미 들었던 고백이건만 직접 마주하고 들으니 이전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왔다.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얼른 눈에 힘을 주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의 첫 고백을 울면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사랑해요.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눈시울을 붉힌 카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여름날의 햇빛처럼 찬란한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예뻐요. 자주 웃어줘요.”

홀린 듯 중얼거리자 순간 멈칫한 카이스가 슥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예쁜 건 내가 아니지.”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돌린 카이스가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궁금했었다. 네가 어떤 모습일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하고 또 상상했었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왠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군.”

솜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볼을 스치고 지나간 손이 이내 내 머리카락을 살포시 휘감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카이스가 이 순간을 음미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신에게 맹세하는 사도처럼 경건한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다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왜 머리색이?’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착각이 아니라는 듯 분홍색이 아니라 순백색의 머리카락이 손에 감겨 있었다.

“각성을 하면서 본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내 혼란을 알아챈 카이스가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본래 모습이요?”

“그래.”

그럼, 외모가 모두 달라졌다는 뜻인가?

궁금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눈치챈 카이스가 손가락을 튕겨 손거울을 소환해주었다.

“……!”

정말 거울 너머에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둥근 눈매나 차분한 인상은 최수현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달빛을 닮은 은회색 눈동자는 로웨나와 닮아 있었다.

로웨나보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가는 편이라 전체적으로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게 진짜 나구나.’

얼떨떨하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꼭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당분간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혹시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나?”

“없어요. 오히려 각성하기 전보다 몸이 더 가벼운 것 같아요.”

괜찮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이라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이스가 마지못해 말했다.

“신벌을 해제하지 않았나. 혹시라도 그에 대한 반동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시스템이 허락한 일이니 반동이나 후유증은 없을 것이다.

카이스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며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냥 빙그레 웃었다.

때마침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데이먼도 처리했고 봉인되었던 기억도 찾았기에 마음 편히 메시지를 열었는데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공략캐릭터 카이스 버몬트의 호감도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엔딩 시 모든 공략캐릭터의 호감도 10% 이상 달성’이라는 부가 조건도 충족되었으므로 메인 퀘스트 ‘조건 1’이 완료되었습니다.』

‘게임에서 탈출하라.’ 메인 퀘스트 성공!

퀘스트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플레이어가 선택한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세계를 떠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제한 시간  72 : 00 : 00 』

드디어 마주한 메인 퀘스트 완료 메시지에 억눌린 숨이 터져 나왔다.

이 메시지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좌절을 겪어야 했던가.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쳐 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지임에도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기억을 찾기 전이었다면 바로 수락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기억을 찾지 못했어도 망설였을 거다.

한 사람 때문에.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카이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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