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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35)화 (135/140)

135화

“그래, 어디 해 보자. 나도 너랑 저 계집을 죽여야 이 분이 풀릴 것 같거든.”

데이먼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움켜쥐자 그에게 잡혀 있던 필립과 해리가 목이 졸린 것처럼 버둥거렸다.

뒤이어 각각의 구체에서 노란색과 보라색의 신력이 흘러나와 데이먼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회복하라고 시간을 줬는데도 영 시원찮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데이먼이 이번엔 다른 이에게 마수를 뻗쳤다.

데이먼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 넝쿨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애런을 붙잡아 올렸다.

넝쿨에 목이 졸린 애런이 버둥거리며 비명을 내뱉음과 동시에 넝쿨의 줄기가 꿀렁꿀렁 움직였다.

생명력을 흡수당한 탓에 애런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그에 반해 데이먼을 휘감은 검은 연기는 점점 짙어졌다.

“누가 더 우월한 존재인지 보여주지.”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데이먼이 카이스를 향해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스가 날개를 펄럭거리자 해일이 덮치듯 어마어마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강력한 힘의 파동에 카이스를 향해 날아오던 단창들이 순식간에 바스라졌고 가디언들을 가두고 있던 구체도 깨져 버렸다.

애런을 구속하고 있던 넝쿨들까지 산산조각 낸 파동은 끝내 데이먼도 덮쳤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보호막을 펼쳐서 위기를 벗어났지만 파동을 막아내는 건 꽤나 힘겨워했다.

카이스는 그 틈을 타 가디언들과 애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빛에 감싸인 그들이 순식간에 카이스 뒤로 이동되었다.

그제야 카이스는 굳은 표정을 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전력을 다할 수 있겠군.”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한 데이먼이 카이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들을 데려간다고 해서 내가 타격을 입을 것 같나? 저놈들은 그냥 애피타이저 같은 거야.”

데이먼의 코웃음에도 카이스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제 상태를 빠르게 점검했다.

황금사슬이 소멸되며 신력 제한은 사라졌지만 봉인된 권능은 일부만 풀린 상태였다.

‘역시 단죄는 쓸 수 없나 보군.’

‘단죄’는 사자(使者)들에게 부여된 가장 높은 등급의 권능으로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죄인을 처단할 수 있었다.

‘단죄가 아니라도 저 놈을 처리할 방법은 많지.’

상태 파악을 마친 카이스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열화의 구속.”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뻘겋게 타오르는 밧줄이 순식간에 데이먼을 휘감았다.

밧줄을 피하는데 실패한 데이먼이 입술을 짓씹었다.

“권능까지 회복한 것이냐.”

카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데이먼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붉은 신검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먼은 어떻게든 밧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으나 그의 요력은 밧줄을 베어내기는커녕 닿기만 해도 힘없이 사라졌다.

이윽고 데이먼 앞에 선 카이스의 금안이 뜨겁게 타올랐다.

“네가 에이바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갈가리 찢어 죽여도 모자라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려 잠시 숨을 고른 카이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여기선 단번에 끝내주지. 곧 지하계의 유황불에 던져질 테니.”

마음 같아서는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고문하고 끝내는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바를 생각하면 단 번에 처리하는 게 안전했다.

데이먼은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놈이니까.

카이스가 신검을 들어 그대로 데이먼에게 꽂으려던 순간.

갑자기 벽면을 따라 술법진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내가 말했잖아. 난 널 얕보지 않는다고. 비장의 무기 하나쯤은 감추어 두었지.”

빙긋 웃은 데이먼이 또 다른 주문을 외자 술법진에서 수백 개의 검은 사슬이 카이스를 향해 날아왔다.

카이스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그에게 달려들던 사슬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그러나 워낙 그 수가 많았던 지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사슬 하나가 카이스의 발목을 휘감았다.

한쪽 발목만 붙잡혔는데도 카이스는 균형 하나 잃지 않고 발목에 휘감긴 사슬을 금세 끊어냈다.

뿐만 아니라 신력을 쏘아 벽면에 그려진 술법진들도 순식간에 처리했다.

준비한 비장의 수가 실패했는데도 데이먼은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걸 어쩌나. 저주가 발동되어 버렸네? 그러게 하나도 놓치지 말았어야지.”

카이스가 무슨 뜻이냐며 눈썹을 찌푸리자 데이먼이 그의 왼쪽 다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방금 전 사슬에 닿았던 다리였다.

“확인해 봐. 아마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을걸? 내가 만든 저주야. 치유술을 반대로 뒤튼 거지.”

카이스가 왼쪽 바지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자 굵은 발목 위로 기이한 문자들이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잠시 후 문자들이 새겨진 자리마다 살갗이 터지고 고름이 차오르더니 종국에는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발목만이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종아리를 타고 오른 저주는 점차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카이스가 황급히 신력을 퍼부어 저주를 해제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 역작이지. 아마 아기오가 오지 않는 이상 풀기 어려울걸?”

“이런다고 네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카이스는 제 다리에 계속 신력을 쏟아 부으면서도 담담하게 물었다.

“뭐, ‘열화의 구속’을 깰 수는 없으니 네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데이먼이 카이스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그 저주, 몸에 다 퍼지면 숙주를 죽게 만들거든. 널 죽일 수 있다면 내가 죽는다 한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이제 막 반려를 다시 만났는데 안타까워서 어떡하나. 에이바는 또 혼자 남겨지겠군.”

“혼자 남겨지는 건 너겠지.”

데이먼의 비웃음 사이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이스와 데이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곳엔 언제 깨어난 것인지 해머를 든 로웨나가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내가 에이바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도 시스템은 계속 기억을 보여주었다.

데이먼에게 납치되고 죽는 순간까지.

황제에 의해 강제로 부화하게 된 나는 결국 황궁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그리고 증거 인멸을 해야 한단 이유로 불에 태워졌다.

다행히 아기오에게 구해져 영혼은 소멸되지 않았고 다른 세계에서 최수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모든 기억과 능력이 봉인된 상태로.

마침내 두 세계의 시간이 맞물리며 세계의 통로가 열렸을 때 아기오가 나를 원래 세계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띠링!

『로딩 완료!

봉인되었던 기억이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경쾌한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한꺼번에 밀려든 기억과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현실로 되돌아 온 것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음성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제 막 반려를 다시 만났는데 안타까워서 어떡하나. 에이바는 또 혼자 남겨지겠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저 놈을 족쳐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나는 해머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가디언들과 애런은 무사하고 데이먼과 대공은 대치중이었다.

무사한 대공을 보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솟았지만 애써 내리눌렀다.

데이먼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대공과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아직 데이먼이 살아있는 거지?’

대공이 가만 두지 않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데이먼과 대공 모두 상태가 이상했다.

데이먼은 불타는 밧줄에 결박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대공이 신의 권능을 발동시킨 모양이었다.

대공은 검은 연기가 다리를 휘감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저주다.’

기억이 돌아오며 신수로서의 능력이 모두 회복된 것인지 신의 권능뿐만 아니라 저주도 식별할 수 있었다.

상황 파악을 마치자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자식이!’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모자라 대공에게 저주를 시전해?

나는 그대로 데이먼에게 달려가 해머를 휘둘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그가 방어막을 펼쳤으나 소용없었다.

해머에 닿자마자 힘없이 스러졌으니까.

“억.”

해머에 정통으로 맞은 데이먼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에이바?”

뒤에서 당황 어린 대공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저들은 알까.

1회차 때 억울하게 죽은 이후로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왜 죽어야 했던 것일까?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야 했던 걸까?

회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애런과 클로디안에게는 그 이유를 캐물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략캐릭터라 복수도 할 수 없었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탓에 혼자서만 냉가슴을 앓았다.

과연 내가 복수할 수 있을까. 내 죽음의 원흉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소멸될지라도 복수만큼은 하고 갈 수 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는데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인지. 전율이 일 정도였다.

나는 다시 해머를 들었다.

지난 시간을 위로하기엔 한 대로는 부족했다.

‘나를 왜 죽였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퍽!

‘너도 한 번 당해봐. 그 고통과 공포를.’

연이어 두들겨 맞은 데이먼이 분노했지만 완전히 능력을 회복한 나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던 데이먼은 끝내 모든 반격을 실패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우.”

한참 동안 해머를 휘두르던 나는 그제야 숨을 내뱉으며 해머를 내렸다. 후련하다 못해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당신, 왜 나를 죽이려 했던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았던 거지? 그렇지?”

해머로 툭툭 건드리며 묻자 축 늘어져 있던 데이먼이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엔 몰랐어. 그저 카이스가 아낀다니 죽이고 싶었을 뿐이야. 겸사겸사 신력도 빼앗고.”

“그럼, 언제 알았어?”

“네가 황태자의 여자를 치료했을 때. 내가 에이바의 신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칼라드리우스.

그건 내 본체니까.

아기오가 스킬을 이용해 조금씩 내 신력을 회복시키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전에는 날 어떻게 알아본 거지?”

“……쿨럭,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시간이 되돌려 진 건 모르는 건가?”

데이먼은 정말 모르는 것인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이전 회차에선 어떻게 나를 찾아내 죽였던 거지?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야. 당신은 이미 나를 두 번이나 죽였었거든.”

데이먼의 흑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건 곧 당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내가 승자가 될 때까지 시간이 계속 돌아갔을 테니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나니 자연히 깨달아졌다.

내가 계속 이 세계에서 회귀했던 이유를.

아기오는 나는 물론이고 대공까지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이 리셋된 목적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내가 실패했다면 시스템은 또 다른 명분을 들어 내게 다시 기회를 주었겠지.

나는 혼란에 빠진 데이먼을 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조금 얼이 빠진 듯한 대공이 서 있었다.

데이먼이 건 저주는 이미 대공의 몸 절반을 잠식하고 있었다.

‘저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는데.’

저주라 해도 대공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가 풀지 못한다고 해도 내겐 방법이 있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대공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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