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로웨나가 시스템으로부터 GP 충전 요소들을 추출 당하던 순간.
황금사슬의 고통에 맞서 억지로 신력을 운용하고 있던 카이스의 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로웨나가 위험하다.’
데이먼에게 납치당한 순간부터 로웨나가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지금은 정말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걸어놓은 보호술이 전해오는 위급한 신호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카이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시야에 새하얀 빛에 휩싸인 로웨나가 보였다. 그녀에게 공격을 퍼붓는 데이먼도.
카이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신력을 끌어올리자 그에 맞서 황금사슬이 그를 압사시킬 듯 옥죄어왔다.
그뿐 아니라 신력이 지나가는 통로마다 막아대는 통에 분출되지 못한 신력이 곧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이대로 계속 사슬에 맞서다가는 소멸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터져 죽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다시는 데이먼에게 제 사람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카이스는 죽을 각오로 힘을 끌어올렸다. 설령 소멸되더라도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폭주라도 일으켜 데이먼과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이스는 끝내 로웨나를 구하지 못했다.
그녀의 심장이 멈춘 순간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
과거 에이바를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은 절망에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이나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었다.
그가 죽을 각오로 가진 힘을 모두 터트리려 할 때 갑자기 신의 권능이 개입했다.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이 세계가 창조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간을 다루는 권능은 최상위급 권능이었으니까.
어째서, 왜?
에이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도, 자신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을 때도 사용되지 않았던 권능이 아닌가.
갑자기 초조함이 밀려왔다.
‘나를 소환하시려는 건가.’
살의를 품고 신벌에 맞서려고 했으니 아기오가 분노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소환만은…….’
또다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아예 ‘신의 사자’로서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건 복수였다.
그것만큼은 제 손으로 끝내야 했다. 에이바와 로웨나에게 속죄할 유일한 길이니까.
그러니 아기오가 나서기 전에 자신이 먼저 끝장을 봐야 했다.
카이스는 제 모든 걸 던져 시간의 권능에 맞섰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신의 권능 앞에서는 미물의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철컥.
기이한 소리와 함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
한 번에 제 힘을 모두 터트리려던 카이스가 우뚝 멈추었다.
둑이 터진 듯 밀려오는 거대한 기운에 전율이 일었다.
‘……!’
깊은 설산에 자리한 호수처럼 잔잔하고 청아한 기운.
분명 에이바의 기운이었다.
어째서 이곳에서 에이바의 신력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것도 이토록 강하고 선명하게.
황금사슬의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환각을 느끼는 건가?
카이스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에이바의 신력을 착각할 리 없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은 심장은 물론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으니까.
그는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에이바의 신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신력의 근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백의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그녀의 전신에서 에이바의 신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누구……?!’
낯설면서도 결코 낯설지 않은 묘령의 여인에 당황도 잠시.
카이스는 곧 그녀를 알아보았다.
해머를 들고 황금사슬을 노려보는 모습 위로 로웨나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저런 모습인 건지? 에이바의 신력은 또 어떻게?’
혼란과 당황에 빠져 있던 카이스는 뒤이어 벌어진 일에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황금사슬이 깨졌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환상을 보는 건가? 이것 또한 아기오의 시험인 것인가?
멍하니 서 있던 그를 현실로 이끈 건 분노 어린 데이먼의 외침이었다.
“네가 망쳤어. 끝이었는데, 정말 끝이었는데 너 때문에!”
데이먼의 광포한 살기에 살갗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 선연한 감각이 카이스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 모든 게 환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어떻게 로웨나가 신벌을?’
물론 그녀가 또 다른 신벌을 이미 해제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 황금사슬까지 풀어버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신벌을 해제할 수 있지? 그것도 신수도 아닌 인간이?
하지만 카이스는 마냥 혼란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살기가 흐르는 거대한 낫이 로웨나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으니까.
카이스는 로웨나를 향해 다급하게 달려가며 신력을 쏘아 그녀에게 보호막을 씌웠다.
그와 동시에 로웨나가 해머를 크게 휘둘렀다.
무슨 일인지 살짝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해머의 위력 때문에 커다란 낫을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당황한 데이먼이 멍하니 제 빈 손을 바라볼 동안 카이스는 무너지는 로웨나의 몸을 재빠르게 안아들었다.
데이먼과의 거리를 벌리고는 자신과 로웨나를 중심으로 보호결계를 둘렀다.
카이스는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로웨나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버려진 채 죽어가던 에이바의 모습이 겹쳐져서일까?
분명 심장 박동이 느껴짐에도 손끝이 떨려왔다.
‘아직 살아있어. 로웨나는 무사해.’
카이스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로웨나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힘을 너무 많이 쓴 것인가? 설마 신벌 해제에 따른 반동 때문은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가슴이 선득해졌다.
처음 로웨나를 만났던 날, 오랜 잠에서 자신을 깨운 로웨나는 멀쩡했었다.
하지만 이번이 두 번째이지 않나.
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신벌을 해제시켰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 됩니다. 로웨나는 안 됩니다. 벌은 제가 다 받을 테니 로웨나만은 제발.”
카이스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신벌에서 해방되는 대가가 로웨나의 희생이라면 자신은 다시 황금사슬을 두를 용의가 있었다.
평생 신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여기에 벌이 더해진다고 해도 괜찮았다.
로웨나만 무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죄를 왜 로웨나가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이미 많은 고통을 겪었다.
더 이상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더는 아프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신이시여, 부디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
카이스가 로웨나를 품에 꼭 안으며 빌고 또 빌었다.
그 순간 불로 지져지는 통증과 함께 사라졌던 심장의 각인이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개 한 짝이 완성되자 익숙하고 그리운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에이바의 신력이.
‘사라졌던 각인이 어째서……?’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이바를 잃은 뒤로 빛을 잃었던 각인이 공명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눈앞의 로웨나와.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일었다.
‘로웨나가 ……에이바였어. 내 반려가 살아 있었어.’
충격으로 굳어졌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거친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경악과 혼란이 지나간 자리를 기쁨과 감격이 채웠으나 오래 가진 못했다.
일전에 로웨나가 고백했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세 번의 삶을 반복했고 두 번이나 제단에 끌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심장이 저며지는 것 같은 고통에 숨을 헐떡였다.
문득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애처롭게 호흡을 이어가던 에이바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 위로 로웨나가 겹쳐졌다.
제단 앞에서 공포에 질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모습이.
‘한 번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어찌 두 번이나…….’
“아……아악!”
카이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아무리 신벌 때문이라고 하지만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여린 몸으로 그 끔찍한 시간을 혼자 버텨왔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널 알아보지도 못하고 혼자 버려둔 날 용서하지 마.’
카이스가 로웨나를 소중히 보듬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녀를 감싸 안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데이먼이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보같이 뭘 기대했던 거야?”
허탈하게 중얼거린 그의 얼굴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찰나일 뿐 금세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온 데이먼이 투덜거렸다.
“젠장, 각성까지 할 줄이야. 진작 죽여 버릴 걸.”
“……설마 너, 알고 있었던 건가?”
번쩍 고개를 든 카이스가 데이먼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못 알아본 네가 멍청한 거지. 그러고도 네가 반려라 할 수 있나?”
데이먼의 비웃음에 카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놈도 알아봤는데 자신은 여태 뭘 한 것인가.
해일처럼 덮쳐오는 자괴감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래서 로웨나를 죽이려 한 것인가?”
“당연하지. 너와 아기오에게 엿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놓칠 리가. 마침 신력도 탐이 났고.”
그런데 로웨나 때문에 다 망쳤다며 서늘하게 뇌까렸다.
카이스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힘껏 말아 쥐었다.
에이바는 로웨나로서 삶을 세 번째 살고 있다. 이전 삶의 끝은 모두 제단에서의 죽음이었고.
카이스가 고개를 들어 데이먼을 응시했다.
‘데이먼은 그때도 알고 있었던 것인가? 로웨나가 에이바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데이먼의 손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전 삶에서 로웨나는 해머를 가지지도, 폴루티아를 정화하지도 않았었는데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것인가.
‘설마 저 녀석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카이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데이먼이 회귀를 자각하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로웨나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뜸을 들이며 관찰하는 게 아니라.
긴장되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속에선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데이먼이 세 번이나 알아볼 동안 나는 뭘 한 건가.’
스스로가 한심하다 못해 원망스러웠다.
카이스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로웨나를 힘주어 안았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널 용서할 수가 없다.”
형제였고 동료였기에 한때는 그를 이해해 보려고도 했었다.
왜 자신에게만 날을 세우고 분노하는지. 왜 자꾸 자신의 것을 망가뜨리려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참았었다.
에이바를 통해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까. 배려와 연민이라는 감정도 알게 되었으니까.
‘어리석었어.’
동정조차 아까운 존재도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적의를 드러냈을 때 밟아주었어야 했다. 자신의 땅인 에칼레시아 대륙을 건드렸을 때 죽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에이바가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테지.
저 따위 빌어먹을 것들에게 수치와 모욕도 당하지 않았겠지.
카이스의 말아 쥔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네가 뭔데 용서를 언급하는 거지? 용서를 빌어야 할 자는 내가 아니라 너잖아.”
“아니. 너를 망친 건 같잖은 네 열등감과 비틀린 욕망이지.”
카이스가 로웨나를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마지막 기회조차 잃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기오의 안배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반복된 것은 로웨나를 살리기 위함이었겠지.
그와 동시에 아기오는 데이먼에게도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데이먼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기오의 자비를 배신한 거였다.
그토록 아기오의 사랑을 원했으면서 비틀린 욕망에 눈이 가려져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탕자가 돌아오길 바라는 아비의 안타까운 마음을.
하지만 아기오도, 데이먼도 그들의 사정 따윈 더 이상 알 바 아니었다.
“그 두 사람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거든요.”
“억울했어요. 왜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두려웠어요. 또 다시 그렇게 죽게 될까 봐.”
복수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더는 무능한 반려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로웨나를 내려놓자 붉은 막이 그녀를 감쌌다.
뒤이어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어두운 돌벽을 따라 붉은빛이 퍼져 나갔다.
데이먼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결계를 두른 것이었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그의 등 뒤로 이전보다 더 화려하고 강렬한 불꽃의 날개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