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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33)화 (133/140)

133화

“헉.”

갑작스럽게 의식이 돌아오며 눈이 번쩍 떠졌다.

부유하고 있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도, 발이 땅에 닿는 느낌도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선 채로 눈만 깜박거렸다.

‘나 죽은 거 아니었나?’

분명 심장이 멈춘 것 같았는데 어떻게 깨어난 거지?

죽어서 영혼이 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혈관을 타고 도는 활력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온몸을 휘도는 강한 기운이 내가 살아있음을 실시간으로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건 뭐지?’

나는 가만히 손을 쥐었다가 펴며 내 안에 넘쳐흐르는 기운을 살폈다.

맑고 따스한 기운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 전부터 알아온 친구와 재회한 기분이랄까.

반갑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그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혼란에 빠진 날 일깨워 준 건 시스템 알림음이었다.

띠링!

『모든 전환을 마쳤습니다.

플레이어의 상태가 안정되었습니다.

GP가 완충되어 해머의 S급 기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시스템 메시지를 마주하자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버몬트 대공의 소멸까지 남은 시간

00 : 01 : 59 』

붉은색으로 깜빡이는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났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이전보다 더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버린 대공이 보였다.

눈도 뜨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심장이 죄이는 기분이었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황금사슬 앞으로 달려간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해머를 들어올렸다.

내가 어떻게 다시 눈을 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를 재촉하듯 해머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너 어떻게……!”

데이먼이 나를 가리키며 경악하는 게 보였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번엔 부디 성공하길.’

황금사슬을 향해 힘차게 해머를 휘둘렀다.

거센 충돌과 함께 해머와 황금사슬에서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지만 빠르게 대처한 덕분에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일은 없었다.

“헉, 헉.”

나는 바닥을 짚으며 숨을 헐떡였다.

엄청난 양의 신력이 한 번에 빠져나간 바람에 머리가 핑 돌고 숨이 가빠왔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황금사슬 위로 빠르게 퍼져가는 새하얀 빛이 보였다.

그 빛은 황금사슬을 모두 집어 삼키고서야 멈췄다.

반항하듯 격렬하게 진동하던 황금사슬이 일시에 멈춘 순간.

쩌적.

철옹성같이 버티던 사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다 이내 빛으로 산화되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황망하게 중얼거린 데이먼이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망쳤어. 끝이었는데, 정말 끝이었는데 너 때문에!”

그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쳐 댔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이어 뜬 메시지 때문이었다.

『히든 루트 수행 완료!

 버몬트 대공을 구함으로써 히든 루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카이스 버몬트에게 내려졌던 신벌이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내려졌던 금제가 해금됩니다.』

『히든 루트 성공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플레이어의 영혼에 걸려 있던 봉인이 해제됩니다. 봉인되었던 기억이 돌아옵니다.

잃어버렸던 기억 로딩 중…….』

진행률이 올라감에 따라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 순간에.’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사신의 낫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어 해머를 휘둘렀지만 결과는 볼 수 없었다.

점멸하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건 다급하게 달려오는 대공의 모습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걸 목도한 사람처럼 경악에 찬 얼굴이었다.

‘다행이다. 스승님을 살릴 수 있어서.’

의식이 끊기는 순간 편안히 눈을 감았다.

* * *

하염없이 침잠해 가던 의식은 어느 순간 눈부신 빛에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마침내 안착한 곳은 심해처럼 어둡고 고요한 공간이었다.

주위가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두려움은 금세 가셨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건가?’

왜 하필 그때 정신을 잃어서.

그래도 스승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지.

사슬에서 풀려나 멀쩡히 서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하릴없이 어둠 속을 유영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한 줄기 빛이 내리비쳤다.

어둠을 밀어내듯 점점 몸집을 불린 빛줄기는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나며 나를 둘러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해머와 똑 닮은 기운에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그때 빛을 통해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받거라. 내가 주는 선물이다.”

“선물이요?”

“그래. 데려가서 잘 키워 보거라.”

“가디언이라면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전자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자주 들어왔던 것처럼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의아했는데 뒤이어 들려온 음성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왜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내가 착각한 건가?’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듯 눈을 가리고 있던 빛이 사라지며 아름다운 정원에 서 있는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대공은 새하얀 알을 품에 안아 든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조금 앳된 얼굴이었지만 인상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보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이는 다른 목소리의 주인 같은데 빛에 휩싸여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보였던 시스템 메시지가 생각났다.

‘봉인된 기억을 돌려주겠다고 했었지.’

대공의 기억을 말하는 거였나?

아닌데. 분명 플레이어의 영혼에 걸린 봉인이라고 했었는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사이 두 남자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가디언으로 선택하라는 게 아니다.”

“그럼, 제 뒤를 이어 에칼레시아 대륙을 맡을 아이입니까?”

“글쎄, 이 아이가 어떤 존재로 자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불분명한 대답에 대공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의 미래에 대해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네가 한번 잘 키워 보거라.”

“……저보다는 다른 형제에게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이 부담스럽다는 듯 상대방에게 알을 다시 건네었다.

그러나 그는 알을 받지 않았다.

“네 가디언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신력만 공급해 주면 되는 가디언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누군가의 삶을 책임질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했던 것처럼 보살피면 돼. 그러다 보면 어찌해야 할지 알게 될 거란다.”

상대방이 부드럽게 달래는데도 대공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네가 가장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맡기는 거란다.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대공은 마지못해 알을 다시 안아들었지만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무척이나 흐뭇해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대공과 대화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알이 무엇인지도.

‘왜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걸까?’

도무지 시스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눈앞의 광경은 계속 흘러갔다.

이번에는 익숙한 곳이었다.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삭막하고 단출한 대공의 침실이었다.

대공은 백자처럼 하얗고 매끈한 알을 품에 안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들이 보면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가 무척이나 곤란해 하는 게 보였다.

뚫어지게 알을 쳐다보던 대공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카이스다. 오늘부터 내가 네 보호자다. 그 누구도 네게 손대지 못하게 할 테니 안심해도 된다.”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을 지어줘야겠지?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셨으니까.”

뒷말은 작게 중얼거린 카이스가 한참동안 고민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에이바.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뜻이다. 마음에 드나?”

그는 알을 향해 어색하게 말을 건네며 동그란 알 위로 가만히 손을 대었다.

신수는 알 속에 있을 때부터 인지능력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또한 같은 신수라면 알과 접촉하여 상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서로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고 했었다.

대공도 에이바의 감정이 느껴지는지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왜 내게도 느껴지는 거지?’

분명 남의 기억을 엿보고 있는 중인데 에이바의 기쁨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너무 몰입했나?’

당황스럽긴 하지만 대공의 일이라 집중한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에이바와의 첫 인사를 마친 대공은 그제야 자신의 방에 에이바를 둘 곳이 없음을 깨닫고는 필요한 것들을 소환해 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 잡은 장식장 위에 부드러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쿠션이 마련되었다.

대공은 쿠션 위에 에이바를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보호결계를 여러 겹 둘러두었다.

그때부터 대공과 에이바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잘 잤나? 오늘은 황궁에 일이 있어 잠깐 다녀와야 한다. 잘 지내고 있도록.”

처음에는 어색하게 건네던 아침 인사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변했다.

“에이바,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나? 오늘은 날이 좋아서 정원에 나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뿐만 아니라 의무적으로 알을 닦고 신력을 공급해주던 건조한 손길이 점차 다정하게 변해갔다.

“음, 아버지께서 내게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던 것이 생각나서 동화책을 준비해 봤다.”

어떤 날은 주섬주섬 책을 꺼내 동화를 읽어주기도 했다.

물론 고저 없는 목소리는 동화구연자로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자연스러워지는 연기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큼큼, 아버지께서 매일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셨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 한참 동안 에이바 주위를 서성이다 겨우 꺼낸 말에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모습이나 발갛게 달아오른 귀 끝이 그가 지금 얼마나 부끄럽고 곤란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대공은 말을 꺼내놓고도 쉽사리 결심이 서지 않는지 한숨만 계속 내쉬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침실에 대공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정직하게 한 음 한 음 부르는 자장가는 빼어나진 않았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루하루 대공의 노력이 쌓여가며 그와 에이바가 함께 하는 시간도 점차 늘어갔다.

“오늘은 황궁을 다녀왔다. 이번에 즉위한 황제와는 상성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나만 보면 견제하는 게 영 피곤하군.”

어느 순간부터는 에이바에게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며 속내를 터놓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들의 시간이 쌓여 갈수록 나도 점차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대공이 에이바를 쓰다듬어 줄 때면 다정한 손길에 내 마음이 따스해졌고, 그가 에이바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때는 내 눈이 절로 감기었다.

그의 동화구연에 울고 웃었으며 그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그를 위로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행복한 만큼 그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나를 웃게 해준 것처럼 그도 웃게 해주고 싶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지금 느끼는 감정이 내 것인지 아니면 에이바의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기가 밀려난 자리에 미풍이 불어오고 색색의 꽃잎들이 흩날리며 봄이 왔음을 알리던 때.

“에이바, 사랑한다.”

대공의 고백과 함께 그와 에이바의 심장에 각인이 새겨지던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아, 아…….”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이 뚝뚝 끊어져 나왔다.

바위가 내려앉은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와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토하듯 진실을 토해냈다.

“내가, 내가 ……에이바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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