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나는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릿한 탓에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대공을 구하시겠습니까?’
이 문장만큼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고지를 코앞에 두고 죽음이라니.
허망하고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게 내 현실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내게는 신세를 한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스승님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이 허무해지지는 않겠지. 내 복수도 대신 해주실 테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러나 결박된 상태라 시스템 창에는 닿지 못했다.
‘이런.’
저걸 빨리 눌러야 하는데.
그때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플레이어를 보호하기 위한 자동 실행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뒤이어 나타난 커서가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예’라는 선택 버튼 위로.
버튼이 클릭되고 시스템창에서 팡파르 같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히든 루트 개방!
버몬트 대공을 구하기 위한 히든 루트가 개방되었습니다.
각 아이템의 히든 등급이 오픈됩니다. 한시적으로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연이어 아이템창이 여러 개 떴다가 사라지고 다시 메시지가 떴다.
『해머의 히든 등급 오픈!
해머의 등급이 S로 상향 조정됩니다. 지금부터 신의 권능에 버금가는 모든 힘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해머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듯 웅웅거리자 내게도 그 진동이 전해졌다.
넝쿨이 해머를 쥔 손을 그대로 결박한 덕분이었다.
가까이 있던 데이먼도 해머의 진동을 느낀 것인지 잠시 멈칫했다.
덕분에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꺼번에 메시지가 쏟아져서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의 권능’이란 말은 기억에 남았다.
문제는! 이렇게 묶인 상태로는 해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공을 구하라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때 데이먼이 여전히 진동하고 있는 해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쯧, 천천히 흡수하려 했더니.”
주인을 알아보듯 내 손과 해머를 휘감고 있던 넝쿨이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기회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목을 까딱였다.
‘회오리.’
내 명령을 받은 해머가 빠르게 휘돌며 데이먼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해머를 피했다.
그사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해머가 내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를 옭아맨 넝쿨이 해머의 회오리에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가루로 변해갔다.
데이먼이 뒤늦게 해머를 붙잡으려 했지만 S급이 허명은 아닌지 그의 술법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유유히 내게 돌아온 해머를 낚아채며 바닥에 착지했다.
‘장난이 아닌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위력에 해머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성가시게 하는군. 그런다고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아느냐?”
코웃음을 친 데이먼이 사신의 낫을 소환해 크게 휘둘렀다.
나는 낫을 피해 구르며 소리쳤다.
“천공의 방패.”
머리 위로 새하얀 방패가 나타나며 나를 보호하듯 투명한 장막이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나를 두 동강 내 버릴 것처럼 사납게 날아든 낫이 방패에 막혀 버렸다.
안도한 나는 바로 대공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공 앞에 다다른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는 끊임없이 황금사슬에 맞서 신력을 끌어올린 것인지 그 자체로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찰랑거리던 긴 머리는 땀에 푹 절어 있었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는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핏방울이 맺혀 있던 입술은 어찌나 물어댔던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반면 대공을 구속하고 있는 황금사슬은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늦었어. 이미 소멸을 위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네.”
나를 뒤쫓아 온 데이먼이 대공의 상태를 보고는 기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거대한 황금사슬 위로 모래시계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버몬트 대공의 소멸까지 남은 시간
00 : 05 : 00 』
시스템은 친절하게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내게 보여주었다.
“스승님, 저 여기 있어요. 스승님 앞에 있다고요. 그러니 제발 좀 멈춰주세요.”
대공을 향해 간절히 외쳤지만 거대한 불덩이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용없어. 저 놈은 이미 나에 대한 살의로 눈이 뒤집혔으니까.”
황금사슬의 발동 조건에 신력 제한만 있었던 게 아닌 건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착하자. 아직 시간이 있어. 방법도 있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황금사슬 앞으로 다가갔다.
사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온몸을 짓누르는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위압적인 황금사슬을 응시했다.
“늦었다니까? 네 같잖은 방패도 곧 사라질 거잖아. 그만 성가시게 하고 이리 와.”
데이먼이 나를 향해 짜증스럽게 손을 까딱였다.
내가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쿨타임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니 저리 여유롭겠지.’
5분의 제한 시간이 끝나면 다시 스킬을 발동시키면 된다.
그러니 지금은 데이먼 협박 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온힘을 다해 해머를 휘둘렀다.
‘제발 이 방법이 통하기를’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머와 황금사슬이 부딪치며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왜 안 되는 거지?’
당황한 내게 시스템이 그 답을 알려주었다.
『GP가 부족하여 S급 특별 기능인 ‘신벌 해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벌 해제’를 위한 GP 최소 기준은 10000입니다.
현재 GP : 135 / 1040 』
10000이라고?
시스템에게 농락당한 기분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어드바이저 기능을 사용했다.
‘GP를 최대치 이상으로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시스템>
플레이어의 HP를 GP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만 현재 플레이어의 HP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므로 GP로의 전환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HP : 30 / 1090 』
‘아…….’
HP와 GP는 시간이 지나면 점차 채워지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깨무는데 데이먼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어리석긴. 네 까짓 게 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혼탁했던 머리가 맑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금 난 신에게 맞서는 중이지.’
일개 인간이 감히 신에게 생채기라도 내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그제야 시스템이 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모든 걸 내어줄게. 지금까지 쌓은 내 레벨도, 내 목숨도 다 내어줄게. 그러니 대공을 살릴 방도를 알려줘.’
어차피 대공이 소멸되면 데이먼의 손에 죽게 될 터.
이 판에 올인하기로 했다.
『시스템>
GP를 충전하기 위한 요소를 추출하려고 합니다.
로웨나 케인 그리고 최수현이 가진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해 주시겠습니까?』
최수현.
나의 진짜 이름.
이 세계에서 처음 불려본 내 이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는 저 이름을 되찾을 수 없겠지.’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지만 애써 삼켜냈다.
내 진짜 이름이 왜 언급된 것인지, 시스템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예’를 눌렀다.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박동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쿵, 쿵, 쿵.
박동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신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플레이어에게서 GP를 충전할 요소들을 추출합니다.
추출 중…….』
진행률이 0%에서부터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10%, 20% ……50%.
진행률이 올라갈수록 내 몸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새어나오던 빛은 점차 전신으로 번져갔다.
“……너!”
뒤에서 데이먼의 경악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아, 천공의 방패를 다시 발동시켰어야 했는데.’
이미 유효 시간이 지났을 텐데 어떡하지?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를 향해 덮쳐 온 요력은 내게서 뿜어져 나온 빛에 닿자마자 스러졌다.
그건 사신의 낫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먼이 아무리 휘둘러도 내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아, 다행이다.’
내심 안도하며 눈을 감자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80, 90, ……98, 99, 100%
『GP를 충전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의 추출을 마쳤습니다.』
완료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귓가에 삐이이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뒤이어 심장이 뚝 멈추며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로웨나의 심장이 멈춘 순간 세계 너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톱니바퀴들도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공의 소멸을 카운트하던 모래시계도, 로웨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붓던 데이먼도.
검은 구체 안에서 소리쳐 대던 필립과 해리도.
몇 번이나 엎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로웨나를 향해 걸음을 내딛던 애런까지도.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모두가 그대로 멈추었다.
기묘한 적막 사이로 시스템 알림음만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로웨나 케인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로웨나 케인의 신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최수현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플레이어를 위한 보호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봉인된 신력이 개방됩니다.
한정된 GP로 인해 일부 잠겨 있던 ‘칼라드리우스의 날개’의 기능이 완전히 개방됩니다.
액티브 스킬이었던 ‘칼라드리우스의 날개’가 패시브 스킬로 전환됩니다.』
『패시브 스킬 : 칼라드리우스의 날개
병자의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성한 새, 칼라드리우스의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유 영역이 무제한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치유의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자가 치유가 가능해졌습니다.』
『‘칼라드리우스의 날개’가 자동 실행됩니다. 플레이어의 신체가 재구성됩니다. 본체가 소환됩니다. 봉인된 능력이 개방됩니다.』
허공에 떠 있던 로웨나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로웨나의 신체가 유리 공예품처럼 파삭하고 깨지더니 각각의 조각들이 빛에 스러지듯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이내 깨끗하게 비워진 허공에 눈송이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긴 막대 그림이 점차 채워져 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참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로웨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붉은빛이 그 반대편에서는 검은빛이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신의 권능을 넘지 못한 이들의 발버둥이었다.
누군가에겐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모든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뜨기 시작했다.
철컥.
멈춰 있던 톱니바퀴들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