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대공의 등 뒤로 솟아난 붉은 날개에서 타닥타닥 불티가 튀었다.
낯선 형상임에도 기시감이 느껴져 눈가를 찌푸리던 찰나.
언젠가 황제의 침실에서 봤던 그림이 떠올랐다.
덧입혀진 채색 아래에서 빛나던 붉은 새의 형상이.
‘설마……!’
그때 데이먼의 희열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더 발악해봐. 더 몸부림쳐 보라고. 이래서야 네 여인을 지킬 수 있겠어?”
이 순간을 즐기듯 두 팔을 넓게 벌린 데이먼이 대공에게 질세라 강하게 요력을 일으켰다.
그를 중심으로 검은 돌풍이 일어나며 결 좋은 금발이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잠시 느슨해졌던 넝쿨이 다시 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카이스, 보이나? 눈도 뜨지 못하고 쌕쌕대는 모습이? 에이바도 꼭 이런 모습이었지. 아, 너는 보지 못했으니 모르겠군.”
데이먼의 도발에 감겨 있던 대공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금안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재가 될 것처럼 뜨거웠다.
대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아, 안 돼.”
해리의 절망 어린 외침과 함께 거대한 화염의 회오리가 우리가 있는 공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뜨거운 불꽃이 넘실거렸다.
곳곳에 쌓여 있던 마수의 사체들은 물론이고 작은 돌 부스러기 하나까지.
데이먼의 요력이 닿았던 모든 것들이 불길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납게 날아드는 채찍을 모조리 태워버린 불길은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넝쿨에도 옮겨 붙었다.
검은 넝쿨을 타고 새빨간 불길이 번져갔지만 내겐 어떤 해도 입히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부드러운 온기만 맴돌 뿐이었다.
순식간에 뿌리까지 살라먹은 불길은 이내 대공을 구속하던 술법진도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나를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자 숨통이 트이고 멀어졌던 의식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급격한 추락감이 느껴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단단한 팔이 나를 감싸 안았다.
놀람도 잠시, 익숙한 온기에 몸에 힘을 빼고 기대었다.
‘살았구나.’
그제야 깊은 안도가 물밀듯 밀려왔다.
철컥!
그러나 단단한 물체가 거세게 부딪치는 불길한 소리에 순식간에 안온함이 깨져버렸다.
단단히 나를 지탱해주던 품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놀라서 고개를 든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곤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커다란 사슬이 대공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대공의 등 뒤로 솟아났던 날개는 어느새 사라졌고 주위를 사납게 휩쓸던 화염의 회오리도 소멸되었다.
황금빛의 사슬은 대공을 완전히 결박하고 나서야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사슬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위압감에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저것이 신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손끝이 떨려왔다.
잠시 멈추었던 사슬이 대공의 전신을 옥죄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이 점차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신음을 내지 않으려 짓씹은 탓에 하얗게 질린 입술에선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도 돌리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두 손을 말아 쥐었다.
‘그때도 이런 일을 당했던 거야?’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목격했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야 대공이 쓰러졌을 때 필립이 왜 신벌의 ‘후유증’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고문을 받았으니 그렇게 아플 수밖에!’
심장이 꽉 죄어들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요수는 물론이고 이 세계의 신을 향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나를 이 세계에 가두고, 몇 번이나 죽인 것도 모자라 대공에게까지 이런 고통을 주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주군!”
필립과 해리도 황금사슬에 갇힌 대공을 보고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들도 사슬은 어찌할 수 없는지 망연히 서 있기만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아까 날개를 펼치실 때부터 불안했었다고.”
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은 해리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데이먼을 만났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필립의 음성은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짝짝짝.
그때 맞은편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셋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엔 흙먼지를 뒤집어 쓴 데이먼이 바닥에 주저앉아 박수를 치고 있었다.
화염의 회오리에 당한 것인지 군데군데 옷이 그을려 있고 여기저기 구른 듯 몰골이 엉망이었다.
“이야, 드디어 그 휘황찬란한 황금사슬을 보게 되는군.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먼이 전율에 몸을 떨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말했잖아. 넌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고. 네 눈앞에서 저 계집을 죽이고 너도 소멸시켜주지.”
“저 자식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해리를 필립이 붙들었다.
“진정해라. 우리는 주군을 지켜야 한다.”
“저 자식을 죽이는 게 주군을 지키는 길이야.”
분을 이기지 못한 해리가 계속 몸부림을 쳤지만 필립은 더욱 단단히 그를 붙들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데이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저 자식이 다시 공격해 오면 주군께서 가만히 계시겠어? 여기서 더 힘을 쓰시면 소멸되실지도 모른다고. 너도 잘 알잖아.”
혹시라도 데이먼이 다시 공격해 올까 긴장하고 있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움찔했다.
‘소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멸이라니요. 에이, 아니죠? 스승님이 그러실 리가.”
애써 태연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리는 내가 옆에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당황해 입술만 달싹거렸다.
보다 못한 필립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금사슬은 벌이자 경고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의 자비를 바라지 말라는.”
“그래서 사슬이 나타났는데도 신력을 운용하면 소멸이 된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신력을 거두시면 사슬이 사라지겠지만…….”
데이먼이 눈앞에 있는데 신력을 거둘 리가 없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대공이 데이먼과의 싸움에서 신력을 제한 이상으로 써서 쓰러지게 되어도 회복할 때까지만 보호하면 될 거라 여겼건만.
내가 손도 쓸 수 없는 지뢰가, 그것도 대형 지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하아.”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막막한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주군을 꼭 지킬 겁니다.”
결의에 찬 음성이었지만 해리도 필립도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가 위험해지면 대공은 제 몸을 불살라서라도 우리를 구하려할 테니까.
그들도 나도 너무 잘 알기에 불안한 것이었다.
“저도 같이 해요.”
자칫 잘못하면 대공을 구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아 그를 구해낸다고 해도 그의 호감도가 100%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가 내가 당했던 것처럼 이 세계와 저 요수에게 희생되지 않기를.
나는 비록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당신만은 저들에게 지지 않고 살아남기를.
그 간절한 바람만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데이먼은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주군 곁에 있어주십시오.”
필립의 묵직한 눈빛에 그가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아가씨가 살아계셔야 주군의 소멸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아니, 대공에겐 나보다 당신들이 더 소중할 테니 나만 남는 건 의미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오싹한 기운이 먼저 등 뒤로 덮쳐왔다.
“카이스가 저 상황인데 충견들이 너무 여유로운 거 아냐? 아니면 벌써 포기한 건가?”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검은 연기에 휩싸인 데이먼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더는 주군을 건드리지 마라. 너는 우리가 상대해주지.”
필립의 신검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강렬하게 빛났다.
“우습군. 내가 너희 같은 애송이들을 처리하지 못해 지금까지 살려둔 것 같나?”
데이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필립과 해리의 눈빛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황금사슬도 나타났으니 너희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겠지. 그래, 카이스의 마지막을 네놈들이 장식하면 되겠군.”
좋은 생각이라는 듯 히죽 웃은 데이먼이 요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한 힘에 온몸의 솜털이 비죽 솟아올랐다.
‘젠장, 그사이 요력을 충전한 모양이네.’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요력 게이지 바가 풀로 충전되어 있었다.
나는 해머를 집중적으로 사용할 요량으로 단검을 집어넣고 데이먼을 주시했다.
데이먼과 우리 세 사람 사이에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땅을 박차고 나가기 전 대공에게 소리쳤다.
“스승님, 저희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어떻게든 당신을 꼭 살릴 테니까 제발 황금사슬에 맞서진 말아줘요.
이를 악물며 달려 나간 나는 정신없이 해머를 휘둘렀다.
필립과 해리도 어떻게든 대공을 보호하고자 필사적으로 데이먼을 공격했다.
그 뒤로는 격전이 벌어졌다.
양쪽 모두 전력을 다한 싸움이라 굉음과 파편이 난무했다.
그 와중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애런이 정신을 차렸으나 그는 전투에 참여하진 못했다.
데이먼에게 죽을 뻔한 데다 카이스의 화염을 피하지 못한 탓에 겨우 몸을 일으켜 무너진 기둥에 기대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덤볐음에도 데이먼의 숨통을 끊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결국 신력을 대부분 소진한 필립과 해리는 만신창이가 된 채 데이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검은 구체 안에 갇힌 그들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지만 구체에 금조차 내지 못했다.
“너희들이 호의호식할 동안 내 가디언들은 내게 충성을 바쳤단 이유만으로 하찮은 동물이 되어 썩은 고기나 먹어야 했지. 네놈들도 곧 그렇게 되게 해주마.”
구체를 톡톡 두드리며 비웃은 데이먼이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과 달리 또다시 검은 넝쿨에 구속된 상태였다.
저벅저벅 내게 걸어온 데이먼이 커다란 손으로 내 목을 쥐었다.
“어떻게 네가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이렇게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줘서.”
“그게 무슨 말이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는 데이먼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나를 보며 싱긋 웃기만 했다.
“자, 카이스 봐라. 네 반려가 어떻게 죽는지.”
반려라니?
무슨 헛소리냐며 쏘아붙이려 했으나 숨통을 조여 오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를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희열에 젖어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지독한 악취를 뚫고 매서운 열기가 덮쳐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공이 황금사슬에 맞서 신력을 일으켰다는 걸.
‘아, 안 돼.’
안 돼요, 스승님.
그러나 내 외침은 이번에도 내뱉어지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끝이야.”
환희에 찬 데이먼의 음성과 함께 내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경고!
플레이어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대공도 나도,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절박하게 부르짖는 순간,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윽.’
누군가 달궈진 쇠로 낙인을 찍은 것처럼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데이먼에게 죽기도 전에 먼저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띠링!
혼미해지는 정신 사이로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시스템>
대공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단, 당신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대공을 구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