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나를 밀어낸 것은 대공이었다. 내가 술법에 휘말리지 않도록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다.
“주군!”
나와 마찬가지로 대공을 구하려던 필립과 해리도 그에게 닿지 못하고 밀려났다.
가디언들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은 대공이 데이먼을 똑바로 응시했다.
황금빛의 눈동자는 고요했지만 폭발 직전의 화산 같아서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정도로 나를 붙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카이스, 나는 단 한 번도 널 과소평가한 적 없었어. 날 얕잡아 본 건 항상 너였지.”
데이먼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술법진에서 솟아오른 검은 넝쿨이 순식간에 대공의 전신을 옭아맸다.
“네가 받은 신벌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내게 또 빼앗기지 않으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야.”
비웃음이 섞인 음성과 함께 술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뒤이어 검은 넝쿨들이 대공의 신력을 빨아들이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스승님!”
사색이 되어 달려간 나와 달리 대공은 새어나가는 신력을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너야말로 날 얕잡아 본 것 같은데.”
대공이 픽 웃음을 흘리자 붉은빛이 순식간에 그를 휘감았다.
신나게 그의 신력을 먹어 치우던 검은 넝쿨들이 하나씩 차례로 터져 나갔다.
“좀 더 빨리 결판을 내고 싶어서 꼼수 좀 부려봤는데 역시 안 통하네.”
데이먼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계략이 실패했음에도 무척이나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렇지만 거기서 벗어나긴 어려울 걸? 말했잖아. 난 널 과소평가하지 않는다고.”
데이먼이 뒷말은 작게 덧붙이며 히죽 웃었다.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대공은 정말로 술법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가 술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신력을 일으켰지만 그때마다 데이먼도 요력을 공급해 술법진을 보호했다.
창과 방패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대로는 스승님이 불리해.’
데이먼은 계속 요력을 공급받을 테지만 대공은 신력 사용에 제한이 있으니까.
아니, 불리한 걸 넘어서 목숨이 위험해 질지도 모르지.
‘한계를 넘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테니까.’
데이먼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필립과 해리는 데이먼의 술법을 깨뜨릴 수 없지만 나라면 가능할 지도 몰라.’
나는 데이먼이 대공에게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슬쩍 몸을 돌렸다.
데이먼의 눈을 피해 해머로 술법진을 내려치려는 순간.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음과 함께 검은 채찍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피하자 짝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서 있던 자리가 깊게 패었다.
“내가 그리 둘 것 같으냐.”
이미 내 생각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 데이먼이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 번, 딱 한 번이면 틈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대공이 빠져나올 수 있는 틈을.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귀신 같이 알아채고 날아오는 채찍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채찍은 내게만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데이먼의 두 손에서 뻗어나간 채찍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애런과 가디언들도 공격했다.
채찍들은 마치 이지가 있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가 하나로 합쳐지기를 반복하며 우리의 빈틈을 노렸다.
우리는 각자의 무기로 채찍들을 막아내며 쉴 새 없이 바닥을 굴렀다.
‘정말 성가시네.’
채찍은 검이나 해머와 달리 유연성이 좋아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매섭게 날아오는 채찍을 해머로 내려치면 그대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구부러져 다시 내게로 날아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력이 강하게 응축된 것인지 아무리 해머로 때려도 절단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이 더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전력을 다한다더니 허언이 아니었나봐.’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대공을 구하고 데이먼을 처리한담.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채찍의 공격 패턴이 미묘하게 달라진 게 느껴졌다.
나를 죽일 듯 달려들던 것과 달리 자꾸 해머를 휘감으려 드는 것이 영 수상했다.
‘설마 해머를 노리는 건가?’
어림없지.
나는 해머의 그립에 숨겨져 있는 단검을 꺼내 해머를 노리는 채찍들을 쳐냈다.
그때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윽.”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검은 채찍에 결박된 애런이 보였다.
대검은 진작 빼앗긴 것인지 채찍에 칭칭 감긴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런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채찍은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더니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허억!”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애런을 보며 데이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카이스,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건가?”
그때까지도 계속 술법진과 씨름하고 있던 대공이 데이먼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아, 너는 이놈에게 별 관심이 없지? 그럼, 네 제자는 어떨까?”
데이먼이 내게 보란 듯이 애런의 목을 더욱 졸랐다.
‘저자는 내가 애런으로 인해 동요하길 원해. 그렇다면…….’
나는 내게 달려드는 채찍들을 쳐내며 애런을 향해 몸을 틀었다.
마치 그를 구하러 갈 것처럼.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여러 갈래로 나뉜 채찍들이 맹렬하게 내 앞길을 막아섰다.
나는 더욱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채찍을 상대하는 척 했다.
그러다 돌연 몸을 돌렸다.
‘데이먼의 술법만 깨면 대공도, 애런도 모두 구할 수 있어.’
갑작스럽게 방향을 튼 탓에 나를 막으려고 달려들었던 채찍들이 순간적으로 길을 잃고 헤맸다.
그 틈을 타 재빠르게 대공에게 달려가서 해머로 술법진을 내려쳤다.
바닥에 진동이 일며 술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잠시 주춤했다.
‘효과가 있어! 이대로 몇 번만 더하면.’
희망을 가지고 다시 힘껏 해머를 휘두르는 순간.
바닥에서 솟아난 검은 넝쿨들이 단숨에 나를 낚아챘다.
“로웨나!”
대공이 다급하게 달려왔으나 술법진을 벗어날 수 없는 탓에 내게 닿지는 못했다.
“아가씨!”
필립과 해리도 내게 달려오려 했으나 쳐내도 쳐내도 끊임없이 생성되는 채찍 때문에 발이 묶여 버렸다.
“쯧,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모를 줄 알았더냐? 누가 카이스의 제자 아니랄까봐. 나를 너무 얕잡아 봤네.”
데이먼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왜 제일 쓸모없는 이놈부터 잡았겠어?”
데이먼이 손짓하자 그사이 기절한 애런의 몸이 허공에 힘없이 흔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일 것처럼 숨통을 죄던 건 멈추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어쩌지?’
암담한 상황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내 몸이 어딘가로 휙 당겨졌다.
“카이스, 이번에도 네 소중한 것이 내 손에 들어왔네?”
넝쿨을 이용해 대공 앞으로 나를 데려간 데이먼이 전리품을 자랑하듯 나를 흔들어댔다.
여태 밤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하던 금안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데이먼은 마치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대공을 자극하는데 더욱 열을 냈다.
“에이바를 네 눈앞에서 죽이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던지. 멍청한 황제놈만 아니었어도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 텐데 말이야.
뻔뻔하게 에이바를 언급한 데이먼은 정말로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순간 대공의 눈에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 어때? 고맙지?”
“……너는 여전하군.”
데이먼을 향한 차가운 시선엔 짙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데이먼은 그런 반응마저도 달갑다는 듯 상기된 얼굴을 했다.
“아니지.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그러니 네가 책임져야지.”
“네가 추방된 것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네 욕심이 널 그렇게 만든 것이지.”
“아니,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아기오와 너 때문이다. 아기오가 나를 인정만 해줬어도, 그가 너만 아끼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데이먼의 절규 어린 외침이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너보다 내가 먼저 선택 받았고, 능력도 내가 더 뛰어났다. 그런데도 아기오는 내가 아니라 너를 더 인정했지.”
“아기오는 신의 사자들을 모두 아끼셨다.”
“웃기는 소리. 내 대륙이 너의 것보다 더 강하고 부유했다. 그럼에도 나는 질책을 들었어. 그에 반해 인간들에게 무심한 너는 흡족해하셨지.”
“너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약한 것은 도태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야. 나는 그 과정을 단축시켜준 것뿐이야. 덕분에 역사상 가장 강한 제국을 탄생시켰지 않나.”
“아기오께선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길 원하셨다. 불필요한 희생을 삼가라 하셨지. 그런데 너는 그 모든 뜻을 어겼지 않나.”
대공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오께선 널 용서하셨지. 그런데 너는 어찌했나. 네 대륙도 모자라 나의 대륙까지 피로 물들이지 않았나.”
언젠가 대공이 데이먼에 관해 알려줄 때 신의 사자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었다.
아기오는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여섯 대륙을 만들었고 최초로 빚은 신수들에게 권능을 내려 각각의 대륙을 맡겼다고 했다.
인간들은 그들을 신의 사자라 부르며 그들을 통해 아기오와 소통했다고.
또한 각각의 신수들은 타 대륙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했었다.
데이먼은 대공의 반박이 퍽이나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 너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야 했으니까. 내가 키운 나라들이 네 것보다 더 강하고 뛰어나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고작 그 이유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켰던 것인가.”
대공이 분노와 환멸의 눈빛으로 데이먼을 노려보았다.
“고작이라니. 그것이 내 존재 이유인데! 넌 언제나 그랬어. 네가 받는 그 인정이, 애정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지. 그래서 더 화가 나. 네가 너무 증오스러워.”
“……내가 그리 미웠다면 내게 화를 내지 그랬어. 왜 죄 없는 에이바를.”
대공은 끝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기오가 너에게만 선물한 것이니까. 네가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원망과 증오를 담아 소리치던 데이먼이 작게 숨을 들이켜더니 나머지 말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너와 아기오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다. 내가 느낀 절망을, 슬픔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어.”
순간 넓은 지하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물론이고 필립과 해리도 분노로 몸을 떨었다.
“나는 버려져 진창을 구르고 있는데 네가 행복하면 안 되잖아. 안 그래?”
데이먼의 가느다란 입매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그러니 처절하게 후회하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워 해. 에이바가 죽은 건 네놈 때문이니까.”
그가 손을 까딱임과 동시에 나를 옭아맨 넝쿨이 갑자기 목덜미로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 여인도. 너 때문에 죽는 거야.”
데이먼이 정말로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아기오가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내 귀에는 더 이상 데이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목을 칭칭 감은 넝쿨이 서서히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컥!”
양손에 든 해머와 단검으로 넝쿨을 잘라버리려 했지만 온몸이 꽁꽁 묶인 터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하얘지며 귀가 멍멍해졌다. 심장은 쿵쾅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팔다리에서도 힘이 빠지며 손에 쥐고 있던 해머와 단검이 자꾸 미끄러졌다.
『경고!
플레이어의 상태가 위험합니다.
HP : 1000 / 1090 』
HP는 빠르게 떨어졌다. 900, 800…….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더 끔찍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안 돼. 이렇게 또 죽을 순 없어.’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던 순간 용광로 앞에 선 것처럼 엄청난 열기가 덮쳐왔다.
동시에 내 목을 조여오던 넝쿨들이 느슨해졌다.
“켁, 켁.”
갑자기 밀려든 공기에 기침이 격하게 터져 나왔다.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주군!”
해리와 필립의 다급한 외침에 겨우 눈을 들어보니 커다란 날개가 보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기도 하고, 이글거리는 태양 같기도 한 붉은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