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천장에 난 커다란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들며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반갑고도 익숙한 기운에 깊은 안도가 몰려왔다.
매섭게 날아오던 낫부리들은 나를 둘러싼 붉은 장막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로웨나, 괜찮나?”
걱정으로 일그러진 금안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안하다, 늦어서.”
괜찮다고,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고개만 젓자 대공이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대공은 혼자가 아니었다. 필립과 해리도 함께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잠깐 애런에게 닿았지만 금세 흩어졌다.
애런은 그들을 보며 안도하면서도 대공을 향한 시선엔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필립의 얼굴엔 깊은 자책이 서려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던 그가 사죄하듯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당장 다가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데이먼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신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하며 부러 밝게 웃자 필립의 굳은 얼굴이 조금 아주 조금 풀렸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때 데이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제야 그에게 가려져 있던 데이먼이 보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비딱하게 우리를 보고 있었다.
“고작 결계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고작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어때 마음에 들었어?”
대답은 대공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서 나왔다.
“좌표 교란에 미로와 환상 결계도 모자라 지뢰와 폭탄까지. 아, 마수들도 있었네요.”
짧게 손뼉을 치며 대답한 이는 해리였다.
무척 해맑은 음성이었지만 그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아, 그래서 시간이 걸렸던 거구나.’
데이먼이 꽤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여서 뭔 짓을 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해리의 심정이 공감이 되었다.
“뭐, 공을 들인 건 인정합니다. 우리 주군의 결계에 비해 조악해서 그렇지.”
생긋 웃으며 엿 먹이는 솜씨가 탁월했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먼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놈이 이제야 온 거냐? 내가 봐주지 않았다면 저 계집은 진작 갈가리 찢겨져 있었을 거다.”
데이먼이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자 대공의 표정이 흉흉해졌다.
그가 슬쩍 몸을 움직여 데이먼의 시선을 차단했다.
“내가 말했었지. 두 번 다시 내 것을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지. 그러나 넌 이번에도 지키지 못할 거야.”
“아니, 이번에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대공과 데이먼의 날 선 눈빛이 맞부딪치며 스파크가 일어났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오가 이번에도 널 도와주리라 믿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담담한 거야?”
무슨 소리냐는 듯 대공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신벌을 받고 있는 이에게 무슨 헛소리야.’
신이 도와줄 거였으면 에이바가 죽기 전에 도와줬겠지.
반려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대공에게 신벌을 내릴 게 아니라!
“……설마 모르는 건가?”
대공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데이먼이 순간 당황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데이먼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것인지 대공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먼이 고개를 들어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반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한 눈초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모르고 있다가 빼앗기는 게 더욱 절망스러운 법이지.”
왜 저러는 거지?
지난번 만났을 때도 음흉하게 굴긴 했지만 지금은 그의 생각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해리, 로웨나를 데리고 피해라.”
대공은 그 틈을 타 해리에게 속삭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해리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보랏빛 신력을 일으켰다. 아마도 순간이동술을 사용하려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해리와 나를 둘러쌌던 신력은 금세 흩어지고 말았다.
“……?”
“이런, 그사이를 못 참고 도망치려 하다니.”
데이먼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무슨!”
당황한 해리가 연속으로 이동술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동술은 결계로 진즉 막아놨지. 너희들 수작이야 뻔하니까.”
“주군.”
해리가 망연한 표정으로 대공을 불렀다.
“네 결계쯤이야 내가 뚫을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당연히 알지. 이 세상에서 내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이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야.”
데이먼이 요력을 피어 올리자 그의 몸이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재빠르게 내게 보호막을 씌워준 대공이 가디언들과 함께 나를 보호하듯 앞에 섰다.
대규모의 공격이 날아들 거란 생각에 우리 모두 긴장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돌바닥에 술법진이 나타나며 최상급 마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정말! 성질머리 고약한 건 여전하네.”
해리가 버럭 짜증을 내며 발을 굴렀다. 필립은 조용히 검을 꺼냈다.
“너희들은 로웨나를 우선적으로 지켜라.”
“맡겨만 주세요.”
“……알겠습니다.”
해리는 냉큼 대답했지만 필립의 대답은 조금 늦었다.
나보다도 대공을 우선적으로 지키고 싶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서운하진 않았다. 필립은 대공의 가디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공은 지금 신벌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지 않나. 혼자서 데이먼을 상대하는 건 분명 어려울 터였다.
“스승님, 저도 제 한 몫은 할 수 있어요.”
해리 경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어필해 보았지만 대공의 눈빛은 완고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도 당신이 걱정된다고요!
하지만 나는 속으로만 항의할 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고, 내 안위에 관해서라면 양보가 없는 대공이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야,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어디 얼마나 지킬 수 있는지 보자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데이먼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이미 지하 공간의 절반 이상을 채운 마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때부터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마수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나와 애런 그리고 가디언들은 정신없이 마수를 처리해야 했다.
붉은 신검을 꺼내든 대공은 데이먼에게 곧바로 뛰어들었다.
데이먼도 요력으로 검을 만들어 대공을 상대했다.
두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수를 주고받았고 어느 하나 쉬이 밀려나지 않았다.
애런은 그래도 몇 번 경험이 있다고 이전보다 능숙하게 마수를 처리했다.
어느새 마수들은 지하 공간을 꽉 채웠다.
거친 전투의 여파로 기둥이며 벽이며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천장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데이먼이 무슨 수를 써 놓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데이먼의 요력은 한정되어 있다. 그건 요력 게이지 바의 존재가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여유로워 보이지?’
데이먼은 대공과 상대하면서도 계속 마수를 불러들이고 있었고 지하 공간이 무너지지 않게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늑대형 마수를 해머로 쳐내며 데이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검은색의 요력 게이지 바가 떠 있었다.
‘저건 또 왜 저래?’
요력의 수치를 알려주는 바는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지만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게이지 바의 3분의 2 정도 되는 지점에서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설마 요력이 줄어들어도 다시 회복되고 있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물론 바깥에서 게임을 할 때는 포션이나 특수 아이템을 이용해 HP나 MP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데이먼은 플레이어가 아니지 않나. 내게도 회복 포션은 레어템인데.
‘……설마?’
순간 든 생각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해리, 아무래도 제단이 다른 곳에 더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해리에게 말을 건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리는 여유롭게 마수를 처리하며 내게 귀를 기울였다.
“데이먼의 요력이 계속 회복되고 있어요. 다른 곳에서 제물이 계속 공급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요력이 회복되다니.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근처에 있던 필립에게도 내 말이 들렸는지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눈에 보여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주군께서는 신력 사용에 제한이 있으신데.”
그래,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대공은 일정 이상 신력을 사용하면 제약을 받으니까.
“스승님께 빨리 상황을 알려드려야 할 텐데.”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필립이 크게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곧이어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간 노란빛의 덩어리가 대공에게로 날아갔다.
한창 데이먼과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던 대공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이야기가 전달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전력을 모아서 한 번에 공격해야 할 것 같아요.”
데이먼이 요력을 충전하지 못하도록 짧고 굵게.
“그럼, 이놈들부터 빨리 처리해야겠군요.”
해리가 마수를 또 한 마리 처리하며 눈을 빛냈다.
“저는 술법진을 살펴볼게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마수와의 싸움은 소모전이 될 뿐이었다.
‘데이먼의 술법은 스승님밖에 깰 수 없다고 했지.’
하지만 나도 가능한걸. 나는 무려 대공의 결계도 뚫은 사람이었다.
내가 술법진을 향해 나아가자 필립과 해리가 길을 뚫기 시작했다.
애런은 우리의 대화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나를 따랐다.
수백 마리의 마수들이 집중적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길을 뚫는 건 쉽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의 무아지경으로 마수들을 날려버렸더니 레벨 업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떴다.
마침내 술법진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축하합니다!
레벨 100을 달성하였습니다.
명성 스탯에 관한 부가 조건도 충족되었으므로 메인 퀘스트의 ‘조건 2’가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가슴이 벅차올라 환호성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마수들 때문에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쓰며 술법진 앞에 섰다.
“저를 엄호해 주세요.”
세 사람이 나를 둘러싸며 마수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주었다.
그 틈을 타 해머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지하 공간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진동이 일었다.
“저 계집이!”
뒤쪽에서 데이먼의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는 대공 때문에 이쪽으로 오지는 못했다.
내 공격에 잠시 멈추었던 술법진은 다시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마수들을 토해냈다.
‘발악을 하는군.’
나는 심드렁하게 그 광경을 보며 해머로 열심히 술법진을 내리쳤다.
요력을 쏟아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빛을 뿜어내던 술법진은 버티고 버티다 끝내 완전히 파훼되었다.
“휴우.”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다시 해머를 들어 올렸다.
술법진은 사라졌지만 이 안에는 아직 마수들이 남아 있었다.
이후로는 마수를 도륙하는 시간이었다.
간간이 데이먼의 욕설이 들리는 듯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빠르게 마수들을 처리하고 대공에게로 향했다.
그사이 데이먼은 곳곳에 상처를 입고 차림새도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반면 대공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공은 우리를 보자마자 신력을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의 신검이 새빨간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 순간 대공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대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강력한 힘에 떠밀려 그대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