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와,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
첫 번째는 결계를 깨뜨리기 위해 휘두른 것이지만 두 번째는 사심을 담아 날린 것이었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서.
생각 같아서는 분이 풀릴 때까지 해머로 때려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클로디안이 뻗어버리면 곤란했다.
그에게 맡길 일이 있으니까.
“전하, 데이먼의 결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금세 태도를 바꾼 나는 클로디안에게 천연덕스럽게 사과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클로디안이 원망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결계 문제라면 한 번이면 족하지 않나.”
클로디안은 충격의 여파가 큰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데이먼의 사술에도 당하셨을지 몰라 부득이하게 한 번 더 해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술이라고?”
“네. 애런도, 카밀라도 데이먼의 사술에 당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전하께서도 모르는 사이 사술에 당하신 건 아닌가 싶어 손을 쓴 거랍니다.”
클로디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지만 애런이 사실이라고 증언해 준 덕분에 더는 나를 추궁하지 못했다.
“전하, 카밀라를 데리고 얼른 여기를 나가세요.”
애런이 할 수 없다면 클로디안에게 맡기면 될 일 아닌가.
그래서 그의 결계를 풀어 준 것이었다.
나는 죽이려 했지만 카밀라는 보호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사람이니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겠지.
부서진 기둥에 몸을 기댄 클로디안이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내가 곱게 보내주니 의심스럽니?’
너에 대한 응징은 데이먼 다음이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데이먼이 카밀라를 보호할 생각이 없는 건 아시죠? 그러니 얼른 데리고 나가세요.”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카밀라, 전하와 함께 도망쳐요.”
“로웨나는요?”
카밀라가 다급하게 다가와 나를 붙잡았다. 연회색 눈동자가 불안과 걱정으로 잘게 흔들렸다.
“나는 저자에게 갚아줘야 할 게 있어요.”
카밀라는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지 내 손을 잡은 채 발만 동동 굴렸다.
“카밀라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날 도와주는 거예요.”
자신이 내 발목만 잡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카밀라가 힘없이 내 손을 놓아주었다.
“……꼭 무사히 돌아와요.”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아라크네 거미줄의 유효 시간이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해머는 상대를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전투 불능 상태로라도 만들어 놓아야 해.
데이먼이 쓰러진 곳을 향해 달려가자 애런이 뒤쫓아 왔다.
그런데 데이먼이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돌벽의 잔해들은 남아 있었지만 쓰러져 있어야 할 데이먼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아라크네의 거미줄(1)’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뭐?
당황도 잠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찾고 있나?”
“……어떻게?”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데이먼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시스템의 말대로 그를 칭칭 감고 있던 거미줄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번 건 꽤나 강력하더군. 빠져나오는데 애를 먹었어.”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아기오의 결박술은 여러 번 당해봐서 파훼 방법을 잘 알거든. 더구나 각성조차 못한 애송이가 쓰는 권능이야 내게 상대가 안 되지.”
각성이라고? 저게 무슨 소리지?
데이먼은 내가 알아들 수 없는 말들만 나열해댔다.
“재미있군. 자각도 못하고 있다니. 카이스 그놈만 알고 있었던 건가?”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며 데이먼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와 애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우리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굉음과 함께 우리 사이로 돌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애송이, 넌 내 상대가 안 된다니까.”
나는 데이먼의 빈정거림을 무시하며 반대편으로 피한 애런을 향해 눈짓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는 금방 내 뜻을 알아차렸다.
‘아라크네의 거미줄.’
속으로 스킬을 외치자 목표물을 변경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떴다.
나는 빠르게 아니오를 선택하고 목표물을 데이먼 한 명으로 고정시켰다.
애런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손에 쥐고 있던 뭉치 두 개를 데이먼에게 던짐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반대편에 있던 애런도 데이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리석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미줄을 보며 데이먼이 비웃었다.
‘하나가 안 되면 두 개를 사용하면 되지.’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데이먼을 결박시킬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은 벌어주겠지.
역시나 데이먼은 날아드는 거미줄을 자르지는 못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여유로워 보였지만 찌푸려진 눈매에선 감추진 못한 짜증이 엿보였다.
두 개의 거미줄이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데이먼을 옭아맸다.
가만히 거미줄을 내려다본 그가 새하얀 거미줄을 잡아 뜯을 듯 쥔 채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이런 틈이야.’
“애런!”
내 신호를 받은 애런의 검에 푸르른 오러가 입혀졌다.
푹!
“윽.”
날카로운 검신이 데이먼의 복부를 찌른 뒤 재빠르게 뒤로 빠졌다.
뒤이어 내가 힘차게 해머를 휘둘렀다.
정통으로 해머에 맞은 데이먼이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컥!”
나는 부옇게 일어난 흙먼지 위로 깜박거리는 상태 바를 바라보았다.
HP 바가 보이는 마수와는 달리 데이먼의 머리 위에는 요력 게이지를 보여주는 긴 막대기가 보였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모두 소진하면서 틈을 만들었던 이유.
첫 거미줄을 날리고 해머를 휘둘렀을 때 데이먼의 머리 위로 요력 게이지 바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미미하긴 했지만 분명 내 공격으로 인해 그의 요력이 줄어들었었다.
해머의 신력이 마수의 사기(邪氣)를 정화시켜 소멸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로 데이먼의 요력도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데이먼의 요력엔 한계가 있어.’
그래서 계속 제물이 필요했던 게지. 요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머 두 번의 위력이면 최상급 마수도 처리할 수 있는데 데이먼은 겨우 손톱만큼의 요력만 소실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금 데이먼에게 달려갔다.
애런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은 데이먼이 아직 거미줄에 묶여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유효타를 날릴 수 있겠어.’
쓰러져 있는 데이먼을 향해 해머를 휘두른 순간.
“로나!”
애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듯 응축된 힘이 폭발했다.
강력한 힘의 파동에 휩쓸린 나는 몸이 붕 떠올랐다. 뒤이어 누군가 나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퍽!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드니 시야에 단단한 가슴팍이 보였다.
나는 애런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후다닥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애런, 괜찮아?”
“로나, 윽.”
다급하게 일어나던 애런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웅크렸다.
추락하는 나를 안고 굴렀으니 괜찮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를 살필 겨를은 없었다.
뒤에서 엄청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데이먼이 보였다.
이미 거미줄을 끊어낸 그는 검은 불꽃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요력을 두르고 있었다.
“하, 감히 쥐새끼 주제에 내 몸에 상처를 내?”
데이먼이 애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가 가볍게 손을 젓자 복부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대신 그의 요력 게이지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상처가 꽤 깊었나 보네. 게이지가 많이 줄어든 걸 보니.’
하긴 일반적인 검이 아니라 오러에 당했으니까.
보통 사람이었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위급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공격 스킬도 방어 스킬도 모두 쿨타임에 들어가서 데이먼을 붙들어 놓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은의 망토’를 쓰고 공격을 해 볼까?
순간 ‘은의 망토’를 쓰고 있을 때 대공이 나를 알아봤던 것이 생각났다.
타락했다고 해도 과거 신수였던 자라면 내 스킬을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몰라.
봐, 지금도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쉽게 끊어내지 않았나.
‘정말 어쩌지?’
힐끗 옆을 보니 클로디안과 카밀라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있는데 데이먼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요력을 일으켰다.
“카이스가 올 때까지 놀아주려고 했는데 아쉽군.”
비릿하게 입매를 비튼 데이먼이 허공에 손을 뻗자 검은 연기가 모여들며 거대한 사신의 낫이 나타났다.
“이 낫은 상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그러니 잘 피해 보거라.”
데이먼이 자신보다도 큰 낫을 휘두르자 거센 바람과 함께 번뜩이는 칼날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해머를 들어 막아냈으나 낫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낫의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건 애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을 새도 없이 바로 움직여야 했다.
거대한 낫은 거침없이 공기를 가르고, 바닥을 내리쳤다.
낫에 닿기만 해도 생명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애런과 나는 각각 검과 해머로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칼날에 몸이 닿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덕분에 우리는 여러 번 바닥을 굴러야 했다.
쾅! 쿠궁!
우리가 있던 공간은 머지않아 흙먼지와 함께 굉음이 난무했다.
조만간 기둥이 모두 부서져 천정이 내려앉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나 애런 모두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데 점점 숨이 가빠왔다.
부연 흙먼지로 시야 확보도 잘되지 않는 데다 여기저기 부서진 돌조각들로 인해 움직임이 원활치 않았다.
‘젠장, 스승님은 언제 오시는 거야?’
전령새를 부르는 피리를 불고 싶었지만 데이먼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여력이 없었다.
막 데이먼의 공격을 막아내고 고개를 돌리는데 애런의 등 뒤로 날아드는 창이 보였다.
애런은 앞으로 짓쳐드는 낫을 막아내느라 뒤를 살필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 비열한 새끼가.”
자욱한 흙먼지로 인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점을 노린 게 분명했다.
때마침 내가 애런 가까이로 구르지 않았다면 나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정공법으로 나온 게 더 이상했지.’
나는 지체 없이 달려가 애런을 향해 날아드는 창을 해머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애런을 구했다고 안심하던 찰나,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날카로운 낫날이 나타났다.
몸을 숙이며 해머를 휘두른 순간, 커다란 낫날이 갑자기 여러 개로 늘어났다.
마치 분신술을 한 것처럼.
그러더니 곧바로 뾰족한 낫부리들이 나를 내려찍으려는 듯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다 막아낼 순 없어.’
본능적인 감이었다.
해머의 회오리 기능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보다 낫부리가 나를 찍어버리는 것이 더 빠를 터였다.
“로나!”
뒤에서 애런의 외침과 함께 나를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하지만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최대한 크게 해머를 휘둘렀다.
역시나 나를 향해 짓쳐드는 낫부리를 모두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머를 계속 휘둘렀지만 끝내 다리를 향해 날아드는 것들은 막아내지 못했다.
이어질 고통에 입술을 짓씹는 순간.
쾅!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진동과 함께 기다리던 음성이 들려왔다.
“로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