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너, 아기오의 권능을 받았구나!”
‘천공의 방패’를 향한 데이먼의 눈빛이 희열과 증오로 번들거렸다.
‘아기오의 권능이라고?’
이건 시스템이 준 건데?
스킬뿐이겠나. 해머도 다른 아이템들도 모두 시스템이 준 것이지 않나.
그러나 데이먼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굳이 신의 권능을 언급하며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시스템, 너 뭘 숨기고 있는 거냐!’
무기와 아이템들이 마력이 아니라 신력을 근간으로 할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어.
아니, 대공의 결계를 뚫고 대공저로 들어간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
“인간이 어떻게 아기오의 권능을 사용하는 거지?”
데이먼의 경계 어린 눈초리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왠지 골치 아픈 일에 엮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 탓이었다.
『 00 : 01 : 28 』
힐끗 시스템창을 보니 스킬 유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단은 거의 다 부서져 잔해만 남은 상태였다.
‘제단을 만드는데도 많은 요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당장 또 새로 만들지는 못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부서진 제단을 바라보는 데이먼의 눈빛이 흉흉했다.
그 틈에 나는 카밀라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드리우스의 날개’
『액티브 스킬 ‘칼라드리우스의 날개’가 활성화됩니다.』
칼라드리우스의 날개는 베어둘스 퀘스트를 완료하고 받은 치유 스킬이었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데 환자의 상태에 따라 GP가 소모되었다.
‘약물에 취한 사람도 깨울 수 있을까.’
카밀라가 움직일 수 있다면 좀 더 손쉽게 데이먼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데이먼과의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GP를 신중하게 분배해야 하지만 수면제 해독 정도는 GP가 별로 들 것 같지 않았다.
대강의 예상치를 계산한 후 카밀라의 몸에 손을 대자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GP가 줄어드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으음.”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이내 연회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됐다.’
나는 카밀라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손을 뗐다.
GP는 20 정도로 생각보다 적게 들었다.
그때 데이먼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얼굴로 달려왔다.
“너!”
당장 나를 붙잡을 것처럼 손을 뻗었지만 천공의 방패 때문에 내게 닿지는 못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너, 방금 그 힘 뭐야!”
힘이라고? 무슨 힘?
아, 방금 사용한 ‘칼라드리우스의 날개’를 말하는 건가?
그건 아주 잠시 사용했을 뿐인데 왜 저리 흥분한 건지?
데이먼은 성난 황소처럼 발을 구르며 당장 대답하라고 소리쳐댔다.
그 외침 사이로 카밀라의 여린 음성이 들려왔다.
“하퍼 경?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데이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탓에 애런이 현재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카밀라는 자신이 납치되어 미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눈만 깜빡거렸다.
『스킬 ‘천공의 방패’ 유효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00 : 00 : 20』
이런. 데이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대로 방패가 해제되면 모두 위험해진다.
“애런, 카밀라를 데리고 도망쳐.”
“싫어. 너 혼자 두고 어떻게 가.”
“스승님께서 곧 오실 거야.”
“……널 두고는 절대 안 가.”
타협의 여지는 없다는 듯 단호한 음성이었다.
곧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떴다.
『스킬 ‘천공의 방패’의 유효 시간이 다 되어 스킬을 비활성화합니다.
쿨타임 48 : 00 : 00 』
“애런, 카밀라를 보호해!”
우리를 둘러쌌던 하얀색 방패가 사라지는 순간 애런에게 소리치며 해머를 휘둘렀다.
갑자기 방패가 사라지는 바람에 주춤했던 데이먼이 해머를 피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는 곧바로 요력을 일으켜 공격을 맞받아쳤다.
쾅!
상충되는 기운이 맞붙으며 강한 반동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나와 데이먼 모두 뒤로 밀려났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카밀라는 애런의 보호 아래 무사했다. 다만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헛웃음이 들려왔다.
“하, 이렇게 빼돌려 놓았을 줄이야.”
충복에게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데이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쟨 또 왜 저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여유롭던 태도는 사라지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카이스가 일개 인간을 보호하는 게 이상하다 했었어. 아기오, 이 빌어먹을 신이!”
영문 모를 말을 중얼대던 데이먼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든 건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건가.’
원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정말로 돌아버린 것 같았다.
“그냥 신력만 빼먹고 버리려고 했는데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역시 내 신력을 노린 거였어.
나 하나로 수만 명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건 아마도 신력 때문인 모양이었다.
내 신력을 판타시아 궁을 위해 쓸지 아니면 요수 자신의 요력을 강화하는데 쓸지는 알 수 없지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난 회차에서 클로디안은 왜 나를 제물로 바쳤던 걸까.
그 당시 내겐 신력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1회차 때 애런도, 2회차 때 클로디안도 혼자가 아니었었지.
두 사람 다 검은 후드를 쓴 키 큰 남자와 함께 제단을 찾아왔었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데이먼과 그 뒤에 있는 클로디안을 찬찬히 시야에 담았다.
아까는 갑자기 나타난 저들을 경계하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데이먼은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클로디안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저 목소리.
과거 제단을 찾아왔던 남자는 두 번 모두 같은 말을 했었다.
“시간이 없다. 물러서라.”
단 두 마디뿐이지만 2회차 때 매일같이 그 순간을 악몽으로 꾸다 보니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었다.
지난번 데이먼에게 납치되었을 때는 제단과 연관되어 있는 줄 몰랐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과거와 닮은 장소에 그때의 구성원들이 모여 있는 탓일까.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며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 남자가 데이먼이었어.’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것처럼 얼얼하면서도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의문이 떠올랐다.
‘애런은 어떻게 데이먼과 함께 있었던 거지?’
클로디안은 황실의 저주 때문이라고 쳐. 데이먼은 왜 애런의 연인을 살리는데 도움을 준 걸까?
1회차 때도 내겐 신력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해.’
나는 광기로 번뜩이는 데이먼의 흑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날 세 번이나 죽이려 했다 이거지?’
아니지, 두 번은 날 죽이려고 시도만 한 게 아니라 진짜로 죽였지.
분노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데이먼이 나보다 먼저 분노를 쏟아냈다.
“이번에야말로 카이스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이번에야말로? 설마 이전 회차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그랬다면 저리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아기 머리통만 한 검은 구체들이 허공에 가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셋을 다 죽일 셈이야.’
더 이상 쓸 수 있는 방어 스킬이 없었다.
해머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었다.
“안 돼! 데이먼!”
결계에 갇힌 클로디안의 절규와 함께 수십 개의 구체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구체를 본 순간부터 열심히 돌리고 있던 해머를 있는 힘껏 날렸다.
‘지금으로선 해머의 회오리 기능밖에는 막을 방법이 없어.’
해머를 중심으로 생겨난 회오리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며 점점 더 몸집을 불렸다.
그 여파로 나와 데이먼의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거렸다.
콰과과광!
해머가 일으킨 회오리에 검은 구체들이 잡아먹힐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공간이 울려댔다.
해머는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데이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구체가 너무 많았던 탓에 해머가 미처 막아내지 못한 것들이 나를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쾅! 쾅!
다행히 그건 애런이 막아냈다.
오러를 입힌 검이 구체를 쳐낼 때마다 그 반동으로 뒤로 밀려났지만 애런은 재빠르게 다시 앞으로 달려와 구체를 막아냈다.
그러지 않으면 카밀라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실력이 늘었네.’
이전에는 오러 유지 시간이 짧고 오러도 정제되지 않았었는데 그사이 벽을 넘은 모양이었다.
애런은 구체를 부수지는 못해도 다른 곳으로 날려 버릴 수는 있었다. 그로 인해 벽과 기둥 곳곳이 부서져 내렸다.
한편 코앞에서 구체를 마주한 카밀라는 새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애런과 카밀라를 보호하며 전방위로 공격해대는 데이먼을 막아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럭저럭 막아냈지만 다음에도 애런과 카밀라를 지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해머가 지나간 궤적 사이로 다음 공격을 위해 요력을 일으키고 있는 데이먼이 보였다.
나는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오는 해머를 낚아채며 스킬을 외쳤다.
‘아라크네의 거미줄’
『액티브 스킬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활성화합니다.
목표물을 지정해 주세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시야에 십자 표식이 생겨났다.
나는 손으로 표식을 끌어 데이먼에게 맞추었다.
『목표물을 지정했습니다.
목표물은 3개까지 지정 가능합니다. 다른 목표물을 추가하시겠습니까?』
한 번에 3개까지 사용할 수 있다더니 동시다발적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아니오를 선택하자 손에 누에고치처럼 새하얀 실뭉치 같은 게 생겨났다.
그걸 데이먼을 향해 던지자 실뭉치가 좌라락 펼쳐지더니 새하얀 거미줄이 완성되었다.
거대한 거미줄은 단숨에 데이먼을 결박시켰다.
작은 실공이 날아오는 줄 알고 비웃고 있던 데이먼이 뒤늦게 요력으로 거미줄을 찢어버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의 공격에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은 거미줄은 사냥감을 포획하듯 데이먼을 칭칭 감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칼날들이 힘을 잃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능력도 봉인한다더니 대단하네.’
『아라크네의 거미줄 한 개가 목표물을 포획했습니다.
거미줄 (1)의 지속 시간
00 : 10 : 00 』
거미줄이 데이먼을 얽맨 순간부터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 같잖은 수작을!”
짜증스럽게 내뱉은 데이먼이 거미줄을 찢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요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나는 데이먼의 능력이 봉인되었음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시원하게 해머를 휘둘렀다.
쿵!
해머에 맞은 데이먼이 뒷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다음은 너다.”
나는 지난 회차부터 쌓아왔던 울분을 담아 클로디안을 향해 힘껏 해머를 휘둘렀다.
“억!”
제단이 있던 자리로 날아간 클로디안이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요수의 결계는 해머에 의해 깔끔하게 파훼되었다.
“또다시 나를 죽이려 했겠다. 내가 그렇게 우습니?”
지난 회차 때 클로디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며 나는 또다시 해머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클로디안이 애런 근처에 있는 기둥으로 날아가 박혔다.
“컥, 컥.”
바닥에 떨어진 클로디안이 거센 기침을 토해내며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