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로나,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목표였다니. 전하께서 네게 해를 입히실 리가 없잖아.”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애런이 다급하게 클로디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아니죠? 전하께서 로나에게 그러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발 아니라고, 오해였다고 대답해 달라는 듯 애런의 음성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하퍼 경.”
“전하!”
애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충격과 혼란의 도가니에 찬물을 끼얹은 건 내 웃음이었다.
“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메아리처럼 퍼져 나갔다.
몸을 떨며 웃고 있는 나를 클로디안과 애런이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데이먼은 곧 죽을 미물의 마지막 발악을 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나를 감상했다.
‘아, 너무 웃겨.’
제단 엔딩만은 피하고 싶어서 그토록 발버둥 쳤는데.
심지어 제단까지 부쉈는데도 또다시 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너무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로나.”
애런이 걱정스럽게 나를 붙들었지만 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한바탕 웃었더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고 내 앞에 있는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나를 죽였던 자들이 한자리에 다 모여 있었다.
시스템이 내게 자비를 베풀어 준 건가?
나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카밀라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전하를 위해서입니까?”
한 번은 꼭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죽인 것이냐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나를 버린 것이냐고.
너무 해묵어 곪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물음이 마침내 입 밖으로 토해지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도 아니면 여기 있는 데이먼을 위한 일입니까?”
클로디안은 대답하지 않을 요량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밀라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이신 건가요?”
과거의 당신이 말했던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때도 카밀라였을까. 애런처럼 당신도 내가 모르는 사이 카밀라와 만나고 있었던 걸까.
문득 ‘그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매혹술이 파훼되었음에도 클로디안은 벼랑에 몰린 사람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인지가 아니라 왜 나여야만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복잡했던 머리가 순간 명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한참 고민하던 클로디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한여름의 녹음처럼 싱그럽게 빛나던 녹안은 버려진 늪지대처럼 혼탁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고뇌와 혼란으로 허우적대는 눈동자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매혹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깨닫고 만 것이다. 저주의 무게를.
판타시아 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역대 황제들의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는 조소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황실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황족이 사랑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이 죽게 되는 저주지요.”
클로디안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내가 판타시아 궁에 들어갔을 때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굳이 저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애런 때문이었다.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해야 그도 어느 편에 설지 판단을 내릴 테니까.
내 편에 서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내 일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예상대로 저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애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래서 추모탑 아래 제단을 만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쓰신 게 아닙니까? 황제 폐하의 연인을 위해서.”
옆에서 애런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대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 아닌가.”
담담히 나를 응시하던 클로디안이 애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맞물렸으나 어느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불편한 침묵을 깨트린 건 나였다.
“그래서 진정 저를 죽이실 생각인 겁니까?”
“……미안해, 영애. 나로선 이게 최선이야.”
애런이 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검을 들었다.
“전하, 로나에게 손대면 전하라고 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제 품에 누가 있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애런이 카밀라를 단단히 붙들며 클로디안을 직시했다.
“하퍼 경, 그대까지 잃고 싶지 않네.”
“전하, 이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함이라 하면 이해해 줄 수 있겠나?”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주길 바랐는데. 실소가 흘러나왔다.
“전하, 제 죽음도 무고한 희생입니다. 아무리 전하라고 하셔도 제 목숨의 무게를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겁니다.”
분노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저들에겐 분노조차 아까우니까.
그런데 ‘무고한 희생’으로조차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데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전하를 위해, 황실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인지요? 전하께서 무슨 자격으로 제 생사 여부를 결정하시는 겁니까?”
지워진 시간 탓에 그 누구에게도 쏟아내지 못하고 혼자서 참고 또 참아왔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가에 힘을 주었다.
저들에게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 절규 어린 외침이 퍼져 나간 자리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클로디안의 녹안이 어둡게 침잠해갔다.
그때 가벼운 음성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흐트러뜨렸다.
“목숨의 무게는 같지 않아. 죄수와 귀족의 목숨이 어찌 같을 수 있어.”
데이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설령 같다고 해도 수만 명의 목숨을 한 명의 목숨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지 않겠어?”
“그게 무슨 말이지?”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애런이 날카롭게 물었다.
“황족의 연인을 몇십 년간 살려두는데 수만 명의 제물이 필요하지. 그런데 이 아가씨 한 명만 있으면 다른 제물은 필요 없어.”
“궤변이군. 대체 무슨 수작인 거지? 로나를 노리는 이유가 뭐야?”
애런이 데이먼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하퍼 경, 진정하게. 나도 쉽게 결정한 일이 아니야. 이대로 무고한 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나?”
“정녕 그 죽음을 막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 전하의 연인이 희생되면 될 일 아닙니까. 한 명으로 수만 명을 구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신랄한 반박에 클로디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애초에 황실의 잘못으로 저주를 받아놓고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겁니까?”
애런은 세간에 퍼져 있는 소문들과 지금의 상황을 연결시켜 퍼즐을 모두 맞춘 모양이었다.
“전하의 연인만 소중합니까? 로나도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묵직한 진심에 클로디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저를 죽이지 않고는 절대 로나에게 손끝 하나 대실 수 없을 겁니다.”
그의 검이 제 주군인 클로디안에게로 향했다.
클로디안도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쉬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
“역시 카이스가 아끼는 건 뭔가 달라도 달라.”
농담처럼 가벼운 어투가 또다시 긴장감을 흩뜨려 놓았다.
“뭐, 이대로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데이먼의 기세가 달라졌다.
여태 구경꾼처럼 방관하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마 눈치챈 건가?’
데이먼과 클로디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댔던 건 비단 오랜 의문을 풀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저들의 목적을 캐내기 위함과 동시에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대공이 찾아올 수 있도록.
처음부터 내 힘만으로 요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공이나 요수나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니.
다만 나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는데 지금은 지켜야 할 이들이 있었다.
그게 내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필립이 목격했으니 바로 알렸겠지.’
내가 아직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 신호는 가지 않았겠지만 대공이라면 충분히 추적해 올 수 있으리라.
“뭐, 그렇다고 기대는 하지 말고. 카이스 그놈이 내 결계를 뚫고 들어오기 전에 널 처리할 생각이니까.”
대공이 여길 찾아낸 건가? 그렇다면 해볼 만할지도.
“스승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스승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제에.”
데이먼을 보며 비웃자 미려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계집. 어디 계속 나불거려 보거라.”
그의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요력이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맹렬하게 날아왔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애런을 뒤로 밀쳐내며 해머를 휘둘렀다.
쾅!
상충되는 기운이 맞부딪히며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굉음이 났다.
다행히 요력이 소멸되며 공격이 무산됐지만 마치 내가 나설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애런의 뒤로 검은 손아귀가 뻗어왔다.
“애런, 뒤!”
애런이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나처럼 요력을 소멸시키는 못하는 탓에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갔다.
“윽.”
기둥과 부딪힌 애런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다행히 그가 카밀라를 감싸 안은 덕에 그녀는 무사했다.
“쯧, 그 여인에게 손댈 생각은 없다니까. 안 그렇습니까, 전하?”
카밀라를 데려오려 했을 뿐이라며 데이먼이 억울한 척을 했다.
“하퍼 경, 카밀라를 이리로 보내게.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지 마.”
“카밀라는 못 보냅니다.”
애런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영애, 그녀는 내 약혼녀다.”
“그래요. 카밀라는 전하의 약혼녀이지요. 전하의 목적을 위해 소모되는 수단이 아니라.”
저들 말대로 목적이 나라면 카밀라를 해칠 생각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제 약혼녀를 미끼로 쓴다는 것 자체가 글러 먹은 것이 아닌가.
내 빈정거림을 알아들은 클로디안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제 와 카밀라를 아끼는 척하지 마십시오. 데이먼의 매혹술에 놀아난 것도 모르는 주제에.”
“매혹술? 그게 무슨 말이지?”
“전하, 아무래도 전하의 여인을 되찾는 건 뒤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내내 방관자처럼 굴던 데이먼이 매혹술이 언급되자 바로 끼어들었다.
“데이먼, 그게 무슨 소리인가. 카밀라부터 보호해야지!”
데이먼이 성가시다는 듯 가볍게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클로디안을 둘러싼 검은 결계가 생겼다.
“데이먼!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풀지 못하겠나?”
그가 결계를 깨기 위해 힘껏 두드려 댔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조용히 지켜보기나 하십시오. 원하는 대로 떠먹여 드릴 테니.”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데이먼이 본격적으로 요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회오리가 일며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저자는 날 원한다. 단순히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제물로.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음침한 기운을 내뿜는 제단으로 시선이 향했다.
“순순히 내게 오면 곱게 대해 주지. 어떤가.”
그가 재미난 일을 앞에 둔 아이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개소리. 오늘 여기서 죽게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거다.”
“그래? 어디 네 말이 맞을지 한 번 알아볼까?”
데이먼이 키득거리며 허공에 수십 개의 화살들을 만들어냈다.
“로나, 물러서!”
다급하게 달려온 애런이 검을 치켜들며 내 앞에 섰다. 힐끗 뒤를 보니 기둥 아래 누워 있는 카밀라가 보였다.
‘카밀라까지 보호하려면 해머로는 안 되겠어.’
나는 바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천공의 방패”
『액티브 스킬 ‘천공의 방패’를 활성화합니다.
00 : 05 : 00 』
해머에서 하얗게 빛이 나며 거대한 방패가 내 앞에 나타났다.
콰과과광!
수십 개의 화살이 방패에 꽂히며 공간을 뒤흔들 정도로 큰 굉음이 이어졌다.
나는 그 틈에 제단으로 달려갔다.
내가 움직임에 따라 방패도 따라 움직였다.
제단은 나와 데이먼 사이에 있었기에 내가 제단으로 향해도 애런과 카밀라는 여전히 방패의 보호 범위 안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지 알아챈 요수가 더욱 매섭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귀청이 나갈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계속 울려 퍼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난번과 달리 요력으로 제단을 보호해 둔 바람에 이 역시도 쾅쾅거리며 요란한 소리들이 났다.
그 순간 나를 향한 데이먼의 안광이 맹수의 것처럼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