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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25)화 (125/140)

125화

“정말 이동 흔적이 없네요.”

주위를 꼼꼼하게 살핀 슐레만 경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발걸음에 짓밟힌 풀들과 죽은 기사와 시녀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들은 보였지만 그 외에 바깥으로 이어진 흔적은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피로롱.

그때 근처 나무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슐레만 경과 애런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무로 향했다.

“아가씨, 이곳에서 요력이 느껴집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필립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곳에서 나는 악취로 눈치채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어.’

이동 흔적 없이 사람만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순간이동.

이로써 범인은 요수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카밀라가 사라진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요력이 남아 있다는 게.

그러고 보니 필립의 말도 어딘가 이상했다.

요력의 흔적이 아니라 요력이 느껴진다고 말하지 않았나.

“두 사람 다 이리로 와 봐요.”

“아가씨?”

“로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슐레만 경과 애런이 의아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해머를 소환한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핏자국이 없는 곳까지.

“얼른 내 뒤로 와요. 빨리요.”

슐레만 경과 애런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해머를 들고 있는 나를 보고 애런이 긴장했다.

“여기 뭐가 있는 것 같아.”

내 말에 애런과 슐레만 경 모두 검집에 손을 올리며 경계했다.

‘탐지 기능’

『해머의 탐지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해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더욱 긴장했다.

나는 해머를 휘휘 돌리다 던졌다.

주위를 빠르게 날아다니던 해머가 어느 장소에 우뚝 멈추었다.

성인 여자의 앉은키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바위에 술법을 새겨놓은 건가?’

아니면 바위 아래 매개체를 숨겨 놓은 건가?

뭐가 됐든 바위를 부수는 게 먼저였다.

조심조심 걸어가 해머를 잡은 순간.

발밑에 기묘한 술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로나!”

“아가씨!”

뒤에서 애런과 슐레만 경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금세 멀어졌다.

시야가 까매지고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한 감각이 이어졌다.

“윽.”

그러다 둔탁한 통증과 함께 추락이 멈췄다.

뒤이어 퍽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삐걱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주시했다.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운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머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로나, 괜찮아?”

“애런?”

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같이 떨어진 건가? 어떻게?

“정말 애런, 너 맞아?”

“응, 너 붙잡으려고 뛰어갔는데 갑자기 뚝 떨어졌어. 다친 곳은 없어?”

“없어. 너는?”

“나도 괜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냉기와 습하고 쾨쾨한 냄새가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나는 해머의 탐지 기능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해머에서 은은한 빛이 나며 바닥에 앉아 있는 애런이 보였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일어날 수 있겠어?”

“어.”

애런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횃불 하나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맞은편 어둠을 향해 차례로 횃불이 타올랐다.

기시감이 드는 상황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기둥마다 꽂혀 있는 횃불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점점 어둠이 물러났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을 마주하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곳은, 이곳은…….

내가 두 번이나 죽임을 당했던 장소와 닮아 있었다.

아니, 공간의 크기만 넓어졌을 뿐 구조가 똑같았다.

바닥과 벽을 채운 네모반듯한 돌들,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는 둥근 기둥.

그리고 기둥마다 꽂혀 있는 횃불들.

매캐한 기름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냄새까지 뭐 하나 같지 않은 게 없었다.

하나 지난번처럼 두렵진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언가를 담담히 기다렸다.

마침내 마지막 횃불까지 모두 밝혀지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웅장한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가장 두렵고 증오스러운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차가운 돌덩이로 여겨질 뿐이었다.

“여긴……!”

추모탑 지하와 같은 구조라는 걸 알아차린 애런이 당황을 드러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상념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제단 위에 흐트러진 보랏빛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발이 먼저 움직였다.

‘제발 아니길.’

제단을 향해 달려가면서 빌고 또 빌었건만 신은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카밀라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걸 뒤따라온 애런이 붙잡아 주었다.

“어? 공녀가 왜 여기에…….”

뒤늦게 카밀라를 확인한 애런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게. 카밀라가 왜 제단에 있는 것인가.’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이지 않나.

아무리 요수라고 해도 황족의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을 텐데.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지난 회차에 당한 일을 잊었는가.

나도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제물이 되어야 했지.

그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카밀라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

‘이것만큼은 막고 싶었는데.’

이 상황을 막지 못한 답답함과 짜증? 클로디안과 요수에 대한 분노? 시스템에 대한 원망?

뭐라 특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길게 숨을 뱉어냈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으나 카밀라를 향해 쉬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창백한 낯이며 미동조차 없는 모습이 정말로 죽은 사람 같아서.

그때 기다란 팔이 불쑥 앞으로 뻗어나갔다.

카밀라의 코끝에 멈춰 선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안심해. 공녀는 아직 살아있어.”

안도의 숨과 함께 들려온 나지막한 음성에 나도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카밀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일단 카밀라부터 구하자. 곧 요수가 올지도 몰라.”

요수를 언급하자 애런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캉! 캉!

주저 없이 검을 꺼낸 애런이 카밀라를 옭아매고 있는 사슬을 끊어냈다.

나도 해머로 거들었다.

“카밀라, 카밀라.”

어깨를 흔들며 깨워 봤지만 카밀라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약을 먹인 건가?’

대공의 조치로 술법에 또 걸리진 않았을 텐데.

혹시나 싶어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예상대로 악취는 나지 않았다.

“공녀는 내가 안을게.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애런이 조심스럽게 카밀라를 일으켜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때 갑자기 지독한 악취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짝짝짝.

“귀하신 손님이 드디어 찾아왔군.”

박수 소리와 함께 언젠가 들어봤던 미성이 들려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애런이 카밀라를 단단히 추슬러 안으며 낯선 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쯧, 날파리 한 마리가 따라붙었네.”

사내의 냉랭한 시선이 애런을 향했다.

“너희는 누구냐!”

“나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거 서운한데?”

사내가 후드를 벗자 결 좋은 금발과 미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대공이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라면 이 사내는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그에 반해 끝도 없는 어둠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했다.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없다.”

애런이 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아, 그렇군. 그럼, 이 모습이라면 기억할까?”

사내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자 순식간에 슐레만 경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애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수, 데이먼을 향해 겨눠진 검 끝에 살기가 어렸다.

“데이먼, 우리도 구면이지?”

“오호, 귀하신 분께서 내 이름도 알고 있다니. 이거 영광인데?”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데이먼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카밀라에게 손끝 하나 대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아, 그 여인에게 손댈 생각은 없어. 내 협력자께서 귀히 여기는 여인이거든.”

“협력자?”

그제야 요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제단 그리고 후드를 눌러 쓴 두 사람.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 아닌가.

나는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제대로 짚은 것인지 후드를 쓰고 있는 이가 움찔했다.

“황태자 전하시라고?”

애런의 당황 어린 외침이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자 그자가 마지못해 걸어 나왔다.

후드를 벗는 손길에 잠시 망설임이 묻어났지만 이내 얼굴을 드러냈다.

“전하!”

“미안하네, 하퍼 경. 자네까지 엮이게 될 줄은 몰랐어.”

“전하, 저자가 공녀를 인질로 협박을 한 것입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클로디안에게 묻는 애런의 음성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요수를 공격할 태세인 애런의 모습에 클로디안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클로디안이 대답을 회피하겠다면 내가 대신 진실을 알려주면 될 일이었다.

“전하, 제가 목적이었던 겁니까?”

“로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애런의 경악 어린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우스울 뿐이었다.

“데이먼이 절 원했던 모양이로군요. 전하께서는 동의하셨고. 그렇죠?”

카밀라에게 손댈 생각이 없었다는 데이먼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카밀라가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다.

이번에도, 또 이번에도 제단에서 죽어야 하는 이는 나였던 것이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클로디안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그래, 너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구나.’

실망이나 원망은 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신뢰는커녕 기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대였으니.

단지 또다시 같은 상황에 몰린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입 안이 텁텁할 뿐이었다.

“역시 카이스의 제자답군. 단번에 눈치채다니.”

반면 데이먼은 즐겁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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