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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24)화 (124/140)

124화

카밀라에게 걸려 있던 술법은 다행히 파훼되었다. 악취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영문 모를 상황에 카밀라가 당황하긴 했지만 잘 둘러대며 안심시켰다.

폴루티아의 독기에 영향을 받았을까 봐 걱정되어 정화시켜 준 것이라고.

카밀라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대공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게도.

“카밀라, 우리와 함께 돌아가지 않을래요?”

요수가 카밀라에게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대로 그녀를 남겨둘 수 없었다.

클로디안이 아무리 상사화를 피워내면 뭐하나.

요수의 술법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무력으로 보호한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요수는 얼마든지 기사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이니까.

“저는 좀 더 머무르고 싶어요. 이곳 주민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거든요.”

아직까지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카밀라가 쑥스럽게 웃었다.

몇 차례 더 설득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의지가 확고해 결국 내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밀라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무리하지 말아요.”

“네, 그럴게요.”

카밀라는 우리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곧장 천막을 나와 대공저로 돌아왔다.

“카밀라에게도 세뇌술이 걸려 있었던 건가요?”

“아니. 이번엔 매혹술이 걸려 있더군.”

“네?”

매혹술을 왜……?!

순간 카밀라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클로디안이 떠올랐다.

‘젠장!’

이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야?

“이제 괜찮은 거죠?”

“그래. 또다시 데이먼의 술법에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감사드려요.”

“저들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무심한 어투였지만 그 안에 깃든 걱정이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은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누가 막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금안에 이유 모를 조소와 슬픔 그리고 애틋함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바 님이 생각난 걸까?’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존재가 떠오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손길이건만. 그게 뭐라고 울적했던 마음이 금세 따스해졌다.

“이번엔 술법 때문이었다고 하나 황태자가 진정으로 공녀를 마음에 담게 된다면 우린 막을 수 없어.”

내가 카밀라 때문에 울적해진 줄 알았는지 그답지 않게 나를 달래었다.

‘그래, 지금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요수를 처리한다고 해서 황가의 저주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까.

오히려 판타시아 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카밀라가 죽게 되겠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그녀의 죽음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술법이 깨졌으니 황태자에게 생긴 상사화 표식도 사라졌겠죠?”

“술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긴 감정이니 그렇겠지.”

그래, 지금으로선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그렇게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달래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 * *

사하룬에 다녀온 지도 벌써 열흘째.

나는 뿌듯하게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로웨나 케인

레벨 : 98     명성 : 510

HP : 1070    GP : 1020

체력 : 986    근력 : 985

민첩 : 983    지성 : 981』

3회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암담했었는데 벌써 레벨이 98라니.

“흐흐흐.”

벅차오르는 기쁨에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명성은 이제 유지만 하면 되겠네.’

사하룬에 대공과 내가 다녀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명성은 금세 500을 찍었다.

문제는 대공의 호감도인데.

‘남은 10%를 어떻게 해야 올릴 수 있을까.’

한동안 꾸준히 오르던 호감도가 최근 들어서는 증가 속도가 더뎠다.

‘역시 반려의 벽을 넘기는 힘든 건가?’

조이가 가져다 놓은 쿠키를 와그작 베어 물며 한숨을 내쉬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아가씨, 저 조이예요.”

“들어와.”

“벨라인의 상단주가 찾아왔는데 급히 뵙기를 청했어요.”

“응접실로 갈게.”

광산에 문제가 생긴 걸까?

나는 옷차림을 살필 새도 없이 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벨라!”

“아, 아가씨.”

벨라는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늘 단정하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큰일 났어요. 공녀님이 사라지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카밀라가 사라지다니?”

“아무래도 납치되신 것 같아요.”

카밀라는 클로디안과 동행하며 황실 기사단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고 있었을 텐데 납치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공녀님이 사하룬에 가실 때 저희 상단 직원들도 동행했거든요.”

사하룬에 사건이 벌어지기 한참 전에 카밀라가 구호 물품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었단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진행해달라는 부탁에 그 뜻을 따라주었다고.

목적지가 사하룬인 것도 기사단이 출발하고 나서야 알았다고 덧붙였다.

“직원들과는 전령새를 통해 계속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아, 그래서 카밀라의 납치 소식을 빨리 알게 된 거구나.

“황도에 곧 당도할 거라는 소식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녀님이 납치되었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며 벨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는요?”

“황실 기사단과 함께 공녀님을 찾고 계신대요.”

“카밀라가 사라진 곳이 어디인지 알아요?”

“타트라 산이요. 산을 넘어가던 중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나 봐요.”

서부에서 황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트라 산을 지나가야 한다.

산을 넘으면 바로 황도 출입을 검사하는 검문소가 나오기에 황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 불리기도 했다.

“도적 떼에게 당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사하룬에서 봤던 황실 기사단은 인원도 많았고 실력 또한 출중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적 떼에게 당한다?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클로디안이 카밀라를 혼자 두었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요수의 술법이 파훼되었다고 해도 제 약혼녀에게 소홀히 할 사람은 아니지.’

설마 요수가 직접 움직인 건가?

술법이 파훼된 걸 알아챘다면 다른 수작을 부렸을 지도 모른다.

‘그날 어떻게 해서든 같이 올라왔어야 했는데.’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벨라,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타트라 산에 머물고 계신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내가 기사들과 함께 가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다 이런 변고가 생긴 건지.”

벨라가 창백한 낯을 두 손에 묻었다.

나는 힘없이 처진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밀라를 꼭 찾아올게요. 벨라는 여기서 연락책을 맡아줘요.”

“네, 그럴게요. 아가씨도 부디 조심하세요.”

나는 그 길로 아버지께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요수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라 필립에게도 부탁했다.

“스승님께 상황을 전해주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이내 몸을 숨겼다.

머지않아 카밀라를 찾기 위한 수색대가 꾸려졌다.

“슐레만 경,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죠.”

“알겠습니다.”

내가 말에 올라타자 슐레만 경을 비롯한 기사 스무 명도 차례로 말에 올라탔다.

말허리를 차자 내 애마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바람을 가르며 쉼 없이 달린 덕분에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타트라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런!”

때마침 산길 초입까지 수색을 나온 애런이 보여 크게 불렀다.

말발굽 소리에 경계하고 있던 그가 나를 알아보고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로나, 여기는 어떻게 왔어?”

“벨라에게서 들었어. 카밀라가 납치되었다며?”

“응, 너한테까지 연락이 갈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단서는 찾았어?”

“간단히 요기나 하려고 잠시 쉬던 중이었는데 괴한들이 습격해 왔어.”

“카밀라는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었던 거 아니야? 어떻게 카밀라만 납치된 거야?”

“아, 그게 습격 직전에 공녀가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었거든.”

여기서 개인적인 용무라 함은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잠깐 일행들과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카밀라가 혼자 이동한 건 아닐 거 아니야.”

“호위 두 명과 시녀 한 명이 따라갔었는데 모두 괴한들에게 당했더라고.”

시녀와 기사 한 명은 죽었고 나머지 기사는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습격을 받자마자 달려갔었어. 거리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애런이 자책 어린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습격했다던 괴한들은 잡았어?”

“아니. 처음에는 매섭게 공격하던 놈들이 갑자기 내빼더라고. 마치 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처음부터 카밀라를 노렸다는 거야?”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습격은 우리를 묶어두려는 수작이었고.”

카밀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낸시와 공작부인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다.

‘피올라 백작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피올라 백작가는 공작부인의 친정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낸시에 이어 공작부인까지 카밀라를 죽이려다 감옥에 갇혔는데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할까?

황제가 공작가가 아닌 카밀라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공작이?’

공작은 가문의 채권을 모두 인수한 이가 나라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바지 사장을 여럿 세워두고 공작가의 채권을 분산하여 인수한 탓이었다.

‘공작은 한창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지만 또 모르지.’

가문의 명성이 떨어지고 연이은 사업 실패가 카밀라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정말 답 없는 쓰레기인데.

“피올라 백작가와 체임버 공작에 대해서는 조사해 봤어?”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따로 조사를 명하셨어.”

“괴한들에 대한 단서는?”

애런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흔적은 안 나왔어? 카밀라가 잡혀갔다면 끌려간 흔적들이라도 있었을 거 아니야.”

“없어. 분명히 주변 어딘가로 이동했을 텐데 어떤 흔적도 없었어.”

‘그게 말이 돼?’라고 말하려던 나는 순간 든 생각에 멈칫했다.

정말 요수가 개입한 것이라면……!

“애런, 카밀라가 사라진 곳이 어디야?”

애런은 순순히 그곳으로 안내해주었다. 마침 그 길에서 클로디안도 마주쳤다.

“영애?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인가?”

그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옷차림이 꽤나 흐트러져 있었다.

“벨라인 상단주로부터 소식을 듣고 달려왔어요. 카밀라가 걱정되어서요.”

“아, 그랬군.”

작게 숨을 몰아쉰 그가 흘러내린 머리를 손으로 대충 가다듬었다.

그는 어딘가 조금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납치되었으니 당연히 정신이 없겠지만 클로디안 답지 않게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이렇게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드는 거지? 분명 매혹술은 파훼되었는데.

‘지금은 카밀라를 찾는 게 먼저야.’

애써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며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카밀라의 흔적은 찾으셨나요?”

클로디안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산 전체를 수색하고 있는데 진전이 없어. 어느 방향으로 도망친 건지 감도 못 잡겠어.”

“산을 벗어났다면 더욱 찾기 힘들 텐데…….”

타트라 산은 황도로 가는 주요 길목이라 사방으로 길이 통했다.

그러니 도주로를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마워.”

곧 황실 기사단과 의논하여 우리 가문 기사들도 한 구역을 맡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슐레만 경과 함께 애런을 따라 카밀라가 사라졌다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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