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스승님, 카밀라를 보고 가야겠어요.”
“표식이 생긴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다.”
비웃는 건 아니었다. 대공은 그저 사실을 내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잠시 물끄러미 나를 보던 대공이 마지못해 내 뜻을 따라주었다.
우리는 다시 클로디안과 애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밀라가 와 있다니 만나보고 갈게요. 다만 저희는 따로 움직일게요.”
“우리도 지금 이동할 거야. 먼 거리도 아니고 굳이 따로 갈 필요가 있을까?”
“그래, 같이 가자.”
클로디안과 애런이 차례로 나서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주목 받고 싶지 않아서요. 사람들의 관심은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그럼, 나하고 같이 가. 내가 안내해 줄게. 전하, 제가 두 분과 동행하겠습니다.”
“아쉽지만 그게 좋겠군. 하퍼 경, 부탁하네.”
“전하, 배려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희는 대공 전하의 신술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술을 언급할 때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곳에 우리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애런이 서운한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렇다고 그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카밀라와는 비밀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
“영애의 뜻이 그러하다면 할 수 없지. 카밀라는 황실 깃발이 걸려 있는 천막에 있을 거야.”
클로디안은 마지못해 우리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럼, 저희 먼저 움직일게요.”
“그래. 우리도 곧 따라가지.”
대공과 나는 그들과 멀어진 뒤 신술을 이용해 대피소가 있는 언덕으로 이동했다.
언덕 위에는 사면을 따라 빼곡하게 천막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폴루티아가 정화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지 않은 것인지 대부분의 주민들이 천막 안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경비병들의 기세도 매우 날카로웠다.
카밀라가 머물고 있다는 천막은 클로디안의 말처럼 눈에 확 띄었다.
제일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황실의 깃발만 찾으면 되었으니까.
“안에는 저만 들어갈게요.”
대공의 은신술로 천막 앞까지 온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편히 이야기를 나누라며 대공이 뒤로 물러섰다.
나는 조심스럽게 천막의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족을 위해 마련한 천막이라 내부는 넓었다.
“실례합니다……!”
안에 한 사람의 인기척만 느껴졌지만 혹시 몰라 목소리를 높이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왜 여기서……?’
혹시 착각한 건가 싶어 고개를 흔들어 봤다. 그뿐만 아니라 잠시 숨을 참았다가 다시 들이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는 여전했다.
‘폴루티아가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모두 정화했잖아. 조금 전까지 폴루탄으로 덮여 있던 곳에서도 악취 하나 나지 않았는데.
왜 그곳과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악취가 난단 말인가. 그것도 이 천막 안에서.
“누구……?”
그때 내 목소리를 듣고 나온 카밀라가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웨나? 여긴 어떻게?”
한달음에 달려온 카밀라가 내 손을 붙들었다. 그러자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악취가 밀려들었다.
나는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아직 밖이 정리가 되지 않았을 텐데.”
“다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간신히 입을 열어 가녀린 손을 도닥였다.
‘이거 예전의 애런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은데.’
나는 카밀라 몰래 그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혹시 로웨나가 마수를 처리했나요? 대공 전하께서도 여기 오신 거예요?”
금방 상황을 파악한 카밀라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네, 대공 전하와 함께 왔어요. 마수는 다 처리되었고, 폴루티아도 깨끗하게 정화되었어요.”
“아, 정말 다행이에요. 다친 곳은 없어요? 마수들이 상당히 흉포했을 텐데.”
“다친 곳은 없어요. 봐요, 멀쩡하죠?”
내가 한 바퀴 돌며 씨익 웃자 그제야 카밀라가 굳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마워요, 로웨나 덕분에 모두 살았어요.”
카밀라가 내게 안기며 속삭였다. 나는 순간 내 코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와, 장난 아니다.’
애런 때보다 몇 배는 더 심한데? 머리가 띵하다 못해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로웨나가 대공 전하와 함께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폴루티아인 데다 규모도 커서.”
내게서 몸을 뗀 카밀라가 의자로 나를 이끌며 말했다.
‘후와, 이제 좀 살겠네.’
여전히 역겨울 정도로 악취가 심했지만 카밀라와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별다른 표식이나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카밀라의 연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깨끗해 보였다. 정신도 멀쩡해 보였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번 사건도 꿈에서 본 거죠?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 일찍 손을 쓰실 수 있었던 거고.”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왠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카밀라의 손등을 가만히 도닥였다.
“카밀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주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없었을 거예요.”
지난 두 회차 모두 이 사건으로 전체 주민의 80%를 잃었었다.
황실은 물론이고 주변 영지에서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설득한 것도 카밀라죠? 황실에서 토벌대를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정말 큰일을 해낸 거예요.”
“제가 설득한 건 아니에요. 전하께서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직접 추진하신 거예요.”
“카밀라를 믿지 않으셨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셨겠지요.”
카밀라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자신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데 카밀라,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아, 그게. 제가 전하께 부탁드렸어요.”
왜? 이전에도 카밀라가 예견한 일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따라온 적은 없었잖아.
“지금까지 제가 꿈에서 본 사건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라 걱정이 되었어요. 그리고 또…….”
잠시 망설이던 카밀라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로웨나가 폴루티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저도 뭔가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마수를 처리할 능력은 없지만 대피소 일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황태자 전하께서 반대하시진 않았어요?”
“처음에는 반대하셨는데 제가 간곡히 부탁하니까 들어주셨어요.”
나는 대답하는 카밀라를 유심히 살폈다.
클로디안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고마움을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달리 애정이 깊어진 것 같진 않았다.
하여 조금 더 반응을 떠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카밀라를 많이 걱정하셨어요. 비행형 마수가 나타났을 때는 이곳까지 넘어갈까 봐 안절부절못하시더라고요.”
“전하께서는 참 다정한 분이시지요. 이곳에 주민들이 함께 있으니 더 걱정이 되셨나 봐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카밀라에게선 특별히 설렘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카밀라,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카밀라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와는 거래로 이루어진 정략혼이라고 말했었잖아요.”
“……네.”
“지금도 같은 마음이에요?”
카밀라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카밀라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졌어요. 나는 카밀라가 행복하기를 바라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카밀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제게 과분한 분이세요. 좋은 분이라 생각하고 있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아니에요.”
‘그럼, 앞으로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라는 물음이 툭 튀어 나갈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서.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예견하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리 아프다.’
황실의 저주에 대해 알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판타시아 궁에 갇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저기, 만약에 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평생 어떤 곳에 갇혀 살아야 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카밀라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로웨나, 혹시 대공 전하께서 로웨나를 가둬두려고 해요? 정말 그런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스승님께서 제게 그러실 리 없잖아요.”
“정말 아니에요? 내게는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봐요.”
늘 순하게 빛나던 회색 눈동자가 누구 하나 베어버릴 듯 형형하게 빛났다.
“카밀라, 안심해요. 그런 일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왜 그런 걸 물어요?”
“얼마 전 티파티에서 관련 이야기가 나왔었거든요. 요즘 유행하는 소설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카밀라의 생각도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난 또. 진짜 놀랐잖아요.”
카밀라가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며 작게 웃었다.
“나는 아무리 좋아도 그렇겐 못 살 것 같은데 다르게 생각하는 영애들도 많더라고요. 카밀라는 어때요?”
“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라서.”
카밀라가 제 입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그사이 나는 요수의 다른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지 주위를 살폈다.
‘언제 카밀라에게 접근한 거지?’
애런 때처럼 누구를 만났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는 탓에 난감했다.
애런을 시작으로 백작가 그리고 카밀라까지.
요수에게 몰이사냥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요수의 뜻대로 되게 둘 순 없지.’
“로웨나, 저는 아직 사랑을 해 보지 않아서 뭐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카밀라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만 저는 사랑보다는 자유를 택할 것 같아요.”
말갛게 웃는 카밀라의 모습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처음 그녀를 여관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아버지와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카밀라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새처럼.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카밀라가 다시 새장에 갇히지 않도록 그녀의 자유를 지켜주고 싶었다.
우선은 요수의 농간부터 처리해야겠지.
해머를 이용하면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데 문제는 카밀라에게 뭐라고 해명한단 말인가.
그냥 미친 척하고 휘둘러 봐?
애런이었다면 가차 없이 휘둘렀을 텐데 연약한 카밀라는 다칠까 무서웠다.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건가?’
나는 천막의 입구를 힐끗거리며 카밀라의 대답에 반응했다.
“역시 그렇죠? 이번에도 카밀라와 생각이 통할 줄 알았어요.”
카밀라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대공 전하께서 문 앞에 기다리고 계신데 안으로 모셔도 될까요? 카밀라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나만 들어왔거든요.”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요. 제가 나가서 인사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밀라를 얼른 말렸다.
“아니에요. 사람들의 이목도 있으니까 전하께서 들어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은신하고 있던 대공을 찾았다.
“스승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대공이 말해 보라며 눈짓했다.
“카밀라에게서 악취가 나요. 애런 때와 똑같이.”
대공의 미간이 대번에 좁아졌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들어가지.”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카밀라가 대공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전하께서 사하룬 지역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녀의 인사에도 대공은 카밀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요수의 술법을 살피느라 그런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카밀라는 당황해했다.
그러다 대공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
“네?”
미간을 찌푸린 대공이 손을 까딱이며 재촉하자 카밀라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만 살짝 잡은 대공이 바로 신력을 피워 올렸다.
붉은 기운이 단숨에 카밀라의 전신을 감싸자 그녀의 눈을 동그랗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