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토벌대들은 두 종류의 마수를 모두 상대할 여력이 없다 판단한 것인지 폴루티아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폴루탄이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던 탓에 그들은 계속 뒤로 이동하며 카무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각 저지선 간의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폴루탄은 벌써 3차 저지선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나와 대공은 저지선의 목책을 구름판 삼아 뛰어올랐다.
쾅!
해머에 맞은 카무스 한 마리가 건물 지붕에 날아가 박혔다.
끼이이익!
동시에 대공의 신검에 베인 카무스들이 비명을 지르며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그것들에게 잡혀 있던 병사들은 대공의 신술로 추락을 면할 수 있었다.
카무스를 처리하고 바닥에 착지하자 우리를 향한 열띤 시선이 느껴졌다.
카무스를 상대하느라 꽤나 고군분투한 것인지 다들 몰골이 엉망이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는 일찌감치 찢어진 모양인지 너덜거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부상자들이 눈에 띄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는 것 같았다.
클로디안과 애런도 무사했고.
“잘 버텼네.”
애런의 어깨를 툭 치자 그가 지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클로디안도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했으나 카무스의 공격이 이어지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했다.
“자, 그럼 이놈들을 마저 처리해 볼까?”
나는 다시 카무스를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
타이크 때보다는 시간이 걸렸지만 드루이드의 과녁과 회오리를 이용해 차근히 처리해 나갔다.
간간이 곤욕을 겪는 토벌대를 도와주기도 했다.
띠링!
『카무스 (500/500)
목표 1을 완료했습니다.』
“스승님, 끝났어요.”
폴루티아 영역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로나!”
갑자기 방향을 틀어 3차 저지선을 넘어가는 우리를 보며 클로디안과 애런이 소리쳤다.
그사이 무너진 3차 저지선은 폴루탄으로 뒤덮여 검은 방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토벌대 일행들과 거리를 벌리며 대공 몰래 인벤토리에서 퓨릭서를 꺼냈다.
‘이걸 보여줄 수는 없지.’
내가 정화자라는 소문이 나긴 했지만 황실 기사들 대부분은 내가 아니라 대공이 정화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니스에서 대공이 산불을 잠재우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걸 직접 보았으니까.
‘쓸데없이 주목을 받을 필요는 없지.’
이미 이목은 넘칠 정도로 끈 상태였다.
“내가 가려줄 테니 진행하도록 해.”
내 뒤에 선 대공이 널따란 품 안에 나를 숨겨 주었다.
나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퓨릭서를 바닥에 부었다.
그 잠깐 사이에 달려드는 마수들은 대공이 처리했다.
푸른 액체가 땅에 닿자마자 질척한 폴루탄이 사라지며 황갈색의 맨땅이 드러났다.
빠른 속도로 정화가 이루어지며 마수들도 모두 사라졌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에 안면창을 해제하고 머리 위에 덮어쓰고 있던 슈트도 벗었다.
슈트 안의 후끈한 열기가 빠지며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띠링!
『퀘스트 ‘움직이는 검은 땅을 저지하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히든 스킬이 개방됩니다.』
히든 스킬이라.
제발 요수를 한 번에 밟아줄 수 있는 스킬이면 좋을 텐데.
『액티브 스킬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개방됩니다.』
아라크네의 거미줄? 처음 들어보는 스킬이었다. 연이어 스킬에 대한 안내 메시지가 떴다.
『액티브 스킬 : 아라크네의 거미줄
이 스킬을 사용하면 정해진 시간 동안 상대를 결박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능력 또한 봉인시킬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 3개까지 사용 가능하며 3개를 모두 사용하면 쿨타임에 들어가게 됨.
지속 시간 : 거미줄 하나 당 10분.
쿨타임 : 1시간 』
‘와우, 이거 유용하겠는데?’
공격 스킬이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처럼 시스템이 기특한 일을 했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시선을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음을 놓겠네요.”
잿빛으로 변했던 하늘이 맑게 개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져 성한 건물은 없었지만 이만하면 선방했지.
주민들도 무사하고, 그들의 터전도 지켜냈으니.
“스승님, 여기서 더 힘을 쓰시면 안 돼요.”
지난번 무니스에서 무리했던 일이 생각나서 얼른 대공 앞을 가로막았다.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물끄러미 나를 보던 대공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래.”
길쭉한 손가락이 내 앞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리고는 멀어졌다.
갑작스런 접촉에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어? 방금 뭐였지?
“이만 돌아가지.”
당황한 나와 달리 대공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는데. 잘못 봤나?
눈을 비비적댔지만 대공의 너른 등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로웨나.”
내가 따라가지 않자 멈춰 선 대공이 고개를 돌려 나를 불렀다.
“네, 가요.”
오늘따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유독 부드럽게 들린다면 착각일까?
간질거리는 기분을 애써 털어내며 대공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 덕분에 살았어. 고맙네.”
오염되었던 지역이 모두 깨끗해진 걸 확인한 클로디안이 우리를 반겼다.
“다친 곳은 없나?”
“없어요.”
클로디안이 정말 다친 곳은 없는지 조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폈다.
대충 그 시선을 흘려내며 고개를 든 순간 뭔가 이상한 것이 시야에 잡혔다.
‘저건 왜 저러는 거지?’
클로디안의 머리 위로 보이는 호감도가 고장 난 화면처럼 흔들리다 못해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또한 호감도 수치도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지난번 확인했을 때 호감도가 54%였는데 50~60% 사이를 마구 오르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 시스템 메시지는 멀쩡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애런의 호감도를 확인해 봤으나 69%로 약간 올랐을 뿐 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대공도 90%로 소폭 상승했지만 마찬가지로 선명하게 보였다. 오직 클로디안의 것만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표정도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마수도, 폴루티아도 다 해결되었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지.”
대공을 따라 걸음을 내딛는데 애런이 나를 붙들었다.
“벌써 가려고?”
“응, 우리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잠깐 숨이라도 돌리고 가. 대피소에 여유분의 천막이 있어.”
“그래, 우리도 대피소로 갈 예정이니 함께 가지.”
“아닙니다. 여기서 더 할 일도 없고, 집에 돌아가 쉬고 싶어요.”
얼른 돌아가 내 침대에 편안히 눕고 싶었다.
‘지금 대피소로 가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사하룬의 변화를 직접 목도한 주민들이 나를 가만히 두겠는가. 게다가 대공도 함께이지 않나.
‘오늘 내로 빠져나오지 못한다에 손목 건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져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으려는데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카밀라도 대피소에 있어. 영애가 온 걸 알면 무척 반가워할 거야.”
“카밀라가요?”
아니, 걔가 왜 이런 험한 현장에.
“이야기를 나눠보면 왜 이곳에 있는지 알게 될 거야.”
클로디안이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한 부모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녹안엔 카밀라를 향한 애정이 녹아있었다.
‘음, 언제 저렇게 달라진 거지?’
클로디안이 카밀라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둘만 남았을 때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니었다.
클로디안은 카밀라에게 기본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를 존중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선 카밀라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졌다.
‘오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변화가 생긴 모양인데?’
이 위험한 곳까지 카밀라가 따라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아까 클로디안이 불안하고 초조하게 보였던 게 다 카밀라 때문이었나?’
카무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피소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그게 주민들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던 건가.
그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의 변화에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미련이나 질투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씁쓸함이 들 뿐?
‘가만, 클로디안이 진정 카밀라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카밀라가 위험해 지는 거잖아!’
순간 얼음을 뒤집어쓴 기분에 정신이 번쩍 났다.
“스승님.”
나는 대공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가 조용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나는 클로디안과 애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스승님, 아무래도 카밀라를 만나보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대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요. 이건 제 착각일 수도 있는데요.”
내가 우려하고 있는 점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대공이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황족들이 사랑에 빠지면 표식이 나타난다.”
“네에?”
처음 듣는 정보라 당황스러웠다.
“손목 안쪽에 검은 상사화가 피어나지. 그 표식은 본인 외에는 보지 못한다. 황가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됐는지 똑똑히 기억하라는 신의 벌이지.”
“본인밖에 보지 못하는 표식이라면 제가 확인할 수는 없겠네요.”
“나는 볼 수 있어.”
대공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에게 인사를 건넬 때, 카무스를 피해 몸을 숙이고 있을 때 등등.
오늘 클로디안이 손목을 내보일 일은 많았다.
“……혹시 보셨어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떡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카밀라는 클로디안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아니,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카밀라의 마음도 변하게 된 건가?
뭐가 어찌 됐든 카밀라의 판타시아행은 확정됐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고 해서 과연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문득 판타시아 궁에서 보았던 황제의 정부가 생각났다.
판타시아 궁 밖을 바라보던 모습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보였었다.
‘하아, 어떡해야 하지?’
복잡한 심경에 한숨을 내쉬는데 순간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표식이 생겼는데 왜 카밀라는 여기 있는 거지?
“스승님, 카밀라는…….”
“아직 표식이 반밖에 완성되지 않았더군.”
“그게 무슨.”
“감정이 완전히 무르익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표식이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깊이에 따라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의 자비이지.”
자비라. 과연 그것을 자비라 할 수 있을까?
제 연인의 남은 생명을 알려주는 모래시계와 같은 표식을 보며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황족들의 마음이 무너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 상대가 카밀라라면 달라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