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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21)화 (121/140)

121화

일반적인 폴루티아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나는 지형이었다.

누가 밤사이 한바탕 검은 액체를 쏟아붓고 간 것처럼.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폴루탄이 질척한 액체 형태이면서도 정해진 지역 안에서만 고여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늪지대처럼.

그런데 지금 눈앞의 지역은 폴루탄이 슬라임처럼 꾸물거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외곽지역이라 군데군데 자리 잡은 단층집이 순식간에 폴루탄으로 뒤덮였다.

폴루티아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목책이 세워져 있었으나 폴루탄은 그것마저도 타고 넘어왔다.

“물러서! 폴루탄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라!”

목책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 이래서 <움직이는 검은 땅>이라고 한 거구나?’

아주 정말 가지가지하네.

“스승님, 이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요?”

“아니. 처음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대공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지역 주민들은 미리 대피시킨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선 클로디안과 애런부터 찾았다.

폴루탄을 막기 위한 목책이 일정 거리마다 세워져 있었는데 클로디안과 토벌대는 3차 저지선 뒤에 서 있었다.

그마저도 1차 저지선이 무너진 탓에 뒤로 이동하고 있었다.

애런은 클로디안 가까이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왜 마수가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러게요.”

분명 퀘스트에선 카무스와 타이크를 처리하라고 되어 있었다.

마수가 두 종류인 것도 처음인데다 목표량도 많은 편이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마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일단 클로디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폴루탄이 그들을 향해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까.

“어? 어! 저기.”

토벌대와 가까워지자 그제야 우리를 알아본 이들이 동요했다.

애런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왔으니 당황스럽겠지.

그런데 뭐, 어쩌라고. 퀘스트가 열리면 지체할 수 없는 걸.

이곳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

불퉁한 마음을 감추며 애런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편지, 오늘 받았어.’

입 모양만 보고도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

클로디안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안도가 이는 게 보였다.

“저도 황태자 전하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애런의 편지로 이미 클로디안이 이곳에 와 있는 줄은 알았지만 모른 척 대꾸했다.

“사하룬에 큰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왔지.”

거짓말.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출발했으면서.

폴루탄의 이동 속도와 폴루티아로 변한 면적을 보았을 때 이 사달이 발생한 건 분명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황태자는 6일 전에 황도에서 출발했지.

황도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주민들을 완벽하게 대피시켜 놓은 것만 봐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카밀라가 알려줬겠지.’

지난 회차들에서 사하룬에 일어난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는 힐끗 토벌대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장화와 얼굴을 제외한 온몸을 틈 하나 없이 둘러싼 가죽 보호구.

머리를 감쌀 수 있는 후드와 악취에 대비한 마스크와 장갑까지.

상당히 준비를 많이 한 옷차림이었다.

거기다 폴루티아의 열기와 독기를 견디기 위해 특수 처리까지 했을 걸 생각하면.

‘하루 이틀 만에 마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꽤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군.”

클로디안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대공이 툭 말을 내뱉었다.

“아바마마께서도 더는 가만히 계실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클로디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잘 버텨보십시오.”

대공은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때마침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바닥을 쇠로 긁는 듯한 울음소리가 저 멀리 하늘에서부터 들려왔다.

“저, 저게 뭐야?”

당황스런 외침에 고개를 들자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무언가가 보였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인지 손톱만 하던 것들이 점점 커졌다.

드디어 나타났군.

“오늘은 비행형 마수도 나타날 거예요. 그러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비행형 마수가 온다고?”

클로디안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로나, 그게 무슨…….”

애런도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카밀라가 마수의 종류는 예측하지 못한 건가?’

생각해 보니 이전 회차들에서 사하룬이 폴루티아로 변했다는 건 알려졌지만 마수의 종류에 대해선 언급된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미리 언질을 해 두어야겠네.

“비행형 마수는 폴루티아 밖에서도 활동이 가능해요. 그러니 대비하셔야 할 거예요.”

“그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클로디안이 다급하게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어딜 보는 거지?’

클로디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는 언덕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막들은 보였다.

‘주민들을 걱정한 건가?’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지만 이상하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 신경 쓰였다.

당장 저곳으로 가고 싶은데 맡은 책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내게는 퀘스트가 더 중요하니까.

“애런, 여기는 네게 맡길게.”

할 수 있지?

혼란과 불안으로 흔들리던 벽안이 잠잠해지더니 이내 굳건하게 빛났다.

“여긴 걱정 마.”

마수 경험도 부족한 이들이 과연 비행형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들을 믿는 수밖에.

나는 비행형 마수 카무스를 상대할 때 주의할 점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준 뒤 발걸음을 돌렸다.

끼익 끼익.

카무스의 쇠로 긁는 듯한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더불어 땅의 울림도 더욱 커졌다.

쿵 쿵 쿵!

커다란 몸집의 무언가가 떼로 달려오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스승님, 가요.”

나는 바디슈트와 안면창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해머를 소환했다.

대공도 붉은 신검을 소환했다.

“모두 제 위치로! 대형을 유지하라!”

등 뒤로 애런의 외침이 들려왔다. 토벌대의 재빠른 움직임도 느껴졌다.

‘나름 훈련을 한 모양이네.’

그들에 대한 걱정을 뒤로 한 채 정면을 주시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카무스는 온몸이 검고 박쥐와 같은 피막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몸집이 얼마나 큰지 날개 한쪽만 해도 성인 서너 명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였다.

“드루이드의 과녁.”

『드루이드의 과녁을 활성화합니다.』

나를 향해 뻗어지는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며 해머를 날렸다.

과녁을 따라 날아간 해머가 정확하게 카무스를 강타하며 카무스의 HP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 번만 더 치면…….’

해머의 등급이 A가 되었기에 최상급 마수라 해도 두 번이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무스를 마저 처리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새로운 카무스가 달려들었기 때문에.

“조심해!”

대공의 외침을 들으며 해머의 손잡이 아래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손잡이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이 빠져나왔다.

단검 크기였던 검은 내 손에 쥐어지자 길게 늘어났다.

등급 A가 되며 생긴 서브 무기였다.

챙!

나를 찢어발길 듯 달려드는 날카로운 발톱을 검으로 막아내며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해머를 집어 던졌다.

『카무스 (1/ 500) 』

해머에 맞은 카무스가 가루가 되는 동안 검을 움직여 또 다른 카무스의 공격에 맞섰다.

해머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카무스를 향해 휘둘렀다.

『카무스 (2/ 500) 』

‘역시 만만치 않네.’

하늘을 날지 못하니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분도 계시긴 하지만.’

힐끗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붉은 신력이 보였다.

뒤이어 후두둑 떨어지는 십여 마리의 카무스도.

‘이거 너무 비교되는 거 아니야?’

속으로 툴툴거리는데 대공이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눈팔지 마라.”

네에, 넵. 이 부족한 제자는 발로 뛰어야죠. 뭐 별수 있겠어요?

카무스를 열댓 마리 정도 처리했을 때 드디어 타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호랑이와 오크를 섞어 놓은 듯한 모습의 타이크는 거대한 몸집과 달리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많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평선을 가득 채운 타이크들을 보니 싸우기도 전에 질린 기분이 들었다.

네 발로 달려오던 타이크들이 우리를 보고는 두 발로 일어섰다.

그러자 안 그래도 거대한 몸집이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크와왕!

마치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를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어서 와.

타이크들이 땅을 박차는 순간 나도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왼손에는 검을, 오른손에는 해머를 든 채로.

양손으로 무기를 다루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는지 모른다.

‘아주 신물이 나도록 훈련했지.’

내가 해머에 익숙해지자마자 대공이 바로 양손 훈련을 시켰었으니까.

타이크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치 나를 포위하듯 둘러싸는 그들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회오리”

『해머의 패시브 스킬 ‘회오리’를 활성화합니다. 』

업그레이든 된 탐지 기능과 함께 추가된 스킬이 바로 ‘회오리’였다.

해머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타이크들을 향해 던졌다.

해머가 빠르게 회전하며 둥글게 둘러선 타이크들을 차례로 후려쳤다.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해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일어나며 타격 범위가 넓어졌다.

“크어억!”

타이크들이 해머에 맞아 나동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타이크들은 해머가 일으킨 회오리 때문에 내게 쉬이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내 손에 돌아온 해머를 들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타이크들을 처리해갔다.

『타이크 (1/700)』

『타이크 (13/700)』

처리된 타이크 수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타이크를 처리했다. 

간간이 그들의 몸을 타고 올라가 카무스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동안 대공은 내가 타이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카무스들을 주로 처리해 주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신없이 타이크를 처리하는 동안 레벨 업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떴다.

그리고 드디어.

띠링!

『타이크 (700/700)

목표 2를 완료했습니다.』

“스승님, 타이크는 마무리했어요.”

아직 퓨릭서를 사용할 수 없기에 마수들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힐끗 뒤를 돌아보니 카무스의 발에 대롱대롱 매달린 병사들이 보였다.

대공이 카무스를 집중적으로 처리하긴 했으나 워낙 수가 많은 탓에 몇 마리가 뒤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스승님, 저쪽으로 넘어가죠.”

지금부터는 카무스와 타이크를 동시에 상대하며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카무스 목표치만 채우면 되니까.

내 뜻을 알아챈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우리는 우리를 쫓는 마수들을 처리하며 3차 저지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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