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사이 애런의 다정한 음성이 다시 한 번 귀에 꽂혔다.
“좋아해. 진심이야.”
진중한 눈빛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고백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내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나는 눈을 들어 애런의 호감도를 확인해 봤다.
호감도 67%.
언제 저렇게 오른 걸까?
이번 회차의 애런은 지난 회차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깊은 우정 때문에 연인으로 발전하기가 어려웠던 1회차, 내가 선을 긋는 바람에 서먹하게 지냈던 2회차.
두 회차 모두 호감도의 변화가 상당히 더뎠었다. 이번 회차처럼 감정을 크게 내비친 적도 없었고.
늘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자라 온 환경 탓에 제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는 이었으니까.
지난 회차들과 다른 이유가 뭘까? 모험 퀘스트로 인해 내 행보가 달라져서 그런가?
‘이제 와 이유가 무슨 소용이겠나.’
이유를 안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애런을 응시했다.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긴장과 기대로 떨리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빛을 잃고 흐려졌다.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런과 나 사이에는 바스러진 옛 감정이 남긴 연민 한 줌이 다였으니까.
그에겐 우정이랄 것도, 신뢰랄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2회차 때처럼 거리를 둘 수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시스템은 고약한 성정인 게 틀림없다.
지난 회차에서 배신당한 연인들과 관계를 끊지도, 복수하지도 못하게 메인 퀘스트로 발을 묶어 놓은 걸 보면.
‘정말 악취미야.’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게 넌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 사실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어.”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을 감추며 태연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대공 전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대해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내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애런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대공 전하께서도 같은 마음이신 거야?”
“그건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부분 같은데.”
솔직히 나도 모르기에 둘러댄 말이었다.
대공이 나를 아끼는 것도 알고, 나를 위해 많은 부분을 배려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호감도는 꾸준하게 오르고 있지만 반려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그 탓에 호감도가 올라가도 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퀘스트 조건이 청혼이 아닌 게 어디야.’
만약 조건이 ‘호감도 100%’로 바뀌지 않았다면 이번 회차는 시작부터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달래는데 갑자기 애런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로나, 네가 내 마음과 같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이용해.”
“뭐?”
“나와 내 가문이 네 방패가 되어줄게.”
조금 전까지 떨리던 목소리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내 마음보다 너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해. 약혼도 너를 지키고 싶어서 생각해낸 거야. 그러니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너와 내가 단순한 친구 사이라면 당황스럽긴 해도 그 마음을 고맙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잖아. 너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아니라고.
“애런, 나는…….”
“우리 가문이 너의 방패가 되면 네가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
“폴루티아를 살리는 일은 제국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잖아. 우리 가문과 영지의 미래를 위해 널 돕는다고 생각해.”
애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그가 조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안전해지면, 그때도 네 마음이 지금과 같다면 파혼해 줄게.”
찰나 그의 눈동자가 흐려졌지만 금세 다시 온화하게 빛났다.
애런의 말대로 그와 약혼하게 된다면 황제는 이전처럼 날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무려 개국 공신 가문이 뒷배로 있으니까.
‘하지만 애런의 손을 잡을 순 없어.’
레벨도, 명성도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의 호감도도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라고?
반려를 잊지 못하는 대공에게 전심으로 부딪쳐도 모자랄 판에?
아무리 내 안위를 위한 일시적 동맹이라고 해도 약혼은 약혼이다.
대공이 어찌 생각하겠는가?
물론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주겠지만 내 진심은 희석되지 않겠는가.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플레이를 정말 후회 없이 마무리하고 싶으니까.
“애런, 네가 얼마나 어렵게 꺼낸 이야기인지 알아. 고마워. 나를 걱정해줘서.”
그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짓자 내 대답을 예상한 것인지 둥근 눈매가 힘없이 처졌다.
“하지만 약혼은 할 수 없어. 널 이용하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소중한 친구인걸.”
애런의 얼굴이 울 것처럼 흐려졌다. 천천히 고개를 떨군 그가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가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애런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 갈무리된 표정은 한결 담담해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빗물을 머금은 나무처럼 젖어 있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따를게.”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모른 척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지만 내가 널 돕는 건 막지 말아줘. 난 어떤 경우에도 네 편에 설 거야. 그러니까 같이 해.”
폴루티아를 정화하는 일도, 황실과 그 이름 모를 배후에 맞서는 일도 같이 하겠다며 비장하게 말했다.
‘이 이상은 설득할 수 없겠지.’
단단한 바위처럼 완고해 보이는 모습에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알았어. 같이 해.”
그제야 굳어있던 애런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내걸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다.
언젠가 그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도 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편안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대공이 제국의 수호자라 불리는 신수라는 것 그리고 그의 반려를 죽였던 황실과 요수에 대해서.
다만 황실의 저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소문대로 폴루티아는 신벌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덧붙여 요수가 그를 확대하고 유지하며 제 힘을 늘려가고 있으며 그와 황제가 서로 돕는 사이라는 것도 말해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애런은 대공이 신수라는 사실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대공 전하께서 수호자셨다니. 어쩐지 전하께서 쓰시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했어.”
애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위험하다고 했는지 알겠지?”
“응,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아.”
“이 얘기는 절대 아무에게도 전하면 안 돼.”
“황태자 전하께서도 요수에 대해 알고 계신 거야?”
“그자가 신에게 버림받은 신수라는 건 모르시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선 모두 알고 계셔.”
“그렇구나.”
애런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럼, 그동안 넌 그렇게 무서운 존재를 상대하고 있었던 거야? 거기다 황제 폐하의 핍박도 받으면서?”
“내가 요수를 직접 상대할 일은 없었어.”
납치되긴 했었지만 굳이 그걸 애런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지.
그랬다간 나를 집에 묶어 두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릴지도 모른다.
‘그럼, 피곤해진다.’
나는 애런을 안심시키기 위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스승님께서 내게 보호술을 걸어주셨고 호위도 붙여주셨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애런은 안도하면서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대공 전하보다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너 하나는 지킬 수 있어. 나도 호위로 데리고 다녀.”
애런이 인외의 격인 대공과 비교해서 그렇지 결코 부족한 실력은 아니었다.
소드익스퍼트로 근위대 선발 시험에서 1위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 근위대 일로 바쁘잖아.”
“……예전만큼 바쁘지 않아. 그러니 위험한 곳에 갈 일 있으면 내게 꼭 말해줘. 폴루티아를 갈 때도.”
“알았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가 나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간간이 행적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런 내 마음은 모른 채 애런은 안심하며 웃었다.
그날 대화를 모두 마친 애런은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상당히 비장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 *
애런이 돌아가고 일주일 뒤, 새로운 퀘스트가 떨어졌다.
『퀘스트> 움직이는 검은 땅을 저지하라!
사하룬 지역에서 빠르게 번져가는 폴루탄을 막아내십시오.
이를 막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제국 전체가 폴루티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목표 1 : 카무스 500마리
목표 2 : 타이크 700마리
목표 3 : 사하룬 정화
보상 : 히든 스킬 개방』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움직이는 검은 땅?
검은 땅이라 함은 폴루티아를 말할 텐데 폴루티아가 움직인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거기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퀘스트에는 현재 상황과 해야 할 일만 주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미래에 대한 우려가 덧붙여져 있었다.
우려가 맞나? 어째 협박 같기도 하고.
제국이 모두 폴루티아로 변하게 될 거라니.
흘려들을 말은 아니었다.
폴루티아를 방치하다 보면 언젠가 제국도 영토를 모두 잃게 되겠지만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말하는 건 단시일 내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음성 지원이 되는 것도 아닌데 뭔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진달까.
‘요수가 뭔 짓을 했나 보네.’
사하룬 지역은 과거에도 폴루티아로 변했던 지역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지역 영주인 몬테나 백작이 그 일로 황궁에서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그를 만나주지 않자 내궁 입구에 주저앉아 영지를 살려달라며 대성통곡을 했기에 모르는 이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 당시 땅이 움직인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면 일파만파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과거와 뭔가 달라진 게 분명해. 이번 퀘스트, 만만치 않겠어.’
목표치만 봐도 역대급이고, 상대해야 할 마수도 매우 까다로운 최상급의 것들이었다.
나는 바로 대공에게 연락했다.
그 직후 애런에게서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
「나는 지금 사하룬으로 가고 있어. 급하게 출발하느라 네게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 서신을 보내.
사하룬 지역이 갑자기 폴루티아로 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사하룬으로 가시는 중이야.
다들 폴루티아 토벌은 처음이라 긴장하고 있어.
혹시 너도 사하룬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까?
마음 같아서는 네가 사하룬에 오더라도 우리가 정리를 끝내고 난 뒤에 오면 좋겠지만 네 계획을 말릴 생각은 없어.
만약 이곳에 올 계획이라면 내게도 알려주면 좋겠어. 널 돕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게.」
그 뒤의 내용은 나에 대한 걱정과 당부들로 채워져 있었다.
자신이 황도를 떠나 있는 동안 내가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서신의 발신지와 발송 날짜를 확인했다.
발신지는 우로스 도시, 발송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4일 전이었다.
우로스 도시는 황도에서 사하룬을 향해 가다보면 첫 번째로 나오는 도시로 황도에서 이틀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지금쯤 사하룬에 도착했겠네.’
우로스에서 사하룬까지 말을 타고 달리면 4일 정도 걸리니까.
‘황태자가 사하룬으로 갔다라.’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폴루티아에 병력을 보내는 것은 이전 회차들까지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퍼트린 소문 때문인가?’
제국민들의 압박에 황실도 더는 폴루티아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겠지.
그렇다 해도 황제가 요수에게 맞설 리가 없을 텐데.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건가?
‘하필 퀘스트와 같은 지역이라 찜찜하단 말이지. 일단 가보면 알겠지.’
대공저에 도착한 나는 대공과 함께 사하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