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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19)화 (119/140)

119화

나는 재판이 끝나고 난 뒤 일주일 동안 호언장담한 대로 정말 바쁘게 돌아다녔다.

두 번의 퀘스트를 제외하고도 시간만 되면 폴루티아를 드나들었다.

‘스승님과 훈련할 때에도 레벨이 올랐어.’

그렇다는 건 퀘스트가 없을 때에도 마수들을 상대하면 레벨이 오른다는 뜻이었다.

요수가 내게 선전포고를 한 이상 하루빨리 강해져야 했다.

내 가족,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귀족들의 항의로 황실의 발이 묶여 있는 이때가 기회였다.

하여 나는 부지런히 폴루티아를 다녔다. 물론 대공과 함께.

혼자 가려고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들켜 버린 탓에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현재 레벨 : 93』

그 결과 일주일 사이에 레벨이 많이 올랐다.

‘흠,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레벨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온다니까. 그래서 힘들어도 보람이 있었다.

『명성이 올랐습니다.

현재 명성 : 470』

‘명성도 순조롭군. 해리가 열심히 해주고 있나 보네.’

지난번에 해리를 만난 이후 그는 나에 관한 미담들을 본격적으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잊혀져 가던 베히른 구호 활동이 다시 재조명되고 로벨라 브랜드는 더욱 유명해졌다.

더불어 폴루티아의 정화자라는 이명도 널리 알려지며 떨어졌던 명성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역시 스승님은 조커였어.’

공략캐릭터 체인지 이용권에서 대공을 뽑은 과거의 나, 칭찬한다.

암담했던 미래에 희망의 빛줄기가 보이는 것 같아 조금 들떠 있던 때에 애런이 나를 찾아왔다.

“잘 지냈어? 재판 이후로 별일 없었지?”

반갑게 인사를 건넨 그가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계속 나를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당장이라도 찾아올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늦었네.’

하긴 황실이 발칵 뒤집혔으니 근위대도 바쁘겠지.

“응, 난 잘 지냈어.”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굳이 애런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쉬긴 한 거야? 피곤해 보이는데.”

애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잘 먹고 잘 잤어. 역시 집이 좋더라.”

기지개를 펴며 태연하게 대꾸하자 애런이 안심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요즘 황궁은 어수선해. 폴루티아에 관한 이야기들 때문에. 너도 그 소문들 알고 있지?”

“알아.”

“하아, 네가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어.”

애런이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황제 폐하께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반박하셨지만 황태자 전하의 태도를 보니 사실인 것 같아.”

씁쓸한 어조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배신감과 허탈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또 다른 배후가 있는 것 같아. 그 세력이 황실은 물론이고 폴루티아와도 관련 있는 것 같고.”

애런은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를 했었다며 의심스런 정황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건 확실한 것 같아.”

“애런,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는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알아. 하지만 네게는 말해줄 수 없어. 너와 네 가문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그렇다는 건 너도 위험하다는 뜻이잖아.”

나는 대답 없이 작게 웃었다. 그러자 애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로나, 사람들이 지금 널 칭송하며 보호하려고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아? 오히려 그 때문에 네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아.”

지금 사람들이 내게 가지는 관심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황제의 발을 묶어두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황제의 경계심을 높이는 데도 일조했으니까.

황제는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를 통해 제국민들은 물론이고 대공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여길 테니.

“황제 폐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야. 다음에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돕기 어려우실지 몰라.”

“전하의 도움은 바라지 않아. 이번 사면패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로나. 나는 네가 너무 걱정돼.”

애런의 순한 눈매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 혼자서 황실과 이름 모를 배후까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혼자가 아니야.”

“물론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지만 그분이 너와 백작가 모두를 구해주실 수 있을까? 본인 일만으로도 벅차실지 몰라.”

아니, 황실은 대공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인외의 존재인 요수를 상대할 수 있는 이도 대공밖에 없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공만 바라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 감당해 왔고, 혼자 버텼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 탈출해야 하는 건 내가 해내야 할 내 몫이었다.

황실과 요수에 대한 복수도.

그러니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여기서 살아나갈 마지막 기회이니까.

“나는 내 가문이 그리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또한 나도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돼.”

“이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가볍게 꺼낸 말 아니야. 내 목숨과 가문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어찌 가벼울 수가 있겠어?”

웃음을 지우고 정색하자 애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대공가와 케인 백작가, 그리고 스승님과 나. 서로 힘을 합치면 황실이든 이름 모를 배후이든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만렙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 게다가 우리에겐 카펜이 있다고.

내 여유로운 태도에 애런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 진중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힘을 보태고 싶어.”

“뭐?”

“나도 널 지키고 싶어. 그러니 내게도 기회를 줘.”

“애런, 너야말로 신중히 생각해. 너는 하퍼 공작가의 후계자이고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잖아. 네가 짊어진 것들의 무게를 알고 하는 소리야?”

애런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내 인생에 더는 끼어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설득하는 것이었다.

“알아.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네가 더 중요해.”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 깊은 곳에서 휘몰아쳤다.

1회차 때 그는 내게 좋아한다고 말은 했으나 사랑한다고 고백하진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내게 준 상처에 미안해했지만 내가 가문보다 우선인 적은 없었다.

또한 나보다도 근위대원으로서의 책무가 먼저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그 모든 것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1회차 때 전심을 다해 노력했을 땐 해주지 않았던 말을 그때에 비해 턱없이 작은 관심을 주었을 뿐인데 들을 수 있게 되다니.

하, 하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제 와 내가 중요하다고 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 생각한 거니?

아, 그래.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나는 반복된 플레이로 기대는커녕 원망과 증오마저도 풍화되어 가고 있는데.

열과 성을 다해 널 사랑할 때, 그때 그 말을 해줬어야지.

그랬다면 너와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잖아!

애써 막아두었던 감정의 둑이 순간 무너져 내리며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임에도 저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애타는 눈빛, 간절한 음성.

분명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을 텐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최대한 평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친구로서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이건 내 문제야.”

일부러 ‘친구’를 강조하자 애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너도 내가 위험할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항상 도와줬잖아.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유순하게 휘어져 있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보던 애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하고자 하는 것, 더는 말리지 않을게. 폴루티아도, 대공 전하와의 관계도.”

확고한 어조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애런이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렇기에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꺾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를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이 물음을 던질 때만 해도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애런이 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야 뻔하니 적당히 듣고 쳐내면 될 거라고.

그러나 그에게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와 약혼해줘. 내가, 내 가문이 널 지킬 수 있게 해줘.”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하자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재판을 보며 생각했어. 백작가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물론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셨지만 사제지간이라는 건 아무리 돈독해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관계지. 황실을 압박할 만한 힘은 되지 못해.”

애런의 말에 틀린 건 없다.

가문 간에 동맹을 맺을 때 왜 다들 혼약의 방법을 이용하겠는가.

수많은 방법 중에 그 방법이 가장 결속력이 강하니까 그렇겠지.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개국 공신 가문이야. 나와 약혼하면 황제 폐하도 더는 네게 함부로 손대지 못하실 거야.”

“……네가 뭘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는 잘 알겠어.”

순간 애런의 푸른 눈동자가 긴장과 기대감으로 작게 일렁였다.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 그의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네 인생의 중대사를 단순히 나를 돕겠다는 이유로 섣불리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쉽게 결정한 거 아니야.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 것도 아니고. 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말하는 거야.”

“공작님께서 이 약혼을 허락하시리라 생각해?”

“그건 걱정하지 마. 아버지 허락은 내가 받을게.”

“애런.”

“네가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자극한 것일까.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게 충격이었던 걸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새어 나왔다.

“그래, 좋아. 약혼을 한다고 쳐. 그러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할 건데?”

너,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설령 지금 없다고 해도 조만간 생길 거잖아!

“그리고 나중에 황실과의 문제가 다 해결되면 그땐 또 어떡할 건데? 우리가 파혼하면 또 얼마나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겠어?”

“나 좋아하는 사람 없어.”

갑작스러운 고백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보다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듯 진중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더욱 당황스러웠다.

‘정말 없는 건가?’

그렇다면 너의 ‘그녀’는 도대체 언제 만나게 되는 거야?

설마 이번 회차에 그것도 뒤틀리는 건 아니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켰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반박했다.

“앞으로 생길 수도 있잖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로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무리 정략혼이 흔하다고 해도 내 안위를 보장하고자 너를 이용하고 싶진 않아.”

“이용해도 돼.”

“애런.”

제발 그만하자. 너 진심으로 나랑 약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호감도가 90% 넘었을 때도 청혼하지 않았으면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나 너 좋아해.”

“그러니까 우정만으로는…….”

“우정 아니야. 나 너 여자로 좋아해.”

평소답지 않게 내 말을 끊은 애런이 담담히 그러나 힘을 주어 말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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