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18살의 여름, 카밀라는 희한한 꿈을 꾸었다.
지금도 진짜인지 아닌지 여전히 믿기지 않는 꿈을.
그 꿈은 18살 봄에 있었던 데뷔탕트부터 21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순간까지, 카밀라 자신의 생애를 담고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그것이 정말 자신의 미래였던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달라졌으니.
처음에는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쌓이며 점점 주인공에게 동화되어 갔다.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카밀라 체임버에게.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았던 꿈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인물은 애런 하퍼라는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건 18살, 봄의 연회 때였다.
데뷔탕트나 마찬가지였던 황궁 연회는 카밀라가 처음 참여하는 연회였으며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였다.
‘체임버 공작가의 천덕꾸러기 사생아’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해도 체임버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첫 연회에서 그녀는 와인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여기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가문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정원으로 끌고 와 윽박지르는 언니를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와인을 쏟고 자신을 비웃었던 이들이 모두 언니의 사람들임을.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이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연회장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경멸하며 지나가리라.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이름을 밝혔으나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찹니다.”
오히려 자신의 겉옷까지 빌려주며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것이 애런 하퍼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마주쳤다.
언니가 자신을 몸종처럼 부리며 괴롭히기 위해 상점가로 데리고 나간 날.
폭언에 이어 손찌검까지 당하는 것을 목격한 하퍼 경이 또 도와주었다.
다들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그는 왜 도와주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으나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서.
여기까지는 현실에서 겪은 것과 똑같았다.
꿈속에서의 하퍼 경은 이후에도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나타났다.
특히 황궁에서 연회가 열릴 때면 어김없이 마주치곤 했다.
“……약혼 소식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에슬라 후작과 약혼하고 처음 참석한 연회에서 그는 그렇게 물었다.
한껏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왜 나를 그렇게 바라보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서.
대신 웃었다. 그에게 더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네,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직접 정해주신 혼처인걸요.”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애써 삼키며 대답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약혼자인 에슬라 후작은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사별한 전처에게서 낳은 자녀가 둘이나 있었다.
일반적인 귀족 가문에서도 꺼릴 혼처였지만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문에 입적되었다고는 하나 친부인 공작조차 냉대하는 사생아였으니까.
가문의 사정에 어두웠던 탓에 약혼할 때까지도 몰랐었다.
공작이 추진한 사업들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가문의 돈줄이 막히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그 비어 버린 재정을 메꾸기 위해 팔려 가게 된 것이라는 사실도.
중앙 정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에슬라 후작 그리고 케인 백작가 다음으로 부유한 후작가의 돈이 필요했던 체임버 공작.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성사된 것이 바로 자신의 혼사였던 것이다.
‘이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으니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역시나 하퍼 경은 축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 생각했다.
머지않아 후작과 혼인하게 되면 하퍼 경과 따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을 테니까.
해가 넘어가 19살이 되자 에슬라 후작과 결혼식을 올렸다.
공작가에서도 천덕꾸러기였던 신부를 후작가에서 인정해 줄 리 만무했다.
거처만 바뀌었을 뿐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돈에 팔려 온 사생아 신부라며 이전보다 더한 냉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다.
더구나 남편에게는 사별한 전부인의 자식들이 있었기에 더욱 가시밭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운 삶이었건만 남편의 폭력은 또 다른 지옥의 문을 열어 주었다.
평소의 남편은 냉랭해도 기본적인 예의는 차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돌변했다.
혼인 후 처음 몇 번의 연회는 괜찮았다. 말없이 웃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몬테나 백작이 주최한 연회에서의 일이었다.
그날 몸이 좋지 않음에도 억지로 동행했다가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부탁을 했더랬다.
“여보, 저 먼저 돌아가 봐도 될까요? 몸이 좋지 않아서 이대로 있다가는 실수할 것 같아요.”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남편에게 부탁한 것은.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단지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을 했을 뿐인데 왜 남편이 화가 난 것인지.
몸이 많이 아팠던 탓에 남편에게서 술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을 텐데.
또한 그날 남편이 원하던 사업권을 따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도 불운 중 하나였다.
아무도 없는 정원 구석으로 끌려가 맞고 쓰러져 있던 자신을 발견한 이가 하퍼 경이었다.
그날 하퍼 경은 여느 때처럼 괜찮느냐고 묻지 않았다.
굳은 얼굴엔 미처 감추지 못한 참담함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니 스스로가 더욱 비참해졌다.
그는 말없이 겉옷을 벗어 자신을 감싸주고는 그대로 안아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만남보다도 비참한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좋지 않았던 몸은 폭력의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고 그대로 마차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 후로는 대외 활동을 모두 금지당했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퍼 경에게 더 이상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나 그것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남편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자신은 점점 고립되었다.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친 짓을 했다.
세차게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
한창 자신에게 분풀이를 하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온 연락을 받고 외출을 했을 때였다.
문득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와 무작정 후작저를 뛰쳐나왔다.
‘살고 싶어.’
오직 그 생각만으로 불편한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남편이 화풀이를 하는 날이면 사용인들이 모두 물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처 없이 빗속을 헤매던 중 또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애런 하퍼.
‘왜 또 당신일까. 왜 하필 가장 초라하고 비참할 때만 만나는 걸까.’
한탄과 원망이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가 일었다.
“……후작부인.”
말에서 뛰어내린 하퍼 경이 달려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단출한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
“안심하십시오. 제가 마련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저와 황태자 전하밖에는 모르는 곳입니다.”
황태자 전하라고?
“으읏.”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지 마십시오. 아직 무리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퍼 경의 도움을 받는 것도 염치없는 일인데 황태자 전하라니.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후작가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려 왔다.
돌아가면 죽는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돕겠다는 것인가.
설마 에슬라 후작과 척을 지려는 것인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친정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터.
안 된다. 자신을 도와준 유일한 이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었다.
“가봐야겠어요.”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일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하퍼 경의 부드러운 손길에 다시 눕혀졌다.
“구해드리겠습니다.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어떻게 돕겠다는 건가.
혼인과 이혼은 가문 간의 일이었다.
아무리 황태자라 할지라도 강제로 이혼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은 왜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건가요. 내가 불쌍해서?’
언젠가 연회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퍼 경의 연인이 누구인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던 로웨나 케인이라고 했었다.
그러면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진 것도 아닐 텐데.
이건 과했다.
단순한 동정과 연민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살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다시 돌아오겠다던 하퍼 경은 오지 않았다.
하루가 며칠이 되고, 며칠이 한 달을 넘었다.
머물고 있는 집에선 바깥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시중인 한 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가 찾아왔다.
“선택하게. 제국에 남아 숨어 살지, 타국으로 나가 자유롭게 살지.”
“하퍼 경은……?”
“그 녀석은 지금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야.”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녹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찰나이지만 그 눈동자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지나갔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여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일까 싶어서.
“내 개인적인 바람은 그대가 타국으로 나갔으면 해. 혹여 그대가 제국 내에서 발각된다면 골치 아파지거든.”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곤란하게 된 건 사실이니까.
“체임버 공작도 그대를 보호해주지는 않을 터. 오히려 에슬라 후작의 편을 들어주겠지.”
반박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해 왔던 사람이니까.
“……알겠습니다. 타국으로 나가겠습니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이내 헤토니 왕국의 신분패와 약간의 돈과 옷가지를 내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그대 몫이겠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하퍼 경에게 하도록. 그 녀석 부탁이었으니.”
“떠나기 전 하퍼 경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그대의 소식은 내가 전해주지. 상황이 나아지면 하퍼 경이 그대를 찾으러 갈 걸세.”
“……알겠습니다.”
그 길로 황태자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마차와 호위를 제공해 주었다.
무사히 국경을 넘어 헤토니 왕국에 도착했지만 오래 살지는 못했다.
오랜 학대로 인해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던 탓이었다.
간단한 상처 치료만 받고 떠난 여정은 길었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스로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가야 했으니 하루하루가 고될 수밖에.
왕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병이 들었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자유롭다는 것, 폭력과 학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하퍼 경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 * *
상념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카밀라는 자신을 에스코트하고 있는 애런을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비록 꿈일 뿐이라도, 이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 이유를 알지 못해도 고마웠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니까.